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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바울의 사랑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4. 1. 1.

 

 

바울의 사랑

 

(김성수 목사)

 

 

(롬 1:9-10)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여러분 혹시 기형도라는 시인을 아십니까? 아마도 제게 인생의 의미와 예수 믿는 믿음에 대해 최초로 고민을 하게 한 분이 바로 그 분이 아니었나 생각이 됩니다. 제 생각이지만 앞으로 그렇게 기발하고 적절하며 슬프고 우울한 어휘들로 인생을 표현할 수 있는 시인은 오래도록 볼 수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그 선배가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을 때 김춘수 시인께서도 그런 비슷한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대학 시절 그 선배 덕에 당시 연세대학교 문학동아리 사람들도 소개를 받아 거의 매일 그 사람들과 밤을 패가며 좋은 교제를 할 수도 있었고, 좋은 책이나 좋은 영화, 좋은 연극들을 많이 접할 수 있게 늘 관심을 가져 주었던 선배였습니다. 제가 군에 가 있을 때에 그 선배님은 한 신문사의 기자가 되셨는데 가끔 저에게 위문편지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편지의 끝은 항상 그 선배님의 시로 장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분이 편지에 써서 보내주신 시 중, 제가 참 좋아하는 시가 있어서 한 편 소개를 해 드리려고 합니다.

 

길 위에서 중얼 거리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 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어떠세요? 삶에 대한 고뇌와 절망과 비탄이 줄줄 흐르지요? 기형도 선배의 대부분의 시가 다 그러합니다. 그것은 곧 그의 인생관이기도 했습니다. 지독하게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 선배가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책과 삶에 대한 사색이었습니다. 정말 역사와 인생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그처럼 치열하게 고민을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겨우 대학에 입학은 했지만 버스비가 없어서 하루 종일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기가 일쑤였던 그 선배에게 있어서 희망이라는 단어는 사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늘 어두웠고 자조적이었으며 폐쇄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배가 어느 날 하늘나라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야기, 천국이야기, 구원의 이야기, 죄의 이야기를 아주 명쾌하게 풀어 놓으면서 우리는 이렇게 인생과 역사에 대해 절망하는 것이 맞다, 는 말을 결론으로 내려 주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 세상 속의 그릇된 희망은 참 인간의 일생을 그르치는 것이라는 그 선배의 말이 오래도록 귀에 맴돌고 있었는데 그 선배가 보내준 편지 속에 이 시가 적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쓴 노래 중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이 끝나던 날’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가 바로 이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그 선배에게 보냈던 글 중 일부입니다. 그 선배는 제가 군에서 제대를 하고 얼마 후에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나이가 스물아홉이었습니다. 많은 지인들과 문인들이 아까운 천재 하나가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떠났다고 슬퍼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그 선배가 얼마나 예수를 사랑했던 사람이며 얼마나 자신의 죄인 됨으로 고통스러워했던 사람인지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냥 가톨릭 신자로 영세나 받고 살다가 간 그런 얼치기 신앙인쯤으로 보는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제가 곁에서 본 바에 의하면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관념 정도가 아니라 실제였으며 심각한 사유와 통찰과 고민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존재와 씨름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한 신앙인의 치열한 고민과 싸움이 곁에 있는 사람에게 향기로 전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도 마음이 답답하거나 몸이 많이 힘들 때 제가 제일 좋아하는 비올리스트 리처드 영재 오닐의 2집 앨범 ‘눈물’ 안에 들어 있는 ‘Brugmuller Nocturnes(브루크뮐러 야상곡)’을 repeat에다 걸어놓고 기형도 선배의 시를 읽습니다.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그렇게 기형도 선배의 시를 읽다보면 인생의 정체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돋을새김으로 가슴 속에 새겨지곤 합니다. 그 선배의 ‘빈집’이라는 시의 첫머리가 ‘나는 사랑을 읽고 슬픔을 쓴다’입니다. 유고 시집에는 ‘나는 사랑을 읽고 쓴다’라고만 적혀 있는데 제게 보낸 편지 속에는 ‘사랑을 읽고 슬픔을 쓴다’로 적혀 있었습니다. 인간 세상 속에서의 인간들의 사랑이라는 것을 잘 읽어보니 그것은 기실 슬픔이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늘 그렇게 진짜 사랑인, 하늘의 사랑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래서 리처드 오닐의 비올라 연주와 함께 기형도 선배의 시를 읽다보면 인생의 처절한 결국과 천국의 찬란한 소망이 신비하게 교차되는 느낌을 갖습니다. 그럴 때 얼른 설교원고를 써 내려 갑니다. 아마 기형도의 우울한 시를 읽으면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쓰는 이는 저밖에 없을 겁니다. 저는 그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소망하고 있는 자들의 이 땅에서의 외로움과 슬픔, 그것이 기형도의 삶이었고 그는 그러한 이 세상에서의 희망 없음 속에서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그의 시를 보면 인생과 역사의 희망 없음을 처절하게 노래하다가 한줄기 빛 같은 희망의 여지를 여백으로 남기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이 세상 속에서의 희망이 아니라 그를 장악하고 있던 하늘 소망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라는 육적자아와 그 육적자아의 남의 살 빼앗아 먹기의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이 역사와 인생에 대해 조금씩 절망하게 될 때 우리는 점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비워진 자, 털린 자가 되어 가는 것이고, 그러한 이들의 삶 속에서 자기 이외의 타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나오게 되며, 성경은 그러한 이를 가리켜 번성케 된 자라 부릅니다. 제가 기억하는 기형도가 바로 그러한 털린 자였으며, 비워진 자였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지독하게 가난하고 망한 자처럼 보였으나 엄청나게 번성한 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일면식도 없는 로마 교회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한 번 만나보기 위해 수차례 시도를 했었고 지금도 하나님께 열심히 간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진심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다’라는 말로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조금 밑으로 내려가서 14절을 보면 자신이 그들에게 빚진 자라는 말까지 합니다. 거기에 쓰인 ‘옵헤일레테스’라는 단어는 ‘빚을 갚지 않으면 감옥에 갇히게 되는 악덕 채무자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도대체 바울이 로마 교회 교인들을 언제 보았다고 이렇게 절절한 표현으로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을 것일까요? 그게 바로 한 복음을 가진 자에 대한 ’교회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이 역사와 인생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그 끝에 오는 자기부인과 역사부정, 그리고 육적 자아의 망함과 비워짐 속에서만 터져 나올 수 있는 하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렇게 성도의 삶 속에서는 분명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변화는 육적 자아의 망함에서 기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몇 편 남겨지지 않은 기형도의 시를 잘 읽어보면 그의 시들은 전부 그 인간의 육적자아의 망함을 선혈처럼 선명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난하고 비루한 인생들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가 큰 핍박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로마로 들어가서 로마 교회를 가르치게 되면 자신도 똑같은 핍박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을 그가 몰랐겠습니까? 그럼에도 여러 경로를 통하여 로마로 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가서 그들을 칭찬해 주고, 격려해주고, 이제 막 탄생한 교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풍성하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사도는 ’신령한 은사‘라고 표현을 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나누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이 아담들의 세상 속에서 그에게 유익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나누고 싶어서 안달이 났습니다. 그런데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의 그 사랑의 향기는 길이 막힌다고 식어 버리는 그런 저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의 교회를 향한 그 사랑은 기도로 터져 나왔습니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로마교회 교인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를 했다고 하지요? 그게 한 길 가는 이들의 하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늘 사랑이 무엇을 전제로 격발이 된다고요? 올바른 현실 인식과 자기 존재 인식, 그리고 그러한 사유와 통찰과 고민에서 비롯된 육적 자아의 망함이 전제 될 때 그 사랑이 격발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자들이 이러한 사도의 열정을 단순히 복음을 받은 자의 전도에 대한 열정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은 조금 가난한 해석입니다. 제 생각에는 성경이 여기에서 교회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히 전도나 선교에 대한 열정에서 그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사도는 지금 너무나 만나고 싶지만 만날 여건이 안 되어서 자기가 가진 신령한 복음을 직접 나누지 못하게 되자 편지를 써서 그들에게 신령한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로마 교회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내용이 우리가 긴 시간 공부하고 있는 1장 15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러한 집약적이고 함축된 복음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와중에 ‘사도 바울 본받아서 전도 열심히 해야 한다’라는 권고를 초두부터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진짜 전도가 무엇이며 진짜 선교가 무엇인지에 관해 다시 한 번 정의를 내려 보려고 합니다. 사도의 하나님 교회를 향한 열정이 과연 어디에서 격발이 되어 나오게 된 것인지, 오늘 본문에서 시작하여 창세기로 가면서 거꾸로 추적을 해 봄으로 해서 우리 성도에게서 나와야 하는 열심이 과연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은 분명 성도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을 하셨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복음을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분명 역사 속의 이 가시적 교회는 확장과 번성이라는 모양으로 확대되어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묵시 속의 완료된 현실이 펼쳐지는 것에 불과하지만 가시적으로 볼 때 그러한 방향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전도라고 하고 선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단순히 우리가 지켜내야 할 명령의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은 항상 약속을 담고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주님은 모든 성도들을 땅 끝까지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서 그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가실 것임을 아울러 약속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늘 사랑은 반드시 무엇을 전제로 일어난다? 육적 자아의 망함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지상 대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뒤집어서 이해를 해 보면, 난 반드시 너희의 육적 자아를 죽여 버리고 너희 자신들에게로만 향하던 그 사랑을 땅 끝으로 돌려 낼 거야, 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조금 생각을 하시면서 들으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번성은 어떤 선택된 울타리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어, 주님의 복음을 전하여 생육하고 번성을 해야 하는 교회는 불특정 다수에게로 보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하신 어떤 무리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완료하실 일인 것입니다.

 

(겔 36:1-3) “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2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양 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 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 이니라 3 내가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보시다시피 확장과 생육과 번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무리인 남은 자에 한해서만 유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육과 번성의 주어가 ‘내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생육하고 번성케 하신다는 증거는 출애굽기에서 더욱 더 선명하게 예표 되어 나옵니다.

 

(출 1:1-7) “1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2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3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4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5 이미 애굽에 있는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이 모두 칠십인이었더라 6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신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생육이 번식하고 창성하고 강대하게 되어 온 땅에 가득 차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밑으로 내려가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생육케 하시고 번성케 하시고 강성케 하셨다는 것이 분명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출 1:20-21) “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 21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

 

세상 왕의 상징인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번성을 막기 위해 남자 아이들은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심히 강대해 지더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생육과 번성이 하나님이 들여보내신 애굽에서 실현이 되었다는 것이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창 47:27) “27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하며 거기서 산업을 얻고 생육하며 번성하였더라”

 

어떠세요? 이렇게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여 생육하고 번성을 해야 하는 교회의 임무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수행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백성의 생육과 번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야곱에게도 약속이 됩니다.

 

(창 35:10-11) “10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 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그렇지요? 그런데 여기가 어디입니까? 베델입니다. 베델은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챈 후에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던 도중에 하나님을 만났던 곳입니다. 거기서는 어떤 약속이 주어지는지 볼까요?

 

(창 28:14-15)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 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여기도 자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생육하고 번성을 하게 될 이스라엘은 자손이라는 말과 바꾸어 써도 되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그러한 구별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 아주 깊은 메시지가 그 구별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아무튼 여기에서는 야곱의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삭에게는 어떤 약속이 주어졌나요?

 

(창 26:4)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역시 번성이 약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번성케 해 주신다고요? 이삭의 자손을. 제한된 울타리가 있지요?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도 동일하게 약속이 되었던 것입니다.

 

(창 22:16-18) “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로 크게 번성하게 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노아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것을 아십니까?

 

(창 8:16-20) “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17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18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19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 옛 세상이 다 멸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 시점입니다. 그건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새 창조의 완성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그 속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생육과 번성이 또 약속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창6:8) 그러니까 생육과 번성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는 반드시 생육과 번성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 생육과 번성이라는 약속은 아담에게 가장 먼저 주어졌습니다.

 

(창 1:28)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지금까지 인용한 모든 성경 구절에서의 생육과 번성이 다 ‘파라, 라바’로 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약속의 모양으로 생육과 번성이 주어지지 않고 명령처럼 주어지고 있지요? 생육과 번성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 부분을 문화 ‘명령’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야 한다고 선동을 하지요.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정확하게 뭐냔 말입니다. 단순히 열매를 맺고(파라: 결실하다) 전도를 하며, 성장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이 되는 것인가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생육과 번성은 아브라함의 자손, 즉 이스라엘, 그 중에서도 진짜 하나님의 백성을 모형하고 있던 남은 자에게 주어졌던 약속이며 명령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이 그 생육과 번성의 대상인 후손이 정확하게 누구라는 것을 밝혀 줍니다.

 

(갈 3:16)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여기보시면 생육과 번성의 대상인 자손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그리고 그들의 자손인 이스라엘이나 남은 자들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말이 되는 거지요?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우리는 생육과 번성이 단순히 숫자가 많아지고 규모가 커지는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완성, 즉 생육과 번성이 예수 안에서 먼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씨가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고, 네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라 했는데 바울이 그 씨와 자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고 하니까요. 그렇다면 생육과 번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산술적 규모와 크기와 수효의 문제이기 이전에 어떤 다른 의미가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예수가 생육과 번성의 원형이란 말입니다. 그건 생육과 번성을 하게 되면 예수처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또 다른 생육과 번성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창세기 8장에서 노아에게 주어진 생육과 번성의 약속을 보았지요? 거기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생육과 번성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모든 정결한 짐승과 새 중에서 재물이 택해지고 그들이 부정한 것들을 위해 죽음으로 말미암아 생육과 번성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창 8:20) “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보세요. 노아의 방주 안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모두 타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중에서 정결한 짐승이 죽어 부정한 짐승들이 생육되고 번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육과 번성의 전제는 정결한 짐승의 제물 됨, 즉 죽음입니다. 에스겔 서로 가면 그 생육과 번성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지가 조금 더 명료하게 나타납니다.

 

(겔 36:11) “11 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으로 많게 하되 생육이 중다하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접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똑같이 ‘파라, 라바’ 생육과 번성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로 밑으로 가면 어떤 식으로 그 생육과 번성이 성취가 되는지가 나옵니다.

 

(겔 36:24~28)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 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생육과 번성을 약속하시면서 그 내용을 말씀하시는데 그게 산술적 수효나 규모를 크게 하실 것이라는 내용보다는 더러운 것을 씻어내고 굳은 것을 부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을 잘 듣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십니다. 그게 바로 생육과 번성의 진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육과 번성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육적 자아의 죽음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여 다시 새롭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7장으로 가면 그렇게 죽어있던 마른 뼈들이 진짜로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되지요? 하나님의 은혜의 입김이 임하자 죽어 있던 자들이 살아있는 자로 고쳐지는 것입니다. 육적 자아의 죽음이 전제된 부활. 그걸 생육과 번성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바로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될 하늘의 군대라는 것을 에스겔서 37장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생육과 번성은 그들의 열심과 노력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자손에게서 먼저 일어난 생육과 번성이 하나님에게 선택이 된 다른 이들의 생육과 번성에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일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이 땅에 죽어야 할 육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몸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모든 죄를 담고 있는 몸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새 몸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그걸 에스겔이 36장에서 생육이고 번성이라고 했지요? 새 언약의 성취, 그것이 바로 생육과 번성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즉 갈라디아서 3장 16절의 바울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 자손’에게서 육의 죽음과 새 몸으로서의 부활이라는 생육과 번성이 먼저 일어났더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생육과 번성이 산술적으로도 성취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이요 공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언약에서도 정결한 짐승들이 제물로 바쳐지자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생육과 번성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생육과 번성은 방향성과 지향성을 말하기 이전에 한 존재 안에서 일어나는 살아남(생육)과 완성됨(번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에 쓰이게 되면 방향성을 가지고 다른 방향으로 전염이 되는 것입니다. 그걸 전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이 세상 속에서 생육과 번성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본인의 육적 자아의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생육과 번성을 명령을 하시고 약속으로도 주신 것은 우리 성도들이 이 역사 속에서 반드시 자신의 몸으로 감내해내야 할 부분이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 명령대로 움직이고 있고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실제로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된 사건이 있었지요? 어떤 일이 예루살렘에 껌처럼 붙어있던 예루살렘 교회를 사마리아와 온 유대로 흩어지게 만들었지요? 스데반이라는 훌륭한 성도가 제물이 되어 하나님 앞에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루살렘 교회가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집니다. 복음이 방향성을 가지고 전파가 되는 데에 한 존재의 죽음이 단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행 8:1) “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스데반이라는 제물이 하나님께 바쳐지고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핍박이라는 고난을 통과하게 되자 복음이 다른 곳으로 전진을 합니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복음이 확장이 됩니다. 산술적으로 볼 때 생육과 번성이지요? 그런데 그 전에 교회라는 존재의 생육과 번성, 즉 죽음과 수난이 먼저 전제되더라는 것입니다. 생육과 번성의 일차적 의미가 뭐라 했어요? 더러운 것이 씻겨 지고 죽어서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것이라 했지요? 스데반의 육적 자아가 세상의 힘에 의해 맞자 죽고 그 위로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는 그 하늘의 존재로 이내 살아났습니다. 그랬더니 복음이 한 발짝 전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안에서 일어난 생육과 번성, 즉 십자가의 죽음과 새 몸으로의 부활이라는 과정을 반드시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육과 번성이 성도에게 어떻게 옵니까? 고난으로, 육적 자아의 죽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생육과 번성이 다른 이들에게 전파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가장 처음 일어난 생육과 번성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났습니까? 아담이라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가 잠이 들고, 그건 성경에서 항상 죽음을 메타포한다고 했지요? 먼저 난 하나님 백성의 육이 죽고 그의 것이 적출이 되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을 하게 되는 방식입니다. 그들에게 생육과 번성이라는 명령이 주어진 것입니다. 성경이 그러한 방식으로 생육되고 번성이 된 자들을 ‘한 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과 삶의 원리는 내가 죽어서 상대방에게 흡수가 되는 방식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의 존재성을 챙기기 위해 상대방을 죽여 ‘하나’를 이루려 한 이가 나타났으니 그게 바로 가인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하나가 되려 할 때 그가 마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벨탑 사건에서 집단적이며 보편적인 아담들의 속성으로 폭로가 된 것이고요. 그러니까 생육과 번성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여 성취해 내야 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려고 작정하신 분처럼 미말에 두시는 삶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관 하에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방법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자신이 생육되고 번성이 되면, 쉬운 말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인되어져가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게 되면, 그것을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그 생육과 번성이 전염이 되고 전파가 되는 방식이 하나님 나라의 생육과 번성인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가 제일 먼저 가신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죽음을 목표로 하여 한 발 한 발 걸어가실 때마다 생육과 번성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옛 성전을 뒤집어엎으시며 ‘이 성전은 헐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짜 성전이 서야 하는데 내가 그것을 사흘 만에 짓겠다’는 십자가의 복음을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향하여 한 발을 더 내 딛으시자 거기가 유대입니다. 거기에서 유대 관원 니고데모가 주님을 만나 복음을 듣습니다. 주님은 그가 가진 모든 배경과 조건을 다 부정해 버리시고 위로부터(아노덴) 거듭나지 않으면 니고데모가 아니라 니고데모 할아버지가 와도 구원 못 받는다는 복음을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 한 발 죽음으로 다가가십니다.

 

한 발을 더 내 딛자 거기에 사마리아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 세상의 힘과 가치로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자 했던,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운 여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시온산, 그리심 산을 운운하는 율법주의자요 형식 주의자였습니다. 주님께서 그녀에게 나를 마시라고하시며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거기에 구원이 임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한 발 한 발 전진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시는 발자욱마다 십자가의 선혈이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한 발을 더 내 딛으시자 이방 왕의 신하가 등장합니다. 이방인입니다. 땅 끝입니다. 거기에서 주님은,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살아나게 되는 것임을 가르치시고 그 집에 믿음을 선물해 주십니다. 그 온 집안이 다 믿었다고 하지요?

 

어떠세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누가 먼저 가셨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종국에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일차적 생육과 번성의 과정 속에서 교회의 생육과 번성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탄생된 교회에게, 마치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명령하신 것처럼 생육과 번성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그 말은 예수가 가신 길을 그대로 좇아와야 한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자기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던 것입니다. 그건 다른 말로 ‘난 반드시 너희를 십자가에 매달겠다’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베델에서 야곱에게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으며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하시며 그에게 생육과 번성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야곱을 어떻게 만드셨나요? 끝까지 쫓아다니시면서 그가 얼마나 야비한 인간인가를 폭로시키시고 결국에는 환도뼈를 부수시어 하나님이라는 지팡이가 없으면 설 수도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걸 생육과 번성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야곱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이 야곱이 간 그 길을 똑같이 갑니다. 이스라엘의 육적 자아를 모형 하는 일 세대 60만 명이 광야에서 다 죽지요? 그리고 그들이 낳은 새로운 이 세대가 하나님의 은혜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 오고 오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그러한 생육과 번성의 길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철장에 의해 더러운 내 육적 자아의 실체가 폭로되고 맞아 죽는 생육과 번성이 먼저 그의 삶 속에서 일어나게 되면 그 과정 속에서 복음이 방향성을 갖고 전진하게 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생육과 번성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염이 되고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를 언제 썼다고 했지요? AD57-58년 어간에 썼다고 했습니다. 어디서 썼나요? 고린도 교회에서 썼습니다. 이 로마서를 쓰기 얼마 전에 쓰여 진 고린도전서에서 그가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표현을 했나요?

 

(고전 4:9)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예수 믿는 게 너무 힘들어서 죽기 일보 직전이라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신을 예수님의 포로가 된 자라고도 했고, 하나님의 승전행렬의 구경거리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를 드러내는 향기라고도 했습니다. 그 상태에서 이 로마서를 쓴 것입니다. 바로 그 고린도에서. 바울이 자신의 역사 속 현실을 시로 썼다면 기형도 시인의 시보다 더 암울하고 어두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렇게 그 자신의 생육과 번성의 과정을 통과할 때 그 바울 안에서 생전 보지도 못한 로마 교회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관심이, 섬김이 튀어 나왔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로마교회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를 했고, 그들에게 신령한 복음을 전해주고 싶어서 이리저리 그들에게 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자기부인이라는, 생육과 번성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자의 삶 속에서 드러나게 되는 성령의 흔적인 것이며, 그러한 자기부인, 즉 육적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신령한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확장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생육과 번성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생육과 번성이라는 것을 명령으로 약속으로 주셨는지 아시겠지요? 그리고 왜 그 생육과 번성의 첫 번째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셔야 했는지 이해가 가시지요? 그렇게 우리의 육은 죽어야 할 것이고 그 빈 그릇에 하나님의 복과 생명력이 가득 채워져야 그게 진짜 산 것이고, 그것이 생육과 번성인 것입니다.

 

여러분, 부디 생육하고 번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그 생육과 번성이 하나님의 도구로 잘 쓰여 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형도 시인의 그 처절한 생육과 번성이 저 같은 사람에게 전해져서 역사 속 절망 안에서 묵시의 소망을 바라보게 만들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생육과 번성이 누군가에게 전해져서 그를 생육시키고 번성케 하는 도구로 쓰여 지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국 독립영화로는 아주 드물게 4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전체에 사랑 신드롬을 일으켰던 영화가 상영이 됐습니다. 아프리카 수단의 한 마을에서 그들의 아버지로 불리던 고 이태석 신부의 자전 다큐멘터리였는데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내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가톨릭의 이태석 신부가 개신교 목사인 김성수의 이기적 악마성을 면전에서 낱낱이 고발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제 또래의 386 일 세대이신 분입니다. 일찍이 의대를 졸업하고 가톨릭 신학대학을 거쳐서 사제가 된 그분은 예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수단의 톤즈 지방으로 가서 거기 있는 사람들을 죽는 날까지 섬기다가 간 사람입니다. 작년에 그분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2~3년 만에 한 번씩 한국으로 휴가를 나온 것 이외에는 수단의 톤즈에서 완전히 톤즈 사람으로 살다가 가신 분입니다. 그 지역 한센 병 환자들의 유일한 친구였고 그 마을 아이들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으며 톤즈 전체의 유일한 의사였습니다.

 

섭씨 50도가 넘는 날씨에 말라리아 모기 때문에 밤에도 이불을 덥고 한증막처럼 자야 하는 그곳에서 그분은 동네 사람들과 똑같은 환경 속에서 지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곳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에 휴가차 나오셨다가 지인들의 권유로 건강 검진을 받으셨을 때 그분은 이미 말기 암 환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상태에서 수단의 아이들을 위해 미니 콘서트를 여시고 그것을 수단의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죽는 날까지 ‘아이들이 날 기다릴 텐데’라는 걱정을 하시며 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톤즈 사람들을 사랑했던지 그곳 딩카족 남자들이 그분의 영정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통곡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딩카족의 최대 수치는 남자가 눈물을 보이는 것이라 하여 그들은 총에 맞아도, 부모가 죽어도 절대 울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태석 신분의 영정을 보자마자 그 곳 사람들이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마치 리빙스턴 선교사의 마지막 영결식을 보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그분이 톤즈 지방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와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후의 톤즈의 실상이었습니다. 그 전 후의 차이를 KBS의 구수환 PD가 잘 비교를 해서 영상에 담아왔는데 그건 마치 천국과 지옥의 차이처럼 느껴졌습니다. 이태석 신부가 그들 곁에 있을 때에는 톤즈 지역 뿐 아니라 남 수단 전체가 역동적으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 사람의 희생의 위력이 그러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태석 신부가 없는 톤즈는 다시 죽음의 땅으로 변해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가톨릭과 개신교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에 대해 논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역사를 허락하신 것은 하늘의 원형을 맛보기로 설명해 주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모습,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살아나고 활기를 얻는 수혜자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존재양식이며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존재가 죽어지고 비워지고, 그의 심장을 가리고 있는 갈비뼈까지 내어주니 거기에서 생명이 잉태되고 그 잉태된 생명 안에 죽어지고 비워진 자의 생명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한 쪽이 죽으니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새로운 생명 안에서 그 죽은 자의 생명이 나타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생육입니다. 그게 성경의 한 몸 사상입니다.

 

울고 있는 톤즈의 아이들에게 졸리 신부님이 보고 싶냐고 물었더니 통곡을 하던 딩카족 아이가 자기도 그분이 믿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그래서 곧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한국말로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를 부릅니다. 생육과 번성의 좋은 모델 아닙니까? 한사람이 하나님의 철장에 의해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 당하자 그 생육과 번성의 향기, 자기부인의 향기가 죽어 있던 자들에게 전파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암으로 돌아가시기 3개월 전 경기도의 한 수양 관에서 교회 신도들을 모아 놓고 미니 콘서트를 하는데 제일 먼저 부른 노래가 윤시내의 ‘열애’였습니다.

 

‘이 생명 다하도록, 이 생명 다하도록 뜨거운 마음 속, 불꽃을 피우리라,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을 피우리라’ 제 또래 신부의 그 절절한 노래를 듣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서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고 하면서 그 은혜 뒤로 숨어 여전히 이기적인 마귀의 삶을 살면서도, 십자가를 들어 변명이나 해대고 있었는지가 발가벗겨져 폭로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뒤의 또 다른 지평으로 저를 이끌어 가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저의 이런 설교를 들으시면서 김성수 목사가 또 다시 성화주의로 돌아간 것 아닌가 생각하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성도는 반드시 생육과 번성의 과정을 통과하며, 사도 바울이 그러했듯이 일면식도 없는, 아니 스데반처럼 자신을 돌로 치고 있는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하고 그들을 사랑해 내는 삶, 생육과 번성의 삶을 전염시키며 살게 된다는 그 위대한 진리가 우리 눈앞에 이렇게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을 부인하겠습니까?

 

게으르지 마십시다. 십자가 뒤에 주저앉아서 방종의 뱃살을 키우며 기름진 쾌락에 자신을 내 맡기지 마십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리고 충만 하라’ 하나님의 이 명령이 우리 삶에 지금도 적용이 된다면 우리는 그렇게 아무런 고민 없이 막 살 수 없습니다. 고민하세요. 그리고 절망하십시오. 그리고 열심을 부려 보기도 하십시다. 그러한 열심 끝에 생육과 번성의 삶이 살아지거든 그러한 삶을 내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하나님의 열심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나 혹시 그러한 열심 끝에도 여전히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있는 자신 안의 마귀를 발견하게 될 때,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자고요.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한 발 더 깊숙이 들어가십시다.

 

이태석 신부가 톤즈를 떠나 하늘로 가면서 ‘울지 마 톤즈, 이게 맞는 거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이렇게 가는 게 맞는 거야’하고 간 것처럼, 기형도 시인이 ‘울지 마 성수야, 이렇게 가는 게 맞는 거야, 육적 자아가 망하는 것이 진짜 망하는 게 아니야, 그게 진짜 번성이야, 그러니까 울지 마’하며 수많은 시를 남기고 간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을 근거로 교회에게 말해 주세요. ‘울지 마 교회야, 그렇게 가는 게 맞는 거야, 울지 마’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있어야 합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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