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가고 싶다
(김성수 목사)
(롬 1:11-15)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이번 한국 집회 기간 동안 무려 세 교회에서 집회를 가졌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짬짬이 서울 강북 모임, 강남 모임, 전북 모임, 경남 모임 등의 여러 서머나 인터넷 가족 모임에 참석을 해서 질문도 받고 토론도 하고 했습니다. 그분들의 진지한 눈망울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멀리 일본에서 뉴질랜드에서 일부러 휴가를 내서 집회에 참석을 해 주신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역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제 마음 속에서 튀어나와 마치 화두처럼 떠나지 않던 단어가 ‘희망’과 ‘묵시’였습니다.
기실 서머나 교회를 시작하면서 우리 개척 멤버들의 마음속을 가득 메웠던 것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었습니다. 특히 담임 목사인 저는 서머나 교회가 이렇게 오래 지속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기복주의와 성공주의, 신비주의와 실용주의, 인본주의와 이기주의로 떡칠이 되어버린 왜곡된 기독교의 현실 속에서 과연 누가 이러한 자기부인과 십자가와 고난의 설교를 이해할 수 있으며, 과연 누가 그 말씀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그러한 종류의 절망이었습니다. 그건 작금의 기독교는 총체적인 왜곡과 타락의 총화인 절망덩어리라는 처절한 현실인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현실인식 속에서 그들의 왜곡과 변질에 분노하면서도 여전히 그러한 모습을 오염(macula)의 형태로 갖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더 절망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때 든 생각, ‘이래서 인간들에게는 예수가 필요하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서머나 교회에게 맡긴 사명이 신비주의와 기복주의에 물든 가짜 기독교에 엿이나 먹이고 조용히 그들에 의해 맞아 죽는 것이라 생각해왔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여기까지 한 길만을 고집하며 달려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결국을 ‘이 세상 속에서 십자가 지고 죽는 것’으로 이미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서울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너무 오래 살아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현실 속에서 당신의 일을 열심히 성취해 나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지고 죽겠다고, 매일 매일 인간들의 추악한 죄를 들추어내고, 인간들의 가능성을 묵사발 내며, 인간들의 기특한 행위들까지도 자기의가 아닌지 의심해 보라는 철저한 인간 자존심 박멸과 하나님 은혜 앞에서의 처절한 인간 존재의 무력함을 낱낱이 폭로 하고 폭로 당하는 가운데, 묵시 속에서 이 땅으로 보내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하나 깨어나 그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돌아오는 놀라운 경험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죽음의 길을 가겠다고 교회 이름까지도 고난의 대명사인 서머나 교회라 명명하고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는데 주님은 그 죽음의 연기와 불길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 올리시고 계셨습니다. 그게 바로 왕의 개선 행진에 동원된 제물의 향기라 했지요?
심지어 번영의 신학을 개혁주의의 가면 밑으로 은밀하게 감추고 사람들을 선동하던 고지론의 본산지에까지 가서 십자가와 은혜와 인간들의 처음자리를 전하게 하시는 유머러스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그저 탄복을 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도구요 지팡이일 뿐인 것이고 모든 일의 성취는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건 이미 묵시 속에서 완성된 것이기에 실패될 수도 중도에 포기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한국 집회 기간 내내 제 마음 속에 ‘희망’과 ‘묵시’가 화두처럼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다는데 네가 뭔데 네 마음대로 절망을 하느냐는 일갈이 제 귀에 들리는 듯 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도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과 권능, 그리고 인간의 한계와 무력함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가서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11절의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한다’라는 표현이나 13절의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라는 절절한 곡언법(부정적 표현으로 강렬한 긍정을 강조하는 표현법)의 표현 등이 그것을 잘 반증해 주고 있습니다. 11절의 ‘원한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피포데오’를 번역한 것인데 그것은 ‘간절히 기도하다, 대단히 갈망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도는 그렇게 로마 교회에 가서 자기가 갖고 있는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고 싶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도의 기도를 안 들어주셨습니다. 그냥 편지만 보내게 하셨습니다. 나중에 로마로 보내시긴 보내시는데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무도 당당히 로마로 진군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죄수가 되어서 쇠사슬에 매여 로마로 끌려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완벽하게 모두 성취가 되었습니다. 사도는 로마로 가서 멋들어지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죽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계획하고 추진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로마 전체가 기독교에게 넘어와 버렸습니다.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인간의 한계를 극명하게 대조하여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기도 응답에 관한 우리의 편견을 깨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 서들을 보면 사도 바울은 참 기도 응답과는 거리가 먼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병 좀 고쳐달라고 그렇게 애타게 기도를 했는데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거절을 당했는가 하면 오늘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바울이 열심히 기도하면서 가려고 했던 길을 수시로 막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행 16:6-7)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롬 15:22-24) “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보세요. 심지어 아시아에서의 전도 사역이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만큼 진행이 되었는데도 하나님께서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살전 2:18)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보신 것처럼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에 잘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당신의 일을 성취해 가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인간의 기도에 의해 바꾸시거나 변개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보좌를 흔드는 기도? 그런 거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기도를 하게 하시는가? 성도의 기도는 자신의 이루고자 하는 일을 이루거나 되고자 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을 일차적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앞에 항복을 하는 것에 첫 번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와 인생의 목적이기도 하고요. 성도는 그렇게 만사가 내 기도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분의 신실하심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선이며 그것이 곧 참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자기부인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도의 기도는 너무 응답이 잘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육적 자아를 소유하고 있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계획과 뜻과 소원이 뭐 그리 선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 응답이 척척 되는 것은 뭔가 수상한 것입니다. 사도들도 기도 응답을 제대로 못 받았다는 것을 절대로 명심하셔야 합니다.
이제 사도가 그토록 열심히 로마에 가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볼까요? 본문 11절을 보시면 사도는 로마 교회에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그들을 견고케 하려했다고 합니다. 그게 사도가 로마에 가려고 했던 첫 번째 이유입니다. 도대체 그 신령한 은사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것으로 로마교회가 견고케 될 수 있다는 것일까요? 본문 15절을 보면 그 신령한 은사가 무엇인지가 정확하게 나옵니다.
(롬 1:15)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간절하게 로마교회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신령한 은사가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로마 교회에 복음이 없었다는 말인가요? 아니지요? 분명 사도는 8절에서 이미 로마 교회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로마 교회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11절을 보시면 그 첫 번째 이유가 나오는데 그것이 ‘견고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 단어는 ‘공고히 세우다, 굳건하게 다지다, 강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도는 이제 막 생긴 로마 교회를 공고히 세우고 굳건하게 다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왜 그런 작업이 필요했는가?
로마 교회는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로마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 회심을 한 로마 거주 인들이 로마로 돌아가 세운 교회입니다. 혹자들은 그도 저도 아닌 무역업자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고 그 곳에 교회가 생겼다고도 합니다. 로만 가톨릭은 그들이 초대 교황으로 떠받들고 있는 베드로를 추켜세우기 위해 로마 교회의 설립자가 베드로라고 은근히 주장을 하지만 성경의 정황상 베드로는 로마 교회의 태동기에 로마에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로마 교회는 사도들이 아닌 일반 신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생겨난 교회가 맞습니다. 그런데 만일 로마 교회를 세운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다면 갈라디아교회처럼 율법주의나 유대주의가 많이 섞였을 것이고 이방인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다면 교리적인 부분이 아주 미약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교리적으로 연약하고 불순물이 섞여 있을 지도 모르는 로마 교회에 말씀을 더욱 깊이 가르쳐서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해 주고 싶어서 로마 교회로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15장으로 가면 사도 바울의 그러한 마음이 더 잘 나타나 있습니다.
(롬 15:19-20) “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보시다시피 사도는 복음이 올바로, 견고하게 전해진 곳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복음을 들고 가서 설교를 해야 할 곳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미 복음이 전파되어 있었던 로마 교회에 그토록 가보기를 원했다는 것은 로마 교회의 교리적 배경이 견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반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쓰여 진 것이 바로 이 로마서입니다. 조금 윗 구절로 가볼까요?
(롬 15:14-15) “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15절의 ‘대강’이라는 단어는 ‘대충’이라는 말이 아니라 ‘메노스, 어떤 부분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충격적일 정도로 담대하게 복음을 기록하여 로마 교회에 보낸 것은 그들이 이미 받은 복음을 더욱 명료하게 전해주어 그들이 가진 것을 상기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믿음이 견고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 말씀의 지속적인 학습과 공급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에게는 분명 성숙의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연약함과 견고함, 분명 다른 거잖아요?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제 말은 성도의 육적 자아가 변화된다는 말이 아니라 성도의 육적 자아가 부인됨으로 해서 그 질그릇 같은 성도의 육적 자아 안에 들어와 계신 보배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선명히 드러나게 되는, 그러한 종류의 성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성숙의 주체는 성도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분명 가시적이며 실존적인 변화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묵시 속의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완료가 되어 있는 상태이지만 이 역사 속에서의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 시제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고전 3:1-2)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보세요.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젖먹이 어린아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 말은 밥을 먹는 어른도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도 동일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엡 4:14-15)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 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여기에서 ‘어린 아이’라고 번역이 된 ‘네피오스’는 당시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던 단어였습니다. 성도는 어떤 지점을 향해 방향성과 지향성을 가진 역동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육적 자아의 측면에서 성도를 관찰할 때, 성도라는 인간은 죽는 날까지 죄만 쏟아놓고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사시는 성령의 열심의 관점으로 성도를 관찰하면 분명 하나님의 일하심이 그의 삶 속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변화는 성화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인간의 열심에 의해 격발이 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무장해제가 되어 지고 육적 자아가 부인이 되어 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주도하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빌 2:13)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구절을 잘 보시면 성도 안에서 일어나는 행함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행함이 밖으로 드러날 때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살고자 하는 성도의 염원으로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뭐 대단하게 착한 행위들이 나온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성도가 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라는 것은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행위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려 하는 모든 사유와 행위를 다 죄라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자신이 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와 피조물의 자리에 제대로 안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소원을 두고 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체성과 자아실현의 야망을 버리는 쪽으로 밀려가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게 선입니다. 그게 죄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염원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걸 다른 말로 믿음의 삶이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삶의 주체가 ‘나’에게서 대상에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타자의 도움이 절실한 자신의 실존을 올바로 자각하게 된 상태에서 다른 타자에게 ‘나’라는 존재를 맡기는 행위를 믿음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의 전제는 철저한 자기부인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 진짜 성화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의 외우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가지요.
(요 6:27-29)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성도가 반드시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뭡니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만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 모든 인간의 행위는 부정되고 부인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와 그 존재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위에 대한 불신과 부정이 전제된 것이니까요.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순간 그들의 모든 행위들을 차압해 버리십니다. 인간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신뢰를 하나하나 부수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그 전에는 자신의 선한 행위가 자신의 위상을 높여주고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챙겨주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니까 자신의 선한 행위 속에 들어 있는 숨은 의도, 즉 자기‘의’ 챙기기가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게 됩니다. 그때 성도는 자신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잃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밖의 타자, 그 중에서도 자신이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하나님께 자신을 조금씩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자기부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부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성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숙의 결과로는,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의 변화와 가치관의 변화 등이 나타납니다. 물론 거기에서 격발이 되는 행동양식의 변화도 나타납니다. 그게 신령한 복음에 의해 견고케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며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복음만이 성도를 견고케 하는 유일한 도구임이 명확하게 나옵니다.
(행 20:29-32)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에게 부탁을 합니다. 그 말씀만이 너희를 든든히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직접 보낸 편지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엡 3:17-19)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즉 복음을 알게 되면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의 어떠함을 깨달아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견고케 됨입니다. 저는 가끔 우리 청년들의 블로그나 홈피에서 그들의 글을 읽는데 그들의 글 속에서 성숙과 변화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7년 전 교회가 시작될 무렵 그들이 쓴 글과 요즘 그들의 글을 비교해보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글 속에는 반드시 그 당시 필자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인생관이 담기게 됩니다. 7년 전의 우리 청년들의 글 속에는 세상에 대한 치기어린 낙관과 야망과 꿈과 비전이 듬뿍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글들을 읽어보면 올바른 자아인식, 그러니까 올바른 자신의 처음자리 인식과 인간의 무력함과 무능함, 그렇게 집착하던 세상 것들에 대한 포기와 절연, 교묘하게 은폐시켜 두었던 자아의 폭로 등이 아주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자신을 근사하게 포장을 할까에 글의 초점이 있었다면 지금은 거기에서 자유롭게 해방이 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성숙이며 변화입니다.
자신이 스스로를 볼 때에는 뭐 별로 변한 것도 없고, 여전히 이기적이고, 여전히 집착과 중독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인생관이 변해있더라는 것입니다. 점점 더 예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자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분명 그러한 성도 안에서의 변화와 성숙이 하나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성령을 받은 자가 그렇지 못한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세계관과 가치관과 인생관을 갖고 살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 때는 몰라도 지속적인 말씀의 수유에 의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행위의 변화가 크게 일어나지는 않을 지라도 세계관과 가치관과 인생관의 변화가 방향성을 가지고 지향성을 가지고 일어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게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말씀의 파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골수와 관절을 쪼개어 인간의 실체를 낱낱이 해부하여 폭로해 버리십니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만이 오롯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철저하게 부인된 자아 안에서 예수의 은혜만을 의지 하고 서는 것이 바로 견고케 됨인 것입니다. 사도가 지금 그 일을 위해 복음을 들고 로마 교회로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그렇게 간절한 염원을 어떻게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지 보세요.
(롬 1:10) “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렇게 사도는 자신의 뜻과 염원을 항상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점검하고 검증해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것이 혹시 자신의 생각과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 늘 두렵고 떨림으로 확인하고 또 확인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좋은 길’이라고 번역이 된 어구를 직역을 하면 ‘길이 분명히 밝혀지다’라는 뜻입니다. 사도는 자신의 염원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옳은 것인지를 점검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분명 확실한 길이 열릴 것이라는 걸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분명한 길이 열릴 그때까지 기다렸던 것입니다. 어떠세요? 사도의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게 바로 말씀에 의해 견고케 된 자의 하나님 절대의존의 모습인 것입니다. 분명 자기부인에 의한 변화와 성숙이 나타나지요?
여기에서 또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사안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본문과 그 밖의 다른 여러 곳에서 보셨다시피, 사도가 판단하기에 로마 교회는 반드시 양육되고 견고케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 안의 어린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견고케 하기 위해 로마로 가겠다는 사도의 간구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막으셨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로마 교회가 말씀으로 견고케 되는 과정을 겪지 않고 그냥저냥 흘러갔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반드시 구원의 현재 시제를 살아야 합니다. 로마 교회는 사도 바울의 서신에 의해 그리고 바울이 아닌 다른 종들에 의해 말씀의 수유를 받아 견고케 되는 과정을 통과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역사 속의 모든 일의 주체가 누구라는 말이 됩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없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홀로, 그리고 스스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심은 당신의 백성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일을 성취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 하나하나의 믿음과 구원에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당신의 종들의 충정까지도 묵살시켜 버리십니다. 심지어 마귀까지도 사용하셔서 인간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가르치십니다.
(살전 2:17-18)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그렇지요? 왜 하나님께서 사도의 그 충정을 그렇게 마귀까지 동원하셔서 막으셨을까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실행하시고 완료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하실 ‘일’에 관심이 있으셨던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라는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과 구원에 일차적으로 관심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사도는 그렇게 번번이 자신의 계획과 뜻이 무산되는 경험을 함으로 해서 자신이 뭐 대단한 자격과 조건을 갖추어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써 주시는 것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도의 경험이 이러한 고백을 하게 했습니다.
(고전 15:9~10)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로라”
자신은 절대로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어서 사도가 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서 나온 모든 행위와 업적은 다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라는 것을 그가 알았습니다. 그게 믿음이며 그게 자기부인인 것입니다. 로마서 15장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롬 15:17-18) “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의 말과 일, 표적과 기사의 능력 등 모든 것이 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합니다. 자기는 그저 하나님의 도구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기의 뜻과 계획이 사단에 의해 막히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조급해 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면 사단이 아니라 사단 할아버지가 방해를 해도 이루어질 것이고 하나님이 막으실 것이면 그 어떤 훌륭한 명분으로 위장을 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막으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사도가 로마 교회에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이유는 본문 1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롬 1:12)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사도는 피차 안위함을 위하여 로마 교회에 가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안위함’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쉼파라칼레오’라는 단어는 ‘서로 위로하다(comfort together)’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단어를 보면서 사도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도가 지금 로마 교회만을 위로하기 위해 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왜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위로를 받아야 하나요? 사도는 예수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늘 외로웠습니다. 사도의 시대에도 그만큼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적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서도 매번 오해와 질시와 모함에 의해 쫓겨나야 했고, 함께 하던 동역 자들로부터도 수시로 버림을 당했습니다.
(딤후 1:15)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딤후 4:10-11,16)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복음을 사는 이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고립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버림을 받습니다. 세상은 예수를 미워하여 죽여 버렸던 것처럼 그 예수가 남기고 간 예수의 형제들을 똑같이 미워합니다. 그건 예수님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렇게 외롭고 고달픈 신앙의 여정 속에서 나와 한 길을 가고 있는 참 신앙인들을 만난다는 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말할 수없는 핍박 속에 던져져 있었다고 했지요?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는 그토록 힘겹게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자신의 현실을 로마 교회와 나누며 그들만이 그 힘겨운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열심히 견뎌내고 있는 로마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역시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고린도 후서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고후 1:6-7)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하나님의 철장에 의해 철저하게 자기부인 작업을 당하고 있는 성도의 고난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모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한 길을 가는 동지들을 만나면 눈물이 터지기도 합니다. 이번 한국 집회에서 만난 우리 서머나 인터넷 식구들이 휴가를 내서 집회 장소에 찾아와 아예 숙소를 잡고 전체 집회에 다 참석을 하신 후 마지막 날 제 손을 잡고 하나같이 눈물을 쏟으시는 것을 보면서 제가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분들도 마찬가지고요. 얼마나 외롭고 힘이 들었으면 뉴질랜드에서 일본에서 익산에서 양산에서 통영에서 휴가를 내어 찾아오셨겠습니까? 한길을 가는 성도들은 그렇게 서로 얼굴만 봐도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나만 남아서 이렇게 외로운 길을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거기에도 있었구나 하는 안도, 그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도 그렇게 위로가 필요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은 어떻겠어요? 그래서 여러분은 모이기를 힘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TV가 여러분을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취미활동이 여러분을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세상 친구들이 여러분을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으세요? 문명이 여러분을 위로해 줄 수 있나요? 아니요. 천만에요. 여러분이 성령을 받은 성도라면 여러분은 그러한 것들에게 오히려 미움을 받고 실망을 하셔야 맞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절대로 성도를 견고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를 죽이는 것입니다. 성도를 견고케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복음뿐이며 성도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성도 간의 교제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 스스로의 인식을 조작하면서까지 복음을 거부합니다. 스스로 속고 있단 말입니다. 예수만 의지하면 된다는데, 예수님의 공로만 의지하면 된다는데, 하나님께 항복만 하면 된다는데 그게 싫은 겁니다. 선악과 따먹고 신처럼 되어 버린 위대한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것입니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제임스 서펠 교수의 ‘In The Company of Animals’라는 책을 보면 인간의 자인식조작의수단이구체적으로설명이되는데그것이절연(detachment),은폐(concealment), 책임 전가(shifting the blame), 왜곡(misrepresentation)입니다. 최근에 한국에서 발생했던 구제역 생매장 사건을 예로 들어서 설명을 해 드리면 이러합니다.
지난 석 달간 한국의 소와 돼지들 수백만 마리가 단지 전염병에 감염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생매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재도 고통을 느낀다고 하는데 하물며 소와 돼지는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소식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젓가락에 돼지고기 삼겹살을 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 인식 왜곡과 조작의 수단을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드는 것임) 인간은 그러한 일들이 생기면 얼른 절연(detachment)을 해 버립니다. 나와 돼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돼지는 더럽고 역겨운 동물이라고 왜곡(misrepresentation)이라고 합니다. 나찌가 일부러 수용소 안의 유대인들을 개돼지처럼 지저분하게 만든 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죽인 것처럼. 그러면서 ‘구제역이 뭐 내가 퍼트린 건가?’라는 책임전가(shifting the blame)를 합니다. 그리고는 얼른 그 증거물들을 묻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포장이 된, 돼지의 형태를 전혀 추측할 수조차 없는 깨끗하게 다듬어진 돼지고기 포장 상품으로 은폐(concealment)를 시도합니다.
이게 인간과 돼지와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왜곡이요 조작이면 괜찮은데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동일한 자 인식의 조작과 왜곡이 벌어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은 사회법이나 도덕과 윤리 등의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인간들을 붙들고 있어서 대량 학살은 자주 일어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우주와 역사를 붙들고 계신 일반 은총을 확 빼버리시는 날 인류는 서로를 대량 학살하여 땅에 생매장하는 일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사람들 마음속에서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이 시간에도 리비아에서는 수 천 명이 학살을 당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그러한 학살에도 가슴 아파하지 않지요? 왜 쌍둥이 빌딩 안에서 수 만 명이 불에 타 죽어도 우리의 감정은 이렇게 밋밋합니까? 지금 이 시간 아프리카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오늘 점심 메뉴가 뭘까를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간 자 인식의 왜곡과 조작의 실태입니다. 절연, 은폐, 왜곡, 책임전가. 인간의 공감의 그릇은 그토록 작습니다. 심지어 인간과 역사는 자신들의 그 잔인함을 근사한 행위들로 위장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인류의 역사상 가장 포괄적인 동물 보호법을 만들어 반려 동물 뿐 아니라 일반 가축까지도 끔찍이 사랑한 정부가 어떤 정부인지 아세요? 히틀러의 나찌 정부였습니다. 히틀러는 동물 보호법을 제정하여 동물을 학대하는 것을 금지한 것은 물론이고, 닭에게 강제로 모이를 주는 것, 가축을 잔인하게 도살하는 것도 금지했으며, 바다 가재를 죽일 때에도 정해진 시간 안에 빨리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고통 없이 죽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류를 죽일 때는 반드시 마취를 하고 죽여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꽁치 한 마리를 구워 먹기 위해서 산 꽁치를 마취시킨 후 죽여서 요리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나찌 정부가 얼마나 동물 보호에 신경을 썼는지 헤르만 괴링의 연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동물은 유기체적 의미에서 생명체일 뿐 아니라, 각자의 삶을 살고 지각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들이며,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고 충성심을 지닌, 애정의 대상이다. 따라서 동물을 여전히 소유물로 취급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내버리겠다" 훌륭해 보이죠? 박애주의자 나셨습니다. 그런데 괴링은 이 연설을 한 날도 수 천 명의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학살해 버렸습니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요. 이게 바로 왜곡되고 조작된 자 인식 속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신들의 더러운 모습을 착한 행위로 위장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성도가 무엇으로 견고케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속에서 성도가 무엇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말씀입니다. 성도 간의 만남입니다. 성도 간의 교제입니다. 그것이 부족할 때 성도는 영적 영양실조에 걸리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서 자기가 가진 복음을 나누려 했던 것처럼, 성도 간의 교제로 위로를 하고 위로를 받으려 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로마에 가고 싶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로마는 교회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셔서 말씀을 진지하게 공부하시고, 성도 간의 풍성한 교제를 나누십시오. ‘로마에 가고 싶다’ 이 바울의 애절한 염원이 예배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간 여러분의 귀에 이명 현상처럼 울리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나누고 싶다, 천국 가족들을 보고 싶다, 견고케 되고 싶다, 하늘 위로를 받고 싶다, 이게 여러분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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