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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농담으로 여겼더라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9. 9.

 

 

농담으로 여겼더라

 

(김성수 목사)

 

 

(창 19:1-23) “1 저녁때에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다. 롯이 소돔 성 어귀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서 맞으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하였다. 2 "두 분께서는 가시는 길을 멈추시고, 이 종의 집으로 오셔서, 발을 씻고, 하룻밤 머무르시기 바랍니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길에서 하룻밤을 묵을 생각입니다." 3 그러나 롯이 간절히 권하므로, 마침내 그들이 롯을 따라서 집으로 들어갔다. 롯이 그들에게, 누룩 넣지 않은 빵을 구워서 상을 차려 주니, 그들은 롯이 차려 준 것을 먹었다. 4 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돔 성 각 마을에서,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쌌다. 5 그들은 롯에게 소리쳤다. "오늘 밤에 당신의 집에 온 그 남자들이 어디에 있소?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리고 나오시오.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 하겠소." 6 롯은 그 남자들을 만나려고 바깥으로 나가서는, 뒤로 문을 걸어 잠그고, 7 그들을 타일렀다. "여보게들, 제발 이러지 말게. 이건 악한 짓일세. 8 이것 보게, 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이 있네. 그 아이들을 자네들에게 줄 터이니, 그 아이들을 자네들 좋을 대로 하게. 그러나 이 남자들은 나의 집에 보호받으러 온 손님들이니까,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게." 9 그러자 소돔의 남자들이 롯에게 비켜서라고 소리를 지르고 나서 "이 사람이, 자기도 나그네살이를 하는 주제에, 우리에게 재판관 행세를 하려고 하는구나. 어디, 그들보다 당신이 먼저 혼 좀 나 보시오" 하면서, 롯에게 달려들어 밀치고, 대문을 부수려고 하였다. 10 안에 있는 두 사람이, 손을 내밀어 롯을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에, 문을 닫아걸고, 11 그 집 대문 앞에 모여든 남자들을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두 쳐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대문을 찾지 못하게 하였다. 12 ○그 두 사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식구들이 여기에 더 있습니까? 사위들이나, 아들들이나, 딸들이나, 딸린 가족들이 이 성 안에 더 있습니까? 그들을 다 성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십시오. 13 우리는 지금 이 곳을 멸하려고 합니다. 이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규탄하는 크나큰 울부짖음이 주님 앞에 이르렀으므로, 주님께서 소돔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14 롯이 나가서, 자기 딸들과 약혼한 사윗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롯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서두르게. 이 성을 빠져 나가야 하네. 주님께서 이 성을 곧 멸하실 걸세." 그러나 그의 사윗감들은 그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15 ○동틀 무렵에 천사들이 롯을 재촉하여 말하였다. "서두르시오. 여기에 있는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여기를 떠나시오. 꾸물거리고 있다가는, 이 성이 벌을 받을 때에, 함께 죽고 말 것이오." 16 그런데도 롯이 꾸물거리자, 그 두 사람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끌어서, 성 바깥으로 안전하게 대피시켰다. 주님께서 롯의 가족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이다. 17 그 두 사람이 롯의 가족을 성 바깥으로 이끌어내자마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롯의 가족에게 말하였다. "어서 피하여 목숨을 건지시오. 뒤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저 산으로 도피하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고 말 것이오." 18 이때에 롯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다른 길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19 두 분께서는 이 종을 좋게 보시고, 저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푸셔서, 저의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저 산까지 도피해 가다가는 이 재난을 피하지 못하고, 죽게 될까 두렵습니다. 20 보십시오, 저기 작은 성이 하나 있습니다. 저 성이면 가까워서 피할 만합니다. 그러니, 그리로 피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주 작은 성이 아닙니까? 거기로 가면, 제 목숨이 안전할 것입니다." 21 그 사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좋소. 내가 그 청을 들어주겠소. 저 성은 멸하지 않겠소. 22 당신네가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터이니, 빨리 그리로 가시오." 롯이 그 성을 '작다'고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 성의 이름을 소알이라고 하였다. 23 ○롯이 소알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떠올라서 땅을 비췄다.”

 

 

우리가 오늘 함께 살펴볼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는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잘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영화로도 수차례 제작이 되었고 소설책이나 동화로도 출간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내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읽고 보고 들으면서도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올바로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롯의 사위들처럼 이 소돔과 고모라의 경고의 메시지를 가벼운 농담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19장 본문의 구체적인 내용 분석에 앞서 이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이 담고 있는 메시지에 대한 개괄(槪括)적인 설명을 하고 다음 주부터 구체적인 내용 분석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은 자기 자신들만을 사랑하느라 절대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삶을 살 수없는 죄인들의 특징과 그들의 말로(末路)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했는지 볼까요?

 

(창 19:4‐5) “4 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돔 성 각 마을에서,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쌌다. 5 그들은 롯에게 소리쳤다. "오늘 밤에 당신의 집에 온 그 남자들이 어디에 있소?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리고 나오시오.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 하겠소."

 

아브라함이 달려 나와 나그네를 맞이하여 종의 모습으로 그 나그네들을 섬긴 것과 아주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한쪽은 자기에게 아무런 보상을 해 줄 수없는 나그네를 지극 정성으로 섬기는 반면 다른 한쪽은 자기들의 유익과 쾌락을 위해 나그네를 이용하고 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아주 극명한 대조입니다. 할례 받은 자들, 즉 성도의 대표로 등장하는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그네를 섬기는 삶을 보여주고, 성도 이외의 모든 죄인들을 대표하는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 남을 해칩니다. 성경이 창세기 18장과 19장의 대조를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을 교훈하려 하는지 금방 아실 수 있으시겠지요? 그렇게 나그네를 대접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들을 위해 나그네를 해하고 이용하려는 자들의 모습이 그려진 창세기 19장은 그 모습 그대로 사사기로 이어집니다.

 

(삿 19:22~24) “22 ○그들이 한참 즐겁게 쉬고 있을 때에, 그 성읍의 불량한 사내들이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싸고, 문을 두드리며, 집 주인인 노인에게 소리질렀다. "노인의 집에 들어온 그 남자를 끌어내시오. 우리가 그 사람하고 관계를 좀 해야겠소." 23 ○그러자 주인 노인이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보시오, 젊은이들, 제발 이러지 마시오. 이 사람은 우리 집에 온 손님이니, 그에게 악한 일을 하지 마시오. 제발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마시오. 24 여기 처녀인 내 딸과 그 사람의 첩을 내가 끌어내다 줄 터이니, 그들을 데리고 가서 당신들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이 남자에게만은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마시오."

 

오늘 본문의 내용과 똑같은 단어들이 등장하지요? 이 이야기는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어떤 레위인이 첩을 두었는데 그 첩이 행음을 하고 친정으로 도망 가버려서 레위인이 첩의 친정으로 찾아가 자기 첩과 함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었던 레위인이 첩을 둔 것에서부터 그 첩이 행음을 한 것, 그리고 그 레위인을 상관하고자 했던 기브아의 베냐민 지파 사람들, 그러한 모습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제사장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만연한 이스라엘 전체의 총체적 타락입니다. 성경은 오늘 창세기 본문의 이방 땅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을 그대로 사사기로 옮겨 그 죄악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안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면 여전히 소돔과 고모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소돔과 고모라에서 아브라함이라는 중보자의 기도에 의해 롯이라는 사람이 살아나는 것처럼 이스라엘이고 이방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유황불 못에 떨어져 죽어야 하는 절대 절명의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보자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 바로 성도의 구속 사건임을 이러한 성경의 점진적 해설 기법에 의해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돔과 고모라는 성경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경고하는 모델로 등장합니다.

 

(신 29:21-26) “21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가운데서 구별하여, 이 율법책의 언약에 나타나 있는 온갖 저주대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입니다. 22 ○당신들의 뒤를 이어 태어나는 자손과 먼 나라에서 온 외국 사람들이, 주님께서 이 땅에 내리신 재앙과 질병을 보고, 23 또 온 땅이 유황불에 타며, 소금이 되어 아무것도 뿌리지 못하고 나지도 않으며, 아무 풀도 자라지 않아서, 주님께서 맹렬한 분노로 멸망시키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과 같이 된 것을 보면서, 물을 것입니다. 24 모든 민족이 묻기를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이런 참혹한 일을 하셨을까? 이토록 심한 분노를 일으키신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할 것입니다. 25 그러면 사람들이 대답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그들의 조상을 인도하여 내실 때에, 주 조상의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버리고, 26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주님께서 허락하시지도 아니한 신들을 따라가서, 섬기고 절하였다.”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한 말씀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너희가 들어가는 땅에서 그들과 섞이고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너희가 섬기면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될 것’이라고 경고를 하는 장면입니다. 심판이지요.

 

(사 13:19) “19 나라들 가운데서 가장 찬란한 바빌론, 바빌로니아 사람의 영예요 자랑거리인 바빌론은,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실 때에,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될 것이다.”

 

(렘 50:40) “40 ○소돔과 고모라가 그 이웃 성읍들과 함께 멸망하였을 때와 같이, 바빌론 도성에도 다시는 정착하여 사는 사람이 없을 것이며, 그 곳에 머무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악한 세력을 대표하는 대명사, 바벨론의 멸망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역시 심판입니다.

 

(마 10:14-15)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려라. 1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는 견디기가 쉬울 것이다."

 

주님께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의 멸망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견주어 경고하십니다.

 

(유 1:7)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유다도 소돔과 고모라를 가리켜 영원한 불의 형벌에 대한 거울이라 표현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 사도는 소돔과 고모라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벧후 2:6) “6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두 성을 잿더미로 만들어 [멸망시키셔서,] 후세에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 본보기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소돔과 고모라를 경건치 아니한 자들에게 보이신 ‘본’이라 표현을 합니다. 여기서 ‘본’이라고 번역이 된 ‘휘포데이그마’는 ‘견본, 모델’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견본이 있다는 것은 실체가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오늘 공부하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견주어 설명이 되고 있는 바벨론이나 에돔, 이스라엘의 멸망은 어떤 실체를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경고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를 통하여 이제 다시는 세상을 물로서 심판 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셨지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통해 이제는 물 정도가 아닌 완전히 끝장이 나는 불의 심판이 도래할 것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후서 3장으로 가면 그렇게 불에 의해 심판을 받아 영원한 멸망으로 처해질 자들이 어떠한 자들인지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벧후 3:3-10) “3 여러분이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욕망대로 살면서, 여러분을 조롱하여 4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어디 갔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 때부터 그러하였듯이 그냥 그대로다." 5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오랜 옛날부터 있었고,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말미암아 형성되었다는 것과, 6 또 물로 그 때 세계가 홍수에 잠겨 망하여 버렸다는 사실을, 그들이 일부러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7 그러나 지금 있는 하늘과 땅도 불사르기 위하여 그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고 있으며,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할 날까지 유지됩니다. 8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9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베드로는 말세에 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고 여전히 정욕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며 농담처럼 여길 것이라 합니다. 물, 불, 기롱, 심판 등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등장하는 단어들이 똑같이 나옵니다. 창세기의 물과 불의 심판의 이야기를 한 문단으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보면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고 여전히 소돔 성의 정욕을 좇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 19:14,16,26) “4 롯이 나가서, 자기 딸들과 약혼한 사윗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롯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서두르게. 이 성을 빠져 나가야 하네. 주님께서 이 성을 곧 멸하실 걸세." 그러나 그의 사윗감들은 그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16 그런데도 롯이 꾸물거리자, 그 두 사람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끌어서, 성 바깥으로 안전하게 대피시켰다. 주님께서 롯의 가족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이다. 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처럼 여기던 사위들은 모두 소돔과 함께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리고 롯의 아내 또한 소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히 여겨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처럼 여기고 지체하던 롯은 살아났습니다. 어떻게 해서 살아나게 되었습니까?

 

(창 19:16) “16 그런데도 롯이 꾸물거리자, 그 두 사람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끌어서, 성 바깥으로 안전하게 대피시켰다. 주님께서 롯의 가족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이다.”

 

롯은 하나님의 인자, 즉 사랑하심에 의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인자는 중보자의 희생과 기도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창 19:29) “29 ○하나님은, 들에 있는 성들을 멸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롯이 살던 그 성들을 재앙으로 뒤엎으실 때에, 롯을 그 재앙에서 건져 주신 것이다.”

 

그렇게 불타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함께 멸망당해야 했던 롯이 아브라함이라는 중보자의 기도로 하나님의 인자를 입어 살아난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역시 소돔과 고모라에서 죄인들과 함께 뒹굴고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하나님의 인자를 입어 건져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이 경고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롱하는 자들처럼 농담으로 여기며 살고 있습니까? 베드로는 그의 서신 서에서 그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그 사실이 농담처럼 여겨지지 않고 정말 믿어지는 사람들은 이렇게 산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벧후 3:11‐14) “11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12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농담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에서 나타나기를 힘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라면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를 읽는 오늘날의 성도들은 베드로 후서 3장 11절에서 14절까지의 교훈까지 그 내용을 연결시켜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이제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이 헌 하늘과 헌 땅이 물러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이라는 성경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멸망할 바벨론에서 나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으라는 성경의 경고를 비웃기라도 하듯 세상은 여전히 자신들의 힘과 지혜를 이용하여 견고한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쌓고 있는 바벨탑과 너희가 두르고 있는 바벨성은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 유황불에 살라질 것이니 어서 어서 거기서 나오라(계18:4)’고 외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하나님의 외침을 농담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를 믿노라 자처하는 이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농담처럼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 왕왕 있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너져 버릴 도성에서 빨리 빠져 나오라는 하나님의 외침을 들었을 때 그 곳에서 벗어나려는 애씀의 모습이 당연히 나타나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땅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며 자기의 생명 또한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세상의 정욕을 좇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조롱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게 어찌 성도의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현 세대와 오는 세대가 오버랩 되어 있는 아주 신비한 시기입니다. 오는 세대가 현 세대 안에 뚫고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현 세대에 들어와 있는 오는 세대를 분별하여 인식할 수 있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보이지 않는 오는 세대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현 세대에서 오는 세대를 인식하여 살며 이 썩어질 현 세대가 완전히 심판의 불에 의해 물러가고 오는 세대만이 오롯이 드러나게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의 눈을 뜨게 되어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생각하는 다른 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요일 3:3) “3 그에게 이런 소망을 두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정말 소망을 가진 이들은 이 땅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 의해 완전히 멸해 질 것을 알기 때문에 이 땅의 힘을 쌓는 허황된 삶에서 돌이켜 자신을 깨끗이 하는 삶에 전력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에 타버릴 것이라고 하니까 마치 이 세상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은 불성실하게 해도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입니다. 그건 헬라의 이원론 적 사고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천국을 공간적 이원론에 입각하여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분명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들어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몸으로 이 땅에서 40일을 지내신 것과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변화된 천국의 몸으로 보여 진 것은 이 땅에 이미 천국이 들어와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분명 지금 세상과 연속성으로 연결이 되는 곳이며 불연속성으로 단절이 되는 곳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모든 문명과 문화는 다 악한 것이므로 모두 불타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이 땅에서의 삶을 불성실하게 막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단절과 연결,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단어는 서로 조화할 수 없는 관계인 듯싶지만 그 천국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잘 이해할 때에 우리는 이 땅에서 성도로서의 삶을 잘 살아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서 시작하여 당도했던 베드로 후서 3장 10절의 말씀을 잘 풀어보면 우리는 그 모순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벧후 3:10,14)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14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10절을 보시면 그 날에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드러나리로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휴레떼세타이’는 ‘모두 불 타 없어진다.’는 의미보다는 ‘불순물이 제거되고 온전한 새 것으로 나타나다’라는 의미로 해석을 해야 문맥에 맞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날에는 이 우주와 자연이 전부 사라져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불순물이 제거된 온전하고 아름다운 상태로 회복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신학은 종말을 소멸(消滅) 아닌 ‘갱신(更新)’으로 보는 것입니다. 똑같은 단어가 누가복음 15장에 쓰였습니다.

 

(눅 15:24)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여기서 ‘얻었노라’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이 새롭게 나타났을 때 사용되는 단어가 ‘휴레떼세타이’입니다. 그 10절의‘드러나다’라는 단어와 베드로 후서 3장 14절의 ‘나타나기를 힘쓰라’는 단어의 절묘한 대조를 보세요. 마지막 날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왜곡되고 망가진 모습을 벗고 온전하게 ‘드러나’ 회복이 될 것이므로 너희들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나타나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에 못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나 부활의 몸으로 음식을 드신 것,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던 것 등은 지금의 육신과 부활의 몸은 연속성으로 연결이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둘은, 동시에 여러 곳에 나타나고 벽을 뚫고 들어오는 등의 불연속성에 의해 단절된 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10절에 나오는 ‘그 날에는 하늘이 떠나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거기서 하늘이라고 번역이 된 ‘우라노스’는 ‘천국,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떠나가다’라고 번역이 된 ‘파렐코마이’는 ‘가까이 오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번역을 하면 ‘그 날에는 천국이 가까이 온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뒤의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다.’는 어구에서 ‘체질, 스토이케이아’는 희랍의 스토아 철학에 나오는 세상을 구성하는 원 물질을 가리키는 단어로 ‘땅과 공기와 물과 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네 물질 가운데 하나인 불이 나와서 그 것들을 불사른다는 말은 좀 어색하지 않습니까? 성경에서는 이 ‘스토이케이아’라는 단어가 율법을 가리키는 ‘초등 학문’이라는 말에 쓰이고(히5:12, 골2:8, 갈4:3) 정세와 권세 등의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대적하고 인간을 죄에 빠트리는 부정적인 하늘의 영들을 가리킬 때 주로 씁니다.(마24:29)

 

그러니까 체질이 불에 풀어진다는 말은 마지막 날에 율법과 악한 영들이 불타버린다는 뜻이 되겠지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대적하고 인간을 죄에 빠트리는 부정적인 모든 것들이 다 제거되고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나오는 영어 성경에는 그 ‘체질’이라는 단어 ‘스토이케이아’가 ‘heavenly body’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반 창조적인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악한 영들이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 10절에서의 불은 상징적 불입니다. 말라기에 보면 그 의미가 명확하게 나옵니다.

 

(말 3:2‐3) “2 그러나 그가 이르는 날에,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살아 남겠느냐? 그는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과 같을 것이며, 표백하는 잿물과 같을 것이다. 3 그는,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정련공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금속 정련공이 은과 금을 정련하듯이, 그가 그들을 깨끗하게 하면, 그 레위 자손이 나 주에게 올바른 제물을 드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태워 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것들을 모두 불태워 버리시고 완전한 새 것으로 다시 지으실 것이라는 의미보다는 타락한 인간의 탐욕과 허세로 왜곡이 된 첫 창조의 불순물들이 모두 제거가 되고 애초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런 세상으로 회복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새 하늘 과 새 땅에 쓰인 형용사 ‘카이노스’는 처음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완전한 새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원래 상태에서 어긋나 있는 것을 원래대로 바로 잡는 것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우주와 자연은 어긋남과 왜곡에서 온전함으로 회복이 되는 것이지 불타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은 자연이 있고 문화가 있고 통치자(하나님)가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 재림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재림 ‘파루지아’는 ‘나타나다’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지금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성령)으로 존재하시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게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재림 때와 지금이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 때처럼 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연속성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우주와 자연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깃들어 있습니다.(롬1:20) 그런데 그것을 파괴해 버린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라는 속성에 흠이 가겠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물을 본래의 목적대로 회복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온전한 회복의 모습은 죄로 인해 타락되고 왜곡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자연과 우주와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것이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다르면 요한이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고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고 표현을 했겠습니까? 요한은 지중해와 사해, 갈리리 바다 등 바다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지도 못할 환경에서 나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눈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얼마나 다른지 거기는 ‘바다도 없더라.’는 말로 그 곳을 묘사한 것입니다. 물론 그 어구에는 많은 중요한 신학적 담론이 있지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요한계시록 강해 때 다 설명해 드렸으니 그 것을 참조하세요.

 

그렇게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의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온전하고 아름다운 곳이지만 이 땅과 전혀 무관한 그런 곳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명기한 것입니다.(롬8:19‐23) 그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회복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을 보호하고 잘 보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노력으로 자연을 원래대로 회복시켜내자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에 부르심을 받은 동역자들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자리에서 해 내자는 말인 것입니다. 제가 자주 ‘여러분 이 세상은 곧 불 타버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와 그 힘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님을 대항하는 세상의 더러운 것들은 이제 곧 사라질 것이므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로 이 땅을 살아가자는 권고이지 절대 이 세상과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과 역할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이라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육신은 사라지고 새 육신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이 육신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새롭게 회복될 ‘나’속에는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에게는 이미 그 영혼이 새롭게 회복이 되어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옛 사람이 그 새로운 영혼의 새로운 삶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새로운 영혼이 새로운 나라의 삶을 잘 살아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옛사람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회복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렇게 회복되어져 가야 하는 것이기에 ‘에이, 언젠가는 불 타버릴 몸인데 대충 살다 가면 되겠지’가 안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이 이 땅에서 누리고 있는 문화, 예술, 여러 가지 직업 등도 모두 퇴폐적이고 버려야 할 더러운 악의 산물이라고만 여기시면 안 됩니다. 그게 영지주의이며 플라톤의 이원론에 입각한 헬라철학의 부산물인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딤전4:4)고 했습니다. 과학, 의학, 음악, 미술 모두 우리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아름다운 음악, 아름다운 미술 이런 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이 이 세상에 가시적으로 조금 드러나고 힌트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사용하시면 참 좋은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결코 악이 토해 내놓은 더러운 것들이 아닌 것입니다. 단지 인간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그런 것들을 악용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면 그 모든 것들이 온전한 아름다움으로 회복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의 자녀다움 속에서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회복시키는 삶을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시는 일은 단지 여러분의 생계를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천국에서도 직업을 가지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될 것입니다. 자연이 있고 문화가 있는 곳이니까요.

 

그러나 그 곳에서의 직업은 인간들이 합의해 놓은 귀천(貴賤)의 구분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직업이 다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을 섬기는 직업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직업이 될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다 그 직업 속에서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바로 그 천국을 훈련하고 연습하는 것입니다. 나의 가족, 나의 직업, 내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바로 그 천국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최선을 다해 이 땅을 살아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하십시오. 직장인들은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을 하세요. 단 여러분의 욕심과 여러분의 입신양명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과 내 이웃을 섬기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내셔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의 모든 더러운 것들과 추악함과 비뚤어진 것들이 다 불타버리고 새 것만 남게 될 날이 올 것을 굳게 믿고 그 마지막 날에 더러운 것들과 함께 불타 없어지는 불행한 자가 아닌 새로운 것으로 회복이 되는 복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오늘 살아 내십시다.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나그네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악한 세상이 곧 멸망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는 절대 농담이 아닙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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