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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신령한 것 안에서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4. 1. 3.

 

 

신령한 것 안에서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

 

(김성수 목사)

 

 

(롬 1:9-11)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우리는 지난주에 사도가 로마교회에 전해 주고 싶어 했던 신령한 것의 용도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견고케 ’됨과 ‘피차의 위로’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토록 로마에 가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사도가 로마 교회에 전해 주고 싶어 했던 그 신령한 은사의 구체적인 내용을 공부하고, 사도가 9절에서 언급한 ‘그의 아들의 복음(신령한 은사) 안에서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라는 어구가 가진 웅숭깊은 메시지에 관해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바에 의하면 사도는 복음을 신령한 은사, 직역을 하면 영적인 선물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거기에 쓰인 단어가 헬라어 ‘프뉴마티코스’입니다. 그 단어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프뉴마, 성령’이라는 단어에서 파생이 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은사, 복음은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하늘의 선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그러한 신령한 은사를 이미 받은 자신에게서 나타나게 된 현상을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라는 어구로 표현합니다. 신령한 은사, 즉 성령으로부터 격발이 된 영적인 선물을 받고 나니 하나님을 ‘심령으로’ 섬기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쓰인 단어가 ‘프뉴마’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것 안에서 심령으로 섬긴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고,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섬김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 말고 다른 종류의 잘못된 섬김도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간단히 말하면 영에 의한 섬김이 있는 반면에 육에 의한 섬김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그렇게 육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긴 적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0장에 가면 그러한 잘못된 섬김의 예가 잘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롬 10:2-3) “2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이 유대주의, 율법주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긴 것이 기실 자기 의를 세우려는 섬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엄밀히 말해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섬긴 것입니다. 섬김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체를 타자로 상정하고 있는 것인데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섬김은 주체가 자기 자신입니다. 그건 올바른 섬김이 아닙니다. 그걸 율법주의라고 하고 유대주의라고 하며 결국 그것은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인본주의적인 자기 의 세우기 차원의 섬김과 대척점에 있는 섬김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 심령으로 섬긴다는 것은 자기의 의가 박살이 나게 되고 자기가 부인이 되는 그런 섬김을 말합니다. 그게 아들의 복음(신령한 은사) 안에서의 하나님 섬김인 것입니다.

 

사도는 이제 막 생겨난 로마 교회가 혹 그러한 잘못된 하나님 섬김에 열심을 낼까봐 걱정스러워, 그들을 견고케 해 줄 요량으로 신령한 선물을 가지고 로마 교회로 한 달음에 달려가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열심을 부린다는 사람들이 전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과 그것을 올바른 열심과 섬김으로 고쳐 낼 수 있는 길은 오직 신령한 은사, 즉 하나님의 올바른 복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이들에게서 그러한 가짜 섬김과 왜곡된 열심이 나오게 되는지에 관해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게 되면서 평생을 하나님의 일에 헌신을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된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여러 차례 목격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의 마지막이 보편적인 통일성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로의 입성을 즐거워하며 평안하게 세상을 떠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자신을 그렇게 죽게 하신 하나님께 골이 난 상태에서 불편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슬픈 것은 후자 쪽이 훨씬 많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죽음이라는 생경한 현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의 죽음의 현실을 작게나마 수시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 성도들의 삶이라면 그러한 성도들의 죽음이 그렇게 불편하고 원망스러운 것일 수만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죽하면 하나님께서도 성도들의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고 하셨겠습니까?

 

죽음이 두렵다는 것은 이 세상 속에서 죽음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해 보지 못한 자의 생경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사망이라고 하는 진짜 죽음에서 건져내셨다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경함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계신 곳에 가는 것이 불편한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 했는데 그분에 대해 잘 모르니까, 그분의 속성이나, 그분의 영광이나, 그분의 사랑이나 은혜나 긍휼에 대해 잘 모르니까 하늘의 삶인 영생이 불편한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에 대해 여전히 무지하다는 증거이며 그러한 두려움에는 반드시 형벌이 있다고 사도 요한은 명확하게 전언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에 의해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의 마지막이 어떻게 그러한 불편함으로 종영이 되겠습니까? 그러한 사람들이 아무리 평생을 하나님을 섬기고, 평생을 헌신하며, 평생 모은 재산을 교회에 다 갖다 바쳤다고 해도 그건 다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더러운 죄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그런 바보 같은 헌신과 투신이 가능한 것인가? 그래서 복음이 ‘신령한 은사’인 것입니다. 신령한 은사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다 열린 은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걸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고전 2:12-14)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 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 이니라”

 

보시다시피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에 의해서만 해석이 되어 지고 이해가 되어 집니다. 그 말은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의 하나님 섬김, 그리고 열심 있는 종교 행위는 전부 육적인 이해의 관점에서 나온 가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진짜 신령한 것을 받은 자들에게서는 육신의 것이 거두어 진다고 분명하게 선언을 합니다.

 

(고전 9:11)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여기에서의 육신의 것은 단순히 헌신이나 헌금이나 봉사 등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일차적으로 이야기하려 했던 것은 헌금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순히 성도의 소유를 털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성도의 육적 자아 전체를 털어내는 능력과 임무를 갖고 성도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헌금은 성도의 육적 자아의 죽음의 한 증상인 것이지 그것 자체가 무슨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해 육적 자아를 많이 털린 사람이 기쁜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할 때 인색함으로 하지 말고 기쁘게 하라는 말은 그러한 의미에서 주어진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신령한 복음에 의해 육적 자아를 털리는 과정을 자기 부인이라 하고 그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곧 창세전 언약 안에서, 그리고 십자가 안에서 이미 완료된 성도의 육적 자아의 죽음을 확인해 가는 필연적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입니다. 그걸 확인하는 과정이 신앙생활이며, 자기 부인인 것이며, 그것을 고난이라고 명명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떠난 이 육적 자아를 예수 안에 넣어서 십자가에서 죽여 버리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자아 안에서, 그리고 자아 밖의 세상 속에서 처절하게 경험을 하며 한 발 한 발 육의 부인 과정을 겪어내야 하는 것이 성도인 것입니다. 그건 곧 숨을 쉬는 상태에서 죽음을 맛본다는 말인데 그게 그리 쉬울 리가 없지요. 그래서 성도의 삶이 녹록치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낸다는 사람들조차도 그러한 육적 자아의 죽음이 왜 성도의 삶에 필요한 것인지에 관해 별로 고민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육적 자아의 죽음의 현상들이 혹여 자신의 인생에 나타날라치면 득달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인생을 돕고 있는(?) 하나님의 선전을 촉구하지요. 그건 신령한 은사, 즉 복음을 받은 자들의 삶 속에서 나무의 그림자처럼 자연스럽게 지향성과 방향성으로 나타나게 되는 올바른 증상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며 열심까지 특심인 가짜들을 펼쳐서 보여 주시는 이유는, 예수 믿는 것의 시작과 과정과 결국이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근거하지 않은 인간의 열심은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만한 것으로 카운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를 쌓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의 예로 제가 늘 드는 사람이 슈바이처입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올곧게 주장하다가 간 신 신학의 아버지입니다. 그럼에도 얼마나 소리 높여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자신의 인생을 다 불 태워 아프리카 원주님들을 섬겼던 사람입니다. 그의 열심 있는 종교 행위는 세계를 울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열심이 바로 신령한 은사에 근거하지 않은 자기 의 세우기의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도 신령한 은사를 잘 공부하여, 과연 우리가 지금 제대로 된 열심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게 분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신령한 은사에 의해 견고케 되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 의 세우기와 하나님의 의에 의존하는 하나님의 의 세우기, 그 두 종류의 각기 다른 열심에 대한 경고의 이야기는 창세기부터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복음이 왜 신령한 은사인지, 그리고 그 신령한 은사를 이해하고 수긍을 하여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에 관해 창세기부터 시작을 하여 요한계시록까지 연결을 해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창 3:4-7)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 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아담과 하와가 뱀의 꼬임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우리는 6절의 ‘자기와 함께 한 남편’이라는 어구를 통해 하와가 뱀에게 미혹을 당할 때 아담이 그 곁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쓰인 히브리어 전치사 ‘임’은 계속 적인 상태를 표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하와가 뱀의 꾐에 빠져 선악과를 먹을 때 아담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아담이 뱀이 하와를 미혹할 때 말리지 않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들었던 아담은 왜 하와가 권해 주는 저주의 실과를 날름 받아먹었는가? 하나님은 성경의 독자인 교회에게 무언가를 설명하시기 위해 아담과 하와를 공범으로 만들어 놓으신 다음에 여자인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먹게 만드시고 신랑이 그 신부와 똑같은 저주의 상태가 되는 순서로 역사를 경륜하고 계신 것입니다. 경륜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도하고 계시고 이끌고 계신다는 말이지요? 도대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러한 연출을 하고 계신 것인가?

 

간단하게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은 죽은 흙에 불과한, 다른 말로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존재들에게 당신의 아들을 신랑으로 주어, 그 아들을 여자와 같은 저주의 상태로 밀어 넣어 그 죽어야 할 여자를 살려내시는 구원의 이야기를 설명해 주시기 위해 에덴동산 위에 그러한 그림을 그려 놓으셨던 것입니다. 차근차근 보자고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상태는 부끄러운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까지도 그들은 벌거벗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벌거벗은 그들과 동행하시고 동거하시며 교제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상태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받을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가 발생을 합니다. 그게 바로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해 입은 사건입니다. 그게 바로 인류의 치명적인 죄였던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벌거벗은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고 자신들의 벌거벗음 위에 스스로의 옷을 덮은 것에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인간의 올바른 자 인식은 원래 하나님 앞에서의 벌거벗은 자여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자여야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로서의 치장에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행위와 사유의 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의 선악구조에 의해 선악을 판단하여 자기의 힘과 지혜로 옷을 해 입으려 시도를 하는 것이 자기의 처음 자리를 떠난 인간의 죄인 것입니다. 그걸 히브리어로 ‘휘브리스, 교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수요 예배 때 공부한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빼앗기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피조물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사랑과 희생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된 흙, 먼지였다는 것을 인식시키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존재됨에 그들 스스로의 힘과 능력이 전혀 가입되지 않은 것임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교보재로 동원된 것이 마귀와 아담과 여자와 선악과와 생명나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들의 선악구조에 의해 ‘벌거벗은 것은 부끄러움’이라는 판단을 해 버린 후,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 입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 가십니다. 그날은 서늘한 날, 즉 심판의 날이라 했지요? 그렇게 자신들의 처음 자리를 이탈하고, 하나님이 있으라 하신 그 처음 자리가 ‘부끄러운 자리’이므로 자신들의 힘으로 무언가 더 나은 삶을 추구해 보겠다고 나선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들에게로 내려 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녕 죽이겠다’고 말씀하셨던 당신의 약속을 깨시고 그들을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뱀의 미혹에 넘어간 그들이 정녕 죽어야 하지만 여인의 후손이 나와서 그들을 살려 낼 것이라는 원시 복음을 제시하신 후 무죄한 짐승을 죽여서 그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를 덮으십니다. 그게 3장 15절과 21절의 내용입니다. 그건 일차적으로 구원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존재 양식이며 존재 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산 자가 되는 것.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벌거벗음을 모면하는 방식, 즉 은혜의 방식으로 비로소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스스로 인정을 하고 그것을 덮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빈 그릇이라는 피조물 안에 하나님의 생명력이 가득 담겨 둘이 연합을 하여 생기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존재들의 존재양식인 것입니다. 그게 피조물의 제자리입니다. 피조물은 절대로 스스로 옷을 해 입음으로써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자리는 분명 죽음의 자리이지만 그 죽음의 자리에 하나님의 피가 덮여 생명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어 스스로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을 정의하고 판단하여 부끄러움을 스스로 떨어내고 자랑스러움을 추구하려 하는 그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대척점에 있는 마귀의 정체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악의 총화로서의 마귀가 먼저 창조가 되어, 먼저 타락을 하고, 그가 내려와 하나님의 백성인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는 순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존하는 존재로 서지 않고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존재로 서려고 하는 그 시도 자체가 바로 마귀의 본질이며 실체라는 것을 성경의 독자인 성도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가 딱 한 번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악과 사건이 구약에서 율법 나무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해 입는 자들로 바리새인들이 등장하는 것이고요.

 

계속 갑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처럼’의 삶을 동경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에덴을 빼앗아 버리십니다. 그리고는 생명나무도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감추어 버리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어차피 아담과 하와 두 사람밖에 없던 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녕 죽으리라’의 저주 아래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생명나무를 감추고, 그 길을 그룹들에게 지키게 하고, 하는 등의 복잡한 과정으로 역사를 몰고 가실 것이 아니라 그 지저분한 죄인 둘 죽여 버리시고 다시 시작하시면 되지 않나요? 아니면 생명나무를 아예 없애 버리심으로 그들이 영원히 영생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시면 그들이 주어진 수명만큼 살다가 영벌로 들어가게 될 것 아닙니까? 왜 자신들의 처음 자리를 벗어난 아담과 하와를 그대로 살려두시고 생명나무를 그대로 보존하십니까? 다 죽여 버리고 아예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자들로 당신의 백성을 다시 만들어 버리시면 되잖아요? 왜 꼭 생명나무 실과를 먹어야 완성이 되는 불완전한 존재로 만드셔야 하냐고요?

 

애초부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실력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생명나무 실과는 생명나무 측에서 먹일 자를 택하여 침노해 들어가는 방식으로 대상에게 주어집니다. 그게 불가항력적 은혜이며 제한적 속죄인 것입니다. 혹자들이 ‘인간의 자유의지’ 운운하면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만 먹지 않았으면 인류의 역사가 이렇게 복잡하게 흘러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추론들을 내어 놓는데 정말 그런가요?

 

우리가 에베소서 1장에서 확인 한 것처럼 하나님은 이 역사를 시작하시기 전, 즉 창세전에 당신의 아들과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당신의 백성들의 창조에 관한 것인데, 하나님은 그 창조의 ‘방법’으로 당신의 아들의 피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로 말미암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완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과 아들의 창세전 언약이었습니다. 그 언약이 있은 후 역사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역사는 창세전 언약이 펼쳐져 나타나는 가시적 현장인 것이지요? 이미 완성된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에 의해 하나하나 하나님의 영사기에 찍혀지고 있는 것이 이 역사라면 이 역사 속에서 우발적인 애드립이 용납이 될까요? 절대로 용납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아들과 세워 놓으신 그 시나리오, 창세전 언약대로만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은 우발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시나리오 안에 들어 있던 것입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경륜에 절대로 우발적인 것이 끼어 들 수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마귀나 아담이나 하와나 선악과, 생명나무 등은 하나님의 시나리오 지문 속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던 하나님의 작품들인 것입니다. 왜요? 교회의 교훈을 위해서요.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의 제한적 자유의지입니다. 그건 엄밀히 말해 자유가 아니지요. 자유라는 말의 전제는 그것을 누리는 자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주체적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객체란 말입니다.

 

(롬 11:36)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보세요. 바울이 만물의 존재 목적을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알리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기록을 하고 있지요? 여기에서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는 어구는 ‘주를 위하여 존재 한다’라는 말입니다. 만물은 주를 위하여, 주를 드러내는 자로, 주에 의해 각각의 용도에 맞게 창조가 된 것입니다. 마귀는 마귀의 용도로 쓰시기 위해, 성도는 성도의 용도로 쓰시기 위해 창조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골 1:16)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더욱 분명하지요? 여기에서도 역시 만물의 존재 이유를 ‘그를 위하여’라고 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피조물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피조물이 어떻게 하나님과 한 나라에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는가를 드러내는 도구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수 있었던 자유의지를 가진 중용의 존재가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죽은 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감추어 놓지 않으시고 동산 중앙에다가 보암 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심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먹으라는 것입니다. 먹고 너희의 실체를 똑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해주지 않으면 그렇게 마귀의 세간으로 살다가 마귀와 같은 종국을 맞게 될 그런 존재가 인간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꾐에 속아 선악과를 먹음으로 마귀와 인간의 지향성이 동일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의 실체는 마귀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산 존재가 되어 영생, 즉 하늘의 생명으로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들을 덮는 방법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벌거벗은 죽은 흙의 상태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흘러나온 하나님의 피가 벌거벗은 성도를 덮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창조 메커니즘인 것입니다.

 

바로 그걸 가르쳐 주시기 위해 첫 창조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창조를 해 내시는데 어떻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창조가 됩니까? 그럼에도 첫 창조에 그러한 것들이 등장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드세요? 왜 인간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어야만 비로소 존재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나야 하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그러한 것들을 살려내고 존재케 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이 개입하지 않았을 때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도 혼돈이며 공허이며 흑암일 수밖에 없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을 찢고 빛이 나오는 것이고 물을 밀어내고 뭍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죽음이며 없음인 처음 인간 안에 진짜 생명이 뚫고 들어가 그 죽음을 찢어서 먹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새 창조의 현실을 설명하시기 위해 첫 창조를 그림책처럼 펼쳐 보이시는 것입니다.

 

(요 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보세요. 태초에 말씀이신 예수가 홀로 존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4절을 보시면 재미있는 말이 나옵니다. 주님이 하나님과 함께 창조를 하시는데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 이외에 다른 존재는 생겨나 있더라도 모두 죽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 예수가 나누어 주는 생명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다 죽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것들, 어두움들, 즉 없음 들이 빛의 소용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5절입니다. 난 이미 이렇게 살아있는데 왜 생명이 또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생명나무를 먹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선악과를 먼저 먹어버린 아담의 모습인 것입니다. 존재는 예수의 생명으로만 산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존재 메커니즘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성도라는 사람들도 이 역사 속에서 어두움의 상태, 없음의 상태,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를 먼저 경험하고, 주님이 주시는 빛, 생명의 필요를 절실하게 깨닫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로 창조의 날들이 묘사 되는 것입니다. 저녁부터 출발해서 찬란한 빛이 비치는 아침으로 가는 것이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새 창조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인에서부터 출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바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을 역사 속에서 하지 못하는 자는 절대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자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선악과 따먹은 아담입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감추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체를 폭로하시고 그들이 산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창세기 3장 22절로 가보세요.

 

(창 3:22)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러분은 이 구절을 읽으시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감추시는 이유를 대시는데 ‘그가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 영원히 살게 되면 안 되니까 감추셨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영생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들도 영원히 사니까요. 영생은 하늘의 생명, 즉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하늘의 존재가 되어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는 아예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 생명나무 실과를 감추시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으로 생명나무실과까지 따먹고 영원히 살까봐 걱정이 되셔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 즉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신들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게 된 ‘처음자리 이탈자’들은 절대로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은 자, 영생을 소유한 자가 될 수 없게끔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추신 것을 찾아낼 수 있는 자는 없으니까요.

 

잘 보세요. 생명나무실과는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 의존자로 사는 자들에게는 축복의 나무입니다. 영생의 나무니까요. 그러나 자기의 주체성과 존재성을 챙기겠다고 선악과를 먹어버린 처음자리 이탈자들에게 있어서 생명나무는 어떤 나무입니까? 저주의 나무입니다. 왜요? 그 나무로 가는 입구를 그룹들과 화염검이 지키고 있다가 그리로 접근하는 자들은 전부 진멸해 버리거든요. 그러니까 생명나무는 축복과 저주 두 가지 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 나무인 것입니다. 어떤 무리들에게는 생명을 주는 축복의 나무가 되면서 어떤 무리들에게는 사망을 가져다주는 저주의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 어렵지만 잘 들어보세요. 지금 그것을 선악과와 연결을 시켜 보세요. 누군가가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감추어진 생명나무 실과를 스스로의 힘으로 따먹을 수 있다고 그 나무에 접근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왜요? 죄인들에게 있어서 그룹들과 화염검은 항상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거든요.

 

(사 66:15-16) “15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16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 즉 여호와께 살육 당할 자가 많으리니”

 

여호와의 진노, 여호와의 저주, 심판을 화염과 칼로 묘사를 합니다.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와 심판의 칼과 화염이 전편에서 무수히 반복이 됩니다. 이렇게 피조물이 생명나무실과에 스스로 접근을 시도하는 순간 그는 저주와 심판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도가 곧 뭐였습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의 경지로 올라서겠다는 인간의 시도였잖아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범죄가 곧 생명나무실과를 스스로의 힘으로 따먹겠다고 시도하는 것과 동일한 범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생명나무 실과 은닉사건을 통해 또다시 선악과 사건을 재현해 내시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은 반드시 생명나무 실과를 스스로의 힘으로 따 먹겠다고 나설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이 화염검과 그룹들 안에 의지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감추어진 생명나무 실과를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 따먹겠다고 하는 인간들의 열심을 부정하고 파괴하고 부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공포되는 현장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생명나무 실과, 즉 영생은 하나님 편에서 인간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지 인간 측에서 열심과 노력을 대동하여 스스로 취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가 쉬지 않고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펠라기안 주의나 알매니언 주의가 다 그러한 표본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생명나무 실과를 에덴에 두시고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감추신 후 아담과 하와를 동쪽으로 쫓아내십니다. 가인도 동쪽으로 쫓겨나서 에녹 성을 세웁니다. 바벨탑도 동쪽에 세워집니다. 패역한 이스라엘이 동쪽의 바벨론으로 쫓겨납니다. 그들이 다시 동쪽에서 서쪽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동쪽의 바벨론으로 쫓아내시면서 하나님께서도 성전을 떠나 어디론가 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겔 11:23) “23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중에서부터 올라가서 성읍 동편 산에 머물고”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셔서 성전 동쪽으로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저주 받아 쫓겨나는 자의 궤적을 그대로 훑으면서 가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왜 저주받아 죽어야 하는 자들의 길을 좇아가시는 것입니까?

 

(겔 11:16) “16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하나님께서 저주를 받아 쫓겨나는 자들의 성소가 되시기 위해, 다른 말로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해 그들이 가는 저주의 길을 함께 동행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다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명나무 실과는 인간들 스스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희생으로 거저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 인간들이 동쪽으로 쫓겨나는 사건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열왕기 서에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후계자를 세우기 위해 어디에서 어디로 갑니까? 길갈에서 벧엘로 가지요? 그리고 벧엘에서 요단강 동편으로 갑니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저주의 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하늘로 승천을 합니다. 거기에서 엘리야의 영감의 갑절을 받은 자가 서쪽으로 회복의 길을 갑니다. 엘리사는 요단강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사마리아로 갑니다. 동쪽으로 간 한 사람의 희생으로 동쪽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한 존재가 서쪽으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엘리야와 엘리사는 저주의 동쪽으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동쪽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교회를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주의 동쪽으로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그 저주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 저주의 자리에서 하늘로 승천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그 동쪽에서 저주와 심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 서쪽으로 회귀를 하게 되는 구원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기억나세요?

 

(요 14:12)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 이니라”

 

더 큰일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창조된, 예수님의 지체로서의 교회의 역사 속 삶을 총칭하는 것이라 했지요? 예수님의 길을 이 역사 속에서 실제 화하여 살아내야 하는 교회의 삶이 ‘더 큰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승천으로 말미암게 된 엘리사라는 존재가 갑절의 영감(더 큰일)을 갖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쪽으로 쫓겨난 저주받은 존재들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귀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저주의 동쪽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 속에 들어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저주를 몽땅 받아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생명나무 실과로의 길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고, 예수님이 바로 그 생명나무 실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서(47장)나 요한계시록(22장)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만물을 소성케 하는 생명나무 실과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동쪽에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회귀할 때 누가 그 땅을 지키고 있었지요? 여호와의 사자,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칼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뭡니까? 생명나무를 지키고 있는 칼을 든 그룹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스라엘이 그 사자를 통과합니까? 이스라엘을 이끄는 이가 여호수아입니다. 그 이름은 헬라어로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그 ‘예수’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고 이스라엘 전체가 할례를 받습니다. 아시다시피 할례는 ‘나’아닌 다른 존재의 희생의 흔적을 내 몸에 가짐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내가 살아나는 언약의 징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할례는 창세전 언약의 축약인 것입니다. 그렇게 동쪽으로 함께 좇아나간 예수 그리스도의 쪼개짐, 할례로 말미암아 동쪽으로 쫓겨난 이스라엘이 생명나무 실과가 있는 약속의 땅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때요?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선택이 되어 진 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약속의 후손으로서의 장자의 역할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장자 권을 취득하자마자 동쪽으로 쫓겨납니다. 그리고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전쟁을 치르는 겁니다. 그 사자를 이기지 못하면 약속의 후손인 야곱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가나안에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를 이깁니다. 생명나무 실과를 지키고 있던 그룹과 화염검을 통과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조차도 ‘야곱아 네가 이겼다’하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주십니다. 그가 이긴 자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환도뼈를 부수어 버리신 사건 이후에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환도뼈라는 히브리어는 원래 자손, 씨, 후손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환도뼈가 부수어졌다는 것은 약속의 후손인 야곱의 씨(자손, 후손)가 부수어짐으로 말미암아 동쪽으로 쫓겨나 죽어야 할 야곱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약속의 땅으로 복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으로 넘어가 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시면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보세요.

 

(마 26:26-30) “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 가니라”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당신의 살과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먹고 마시라고 하시지요? 그러면 무엇이 주어진다는 겁니까? 영생이요.

 

(요 6:54)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그런데 그렇게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신 주님께서 어디로 가십니까? 감람산으로 가십니다. 감람산은 올리브 산,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쫓겨나가는 저주받은 이스라엘을 좇아 나가셔서 거하신 성읍 동편 산이 바로 올리브 산입니다. 그러니까 동쪽으로 쫓겨난 저주받은 죽은 흙들이 어떻게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동쪽 행,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받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동쪽으로 나가셔서 그 곳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그림으로 그려내면 어떤 그림이 될까요? 생명나무는 죄인들에게는 더 이상 축복의 나무가 아니라고 했지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선악을 판단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에 이르러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자들은 다 선악과 따먹은 죽은 흙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나무는 저주와 심판의 나무인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1장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받은 자’라고 선언을 했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단두대도 아니고 화형도 아니고 십자가라는 나무에 달려 죽으셨는지 아세요?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나무로 향하려고 하는 모든 죽은 흙들의 저주를 그 나무에서 해결하셔야 했기 때문에 십자가라는 저주의 나무에 맞아 죽으신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저주의 나무가 은혜의 나무, 축복의 나무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물이 되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령한 은사,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저주의 나무에 매달리셔서 그 저주의 나무를 두르고 있던 화염에 타시면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셨고, 예수님께서 그 저주의 칼에 맞아 아버지와 끊어지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에게 신령한 은사, 복음이 거저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현실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갈 3:10-13)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 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잘 보세요. ‘선악과 먹지 마’라는 명령 안에 축약이 되어 있던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 순종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걸 바울이 10절에서 ‘항상’이라는 단어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항상, 완벽하게’지켜내야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 말고 다른 피조물들이 절대로 지켜낼 수 없는 하늘의 원리요, 존재 양식이요, 속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기고만장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겠다는 것은 자신이 율법의 주체가 되겠다는 거니까요.

 

그것은 아울러 생명나무 실과를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따 먹어 보겠다고 바벨탑을 열심히 건설하는 우매한 인간 건축자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마귀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하신 일을 믿고 그 분의 행하심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의존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의로 옷을 입고 구원을 받게 되는 성도의 실존의 올바른 그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들이 세마포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세마포는 어린양의 피에 빤 옷이라고 하지요? 성도의 옷은 곧 예수의 피라는 말입니다. 그거 말고 다른 옷 입으면 절대 그 혼인잔치에 못 들어갑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나무 실과 따먹으러 갔다가는 나무의 저주를 받아 죽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저주의 나무로 나아가셔서 그 나무의 저주를 받아 죽으시고 그 나무로 가는 길을 여시는 분으로 역사 속에 등장하시는 것입니다. 그 방법 이외에는 인간이 영생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의 지성소에는 일 년에 단 한 번 대 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들어가 시은 좌에서의 용서를 받아내는 속죄일이라는 형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만이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그룹들과 화염검이 새겨져 있던 성소의 휘장이 언제 찢겨 나갑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 찢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두루 도는 화염검과 그룹들에게 맞아 죽고 그 길이 선택된 백성, 창세전 언약 안의 성도들에게만 열리는 것입니다. 그게 히브리서 9장 전체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0장으로 넘어가면 그 9장 전체를 간단하게 요약을 해 주는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히 10:19-20)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그 길과 생명이 바로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과 생명이 어떻게 열리게 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미가가 이렇게 예언을 합니다.

 

(미 2:12-13) “12 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초장의 양떼 같게 하리니 그들의 인수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 13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보세요. 여호와께서 먼저 나가셔서 저주를 받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 길이 열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생명나무 실과를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점령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유대주의와 율법주의, 인본주의를 마귀의 유혹으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선한 삶과 착한 삶이 하나님의 구원의 완료에 기여가 된다는 그러한 성화주의 또한 마귀의 유혹인 것입니다. ‘착하게 살아라, 안 그러면 구원에서 탈락된다. 열심히 노력해라, 그러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상을 받을 것이다’ 이게 다 뭡니까? 생명나무 실과로 가는 길을 여시기 위해 당신의 몸을 찢고 화염검과 그룹의 저주를 받아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부인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격발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과 열심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는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는’이라는 권고는 무엇을 독려하는 것인가?

 

(고전 15:57)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김을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걸 믿는 게 이기는 것입니다. 노력해서 이기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요일 5:4)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보세요. 이김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면 우리는 영원히 저주 받아 마땅한 죽은 흙일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성도의 믿음인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업적이나 공로를 쌓거나 무언가를 성취해 내는 게 아닙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예수님이 나 때문에 저주받아 죽으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받게 된 것이라는 복음, 그것을 믿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기기 위해서는 자꾸 지고 부인당하고 해체 당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철장이 개입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져야 묵시 속에서 이기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러한 복음의 공식은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인간들의 가능성에 집착하고 인간의 능력을 숭앙하며 역사 속 인간 존재의 미래를 낙관적인 것으로 가르치면서, 고지를 점령하라느니 긍정적 사고를 하라느니 하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군상들의 생명나무 침공인 것입니다. 그들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건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전 11:27-29)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 이니라”

 

이 말씀은 성찬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 성도가 성찬 상에서 예수를 먹고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생명나무의 저주가 풀렸다는 증거입니다. 창세기에서 막혔던 것이 고린도서에서는 풀려 있지요? 그러나 그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의 생명나무에로의 접근은 오히려 저주를 받게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생명나무 실과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하는 ‘성찬’이라는 종교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열심을 가리켜, 오히려 죄를 먹고 마시는 저주받을 일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은혜의 깊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의, 생명나무 실과를 향한 인간들의 욕망과 야심, 자기 주체성과 자기 존재성 챙기기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종교행위는 전부 저주받을 죄란 말입니다. 그건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이 세상의 아담군상들의 삶의 방식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생명나무를 감추어 놓으시고 스스로의 힘과 노력과 지혜를 동원하여 그 생명나무실과를 취득하려하는 인간들의 모든 시도와 노력을 다 부수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그들이 기독교인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인간 존재의 본질과 실상,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 그리고 그 두 존재 사이에는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가 성립이 될 수 있는가를 교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받을 이 역사와 인생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실력으로, 문명, 교육, 이데올로기, 종교 등의 선행체계와 지식체계를 총동원하여 생명나무에 도달하려고 하는 와중에, 믿음으로 그 속에서 빠져나와, 인간의 육적 열심이나 노력이 아닌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비밀스러운 당신의 백성들을 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과 등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존재원리나 존재 양식, 추구방향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끌려가게 되는 특별한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서쪽으로 회귀를 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속에서, 동쪽에서 저주 받은 자의 삶을 먼저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역설이 이해가 가십니까? 이미 구원에 당도한 자들이 그 구원의 현실을 몸으로 삶으로 설명해 내기 위해 이 동쪽의 세상에서 저주받은 동편의 삶을 먼저 살아내야 한다는 역설을. 그러나 성도는 그러한 동쪽의 삶속에서 서쪽의 영광을 믿음으로 보는 사람들이기에 성경이 당신의 백성들이 동편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기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 24:15) “15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동편에서, 바다에서, 즉 저주의 현실 속에서 소망으로 꿋꿋이 견뎌내는 자들이 바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들이며,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의 믿음을 볼 수 없습니다. 세상은 그들이 받은 복음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심령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복음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신령한 영역으로 이미 들어와 계신 분임을 잊지 마시고 힘을 내셔야 합니다. 복음을 아는 여러분만이 이 성찬 상의 예수를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으로 사십시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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