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 버릴 사치의 세력
(김성수 목사)
(계 18:1-4) “1 그 뒤에 나는 다른 천사가 큰 권세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땅은 그의 영광으로 환해졌습니다. 2 그는 힘찬 소리로 외쳤습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도시 바빌론이 무너졌다. 바빌론은 귀신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 되고, [더럽고 가증한 온갖 새들의 집이 되었구나!] 3 이는, 모든 민족이 그 도시의 음행에서 빚어진 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세상의 왕들이 그 도시와 더불어 음행하고, 세상의 상인들이 그 도시의 사치 바람에 치부하였기 때문이다." 4 나는 하늘에서 또 다른 음성이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 백성아, 그 도시에서 떠나거라. 너희는 그 도시의 죄에 가담하지 말고, 그 도시가 당하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라.”
우리는 계속해서 음녀 바벨론의 멸망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시면 ‘이 일 후에’ ‘메타 타우타’라는 단어로 시작이 됩니다. 이 단어는 장면이 바뀔 때 쓰이는 단어라고 했지요? 17장에서 음녀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설명을 한 요한은 똑같은 내용을 이제 다른 환상으로 보고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디즈니랜드의 입체 영화관을 떠올리시라고 했지요? 요한 계시록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같은 내용을 점진적이며 반복적으로, 때로는 다른 관점에서 기록을 하고 있는 책입니다. 2절을 보시면 그게 더 확실해 집니다.
(2절)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이 말은 전에 어디서 보았던 구절입니다.
(계 14:8)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계속 무너지지요? 한 번 무너진 것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무너집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핍박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이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반복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18장에는 그 바벨론의 멸망이 앞에서보다 좀 더 처참하고 실감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럼 한 절 한 절 보겠습니다. 먼저 2절로 가겠습니다.
(계 18:2) “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요한은 구약의 여러 곳에 나타난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구절들을 인용해서 그 마귀의 세력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파멸을 하게 될 것인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사 13:19-22) “19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리니 20 그곳에 처할 자가 없겠고 거할 사람이 대대에 없을 것이며 아라비아 사람도 거기 장막을 치지 아니하며 목자들도 그곳에 그 양떼를 쉬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21 오직 들짐승들이 거기 엎드리고 부르짖는 짐승이 그 가옥에 충만하며 타조가 거기 깃들이며 들 양이 거기서 뛸 것이요 22 그 궁성에는 시랑이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한 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렘 50:39-40) “39 그러므로 사막의 들짐승이 시랑과 함께 거기 거하겠고 타조도 그 중에 깃들일 것이요 영영히 거민이 없으며 대대에 거할 자가 없으리라 4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성읍들을 무너지게 한 것같이 거기 거하는 사람이 없게 하며 그 중에 우거하는 아무 인자가 없게 하리라”
둘 다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역시 이스라엘의 대적인 에돔의 멸망에 관한 예언도 오늘의 본문과 아주 흡사합니다.
(사 34:8-15) “8 이것은 여호와의 보수할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실 해라 9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붙는 역청이 되며 10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않고 그 연기가 끊임 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 11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 거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에돔에 베푸실 것인즉 12 그들이 국가를 이으려 하여 귀인들을 부르되 아무도 없겠고 그 모든 방백도 없게 될 것이요 13 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서 시랑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 14 들짐승이 이리와 만나며 수염소가 그 동류를 부르며 올빼미가 거기 거하여 쉬는 처소를 삼으며 15 부엉이가 거기 깃들이고 알을 낳아 까서 그 그늘에 모으며 솔개들도 그짝과 함께 거기 모이리라”
그리고 역시 이스라엘의 대적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도 이렇게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습 2:14-15) “12 구스 사람아 너희도 내 칼에 살륙을 당하리라 13 여호와가 북방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로 황무케 하여 사막 같이 메마르게 하리니 14 각양 짐승이 그 가운데 떼로 누울 것이며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기둥 꼭대기에 깃들일 것이며 창에서 울 것이며 문턱이 적막하리니 백향 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이라 15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여 손을 흔들 리로다”
보세요. 이 세상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을 밟고, 화려하고 당당하게 그들의 권세를 과시했던 대적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떻게 되었다고요?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 표현들은 천국의 대표적인 상징인 ‘생명’과 ‘활기’와 ‘기쁨’과 ‘빛’같은 것들과 정 반대되는 개념들로 동원이 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해 보이고 힘 있어 보이고 활기 차 보이는, 붉은 옷과 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는 바벨론의 실체는 ‘죽음’과 ‘무기력함’과 ‘어두움’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대조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만이 그렇게 가시적인 현실 뒤에 감추어져 있는 바벨론의 실체를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세상의 힘의 원리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그의 백성들에게 ‘내 백성들아 거기서 나와라’ 하고 강하게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시면 그 하나님의 애절한 권고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계 18:4)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여러분이 조금 전에 읽으신 구약에 나타난 바벨론을 비롯한 하나님의 대적들의 멸망을 보시고 또 오늘 본문에서의 바벨론의 멸망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 나는 그러한 멸망을 당하지 않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라는 안도의 숨을 쉬고 계십니까? ‘혹시 나도 그렇게 귀신들과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인 그 어둡고 음습한 곳에 가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이 앞서십니까?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신앙생활은 한번 갔다가 아니면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지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사업은 한번 망하면 다시 재기를 할 수 있고 대학은 한 번 떨어지면 재수와 삼수의 기회가 주어지지만 신앙생활은 한번 실패하면 그 길로 영원히 귀신들과 더러운 영들과 함께 이를 갈며 무한대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진지해 지십시오. 조금만 더 열심을 부리십시오.
제가 왜 굳이 구약의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멸망하는 장면을 여러 군데 찾아서 읽어드렸는지 아세요? 제발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다른 세상에 관심을 가지시라는 의미에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 해서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고 남들과 똑같이 힘의 원리에 의해 남을 평가하고 이 세상의 힘으로 나를 치장하고 장식하고 자랑을 삼으려 한다면 여러분도 음녀 바벨론과 똑같은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경주하자는 것입니다. 그 음녀 바벨론의 미혹이 얼마나 달콤한지 세상 사람들은 전혀 거부감 없이 그 미혹에 끌려갑니다.
(계 18:3)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그 음녀의 미혹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 음녀가 주는 금잔에 취한 자들은 전부 그 음녀 바벨론과 함께 처참한 말로를 맞게 될 것인데 그들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세요. 땅의 왕들이 그 음녀와 더불어 음행을 하고, 상인들도 그 음녀의 사치스런 미혹을 좇아 부를 추구하다가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로 다음 구절에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하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날 이 강대상에서는 어떤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세상 속에서 나오십시오. ‘그래야 지요?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오늘 날 교회에는 ’고지론‘이 판을 치고 여전히 세상의 힘의 원리가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습니까? 장로는 인격과 신앙보다는 돈이 많아야 하고 세상 적인 힘을 소유한 사람이 교회에서도 소위 쓸모 있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제 질문에 답을 해 보세요. 첫 번째 질문은 아주 쉬운 질문입니다. 돈이 많고 신앙이 없는 사람과 돈이 없고 신앙이 있는 사람 중에 누가 더 교회에 득이 되는 사람입니까? 당연히 돈이 없어도 신앙이 있는 사람이지요.
그럼 두 번째 질문을 드리지요. 돈이 많고 높은 자리에 않은, 신앙이 있는 사람과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직업을 가진 신앙이 있는 사람과 누가 더 교회에 득이 되는 사람입니까? 사람들은 대부분 이왕이면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더 쓸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이 교회에 오면 교회가 갑자기 활기가 있어집니다. 뭔가 그 사람으로 인해 교회가 유익을 볼 거라는 기대 때문이지요.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실 때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더 선호하시나요?
(요 6:28-29)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일은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우리를 통하여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를 잘 믿게 되는 것, 그것이 완성이 되면,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받게 되면 이 우주는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것처럼 완전히 멸망하고, 새로운 신천지가 도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는 데에는 부자와 명예를 소유한 사람들도 귀하게 쓰이겠지만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도 그에 못지않게 쓰여 집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지요.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올라앉은 사람들이 남들에게 행복하고 기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동원하지 않아도 그들은 충분히 기쁘고 행복할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못 배우고 소외된 사람들이 전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조건이 없음에도 예수로 인해 만족해하고 즐거워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가 ‘도대체 저들이 저런 상황 속에서도 기쁘고 즐거울 수 있는 그 비밀이 뭘까? 저들이 나와 다른 것은 저들이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 하나 뿐인데 그럼 그 예수 그리스도가 저러한 행복과 기쁨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나도 그 예수를 알고 싶다’ 만일 이런 생각을 갖게 된다면 그는 지금 그의 가난과 못 배운 것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교회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도 제대로 못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엉뚱한 것을 하면서 ‘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자랑들을 합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일부러 가난하게 살고 일부러 무식해 지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만큼은 그러한 세상 적인 힘의 논리로 사람과 사물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거기서 나오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그 음녀가 주는 세상 힘의 논리에 빠져서 하나님마저도 그 세상 힘을 얻어내는 방법으로, 수단으로 동원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가진 힘을 동원해서 이 땅에서 무언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서 쓸모 있는 일을 하라고 이 땅에 남겨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잘 믿게 되는 데에 여러분의 가난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잘 믿는 데에 여러분의 질병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잘 믿는 데에 여러분의 사업의 실패가 유용하게 쓰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가난해서 병이 걸려서 사업에 실패해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혹 이런 질문이 드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우리가 보기에 엄청난 일을 하고 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럼 그러한 대표적인 사람 중에 다윗을 한번 볼까요? 다윗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어린 소년 시절에 물맷돌 다섯 개로 블레셋의 골리앗을 때려 죽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울이 다윗을 질투해서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라 해서 그의 옷자락만 조금 베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죽인 병사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그 사울의 가족들을 후대해 줍니다. 그리고 사무엘 하5장에서 비로소 왕이 되고 사무엘 하 7장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삼하 7:5-13)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7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9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겠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언제 너희들 더러 내 성전 지어달라고 했느냐? 내가 너희를 위해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이지 너희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게 8절입니다) 내가 다윗을 주권자로 삼고 다윗의 대적들을 물리쳐 주고 보호해 줄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를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진짜 성전을 건축하게 될 것이다’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이 뭡니까? 바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성도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제가 나중에 다시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우리 성도들의 본분은 이 땅에서 우리의 힘과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무슨 일을 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이끌려 열심히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가는 것이고 그 은혜를 인식하게 되면 감사가 나오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성숙되어져 가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대한 증거가 바로 사무엘 하 12장입니다. 다윗이 그 수많은 신앙의 승리를 경험하고 한 순간에 무너지는 장면입니다. 자기의 충실한 부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가 임신을 하자 우리아를 궁지에 몰아서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는 그게 죄인지도 모릅니다.
(삼하 12:1-12) “1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2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3 가난한 자는 아무 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4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5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6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7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8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다윗은 나단이 그에게 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자기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나단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에게 분노합니다. ‘그 놈은 죽여야 한다.’ 나단이 ‘그게 바로 당신이요’ 하고 말해주자 그 때 다윗이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자였구나, 그럼 지금까지 내 삶 속에 일어났던 그 수많은 신앙의 승리의 순간들은 다 무엇인가?’ 그리고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삶 속에 나왔던 수많은 신앙의 승리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끌어 주신 결과이지 자기 안에 있는 힘과 열심의 결과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시 51:1-17) “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더러운 관을 통과해서 나오는 것들처럼 전부가 다 죄라는 것) 4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나라는 인간 자체가 죄라는 것)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고쳐달라고 하지 않는다. 창조해 달라고 한다. 나올게 없으니까)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 하시나이다”
(우리로부터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을 만들어 낼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원래 제사라는 것이 뭡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 어떤 중재자, 구원자가 없으면 우리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이해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 제사인데 우리는 아차하면 우리의 정성과 진심이 우리의 구원에 일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공로주의입니다. 공로주의는 누가 더 낳은 열심을 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느냐의 싸움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의 문제입니다.)
(17절)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제사는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 단 한 순간도 선하게 존재할 수 없는 죄 덩어리입니다' 라는 자각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제사라는 것입니다. 그 걸 인식하는 게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걸 우리가 뭐라고 부릅니까? 그걸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가를 자각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그 것입니다. 상한 심령)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입니다. 뭐 대단한 일 해내는 것 아닙니다. 그것을 마태복음 5장의 언어로 표현을 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산상 수훈에 대해 자세하게 공부를 하겠지만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것’은 ‘복’의 조건이 아니라 ‘복 받은 자’에게서 나오는 ‘결과’요 ‘증상’이요 ‘확인’ 인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복을 받은 자,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 속에서 ‘나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구나’라는 자각을 하게 만드신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 속에 일어나는 죄에 대한 욕구나 마귀의 공격 같은 것들을 그냥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 속에 실패와 절망과 좌절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러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 ‘죄인들의 처참한 실존’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울러 신앙의 진보도 함께 병행시켜 요구하십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삶 속에는 늘 갈등과 자신에 대한 좌절과 실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구원자가 꼭 필요했었던 이유를 마음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의지하는 자’ 그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로 완성이 되어져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거기에 돈이 필요합니까? 건강이 필요한가요? 명예가 필요합니까? 물론 그런 것이 사용될 때도 있지요. 그러나 거기에는 때로 가난도 질병도 눈물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음녀는 세상의 힘의 논리를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진짜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을 저리로 밀어놓고 자꾸 세상의 힘과 정성과 열심과 진심으로 ‘엉뚱한 일’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다윗의 시편 51편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세요. 이게 그 다음에 지은 시입니다.
(시 40:1-7) “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기도를 하고 간절히 바라며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6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다윗은 자기에게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음을 알았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기적이 자신의 삶 속에 나타나지 않으면 자신은 도저히 불가능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다윗은 자신에게 구원자가 필요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다윗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 오실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7절을 보시면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지요? 어떻게 그걸 예수 그리스도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히 10:1-7)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정확하게 시편40편을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히브리서 10장 7절에서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는 말을 하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실패와 절망과 좌절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은 것입니까? 내 속에서는 선한 것이 전혀 나올 수 없는 존재이고 그래서 나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기적 같은 간섭이 필요하며 바로 그 구원자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그 내용을 설명하는 모델로 성경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윗이 어떤 결론을 얻는지 보세요.
(시 32:1-2) “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은 ‘모든 것은 은혜로구나,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기적을 일으켜 주시지 않고 구원자를 보내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전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구나.’라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골리앗을 때려죽이게 만드셨고 사울을 놓아주게도 만드셨고 밧세바를 범할 때 그냥 놔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메시아의 필요를 알게 되고 그 메시아를 보내주실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골리앗을 때려죽인 용감함의 표상으로, 사울 왕을 살려 준 자비의 표상으로, 사울의 가족들을 후대한 친절함의 표상으로, 성공한 왕의 표상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은 그러한 모든 선한 것들을 하나님의 인도와 간섭 아래에서만 누리고 발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렇게 불가능하고 더럽고 추한 인간들에게 찾아오셔서 독생자의 목숨을 끊어서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시며 결국 그 하나님 앞에 항복하며 감사의 찬송을 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 전체’의 삶의 표상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에 가면 다윗이 그 파란 만장한 삶을 살고 난 뒤 얻은 결론이 이렇게 등장합니다.
(롬 4:6-8)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의 시편32편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게 다윗의 삶의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골리앗을 때려 부수고 자비를 베풀고 성전을 짓는 일을 하기 위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나는 불가능한 존재이며 내 안에서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메시아가 오시지 않았다면 나는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삶으로 경험하게 되고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많이 붙잡게 되고 은혜를 더 많이 사모하게 되는 하나님께 항복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렇게 죄를 많이 짓게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러분 자신에 대한 실망을 그렇게 많이 하도록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절망과 실망과 실패 속에서 점점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나에게 아들의 목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며 그 감사가 나의 삶을 그 분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조금 씩 조금씩 바꿔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거기에 돈이 필요한가요? 거기에 명예가 필요합니까? 거기에 수려한 외모가 필요한가요? 그런데 왜 예배당에 와서 전부 그걸 구하고 있냐는 말입니다. 그건 음녀 바벨론의 미혹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그리고 진짜 너희가 해야 할 일을 하라’ 여러분 때때로 ‘예수를 믿는 자로서 이런 삶을 살아도 되나?’ 라고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실 때가 있으시지요? 때때로 ‘내가 이런 죄를 짓고도 구원을 받은 사람이 맞나?’ 하실 정도로 실패하실 때가 있지요? 그 때 여러분은 절망의 나락 속을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제 안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안에 선한 것을 창조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절대 선한 것을 내 놓을 수 없는 자입니다. 도와주세요.’ 그리고 ‘이런 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구나. 너무나 감사하다’ 까지 가십시오. 그리고 그 감사가 여러분의 삶을 바꾸어 가는 그 복된 경험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꾸 항복해 가십시오. 그렇게만 된다면 그 더럽고 추악한 죄도 여러분에게 유익인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신앙생활이며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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