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사랑
(김성수 목사)
(엡 3:17-19)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인 “사랑”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하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내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우리를 그렇게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겨주시고 그렇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신자들이 도달해야할 목표지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우리 신자들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도달해야 할 유일한 목표지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놓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간이 타락을 하고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 왜곡되고 상실된 사랑을 우리 삶 속에 회복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자의 삶은 반드시 그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그 사랑 가운데서 터가 굳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계명을 두 가지로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주 너의 하나님을 네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 우리가 도달해야할 목표지점은 바로 거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인간론을 정리해 드리면서 우리 인간은 기능적인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했지만 아직 구조적인 형상은 남아 있다고 설명해 드렸지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그 사랑으로 우상과 나의 배를 사랑하는데 써 버리는 죄인들의 예를 들어서 설명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여전히 구조적인 면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은 “사랑”의 이야기를 보거나 듣게 되면 가슴이 아려오고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동스러운 다큐멘터리나 불쌍한 이들을 보면 함께 울기도 하고 함께 기뻐하기도 합니다. 왜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우리가 그렇게 울고 웃습니까? 모든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붙들고 있는 이 죄라는 놈이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을 하지 못하게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 사랑을 왜곡시켜서 엉터리 이기적인 “자기사랑”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왜곡된 자기사랑“을 하기 위해서 이웃과 하나님을 희생시키는 악한 행동을 서슴없이 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짐승들은 사냥을 할 때 자기가 먹을 만큼만 사냥해서 먹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힘에 부쳐 끌고 갈 수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잡습니다. 잡아서 버리는 한이 있어도 다 죽입니다.
짐승들은 자기에게 먹이를 주는 주인은 절대 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은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의 등에 비수를 꽃을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자기를 모욕하거나 자기와 다른 사람들은 죽어서 시체가 되어 있어도 무덤에서 끌어내서 토막토막 잘라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성경책에 손을 얹고 영원히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하며 살겠노라고 다짐하고 다짐하고서도 자기 성질을 건드렸다고 토막을 쳐서 묻어 버릴 수 있는 것이 타락한, 사랑을 잃어버린, 아니 왜곡된 자기 사랑을 하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 때 신문의 헤드라인이 “부부 싸움은 칼로 몸 베기”였지요. 그렇게 사랑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 사랑을 회복시켜 영원한 하늘에서 데리고 사시고자 하신 일들이 바로 구원이며,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지 못한다면 그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 유명한, “사랑 장“이라 불리는 고린도 전서 13장을 가지고 그 사랑의 본질에 대해 조금 더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서를 잘 읽어보신 분들은 이 사랑 장이라고 하는 고린도 전서 13장이 조금 어색하게 끼어 있는 것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12장까지 은사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다가 갑자기 사랑 장 13장이 나옵니다. 그리고 14장부터 다시 그 은사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마치 13장은 삽입 장처럼 12장과 14장 사이에 끼어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인 즉은, 고린도 교회는 지금부터 2,000년 전에 그리스 지방에 있던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종교적인 열심이 대단했던 교회였습니다. 열심이 대단했던 만큼 교회 안에 많은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은사가 잘못 쓰이고 있었습니다. 눈에 띄는 은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했고 자기들은 이미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처럼 일상생활은 도덕적으로 아주 문란한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만연해 있던 그 은사에 대한 자랑과 시기와 질투를 이야기 하다가 12장을 이렇게 마칩니다.
(고전 12:27-31)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러니까 은사에 대해서 죽 설명을 하고서 그 은사들이 왜 너희들에게 주어진 것인지 그리고 그 은사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13장에서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그 은사를 가지고 너희의 신앙을 자랑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데 쓰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그렇게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은사들은 너희들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고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이게 고린도 전서 13장입니다. 지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종교행위에 안주하고 있습니까? 나는 기도한다. 나는 헌금한다. 나는 주일 성수한다. 이런 것들이 마치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종교행위들은 전부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훈련과 학습의 방편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지 그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지요? 아무쪼록 오늘 우리가 고린도전서 13장을 공부하면서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을 좀 모두 벗고 진짜 사랑을 배우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1절에서 3절까지 사랑의 절대성에 대해 설명을 하고 4절부터 7절까지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8절부터 마지막까지는 다시 사랑의 영원성을 들어서 사랑의 절대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끝을 맺습니다. 먼저 1절에서 3절까지를 한번 보지요.
(고전 13: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1절을 보시면 아무리 훌륭한 눈에 띄는 은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같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헬라의 신비종교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자연의 신 디오니수스라는 신과 야생 동물의 여신인 키벨레라는 신을 섬기는 축제가 있었습니다. 그 때 치던 것이 바로 찰로코스라는 소리 나는 구리 우리나라 악기로 치면 징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킴발로스라는 꽹과리였습니다. 이러한 악기들은 사람들의 감정을 흥분시키는 역할을 했던 악기들이었습니다. 단음으로 계속해서 리듬을 치면 사람들이 흥분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마취제 없이 사람을 치료할 때 그런 방법을 쓴다고 하지요?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징과 꽹과리를 계속해서 치는 것도 그런 의도에서 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왜 이러한 이방 종교에서 쓰는 악기들을 여기에다 기록을 하고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사랑이 없는, 사랑을 근거로 하지 않은 여러 가지 은사는 그게 아무리 대단한 은사라 하더라도 그건 무당 짓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이 일부러 소리 나는 징, 울리는 꽹과리라는 단어를 가져다 쓴 것입니다. 그리고 2절을 보시면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언’ ‘프롭헤테리아’라는 것은 설교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잘 풀어서 그럴듯하게 설교를 하고 놀라운 성경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nothing이라는 것이지요.
"nothing"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제가 많이 떨렸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을 했습니다. “과연 나는 사랑으로 이 목회를 하고 있는가?” “나는 사랑으로 설교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nothing이라니까요. 얼마나 두려워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아무리 대단한 은사를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nothing이라는데 여러분 사랑하고 계십니까? 우리 오늘만큼은 그냥 흘려 지나지 말고 정말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자고요. 그리고 3절을 보시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털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 자기 몸을 제물로 드려서 다 불태운다 할지라도 그게 사랑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면 nothing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혀 카운트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정의하고 있는 사랑이 뭡니까? 내가 가진 것으로 불쌍한 사람을 돕고 남을 위해 이 한 몸 불태우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진짜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자기의 자랑을 위해서 연극으로도 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7,80년대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정말 자기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질렀습니다. 거기서 얻어진 결과가 무엇이지요? 오히려 더 큰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것은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는 전혀 무익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엄청난 은사들을 가지고 있고 놀라운 성경지식을 가지고 있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있고, 자기 것을 다 털어 남을 위해 쓰는 구제 행위도 하고, 다른 이를 위해 자기 몸을 불태우는 것. 이게 뭡니까? 우리가 말하는 소위 “좋은 신앙“ 아닙니까?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그런 것은 다 가짜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거워지지요? 그래서 로마서에서 바울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기술을 합니다.
(롬 12:9)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여기서 “거짓이 없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뉴포 크리토스”입니다. 그것은 그리스 시대의 연극배우들이 쓰던 탈이었습니다. 사랑은 연극배우들이 하는 연극처럼 위선적이고 이중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사랑은 언제든지 그런 가면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단호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Love must be sincere 이 sincere라는 단어는 라틴어 ‘시네세라’는 ‘밀 납, 초’라는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고대시대 때는 항아리나 도자기가 귀했기 때문에 항아리나 도자기가 깨지면 아까워서 ‘밀 납’으로 때워서 팔았다고 합니다. 많은 항아리와 도자기가 그렇게 ‘밀 납’으로 봉해진 것들이었기 때문에 고급 토기에는 “밀 납을 바르지 않았음 ‘시네세라’라는 도장을 찍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깨진 항아리인데도 안 깨진 항아리인 것처럼 위선적으로 속이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너무나 허구가 많습니다.
그래서 존 캘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제로 사랑 아닌 것을 흉내 내는 것이 얼마나 교묘한지 그 정도를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속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이고 있다. 그들은 배반을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자신을 속이고 있으면서도 참 된 사람을 베푼다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자들이다. 정확하지요? 그래서 제가 칼빈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의도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으면서 거짓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맛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어설프게 흉내를 내는 것들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이런 사랑을 정말 할 수 있으십니까?
여러분, 제가 지난 시간에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선택이며 책임이라는 면을 많이 강조를 했지요? 그렇지만 그 사랑의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그 사랑을 근거로 자신의 사랑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나타내려는 것이 될 때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요, 소리 나는 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대상을 선택을 하고 지속적으로 사랑을 쏟아 붓기 전에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맛 보셔야 합니다. 그게 전제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랑은 전부 가짜입니다. 전부 자기 자랑일 뿐입니다. 왜곡된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계속해서 4절로 넘어가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라, 사랑하라 하는데 도대체 그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 정확하게 알고 돌아가자고요.
(고전 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가 이 구절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한 군데 더 찾아보겠습니다.
(요일 4:16)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정확한 정의를 내려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니까요. 그러면 지금 읽은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에 하나님 혹은 예수님을 넣어서 읽어도 되는 것이지요? 우리 그렇게 한번 읽어볼까요?
“4 예수님은 오래 참고 예수님은 온유하며 예수님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5 예수님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예수님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예수님은 성내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예수님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예수님은 모든 것을 참으며 예수님은 모든 것을 믿으며 예수님은 모든 것을 바라며 예수님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어떠세요? 정확하게 예수님의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지금 그 사랑의 자리에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 자기 이름을 넣어서 한번 읽어볼까요?
“4 00은 오래 참고 00 은 온유하며 00 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00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00 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5 00 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00 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00 은 성내지 아니하며 00 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00 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00 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00 은 모든 것을 참으며 00 은 모든 것을 믿으며 00 은 모든 것을 바라며 00 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어떠세요? 굉장히 어색하지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그리로 부르신다고요. 우리는 반드시 그 자리로 가야하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사랑이신 우리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랑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잘 배우시고 저나 여러분이나 그렇게 살기를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4절부터 보지요.
(고전 13:4)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오래 참고“ 여기서 오래 참는다는 말은 ”마크로뒤메이“입니다. 이 말은 어떤 상황에 대한 ”오래 참음”이라기보다는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 즉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어려움을 견디는 것을 뜻합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손해를 당했을 때 그것을 보복할 힘이 있으면서도 자제하는 적극적인 인내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 오래 참음, 인내를 가르치는 대목이 있지요?
(딤후 4:2)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오래 참아라.“ ”네가 말씀을 전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봉변을 당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고, 배반을 당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인간관계에 노출이 될 텐데, 그 때마다 너는 오래 참아라.” 네, 사랑은 그렇게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이좋은 사람 사이에서는 오래 참음이라는 것이 필요가 없지요?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대적하고 나를 미워하는 그런 사람을 오래 참아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바로 붙어있는 단어가 “온유하며”입니다. 여기서 온유하다는 말“크레스 튜오마이”는 good 과 kind를 더해 놓은 단어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으로 남을 이롭게 하는 친절함과 선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단순히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고 인내하면서 그 미운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 자기의 가진 것으로 그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베푸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불가능 한 일인 것 같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래 참아 주지 않으셨다면 이 중에 누가 온전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래 참아 주십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아니 그 전, 선사시대 때부터 이 우주가 창조 된 날부터 우리를 향해 오래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벌레 같은 인간들을 오래 참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즘 제가 가장 감사하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 대해서 참 오래 참아주고 계시다는 것을 피부로 느낍니다.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롬 2:4)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벧후 3:8-9)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까지 이 더러운 역사를 오래 오래 참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 더러운 인생을 오래 참고,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래 참고, 온유하며“의 의미입니다. 그 오래 참고 온유하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긍휼“”엘레오“라고 표현할 수 있지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자들에게 은혜를 부으셔서 그 벌을 내리시지 않는 것을 긍휼이라 한다고 했지요? 바로 그 오래 참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그 하나님의 음성에 냉담했습니까? 얼마나 그 분을 멸시했습니까? 얼마나 우리가 그 분을 조롱하고 우습게 여겼습니까?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피조물들을 한 순간에 다 없애고 없던 걸로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그 모욕과 능멸을 참으시는 것입니다. 참으실 뿐 아니라, 단순히 용서하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각양 좋은 것을 계속해서 공급하고 계십니다. 그게 오래 참음입니다. 우리에게 동일하게 그 오래 참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도저히 불가능 할 것 같지요? 여러분, 우리 인간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아시겠지요? 원래 우리는 그런 사랑을 하도록 지어진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죄라는 놈이 얼마나 지독한지 이제는 그 사랑이 너무 버거워서 우리 머리로는 가히 상상이 안 가는 그런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사랑을 쏟아 부으셨고 우리를 다시 그 참 사랑의 자리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엡 4:32)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딤전 1:6) “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But for that very reason I was shown mercy so that in me, the worst of sinners, Christ Jesus might display his unlimited patience as an example for those who would believe on him and receive eternal life.
보세요.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셨으니까 너희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관포지교라는 말 아시지요? 아주 훌륭한 우정을 가리켜서 우리가 관포지교라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사기에 나오는 말인데 중국 제나라 때 “관중과 포숙아“라는 두 재상의 이야기입니다. 관중은 어려서부터 포숙아와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관중은 늘 포숙아를 이용하고 놀려먹기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포숙아는 늘 참아 주고 인내하며 관중을 아껴 주었습니다. 한번은 관중과 포숙아가 둘이 동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포숙아가 자금을 대고 관중이 경영을 맡아 사업을 잘 일구었습니다. 그런데 관중이 그 이익금의 거의 대부분을 독차지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포숙아는 ”관중이 원래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자라서 그런 것“이라고 오히려 주위 사람들 앞에서 관중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둘이 함께 전쟁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관중은 포숙아를 내버려두고 세 번이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을 갔습니다. 포숙아는 역시 관중의 편을 들어 “그에게 늙으신 어머님이 계셔서 어머니가 보고 싶어 도망했던 것이라”고 대신 변명을 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황제가 죽었을 때 왕자가 두 명 있었는데 관중과 포숙아는 각기 다른 왕자를 모시고 그 왕자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었습니다. 관중이 멀리서 포숙아가 모시는 왕자를 향해 활을 쏘았습니다. 그 왕자는 포숙아의 말을 듣고 급히 죽은 체 했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황궁에 들어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황제는 자기에게 활을 쏜 관중을 당장 잡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포숙아가 그 황제 앞을 가로막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황제 폐하가 싫어서 활을 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모시고 있는 왕자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해 황제 폐하에게 활을 쏜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그의 충성심이 대단하고 그의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니 그를 재상에 앉히라고 황제에게 간곡히 간하여 관중이 제 나라의 재상이 됩니다. 이렇게 포숙아는 평생 관중을 참아 주고 그에게 자기의 좋은 것을 쏟아 부어 그 친구를 섬겼습니다. 나중에 관중이 이런 시를 씁니다. ‘생아자 부모, 지아자 포숙아’ ‘자기를 낳아주신 것은 부모이지만 자기를 알아준 것은 포숙아 뿐이다‘ 그렇게 자격 없는 상대방을 오래 참아주고 온유로 대해 주면 그 상대방이 그 사랑에 녹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포지교라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에게는 “스탠튼”이라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링컨을 얼마나 싫어하고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공식 석상에서 링컨에게 “교활하고 조잡한 어릿광대”라고 수시로 모욕을 했고 “세상에서 제일 못 생긴 고릴라”라고 모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릴라를 잡으려면 아프리카로 가지 말고 일리노이로 가라”고 링컨을 조롱했습니다. 링컨은 정말 못 생긴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말을 타고 가는데 어떤 여인이 링컨의 얼굴을 보고 너무 놀라서 링컨에게 막 따졌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링컨이 “부인, 내 얼굴이 이렇게 생긴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부모님이 나를 그렇게 낳아 주신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여인이 “당신이 그렇게 생긴 것은 부모의 책임이라지만 그 얼굴을 갖고 돌아다닌 것은 당신의 책임이다”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가 수염을 기른 것입니다. 정말 못 생긴 사람에게 못 생겼다고 공격을 하면 그건 치명타입니다. 자기의 감추고 싶은 부분을 자꾸 들춰내는 자가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런데 링컨이 대통령이 되자 그 “스탠튼”을 국방 장관에 임명을 합니다. 국방 장관에는 그가 가장 적임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링컨이 워신턴의 포드 극장에서 남부 출신 배우인 부스에게 저격당해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때 스탠튼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여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누워있다” 끊임없는 사랑과 인내는 이렇게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자들을 그렇게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그 분 앞에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뭡니까?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여기서 투기라는 것은 ”젤로이”입니다. “시기, 질투“ 이런 뜻이죠. 우리 타락한 인간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천성 적으로 배 아파하는 자들입니다. 오죽하면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다 있겠습니까? 그것은 시기, 질투가 그만큼 타락한 인간의 보편 적이며 일반 적인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못 견뎌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곤란한 지경에 빠지면 은근히 그 것을 즐깁니다. 그게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여러분, 신문에 가끔 특종이라는 것이 올라옵니다. 그 특종 중에 우리 이웃의 잘된 일, 착한 일, 선한 일 이런 것이 올라오는 것 보셨어요? 아니요. 사람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던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던가,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던가 하면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을 갖고 흥미를 가집니다. 그게 타락한 인간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여러 군데 다녔기 때문에 신학교 동기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이미 개척을 한 사람들도 있고 아직 다른 교회 부 목사로 사역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작년에 우리 교회가 개척되었을 때 다들 와서 축하를 해 주고 갔지요. 그런데 우리 교회에 개척 교회치고는 사람들이 좀 늘어났다는 소문이 도니까 얼마나 들 배 아파하는지 몰라요. 아주 눈에 보여요. 목사들도 그렇다니까요. 여러분, 왜 사람들이 시기를 하고 질투를 하지요? “내가 저 상대방보다 더 잘되고 더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 주님의 사랑에 충만히 거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 되던 못 되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목과 평가에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나는 이미 목이 충분히 해갈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목이 마르지 않거든요. 내가 누구를 시기한다는 것은 아직 내게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의식이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노래할 때, 한번 유명한 사람이 되어 봐야겠다고 꿈을 야무지게 먹고 있을 때, 저한테 돈 내고 노래를 배웠던 아이들이 하나 둘 씩 스타가 될 때마다 배가 아파서 못 참겠더라고요. 김민종, 박효신, 서문탁 이런 아이들이 음반을 수십만 장씩 팔고 가요 톱 텐 1위를 하고 그럴 때 겉으로는 축하를 해 줬지만 그 쓰린 배를 달래느라 밤마다 소주잔을 기울이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상하게 기독교 방송에서 제가 진행하던 방송이 제가 진행할 때는 그렇게 인기가 없다가 이현우, 윤도현, 유리 상자 이런 아이들이 진행을 맡으면서 뜨기 시작합니다. 너무 배가 아프지요. 지금은 누가 스타가 되던, 누가 얼마를 벌던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저 녀석 저렇게 어린 나이에 돈을 너무 쉽게 많이 벌어서 어디 예수 믿겠나? 이런 생각만 듭니다.
내게 어떤 다른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만한 것이 충분히 있으면 그 사람은 절대 남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습니까? 가인이 아벨을 왜 죽였습니까? 시기심 때문에 죽여 버린 것입니다. 시기 질투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시기 질투는 애교가 아닙니다. 어떤 질투심 많은 여자가 하나님도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도 질투한다. 그랬다는데 -그건 “열심“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우리 신자들은 그 불공평성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은 정말 불공평합니다. 누가 가난하고 싶어서 가난하게 태어납니까? 누가 예쁘게 나고 싶지 않아서 예쁘지 않게 납니까? 다들 잘 나고 싶고 다들 예쁘고 잘생기고 키 크고 싶습니다. 다리 길고 싶습니다. 네, 우리가 날 때부터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우리 신자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그 불공평한 것을 불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숙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불공평함 속에서 평안을, 안식을 얻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불공평하게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 불공평함 속에서의 안식과 평안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공평함을 자기의 힘으로 공평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들 나섭니다. 그것을 것을 만용이라고 합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한국에서 막강한 정치 집단이 하나 생겼더라고요. “뉴 라이트 전국연합” 그게 얼마나 영향력 있는 정치 집단인지, 박근혜, 이명박, 손학규 같은 쟁쟁한 정치인들이 그 창립 집회에 다 나타나서 축사를 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신 우익 운동이지요.
2007년 대선 때 좌파 성향을 가진 정당의 재집권을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것이 바로 “뉴 라이트 전국 연합”입니다. 그 창립대회에서 그 뉴라이트 전국연합 의장이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사상, 도산 안창호의 진실정신, 백범 김구의 국가를 위한 헌신, 유일한의 투명한 자본주의, 장준하의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열린 민족주의를 받들어 이들 정신에 담긴 동양적 도덕성과 열린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보완해 가겠다.“ 라고 그 ”뉴 라이트 전국 연합“의 상임대표가 수천 명의 지지자들이 모인 창립총회에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섬기는 목회자입니다. 다산 정약용, 도산 안창호, 백범 김구를 본받아야 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 분 아닙니까? 그리고 그렇게 가르쳐야 하는 분 아닙니까? 그런데 누구를 본받아 무엇을 이루자는 것입니까? 이제 그 분은 누구도 가벼이 볼 수 없는 명실상부한 막강한 정치 세력의 대장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그렇게 불공평함을 공평하게 만들어 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 불공평함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으로 자족하는 훈련을 하고 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가진 자들의 행복과 안녕을 시기하여 못 가진 자의 편에서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행복과 복지와 안녕을 보면서 축하해 주고 자기 일 마냥 기뻐해 주는 것,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그냥 자기의 자리에서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 시기하지 않는 사랑을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합니다. 자기가 하지 못한 것, 내 아이들 대에서라도 이루어 보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소질도 없는 아이에게 음악, 미술, 무용 다 가르칩니다. 땡 빛을 내서라도 과외 시킵니다. 왜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 나지 못해서 겪었던 한을 자식을 대리자로 내세워 풀어보려는 시도입니다. 그런 부모를 갖고 있는 아이들은 정말 불쌍한 아이들입니다. 아이 때부터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나야 한다고 하는 그러한 시기와 질투를 훈련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뭡니까? “사랑은 자랑하지 않으며” 여기서 쓰인 단어가 “페르페 류에타이”입니다. “고무풍선처럼 부풀리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왜 자랑을 하지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과장을 해서라도 자기를 포장합니다. 특히 우리 이민 사회를 보면 그런 자랑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잘 나가지 못했던 사람 거의 못 봤습니다. 그리고 웬 서울대 졸업생이 그렇게 많아요? 인정받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로렌스 크렙이라는 신학자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자기 동생이 사고로 죽어서 그 동생의 장례식에서 설교를 하는데 자기는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그래 크랩 잘했어,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많이 감동할거야” 동생의 장례식에서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자신을 자랑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로렌스 크렙은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합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러한 자랑은 하나님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기쁘게 받아주신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뭔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나아야 하나님도 나를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잘못된 신앙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서 그 천지의 주재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고 계심을 아는 사람들은 굳이 다른 사람의 인정 같은 것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목사들이 빠지기 쉬운 그런 실수지요.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몸에 무리가 가도 새벽기도 절대 안 빼먹고, 청렴하게 살기를 노력하고, 시간을 내서 심방도 가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애씁니다. 그러다가 제 친구 목사님들 두 명이 지난달에 몸에 스트로크가 와서 쓰러졌습니다. 나쁜 것 아닙니다. 그러나 교인들에게 인정받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저도 교인들에게 좋은 소리 해주고 교인들에게 인기를 끌고 싶은 마음이 가끔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라옵니다. 누가 욕먹고 싶겠습니까? 때로는 굉장히 외롭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천지의 주재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해 주고 계신다는 그 사실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을 외웁니다.
(갈 1:10)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리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간곡히 부탁한 디모데 후서 4장 말씀을 떠올립니다.
(딤후 4:2-5) 2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하십시오. 3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4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5 그러나 그대는 모든 경우에 정신을 차려,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있다는 그 확신이 있는 사람은 절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풍선을 부풀리듯이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자기들이 갖고 있는 은사를 너도 나도 부풀려 자랑들을 했습니다. 은사라는 것은 하나님이 목표지점으로 주시 그 목표지점에 잘 도달하라고 하나님께서 그 길까지 가는 길에 횃불로 주신 것들이 은사입니다. 그런데 그걸 전부 자기 자랑으로 쓰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건 신자의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분은 자기를 숨기셨습니다.
(빌 2:5-7)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우리 주님은 자기를 완전히 비우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자기가 자랑할 만한 것들이 많이 있어도 오히려 자기를 감추고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자랑을 봅니까? 성경 많이 안다고, 기도 많이 한다고, 좋은 일 많이 한다고 얼마나 들 뻐깁니까? 그것은 사랑을 근거로 한 신앙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에 “사랑은 교만하지 않으며“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교만일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겸손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자기의 장점을 잊어버리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냥 속으로는 ”내가 그래도 너보다 낫지“라고 생각하면서 겉으로만 ”제가 뭘요“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위선입니다. 겸손은 자기의 장점을 말 그대로 잊어버리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교만은 “휘브리스” 죄의 뿌리입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 위에 올라앉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마귀가 무엇으로 타락을 한 것입니까?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앉겠다고 하는 교만이요. 인간이 왜 타락했습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에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지요? 이렇게 자기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을 교만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끌고 가주시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하나님이 도와주기를 원합니다. 그게 교만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힘을 추구합니다. 출세하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인생을 이끌어 줄 하나님이 그 안에 인식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힘을 키워 남들보다 위에 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강하게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죄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남들의 인정이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남들보다 더 높이 앉으려 애 쓰지 않고 , 오히려 자기를 숨기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입니다. 이 단어 “아스케모네이” “무례”라는 말은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교회 론을 공부할 때 살펴 본 것처럼 고린도 전서 11장에 성찬식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일 다 마치고 정리하고 성찬식을 하러 왔는데 먼저 온 부자들이 음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버리고 먼저 취해 있는 것을 바울이 신랄하게 질책을 했지요? 그게 무례입니다. 다른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것. 교회 안에서 우리가 본의 아니게 무례하게 행할 때가 있습니다. 전혀 악의 없이 무례를 행할 때가 있습니다. 가난해 본 분들을 아시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의 자랑에 은근히 상처를 받습니다. “나는 매일 똑같은 고쟁이만 입고 다니는데 어떤 집사님은 매주 옷이 바뀐다.“ ”나는 이렇게 못 배웠는데 저 사람은 참 똑똑하다. 난 여태 뭘 한 걸까?“ 우리가 자기가 소유한 것을 누릴 때 다른 이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가진 사람들은 더 조심하고 신경을 써야 합니다. 아주 예민하게 배려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체면과 그들의 편리와 그들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그들이 수치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늘 배려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약점과 허물이 드러날까 봐 먼저 자기가 그것을 덮어주고 감춰 주려고 애 쓰는 것, 그것이 무례히 행치 않는 사랑”아스케모네이“입니다.
그 다음이 뭐지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입니다. 이 말은 자기중심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이 사랑의 본질을 전부 요약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사랑을 하지 못하는가 하면 “왜곡된, 이기적인 자기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참 힘든 것이지요. 자신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권리와 유익과 복지를 위해 사는 것이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쏟아 부으신 사랑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당신의 유익이 아니라 원수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가장 아끼는 것을 내어주시는 사랑,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타인 중심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렇게 타인 중심의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그렇게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거 연습하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부간에, 연인 간에, 형제간에,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도 얼마나 자기중심 적으로 살아갑니까? 아버지가 재산이라도 좀 남기고 가면 형제간에 그거 더 많이 갖겠다고 칼부림 나지요? 그런 것은 제가 아버님으로부터 참 잘 배웠어요.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실 때 땅을 좀 남기고 돌아가셨는데, 아버님이 장남이신데도 시골에서 사시는 막내 삼촌에게 그냥 다 주셨어요. 땅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지 서울서 사는 사람이 땅이 왜 필요해? “자기중심 성“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이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입니다. 헤롤드 채드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떠한 악도 쉽게 화를 내는 것만큼 공동체를 해치는 것이 없다. 쉽게 화를 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의 뚜렷한 증거이다“ 쉽게 성을 내는 것은 공동체를 깨는 최악의 무기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생각해 보세요.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간구 하는 그 모습, 우리가 그런 신앙의 선배들을 보면서도 너무나 쉽게 우리의 분을 표출해 버리지 않습니까?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이 뭐지요?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입니다. 여기서 악한 것“카콘”은 내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본래적인 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닥쳤던 악한 것, 악한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지 아니하며“로기제타이”는 “셈하다, 계산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의 정확한 번역은 ”누군가 자기에게 행한 악한 행위를 복수하기 위해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 않으며”라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히 8:12) “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시 103:12) “12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하나님은 우리 죄를 아예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밤마다 예수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사기를 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자기가 신학교 때 지은 죄를 한번 물어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지요? 그랬더니 그 사기꾼이 그 사람만 아는 죄를 알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궁리해 낸 답이 ‘예수님께서 잊어버리셨대요.’였답니다. 그런데 질문을 하신 그 목사님이 거기서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이 신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이미 그 죄를 다 잊으셨다고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해 놓으셨는데 나는 여태까지 그 죄로 괴로워하고 있었구나.‘하고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네, 사랑은 상대방이 나에게 행한 악한 일들을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용서할 뿐 아니라 다 잊는 것입니다. 유대인 역사박물관 앞에 크게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용서한다. 그러나 결코 잊지는 않는다.”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망각이 없이는 절대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셨습니다. 다 잊어 주신 것입니다.
(사 1:18)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그 다음 구절이 뭐지요?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범죄하고 실족하면 은근히 그것을 즐깁니다. 동정하는 척 하면서 그것을 즐깁니다. 주님은 죄에 빠진 이스라엘을 향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시면서 “예루살렘 아 예루살렘아 내가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너희를 모으려 한 것이 몇 번이냐?” 우리 주님은 자기가 스스로 그 죄에 빠진 이스라엘이 되십니다. 가슴 아파하십니다. 사랑은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실수를 즐깁니다. 그렇게 남의 잘못을, 약점을 즐기는 사람들은 반드시 뒷공론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간혹 교회 안에서 다른 이들의 잘못을 보게 되었을 때, 혹은 듣게 되었을 때 뒷공론 들을 많이 하지요? 핑계는 전부 “기도 제목을 나눈다는 핑계”로 “김 집사님, 우리 이 집사님을 위해 기도해 줍시다.” “왜요?” “글쎄 이 집사님이 어쩌구 저쩌구” 그러면서 은근히 그 사람이 저지른 실수를 즐깁니다. 이 gossip은 아주 나쁜 죄입니다. 그래서 고든 피라는 유명한 신약학자는 "가장 악한 종류의 악이 gossip 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정 맛 본 사람들이라면 절대 뒤에서 남 욕하고 뒤에서 남 이야기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의 행동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랑의 본질을 이렇게 마무리 짓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기서 “모든 것을 참으며”의 “판타 스테게이”는 “모든 것을 덮어서 막다“라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친 자에게 보복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고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맛 본 사람들만이 이러한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만이 모든 것을 참으며 그리고 자기에게 그렇게 해를 끼친 악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얼마 전 전방 부대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군인들이 죽었습니다. 그 사건을 저지른 김 일병이라는 사람의 공판 현장에 사망자 가족들이 전부 나와서 그 공판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가슴이 아프겠지요. 여러분이 그 사망자 가족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겠습니까? 생때같은 아들을 졸지에 잃었으니.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김 일병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신다면 그 사망자 가족의 입장에서 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왜? 그 많은 사람들 다 놔두고 저런 자를 사랑하시냐고 따지겠지요? 만일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아직 여러분이 어디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인지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르시는 분들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공부한 이 사랑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으실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우리 주님께서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까? 거기에 서서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살인자들 뿐 아니라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 거짓말쟁이, 사기꾼 온갖 종류의 죄를 지은 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향해 “저 놈을 죽여라, 저 놈을 죽여라”하고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향해 아무 말씀 안 하셨습니다. “그래, 내가 죽으마.“ 이게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크신 사랑에 의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누구를 미워하며 누구를 시기하며 누구를 책망하며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여러분, 아직도 그건 예수님이니까 할 수 있는 사랑 아닙니까? 라고 반문하시렵니까?
(롬 5:5)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그 사랑이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이미 부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이제 그 사랑이 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자 한다면 순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일 4:19-21)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은 항상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라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열심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반드시 해 내야 합니다. 이제 새 계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옛 계명도 “사랑하라“입니다. 그러나 옛 계명에서는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해 내야 했지만 새 계명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자로 만들어 놓으셨으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 사랑하는 자리로 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 계명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랑과는 담쌓은 사람으로 살고 있다면 그게 무슨 새 계명에 속한 구원받은 자이겠습니까? 바울이 이 고린도전서 13장을 어떻게 마칩니까?
(고전 13:13)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여기서 “있을 것인데”는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있는 것인데”로 번역을 해야 맞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우리 신자의 신앙생활에서 꼭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죠? 믿음과 소망은 뭡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때까지만 필요한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실체를 보게 될 거니까요. 그 믿음과 소망이 필요 없어질 때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사랑하며 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만 남는 것입니다. 그 소중한 믿음, 소망도 결국에는 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믿음이 있다고 자랑 마시고 소망이 확실하다고 자랑 마시고 나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를 먼저 확인하십시오. 그게 안 되고 있다면 오늘 우리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 합시다. ‘사랑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 사랑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오늘부터 우리의 의지를 발동해서 힘껏 사랑해 봅시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의지의 발동입니다.
사랑은 결단이며 책임인 것입니다. 내 안에서 사랑하고픈 마음이 저절로 솟구쳐 나기를 기다리지 마세요. 우리 안에서 가끔은 그러한 감격스러운 생각들이 솟구쳐 날지도 모르지만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분명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사랑하고 싶지 않을 때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건 의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막 사랑하고 싶고 감격스럽고 그러면 사람 안에 “에피니프린”이라는 것이 생성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계속해서 나오게 되면 인간은 죽습니다. 그러니까 늘 감격스럽고, 늘 기쁘고, 늘 사랑이 넘친다는 사람은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천국에나 가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그렇게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때, 사랑할 기분이 들지 않을 때 사랑을 열심히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또 사랑해 보고, 또 안 되면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계속해서 그 사랑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부를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제가 만난 사람 중에 공부가 정말 좋다는 사람은 세 사람 만났는데 그 셋이 전부 우리 교회에 있어요. 누가 박사들 아니랄까봐 티를 냅니다.
보통 평범한 사람들은 공부하기 싫습니다. 그렇지만 왜 꾸역꾸역 합니까? 내가 건전하고 건강한, 성실하고 책임 감 있는 사회의 일원으로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훈련이기 때문에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 나이 때 성실과 책임을 훈련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공부니까요. 그런 것처럼 천국의 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영원히 있어야 하는 그 사랑을 연습하고 맛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 환경, 은사들은 전부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사랑합시다.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는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열망하며 소원을 품어야 합니다. 난 안 될 거라고 자포자기(自暴自棄)하지 마세요. 사도 바울도 이 고린도서를 쓰기 얼마 전까지 사람들을 때려죽이느라 그 손에 피가 낭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자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 사마리아 놈들을 다 태워 죽일까요? 라고 했던 우레의 아들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된 것을 기억하세요.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노력하자고요
(벧전 4:7-8)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롬 13:8-10)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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