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 자들의 목표지점
(김성수 목사)
(요 9:39-41)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가 눈을 뜨게 되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며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되어 그의 삶이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를 하자면 소경이었던 자가 새롭게 눈을 떠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말은 계시의 paradox가 이해되어지기 시작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paradox는 어떠한 명제가 있을 때 그 명제가 가지고 있는 표면적 내용이 전혀 비논리적이고(illogical) 불합리해 보이는데 사실은 그 속에 진리(fact)를 담고 있는 명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개기일식 때 태양 뒤편의 별이 지구에서 관찰이 되는 현상 같은 것입니다. 그건 분명 모순처럼 보입니다. 우선 빛이 고형의 장애물(mass)을 통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임의의 어떤 점에서 다른 점까지의 최단 거리는 직선이어야 한다는 유클리드 기하학에 근거해서도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비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서로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를 따질 수 없는 두 개의 독립된 기하학입니다. 왜냐하면 유클리드 기하학의 전제는 공간은 일률적(uniform)이며 획일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휘어진 공간 속에서의 최단 거리는 직선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면이나 찌그러짐이 없는 공간의 도형의 성질을 다루는 것이 유클리드 기하학이고, 곡면이나 휘어진 공간 등의 도형을 탐구하는 것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입니다. 그러한 비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하면 태양의 뒤편에 있는 별이 휘어져서 지구에서 관찰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평면이나 찌그러짐이 없는 공간, 그리고 인간의 눈과 관찰이라는 한 차원(dimension)에 휘어진 공간이나 곡면의 다른 차원이 들어오면 모순인 듯 한 명제가 참으로 둔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뜨게 된다는 것은 자연인들은 볼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삶과 존재,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계시의 paradox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계시란 다름 아닌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하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가 자연과 역사와 성경을 통해 설명 되어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전자를 일반계시라 하고 후자를 특별계시라 부릅니다. 그런데 역사와 자연 속에서 보여 지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는 그야말로 유약하고 재미없고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오죽하면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이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대표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삶이 철저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털어 원수까지도 섬기다 간 그 고단한 삶에 세상은 저주의 채찍과 분노의 장대로 화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삶을 승리라고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그대로 좇아 살라고 요구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러한 삶은 패배의 삶이요, 상실의 삶이요, 바보의 삶일 뿐입니다. 오죽하면 세례 요한까지도 감옥에서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하고 물어보았겠습니까? 메시아가 왔는데 메시아의 앞길을 준비하러 온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사42:7)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그렇게 paradox인 것입니다.
눈을 뜬 성도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paradox를 이해하고 또한 복음의 paradoxical한 요구를 받아들이며 그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인생에 왕이 되어 모든 주권을 행사하던 ‘죄’의 자리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자리였는지를 자각하고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성도는 그렇게 자연인의 상태에서는 보지 못했던 하나님 나라의 paradox를 이해하고 알아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구원을 받는 즉시 전혀 죄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인가요? 우리의 경험상 그게 맞습니까? 사도 바울은 어떠했는지 한번 볼까요?
(롬 7:15-25)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 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 자기 자신은 선을 행하고 싶어 하는데 자꾸 안에서 또 다른 법이 자기를 죄로 이끌고 간답니다. 심지어 사도는 자기가 행하는 악은 자기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죄의 것이라고 발뺌을 합니다. 그만큼 자기가 행하는 악이 견디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3차전도 여행을 마칠 무렵인 AD57년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바울은 거의 그의 사역 말기에 이러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그의 사역 기간 내내 자신의 죄와 끊임없는 싸움을 했으며 때로는 그 죄에게 밀려 자신의 나약함을 이토록 절절하게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새롭게 눈을 뜬 성도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여전히 악을 행하고 자주 죄에 넘어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요?
(롬 8:10-11)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의 몸과 영이 다 살아나게 된다고 하지 않고 몸은 여전히 죽은 것이라 합니다. 그렇게 사도는 10절에서 우리의 몸이 죽어 있다고 현재시제로 말을 한 후 11절에서는 죽을 몸이라고 미래시제로도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죽을 몸이 결국 부활의 몸으로 살아날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눈을 뜨게 된 것은 영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은 여전히 죽은 몸입니다. 그래서 이 몸은 결국 죽어서 사라지고 새로운 몸이 우리의 영에 입혀지게 될 거란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죽은 몸, 혹은 죽을 몸 때문에 여전히 죄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에 대한 욕구와 더러운 죄 성과 악한 행위들이 자각될 때 내가 가장 악한 죄인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혹시 나는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근심도 하게 되는 것이고,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좀 건져 달라고 가슴 아픈 고백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주일 창세기 24장을 강해하면서 여러분이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짓는 것에 대해 너무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육신을 입고 있는 그 날까지, 우리가 이 땅에서 숨을 거두는 그 날까지 죄를 짓고 살 것입니다. 그건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는 것만큼 확실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구원받은 성도들이 죄를 짓도록 놔두실까요? 그 죄 속에서 우리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더욱 공고히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연인 시절에는 죄가 쾌감으로 느껴지는데 새롭게 눈을 뜨고 난 후에는 죄가 사망의 몸, 그러니까 자기가 죽인 시체처럼 더럽고 불쾌하며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여러분, 우리 여기서 ‘죄’의 정의를 다시 한 번 내리고 가야 하겠습니다. 죄가 뭡니까? 죄는 살인, 간음, 도둑질, 사기, 험담, 다툼이라는 여러 증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자체가 죄의 핵심 내용은 아닙니다. 죄의 핵심 내용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기 위하여 하나님과 관계없이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구제나 금식이나 선행이나 윤리적인 삶을 하나님이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관계없는 구제나, 선교나, 선행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뜨기 전에 우리의 입신양명이나 우리의 인기나 우리의 자랑을 위해 남과 경쟁하고 다른 이들을 밟고 고지에 올라섰을 때 얼마나 큰 성취감과 그에 따른 쾌감을 느꼈습니까?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부자 되고, 나만 유명해지고, 나만 인기인이 되면 우리는 그것으로 행복해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지 론을 그토록 경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는 현상 이전에 경향이며 원리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죄가 나의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않고 마치 내가 하나님의 일에 무언가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죄인 것이라며 내가 고지에 올라가 하나님의 일을 돕겠다고 하는 고지론은 그 발상부터가 인간의 죄 성에서 기인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기 전에는 그러한 죄 성속에서 파생되는 시기와 질투와 험담과 권모술수와 거짓과 속임수 등은 내가 만족한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당연한 수단이요 방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삶 속에서 자행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눈을 뜨게 되면 여전히 그러한 삶 속에서 뒹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 참으로 부끄럽고 고통스럽고 불쾌합니다. 마치 옷 한 벌로 일주일간 샤워도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옥수수 밭만 매다가 일주일 만에 시원하게 샤워를 한 뒤 또 다시 그 땀에 전 옷을 입었을 때와 방불합니다. 찝찝합니다. 한 두 달 간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다가 어느 날 밤 곁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있는 남편의 모습에 현혹되어 밤 열 두 시에 라면 두 개에다 계란 두 개 넣어서 다 먹고 밥까지 말아서 먹은 뒤의 그 불쾌감 같은 것, 성도는 이제 나의 배만을 위하는 자신의 이기심에 바탕을 둔 자기의 죄를 대할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 뒤로 얼른 숨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평생을 그렇게 자기 배만을 위해 살다가 더러운 시궁창으로 영원히 던져지게 되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눈과 귀를 열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셨음에 감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까? 우리에게는 이 지긋지긋한 육신의 몸을 벗고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새로운 몸이 주어지는 그 날이 약속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우리는 여전히 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이 죽을 몸의 행실이 폭로될 때 우리 자신에 대해 커다란 실망을 하게 되지만 거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제 이 죽을 몸을 벗은 후 죄와는 전혀 상관없는 완전한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임을 확실하게 믿고 있기에 죽을 몸이 짓는 죄 앞에서 오히려 은혜와 소망을 더욱 공고히 붙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죽을 몸을 새 몸으로 바꾸어 주실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을 오매불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고전 15:50-55)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바로 이 소망입니다. 우리는 종국에 마치 독침을 쏘듯이 달려드는 사망과 죄와 전혀 상관이 없는 새로운 몸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악한 행실 속에서도 점점 더 부활의 소망을 확고히 다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거듭난 이후에 자기에게서 나타나는 자신의 죄를 바라보며 ‘오 거룩한 죄여’라고까지 말을 한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도 신학교 내내 창녀촌을 들락거리는 삶을 살았다지요? 그러나 그의 그러한 경험이 자신의 무력함과 추악함을 더욱 확고히 깨닫게 해 주었고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고 의뢰하는 기도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눈을 갖게 되어 가치관과 세계관이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은 그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에 부합되지 못하고 여전히 옛 가치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불가능함과 나약함, 그리고 죄의 추악함과 집요함이겠지요. 그 때 성도는 자기를 신뢰하고 의지하던 자아 숭배 교에서 점점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 부인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과 나의 계획과 내가 바라는 가치의 추구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깨닫게 되어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맞추어,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죄는 거룩한 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시 계시의 paradox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삶은 죄까지도 거룩하게 선용이 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여러분은 이제 막 살아도 된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확실하다면 앞으로 여러분이 짓는 모든 죄는 정죄의 대상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실수로 살인을 하거나, 너무 배가 고파 도둑질을 하거나, 사기를 친다 해도 그건 하나님 앞에서 카운트가 되지 않습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죄를 많이 지을수록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니까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죄를 짓고 살까요? 죄를 많이 지을수록 자기의 추악함을 더 많이 깨닫게 되고, 죄를 많이 지을수록 부활 소망을 공고히 하게 되는 것이라면 열심히 죄만 짓다가 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성경은 대답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롬 6:1-11)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 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 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 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마지막 11절에 ‘여길지어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는 ‘깨달아 알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바울은 구원을 받은 성도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을 확인하고 깨달아 알아 그 신분에 맞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제 성도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율법 준수의 차원에서 혹은 의무와 책임의 관점에서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자와 공주라는 자신의 신분을 열심히 배우고 확인하여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살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아내는 지금 입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를 입양해서 우리를 양자 삼아주신 우리 주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그 아이에게 퍼 부어주면서 우리 주님의 사랑에 대해 더 많이 경험하고 싶고, 사랑에 빚진 자로서 조금이나마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누기 위함입니다.
사실 그런 마음은 제가 대학시절 섬기던 야학에서 만난 아이들을 보면서부터 품었던 생각이었습니다. 알코올 중독과 도박 중독, 정신지체와 가난 등으로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는 부모님 밑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면서 나중에 결혼을 하면 꼭 그런 불쌍한 아이들을 입양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에 보육원이나 고아원을 자주 찾아다녔었는데 그런 곳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진풍경이 있습니다. 요즘은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부터 20여전 년의 고아원은 시설이 형편없었습니다. 아이들의 머리와 옷에는 이와 벼룩투성이였고 화장실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했습니다. 먹을거리는 말할 수 없이 부실했고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을 바란다는 것은 사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 가끔 아주 부유하고 점잖은 부부가 와서 아이를 입양해 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입양이 되어 가는 아이들 중에 어느 누구도 행복하고 기쁘게 그 곳을 떠나는 아이들이 없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하나같이 새로운 부모님의 멋진 차에 타고도 손을 뻗어 나 그냥 여기에 있게 해달라고 울고불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 아이는 이제 새로운 부모 집으로 가면 좋은 학교에도 갈 수 있고 생일 날 맛있는 케이크와 선물도 받을 수 있고 이와 벼룩 걱정이 없는 좋은 침대와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책상과 자기를 한없이 사랑해 줄 가족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도착하기 전에는 전에 살던 쓰레기 굴 같은 보육원이 익숙한지라 자꾸 거기에 머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아이가 새 부모의 집에서 일 년 정도 생활하고 자신이 예전에 누리던 빈곤함과 더러움에 비교하여 새 부모님 집의 풍성함과 부요함을 다 누려보고 안 뒤에 보육원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기쁘게 돌아갈까요? 절대 안가지요.
혹 새 부모님과 보육원에 방문을 했을 때 그 아이가 전처럼 이가 득실득실한 아이들과 함께 화장실 뒤에 가서 담배나 피우고 부엌에 가서 옥수수나 훔쳐 먹고 그럴까요? 그 아이는 이제 그 아이의 신분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 더 자랑스럽고 행복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옛 사람의 삶을 집요하게 붙들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에 관해 배우고 확인한 만큼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를 한 것입니다.
(엡 1:17-19)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늘의 소망과 그 기업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 분의 능력이 얼마나 큰 지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면 알수록 성도의 삶은 하나님 나라 자녀답게 변화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맛을 보면 볼수록 그 삶의 참 맛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은 영생, 즉 신적 생명의 정의를 이렇게 내린 것입니다.
(요 17:3)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신적생명, 즉 영생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엡 4:15-16)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게 되는 방법이 이러합니다.
(엡 4:13)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이해한 만큼 나의 신분에 대한 자각을 또렷하게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지식과 이해와 자각이 우리의 삶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마 13:23)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잘 보세요. 성도의 삶 속에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씨입니다. 그런데 그 씨가 무엇이지요?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이해와 자각이 우리의 삶을 풍성한 영생의 삶으로 성숙시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면 이러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면 우리의 영은 눈을 떠 살아나게 되는데 우리의 죽을 몸이 여전히 죄의 영향을 받아 우리를 자꾸 옛 사람의 삶 속으로 넘어뜨리려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넘어짐과 실패 속에서 우리의 불가능함과 죄의 집요함과 더러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쏟아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에게 약속된 새 몸을 주시겠다는 부활의 소망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열심히 죄를 지으면서 살아도 되는 것인가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뜨인 눈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와 우리의 신분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올바른 자각과 올바른 이해를 쌓아가면서 점점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토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며 필연적인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불가능함과 추악함과 죄의 더러움과 집요함을 깨닫고 은혜 뒤로 숨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멋지게 토해내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짧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주 길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야 참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 자각에 이르기까지 평생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평생 엉터리로 살다가 가는 그리스도인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도는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그 지점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그 자각만 오롯하게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열매로 맺어져야 하는 여러 가지 행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와 우리의 신분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이해와 자각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나노 기술 연구소의 황지성 박사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이 환경문제에 관심이 있어서 american eagle에 관해 공부를 하셨답니다. 일명 대머리 독수리라고도 하지요. 한 때는 그 대머리 독수리가 미국에 약 200만 마리가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차별적인 살충제의 살포로 벌레들이 죽고 그 죽은 벌레를 물고기가 먹고 그 물고기를 대머리 독수리들이 잡아먹음으로 해서 약 1,000마리 정도로 줄어 거의 멸종 위기에 처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환경단체 등의 꾸준한 노력으로 다시 늘어나고 있다고 하는데요, 그 독수리는 2마일 밖에서 물속에 있는 물고기의 흐름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일단 그렇게 물속의 물고기의 움직임을 감지하면 쏜살같이 내려가 그 물고기를 잡아채서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밤에 시골 길을 가고 있는데 차에 치어 죽은 짐승의 썩은 고기를 그 대머리 독수리들이 여러 마리 붙어서 뜯어 먹고 있더래요. 그 때 그 황지성 박사가 그 독수리들을 보고 외치셨답니다. ‘야, 너희들이 어떤 새인데 저렇게 썩은 고기를 먹고 있어? 너희는 2마일 밖에서 물속에 있는 물고기를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그 물고기를 잡아챌 수 있는 힘이 있는 새야. 그런데 왜 썩은 고기를 먹고 있어. 싱싱한 물고기를 잡아먹어야지’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면서 그런 마음을 갖지 않으실까요? ‘애들아, 너희는 하늘나라의 왕자요 공주야 그런데 왜 창녀처럼 살고 있어. 왜 세상에 빌붙어 거지처럼 살고 있어? 너희는 하늘나라 백성들처럼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어’하고 말씀하실 것 같아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다운 삶을 버겁다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시키는 사감선생의 명령처럼 여기시면 안 됩니다. 제가 우리 아이들을 야단칠 때 자주 쓰는 말이 ‘우리 집은 그리스도인 집안이잖아. 우리는 모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고 너희 아빠는 목사잖니.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막 살면 안 돼’입니다. 형사법을 들이대며 ‘형사법 몇 조 몇 항에 의거하여 너희는 그런 짓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어. 삼강오륜이 이러한데 너희가 어찌 그렇게 살 수 있니?’라고 꾸짖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아빠의 신분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자각이 있을 때 그들의 신분에 대한 재인식을 통한 꾸지람이 가장 효과적 권고가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가 자신의 신분이 어떠한 것인지를 배우고 아는 만큼 우리는 성경의 권고 앞에 진지해 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신분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그러나 반드시 그에 걸 맞는 삶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상속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 8:14-17)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 이니라”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을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자 예수님과 공동상속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새 생명과 새로운 삶과 새로운 터전을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그 상속분은 이미 이 세대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도 있습니다.
(벧후 1:3-4)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여기도 잘 보시면 우리가 우리를 부르신 분을 아는 만큼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분을 지금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만큼이요. 이렇게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할 삶은 율법으로서의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그 분의 상속된 유업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것을 우리가 함께 누리며 즐기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자녀가 남의 것을 훔쳤을 때 혹은 다른 아이와 다투었을 때에 율법을 들이대며 ‘살인하지 말랬잖아, 이웃을 사랑하랬잖아, 왜 법을 안 지켜?’하지 않고 ‘우리 집은 예수 믿는 집이잖아’하고 달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꾸지람이듯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양자된 자로서 하나님의 상속분을 그렇게 책임 없이 경홀히 여긴 후에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수야, 넌 내 아들이잖아, 내가 너에게 상속해 준 게 그런 게 아니잖아’ 그게 바로 신학에서 말하는 theology of adoption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성숙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올바른 지식과 이해에 의해 진행되어 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들어와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성도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알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소원을 두게 하시고(빌 2:13)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롬 8:14)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은 강제로 세뇌시키고 폭력을 동원하여 이끌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에 담긴 강제성은 설득의 강제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것은 쉬운 말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설득하시고 설복시키셔서 우리를 양육하시고 성숙시켜 가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인도하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아고’가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쓰입니다.
(마 7:4)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티를 빼다’에서 ‘빼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아고’입니다. 여러분, 눈 속에 있는 티를 뺄 때 강제로 손을 넣어서 잡아 뺍니까? 살살 달래서 조금 씩 조금씩 빼야지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해 가신다는 말입니다.
(시 32:8-9) “8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 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은 성도를 노새나 말처럼 자갈과 굴레로 이끄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그럴 거면 이 역사와 인생이라는 것을 만드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냥 영원 속에서 강제로 로봇으로 만들어서 하나님 나라에 넣으셨겠지요. 하나님은 우리와 친구가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심에서 우러난 사랑과 순종과 섬김을 받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격에 설득하십니다. 때로는 상황과 환경으로 우리를 설득하십니다. 그리고는 우리 귀에 대고 속삭이시는 것입니다.
(사 30:21) “21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면 우리 인간에게서는 두 가지 국면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 하나가 인식론적 변화이고 두 번째가 존재론적 변화입니다. 인식론적 변화는 구원을 받고 눈을 뜨게 되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삶의 원리에 대한 올바른 자각이 일어나게 되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존재론적 변화는 우리 안에서 좀처럼 감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존재론적 변화란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존재의 변화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존재론적 변화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영적으로는 우리 신분이 존재론 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습니다. 그 존재론적 변화의 궁극적인 완성지점으로 가면서 우리가 이 땅에서 말씀에 대한 지식과 이해와 자각을 통하여 조금씩 그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을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바로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을 점점 부인시키시고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하심으로 정말 우리가 예수와 연합된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씩 경험케 하시는 것이 성령의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은 거의 결사적입니다.
(갈 5:16-17)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소욕이라고 번역이 된 ‘에피뒤메오’는 ‘강하게 소원하여 강한 영향을 투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간섭은 미적미적한 것이 아니라 집요하며 강력한 간섭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목숨을 끊으시면서 까지 건져낸 ‘나’이기에 반드시 성숙시키고 양육시켜 당신의 자녀다운 자로 만들어 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약 4:5) “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여기서 ‘시기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구약에서 잘 쓰이는 ‘질투’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지요? 그 말은 우리를 그처럼 집요하게 사랑하신다는 신인 동형 론 적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토록 우리의 성화를 갈망하시며, 우리의 이름과 우리의 거룩한 부르심에 합당하게 되는 것을 간절히 바라시며, 우리가 참다운 하나님의 자녀들일 수 있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그 사실을 즐거워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우리에게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양육의 목표지점이 어디인지 보세요.
(딛 2:12-14)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게 바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21절을 읽고 오늘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갈 2:19-21)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옛 사람인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육체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 육체는 내가 하나님 없이 살기 위해 내 안에 쌓아놓은 온갖 종류의 습관과 중독과 관념과 논리와 인격 등을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나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습니다.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우리는 이미 옛 사람을 장사지냈습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확고한 소망을 담은 예변적 과거의 표현이지 가시적이며 역사적으로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는 2,000년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이루어 내신, 전 역사를 아우르는 그 구원을 오늘에 가시적으로 완성시켜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다고도 하고 죽을 것이라고도 하며 죽어가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며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도 하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도 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already 와 not yet의 tension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가시적이고 물리적으로 우리에게 오지는 않았지만 이미 이 세대에 뚫고 들어와 버린 오는 세대를 성령의 보증으로 조금씩 맛을 보며 그 삶을 누리고 즐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이해와 자각을 하며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고 그 신분에 맞는 삶을 하루하루 경주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실패할 것입니다. 그런 ‘나’가 실망스럽고 때로는 저주스럽기도 할 것입니다. 그 때는 그러한 ‘나’를 인정하세요. 그리고 거기에 비해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가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깨달으시면 됩니다. 그렇게 자기가 부인되고 비워지면 그 안에 있는 예수의 삶이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나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열심히 하나님의 아들다운 삶을 살아내십시다. 그렇게 가다보면 언젠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아름다운 순종의 삶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수많은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처럼 마치 침을 뱉어 눈에 이겨 붙인 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그 순종의 길을 가라고 해도 ‘주님 왜 내 눈에 침을 뱉으세요.’라는 원망의 외침이 아닌 ‘주님이 가라시면 어디라도 가겠습니다.’라는 순종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목표는 예수를 이용한 성공과 번영의 삶을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already, not yet의 tension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잘 지어져 가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전력을 기울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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