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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전갈을 밟으십시오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12. 30.

 

 

전갈을 밟으십시오

 

(김성수 목사)

 

 

(계 8:13-9:12) “13 그리고 내가 보고 들으니, 날아가는 독수리 한 마리가 하늘 한가운데로 날면서, 큰소리로 "화가 있다. 화가 있다.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아직도 세 천사가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다" 하고 외쳤습니다. 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이 하나 있는데, 그 별은 아비소스('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을 일컫는 그리스어)를 여는 열쇠를 받았습니다. 2 그 별이 아비소스를 여니, 거기에서 큰 용광로의 연기와 같은 연기가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해와 하늘이 그 구덩이에서 나온 연기 때문에 어두워졌습니다. 3 그리고 그 연기 속에서 메뚜기들이 나와서 땅에 퍼졌습니다. 그것들은, 땅에 있는 전갈이 가진 것과 같은 권세를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4 그것들은, 땅에 있는 풀이나 푸성귀나 나무는 하나도 해하지 말고,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만을 해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5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람들을 죽이지는 말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라는 허락이 내렸습니다. 그것들이 주는 고통은 마치 전갈이 사람을 쏠 때와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6 그 기간에는 그 사람들이 죽으려고 애써도 죽지 못하고, 죽기를 원해도 죽음이 그들을 피하여 달아날 것입니다. 7 그 메뚜기들의 모양은 전투 채비를 한 말들과 같고, 머리에는 금 면류관과 같은 것을 쓰고,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8 그리고 그것들은,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이빨은 사자의 이빨과 같고, 9 쇠로 된 가슴막이와 같은 가슴막이를 두르고, 그 날개 소리는 마치 전쟁터로 내닫는 많은 말이 끄는 병거 소리와 같았습니다. 10 그것들은 전갈과 같은 꼬리와 침을 가졌는데,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을 해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11 그것들은 아비소스('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을 일컫는 그리스어)의 사자를 자기들의 왕으로 떠받들었는데, 그 이름은 히브리말로는 아바돈(파멸')이요, 그리스말로는 아볼루온(파괴자')입니다. 12 첫째 재앙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두 가지 재앙이 더 닥쳐올 것입니다.”

 

 

이제 다섯 번째 나팔로 넘어갑니다. 황 충, 메뚜기가 나오고 그들이 사람들을 괴롭히는데 그 기간이 다섯 달입니다. 그리고 그 황충들의 생김새가 자세하게 묘사가 되고 있지요? 이게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인가? 오늘 공부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네 번째 나팔 재앙까지의 내용을 공부했습니다. 그 네 가지 나팔재앙은 자연계와 생태계의 파괴, 그리고 그로 상징되는 첫 창조를 지탱하고 있는 것과 그 첫 창조의 부산물들을 하나님께서 쳐 가시는 재앙 속에서 우리 성도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어져 가는 역설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궁극에 가서는 다 타 버릴 첫 창조의 것들을 하나하나 부수시는 역 창조의 수순을 밟고 계시고 우리는 그 속에서 새 창조의 아름다운 것들로 지어져 가는 구속사의 다이나믹을 네 가지 나팔 재앙을 통해 배웠습니다. 요한은 우리 그리스도인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paradox를 8장을 마무리 짓는 13절에서 한번 확인시켜주고 9장의 다섯 번째 나팔로 넘어갑니다. 13절을 보시면,

 

(13절) “1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

 

네 번째 나팔 재앙이 끝나고 갑자기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등장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독수리’하면 무엇을 떠올리게 됩니까? ‘하나님의 보호하심’‘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떠오르지요?

 

(출 19:4)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신 32:10-12)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라하프, 알을 품다)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 “독수리“는 심판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신 28:49) “49 곧 여호와께서 원방에서,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의 날음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호 8:1) “1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이렇게 독수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동시에 나타내는 동물입니다. 그 독수리가 ‘화, 화, 화가 있도다’하고 ‘화’를 선포하며 날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이 세상에는 ‘화’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일곱 재앙이 주는 메시지가 전부 이 구절 안에 용해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성경 전체에 용해되어 있는 진리입니다. 구약에서 한군데 찾아보고 넘어가지요.

 

(출 12:12-13) “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죽음의 천사가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는 심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인방과 문설주에 피가 발려져 있는 집,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머리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은 그 죽음의 천사가 그냥 넘어 갑니다. 여기서 넘어간다는 말 히브리어 ‘파싸흐’는 ‘hovering’이라는 뜻입니다. 조금 전에 설명해 드린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를 품다’‘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 하신다’라하프‘와 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인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품어서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구원이라는 것은 타락한 첫 창조의 것들을 멸하시는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역 창조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품어 안으시고 그들을 새롭게 재창조해 내시는 모습으로 이 역사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 우주의 역사는 창조 때부터 종말 때까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계속 심판을 당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입니다. 그 독수리가 어디로 날아갑니까? ‘공중’으로 날아갑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공부하신 요한 계시록에는 두 가지의 세계관이 등장합니다. 하늘과 땅, 그렇죠? 하늘에 완성된 교회와 지상의 불완전한 교회, 하늘과 땅, 이 두 가지 세계관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와 성도들의 삶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요한 계시록입니다. 그런데 여기 13절에 또 다른 세계관이 등장하는데 ‘공중’‘메수라네마’입니다. 하늘과 땅의 중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레엄 골즈워디의 ‘복음과 요한계시록, The Gospel in Revelation’ 이라는 책에 보면 그 개념에 대해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 중에는 ‘타락한 인간’‘아담의 후손인’ 옛 세대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옛 세대에 속해서 율법을 따라 정죄를 받고 사망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세대가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땅에 속한 옛 세대와는 달리 하늘에 속한 새 세대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에 속한 새 세대가 바로 하늘에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옛 세대가 살고 있는 땅에서 역사와 인생이라는 시간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들은 그 역사와 인생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다른 말로 신앙생활을 통해서 새 세대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와 방식을 배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면서도 땅을 살아야 합니다. 그들은 땅에서 하늘을 맛보며 하늘의 원리를 살아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의 옛 세대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놓이게 될 때 그 재앙에 함께 노출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도 안전합니다. 안전할 뿐 아니라 그 재앙 속에서도, 그 화(禍)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그들의 삶은 세상에 화를 선포하는 삶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공중이라는 또 다른 세계관이 여기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그 공중이라는 세계관 속에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다섯 번째 나팔로 넘어갑니다. 다섯 번째 나팔을 부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습니다. 그가 무저갱을 엽니다. 그랬더니 그 구멍에서 연기가 나와서 해와 하늘이 어두워집니다. 여기서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이 아주 분분합니다. 카톨릭에서는 무저갱의 문을 여는 하늘에서 떨어진 별을 ‘마틴 루터’라고 해석을 합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카톨릭에서 보면 만고의 역적이지요? 그래서 그 별을 마틴 루터라고 해석을 합니다. 반면에 해리 아이언 사이드 박사님은 그 별은 ‘교황’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황이 무저갱의 문을 열어서 타락한 교리, 뉴 에이지 같은 것들이 나온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에 대해서 감정을 갖고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서로 사이만 나빠지지 결코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분들은 그 떨어진 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을 하십니다. 아주 많은 분들이 그 떨어진 별을 그렇게 봅니다. 왜냐하면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한 계1:18에도 예수님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갖고 계십니다. 게다가 요한 계시록 20장에 보면 오늘 본문의 내용과 아주 흡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계 20:1-3)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 천년 동안 결박하여 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맞죠?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떨어진 별은 무저갱의 열쇠를 받습니다. 무저갱의 열쇠를 가진 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로부터 무저갱의 열쇠를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무저갱의 열쇠를 그 떨어진 별에게 주신 분이 그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열쇠를 받은 자는 다른 존재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별이 땅에 떨어지다’의 ‘떨어지다’는 ‘핍토’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악한 천사, 사단이 떨어질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눅 10:18)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이 구절을 좀 더 원어에 맞게 번역을 하면 ‘하늘에서 별 같은 사단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입니다. 여기서 쓰인 단어도 ‘핍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땅에 내려오실 때는 다른 단어가 쓰입니다. 우리가 좀 전에 보았던 계시록 20장의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이 땅에 내려오실 때는 ’카타바이노‘라는 단어가 쓰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별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이는 사단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더 근거를 대 드린다면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별’에서 ‘떨어진’‘페프토코타’는 완료 능동태 분사입니다. ‘이미 떨어졌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별은 ‘이미 떨어진’ 존재입니다. 사단이 언제 하늘에서 떨어졌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때 사단은 떨어졌습니다. 그 떨어진 존재인 사단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 때까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여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개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이중적 의미가 들어 있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십자가지요? ‘너희는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을 것이다’라는 심판의 메시지도 그 십자가에 함께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면 이제 그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에 심판을 행했던 죽음의 천사가 상징했던 세상을 재앙 속으로 떨어뜨리는 무저갱의 천사가, 사단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 9:11) “11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여러분, 출애굽기에 나오는 그 죽음의 천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무저갱의 임금 무저갱의 천사 (아바돈, 아볼루온)입니다. 하나님께서 돌아다니시면서 사람들과 짐승들을 죽이지 않으신다고요. 하나님은 그 사망이라는 천사, 사단을 도구로 써서 악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출애굽기 13장에서 보셨듯이 하나님은 ‘내가 죽이겠다.’라고 표현을 하신다고요. 이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역사는 운행되어져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내가 한다. 내가 죽인다.’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재앙과 심판들은 우리의 죄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 타락한 인간들의 죄, 그 죄가 스스로 우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무저갱의 천사에게 무저갱의 열쇠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을 심판해야 하는데 너희들이 그 역할을 해야겠다.’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무저갱은 사단 마귀들이 갇혀있는 곳입니다. 그들을 풀어서 세상을 치게끔 허락하시는 것은 이제 심판 받을 자들에게 그 심판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간이 다섯 달입니다. 다섯 달은 어디서 나온 거지요? 노아의 홍수 때 비가 며칠간 왔습니까? 150일. 5개월이죠?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기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세상은 심판의 비로 다 죽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방주에 의해 보호를 받고 살아나는 기간이지요? 이렇게 성경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2절을 보시면 그 하늘에서 떨어진 악한 천사가 무저갱의 문을 여니까 연기가 납니다. 성경에서 연기는 어디에 자주 등장합니까?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현현을 표현할 때 연기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무저갱을 열었는데 그냥 연기가 아니라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옵니다. 뭡니까? 속임수죠?

 

사단은 하나님의 흉내를 내어서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 자들을 미혹해서 심판의 자리로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그 연기 같은 연기가 해와 하늘을 어둡게 만듭니다. 진짜 하나님의 현현, 진짜 하나님의 거룩의 연기는 창조의 연기요, ‘빛이 있으라’ 연기입니다. 그런데 이 ‘연기 같은 연기’ 가짜 연기는 오히려 해와 하늘을 어둡게 만들어 버리는 연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그 연기 같은 연기에 속아서 결국 사망으로 심판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연기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있는데 그게 황충입니다. 메뚜기죠. 라일 같은 신학자는 그 메뚜기가 미국의 아파치 헬기라고 설명을 합니다. 나중에 종말 때 미국의 아파치 헬기가 구름 떼처럼 몰려 와서 폭탄을 퍼 붓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합니다. 글쎄 재미는 있습니다만, 성경은 성경 안에서 풀어야 한다고 했지요? 요한은 구약 성경에 나타난 메뚜기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사용해서 그 재앙의 엄청난 파괴력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파치 헬기 같은 것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 출몰했던 메뚜기 떼는 태풍 토네이도의 파괴력에 버금가는 피해를 주었습니다. 메뚜기 떼가 지나간 자리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메뚜기 떼는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아서 하늘을 덮으면 해가 가려져서 먹구름이 낀 것같이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신출귀몰한 곤충이라고 하지요? 마귀의 세력이 그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메뚜기가 등장하는 몇 구절만 찾아보지요.

 

(삿 6:3-5) “3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이 치러 올라와서 4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식물을 남겨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5 이는 그들이 그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서 메뚜기 떼 같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약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엄청난 수를 가리킬 때 메뚜기 떼 같다고 하지요?

 

(암 7:1-2) “1 주 하나님이 나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 주셨다. 주께서 재앙에 쓰실 메뚜기 떼를 만드신다. 두벌갈이의 씨가 움돋을 때, 곧 왕에게 바치는 곡식을 거두고 나서, 다시 두 번째 뿌린 씨가 움돋을 때이다. 2 메뚜기 떼가 땅 위의 푸른 풀을 모두 먹어 버리는 것을 내가 보고서 "주 하나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야곱이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는 너무 어립니다" 하고 간청하니,”

 

엄청난 파괴력을 말합니다. 모두 먹어버립니다. 그 밖의 7절부터 10절까지에 나오는 메뚜기에 대한 묘사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제가 hand out으로 나누어 드렸으니까 그것을 참고하세요. 그 생김새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 메뚜기 떼가 주는 메시지를 잘 챙기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5절을 보시면 그 메뚜기가, 마귀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권세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한 자들만을 쏩니다.

 

(계 9:5) “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그 메뚜기들이 전갈이 사람을 쏠 때의 아픔 같은 무지무지한 고통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쏟아 붓습니다. 그럼 또 구약에서 전갈이 가지는 메시지를 찾아 봐야겠지요? 성경에서 전갈이 등장하는 곳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영역밖에 있는 자들, 혹은 그들이 사는 세상을 가리킬 때 전갈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겔 2:3-6)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4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6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 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지어다”

 

패역한 족속, 죄인들을 가리켜 전갈이라 표현합니다.

 

(신 8:14-15) “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 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가나안과 비교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밖의 세상을 상징하는 광야를 전갈이 있는 곳이라고 표현을 하지요? 그러니까 황충이 전갈이 쏘는 것처럼 믿지 않는 자들을 괴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영역 밖에 있는 세상의 삶의 원리로 사는 자들을 그 세상의 삶의 원리, 즉 죄가 스스로 그들 자신을 고통스럽게 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 뭡니까? ‘내 배’죠?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죄인들의 궁극 적 목표는 ‘내 배를 살찌우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의 삶의 원리죠. 저마다 내 배를 위해 살게 되면서 생기는 것이 뭡니까? = 물질주의를 추구하는 인간들이 낳은 열매들이 뭡니까?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전쟁, 경쟁, 분 냄 이런 것들입니다. 이것이 전갈의 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만들어 낸 것이죠? 자기 안에 있는 죄의 결과들입니다. 사도 바울도 똑같은 경고를 합니다.

 

(딤전 6:9-10) “9 부 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여기서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부자가 되려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의 존재의 안전과 행복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는 죄인들을 총칭해서 ‘부 하려 하는 자들’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산다고요?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게 다섯 번째 나팔입니다. 엉터리 철학과 이념, 교육, 엉터리 교리 이런 것들은 인간을 하나님 위로 올려놓습니다. 인본주의, 뉴 에이지, 기복주의, 물질주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할 인간들을 오히려 신으로 추켜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제일 잘나야 하고, 모두 나를 존경해 줘야 하고 모두가 나를 부러워해야 한다는 삶의 목표를 세우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이 결국은 자기를 찌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해보면 사단이 무저갱의 문을 열어서 마귀들을 땅으로 쏟아 부어서 하나님의 흉내를 내면서 믿지 않는 자들을 미혹하여 공격하는데 그 공격 방법이 거짓 가르침으로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빼앗아서 엉뚱한 것을 추구하게 만들어서 스스로 올무에 빠지고 시험에 빠지고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여러분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고 부자 되고 병도 낫게 된다는 가르침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 하셨던 복들입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지키면 주시겠다.’고 하셨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앞의 말은 쏙 빼고 뒤의 것만 주겠다고 하는 것이 기복신앙 아닙니까?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그러한 복을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잘 믿어드릴 테니 내가 원하는 것을 충분히 주세요.’ 이게 구약 아닙니까? 그렇죠? 그럼 여러분은 다시 율법 아래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그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전부 사망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 율법을 지켜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전 15:55-56)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 구약의 복을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다시 구약의 율법 아래로 들어가게 되시는 것이고 그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사망에 의해 쏘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만을 좇는 사람들의 인생이 얼마나 고단합니까? 얼마나 괴롭습니까? 많이 가져도 괴롭고 없어도 괴롭고 참 만족이 없어요.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희는 절대 거기에 빠지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가셨습니다.

 

(눅 10:19)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맞다 면,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들이 맞다 면 우리는 그 전갈에 쏘이는 것이 아니라 그 전갈을 밟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그 전갈을 밟을 권세를 주셨다고 하는데 여전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그 전갈의 쏘임에 당하고 있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지요. 마귀는 언제나 그 거짓 가르침을 가지고 우리를 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쏘이면 잡히지도 않는 신기루 같은 목표를 향해 시간을 허비하고 에너지를 허비하며 고단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절대 거기에 넘어지지 않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전갈을 밟을 권세가 있다’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자들은 자기가 붙들고 있는 세상 것들을 조금만 흔들어도 괴로워서 죽습니다. 전갈에 쏘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것들이 떠나가면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여기도 망해서 하나님 앞에 돌아 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여러분, 여러분이 아는 사람 중에 돈을 너무 많이 벌어서 예수 믿게 되었다는 사람 보셨어요? 전부 망해야 돌아온다니까요.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절대 전갈이 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절망하고 자포자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돌아온다니까요? 그래서 4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않은 사람들만 해하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그런 것으로 해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그 까짓 것들 좀 떠나가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빌 4:4-7) “4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절대 전갈이 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직까지 그 전갈의 쏘임에 당하고 계신다면 여러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 맞으신지.. 첫 창조의 부산물들을 좇아 사는 사람들, 세상의 가치를 좇아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는 절대 평안이 없습니다. 절대 만족이 없습니다. 늘 부족합니다. 내가 올라가기 위해서는 늘 다른 사람을 밟아야 합니다. 그 삶이 괴롭다고요. 거기를 지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

 

(계 9:6) “6 그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라고 표현을 해놓은 것입니다. 이 말은 나중에 최후의 종말 때는 사람들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뱀파이어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지옥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죄인들은 이 땅에서 그 지옥을 미리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전쟁과 살인과 다툼이 왜 존재합니까? 세상의 가치, 내 배를 위한 죄인들의 욕심 때문 아닙니까? 그건 지옥입니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전갈을 밟을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그러한 욕심과 교만이 솟구쳐 올라올 때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밟아버리십시오. 그래야 진짜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입니다. 절대 그 메뚜기의 꼬리에 달린 전갈의 독에 중독되지 마시고 하늘 소망을 바라시며 늘 기쁨과 평안을 잃지 않으시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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