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으로 보는 것,
그리고 영으로 보는 것
(김성수 목사)
(요 9:24-30) “24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 것이니이다 26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 하는도다”
우리는 지난주에 요한복음 9장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면서 그 속에 담겨있는 구원의 서정(敍情)과 그 구원의 여정(旅程)을 통과하는 성도들의 삶 속에서 성숙의 도구로 나타나게 되는 세상 세력으로부터의 출교와 배신과 위협 등의 고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눈을 뜨게 된 소경이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내가 믿나이다.’라는 고백을 하기까지의 과정에 소명에서 영화까지의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 전체가 약도로 그려져 있는 것이라 했지요?
오늘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눈을 떠서 본다는 것의 의미와 그렇게 눈을 뜨게 된 성도의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하는 변화에 대해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두 번째 파트인 성화의 부분은 다음 시간에 설명을 해야 할 듯싶습니다. 먼저 왜 성경이 모든 죄인들을 소경이라 칭하는지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도대체 죄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들을 모두 소경이라 하는가?
(요 1:1-5, 9-10)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 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보시는 바와 같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소경은 하나님과 하늘의 것을 인식하거나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로 말미암아 하늘의 것들로부터 차단이 된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을 소경이라 칭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전혀 무지한 일련의 소경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찾아오셔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사건이 바로 구원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 때부터 비로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각과 인식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구원은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눈을 뜰 수 없는 소경이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뜨게 되는 것처럼 전혀 불가능하고, 무력하고, 완전히 타락해 있던 죄인들이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하게 되고 그 하나님 나라의 생명인 영생을 믿고 소망하며 바로 그 새 생명으로 인도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이고 믿음으로 눈을 뜨고 난 후 보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아시겠지요? 요한복음 3장은 그렇게 소경되었던 자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뜨게 되어 구원을 얻게 되는 그 전체의 이야기를 아주 간략하면서도 명료하게 기록을 해 놓았습니다.
(요 3:14-21)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 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 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 부분은 민수기 21장의 불 뱀 사건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먹을 것과 물이 박한 것에 대한 투정을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불 뱀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켜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놋뱀을 쳐다보면 살 것이라 전하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이야기를 예로 드시면서 나도 놋 뱀처럼 십자가에 들려야 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로 시작이 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복음 선포에 이어서 ‘악을 행하는 자들, 즉 죄인들은 그럼에도 절대 빛으로 오지 않고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더라.’는 구절이 붙어있습니다. 그 구절들은 아주 명쾌한 복음을 메시지로 담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그러나 자칫 오해를 하면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에게 허락된 것이므로 죄인들이 자신들의 지식과 의지를 발동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어주면 구원을 받고 바라보지 않고 믿지 않으면 유기가 된다는 그런 알매니언 주의적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구절입니다. 그렇지만 민수기 21장을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이해를 하면 성경은 그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 21장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로부터 이미 창세기를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동물이 무엇이겠습니까? 뱀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힘든 광야 막사에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불뱀이 나타나서 그들을 물어 많은 동료들이 죽었고 자기들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귀요 저주요 사망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세가 놋으로, 다른 것도 아닌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달고 그 뱀을 바라보면 살 것이라 합니다. 그 때 그 뱀을 믿음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요? ‘그래, 그 장대에 달린 뱀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상처에 특효가 될 거야, 얼른 바라봐야지’하며 바라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우리 거기에 대한 대답을 단순하게 추측하지 말고 신약으로 가서 그 대답을 찾아보자고요.
그 장대에 달린 놋 뱀은 십자가라는 장대에 죄와 사망과 저주가 되셔서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장대에 달린 예수를 믿으면 사망에서 구원을 얻는다고 구원의 원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예수를 몇 명이 믿음으로 바라보았습니까? 다 도망하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마가는 벌거벗은 채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 벌거벗은 마가의 모습은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버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각인시키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렇게 이 땅에 사망의 죄, 즉 뱀을 멸하시기 위해 뱀이 되셔서 죽으신 예수는 모든 이들에게 외면을 당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서두에 함께 읽었던 요한복음 1장은 모든 죄인들이 눈이 멀어 빛이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부터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사실을 민수기 21장과 연결하여 보면 십자가라는 장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상징하는 그 놋뱀을 자의에 의해 쳐다 볼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후로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거듭 강조하여 저주의 놋뱀을 치유책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자가 없음을 단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 은혜를 부으셔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그 장대에 달린 저주와 심판과 죽음의 상징인 놋뱀을 보게 하셔서 그 선택된 무리를 살려 내신 것입니다. 그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죄인들의 것이었던 저주와 심판과 죽음의 죄가 되셔서 십자가라는 장대에 달리시고 어떤 선택된 무리들에게, 아무도 쳐다보지 않으려 하는 그 저주의 십자가 장대를 쳐다 볼 수 있는 눈을 주심으로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바로 구원의 사건을 미리 힌트하고 있는 것이 민수기 21장의 불뱀과 놋 뱀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모두 다 불뱀인 죄에 물려 사망에 이르러야 하는 와중에 당신의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하셔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의 ‘세상’은 세상과 함께 불뱀인 죄에게 물려 사망에 처할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놋뱀을 쳐다보게 된 ‘구원받은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요한복음 3장 16절의 세상이 전체 세상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런 구절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요?
(요 17:9)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온 세상을 위해서 주셨는데 정작 주님 자신은 ‘난 세상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자들만을 위해서 왔다.’라고 말하고 계신 것입니까? 두 분이 의견이 안 맞으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주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구원 받은 제한적 세상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limited atonement)주님은 선택된 그들만을 위해,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요 1:9-13)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 이니라”
빛이 이 세상에 오셨는데 아무도 그 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그 빛을 영접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눈을 뜬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기도 오해의 소지가 있지요? ‘봐라, 영접하는 자,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아니냐?’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아무도 스스로의 힘이나 의지로 주님을 영접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뜨게 되어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무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게 눈을 뜨게 된 사람들을 가리켜 성경은 ‘새로운 피조물’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된다고 합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보세요.
(요 9:25)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 것이니이다”
막 눈을 뜬 그 소경이 얼떨떨해서 다른 것은 알지 못했지만 자기가 전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을 뜬 성도는 이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 세상을 보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고후 5:16-17)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뜨게 된 성도들은 이제 세계관과 가치관이 바뀌게 되어 이전과 똑같은 사건이나 상황이나 사람들을 보면서 전혀 새롭게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관(世界觀), 가치관(價値觀) 모두 뭡니까? 세상과 가치를 바라보는 눈(觀)입니다. 그 눈이 이제 하늘의 관점으로 바뀌게 되어 전혀 다른 이해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성도의 개안(開眼)입니다. 고난이나 불행을 바라보는 관점도, 이 세상의 힘인 돈이나 명예나 인기를 바라보는 관점도, 이웃을 바라보는 관점도, 원수를 바라보는 관점도 다 달라집니다. 새로운 피조물들에게 보이는 세상은 이제 새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컴퓨터의 OS가 바뀌어 버리는 형국입니다. 단순히 software몇 개를 install하는 것이 아닌 컴퓨터의 operating system이 완전히 바뀌어 성도의 삶에 새로운 운용체제가 적용이 되는 것이지요.
새로운 피조물들은 이 세상에서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 나라를 사는 이들로 성숙되어져 가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기 전인 소경된 육신의 눈으로 볼 때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소경들에게는 그저 과거를 답습하는 회전하는 수레바퀴 같은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고 말을 한 것입니다.
(전 1:9-10)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보시다시피 우리가 읽었던 고린도후서의 말씀과 이 전도서의 말씀은 서로 모순인 듯 보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했는데 바울은 해 아래 새 것이 나타났고 그 새 것들은 이제 육신의 잣대로 현상을 판단하거나 이해하지 않고 새롭게 바라보고 인식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 다 맞습니다. 전도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인간적인 입장에서 냉철하게 관찰한 현실 인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은 분명히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새롭지 않습니다. 반면,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변화된 사람의 현실 인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인으로서 세상을 바라볼 때는 그 무엇도 새로울 것 없었고, 모든 것이 권태로이 반복될 뿐이라고 느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영으로 변화 받고 나니,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 1장은 믿음을 가지기 이전의 현실 인식을 담고 있다면, 고린도후서 5장은 믿음을 가진 이후의 현실 인식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변화 받지 않고는 제 아무리 스스로 노력한다 해도 새로울 수 없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새로움, 영적 개안은 외적인 변화(outer change)의 추구나 노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inner change)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적인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분의 영으로 변화 받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의 결단이 아무리 비장해도, 그것으로는 참된 새로움을 얻을 수도 없고, 그 새로움이 오래 지속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년 새해를 맞을 때마다 혈서까지 쓰면서 한 다짐들과 결단들이 한 달이 못가 흐지부지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단이나 우리의 노력이 절대 우리를 새롭게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 자신이 먼저 새로워진 다음에야 비로소 세상이 내게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지킴이나 제사 등의 종교 행위로 스스로를 새롭게,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하며 당시의 최고의 저주의 욕을 거침없이 던지셨습니다.
이렇게 새롭게 본다는 말은 그 동안 육안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던 실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 받아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눈 혹은 영안으로 보아야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고, 그래야만 인생을 참되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눈을 떠야 합니다. 그렇게 눈을 뜬 사람은 점점 새로운 것을 깊이 깨달아가고 점점 새롭게 변해 갑니다. 그래서 점점 행복해 지고 신형이 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나무들이 지나가는 것처럼’희미하게 보다가 점점 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 속에 있는 새 생명이 오롯이 드러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점점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삶은 새롭게 완성이 되어가는 삶이며 그로 말미암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게 되는 삶인 것이고
죄인들의 삶은 점점 썩어지고 늙어지고 부패해 가는 육신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결혼 생활도 행복한 신혼에서 점점 지루하고 싫증나고 짜증나는 불행으로 치닫는 한편 성도들의 결혼 생활은 점점 더 새롭고 활기찬 신혼으로의 질주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눈에 보이는 것을 화려하고 풍성하고 만족하게 구비하지 못한 상대방이 마땅치 않았는데 예수를 알고 나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삶이 있고 그 삶의 핵심은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눈에 보이는 환경이나 여건이 영 마땅치 않음에도 섬기고 사랑하는 삶이 깊어지면서 점점 행복한 신혼으로 바뀌어 가게 되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새롭게 눈을 뜬 성도들의 삶은 비단 결혼 생활 뿐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새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은 절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 되어지는 것은 바리새인들 정도의 수준에 머문 것이지 절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개안이 아닌 것입니다.
헬라어에는 육안으로 보는 것과 마음으로 꿰뚫어 보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각각 다릅니다. 굳이 신앙적인 차원에서 보지 않더라도, 보는 방법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말에는 '본다'라는 단어가 하나 밖에 없지만, 이 말의 쓰임새를 보면, 그 단어에 두 가지의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을 보아라.’라고 말할 때는 육안으로 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보라’는 말을 달리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갈비 좀 먹어 봐’라고 말할 때나 혹은 ‘이 음악 좀 들어 봐’라고 말할 때가 그렇습니다. 이 때 ‘보라’는 말은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맛을 보고 그 맛이 어떤지 깊이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음악을 듣고 그 음악이 어떤 감동을 주는지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제대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야, 이것 좀 봐 봐.’ 이 말은 보고 또 보라는 것이 아니라, 보고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육안으로 본 다음, 마음의 눈으로 보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우리 조상들도 보는 방법에는 두 종류가 있으며, 마음으로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한자의 경우에도 두 종류의 보는 것에 대해 각각 다른 글자를 씁니다. ‘볼 견’(見) 자(字)는 보통 육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반면, ‘볼 관’(觀) 자(字)는 마음으로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관음’(觀音, to perceive the voice)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소리를 본다.’는 뜻입니다. 소리를 들어야지 어떻게 봅니까? ‘들어 보라’는 말입니다. 소리를 듣고 생각하면 소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안으로 보는 것으로 다 알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하여 확인된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본 것에 대해 생각하고 분석하고 판단하여 알아야 참되게 보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까지가 인간이 노력해서 할 수 있는 한계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물과 사건을 인식할 때 눈으로 보고 깊이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 사람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영의 눈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모든 만물과 상황과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비추어 보아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 중에는 첫째,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이 진짜이며 그것만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 육안으로 보이는 것을 이성으로 검토하고 분석하고 질문해가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셋째, 육안으로 보고 이성으로 검토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보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동물적 차원(dimension of animal)에 사는 것이며, 둘째 사람은 인간적 차원(human dimension)에서 사는 것이고, 셋째 사람은 영적 차원(spiritual dimension) 혹은 신적 차원(divine dimension) 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 번째 차원에서 살아야만 가장 행복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때, 그분은 가장 먼저 우리의 영적 눈을 열어 주십니다. 그 영적 눈으로 그 동안 보지 못하던 차원들을 보게 되니, ‘모든 것이 새롭다.’라는 탄성이 터져 나오는 것이고 거기에서 참 된 행복을 조금씩 맛보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5:7)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 이로라”
이렇게 성도는 믿음으로, 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때 가장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눈이 멀어 있던 소경들 중에 선택받은 소수의 무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뜨게 되면 그들은 이제 세상을 새롭게 보기 시작하고 새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은 다른 종교인들도 다 합니다. 중국 송나라 때의 유신 선사라는 분의 이런 시가 있습니다. 산시산 수시수(山是山, 水是水) 산불시산 수불시수(山不是山, 水不是水) 산지시산 수지시수(山只是山, 水只是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이다
이 시는 속경 덕전등록(續景德傳燈綠) 22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중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는 금강경 오가해를 비롯해서 대장경 제종부와 사전부에 무려 42번이나 나오는 아주 인기 있는 법어입니다. 그것을 우리나라의 성철스님이 짧게 인용해서 쓰신 것입니다. 그 뜻은 이러합니다. ‘내가 삼십 년 전에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로 보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선지식을 친견하여 깨침에 들어서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이제야 확연히 체득하고 나니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이더라’ 이 법어를 쓰신 유신선사는 자신의 삶 속에서 똑같은 산과 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세 번에 걸쳐 바뀌어졌음을 고백합니다.
그 첫 번째 단계가 산과 물을 보면서 그냥 산을 산으로 보고 물을 물로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거기에서 참선을 통해 선지식을 얻고는 산이 그냥 산으로 보이지 않고 물이 그냥 물로 보이지 않는 두 번째 단계로 도약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가는데, 확연히 도를 깨닫고 나니 산은 그대로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이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시가 말하려는 원래의 메시지는 모든 것은 허상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후대가 인용을 하여 전혀 다른 내용으로 가르침을 전수하였습니다. 그것이 견성(見性)오도(悟道)입니다. 처음에 자연인이 만물을 볼 때는 그냥 그 외양과 현상으로 인식하고 판단을 하게 되지만 그가 도를 깨닫고 만물을 보게 되면(見性) 만물의 나타나는 외양으로만 인식을 하던 수준에서 벗어나 그 속에 담긴 것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 했던 것처럼 사물의 겉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육안으로 보이는 것을 이성으로 검토하고 분석하고 질문해가며 그 본질을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추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기도 하고 아름다움 속에서 추함을 보기도 합니다. 그 단계의 사람들은 배가 고파도 그 배고픔 속에서 보람을 느끼기도 하고 고통 속에서 희열을 느끼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풍요 속에서 빈곤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단계인 물은 다만 물이고 산은 다만 산으로서의 인식단계로 가면(悟道) 물속에서도 부처를 보고 산 속에서도 부처를 보며 속된 일 속에서도 부처를 보고 종교적인 일 속에서도 부처를 보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에서 도를 닦는 스님이나 집에서 아이를 보고 빨래를 하는 아낙네나 똑같이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부처가 되어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떠세요?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의 목적지와 신앙의 단계가 아주 흡사하지요? 이렇게 불교뿐만 아니라 그 어떤 종교도 그 종교에 입문하는 순간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변화된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슬람교나 힌두교나 불교에 그렇게 선행과 구제를 하는 이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연인들도 그리스도인들과 흡사한 새로운 삶을 살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과 비 그리스도인들의 새롭게 변화된 삶의 추구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왜 제가 굳이 이것을 구분하려 하는가하면 성경에 실제로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관점으로 새롭게 세상을 사는 듯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님께 욕만 바가지로 먹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인들과 성도들 사이의 새로운 삶, 변화된 삶에로의 추구의 다른 점(difference)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도 죽도록 고생만하고 그들처럼 욕만 바가지로 먹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난 속에서도 당당했고, 자기 것을 아낌없이 털어 이웃을 돕기도 했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기도를 하면서도 그 배고픔 속에서 희열을 느끼기도 했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게 바리새인 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른 이방인들에 비하여 그렇게 열심히 새로운 삶을 사는 듯했던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아직도 소경이다’라고 정죄를 해 버리십니다.
(마 23:25-26)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그들이 겉은 깨끗했는데 속을 들여다보니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착한 일을 많이 하고 경건한 척하며 살았지만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방탕하고 탐욕스럽게 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가 보지 않아도 열심히 율법을 지켰고 선행에 힘을 썼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부와 성공에도 초연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선행과 훌륭한 종교행위들이 전부 자기의 자랑과 인기를 위한 것이 될 때 그것은 소경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멋지게 경건생활을 하고 착한 일을 하던 바리새인들의 속셈을 이렇게 폭로해 버리십니다.
(마 23:11-18)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16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 지라 하는도다 17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인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 이외에 모든 종교인들이 하는 행위를 성경은 위선이라 하고 소경된 자의 행위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새로운 삶은 단지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삶은 나를 높이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높이는 삶으로 삶의 주권을 돌려드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도덕적 윤리적 선행이 열매로 맺히기도 하는 것이고요. 그렇게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의 눈을 떠 새로운 삶을 추구하되 자연인들의 그것과는 다른 새로움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새로운 삶, 성화는 어떻게 격발되며 어디를 목표로 하는 것인지에 관해서 다음 주에 자세하게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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