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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빛이 있으라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4. 1. 4.

 

 

빛이 있으라

 

(김성수 목사)

 

 

(창 1:1‐5)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3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4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셔서, 5 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시간이 창조되기 전인 영원 속에서 어떠한 목적을 가지시고 ‘레시트!’ ‘시간을 창조’하셨고 그 시간과 함께 물질이라는 것이 생겨났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시간’이라는 것은 물질의 존재 방식이며 그 시간이 사라지게 될 때 물질도 함께 사라지게 되는 것이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사라지게 될 때 사람의 영혼은 영원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의 개념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 물질인 육신과 물질세계를 떠나는 그날, 다른 말로 ‘죽는 날’ 그 사람은 시간 속에서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죽음과 동시에 영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매일 매일을 영원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매일 매일을 영원을 준비하며 사는 삶을 에녹의 삶을 예로 들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바로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사람들이며 앞으로 천국을 살 사람들인 것입니다.

 

(영원을 준비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받아 그 성품과 인격과 지혜를 온 세상에 드러내며, 자신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모두 그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며 기여하는 삶이 바로 영원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삶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난주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영원을 준비하며 사는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연결이 되시지요?) 오늘은 창세기의 ‘첫째 날‘에 관해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의 말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이 구절을 가지고 학자들 간에 많은 이견들이 있습니다. 유명한 구약학자인 E. J Young같은 사람은 이 창세기 1장 1절이 실제 창조의 과정을 설명한 말씀이 아니라 6일 동안 이루어진 전체 창조에 대한 광범위한 ‘요약 설명’ 즉 ‘서론적 설명’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1절은 6일 동안에 이루어진 창조 과정 전체의 ‘제목’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1절에서 천지가 창조되었다고 했는데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더라’고 했으니 그것은 창조가 두 번 있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창조이어야 하는데 2절에서 그 세계가 혼돈스럽고 공허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절의 그 창조가 어떤 이유로 변동되었기 때문에 3절부터 새로운 창조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이 6일간의 창조를 요약해서 말하는 제목이라고 보지도 않고 지금 이 세상이 있기 전의 어떤 다른 창조를 말하는 것으로도 보지 않습니다. 저는 이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는 창조의 첫째 날 첫 사역을 설명한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1절에 나오는 ‘천지’는 천지만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들과 땅’만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가 실패로 돌아가서 다시 엎어 버리고 새 창조를 하셔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첫 일로 시간과 함께 그야 말로 천지 즉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이 ‘하늘들’ ‘솨마임‘이라고 묘사가 된 것은 성경이 하늘을 셋으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대기권의 하늘, 그리고 그 대기권 밖의 무한히 뻗어있는 것 같은 우주로서의 하늘,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며 앞으로 그 분의 백성들과 함께 하실 하늘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이 계신 곳을 보고 왔을 때 그 곳을 삼층 천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라는 공간과 지구가 그 첫째 날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 이외의 다른 존재들이 함께 거할 ’하나님 나라’도 그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첫째 날에 하늘들과 땅, 즉 지구가 만들어졌고 거기에 빛이 보태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기지요? ‘분명 해와 달과 별들은 넷째 날 만들어졌는데 그럼 첫째 날은 이 우주에 달랑 지구만 만들어졌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지구가 홀로 우주라는 공간에 떠 있을 수 있었을까요? 지구는 수많은 별들과 달과 태양과의 거리와 질량과 인력의 관계에 의해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구만 달랑 우주에 떠 있을 수 있나요? ‘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라서 그게 가능합니다.

 

(욥 26:7) “7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토후, 빈 것, 무(無))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타라, 매달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지구를 아무 것도 없는 공간 속에 홀로 걸어놓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창조된 지구는 처음에는 무질서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창조된 무질서한 천지를 시간 속에서 질서를 잡아가시는 것이 엿새 동안의 창조인 것입니다. 여기서 ‘깊음‘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테홈‘은 바다를 뜻합니다.

 

(창 7:11) “11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 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여기도 ‘깊음‘ ’테홈‘이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그러니까 첫째 날 천지가 창조되었을 때 지구는 혼돈과 공허와 깊은 바다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성령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라는 구절이 2절 말미에 붙어 있지요? 여기서 ‘운행하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라하프‘는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품다‘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그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뿐인 세상을 질서와 풍요와 빛의 세상으로 창조해 내시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품어 안고 계신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조라는 것은 태초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만들어 내신 삼위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모습은 창세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을 받들어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 속에서 이루고 계신 오늘날의 새 창조를 그대로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에 가보면 창세기의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를 타락한 죄인들의 세상에 그대로 쓰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렘 4:23) “23 땅을 바라보니, 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합니다. 하늘에도 빛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 보시면 타락하고 추악한 세상을 ‘혼돈과 공허와 빛이 없음’으로 표기를 하지요?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속해서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떻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빛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가? 바로 그 이야기가 창조를 시작으로 가시적으로 역사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와 관련된 것들만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창세기 1장 1절이 지금의 천지 이전에 창조된 어떤 다른 창조로 보지도 않고, 6일간의 창조의 제목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천지창조의 첫째 날에 있었던 하늘들과 지구의 창조인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여러분들이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를 이해하시는 데에 상식으로 꼭 알아두셔야 할 내용을 몇 가지 알려 드리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현대 신학은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에 관해 몇 가지 엇갈리는 학설을 내 놓고 있습니다. 먼저 gap theory 라는 것이 있습니다. ‘간격 설’이라고도 부르지요. 이 학설은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오랜 시간적 간격이 있었다는 설입니다. 즉 하나님은 1절에서 천사를 포함하여 세상을 아름답고 완전하게 창조하셨는데 천사 장이었던 사단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를 포함한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고 그로 인해 2절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지구의 상태가 지속되던 중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땅을 새롭게 하신 것이 3절 이후에 언급되고 있는 창조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gab theory에 의하면 창세기 1장 3절에서 31절까지의 창조는 첫 창조가 아니라 재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1절의 첫 창조와 3절부터 나오는 새로운 창조 사이에 수십 억 년에서 수백 억 년의 gap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의 나이가 왜 이렇게 많은지가 설명이 되지요. 정말 그럴까요?

 

두 번째로 일일 간격 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literal day with gap theory) 이 이론은 하나님께서 첫째 날의 창조를 24시간 내에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는 수억 년 정도를 쉬시다가 다음에 둘째 날 창조를 하시고 또 수억 년을 쉬시다가 또 셋째 날 창조를 하시는 식으로 총 46억 년에 걸쳐 창조를 하셨다는 설입니다. 이 설에 의하면 아담 이전에 이미 인류가 있었고 그들이 사단과 함께 하나님께 범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홍수로 심판하여 죽이셨다고 합니다. 이 설은 19세기 초에 스코틀랜드의 목사인 토마스 찰머스에 의해 제기 되었습니다. 이 이론도 당시 지질학의 발달로 인해 지구의 나이가 매우 오래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 되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으로부터 기독교를 변증하겠다는 마음에서 나온 이론인 것입니다. 이 설은 나중에 G. H. Pember에 의해 ‘지구의 여명기‘라는 책으로 발간되어졌고 그 때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요? 그러니까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고 추측이나 상상으로 기독교를 변증하다보면 이런 억지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점진적 창조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이론은 ‘6일 6시대 설’이라고도 불립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날’ ‘하루’ ‘욤’을 문자 적인 하루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주 긴 시간, 그러니까 지질학적 시대와 대충 일치하는 기간으로 보는 것입니다. 중생대, 고생대, 주라기, 백악기 같은 이런 지질학적 기간이 성경에 ‘하루’ ‘욤’이라고 기록이 된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 이론도 조금 억지처럼 보입니다. 저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루를 그냥 ‘24시간’으로 봅니다. 그리고 날 들 사이에 gap이 있었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엿새 만에 천지 만물은 창조 된 것이고 하나님은 7일째 안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우주의 나이도 6,000년에서 길어야 12,000년 정도로 봅니다. 저만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존 칼빈을 비롯한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이 우주의 나이를 그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존 칼빈은 단호하게 이 우주의 나이를 6,000년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4,000년 전 사람이니까 거기서부터 거꾸로 족보를 따져 올라가 보면 그 정도의 나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화석들을 담고 있는 지층들은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지층과 지층이 품고 있는 화석들을 보면 마치 진화론을 입증하는 것처럼 가볍고 작고 단순한 것이 아래에 있고 크고 복잡한 것들이 위쪽으로 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오히려 창조론을 입증해 주는 것들입니다. 원래 화석이라는 것은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지금 죽어서 땅에 묻힌 짐승들이 모두 화석이 됩니까? 아니지요? 대부분 썩어 없어집니다. 그러면 화석이라는 것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까? 화석이라는 것은 생명체가 갑작스럽게 흙 속에 묻히고 또 이 흙이 급속도로 압력을 받아서 석화(石化)될 때에만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지층 중에는 화석을 품고 있는 고대 지층들과 같은 지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발견되는 화석들과 화석을 품고 있는 지층들은 어떤 지각의 대 변동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창세기 6장의 노아의 대 홍수인 것입니다. 하늘의 물들이 땅으로 모두 쏟아지고 땅의 물들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과학자들은 아득히 먼 옛날에는 땅이 지금처럼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가 아니라 거대한 한 덩어리의 땅이었을 거라 추측합니다.

 

엘 고어의 global warming이라는 강연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 보면 남아메리카 대륙과 남아프리카 대륙을 컴퓨터로 맞춰보면 그대로 이가 맞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 홍수로 땅이 주저앉고 올라서서 지금처럼 이러한 모양이 된 것입니다. 지상 위의 땅들은 급속히 물 아래로 잠겼고 그 위로 흙들이 덮였습니다. 거기서 살아남은 짐승들은 한 동안 살아 있다가 또 다시 물속으로 잠기고 그 위로 흙이 덮이면서 화석과 지층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작고 단순한 짐승들은 먼저 죽었고 크고 힘이 센 짐승들은 좀 더 오래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 마치 작고 단순한 짐승에서 크고 힘이 센 짐승들로 진화를 한 것 같은 화석이 생긴 것이지 그 것이 진화의 증거는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의 나이 문제도 그렇습니다.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 측정법이나 천문학적 자료를 근거로 계산해 본 지구의 나이는 50억 년에서 150억 년에 이릅니다. 이건 어떻게 해결을 하지요? 여러분 아담이 아기로 태어났습니까? 성인으로 태어났습니까? 성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독처 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금방 결혼도 시켜 주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필요에 의해 지구를 50억 년짜리로 만드실 수 있나요? 없나요? 그런 것들은 신자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구가 어떻게 만들어졌던 또 지구의 나이가 얼마나 되건 그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단지 그러한 창조를 시작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내가 이렇게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날들을 하루 24 시간으로 보고 그 날들 사이에는 어떠한 갭도 없었다는 것을 전제로 창세기를 해석해 나갈 것입니다. 이렇게 본문 1절과 2절의 주해를 마치고 3절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계속해서 본문 3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가라사대’ ‘아마르’라는 단어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만 해도 ‘가라사대‘라는 말이 9번이나 나옵니다. 우리는 그 단어 ’가라사대‘ ’아마르‘라는 단어를 통해서 천지가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추론해 낼 수 있습니다. (’가라사대’가 ‘말씀하시되‘이므로) 그렇다고 창세기에 정확하게 ’천지가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라는 말이 한군데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천지가 말씀으로 창조가 된 것을 어떻게 아는가? 신약에서 창세기 1장의 ‘가라사대’ ‘아마르’라는 단어가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밝혀 줍니다.

 

(히 11:3) “3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 곧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생기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보세요. 천지는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밖으로 뱉어지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요 1:1‐3)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골 1:15‐16) “15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16 만물이 그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히 1:2) “2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시켜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히 1:10) “10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태초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하늘은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천지는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그런데 그 말씀은 예수님이시다. 따라서 천지는 예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막연하게는 알고 있지만 잘 정리가 안 되어 있는 내용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이다’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그 때마다 그 하나님의 입에서 예수님이 밖으로 튀어나오게 되는 것인가요? 우선 그 문제부터 해결을 해보도록 하자고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어떤 나라 말로 말씀을 하셨을까요? ‘빛이 있으라’ 이렇게 한국말로 하셨을까요? 아니면 ‘let there be light' 이렇게 영어로 하셨을까요? 아니면 히브리말로 ’오르 하야‘그러셨을까요? 아니면 헬라어로 ’프오스 람파이‘하셨을까요?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올라가 보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입에서 나오나요? 하나님의 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 질문은 참 우매한 질문이지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형체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언어를 사용해서 그 분의 입이 ’있다 없다’를 거론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우선 우문(愚問)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국어사전에 나오는 ‘말과 말씀’의 개념으로만 이해를 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혀 연관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하늘의 비밀들을 설명하고 계시기 때문에 연관이 없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말이라는 것은 그 것이 소리가 되어서 밖으로 나오기 전에는 그 말을 내 뱉은 존재의 속에 들어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내 뱉어진 말이 ‘빛이 있으라’라는 말처럼 명령형으로 나왔을 때, 그 말은 그 명령을 말로 내 뱉은 존재 속에서는 ‘계획과 의지’로 먼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밖으로 내 뱉어진 어떠한 언어가 아니라면 그 것은 언어로 나오기 전의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그런데 전지전능한 존재이신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는 곧 실행이요, 성취이며 완성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어떤 것을 계획하셨다는 것 자체가 그것은 반드시 실현되고 성취되고 완성될 일이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는 ‘그 자체가 힘과 능력을 갖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전지전능한 존재는 헛된 목적을 가질 수도 없고, 헛된 의지를 품을 수도 없으며 자신이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것을 이루실 충분한 힘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힘이며 능력‘인 것입니다.

 

(사 55:10‐11) “10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셔서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사람에게 먹을거리를 주고 나서야,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11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히 4:12)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 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

 

(렘 23:29) “29 내 말이 불과 같지 않으냐? 바위를 부수는 망치와 같지 않으냐? 나 주의 말이다.”

 

보시는 바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힘이 있는, 살아 있는 존재처럼 묘사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살아서 운동력이 있고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시간에 열역학 제1의 법칙에서 에너지, 힘은 곧 물질이라는 원리를 배웠지요?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서 물질은 에너지로 화해도 그 형태가 변할 뿐 동일한 그 물질이 갖고 있는 에너지는 감소하거나 보태질 수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질은 곧 에너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에너지에 어떤 창조적인 힘을 가하면 그 것이 그 에너지의 양만큼의 물질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고 했지요? 그 것을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원리에 적용을 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힘입니다. 다른 말로 에너지입니다. 그 말씀이신 힘이, 능력이, 에너지가 하나님의 창조의 힘에 의해 형태 화 된 것이 바로 창조인 것입니다. 열역학 제 1법칙에 의해서 물질이 무에서 유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 에너지, 힘,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었고 그 에너지가 형태화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천지 창조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는가? 여러분이 이 부분을 이해하시기 위해서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계셔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렇게 삼위(三位)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one substance three persons' '본질은 하나이신데 본체가 셋인 분’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히브리서 한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히 1:3)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여기서 ‘본체‘라고 번역이 된 단어 ’휘포스타시스‘는 ’subsistence' '실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본체’ ‘휘포스타시스’의 ‘형상’ ‘카락테르’ ‘인(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본체’와는 ‘다른 본체’ ‘휘포스타시스’를 갖고 계신 분이지만 ‘본질’이 같으신 분 ‘consubstantial’(라틴어로는 호모우시오스)한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다른 ‘본체’를 갖고 계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에 정확하게 동의하시며 그 것을 실행에 옮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성령하나님은 성자께서 실행하신 그 것을 ‘적용’하시는 분이십니다. (필자의 졸저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의 성령 편을 참조) 구약이나 신약 할 것 없이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그대로 실행에 옮기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 5:17)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보세요. 예수님은 세상의 창조 때부터 자신이 성부와 더불어 끊임없이 일해 오셨음을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로 일을 하셨습니다. 천지 창조 때는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가시화 시켜 천지 만물을 창조해 내셨고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사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2,000년 전 성자 예수님은 직접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실행에 옮기신 것입니다. 잘 기억해 보세요. ‘기드온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사자, 삼손의 부모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사자, 야곱과 씨름을 한 하나님의 사자,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의 사자’ 그 천사들을 보고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뭡니까? ‘내가 여호와를 뵈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스가랴 2장에 보면 ‘척량 줄을 잡은 자에 대한 환상‘이 나옵니다. 3절에서 천사가 천사를 보내는데 9절에 보면 그 보내는 천사를 ’만군의 여호와‘라고 선포를 합니다. 아울러 이사야서에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군의 여호와라고도 부릅니다.

 

(사 25:9) “9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바로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바로 이분이 주님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한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으니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그렇지요? 종합을 해 보면 성부 하나님과 다른 본체를 지니셨지만 한 본질 속에 계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입으시기 전인 창조 때나 구약 시대 때도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실행에 옮기시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이미 하고 계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에 보면 바울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이끈 분도 예수 그리스도라고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이 성자 예수님을 보았다’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에서는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을 참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자 예수님은 창조 때에도, 구약 시대 때도, 하나님의 말씀의 실행자가 되셔서 중보자로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000년 전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창세전에 계획된 새 창조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제 거꾸로 가보겠습니다. 그 분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그 계획대로 완벽하게 살아내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새 창조를 시작하신 그 복음을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창세기의 첫 창조와 비교해서 이해해 보세요.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새 창조를 이루신 것처럼 첫 창조 때도 창세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전에 공부했듯이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가 힘과 능력이 되어 실행되어지는 것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우리 안에 성령으로 존재하시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우리의 구원을 완성시켜 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날 기록된 말씀으로 가시적으로 존재하고 계십니다.

 

(요 5:39) “39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를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서 운동력이 있으며, 그 자체가 힘이며 능력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듯이 새 창조도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되어지고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하지 않고 여러분의 거룩의 완성을 이루시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인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따라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셨지요? 이것이 바로 ‘가라사대’ ‘아마르’가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창세기의 첫 번째 날 창조된 것이 뭡니까? 빛이지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천지 창조 위에 질서가 잡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은 태양 빛이 아닌 어떤 다른 빛입니다. 그 빛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신약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신약에서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죄인들을 질서와 풍요와 빛으로 이끄시기 위해 첫 번째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실행자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지요. 요한복음의 첫째 날에 누가 왔습니까? ‘빛이 오셨다’라고 하지요? 그 요한복음 1장 2장의 일곱 날에 관한 내용은 창세기의 일곱 날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라고 설명 드렸잖아요.

 

(요 1:9‐10) “9 ○그 빛이 세상에 오셨으니,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시다.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창세기 첫째 날의 빛은 무슨 빛입니까? 태양을 발광체로 하지 않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그 빛,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질서를 세우시고 풍성함으로 채우시며 어두움을 몰아내실, 무에서 유로 생명을 창조해 내실 그 하나님의 생명력이 바로 창세기 첫째 날의 빛입니다. 다른 말로 창세기 1장 3절의 ‘빛이 있으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제 그 분의 능력과 지혜로,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시겠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포효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어두움과 구별되는 어떤 빛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낮과 밤도 생겼습니다. 제가 전에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물들에게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력은 다른 말로 ‘바라크(복)’혹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부른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창세기의 첫째 날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에서부터 출발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발산되어 역사 속에 가시화 되어 나타난 것이 천지 창조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천지 창조의 첫째 날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 찬, 무질서한 천지에 ‘빛’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천지 만물은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며 거기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생명력, 하나님의 영광이 만물을 존재케 하는 것이고 만물을 유지하는 힘인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날 ‘빛’이 있는 것으로 창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새 창조가 어디서부터 출발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라고도 부릅니다.

 

(히 1:3) “3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하나님의 본바탕의 본보기이시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고후 4:6) 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렇게 창세기의 첫째 날은 그 창조된 빛으로 말미암아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질서가 잡히고 생명의 움이 트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반역하여 질서를 깨뜨리고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만들어 버린 죄인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질서로 하늘의 풍요로 광명으로 인도하실 것이 힌트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빛은 지금의 태양 빛과 같은 그런 종류의 빛은 아니었지만 분명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시작한 빛이었고, 어둠을 밝히고 구별해 내는 광명 한 것이었고, 아직 태양이 없었던 창세기의 셋째 날에 만들어진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과목을 자라게 하는 숨어있는 빛, 보이지 않는 빛, 하나님의 생명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태양이 생기기 전에 하루를 밤과 낮으로 구별 짓는 빛이었습니다.

 

원래 밤과 낮을 가르는 것도 태양이고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과목을 자라게 하는 것도 태양인데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에 ‘빛’이 창조되고 그 빛에 의해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과목이 자라고 밤과 낮이 갈리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해서 태양이 밤낮을 가르고 식물이 자라는데 필연적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력인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우주의 운행 원리이시며 이 땅의 모든 생명의 원인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빛’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새 창조를 상징하고 있는 구약 성경에 계시된 구속사의 첫 사건도 항상 빛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막에 들어서면 첫 번째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번제 단이지요? 번제 단은 죄인들의 속죄를 위해 무죄한 어린양이 대신 죽임을 당하는 곳입니다. 바로 빛이 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새 창조는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의 첫 시작은 무엇이지요? 유월절 사건이지요? 모든 죄인들의 장자가 죽어 나가는 유월절에 어린양의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자신들의 공로 없이 살아나는 날이 유월절입니다. 역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죄인들의 출애굽은 시작이 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 창조,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첫째 날에 빛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빛을 보고 그 빛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신 분들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무질서에서 질서로 돌아오신 것이며 온통 공허뿐인 이 세상 속에서 하늘의 풍요를 맛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무질서 속에 있는 세상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 분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며 사실 것입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하늘의 풍요가 아닌 공허뿐인 세상의 것들에 목숨을 걸고 사실 것입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에 의해 또 다른 ‘세상의 빛’이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어두움을 폭로하고 밤과 낮을 갈라버리는 거룩한 빛의 삶을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당해 주세요. 그래서 그 상대방의 악을 폭로하십시오. 많이 인내하십시오. 많이 사랑하십시오. 원수의 등에 칼을 꽂고 싶은 것이 타락한 죄인들의 본능입니다만 여러분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피 흘리기까지 그렇게 하십시오. 그게 빛입니다.

 

이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 오경의 최초의 수신자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출애굽 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너희의 구원은 어느 날 즉흥적으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창세전부터 계획되었던 것이며 창조도 바로 너희들의 구원을 위해 일어났던 것이고 너희들을 있게 하기 위해 아담이 있었고 아벨이 있었고 셋이 있었고 노아가 있었고 셈이 있었고 아브라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너희의 구원을 위한 약속을 하셨고 이렇게 그 약속을 지켜내신 것이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오늘날 출애굽 해서 광야를 살고 있는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에게 외치는 소리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창세전에 계획이 세워졌고 그 새로운 창조의 완성을 향해 천지 창조로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천지는 누구를 위해, 누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성도를 위해 존재하며 성도를 위해 지금도 운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존귀한 분들이십니다. 그 신분에 걸 맞는 삶을 지금 사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바로 오늘 살아내십시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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