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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어린양의 전쟁(II) /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9. 3.

 

 

어린양의 전쟁(II)

 

(김성수 목사)

 

 

(계 17:9,14-18) “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 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15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16 네가 본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18 또 네가 본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우리는 지난주에 짐승과 음녀가 어린양과 싸우는 어린양의 전쟁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세력과 싸우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사자나 독수리의 모습으로 전쟁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힘없고 나약해 보이고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전쟁을 하신다는 것을 살펴보았지요? 져 주고 용서해 주고 인내하고 사랑하며 오해를 감수하고 고독하게 살아내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진정 승리의 삶이었던 것처럼 그 곁에서 함께 하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 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도 역시 같은 모습으로 세상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적은 어떤 특정한 장소, 특정한 시대, 특정한 인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 철학과 사상과 문화와 시대정신 등으로 깊숙이 침투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잘 분별하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속을 수 있다는 것도 확인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매력적인 붉은 옷과 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온 세상을 미혹하여 몰아가고 있는 용과 음녀와 짐승의 세력을 어떻게 분별하여 그 어린양의 전쟁을 잘 치러내며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살아낼 수 있는가? 그 답이 9절에 나와 있습니다.

 

(계 17:9) “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표준새번역] “9 여기에 지혜를 가진 마음이 필요하다. 머리 일곱은 그 여자가 타고 앉은 일곱 산이요, 또한 일곱 왕이다.”

 

우리 성도들이 악의 세력에게 미혹 당하지 않고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쓰인 '지혜' 헬라어 '쏘피아'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호크마'입니다. 그 '호크마'라는 단어가 여러 곳에 나오는데 그 중 몇 군데만 찾아 드리겠습니다.

 

(잠 2:1-5) “1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4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여기서도 ‘내 아들아 지혜에 귀를 기울여라, 네가 은을 구하는 것처럼 감추인 보석을 찾는 것처럼 열심을 내서 지혜에 귀를 기울여라’하고 권고를 하십니다.

 

(잠 2:16) “16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잠 3:13-15) “13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14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15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음녀가 들고 미혹하던 것이 금과 보석과 진주)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잠 8:10-17) “10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11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무릇 원하는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똑같은 대목이 나오지요? 지혜는 진주보다 낫다, 그러니 진주보다, 세상의 힘보다 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지혜가 무엇인가? 바로 밑 구절부터 그 답이 나옵니다)

 

(12,17-30절) 12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성경이 말하는 ‘지혜’‘소피아’‘호크마’가 결국 뭡니까?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은 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 분의 삶은 어떠한 삶이며, 왜 그 분이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명확하게 확인하고 있지 않으면 절대 세상을 이겨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기는커녕 그 음녀가 주는 진노의 포도주에 취해 더럽고 가증한 것들을 좇다가 결국 멸망해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한 에베소서 5장에서도 세상이 주는 진노의 금잔에 취해 세월을 방탕하게 허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역시 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엡 5:15-18)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여기서 이해하라 라고 번역이 된 ‘쉬니에미’는 ‘잘 분별하여 경건하게 행동하다’라는 뜻)

 

(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보세요. 요한 계시록의 언어와 에베소서의 언어가 얼마나 비슷합니까? 왜 술에 취합니까? 지혜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 음녀가 주는 술에 취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경건하게 행동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배울 수 있습니까? 당연히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온통 그 지혜이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눅 24:27)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성경이 무엇에 관해 기록이 되어 있다고요?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 5:39)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 성경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약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렇게 성경은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시며, 그 분이 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으며 그 분은 어떤 삶을 사셨으며 왜 죽으셨으며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그리고 그 모든 삶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지에 관해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 책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희들은 그 어린양이 살다 가신 하늘의 삶의 원리로 이 땅을 살아야 한다.’고 초청하시고 그 삶의 내용을 설명해 놓으신 책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이용해서 잘 먹고 잘사는 방법을 기록해 놓은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죽여서 다른 이를 구원해 내는 어린양 예수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과 삶의 원리를 소개하는 책인 것입니다. 정 반대의 내용이지요.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통해 그 삶을 배우시는 것이고 연습하는 것이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룩’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어떤 한 무리가 거기서 떨어져 나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구별되어 가는 것을 ‘거룩’(separate)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하면 마귀의 세력에게 속지 않고 진짜 행복하게 기쁘게 살 수 있는지에 관한 삶의 매뉴얼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값비싼 기계를 구입하게 되면 매뉴얼을 잘 읽지요. 그래야 그 기계가 가진 여러 가지 기능을 잘 활용해서 가치 있게 쓸 수 있으니까요.

 

저희 집사람처럼 매뉴얼을 무시하는 사람은 핸드폰 벨 소리도 못 바꾸고 문자를 어떻게 보내는 지도 모르고 그냥 send 하고 end 밖에 몰라요. 아직도 집에서 혼자 영화를 못 봐요. 어떻게 연결하는지를 모릅니다. 그런 하찮은 기계도 매뉴얼을 모르면 효율적인 활용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지금 이 땅에서 어떤 처지에 놓인 것이며 어떤 전쟁을 치르고 있으며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가장 행복한 것인지에 대해 매뉴얼’을 자세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강요하는 잔소리’로 밖에 취급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면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해라‘ 같은 율법의 차원에서만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조롱했습니다.

 

(사 28:1, 7-11) “1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7 이 유다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8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9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10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11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음녀의 포도주에 취한 (에브라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대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제에르 샴’ 인데 이 말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아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누구를 조롱할 때나 아이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칠 때 쓰던 유치한 말이었습니다. ‘얼렐레 까꿍‘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술에 취해서 주정부리는 소리‘를 그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사야를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하는 잔소리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경홀히 여기고 음녀의 금잔에 취해 있던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모두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지혜를 경홀히 여기고 음녀의 금잔을 분별하지 못한 자들의 결국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호 4:1-7)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2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 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3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7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 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지혜를 무시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자들은 저주와 사기와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과 살육과 학살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호 6:1-3)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우리가 세상과 함께 멸망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뭐라는 것입니까?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뭐라는 거예요? ‘여호와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지 말고 힘써 여호와를 아는 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지혜이신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 알게 되면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에베소서로 가보겠습니다.

 

(엡 3:14-19) “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들에게 궁극적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이 뭘까요? 하나님은 무엇으로 충만해 계셔요?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만의 것, 바로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거룩, 사랑, 온유, 절제, 인내, 용서 같은 하나님이 내용으로 가지고 계신 것들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목표 지점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 목표 지점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다고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 성도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충만으로 자기 안에 채우며 거룩하게 지어져 가는 길에 걸림돌을 놓는 자들이 바로 음녀요 짐승이고 그들과 싸워 그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로서의 삶을 잘 지켜내는 것을 우리가 어린양의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을 성경은 한 마디로 ‘사랑’이라고 부르지요? 그러니까 쉬운 말로 우리는 이 땅에서 열심히 ‘사랑하는 자’로 바뀌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딤전 1:5) “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방대한 분량의 잔소리를 해 놓으신 것은 여러분 안에서 참된 사랑이 나오게 하시기 위함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빌 1:9-11)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더 풍성하게 된다고 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총명이 우리의 사랑을 풍성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10-11절)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 지혜를 통해 풍성한 사랑을 소유한 자가 되어져 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의해 사랑이 풍성한 사람으로 확연하게 변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지요.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목적과 뜻을 위해서는 살인도 불사하던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행 26:9-12)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딤전 1:13)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여기서 훼방 자, 핍박 자, 포행자로 번역이 된 단어는 원래 ‘독설을 퍼붓는 자, 다른 이를 박해하는 자, 오만 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랬던 바울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고전 4:11-16)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훼방 자요, 핍박 자요, 포행 자였던 사도 바울이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을 오히려 축복하는 사람이 되었고 핍박을 당해도 참는 사람이 되었고 누군가가 자기를 비방할 때 ‘파라칼레오’ 그를 초청하여 위로해 주었다고 합니다. 사도는 그러한 “자기를 본받으라.“고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이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이지요?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이 후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디서 만납니까? 유일하게 성경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통해 예수를 제대로 만난 사람은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사랑하는 자’ 로 빚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충만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 나가는 것이 바로 ‘어린양의 전쟁’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치러내야 하는 영적 전쟁은 바로 여러분의 거룩의 완성에 대한 것이지 어디 선교 지나 기도원에서 치러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이 바로 영적 전쟁의 최전선인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이제 100년밖에 안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제가 보기에는 아직 정리되지 못하고 성숙되지 못한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불과 3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읽을 만한 신앙 서적이 전혀 전무했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 온 신앙 서적이 워치만 니의 책이었습니다. 그 워치만 니는 훌륭한 신앙인이기는 하지만 다소 위험한 요소를 지닌 분입니다. 그 분은 성화의 부분을 칭의와 묶어 버렸습니다. 구원은 내가 듣고 선택한 그 때 이미 완성 된 것이고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을 위한 헌신에 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 바로 워치만니 식의 신앙인 것입니다. 내 구원은 이미 완성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한국의 기독교는 자신의 거룩을 챙기는 데에는 소홀한 반면에 선교나, 전도, 구제 같은 사업적인 성격을 더 많이 띠게 된 것입니다.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변치 않는 신분과 운명의 차원에서 과거의 시제로 쓰는 것이지 우리는 지금 현재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이 부분을 많이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엡 1:3-5)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아들을 삼으신 것은 우리를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아들을 삼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들을 삼으신 것은 (과거)이지만 아들이 된 자들은 현재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빚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12절에 다시 한 번 그 목적지가 제시 됩니다.

 

(엡 1:12)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죄에서 건져내어져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라는 것이 뭡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의 속성, 거룩, 사랑, 온유, 절제, 인내, 화평 등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우리를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탄복을 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바로 그 영광의 찬송이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엡 1:17-22)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는 계속해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을 20절부터 다시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결과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성도들이 함께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시 살아나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살아 난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거기까지가 구원입니다. 왜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셔야 합니까? 그 머리에 붙은 교회가 “자라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엡 4:13-15)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입니다)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 것까지가 구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땅에서 다른 것을 하실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 길에 음녀와 짐승이 금과 보석과 진주와 금잔을 들고 미혹하며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우리가 치러 내야 할 영적 전쟁, 어린양의 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는 많이 실패하고 많이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시작된 그 일은 반드시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게 지난주 청년 예배 때 우리가 빌립보서에서 공부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완성하실 것을 내가 확신하노라” 인 것입니다. 거기서 ‘착한 일’이라고 번역이 된 ‘에르곤 아가똔’은 ‘good work’라고 했지요? ‘좋은 일, 선한 일, 착한 일’ 그 에르곤 아가똔은 창세기에서 인용이 된 단어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던 그 ’좋은 일‘ 바로 새 창조를 의미한다고 했지요. 우리 안에 이미 새 창조가 시작되었고 그 창조는 반드시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이 바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반드시 완성하실 것”이라는 구절의 진의라고 했지요?

 

보세요. 우리는 가야할 여정이 있는 것입니다. 완성을 향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싸워야 할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혜가 필요하고 그 지혜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진 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신앙생활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사랑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생의 과제로 삼아야 할 아주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것을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단순히 처녀와 총각이 만났을 때 불일 듯 일어나는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얼마 못 가서 금방 식습니다. 그 것은 열정이라고 부르고 진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것보다 더 깊은 것입니다. 그 열정이 지나간 후에 진짜 농익은 사랑이 익어 가는 것입니다. 서로 좋아서 죽고 못 사는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아주고 품어 주고, 용서 해 주고, 인내해 주는 그런 깊은 단계로 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서에서 사랑을 오래 참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고 상대방을 위해 나의 존재의 목적이 바뀌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때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오래 참고’ ‘love is long suffering’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유익을 위해 내가 죽고 참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은 그냥 서로 좋아서 죽고 못 사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나의 애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남의 애를 끊나니’ 그렇게 나의 애가 끊어져도 상대방을 위해 참아주며 져 주며 품어주며 용서해 주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천국의 시민으로 자라 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하루아침에 우리 안에서 솟구쳐 나올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그래서 끊임없는 전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 바로 그 전쟁, 어린양의 전쟁을 잘 치러 내시기 바랍니다. 그 전쟁을 잘 치러내시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요? 지혜, 지혜는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 더욱 더 말씀 공부에 진지해 지시기 바랍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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