새와 물고기 그리고 짐승들
(김성수 목사)
(창 1:24‐31) “24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집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25 하나님이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집짐승도 그 종류대로, 들에 사는 모든 길짐승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2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29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에 사는 모든 것, 곧 생명을 지닌 모든 것에게도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준다"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31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우리는 지난주에 창세기의 다섯째 날까지의 창조가 어떻게 구속사와 연결이 되는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한 창세기의 다섯째 날을 조금 더 부연 설명해 드리고 창조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창세기의 여섯째 날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다섯째 날까지의 창조는 여섯째 날 창조를 위한 무대장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여섯째 날의 창조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이 창조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에 관해서는 다음 주에 자세하게 다루어 드리도록 하고 오늘은 새와 물고기와 짐승의 창조, 그리고 그 것들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하는 사람의 역할에 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다섯째 날에는 새들과 물고기들이 창조됩니다. 그리고 짐승들은 여섯째 날 창조가 되지요. 사실 이러한 구분은 별로 중요한 것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해부학자 pryrevost 박사에 의하면 새와 물고기는 여섯째 날의 짐승들과 달리, 한 쪽은 날개를 가지고 있고 한 쪽은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 빼면 그 구조가 혈구로부터 시작해서 정확하게 같다고 합니다. 같은 날 창조되어 하나는 지느러미를 가지고 물속으로 들어가고 하나는 날개를 달고 궁창으로 보내진 것입니다. 참 성경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신묘막측‘합니다. 창세기 1장 22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다섯째 날에 궁창을 나는 새들과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창 1:22)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우리가 좋아하는 ‘복’이 나옵니다. 그런데 새들과 물고기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새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셨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새들의 모든 소원을 다 들어 주셨다는 말인가요? 우리가 생각하는 복의 개념으로는 그렇게 해석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복은 우리가 정의하고 있는 그 ‘복’이 아니라는 것을 이 구절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뒤에 그 복의 의미가 나오지요? ‘생육하고 번성하여 물과 땅에 충만하라’ 이게 성경이 말하는 ‘복’ ‘바라크’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물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력인 것입니다. 그 새들과 물고기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과 바다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오늘날까지 충실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새들과 물고기들의 번식력은 우리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합니다. 대구는 한 번에 900만 개의 알을 낳습니다. 고등어는 한 번에 50만 개의 알을 낳고요, 만일 청어를 잡지 않고 몇 년간 그냥 방치해 두면 이 세상의 온 바다가 모두 청어로 가득 찰 정도로 번식력이 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많은 새들과 물고기들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친히 그들을 모두 먹이십니다.
(시 104:24‐28) “24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25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26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27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28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그 것들을 전부 하나님께서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시지요?
(마 6:26)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욥 12:7‐9) 7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고하리라 8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9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땅의 짐승들만 잘 보아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시고 생존케 하신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전체 구절들의 뒤에 한 구절을 붙인다면 어떤 구절을 붙이시겠어요?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떠세요? 이렇게 하나님의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생존케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으로 걱정하고 계십니까? 여기에 정말 ’난 너무 가난해서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계신분 계십니까? 이 미국은 홈리스들도 빵을 골라 먹는 나라입니다. 다운타운에서 홈리스 선교를 하시는 분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요즘 홈리스들은 배가 불러서 웬만한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적어도 생존의 문제는 아니지요? 그럼 무엇입니까? 남들과 비교해서 잘 나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걱정하는 것이지요? 상대적 우월감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니까 우리는 슬픈 것입니다. 그건 정말 사치스러운 걱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자랑하고 증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일을 하는데 필요한 양식은 하나님께서 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 말고 다른 일들에 관심이 많으니까 그 일을 하는데 필요한 또 다른 것들에 대한 욕심이 여러분을 염려케 하고 걱정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 잊지 마세요.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물고기들과 새들까지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데 성경을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바다와 땅에게 명령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 1:20,24) “20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4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물과 하늘과 땅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우리는 ‘명령’이라는 것은 인격이 있는 존재에게만 해당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말씀은 무생물에게도 그대로 능력으로 작용해서 그 말씀이 실현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물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염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서 물고기들이 생존할 수 있게 만듭니다. 바다의 염도가 지금보다 지나치게 높아지거나 낮아지게 되면 물고기들을 포함한 바다의 생물들은 모두 전멸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창세부터 지금까지 그 염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global warming 으로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바다의 염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탐욕은 하나님의 창조를 이토록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대로 나가면 얼마 안 있어 바다의 모든 생물들이 멸종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러한 종말의 현상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러 저러한 정황으로 볼 때 정말 종말은 가까이 온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궁창도 새들이 잘 날아다닐 수 있게 심술을 부리지 않습니다. 땅도 흙을 내어 짐승들의 창조에 동참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능력이 되어 실현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모든 만물이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정해주신 법칙대로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물론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면에서 훼손되고 어그러지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목적이 완성될 때까지는 만물이 존속해야 하기 때문에 만물이 생존하고 유지되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명령은 지금도 신기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와이에는 황금 새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황금 새는 2000마일이 넘는 알라스카에 가서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알이 부화해서 어느 정도 날 수 있게 되면 다시 2000마일을 날아서 하와이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 새끼들도 어미 새가 되어 알을 낳고는 정확하게 2000마일을 날아서 하와이로 간다고 합니다. 알라스카의 연어는 태평양이나 대서양에서 살다가도 정확하게 4년째가 되면 알라스카로 돌아와서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 상류로 올라가면서 몸이 붉어지고 흐늘흐늘해 지면서 죽습니다. 하류의 새끼들은 그 어미의 몸을 먹이 삼아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태평양이나 대서양으로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그 새끼들도 정확하게 4년째가 되면 그 알라스카로 돌아와 알을 낳고 새끼들의 먹이가 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칙이요 질서입니다.
물고기들과 새들과 짐승들은 창조되자마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창조되고 난 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먹이는 무얼 먹어야 하나?‘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짐승들이 그런 걸로 고민하고 우왕좌왕 했다는 구절이 있습니까? 만물은 그냥 창조되자마자 자기들 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명령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본능으로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짐승들은 본능을 통해 하나님의 법칙과 질서를 따릅니다. 고양이는 위에 문제가 생기면 한동안 금식을 합니다. 아무리 맛있는 생선을 곁에 놓아주어도 절대 먹지 않습니다. 그건 본능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프로그래밍 한 로봇처럼 위가 고장 나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냥 굶습니다. 하나님은 고양이에게 그러한 자가 치료의 방법을 본능으로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짐승들은 절대 필요이상으로 축재를 하지 않습니다. 사자가 수많은 양떼를 보고 ’한 달간 먹을 양식을 오늘 다 마련해야겠다.‘하고 양을 여러 마리 잡는 것 보셨습니까? 그냥 한 끼 식사면 족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 유독 인간만이 탐욕을 부립니다. 그건 인간에게 자율성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거기에 대해선 우리가 다음 주에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간은 그 하나님의 형상 안에 들어 있던 자율성(자기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어떤 일을 하거나 자기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여 절제하는 성질이나 특성.) 을 이용해서 본성 안에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복종하고 순종해야 했는데 그 자율성을 이용해서 하나님을 거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자율성을 발휘해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범죄가 바다와 땅과 궁창까지도 저주를 받게 해서 그 바다와 땅과 궁창을 사는 새들과 물고기들과 짐승들에게까지 피해가 간 것을 아십니까? 인간이 범죄를 하자 하나님은 땅을 저주하십니다. 그래서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장미꽃에는 원래 가시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이 만물을 그렇게 저주받은 모습으로 뒤틀리게 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땅이 원래 갖고 있던 생산력도 현저하게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농사를 지어도 소산이 만족할 만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창조물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만물을 잘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 만물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했었는데 하나님과 만물의 중보자로 서 있던 인간이 타락을 함으로 모든 만물이 함께 저주를 받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 때 인간의 죄로 비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기식하는 모든 만물이 함께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천지만물이 우리 인간들을 보고 얼마나 원망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인간이 타락을 하자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만물의 지배권을 상실했습니다. 당연하지요? 인간 때문에 자기들까지 저주를 받았는데 그 인간들의 다스림에 복종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인간들은 오히려 짐승들에게 잡혀 먹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죽하면 똥개들이 다 우리 인간을 우습게보겠습니까?
(전에 어떤 분이 주먹만 한 치와와를 데려온 적이 있었는데 그 치와와가 눈을 부릅뜨고 저를 보면서 짖더라고요. 범인(凡人)들은 그냥 그러려니 했겠지만 창세기를 아는 저로서는 정말 혈압 올라서 풍(風)오는 줄 알았습니다. 손바닥만 한 치와와가 감히 누구를 보고 짖습니까? 저는 그 치와와의 ‘멍멍’ 소리가 인간들을 향한 피조물들의 원망의 소리로 들렸습니다. 천지 만물을 지배해야 하는 인간이 어떻게 이 꼴이 되었는지 참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인간이 다스리고 짐승들은 인간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세워두신 질서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질서가 무질서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무질서를 다시 질서로 세우실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노아 때 잠깐 그 회복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보여 주셨지요? 바로 방주입니다. 무질서의 세계는 모두 저주의 물에 빠져 죽어버리고 질서의 세계가 회복이 되는 모형이 바로 방주인 것입니다. 사자와 어린양과 노루와 사슴과 표범이 한 배 속에서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물론 그들의 먹이는 노아에 의해 공급이 되었습니다. 다스림이 회복된 것입니다. 노아는 그 방주 안에 있는 동안 그 속에 있는 짐승들을 다스리고 보호하고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태초에 우리 인간에게 주어졌던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그 질서가 깨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상당부분 훼손되고 뒤틀리기는 했지만 인간을 제외한 천지 만물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법칙과 질서를 따라 여전히 성실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기자의 말이나 욥의 권고처럼 새들과 물고기들과 짐승들과 자연을 통해 우리의 타락한 실존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배워야 합니다. 여전히 성실한 대 자연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25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짐승들을 그 종류대로 지으셨다는 말이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성경이 왜 ‘종류대로’ ‘르미네후’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후대에 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어떻게 왜곡할지를 이미 아셨던 것입니다. 그 ‘종류대로‘ ’르미네후‘라는 단어는 종과 종이 섞여서 대진화가 일어난다는 그러한 진화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고기와 새와 짐승들을 처음부터 ’종류대로‘(르미네후)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와 물고기와 짐승들을 ’종류대로‘(르미네후) 창조하셨기 때문에 어떤 생물도 자기 종의 한계를 벗어 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은 절대 어류가 양서류가 되고 양서류가 파충류가 되고 파충류가 포유류가 되는 대진화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BC 1,500년경에 기록된 이 창세기에 이러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으세요? 계속해서 본문 30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피조물들에게 먹이를 손수 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 1:30) “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는 곡물과 열매와 채소를 음식으로 주셨고 새나 짐승들에게는 풀을 먹이로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님께서 먹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먹거리들을 분리시켜 주셨습니다. 만일 새나 짐승들이 인간이 먹는 곡물이나 채소나 열매를 함께 먹게 되어 있었다면 그 식량은 금방 바닥이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코끼리나 공룡은 얼마나 많이 먹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각자의 식량을 정해 주심으로 모두가 풍성한 식탁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남의 밥그릇 쳐다보면서 부러워하거나 침 흘리지 마세요. 각자 자기에게 주신 먹거리의 종류가 있는 것이고 각자에게 주신 먹거리의 양이 있는 것입니다. 그냥 그것으로 만족하면 됩니다. ‘저 사람 밥그릇은 저렇게 큰데 내 것은 왜 이 모양이야‘ 이런 불평하지 마세요. 여기 보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짐승들과 새들이 처음에는 오로지 채식만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짐승이나 인간이 고기를 먹기 시작했느냐? 그건 노아의 홍수 이후에 땅이 피폐하게 되고 식물들이 부족하게 되어서 그 부족한 식량을 고기로 채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인간은 더욱 더 포악해지게 되었고 수명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창 9:1‐3) “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2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3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이거보세요. 노아의 홍수 이후에 비로소 고기가 식량으로 주어집니다. 독일의 빌헤르 벤네르 박사에 의하면 채소는 태양으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저축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나 짐승이 채소를 먹으면 그 채소가 축적한 태양 에너지를 사람에게 방출해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채소를 많이 먹는 사람들이 건강한 것입니다. 그리고 채소 속에는 아연이라는 미네랄 성분이 많이 들어 있어서 노화도 방지시켜 준다고 합니다. 반면에 육식을 하게 되면 피의 산성도가 높아지고 피 중에 염분, 요소, 젖산, 황산 등이 많아져서 땀으로 배출이 되는데 그 것들에 의해 피부가 조금씩 침식이 되어서 거칠어지고 주름살도 많아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육식에 의해 체질이 산성이 되면 그 산성 물질이 대 뇌를 자극해서 화를 잘 내고 신경질이 많아지고 성격이 급한 다혈질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에 인간과 짐승들에게 풀과 채소만 먹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채소만 먹던 사람들이 900살 이상씩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지요? 게다가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궁창 위의 물이 인간에게 해로운 자외선을 막아주고 온실과 같이 캐노피 현상까지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오래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이 고기도 먹어야 하는 식량의 부족으로 이어졌고 인간은 그로 말미암아 많은 손해를 보게 된 것입니다. 다 자업자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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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15:17) “17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물론 이 구절은 가난하게 살아도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부자로 살면서 매일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지만 식품공학적 차원에서도 맞는 말입니다. 채소를 많이 드십시오. 하나님은 이렇게 짐승들과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놓으시고 식량까지 준비하신 후에 짐승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참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을 직역을 하면 ’보라, 얼마나 좋은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참 좋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확하게 순응하며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곳은 너무나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어느 날부터 그 좋은 것들이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뉘기 시작합니다.
(창 7:1‐3)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 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3 공중의 새도 암 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분명 창세기 1장에서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구원의 언약을 하시는 장면에서부터 부정한 짐승과 정결한 짐승이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은 정결한 짐승을 일곱 쌍씩 태우게 하시고 부정한 짐승은 두 쌍 씩만 태우게 하십니다. 정결한 짐승은 하나님께 바칠 제물로 여분을 두어서 배에 태우신 것입니다. 그 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실 때 정결한 것만을 받으시고 부정한 것들은 받으시지 않으시겠다는 의지를 거기에서 표명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가면 그 것이 먹는 것으로까지 확대됩니다. 정결한 것은 먹고 부정한 것은 먹지 말라고 하시지요?
(레 11:2‐3)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3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굽이 갈라져서 쪽발이 된 짐승과 되새김질하는 짐승을 정결한 짐승이니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은 부정한 것들이니 먹지 말라고 하시지요. 이것은 단순히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의 구분이 아니라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굽이 갈라지다‘ ’파라스‘라는 단어는 ’완전히 구별되어 갈라지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 말은 부정한 세상과 완전히 구별되어 갈라진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 ‘성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되새김질하는 짐승’은 모두 채식을 하며 다른 짐승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평화로운 짐승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정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정결한 짐승은 더러운 것과 완전히 구별되고 자신의 먹이를 위해 다른 존재에게 해를 끼치는 그러한 힘의 원리에서 벗어난 존재인 ‘성도’를 상징적으로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만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타락하기 전의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인 것입니다.
정결했던 하나님 나라에 죄가 들어와서 그 정결함이 부정함으로 바뀌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 부정함을 몰아내고 다시 정결함으로 만들어 ‘보시기에 좋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실 것이라는 언약을 그러한 내용 속에 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회복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노아의 방주에서부터 갈라지기 시작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언급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나의 배를 불리기 위해 남을 죽이는 그러한 세상의 힘의 원리에서 벗어나 평화의 사람, 화평케 하는 자로 구별되어 살아야 하는 성도의 삶, 십자가의 삶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애초에 보시기에 좋았던 인간이 타락을 하고 모든 인간이 ‘부정한 짐승’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 있은 후에 도저히 정결한 짐승이 될 수 없었던 부정한 짐승들이 정결하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행 11:4‐9) “4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가로되 내가 욥바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8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고넬료에게 성령이 내리기 전에 베드로에게 보여진 환상입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는 것을 부정한 짐승이 깨끗케 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엄격하게 구별되었던 부정함과 정결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에게 성령이 주어지게 됨으로 해서 그 성령을 받은 자들은 모두 정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창세기 1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결하게 된 사람들은 완전히 갈라진 굽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나의 배를 불리기 위해 다른 이를 해치지 않는 평화의 사람, 되새김질을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의 원리를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창세기의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창조된 새와 물고기와 짐승들을 통해 부활의 소망까지도 유추해 냈습니다.
(고전 15:38‐44)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하나님은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각기 그 ‘종류대로‘(르미네후)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종과 종은 완전히 다른 메카니즘으로 움직이며 생존합니다. 물고기가 땅에 나와서 산책할 수 없습니다. 새들이 물속에 들어가서 잠수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과 짐승과 물고기와 새들을 ’종류대로’다르게 지으신 것처럼 부활한 성도들도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몸의 재질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한 우리의 몸의 재질이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육신의 재질과 어떻게 무엇이 다를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두 번째 부활의 날을 기다리고 있지만 이미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몸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데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활한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어떤 재질의 몸을 갖게 되느냐는 사실 부차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부활한 자들의 삶의 내용에 대해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추구하는 성공주의, 물질주의, 합리주의, 자연주의 같은 세상의 힘에서 벗어나 그와는 정 반대의 삶인 ‘십자가의 삶’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부활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창세기의 창조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담아 놓으신 깊으신 그 분의 의중을 헤아려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천지만물을 모두 창조하신 후에 인간들에게 그 모든 것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 1:28)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땅을 정복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물고기와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것입니까? 심지어 여기서 쓰인 땅을 ‘정복하라’ ‘카바쉬’라는 단어는 ‘복종시키다, 침략하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침략하라는 뜻일까요? 성경은 이 구절에서 이 땅에는 인간이 침략하여 복종시켜야 할 무엇인가가 있게 될 것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것은 단순히 자연과 천지만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걸작품인 천지창조와 인간을 공격할 존재에 대한 경고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형체가 없는 영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항상 매개체를 사용합니다. 그 매개체는 뱀도 될 수 있고 토끼도 될 수 있고 염소도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에게도 굴복하지 말고 그 것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그 경고를 잘 듣고 뱀이 와서 그들을 미혹했을 때 정복하여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우습게 여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두 번째 아담은 사단의 모든 시험을 다 이겨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를 정복해 버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창세기 1장 28절을 읽으면서 어떤 메시지를 받아야 합니까?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복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복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에서 발해진 하나님의 명령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에 순종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우리의 이 인생 속에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창세기 1장 28절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연을 보호하고 짐승을 보호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는데 우리가 자연을 훼손하고 짐승들을 마구 잡아 죽여서 지금 이 땅이 이렇게 황폐하게 되었으니 다시 태초의 명령으로 돌아가 자연을 보호하고 짐승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해석을 합니다. 옳습니다. 자연을 훼손하지 말아야지요. 그러나 이 구절은 단순히 그러한 것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창세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약의 창을 통해 보지 않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책입니다. 성경의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이 창세기의 창조기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풀지 않으면 상당한 곡해가 따르는 책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창을 통하지 않고 창세기 1장 28절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보호하고 자연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하신 것인가 보다‘하고 엉뚱한 해석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환경운동 하다가 가셨나요? 짐승을 보호하자는 캠페인을 벌이다 가셨습니까? 자연 보호를 외치다 가셨나요? 아닙니다. 오로지 마귀와 싸우다 가셨습니다. 마귀의 정체를 폭로하고 죄의 정체를 폭로하여 그 것들을 정복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게 땅을 다스리는 것이며 정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된 우리가 이 창세기 1장 28절을 읽으면서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은 ‘너희는 지금 땅을 정복하고 있는 마귀를 침략하여 그들을 정복하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마귀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입니까? 예수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마귀에게 승리를 하셨는지를 배우면 되지요. 마귀는 온 힘을 다해 예수님을 핍박하고 시험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휘하의 사람들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고문하고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인내하셨습니다. 용서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게 바로 마귀를 이긴 삶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드러내심으로 마귀를 이기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귀를 이기고 정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인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처한 상황과 조건과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사건들로 일희일비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상황들과 조건들과 사건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스리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 것들에게 정복 당하셔서는 안 됩니다. 우울해 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건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최선의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잘 헤아려 오히려 선용을 하십시오. 여러분 이 창세기의 창조를 공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얼마나 엄청난 스케일의 시나리오를 준비하셨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여러분은 그처럼 존귀하고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운 오리새끼처럼 오리 흉내 내지 마시고 백조처럼 우아하게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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