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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믿는 자의 세 가지 표지(I)-(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31.

 

 

믿는 자의 세 가지 표지(I)

 

(김성수 목사)

 

 

(요 8:21-47) “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 하려는가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 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 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 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우리는 지난주에 ‘너희는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여전히 구원과 참 행복을 향한 자기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율법에 묶여 율법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자기 의를 쌓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한 주님의 일갈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율법을 동원하여 주님과 간음한 여자를 살해하려 하는 유대인들의 행태는 자신들의 힘과 가능성을 과시하려하는 죄인들의 대표적인 속성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것처럼 주님은 그들의 죄악성과 추악함을 폭로해 버리시고 너희는 지금 죄를 짓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죄 속에서 살다가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는 사형 선고까지 내려 버리셨습니다. 그것은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형 선고라기보다는 죄 자체에 대한 사형 선고였습니다.

 

그 말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의 종이 되어 계속해서 그 죄와 어울리며 그의 명령에 순응하는 삶을 사는 이들은 똑같이 죄가 사형 집행을 당할 때 사망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경고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망으로 떨어져야 하는 모든 인간들 중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어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구세주 되심을 알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데 그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사형 선고 뒤에 주님의 십자가에 의한 대 사면이 있을 것임을 본문 28절에서 힌트하십니다.

 

(요 8:28) “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상반부의 ‘인자를 든 후에’라는 어구에서 ‘들다’라고 번역이 된 ‘휩소오’라는 단어는 ‘위로 들어 올리다’라는 물리적 행동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lift up on high’즉 주님의 영광스러운 하늘로의 승귀(勝歸)를 가리키기도 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전히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처럼 율법을 힘써 지키며 자기 의를 쌓고 있던 유대인들의 모습은 죄 속에서 살다가 죄 속에서 죽어야 하는 사형수들의 모습임에 틀림없지만 그들 중에서 창세전에 선택함을 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해 구원해 내실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승리라는 역설이 ‘휩소오’라는 단어 하나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철저한 패배요 실패였지만 하늘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승리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이 역사와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인 성도들도 참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의 매 순간에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서 2년 내내 ‘이겨라, 이겨라, 끝까지 이겨라’라는 하나님의 응원의 목소리를 들은 바 있습니다. 그 말은 사실 ‘내 백성아, 져 주어라, 손해 보아라, 용서해라, 용납해라’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 삶이 곧 이기는 삶이요 승리의 삶이니까요. 율법을 들어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의 의를 자랑하기 위해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의 약함을 폭로하고 심지어 밟아 죽이려 하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에는 승리의 모습이요 강자의 모습인 듯 보여도 하늘의 눈으로 볼 때에는 참으로 유치하고 더럽고 치졸한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반복하여 ‘십자가를 지라, 자기를 부인하라, 형제를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사랑해라,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 주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힘이 드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해 내야 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자기의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는 대로 마음대로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 때 진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일이냐, 아니면 나의 기쁨을 위해서이냐를 잘 분별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 중심의 세계관이 하나님의 중심의 세계관으로 변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나를 괴롭힌 이에게 멋지게 복수를 할 기회가 생겼을 때에 내가 복수의 칼을 휘두름으로 해서 나의 속을 조금 후련하게 만들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용서하고 품어 줌으로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이냐를 생각하시란 말입니다.

 

약간의 불법과 권모술수를 사용하여 아무도 모르게 불로소득을 취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때 그 약간의 불법적인 돈을 취함으로 나의 욕심을 채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과감히 포기를 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릴 것인가를 생각하시란 말입니다. 나의 기쁨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을 생각할 때 성도는 항상 이 세상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승리의 삶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바로 그러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을 직접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살아내심으로 우리에게 표본이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님의 삶이 하늘로의 승귀의 삶이었음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매사에 ‘what would Jesus do?’ ‘만일 예수님이시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를 고민하면서 모든 일을 해 나가는 습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매사의 관심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었습니다. 자기의 존재 증명이나 자기의 자랑이나 자기 욕심의 성취에는 아예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실 정도로 아버지와의 잠시 동안의 단절을 괴로워 하셨음에도 아버지가 원하시기에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본문 29절을 보시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을 가능케 했던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원리(십자가를 지는 삶, 자기 부인)의 바탕이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 8:29)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 하셨느니라”

 

이렇게 주님은 ‘항상’ 아버지의 기쁨을 먼저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대적하여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 이들 중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있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을 몹시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지금 보신대로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시러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당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보내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세상, 즉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도록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의 행사가 못마땅해 보여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이 그들 속에 있기에 목숨을 버리시면서 까지 그들을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요 8:26) “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겉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며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의로운 척 하지만 그 속에는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이들을 언제든지 살해하고자 하는 음흉한 마음을 감추고 있는 한심한 인간들에 대해 왜 주님의 판단이 없으셨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 임의로 판단치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판단을 접으시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인간들을 사랑하시어 그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은 자기에게 손해와 상함을 끼치는 원수들까지도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심으로 전심을 다해 사랑해 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모든 일을 그렇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저 내 성질대로 하자면 당장이라도 요절을 내고 싶은 사람이 교회 안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는 것을 당신의 기뻐하시는 일이라 하셨으므로 우리도 그 기쁘신 뜻을 따라 사랑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삶이며 그게 복음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바로 승리의 삶이며 영광스러운 하늘나라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아울러 바로 그러한 성도의 십자가의 삶이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심에서 우러나온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삶의 고백과 행위는 죄인들에게 복음이 되어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이 명확하게 밝혀 줍니다. 그렇게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하던 유대인들에게 ‘내가 들리면’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전해지자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요 8:30)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주님이 무슨 이적과 기사를 행하신 것도 아니고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대단한 설교를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냥 ‘여전히 너희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하는 너희들은 죄 속에서 살다가 결국 죄 속에서 죽을 것인데 내가 십자가를 지고 높이 들리게 되면 너희가 살아날 것이라’는 간단한 십자가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구절들을 대할 때에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침묵했을까? 왜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가표를 든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막아서서 주님의 편을 들지 않았을까? 정말 그들이 믿은 사람들일까?’ 이런 의구심을 갖기 보다는 성경이 교회에게 주는 메시지를 챙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광야에서 모두 죽어 버린 출애굽 이스라엘의 일 세대들이 모두 지옥에 갔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모두 천국에 갔는지 아니면 그 중에서도 택한 자만 천국에 가고 유기된 자들은 지옥으로 떨어졌는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궁금해 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기록들을 통해 성경의 독자들인 당신의 백성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던지고 싶으신 것일까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함께 살핀 구절들을 통해 ‘그들이 정말 구원을 받은 자들일까?’라는 의구심보다는 십자가의 삶과 그것을 담고 있는 진리의 선포만이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통로요 수단으로 쓰인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30절까지의 메시지가 끝나고 31절부터는 믿는 자들의 표지와 자칭 믿는다고 하는 자들 중에서 잘못된 믿음을 행사하고 있는 마귀의 자식들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십니다. 우리가 지금 함께 읽어 보았듯이 30절에서 많은 이들이 믿었다고 했고 31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31절 이하의 말씀을 30절의 믿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심도 알 수 있습니다.

 

(요 8:31-32)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런데 믿었다고 하는 이들이 주님의 말씀에 금방 반기를 듭니다.

 

(요 8:33)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이게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까? 주님은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믿지 않는 자들이라고 서슴없이 말씀하십니다.

 

(요 8:45-46)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주님은 심지어 그들이 믿는 자들이 아닐 뿐 아니라 여전히 마귀의 자식들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요 8:44)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따라서 우리는 31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오늘날 예배당 출입을 하면서 예수를 믿노라하는 이들 중에 들어와 있는 믿지 않는 마귀의 자녀들의 특징이 어떠한 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고 혹 우리 안에는 그러한 마귀 적 요소가 남아있지는 않은지에 대해서도 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왜 30절에서는 믿었다고 했는데 그 이하의 구절에서는 믿지 않았다고 하는지 그런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잠깐 정리를 해 드릴게요. 우리는 30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구원과 참 행복에 있어서의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열망해야 하는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가 어떻게 인간 세상에 투영되어 나타나는 지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자신의 자랑과 자기증명을 위해서는 그들의 이웃을 언제든지 살해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고 자기들의 자랑과 인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자는 그게 하나님일지라도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흡혈귀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자기들의 의를 자랑하며 그들 스스로 그렇게 쌓고 있는 의가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죄 속에서 살다가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는 사형 선고를 하신 후 ‘그러나 내가 십자가에 들리고 영광스러운 승귀를 한 후에는 너희 중에 택함을 받은 이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의 율법지킴과 절기 준수를 기각 시켜 버리시고 당신의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이 주어지게 됨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 때 많은 이들이 믿었다는 어구를 통해 믿음은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며 구원은 그 믿음을 통해서만 올 수 있다는 것을 메시지로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31절부터 정말 믿는 자들의 표지는 어떠한 것이어야 하며 가짜 믿음을 가진 마귀의 자식들의 특징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31절과 32절을 통하여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의 특징과 자격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다시 한 번 31절과 3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요 8:31-32)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 첫 번째가 ‘내말에 거하는 자’이고 두 번째가 ‘진리를 아는 자’이고 세 번째가 ‘자유케 된 자’입니다. 참 믿음을 가진 주님의 참 제자들의 첫 번째 특징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하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메노’는 ‘계속하여 거하다, 계속하여 머물다’라는 뜻입니다. 그 말씀은 ‘성도와 말씀과의 동고동락, 불가분의 관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성도와 말씀이 괴리(乖離)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믿음이 있노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싫든 좋든 교회에 와서 말씀을 배웁니다. 그리고 목사의 성화에 못 이겨서라도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많이 읽고 배운 이들 중에 여전히 그 말씀과 함께 거하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말씀과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주님의 말에 거하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의 거룩을 위해 예배당 안에 심겨진 마귀의 자식들일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도 공부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돌밭이나 가시 밭, 길가 밭이 아닌 하나님이 갈아엎으신 옥토들입니다. 길가 밭은 말씀이라는 씨앗이 떨어지면 새들이 얼른 와서 주워 먹어 버려 싹을 틔울 수가 없습니다. 돌밭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되 뿌리가 없어 금방 시들어 버립니다. 성경은 그들이 환난이나 핍박이 찾아오면 금방 절망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리에서 떠나버리는 자들이라 합니다.(마 13:21)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말씀을 받을 때 기쁨으로 받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 속에서 그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 속에서 믿음 같은 것이 보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눅 8:13)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오늘 본문의 내용과 흡사하지요? 믿는 것 같았는데 실상은 아닌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조그만 시험만 몰려와도 금방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그런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가시밭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그리고 일락(一樂) 때문에 말씀의 결실을 맺지 못하고 늘 흔들리는 자들을 가리킵니다.(마 13:22) 말씀을 지키며 사는 삶 보다는 세상의 힘을 모으고 누리는 것이 더욱 즐겁고 행복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주님의 말씀을 받으나 그 말씀에 거하지는 않는 자들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눅 8:15)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주님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주님의 참 제자는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갈아엎어진 옥토는 말씀의 씨가 떨어지면 그 씨를 달게 삼킵니다. 그 후로는 씨가 흙을 삼켜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길가 밭이나 돌밭, 가시떨기들은 기쁨으로 말씀을 받기도 하고 작은 일에는 믿음을 발휘하는 것처럼 연극은 할 수 있지만 정작 세상 힘에 대한 유혹과 자기의 손해와 상함을 수반해야 하는 시험 등이 찾아올 때 와르르 하고 일시에 무너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능동적으로 달게 삼키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거하며 때로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때로는 참회의 기도를 드리며 살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맞습니다. 물론 성도의 신앙의 여정은 자라나는 성숙의 과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성도를 프쉬키코스(미성숙한 상태)와 프뉴마티코스(영적인 성도)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유아기 때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 떨어진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많은 말씀을 배우고도 여전히 삶의 주된 경향과 특성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면 그 사람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정체를 재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표지는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진리가 뭡니까?

 

(요 8:32,36)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주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라 말씀하신 후 하나님의 아들이신 당신께서 바로 진리이심을 밝히십니다. 그런데 31절을 보시면 사람이 진리를 알 수 있는 방법이 ‘너희가 내 말에 거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말은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 내내 계속하여 말씀하여 오신 것임을 25절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요 8:25) “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그렇다면 주님께서 처음부터 반복하여 일관성 있게 말씀해 오신 그 진리의 내용이 뭡니까?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부터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 오병이어,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 등등 모두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지요? ‘인간들아, 너희들의 힘으로는 구원과 참 행복에 절대 이를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시도들은 죄다. 죄를 짓는 자들은 죄 속에서 죽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인 나 예수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의 은혜 뒤로 숨어야 한다. 오직 그 길만이 너희들이 유일하게 참 행복과 만족에 이를 수 있는 길이다’입니다.

 

간단하게 축약하면 ‘행위가 아닌 은혜에 의한 구원, 죄로 말미암는 사망과 예수의 은혜에 의한 생명’ 이것이 진리이며 그 진리의 실체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시고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진리는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그 제한적인 힘을 이용하여 세상의 힘을 쌓아 가시적 행복과 만족에 이르려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은혜의 진리를 모르는 자들이며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자들입니다. 그것은 운명론 적인 선언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들은 완전한 사망으로 서서히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결론을 향하여 열심히 죽고 있는 자들을 가리켜 성경은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라 부릅니다. 그 때 밖으로부터 한 구원자가 나타나 그들 중 얼마를 건져낸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함께 공부했다시피 죄인들이 죄 속에서 살다가 죄 속에서 죽어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연의 법칙과 같이 너무나 필연적이며 당연한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사과가 사과나무에서 떨어질 때 위로 치솟아 오르지 않습니다. 만류인력은 모든 장소에서 모든 물체에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죄가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죄 속에서 태어나고 그 죄는 삯(옵소니온)으로 반드시 사망을 지급합니다. 모든 인간들은 다 사망을 향해 만류인력에 끌리듯 달려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사망에 대해 불가항력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만류인력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력의 힘보다 더 큰 힘으로 그 사과를 붙들어 버리면 됩니다. 사과가 아래로 떨어질 때 인력의 힘보다 더 큰 힘을 오른 손에 가하고 그 사과를 받아 버리면 사과는 더 이상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멈추게 되지요. 그러나 그것은 사과의 능력이 아니라 인력을 막아선 다른 힘에 의해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그게 구원인 것입니다.

 

정말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은 물에 빠져 익사 직전에 있는 사람이 팔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여전히 남은 힘을 과시할 때는 절대 물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익사 직전에 있는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자기를 건져주러 오는 사람을 칭칭 감아 버리기 때문에 절대 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베테랑 수상 안전 요원들은 물속에 빠진 사람이 힘이 다 빠져 물속으로 꼴깍하고 들어갈 때 물로 뛰어듭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렇게 익사 직전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이제 곧 사망으로 던져질 찰나에 우리 주님께서 뛰어들어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는 우리를 등에 업으시고 우리를 목적지로 이동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등 위에서 예수님의 등을 발로 구르며 이리가라 저리가라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어찌 사망에서 구원 얻은 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여전히 자기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자기 목적 달성의 도구요 방법으로 쓰려 하는 사람은 절대 진리를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리는 자신의 무능력함과 무기력함, 그리고 지혜 없음을 온전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며 그 분의 말씀에 힘을 다해 순종하는 것을 열매로 맺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2절의 ‘진리’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 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는 철학에서 말하는 그런 것이나 관념적인 진리가 아니라 예수와 예수가 담고 있는 은혜에의 기댐이라는 진리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여 구원과 행복에 도달해 보겠다는 모든 시도를 죄라합니다. 우리가 그 죄 속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그 분께 오롯이 순종하는 길만이 가장 행복한 삶임을 깨달아 인식하는 것을 가리켜 진리를 아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게 진리를 아는 이들만이 참 제자이며 참 성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인생 속에서 자기의 꿈과 야망과 욕심을 다 내려놓고 자기 인생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을 간단한 한 문장으로 줄이면 내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 선생께서 저의 노래를 아주 좋아하셔서 가끔 그 분의 패션쇼 장에 초청을 받아 가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패션쇼 장에 가서 느낀 것이 패션모델은 그가 입은 옷에서 눈이 돌아갈 만큼 예쁘거나 화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패션모델의 임무는 디자이너가 입혀준 옷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이지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모델들은 지나치게 다이어트를 해서 옷이 돋보이는 몸매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목구비가 너무 아름다워서도 안 됩니다. 표정이 너무 살아 있어도 안 됩니다. 패션모델은 마치 마네킹처럼 디자이너의 계획에 맞추어 디자이너와 그의 작품이 돋보이도록 자신은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패션쇼가 살아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는 우리 자신을 돋보이는 삶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인생이라는 무대에 세우신 우리 하나님과 우리를 인생의 무대에 세우심으로 우리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 인생의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무대에서 하나님과 그 분의 계획이 아닌 여러분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그 무대는 실패작이 되고 있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빛이 없는 어두운 세상의 하늘을 날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비행기가 그 어두움 속에서 유일하게 빛의 역할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관제탑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창공을 날려 할 때 그 비행기는 곧 추락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감정과 의지와 지성과 인격까지도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고 그 분의 말씀이 나의 전 존재를 삼켜 버려 내가 온전히 새롭게 태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간구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하나님 백성의 세 번째 특징인 ‘진리로 자유케 된 자’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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