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온 세상에 전파된 로마 교회의 믿음(17) /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9. 9.

 

 

온 세상에 전파된 로마 교회의 믿음(17)

 

(김성수 목사)

 

 

(롬 1:8) “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 됨이로다”

 

 

도가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노자의 말 중에 도가도 비가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道), 즉 진리는 그 자체로 포착이 되지 않으며, 상(象)이라는 징조나 낌새로 알 수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노자는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신의 도(道)관을 설명합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진리를 드러내는 징조와 낌새라는 것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러합니다.

 

동양의학 중에는 장상학(藏象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체에 나타나는 병리적, 생리적 현상을 관찰을 하여 각 장부의 생리적 기능과 병리적 변화, 그리고 장부 간의 상호 관계를 짚어내는 학문입니다. 동양학을 공부하다보면 가끔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헬레니즘 문명 속에서 정리되고 집약된 서양문명에 너무 익숙하다보니 동양학을 그저 막연한 관념 정도로만 치부하곤 하는데, 모든 동양학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자연과의 교감의 관점에서 동양학을 연구하다보면 동양학은 실증학문의 경지를 넘어서는 대단한 면모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장상학에서 장(藏)은 인간 몸 내부에 실재하는 장기를 말하고 상(象)은 밖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상학은 ‘실존하는 실재는 반드시 상을 맺게 되어 있다’는 원리에 의해 보이지 않는 인체 내의 장부의 기능과 상태를 망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에게는 어떤 기쁜 일이 있으면 그 기쁨을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얼굴에 기쁨의 상(象)이 나타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기쁜 일이 생기면 기쁜 일을 주관하는 심장이 그 기쁜 일로 인하여 열을 내게 되는데 이렇게 심장에 열이 오르면 그로 인하여 맥박이 빨라지고, 그렇게 됨으로써 심장의 열기가 위로 올라가서 얼굴에 화색이 돌게 됩니다. 이런 낌새와 징조를 가리켜 동양학에서는 상(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슬픈 일은 폐에서 열이 올라오고 화가 나는 일은 간에서 화기가 올라옵니다. 그렇게 실체가 존재하는데 그 실체가 감추어져 있을 때 우리는 그 실체로부터 말미암는 가시적 낌새인 상(象)에 의해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노자가 말하는 징조와 낌새로서의 상(象)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그러한 원리가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들은 이 땅에 상(象)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감히 인간이 추측하거나 상상할 수조차 없는 하늘의 것들과 그 모든 것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이 땅에 모형이나 징조나 낌새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을 선물 받은 자에 한해서만 그러한 모형과 징조, 낌새 속에서 실체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상(象)으로 나타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는 성전이나 이스라엘, 성도의 몸 등의 역사 속의 수많은 실물예시의 모형들에서 상(象)으로 보여 졌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은 그러한 실물예시의 모형들 속에서 그것들이 가리키고 있는 실체를 보게 됩니다. 주님은 그렇게 나타나는 하늘의 상(象)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을 어리석은 자, 외식하는 자라 부릅니다.

 

(눅 12:54-56) “5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 하니라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보세요. 분명 하늘은 역사 속의 ‘시대’에게 계속 어떤 말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그것을 분변치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모스서에는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는지 볼까요?

 

(암 3:4-7) “4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5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 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땅에서 뛰겠느냐 6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역시 하나님은 역사 속의 시대에게 계속 말씀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기록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종들에게 보이지 않고는 절대로 행하지 않으신다고 하지요? 그런데 ‘나’라는 존재와 이 육적 세상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그 하늘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에 나오는, 철길을 걸으면서도 기차의 굉음을 듣지 못해 기차에 치여 죽은 농아 소년처럼 멀리서 실제로 달려오고 있는 죽음의 열차 소리, 말씀으로 오신 예수라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자기의 일상에만 매여 있는 것이 사망으로 향하는, 어리석은 이 세상의 아담 군상들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하늘의 것, 하늘의 복음을 상(象)으로 살아내는 하나님의 소리들인 것입니다. 하늘 백성들의 묵시 속 현실을 이 세상 속에서 상(象)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 속에서 어떠한 상(象)이 맺혀져야 할까요? 구제? 선행? 종교행위? 그러한 것은 전부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성도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하늘의 상(象)은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나’는 죽고 하나님에게 나의 모든 것을 의존하여 그 분의 이끄심에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나’라는 주체가 부정되고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의존이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니까요. 그게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이잖아요. 그게 이 세상 속에서 성도의 삶 속에 상으로 맺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죄 냄새만 풍기다가 사라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는 것을 들어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서 눈에 보이는 어떠한 상(象)이 맺혀졌다는 뜻이지요? 그렇지 않고 그들의 믿음이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온 세상을 향하여 전파 될 수가 없는 거잖아요? 분명 로마 교회에는 가시적인 어떤 상이 맺혀졌습니다. 그게 무엇일까? 그리고 그 상은 어떻게 맺혀지게 된 것일까? 우선 온 세상으로 전파되는 그러한 로마의 믿음을 보며 사도가 ‘내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그건 온 세상으로 전파되었던 로마의 믿음이 하나님의 작품이었음을 사도가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 세상으로 전파가 된 로마 교회의 믿음은 절대로 로마교회의 자랑이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사도는 지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고 그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장악당한 로마 교회가 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주도되는 교회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믿음의 향기가 어떠한 상(象)으로 맺혀지게 되는지 복음서의 한 대목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으로 가면 교회에 맺혀져야 할 상(象)에 대한 예수님의 강화가 나옵니다. 그 중 한 부분을 떼어서 그 강화 전체와 연결을 시켜 보면,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상(象)으로 맺으라고 하시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 18:15-20)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제가 지난 며칠 동안 교회에 나타나야 할 상(象)에 대해 연구를 하기 위해 교회에 관한 예수님의 강화를 계속 반복해서 읽어내려 가면서 발견한 것이 이 마태복음 18장 15절 이하의 이야기가 ‘용서’라는 대 주제, 그 중에서도 주님의 용서라는 대주제로 흘러가는 큰 강의 일부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 16장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이야기에서부터 계속 이어지는 십자가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그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마 16:19)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그러니까 교회는 예수님만이 그리스도, 즉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고 믿는 자들이며 그들은 천국과 연결이 되어 천국의 현실을 이 땅에 보여주며 사는 자들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게 천국의 열쇠를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 즉 교회는 자신의 존재와 삶으로 하나님 나라의 열쇠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상(象)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저런 것이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저렇게 살게 되는 것이구나’를 삶으로 보여주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말씀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늘과 연결이 된 땅의 존재들이 생겨났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마태복음 18장에서도 똑같은 어절이 등장하지요?

 

(마 18:18)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베드로와 그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교회 안의 죄에 대한 대응을 말씀하시는 곳에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주님과 베드로와의 대화와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18장 15절 이후의 교회 안의 죄의 문제와는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을 뿐 아니라 동일한 문맥 속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에 의해 교회가 세워지는 이야기와 가시적 지역 교회에서 나타나는 상(象)으로서의 모양이 정확히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사역, 즉 십자가의 공로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늘과 연합이 되어 하늘의 뜻을 땅에 상(象)으로 내리 꽂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해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선물을 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아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게 되겠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베드로의 이야기부터 쭉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16장의 베드로와 교회의 이야기 바로 다음에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교회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이 되는 은혜 공동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마 16:21)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이렇게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으로 거저 발생한 은혜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님을 말리지요? 자신의 육적 욕망을 채워줄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자기가 원하는 모양으로 서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자 예수님께서 교회의 올바른 상(象)으로서의 삶을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마 16:24)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 이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고 은혜로 완료가 되는 은혜 공동체이므로 교회의 자기주장이나 자기 확인, 자아실현의 욕망은 부정되고 부인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존재가 부정되고 타자에게 전적인 의존을 하게 될 때 그것을 역사적 관점에서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사유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다른 표현인 것이고, 언약과 언약 성취의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하나님 쪽의 언어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전체 주어가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 모세를 애굽에서 떠나게 했고, 믿음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으며, 믿음이 사라를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을 낳는 자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끌려가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들의 삶을 믿음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현실 순응의 모습이 로마 교회에 상(象)으로 나타났다는 것이고 그 상(象)이 온 세상으로 전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상상할 수도 없는 핍박 속에 처해있었습니다. 로마서 8장으로 가면 당시 로마교회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롬 8:17-18, 35-37)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 이니라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교회는 이렇게 고난 중에 있었고 말도 못하는 핍박 속에서 도살할 양처럼 여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넉넉히 이기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왜요? 그들은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존재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자기의 문제를 해결 받고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여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입신양명하는 그러한 종교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띠에 묶여 자기가 원치 않는 길로 끌려가며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현실을 상(象)으로 맺는 공동체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들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상을 맺게 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들이 하늘의 상(象)으로 로마 교회에 나타나고 있었고 그 상(象)이 온 세계로 알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그걸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뭐 대단한 업적을 이루고 대단한 선행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들을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믿음이 로마교회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에 ‘너희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끌려가는 자들이 맞구나’하고 그 가시적 상(象)의 모습을 칭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는 하나님께 하고요. 하나님의 작품이며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격발이니까요. 그건 자기 부인의 교리와 십자가의 교리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로마교회에게 십자가와 자기부인의 도를 올바로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을 근거로 자기부인의 과정을 통과하게 만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범인들은 절대로 통과하지 못할 그 길을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장악이 된 로마교회 교인들이 살아내더란 것입니다.

 

다시 마태복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꾸짖는 베드로에게 십자가와 자기부인의 도에 대해 말씀을 하신 후 저으기 실망했을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는 십자가 이후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것으로 패배가 아니요, 절망이 아니며, 끝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하늘의 존재로 변화하셔서 그들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셨을까요? 앞으로 그들에게 닥치게 될 하늘의 상(象)을 맺는 삶이 십자가와 자기 부인으로 고통스럽게 그들에게 닥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이 천국의 현실을 기억하고 견뎌내라는 의도에서 그들에게 하늘의 현실을 잠깐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변화산 아래에서는 또 다시 제자들의 능력 자랑의 잔치가 질펀하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믿음이라는 것이 자신들에게 능력으로 사유가 되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허락도 없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친다고 수선들을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그들을 나무라시지요?

 

(막 9:19) “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주님은 그렇게 믿음이 자신들에게 능력으로 사유될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믿음 없는 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를 고쳐주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전에는 우리가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고 했는데 왜 지금은 안 되는 겁니까?’ 그들에게 예수님이 대답을 하십니다.

 

(마 17:20)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에게는 겨자씨만큼의 믿음도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건 믿음이 아예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 말은 믿음이라는 것이 인간들에게 사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겨자씨 같은 믿음이 있는 자들은 산을 명하여 옮길 수도 있고 못할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여기에 쓰인 어구 ‘호스 코콘 시나퓨스’는 겨자씨 같이 생긴 믿음이라는 뜻으로 쓰인 어구입니다. 겨자씨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그렇게 겨자씨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도의 믿음은 능력으로 나타나거나 눈에 보이는 힘으로 측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자기가 겨자씨처럼 부인이 되고 하나님의 일하심만이 드러나는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진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일하심이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난 아니요, 주님이 하십니다’라는 자기부인의 현실 속에서(겨자씨)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역사가 믿음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한 겨자씨의 믿음을 갖게 된 자는 율법의 산, 시온산이 바다로 던져진 구원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게 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겨자씨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은 산을 들어 바다로 던질 수 있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일을 예수님의 십자가 가 성취해 내셨으니까요.

 

그러니까 교회는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당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도구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자신의 능력을 자랑할 수도 없고 자신의 영광을 추구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 변화산 아래의 믿음 없음의 이야기를 하다가 또 다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상기시킵니다.

 

(마 17:22-23)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 하더라”

 

보세요. 교회는 이렇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완성이 되는 자기 부인의 은혜공동체인 것입니다. 그 내용을 좀 더 강화하기 위해 그 문맥은 성전 세 문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마 17:24-27) “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왜 성경이 갑자기 성전 세 문제로 화제를 돌리는지 궁금하지 않으셨어요?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성전 세란 생명의 속전으로 드려지던 돈을 말합니다.

 

(출 30:15-16) “15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16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

 

그런데 그 생명의 속전은 부자라고 더 내서도 안 되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서도 안 됩니다. 모두 동일하게 반 세겔씩을 내야 합니다. 그건 생명의 속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무조건적인 은혜 성을 설명하기 위한 설정이었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큰 자든 작은 자든, 다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동일한 속전에 의해 영생을 얻게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 속전은 인간의 배경이나 조건 등을 고려하여 차등 있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영생’이라는 선물을 주기 위해 무조건적으로 퍼부어 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그 반 세겔로 오신 생명의 속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십니다.

 

그리고는 물고기를 한 마리 잡아서 그 입 속에 들어 있는 한 세겔로 당신 몫과 베드로의 몫을 계산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분명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돈 궤 맡은 자가 있었고 그 안에 한 세겔 정도의 돈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물고기를 잡아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세겔을 꺼내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생명의 속전은 인간들의 노력이나 공로가 개입되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격이나 됨됨이를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달랑 예수님 것과 베드로 것만 챙기십니다. 그때 그러한 교회의 은혜 성에 대해 잘 모르는 다른 제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시기와 질투가 샘솟겠지요? 그래서 성경이 그 성전 세의 이야기를 바로 제자들의 누가 크냐의 싸움으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마 18:1)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보세요. 성경은 계속해서 교회의 자기 부인과 하나님 나라의 은혜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속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존재의 가치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모습으로 폭로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천국에 어떻게 해야 들어갈 수 있습니까?’도 아니고 ‘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큰 사람입니까?’를 묻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선민이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천국은 당연히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 앞에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십니다. 거기에서의 어린 아이 ‘파이니온’은 ‘유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누가 큰가를 겨누고 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마 18:3-5)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어린아이는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도 어린아이들은 자신들이 낮은 자리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즉 어른은 큰 자고 어린 자신들은 낮은 자라는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어른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지켜줄 대상일 뿐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사회 구조가 만들어 놓은 큰 자와 작은 자의 구분 속에서 큰 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어른들을 보면서 ‘누가 더 큰가’라는 경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은 누군가에게 철저하게 의존되어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아는 게 어린 아이입니다. 그게 자기 부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하나님 절대의존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면 들어갈 수 있다는 방법론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자들로 만들어 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5절에 나오는 ‘누구든지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 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그렇게 세상이 정립해 놓은 높은 자리, 낮은 자리의 구분이 없이 자신의 어린 아이 됨을 인정하는 자만이 아무런 부담 없이 어린 아이를 영접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자가 바로 은혜를 받은 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자각하지 못하고 어떻게 예수를 영접합니까?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나’의 영생을 그분께 전적으로 맡긴다는 의미인데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제자들의 그러한 높고 낮음의 사고방식은 천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러한 약한 자들을 그야말로 ‘약한 자’로 취급을 하며 그들에게 모멸감을 주고 괴리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주님은 그걸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누가 큰 자냐의 싸움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그렇게 큰 자, 작은 자를 구분해 놓고 큰 자의 자리만을 추구하는 자들이 바로 소자를 실족케 하는 자라고 일갈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소자를 실족케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걸어 깊은 바다에 던져 넣어도 시원치 않은 놈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바로 죄의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자기 자아 챙기기, 자기 육신 챙기기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중심으로 사는 모든 인간들은 적어도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로 던져질 벌은 확보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다른 사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니에요? 큰 것을 추구하고 큰 자됨을 사모하며 성공과 번영을 꿈꾸잖아요? 우리는 의도적으로라도 자꾸 그런 것으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큰 것에로의 추구가 연자 맷돌을 목에다 차곡차곡 거는 일이 되는 거거든요. 주님은 그러한 제자들에게 인간 육신의 허망함과 가치 없음을 주지시켜 주십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하다면 그까짓 육신들은 잘라버리고 뽑아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 18:8-10)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그렇지요? 육신을 잘라버리고라도 천국에 들어오라는 것은 천국에서는 그러한 인간의 육신적 욕망이나 야망이 전혀 필요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라버리고 오라고 하시지요. 그런데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자기 육신의 안위를 위해 자기 인생을 올인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하늘과 하늘의 것을 나타내는 상(象)일 뿐임을 아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소자처럼 보여도, 아무리 작은 자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이 땅에서 하늘의 상(象)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니까 절대로 눈에 보이는 모습을 근거로, 세상이 정립해 놓은 큰 자, 작은 자의 구별 공식으로 그들을 실족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육체와 육체에 걸친 세상 힘의 옷으로 사람들을 판단 하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은혜 공동체라면서요. 너나 할 것 없이 물고기 입속의 반 세겔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그 사람의 배경이나 조건이나 행위 등을 가지고 등급을 매깁니까? 그게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뵙는다는 말씀 속에 담긴 내용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천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수종들도록 창조된 존재라고 하지요?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아 보이는 사람도 그가 천사가 수종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늘 왕의 아들들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짜 가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돈으로 환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선택이 되고 세워진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므로 큰 자, 작은 자의 싸움이나, 자기 공로 챙기기나, 자기 확인 등의 헛된 시도나 추구를 멈추라는 것입니다. 물론 원리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그것이 성취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그렇게 지향되어져 간다는 말인 것입니다. 지향성의 이야기요, 방향성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성도라면 적어도, 예수라는 생명의 속전이 없었으면 이 세상이 규정해 놓은 큰 자, 작은 자의 구조와 공식 속에서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지옥의 불구덩이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죽은 흙에 불과한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문맥에 이어지는 내용이 18장 15절 이하의 내용입니다.

 

(마 18:15-20)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지금 이 이야기는 연자 맷돌을 목에 걸어 바다에 던져도 시원치 않을, 소자를 실족케 하는 죄에 대한 일갈에 이어지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소자를 소자로 몰아붙여서 큰 자, 작은 자의 구조 속에서 절망케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 다른 이들의 죄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시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이라는 단서를 다시지요? 그러니까 교회에 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죄가 있다는 말이지요? 여기에서의 죄는 단순히 사건화 되어 밖으로 튀어 나온 특정한 몇 가지의 범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 중에 죄가 아닌 것이 있나요? 우리의 육신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다 죄입니다. 다만 우리 안에서 우리를 살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될 때 그것만이 선입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확인했잖아요? ‘나’라는 우상의 안위와 번영과 영광을 위해 다른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이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로 던져질 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이 맞는 말이지요. 우린 다 ‘나’만을 위해 사니까요.

 

그렇게 성도는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도 여전히 육적 자아의 약한 모습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음자리가 어떤 자리였는가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하고 인정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 위에 덮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이불이 얼마나 따뜻하고 아름답고 안전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처음자리를 수시로 폭로해 버리십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어떤 이들에게서 약한 모습이나 부족한 모습이 보여 지게 될 때 성도의 구원의 현실의 은혜 성을 올바로 인식하고 있는 자들이 그들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세상 적 관점에서의 소자로 평가하겠습니까? 내가 바로 죄인 중의 괴수인데 누가 누구를 가리켜 소자라고 합니까?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구원을 얻었는가를 상기하며 그러한 약한 자들을 은혜의 복음 안에서 권고 하겠지요? 그런데 인간의 죄 성이라는 것이 누가 자기의 약점이나 죄를 지적하면 금방 수긍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들킨 것에 대한 난감함이나 그것을 지적하는 상대에 대한 분노로 응전을 합니다. 그때 두 세 사람의 증인을 데리고 다시 죄를 지적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교제 속에서의 성도의 본무는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지적하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는 회중의 죄를 어줍지 않게 감추어 주거나 가려주는 것이 아니라 낱낱이 폭로시켜 버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두 세 사람이 증참하여 죄를 지적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거기에서 항복하나요? 아니요. 더 기분 나빠 합니다. 자기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느냐고 더 방방 뛰지요. 그렇게 계속해서 죄를 지적하다가 나중에는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십니다. 그건 교회에서 쫓아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치리의 부분을 설명하면서 기독교인의 성화를 강조하기 위해 그것을 출교라고 설명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건 제가 성화를 강조하기 위해 다소 오버를 한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자신의 죄인 됨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이들을 교회에서 다 쫓아낸다면 여기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방인과 세리는 출교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예수님의 긍휼의 대상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어울리셨고 그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못마땅해 하는 유대인들에게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치 않는 이들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말씀을 하신 것은, 인간은 육의 몸을 입고 있는 한 절대로 자신의 육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회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 더 초점을 두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성령의 간섭하심이 없이 절대로 자신의 신 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때 그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예수님의 긍휼을 입어야만 살아날 수 있는 가련한 자로 여겨주라는 말인 것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나 자신이 그런 자라는 것을 우리는 아니까요. 우리는 그러한 우리 안의 마귀 성을 매 순간 폭로 당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필연성을 차근차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가능한 나 자신의 모습 속에서, 그리고 내 주변의 교회 지체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올바로 자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깊이를 조금씩 알아가게 될 때 우리 안에서 열심히 일을 하시는 은혜의 왕 노릇이 우리 자신을 조금씩 포기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진짜 용납과 용서와 섬김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두 세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어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면 발생하는 것이 비교와 우위 쟁탈이라는 죄입니다. 그게 ‘나’라는 우상의 ‘하나님처럼’의 추구잖아요? 그게 죄의 본질입니다. 그 위에 성령의 은혜가 임하면 그 두 세 사람은 그 관계 속에서 튀어 나오는 죄의 정체를 올바로 인식을 할 수 있게 되고 그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그 죄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왜요? 이미 십자가 안에서 모든 용서가 다 이루어 졌거든요.

 

그래서 바로 그 이야기 다음에 베드로의 ‘용서’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다 들은 베드로가 주님에게 갑자기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몇 번이나 용서를 해 주어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보세요. 베드로는 계속해서 주님의 말을 못 알아먹는 자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로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치도 않고 수긍하지도 않는 자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데 베드로는 ‘내가 몇 번 용서해 주면 하나님 마음에 드는 용서를 한 게 되는 겁니까?’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하는 자기부인의 자리로 가는 자이지 ‘내가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라는 건방진 교만의 질문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의 실체를 올바로 알지 못하고 마치 자신이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자리에 앉아있는 자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건 무한의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걸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나요? 지금 주님이 그걸 열심히 연습해서 성취해 내라고 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인간의 죄의 추악함과 집요함을 들추어내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일흔 번씩 일곱 번, 그러니까 무한의 용서가 필요한 죄 덩어리라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누구를 용서합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가 죄지은 자를 무한대로 용서하여 덮어주는 것이라면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을 용서하지 않으셨지요? 왜 지옥이라는 것을 만드셨습니까? 왜 말 안 듣던 이스라엘 1 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용서는 공의를 전제로 한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누군가 자격 있는 이가 다 받아내야 성취가 되는 용서입니다. 그러한 용서를 할 수 있는 분은 일단 누군가의 죄에 대해 분노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창조주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할 수 있는 자는 어떤 자격 있는 자에게 그 진노를 다 퍼부을 수 있는 권세와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용서를 누가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용서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어이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바로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임을 아는 자들만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빚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난 은혜 받은 죽은 흙’이라는 자기 실존의 올바른 인식 속에서 타자들의 위해 행위의 무게가 가벼운 것으로 느껴지게 될 때 그것을 인간 세상의 ‘용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자신이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성령 안에서 폭로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신의 실존이 올바로 자각이 될 때 ‘내가 진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구나’하는 자각이 되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지금의 돈으로 따지면 수조원이 넘는 돈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돈을 탕감 받은 자가 고작 백만 원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감옥에 넣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지요? 그 수조원이 내 손에 들어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짜로 수조원이 내 손에 현찰로 주어졌다면 그까짓 백만 원은 코푸는 휴지로도 여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조원은 그냥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손에 만져지지 않는 빚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백만 원은 받아내기만 하면 내 손에 만져질 수 있는 거잖아요? 그건 우리의 죄가 우리에게 관념으로만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죄의 속전으로 치러진 예수의 십자가의 가치를 백 데나리온보다 더 무가치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 즉 소자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어 안을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탕감 받은 죄의 속전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삶 속에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삶 속에서 ‘나는 예수님의 용서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한 존재가 맞구나, 내가 죄인 중의 괴수구나’라는 자기 부인의 자각이 나오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자기부인의 자각 속에서 자신의 현실이 하늘의 상(象)을 맺는 삶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로마 교회에 믿음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혹독한 시련을 잘 견디며 살아 있었습니다. 마치 도살할 양처럼 여김을 받으면서도 예수의 십자가만을 붙들고 살아있었습니다. 자기들은 예수가 없었으면 영원한 지옥에서 죽은 흙으로 살았어야 했다는 자기 실존의 올바른 자각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고난의 삶이 그냥 살아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서 그러한 모습이 나오고 있나요? 저는 지금 성화의 문제를 들먹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 우리의 힘으로 성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절대 변화나 성숙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늘 용서를 받아야 할 시은좌 밑의 십계명 돌 판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성도의 삶은 반드시 흔적이 남게 되어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라는 실체를 붙잡아 그 바람을 증명하거나 제시할 수는 없지만 바람의 흔적이 나뭇잎이 흔들리고 강물이 출렁이는 상(象)으로 남게 되는 것처럼 성령의 바람이 성도의 인생에 불어오면 성령이 맺으시는, 은혜의 왕 노릇이 주관하시는 자기 부인의 흔적이 성도에게서 격발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이 도에 지나게 헌금을 하면서도 즐거움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사도들이 감옥에서 죽도록 고생을 하고 나오면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에게서는 그런 흔적이 보여 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이끄시던 푸른 초장으로 이끄시던 그 속에서 나에게 쏟아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할 수 있으십니까? 그래서 다른 이들이 우리의 그러한 믿음을 보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일이 생겨나고 있나요? 만일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여전히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속에 녹아 있는 하나님의 그 엄청난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열심히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예수의 십자가만이 가르쳐져야 하고 그 십자가만이 대화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 우리의 육적 자아가 조금씩 부인이 되어져 가게 되고, 바로 그때 우리 위에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믿음이 온 세상으로 전파되고 그러한 하나님의 믿음 아래에서 하나님에게 끌려가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