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만한 삶
(김성수 목사)
(엡 3:16-4:3)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1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는 지난주까지 아주 긴 시간동안 사도 바울의 기도의 내용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이미 신자였던 에베소 교회를 위해 위대한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시기를,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더 깊이 발견하게 되기를, 그리고 그들이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그리고 그 깊고 넓고 높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어 그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정말 긴 시간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18절에 보시면 그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성도와 함께”알아가야 하는 사랑입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모든 성도가 함께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본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거죠. 혼자서는 그 사랑을 배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라는 무리로 묶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올바른 교회를 만나는 것은 여러분의 인생에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19절에 보시면, 너희가 그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와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이 너희에게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기도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교회가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한다.“는 것을 조금 곡해 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무슨 특별한 열심이나, 대단한 은사의 발휘 같은 것으로 이해를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하는 것이 정말 그런 것일까요? 우리 안에 성령하나님께서 내주 하시게 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다른 말로 “성령 충만”이라고도 부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오시게 되면 우리는 정말 그런 커다란 능력을 발휘하게 되고 대단한 열심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되는 것입니까? 아마도 이런 구절들 때문에 오해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눅 24:49)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성령을 보낼 것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기다려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입게 되는 것을 능력을 입는 것이라고 하신 이런 말씀을 토대로 그리스도인들의 충만을 대단한 열심이나 능력의 발휘 같은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발휘해야 할 능력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셨던 그 권능, 능력은 이런 능력입니다.
(요 21:18-19)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성령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살던 삶을 이제 성령께서 오셔서 직접 우리의 삶을 이끌고 가실 때, 순종하고 따라갈 수 있는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절대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 갈 수가 없지요. 그러나 성령이 오시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우리는 그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좇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된 자들의 능력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가실까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유일한 목적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자들을 가리켜 “능력 있는 자”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한 자”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에게 나타날 그 충만은 ‘하나님의 충만’입니다. 하나님의 충만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를 해 보면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요? 첫째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요, 둘째가 사랑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렇죠? “전지전능하신 능력과 성품” 그러면 그 둘 중에 우리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하나님의 충만은 뭘까요?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그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이 충만하게 흘러넘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도를 이렇게 마칩니다.
(엡 3:20-21)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20절 보시면 “우리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이라는 구절이 있지요? 이 말씀은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기도한 것들을 벌써 하나님께서는 교회 가운데서 역사 하시면서 이루어 가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는 구절로 하나님은 늘 우리가 기도하는 것들보다 더 좋은 것으로 우리를 위해 공급하신다는 것을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주지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바라지 못한 것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조차 다 아시고 이미 그것들보다 더 넘치게 우리를 다듬어 가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지금까지 기도한 것들보다 더 훌륭하고 멋지게 너희들을 만들어 내실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구절들을 가지고 “거 봐라,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바라지 못한 것까지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시는 분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라는 말이 맞다” 그렇게 우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쓰인 단어 “넘치도록” “휘페르 에크 페리수”는 사도 바울이 만든 단어입니다. 여기 하고 데살로니가 전서 3장 10절에 딱 두 번 쓰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넘치도록 풍성하게”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영적인 풍성함을 가리킬 때만 쓰인 단어입니다. 같은 의미의 단어가 2장에서 한번 쓰였는데 2장7절을 한번 볼까요?
(엡 2:6-7)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지극히 풍성함”이 “휘페르 발론타”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풍성함이 어떤 풍성함입니까? 바로 그 앞의 6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시고 다시 살려내셔서 하늘에 앉히신 영적인 풍성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아직 구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그 모든 것들을 이미 다 아시고 그 것보다 더 엄청난 것으로 우리에게 ”휘페르 에크 페리수“ ”넘치도록“ 주신다고 하신 것”은 영적인 풍성함인 것입니다. 이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의 말년, 사도 바울이 죽기 2, 3년 전에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그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신 어떤 것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자기가 경험한 것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경험한 세상 것들이 뭡니까? 가난에 쪼들리고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히고, 교인들에게 배신당하고 했던 것들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그런 풍성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넘치도록 주시는 것은 영적인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그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안에서와 예수 안에서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빌고 기도를 끝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라고 했지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사도는 그 영광이 교회 안에서도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교회 안에서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대대로 영원 궁하기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나타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이 교회인 여러분에게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장장 세 장에 걸쳐서 기독교의 교리를 완벽하게 설명을 하고 그리고 그 진리를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까지 마치고 나서 4장부터 “그러므로” 하고 그리스도인들의 행동강령을 나열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 이것이 우리가 오늘부터 공부할 내용입니다. 왜 사도는 로마서에서도 그렇고 에베소서에서도 그렇게 꼭 교리를 세세하게 설명을 한 뒤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하고 나중에 가서야 그리스도인들의 행동강령을 기술을 할까요? 처음부터 거두절미하고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하고 써도 되지 않습니까? 제가 여러 번 설명해 드린 대로 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열심은 오히려 자기 의를 쌓게 되어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거죠.
(롬 10:2) “2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지식 없는 열심은 아주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사도는 “그 바른 지식”을 먼저 정확하게 설명을 하고 그리고 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은 바른 진리를 근거하지 않은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엉터리 열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께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저주의 욕을 들었습니까? 그들이 계명을 잘 지켰다고 우겼고, 그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의인이며 선민이라고 자처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노여움을 산 것입니다. 그렇죠? 많은 계명 중에 그들이 가장 민감하게 지키려고 노력했던 계명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십계명 중에서 가장 길게 설명을 하신 계명이 뭡니까? 출애굽기 20장을 잘 생각해 보세요. 안식일에 관한 계명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거의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적군이 칼을 들고 좇아오는데 그날이 안식일이면 그 사람들이 뛰어서 도망가지 않았다고 하니까 얼마나 철저하게 그 날을 지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번 볼까요?
(출 20: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히브리 사람들은 그들의 문학 양식에서 중요한 어떤 것들을 나열할 때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것들은 활자의 양을 많이 할애를 해서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은 십계명 중에서도 안식일에 관한 계명에 아주 특별히 촉각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안식일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 대단히 진노하셨음을 유대인들이 읽고 있었던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 31:12-17)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여러 가지 율법이 있지만 이렇게 그 율법을 어긴 사람이 처형이 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진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상징하고 있는 어떠한 것이 범해질 때 그렇게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임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민 15:32-36) “32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33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 왔으나 34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36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에 대해 엄청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 앞에 패역한 일을 할 때마다 “너희가 안식일을 어겼다”라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행위의 대명사로 유독 안식일을 강조해서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겔 20:10-13)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로 애굽 땅에서 나와서 광야에 이르게 하고 11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12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13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패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의 위에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게다가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시는 이유도 그들이 안식일과 안식년을 범한 것이 이유가 되어서 그들이 지키지 않은 안식년을 70번을 한꺼번에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대하 36:17-21) “17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백발노옹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18 또 하나님의 전의 대소 기명들과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과 방백들의 보물을 다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19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을 헐며 그 모든 궁실을 불사르며 그 모든 귀한 기명을 훼파하고 20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이르니라 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은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제가 설명해 드렸죠? 이렇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이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뉘우치고 행한 것이 안식일을 포함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이 그렇게 포로로 끌려가게 된 이유가 안식일을 안 지키고, 율법을 안 지켰기 때문이라고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고서 그들은 그 이후로 더더욱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안식일을 지켜왔고 지금도 지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의 전차“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chariots of fire" "반젤리스”의 영화음악으로 더욱 유명하지요? 그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인 영국의 캐임브리지에 다니는 헤럴드와 에릭이라는 두 수재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공부만 잘할 뿐만 아니라 달리기에도 소질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이 두 청년은 올림픽에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올림픽 100m 달리기 결승전 날이 하필 일요일이었습니다. 에릭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안식일 날 뛸 수 없다고 하며 그 결승전을 포기합니다. 결국 다른 선수들의 배려로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에 결승전이 있는 400m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는 스토리입니다. 이 영화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의 “주일 성수“에 관한 고정관념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죠? 골든 글로브와 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세계적으로 성공한 영화여서 더욱 그 영향이 컸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안식일이 뭐길 래 하나님은 그렇게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못 견뎌 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지금도 안식일을 지킨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주일은 꼭 자기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여행을 갔다가도 주일에는 자기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다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멀리 유학을 가거나 이사를 가서도 꼭 헌금을 전에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 부치죠? 도대체 그 안식일이 무엇이기에 그러는 겁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일부러 그 안식일을 범하시며 일을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기신 일 때문에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미움을 사게 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도 안식일이고, 소경 된 자의 눈에 진흙을 이겨 발라 그 눈을 뜨게 하신 날도 안식일입니다. 손 마른 자를 고치신 날도 안식일이고 제자들이 이삭을 비벼서 먹은 날도 안식일입니다. 먹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비빈 게 안식일을 어긴 겁니다. 복음서를 잘 보면 예수님은 일부러 그 안식일에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이 보입니다. 이제 그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살펴보고 왜 우리 주님은 그 안식일에 그러한 일들을 하셨는지 추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교리 설명에 심혈을 기울여서 유대인들의 엉터리 열심, 가장 사악한 죄악인 율법주의를 경고했는지를 확실하게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안식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창세기 2장2절에서 처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모두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구절에서 처음으로 ”안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창 2:1-3)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made it holy, because on it he rested from all the work of creating that he had done.
여기에 안식일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는 말과 하나님께서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어떤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그 날에 복을 주셨다고 하십니다. 이 구절 안에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 교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 질문을 여러분의 가슴에 잘 품으시고 계속 가보겠습니다. 이렇게 안식이라는 것이 처음 등장하고 오랜 역사 동안에 안식이라는 것이 등장하지 않다가 출애굽기 20장에 가서야 처음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계명으로 주어집니다.
(출 20:10-11) “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그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근거를 창조기사로 대십니다. “내가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칠 일째 쉬었다. 그러므로 너희도 안식일을 지켜 아무 일도 하지 마라” 그리고 딱 40년 후 신명기에서 다시 안식일을 명하시는데 신명기에서는 그들이 애굽 땅에서 구원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신 5:12-15) “12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4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 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를 하시고 일곱 째날 안식을 취하셨다는 것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건짐을 받게 되는 것, ‘구속, 죄 사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가보죠.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이 무엇인지는 성경에 잘 설명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전체를 통해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는 그 말은 하나님께서 그 안식일에 어떤 복된 씨앗을 심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복된 씨앗은 우리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생기게 된 죄와 수고로움에서 자유롭게 되어 우리가 누리게 될 “영생”이라는 씨앗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안식일에는 앞으로 긴 세월 후에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게 될 ‘구원, 영생’이라는 씨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복을 담아 두셨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조금 더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여섯째 날 인간과 육축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 물질 세계, 공간 세계, 감각 세계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시간이라는 초월적인 영역에다가 복을 부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죠?
여러분, 시간이 뭡니까? 우리는 시간이 뭔지 잘 몰라요. 우리는 물질과 공간에 대해서는 아주 익숙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또 내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아주 익숙합니다. 그런데 시간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시간은 전혀 우리가 통제할 수가 없어요. 공간과 물질은 우리가 마음대로 만들었다 부수었다 할 수 있지만 시간은 전혀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측정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뚝뚝 잘라서 우리가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1968년에 국제 도량형 위원회(CGPM)에서 세슘원자의 복사주기에 91억 9천 만 배를 곱해서 1초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가 그것을 1초라고 부르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냥 막연히 그 시간이라는 것이 흘러가면 우리 인간이 늙고 병들고 약해져서 결국은 죽게 된다는 것 정도로 시간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시간을 두려워합니다. 그 시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물질과 공간 속으로 숨어들게 됩니다. 시간에 의해 두려워진 마음을 공간과 물질로 달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모으고, 멋진 집을 사고 싶어 합니다. 그 안에 불안한 자신을 숨기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외모를 열심히 아름답게 가꾸어 보기도 하고 남들은 쳐다보지도 못할 값비싼 것들로 자신을 치장하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하고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합니다. 그도 물론 자신이 숨을 공간과 물질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시간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공간과 물질의 영역에서 공간과 물질만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았다고 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내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인간의 복은 공간과 물질의 영역이 아닌 시간의 영역 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인 인간과 일곱째 '날'에 공히 복을 부으셨습니다. 사람과 시간에다가 동일한 하나님의 복을 부으신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지어진 인간, 즉 하나님의 백성은 시간 속에서만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이라는 시간에 복을 부으시고 그 '날'이라는 시간을 거룩하다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시간 속에 복되고 거룩한 어떠한 것이 담지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시간의 영역 속에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서는 그 분이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 이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시간의 영역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하고 깨닫고 인식한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알고 소망하는 것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는 이 공간과 물질의 영역이 아닌 시간의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인 로마서에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가다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기와 때'가 바로 '카이로스''호라''시간'입니다.
바울은 시간의 영역을 모르고 물질과 공간의 세계에만 집착하고 있는 자들을 '잠자는 자'라고 부르고 시간의 영역을 깨닫고 시간의 영역에서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을 '깨어있는 자'라고 일컫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제발 이 소멸될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 갇혀서 엉뚱한 허비를 하지 말고 눈을 들어 시간의 영역을 바라보라'고 간곡히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물질과 공간은 시간의 영역에서 배태되어 탄생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시간이 창조해 놓은 것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서도 천지의 창조 이전에 '태초에' '레쉬트'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레쉬트'는 '시간이 창조되었을 때에'라는 의미입니다. 즉 시간이라는 것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해 보이는 것들이 창조되는 것임을 제한된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어떠한 것의 모형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다시피 영원에서 튕겨져 나온 이 물질 세계의 모든 것은 하늘의 것들을 그림자처럼 닮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에덴동산도 하나님 나라의 성전을 그림자처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은 하늘의 어떤 것을 원형으로 하고 있는 걸까요? 바로 영원이라는 것을 제한된 물질세계 속에서 그리고 있는 것이 시간인 것입니다. 시간은 그렇게 영원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영원 속에 존재하시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도 바로 그 영원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에서 물질과 공간이 어떠한 목적과 계획을 지니고 잠시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그 시간의 영역을 안식일 속에서 찾으려 했었습니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안식일을 감지되지 않는 그 시간의 거룩한 지성소로 여겼습니다. 여러분, 우리말 개역 성경에 ‘거룩’이라고 번역이 된 ‘카다쉬’라는 단어는 원래 자세한 뜻을 알 수 없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하나님의 크심과 하나님의 신비함, 하나님의 위대함 등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이 땅의 것과 구별되는, 하나님을 포함한 하늘의 것에 쓰인 단어입니다. 잘 생각 하시며 들으세요. 그러니까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 유일하게 거룩했던 것은 “안식일이라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하게 하셨고, 거룩한 전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시간”에 대해서 많은 묵상을 해야 하고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인간들이 물질과 공간, 감각 세계에 목숨을 걸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는 시간에 복을 부으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고 물질과 공간, 감각 세계에서 눈을 돌려 “시간의 세계“를 바라보라고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헬라 철학은 이데아와 현실, 공간적 이원론이지만 우리 기독교는 이 세상과 다가오는 세상의 시간적 이원론입니다. 우리가 고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그 다가 올 시간, 영적 세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있는 영생이 뭡니까? 영생은 하나님과 영원히 화목하게 살게 되는 시간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그 안식일이라는 시간에다가 “영생“이라는 씨앗을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복을 주셨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안식일이라는 시간에다가 복을 부어 주셨다는 것은 그 안식일이 하나님의 참 복인 영생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그 사실을 입증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그 안식일을 처음에 이스라엘에게만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구원을, 영생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모델로 택해졌기 때문입니다.
(출 31:13-17) “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의 표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라는 언약의 표징으로 주신 것이 몇 가지가 있죠? 첫 번째 “할례” 그렇죠? 할례는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 선택 된 이스라엘 백성이다“라는 symbol 이었지요? 언약의 축복의 보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아들의 할례를 행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죽이시려고 했던 장면이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니까요. 그리고 두 번째가 이 안식일입니다. 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언약 백성의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까지 이 세상에서 7days life cycle을 가진 민족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생활주기가 전 세계 공통으로 일주일이 되었지만 그 전에는 그렇게 7days life cycle을 가진 민족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벨론은 “달 신”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 바벨론의 생활주기는 달마다 돌아갔습니다. monthly cycle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 같은 나라는 태양신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life cycle은 하루, 1day life cycle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시스나 오시리스 같은 계절 신을 섬기던 나라는 한 계절이 그들의 life cycle 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유독 이스라엘만이 7days life cycle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7days life cycle로 살게 되면서, 일주일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세상의 모든 잡신들은 다 가짜고 오직 여호와만이 창조주이시고 , 오직 이스라엘만이 진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것을 누리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언약의 표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갖고 있는 의미가 뭔지 점점 분명해 지지요?
여러분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뭡니까? “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을 구원해 내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천국 생명을 허락하시겠다는 것이 언약의 실체입니다. 바로 안식일이 그 표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밖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 사람들 이외의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사망이죠?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의 표징인 안식일을 범하면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엄명을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그 언약의 밖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죽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단지 그날, 토요일이 뭔가 범상치 않은 대단한 날이라서가 아니라 그 날이 갖고 있는, 그날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영생이요, 구원이기 때문에 그 날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설명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할례를 받지 않거나 안식일을 어기면, 그 언약의 표징을 행하지 않으면, 그 언약밖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상징이란 말이에요. 여기까지 이해가 가시죠? 왜 안식일을 어기면 죽이는지, 왜 할례를 안 받으면 죽이는지. 그러니까 그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완성될 진짜 참 안식, 영생의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골 2:16-17)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는 것이죠? 그 실체는 (여기서 몸 “소마”는 실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정확해 졌죠? 그래서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죽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자들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독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 안식이 뭐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 세상의 죄와 수고와 질병과 고통, 갈등, 투쟁, 슬픔 이모든 것들이 전부 물러간 영생의 상태를 안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진짜 안식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영생을 상징하는 안식일에 병자가 있다는 것이 뭡니까? 그 안식일은 불완전한 안식일이죠? 그러니까 그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심으로 예수께서 그 안식일을 완전하게 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안식이다. 바로 이게 영생이다“ 안식일에 일을 한 사람을 죽여 버리신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인간이 왜 일을 하지요? 이제 타락한 인간은 땅과 함께 저주를 받아서 자기가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는 일은 이제 먹고살기 위한 노동이 된 것입니다. 원래 인간의 일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동반자로서 그 아름답고 위대한 창조를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노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하고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들의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무엇을 상징한다고 했습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질 영생의 상태, 그렇죠? 거기에서는 누가 우리를 먹여 주십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먹여 주십니다. 그래서 그 영생을 상징하는 안식일에는 그 천국의 삶의 모형으로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먹이시니까.
광야에서도 안식일에 먹을 것은 미리 그 전날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부터 안식일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계속해서 demonstration해 주신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는지 아시겠지요? 왜 주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을 비벼서 먹는 것을 놔두셨는지 아시겠지요? 주님은 안식일이 갖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그들에게 demonstration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너는 왜 그 날을 안 지키느냐?”하고 예수님을 때려죽인 것입니다. 여러분, 3.1절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광복절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3.1절 날 대문에다가 태극기 달면 그게 3.1절지키는 것입니까? 광복절 행사장에 참석해서 광복절 노래 부르고 오면 광복절 지키는 것입니까? 그 날이 갖고 있는 의미를 잘 되새기고 그 날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게 된 그 자유를 잘 누리는 것을 “3.1절을 지킨다, 광복절을 지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날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태극기 하나 꽂아놓고 “난 지켰네.”한다는 것입니다. 그 것을 우리가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교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서 열심으로 자기의 죄를 덮으려고 하는 것, 이것을 막기 위해 사도 바울이 3장까지에서 교리를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4장의 “그러므로”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도 장장 11장까지 교리를 자세하게 설명해 놓고 12장부터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인간이 법을 지키려는 열심을 극악한 죄라고 하는지 지난번에 잠깐 설명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을 하고 하나님 없이 살게 된 후에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악이라는 놈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전쟁이 일어납니다. 간음과 다툼이 생깁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없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법”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정작 자신은 그"법“을 지키기 싫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법“을 지켜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 법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을 지키는 노력을 함으로 해서 하나님 없이 자신들의 안위를 스스로 챙기는 것이 바로 인간의 법입니다. 스스로 법을 지켜서 내 삶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시도지요.
그리고 모든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 죄책감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죄책감이라는 녀석은 엄청난 괴물입니다. 누구도 그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그 죄책감을 상쇠하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그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그러한 것들로부터 바로 오늘 제가 지적하고 싶은 ”율법주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무조건 내가 내 힘으로 지켜 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율법주의, 그 율법주의는 가장 사악한 죄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율법주의에 젖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 진저”라고 저주를 하셨고 율법주의를 다룬 책 갈라디아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그 율법주의를 다른 복음이라고 했고 그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욕을 퍼부은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사악한 죄입니다.
그러면 오늘날로 넘어오겠습니다. 이제 그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나라가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주일날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그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고 소망하며, 그 나라를 직접 누리기도 합니다. 구약의 안식일이 갖고 있던 의식적인 면은 이제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 사라졌지만 그 정신과 의미는 그대로 오늘 날 주일에 배어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이 그러했듯이 그 날을 무작정 지키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 날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누리는 것이 정말 그 날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또 다른 율법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주일 날 왜 모여서 예배를 하는지 그리고 그 날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순히 “난 주일 지켰어” “난 교회 안 빼 먹었어” 라는 열심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 그 주일의 의미를 잘 알고 계시고 평소에도 그 안식을 잘 누리실 수 있는 분이라면 여러분 꼭 주일 날 예배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날에 들어있는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 일요일은 한국의 월요일입니다. 날짜에 얽매이시면 안 됩니다. 제가 아는 중앙아시아의 어떤 작은 나라에 가신 선교사님은 그 나라의 휴일이 목요일이랍니다. 그래서 그 곳에서는 목요일 날 모여서 예배를 드린 답니다. 그거 안 되나요?
캘빈의 기독교 강요 2권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 계명의 의식적인 부분이 폐지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꼭 토요일 날 지켜야 했던 안식일의 의식적인 부분이 폐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진리이심으로 그가 나타나심으로 모든 그림자들이 뒤로 숨는 것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참 된 안식의 성취이시다. 그러므로 안식이란 어느 하루 동안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기까지 우리 삶의 전 과정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날짜를 지키는 미신적인 행위를 삼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주일만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 그 진정한 안식의 의미를 배우고 누리며 살아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교회가 모이기로 한 어느 날에 함께 모여서 그 하나님을 자랑하고 찬양하고, 그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즐기는 시간이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일날 부득이한 사정이 있으신 분들은 빠지셔도 됩니다. 여행 가셨다가 비행기 타고 본 교회로 안 오셔도 됩니다. 왜 한국 교회에 “주일 성수” 바람이 불었느냐 하면 목사님들이 신자들의 열심을 독려하기 위해서 겁을 많이 줬다고요. 주일 날 교회 빼먹고 놀러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 이야기, 십일조 떼먹었더니 아이가 불치병이 걸린 이야기, 십일조 다 계산해서 냈더니 그 아이가 나았다는 이야기 등등 뭐 이런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로 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겁이 나서, 혹은 재수 없을까봐 교회에 나와 주는 것이 “주일 성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이는 이유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영원히 천국에서 함께 살 내 천국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그리고 그 천국의 예배를 사모해서 가 아니라, ‘그 날 안 나오면 차에 빵꾸 날까봐, 비즈니스에 지장 있을까봐, 왠지 꺼림칙해서‘ 이런 거라면 여러분 교회 안 나오셔도 됩니다. 집에서 푹 쉬세요. 제가 이렇게 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걱정이 되는 것은 이렇게 진실을 이야기하면 몇몇 악당들이 “이제 마음 놓고 교회 빼먹어도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게 될까봐 제일 걱정입니다. 그래서 캘빈이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정해진 날을 택하여 성도가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비한 떡을 떼며 공적으로 기도하며 일군들을 노동에서 쉬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날을 정해 놓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모임을 가질 수 있겠는가? 혹자는 날을 구별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날마다 모이자고 한다. 그렇게 날마다 모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을 실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정한 시간을 영적인 지혜를 위해서 정하는 것은 진실로 가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요일로 그 날을 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 날을 소중하게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꼭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찬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고, 쉼을 갖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럼에도 부득이하게 교회를 빠지게 되었을 때 죄책감 같은 것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올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 서마다 이렇게 교리 설명에 열을 올리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끌고 가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신자들의 헌신을 요구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헌신하십니다. 그러니까 열심만을 가지고 신앙을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두 번째 표어를 지었습니다. “자나 깨나 열심 조심” 그렇다고 열심을 내지 말라는 것 아닙니다. 이렇게 율법주의에 대해 경고를 하면 사람들이 열심을 잃어버리곤 하는 것을 왕왕 봅니다. 제가 그러한 형식이나, 율법주의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교회가 헌금이 다른 교회들에 비해 월등히 적어진 것을 아십니까? 우리 교회 교인들이 기도하고 전도하는데 다른 교회 교인들과 비교도 안 되게 열등하다는 것 아세요? 여러분이 잘못 이해하신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열심을 내야 합니다.
(고전 15:58)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롬 12:11)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벧전 4:8)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후 1:10)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보세요. 열심을 내라고 하시죠? 여러분 전도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열심을 내되 먼저 왜 열심을 내야 되는지를 알고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주의자들의 열심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열심이, 희생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나오는 열심과 율법주의에서 나오는 열심을 어떻게 구별합니까? 그 사람이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해 보면 압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기가 열심을 내어 하고 있는 것을 못하게 하면 못 견딥니다. 그리고 그것을 못 하게 한 사람을 미워하고 자기 대신 일을 맡은 사람에게 비협조적이 됩니다. 자기의 유일한 죄책감의 해결 방법을 빼앗겨 버린 결과가 되기 때문에 상당히 분을 냅니다. 그리고 율법주의자들은,
(1) 직분을 탐합니다.
(2) 예배를 빼 먹거나, 평소에 하던 큐티를 몇 번 빼먹거나 매일 하던 새벽기도를 며칠 쉬고 나면 불안해합니다.
(3)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열심히 교회 일을 하면서도, 열심히 종교행위를 하면서도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4) 그리고 율법주의자들은 신앙생활이 짐처럼 여겨집니다. 예배 시간, 성경공부 시간, 교회 식구들이 모이는 시간이 부담스럽고 짐처럼 느껴집니다.
(5) 그리고 율법주의자들은 완벽주의를 지향합니다.
(6)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보다 모자란 사람을 깔봅니다.
진짜 복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안 사람들은 그런 엉터리 열심 안 부립니다. 하나님만 아시는 겸손한 열심을 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신자들에게 바로 그 진짜 열심을 독려하기 위해서 이렇게 늘 충분하게 교리를 먼저 설명을 하고 “그러므로” 로 시작되는 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그러므로”의 열심을 내고 계십니까? “율법주의자”의 열심을 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멍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이제 다음 주부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내어야 할 열심에 대해,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할 “충만”에 대해 한 절 한 절 자세히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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