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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아브라함과 사라, 하갈과 예수 그리스도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31.

 

 

아브라함과 사라, 하갈과 예수 그리스도

 

(김성수 목사)

 

 

(창 16:1‐16)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하갈이라고 하는 이집트 사람 여종이 있었다. 2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주께서 나에게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시니, 당신은 나의 여종과 동침하십시오. 하갈의 몸을 빌려서, 집안의 대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따랐다.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기의 여종 이집트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아내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온 지 십 년이 지난 뒤이다.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니, 하갈이 임신하였다. 하갈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자기의 여주인을 깔보았다. 5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받는 이 고통은, 당신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나의 종을 당신 품에 안겨 주었더니, 그 종이,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나를 멸시합니다. 주께서 당신과 나 사이를 판단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6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하였다. "여보, 당신의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이 좋을 대로 그에게 하기 바라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다 7 ○주의 천사가 사막에 있는 샘 곁에서 하갈을 만났다. 그 샘은 술로 가는 길옆에 있다. 8 천사가 물었다. "사래의 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갈이 대답하였다. "나의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9 주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10 주의 천사가 그에게 또 일렀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 11 주의 천사가 그에게 또 일렀다. "너는 임신한 몸이다.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여라. 네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께서 들으셨기 때문이다. 12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싸울 것이고, 모든 사람 또한 그와 싸울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친척을 떠나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13 하갈은 "내가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 하면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를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름지어서 불렀다. 14 그래서 그 샘 이름도 브엘라해로이라고 지어서 부르게 되었다. 그 샘은 지금도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그대로 있다. 15 ○하갈과 아브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니, 아브람은,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었다. 16 하갈과 아브람 사이에 이스마엘이 태어날 때에,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이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실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쪼개진 제물 사이로 홀로 지나가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쪼개짐으로 완성해 내실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엄청난 경험을 한 아브라함이 16장에 와서 또 다시 커다란 실수를 합니다. 아내 사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아 버린 것입니다. 이 모습이 인간 측에서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알량한 믿음의 실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주도권을 하나님께서 쥐고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큰 일 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역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탄생하게 되는 약속의 자녀인 교회의 탄생 이야기를 에피소드 화시켜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증거를 대 드리지요. 이 창세기16장의 이야기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해설해 줍니다.

 

(갈 4:21-31) “21 ○율법 아래 있기를 바라는 여러분, 내게 말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율법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합니까? 22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태어나고 하나는 종이 아닌 본처에게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3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육신을 따라 태어나고, 본처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을 따라 태어났습니다. 24 이것은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두 여자는 두 가지 언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내 산에서 나와서 종이 될 사람을 낳은 하갈입니다. 25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을 뜻하는데, 지금의 예루살렘에 해당합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은 그 주민과 함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26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이 아닌 여자이며,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27 성경에 기록하기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여, 즐거워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여자여, 소리를 높여서 외쳐라. 홀로 사는 여자의 자녀가 남편을 둔 여자의 자녀보다 더 많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28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29 그러나 그 때에 육신을 따라 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박해한 것과 같이, 지금도 그러합니다. 30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아라. 여종의 아들은 절대로, 종이 아닌 본처의 아들과 함께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31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한 여자의 자녀입니다.”

 

그러니까 사라와 하갈,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는 율법으로, 다른 말로 인간의 힘을 의지하여 행복에 이르려 하는 자들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행복의 근원을 삼게 되는 교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환언하면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말미암게 되는 것이지 스스로의 노력이나 열심을 근거로 탄생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장에 가면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후에, 생식기를 쪼갠 후에 이삭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 이삭은, 다른 말로 교회는 인간의 생식 능력에 의해 태어난 자가 아니라는 의미인 것이지요. 여기서 여러분이 잘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왜 약속의 자녀인 교회의 탄생을 행복이라는 단어와 혼용해서 쓰는지 아세요? 죄인들이 교회로 탄생 된다는 것의 의미는 타락한 자들이 사망의 열매들인 고통 속에서 참된 행복의 자리로 옮겨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죄로 인해 엉뚱한 행복을 좇느라 고통 속에 빠진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참 행복의 자리로 회복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각자가 추구하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그 각자의 행복의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자기들의 힘과 이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여 찾으려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이들은 참 행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께 순종하는 데에서만 찾아질 수 있음을 알고 예수만을 의지하며 그 분 앞에 항복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느라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면서 하늘나라의 행복을 맛보게 되지만 세상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밟아 자신의 욕심이 채워지는 만큼 행복해 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의 탄생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성경 전체의 기술은 타락한 인간이 진짜 행복한 자리로 옮겨지는 일이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에 의해, 이 세상의 것들을 쌓는 것으로는 절대 불가한 것이라는 말과 정확하게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 성경의 수신자인 교회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책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쏟아놓은 모든 시도나 열심이나 업적이나 힘 등은 절대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으니 다 털고 하나님의 은혜 뒤로 숨으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땅의 힘과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여 자기가 원하는 세상 적 행복에 스스로 도달하려 하는 이들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며 그 참된 행복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율법주의에 빠진 자들로 성경에 등장하는 것이고 그 그림이 오늘 본문의 하갈과 이스마엘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하고 자기 스스로 선악을 분별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과 만족에 이르겠다는 반란이 선악과 사건입니다. 선악과 사건은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분별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보겠다는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렇게 타락한 인간들은 첫 번째 아담처럼 자꾸 자기 쪽에서 무언가를 내어 놓아 행복에 도달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율법을 지키고 그 율법지킴을 자기 의로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 힘으로는 절대로 거기에 이를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요. 바로 그 선악과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서 재현(再現)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자신의 티끌 됨을 인정하고, 다른 말로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배우고 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세상의 지혜와 세상의 힘을 사용하여 스스로 행복에 도달하려 하는 세상의 모든 시도가 헛것임을 배우고 가야 하기에 하나님은 이 땅에서 성도가 자신을 온전히 부인하고 세상의 헛됨을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해 세상 힘의 헛됨과 인간의 무력함을 경험케 하십니다. 그것이 인간들에게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칼빈은 ‘믿음의 다른 말은 기다림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 즉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며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다른 말은 기다림인 것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을 통해 성숙됩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인내하며 잘 기다려 내는 것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이 진짜 눈에 보이게 되는 날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날인 것이고요. 그러나 굳건한 믿음 위에 서 있지 못하고 조급증에 걸려 있는 사람들은 그 기다림의 시간이 답답하고 초조하고 때로는 절망감까지도 느낍니다.

 

(벧후 3:9) “9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보세요. 주의 약속의 특징은 더딤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믿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너무 더디다고 하나님마저도 부정합니다. 때로 그러한 세상의 조급증에 성도들까지도 부화뇌동하는 일이 생겨나곤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더딤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참으심과 기다리심에서 기인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성숙하고 완성되어 하나님 품에서 자유롭게 거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최선의 때에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하나님의 기다림의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기다림은 성도의 기다림을 수반(隨伴)합니다. 그러니까 참된 행복은 오랜 기다림의 ‘믿음’을 지나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 기다림 속에서 조급한 마음에 자꾸 세상의 행복들로 그 참 행복을 대체하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꾀로 우리가 원하는 행복의 응답을 인위적으로 생산해 내는 조급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쪼갠 고기 사이를 횃불의 모습으로 지나시는 엄청난 언약의식을 보여주신 후에도 한참을 침묵하셨습니다.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언약의식까지 행하셨으면 바로 주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가 가나안에 들어온 지 10년이 되도록 자식을 안 주셨습니다. 게다가 아브라함과 사라는 적은 나이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여든 다섯 살이 되었고 사라도 일흔 살을 훌쩍 넘겨 경수까지 끊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식소식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라 해도 아침이면 거울에 보이는 자신들의 늙어가는 모습과 그 속에서 아무런 말씀이 없이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래도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침묵 속에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이니까요.

 

오늘 본문 1절은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라는 어구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으세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거창하게 약속을 하신 후인데 응당 ‘아브람의 아내가 이내 생산을 하였고’로 시작을 해야 맞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을 해 놓고서 너무 바쁘신 관계로 잊어버리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자기들의 힘을 모두 빼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들이 그 기다림 속에서 자기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깨닫고 오롯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당신께만 순종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였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곧 자기의 꾀를 사용하여 또 다시 인간 쪽에서의 작품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참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사라는 자기의 여종 하갈을 자기 남편에게 주어 임의로 자식을 생산해 내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주모(主母)가 자식이 없을 때 하속(下屬)을 통해 자식을 낳는 것은 당시의 자연스러운 관습이었습니다. 얼핏 보면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적극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 것같이 보이지만 2절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라는 사라의 말을 보면 이미 사라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신에 빠져 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굳건한 믿음 위에 서있지 못한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때에 자기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마저도 힘없는 늙은이 취급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브라함마저 그러한 아내의 요청을 냉큼 수락을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러한 아내의 불경한 요청을 거부하고 아내를 나무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 아내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임신을 시켰습니다. 그게 바로 자기의 힘으로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자신들의 가능성을 피력했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부인이 되지 않은 자아 도취된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자기들의 꾀와 자기들의 힘으로 약속의 자녀를 출산할 수 있다고, 행복의 고지(高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인내 속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일을 강행시키려 할 때 마귀는 항상 우리가 덥석 잡을 수 있는 거리에 하갈을 준비해 둡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고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로 내려갔을 때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다시스로 가는 배가 그 곳에 있었습니다.(욘 2:3) 그 배는 요나의 하갈입니다. ‘나의 하갈’은 내가 주님의 뜻을 나의 방법대로 이루려고 할 때마다 내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내 육욕의 몸종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기독교를 통째로 먹어버린 율법주의요, 신비주의요, 기복주의요, 물질주의요, 실용주의 등인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이 세상의 것으로 대체하여 맛보게 해 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상기(上記)한 것들입니다. 금욕적인 생활과 왕성한 종교행위가 자기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을 거라 착각합니다. 신비적인 경험을 하여 다른 이들보다 종교적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팔을 비틀어서라도 이 세상의 복을 얻어내어 하늘의 행복을 이 세상의 것으로 대체하고 싶어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참된 행복과 만족과 기쁨과 안식과 위로여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믿음으로 그 나라를 기다리며 그 믿음에 의한 소망으로 지금 이 땅에서도 그 나라의 행복과 기쁨을 조금이나마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나라를 기다리지 못하고, 믿음으로 그 나라를 향한 소망을 갖지 못하며, 기쁨과 소망은커녕 불안과 초조함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꾀를 좇아 행복과 기쁨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고 그 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바로 우리 육욕의 몸종인 하갈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비주의나 기복주의나 율법주의, 물질주의, 성공주의, 실용주의 등은 영적 조급증에 걸린 죄인들이 토해놓은 토사물과 같은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대단한 종교행위나 커다란 업적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님이 주신 인생 속에서 흔들림 없는 신뢰로 아버지의 때와 하늘의 선물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삶을 인내 속에서 잘 살아내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게 믿음이니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보이는 것처럼 사는 삶,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사랑하고 섬겨주며 참고 인내하며 잘 기다리는 삶이 바로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하는 위대한 천국의 삶인 것입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 겉으로 보여 지는 헌신과 투신의 종교행위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힘은 들지만 폼이 나는 것이거든요. 정말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묵묵히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창 15:11‐12)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아브라함이 지금 하나님과의 언약의식을 준비해 놓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솔개가 그 언약 제물 위로 날아듭니다. 솔개는 율법에 규정된 부정한 짐승입니다. 부정한 것이 정한 제물 위로 날아들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방해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성도의 대표인 아브라함은 솔개를 부지런히 쫓아냅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해질 때쯤 되어 아브라함이 잠이 들어버립니다. 아브라함이 열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준비하라고 하신 제물은 당시로서는 꽤 값이 나가는 것들이었습니다. 요즘도 삼년 된 암소, 암염소, 수양 등은 요즘도 아주 값이 많이 나가는 가축입니다. 당시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낌없이 그 가축들을 쪼개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헌신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둠이 몰려오자 아브라함이 심히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자기의 힘과 재산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일은 쉽게 해내었던 아브라함이 정작 어두움 속에서 기다리는 것은 심히 두려워합니다. 눈에 보이는 싸움은 성도가 이를 악물고 싸우기로 작정하면 못 이길 것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로부터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면 감옥에 넣어 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았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모르긴 해도 이곳에 계신 분 중에 반 이상이 감옥을 택할 것입니다. 헌금이나 봉사 등으로 나의 돈과 시간과 에너지가 손해를 보게 될 때도 여러분은 흔쾌히 하시지요? 우리는 눈에 보이는 솔개의 공격은 어느 정도의 결단만 있으면 못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전혀 이 세상 것으로 보상해 주시지 않는 것 같고 아예 자기에게는 관심도 없는 것같이 침묵하고 계실 때 보이지 않는 솔개의 모습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마귀의 속삭임에는 쉽게 넘어 갑니다. ‘왜 너만 손해 봐야하니? 너도 세상의 힘을 쌓아서 떵떵거리며 살아봐, 왜 너만 당해야 해? 너도 물어뜯어버려’ 그 때 우리는 묵묵히 하늘의 복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우리 인생의 어두움은 우리의 믿음을 더욱 더 공고히 다져주는 하나님의 세밀한 간섭인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에 찾아오는 어둠은 하나님의 빛을 더욱 사모하고 그 가치를 깊이 인식하도록 하는 믿음의 훈련교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어둠을 스스로의 자가발전으로 밝히려 했던 것입니다. 아직 힘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의 힘과 지혜로 우리가 원하는 행복과 만족에 도달할 수 없다는 완전한 항복을 하기 전에는 절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성도가 이 세상 속에서 점점 더 캄캄한 어둠과 기다림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의 정석(定石)인 것입니다. 그건 일이 잘 되고 안 되고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는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들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그리고 이 세상이 얼마나 불가능한 곳인지, 어느 정도까지 자정능력을 상실해 버렸는지, 이 세상이 얼마나 어두운 곳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부인되고 자기가 이 세상의 왕이 되고 싶어 쏟아 내었던 자신의 욕심이 부인이 되며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만을 바라보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기독교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서는 자꾸 사라의 속삭임이 들려옵니다. 신비한 것들을 체험해 보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지라합니다. 그래서 땅의 풍요를 쟁취하라 부추깁니다. ‘하면 된다’는 긍정적 사고가 우리의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기독교는 ‘해도 안 된다’를 배우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심지어 종교 행위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도 감읍하여 금방 이 세상의 복으로 채워주신다고도 합니다. 그들은 그게 쿠에이즘(coue'ism)이어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지름길이라 힘을 주어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라의 속삭임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첩경(捷徑)은 없습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누가 얼마나 잘 기다려 내느냐에 신앙의 경중(輕重)이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지름길로 생각하고 내가 생각해서 가는 길은 하갈을 안겨주는 외도의 길 일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는 교회의 방법론은 모두 하갈입니다. 그 하갈에게서 신앙의 서자인 이스마엘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저도 그러한 신앙의 서자인 이스마엘을 낳아본 적이 있습니다. 아니 지금도 종종 낳고 있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마엘이 두고두고 저를 괴롭힙니다. 어린 시절 신비한 현상을 찾아 강산을 누빈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짜릿했던 그러한 체험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저를 오랜 시간 격리시켰습니다. 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교만을 떨었던 일, 그 일이 나의 자랑이 되고 나의 행복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두고두고 저를 괴롭혔습니다. 나의 잘남이나 나의 깨끗함을 증명하기 위해 남을 헐뜯고 남의 실수를 들추어내어 험담을 했던 것이 두고두고 저를 괴롭힙니다. 나를 괴롭힌 사람에게 멋지게 복수를 하면 정말 속이 시원해 질 것 같았는데 그 일이 두고두고 저를 괴롭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늘의 복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제 안에서 스물 스물 기어 나온, 이 세상에서의 자기 자랑이나 자기 증명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는 욕심이 사라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게 했고 그 결과 저의 육적 사생아인 죄를 출산해 버린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분명히 내 생각엔 그 방법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았는데 그렇게 해서 낳은 이스마엘 때문에 고통을 받고 아주 긴 거리를 돌아오게 된 사건들이 종종 있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스마엘을 낳고 13년을 돌아간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며 사랑하고 섬기고 용서해주고 용납해주는 삶을 살기로 작정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일시적 쾌감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면 안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우리의 꾀를 따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려 할 때 우리에게 쾌감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쾌감은 즉각적이며 일시적인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편법을 사용하여 일을 도모했는데 하갈이 금방 잉태를 했습니다. 기도 응답이 즉시 들어진 것처럼 보이지요? 처음에는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 셋 다 굉장히 기뻤을 것입니다.

 

신비적인 체험을 했을 때 짜릿한 쾌감이 있지요? 내가 나의 자랑과 유익을 위해 열심히 종교행위를 했을 때 뿌듯하시지요? 열심히 기도해서 많은 재물을 얻게 되었을 때 가슴이 터질 것처럼 기쁘시지요? 그런데 그런 쾌감이 얼마나 지속되던가요? 아니 그러한 것들로 인해 여러분이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데에 정말 도움이 되었습니까? 아니요. 그러한 것들은 오히려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빼앗아 갑니다.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이 있는데 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도 보세요. 즉각적인 응답으로 행복해 했던 세 사람에게 그 응답으로 말미암아 문제가 생깁니다.

 

거기서 출생한 이스마엘로 말미암아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 세 사람의 관계가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사라는 자신이 아브라함을 부추겼음에도 불구하고 하갈이 임신을 하자 아브라함을 원망하며 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립니다.(5절) 아브라함은 위기가 닥치자 자기의 씨를 받아 임신한 하갈을 사라의 처분에 맡겨 버립니다.(6절) 자기 자신의 안전과 유익을 위해 아내를 팔아먹었던 아브라함의 못된 버릇이 여지없이 반복 됩니다. 하갈은 자기를 괴롭히는 사라와 비겁한 아브라함을 피해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6절,7절) 이렇게 그 일로 모두 다 서로를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이삭과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대대로 원수지간이 되어 싸우게 됩니다. 그 싸움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들인 아랍사람들과 이삭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의 오랜 전쟁은 바로 창세기 16장에서 비롯된 싸움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조급증이 낳은 이스마엘들은 성도를 고통 속으로 몰고 갑니다. 기다리셔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받은 계시나 내가 경험한 영적 체험이 오늘의 나의 위기에서 믿음으로 적용되지 못할 때 그것은 부질없는 몽상에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계시가 어디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시면서 언약 의식을 행하시는 것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식과 체험이 그의 위기 때에 믿음으로 발휘가 되지 않습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성취를 결코 인간의 꾀나 편법으로 이루지 않겠다는 결단의 각오와 결단의 행위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설교를 통하여, 좋은 책들을 통하여 많은 성경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신비한 체험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여러분의 머리만을 채우고 있고, 그러한 체험들이 여러분의 표피만 터치하여 전혀 믿음의 행위로 발휘되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사라의 요구를 들었을 때 지금까지 받았던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비추어 사라의 요구를 조명해보거나 판단해 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이 받은 계시의 말씀과 체험을 믿음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계시는 관념으로만 머물고 삶은 여전히 자신의 욕심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도 그런 실수를 했으니 우리도 그럴 수 있다’에서만 머물면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성도가 가게 될 길을 제시해 주시는 측면도 있지만 너희는 그러한 실수를 범하지 말라는 경고의 측면이 더 큰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실수를 정당화 하는 데 쓸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실수를 예방하는 데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우려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감찰하심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직무유기 현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도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감찰하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서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감찰하심 아래서 허락된 것이기에 우리는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결론으로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감찰하심이었음을 보여주며 교회에게 용기와 격려를 북돋아 줍니다.

 

7절 이하를 보시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경고가 하갈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 그 말씀을 전하므로 그 셋이 모두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접하게 됩니다. 하갈이 사라의 핍박을 피해 자기의 고향인 애굽으로 도망을 가던 길에 술 길이라는 곳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조급증을 견디지 못하고 고난을 피해,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 죄악의 땅의 상징인 애굽으로 도망가는 하갈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하갈 모두 똑같은 조급증 환자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의 길을 막고 다시 고난 속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창 16:9)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조급증에 걸린 성도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처한 고난 속에서 스스로의 꾀를 의지하여 애굽으로 도망가려 할 때 성도 안에서 그 성도를 감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도망가지 말고 거기서 버텨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어둠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갈에게 다시 돌아가라고 말씀을 하신 여호와의 사자는 그 하갈의 아들 이름을 ‘이스마엘’로 지어 주십니다. 이스마엘은 ‘고통을 들으시는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하갈이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부르고(13절) 그 샘을 ‘브엘라헤로이’ ‘나를 감찰하시는 살아 계신 분의 우물’이라 이름 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며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고 우리를 감찰하시는 주님이 침묵하실 때에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조급한 마음에 하갈을 붙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도망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사라의 속삭임과 타협해 버리면 안 됩니다. 세상과 타협하여 스스로의 해결책을 내어 놓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갈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로 돌아갔습니다. 하갈이 역시 조급증에 걸려 자신의 꾀로 위기에 처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로 돌아가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 했겠지요?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에 대해 무관심 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나를 계속해서 지켜보고 계셨다. 그 분은 나를 들으시는 분이요. 나를 쉬지 않고 지켜보시는 분이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 하갈을 통해 그 가정에 전달이 된 것입니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바로 우리 교회에게 전하고 싶은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조급해 하지 마세요. 우리의 꾀로 우리가 원하는 즉각적인 응답을 얻어내려 하지 마세요. 율법주의, 기복주의, 신비주의, 물질주의, 성공주의, 실용주의 등은 반드시 육적 서자인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성령으로(롬 8:9) 우리 안에 실재하고 계십니다. 그 분은 한 순간도 쉬지 않으시고 우리를 감찰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믿음을 발휘하며 인내 속에서 기다리는 삶을 사는 자로 지어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기다림의 믿음을 잘 발휘하지 못하여 우리의 꾀에 지레 넘어질 때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외치십니다. ‘돌아가라, 너에게 허락된 어둠, 너에게 허락된 침묵의 시간, 너에게 허락된 고난의 시간은 찬란한 빛의 현현(顯現)의 서막인 것이니 잘 참고 견뎌내라’

 

여러분이 당면한 그 어둠이, 그 기다림의 시간이 정말 견디기 힘드시거든 ‘브엘라 헤로이’ ‘나를 감찰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우물’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여러분을 향한 세심한 간섭이라는 이 역설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꾀로 영적인 서자 이스마엘을 낳아버리면 당시에는 유익인 것 같아 보이지만 여러분은 그만큼 길고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맞게 될 것입니다. 기다리세요. 참으십시오. 찬란한 풀무 같은 빛이신 우리 하나님이 여러분을 감당 못할 빛으로 비추실 날이 곧 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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