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성결의 영으로 부활한 자들의 삶(9)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22.

 

 

성결의 영으로 부활한 자들의 삶(9)

 

(김성수 목사)

 

 

(롬 1:2-4)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오늘은 본문 4절을 중심으로 성결의 영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기에 사도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복음이라고 하는가에 관해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먼저 4절의 ‘성결의 영으로는’이라는 어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 어구의 해석에 대해서는 지금도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그게 성령이냐, 아니면 예수님의 신성이냐, 그리고 거기에 붙어 있는 ‘카타’라는 전치사를 ‘~에 의해서’로 번역을 할 것이냐, 아니면 동질성의 전치사로 이해할 것이냐, 등등 여러 가지 논란이 많은데, 제가 생각할 때에는 우리가 몇 주간에 걸쳐서 3절과 4절을 공부한 그 방식대로 3절과 4절을 댓 구로 보게 되면 그 논란은 쉽게 풀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3절의 ‘육신으로는’이라는 ‘카타 사르카’가 창세기 6장에서부터 출발된, 죽어야 할 옛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바가 있습니다. 그 육신은 반드시 죽어야 할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이었는데, 그 육신이라는 것의 정체가 ‘다윗의 혈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힘을 가진 막강한 인물, 그리고 그가 중심이 된 이 세상의 파라다이스의 회복, 그것이 바로 다윗 왕과 같은 막강한 힘을 가진 메시아를 열망하던 이스라엘의 민속 메시아사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에 의해 살해당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을 열망하는 이 땅 왕들의 혈통은 반드시 멸해져야 하는 것이고 그 자리를 진짜 하늘의 다윗인 예수님과 그의 혈통들이 채우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성취입니다. 따라서 3절의 ‘카타 사르카’에서의 ‘카타’라는 전치사는 유사성과 동질성의 전치사인 것입니다. 육신=다윗의 혈통.

 

그렇게 ‘육신으로는’에서의 ‘육신’이 예수님이 입고 오신 죽어야 할 육신이라면 ‘성결의 영으로는’에서의 ‘성결의 영’은 무엇이겠습니까? 육신과 대조되는 것이지요? 그게 뭐겠어요?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니고 오신 불가사의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시면서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신성을 가리키는 것이 ‘성결의 영’입니다.

 

거기에서 ‘성결의’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하기오쉬네’가 형용사가 아니라 명사입니다. 그 단어는 ‘거룩, 성결’이라는 명사인데 그 단어와 ‘프뉴마, 영, 숨, 호흡’이라는 단어가 붙어서 거룩함의 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카타’라는 전치사는 앞의 댓 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사성과 동질성을 나타내는 전치사로 쓰였습니다. 그 거룩이라는 영, 거룩의 본체이신 영이 무엇과 동질성을 가지는가하면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성결의 영은 성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울러 ‘인정되셨다’라는 단어는 ‘호리스덴토스’로서 ‘선포하다’라는 뜻을 지닌 ‘호리조’의 부정 과거 수동태입니다. 그 단어도 직역을 하면 ‘선포되어졌다’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어구를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보면 ‘거룩의 본체이신 영,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그 분이 죽음에서 살아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어졌다’라는 뜻이 됩니다. ‘살아남, 부활’이 원인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되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살아나신 것이고, 그 살아나심의 사건이 그 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선포한 사건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성결의 영이라는 어구가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어야 할 육신을 입고 오셔서 모든 택한 백성들의 그 육신을 품어 안고 대표가 되고 대신이 되어 죽으신 것이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의 ‘거룩의 본체로서의 하나님 되심’이 입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늘 본문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죽어 없어져야 할 것과 부활하여 살아나야 할 것을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것을 ‘복음’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이 왜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인가?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죽었다가 살아나야 복음이지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 정말 좋은 소식이 되는 것인가요?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왜 예수님의 부활이 복음인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전 15:20-22)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셔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왕의 추구, 용사됨의 추구’를 품에 안으시고 죽으신 것이어서 복음이고,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잠자는 자들, 즉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모든 성도들의 부활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의 첫 열매, ‘아파르게’는 수확물 전체를 대표할 뿐 아니라 후에 거둘 결실까지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차 도래할 죽은 자들의 부활의 전조요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적이고 보편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성도들에게 복음이 되는 이유는 그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과 연합된 우리 성도의 부활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십자가에서 성취된 영적 언약의 성취를 첫째 부활이라고 부르고, 가시적인 새 몸으로서의 부활을 둘째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그 둘은 사실 따로 떨어져 있는 개별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가시적인 둘째 부활에 참여할 자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첫째 부활의 삶으로 그 둘째 부활의 필연적 도래를 증거 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의 연관성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집중적으로 공부할 부분이 바로 그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의 지상적 삶에 관한 부분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책이 바로 요한 계시록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천상의 완료된 교회와 지상의 가시적 교회를 넘나들면서 천상의 완료된 교회가 이 지상에서 어떠한 삶을 통과하게 되는지에 관한 교과서 같은 책입니다. 그 중에서 계시록 20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계 20:4-6)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여기에서의 이 ‘천년’이라는 단어가 전 천년설과 후 천년설, 무 천년설이라는 각기 다른 종말론의 해석을 낳게 된 단초입니다. 여기에서의 천년은 단순히 어떤 제한된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천이라는 숫자는 항상 완전함과 완료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등장합니다. 그 숫자는 완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수인 10이 세 번 곱해진 것입니다. 거기에는 통치의 수 10과 하나님의 수인 3이 결부됩니다. 계시록 17장의 열 뿔과 열 왕 등이 왕적 통치를 가리키는 10이라는 숫자의 용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구약에서도 그러한 용례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제가 전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면서 ‘내 말을 잘 지키는 자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천이라는 정확한 숫자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의 완전함과 완료 성을 보여주신 것이라 했지요? 지금 계시록 20장의 진술은 바로 그 천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서 왕으로 다스리시고 성도도 살아나서 왕 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언제 시작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 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성도의 왕 노릇이 시행이 되는 그 천년이 언제 시작되는 지 잘 보세요.

 

(계 5:9-10) “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잘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둠의 나라에서 건져 올리셨습니다. 그들이 그때부터 이 땅에서 왕 노릇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9절과 10절의 ‘피로 사고’, ‘하나님께 드리시고’,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시고’, ‘왕 노릇 하는’ 것은 동사의 시제 상, 모두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시록 20장의 그 천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성도가 이 땅에서 왕 노릇을 하게 되는 천년은 상징적인 숫자로서 기간이 아닌 상태를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자들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영생’의 ‘상태’를 ‘천년’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들이 사망의 올무에 갇혀 버린 상태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누구입니까? 므두셀라입니다. 므두셀라가 몇 년을 살았습니까?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공부할 때 보았지요? 창세기 5장은 죽음의 족보였습니다. 모두 ‘죽었더라’로 끝이 나는 족보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에 속한 자들이 대부분 900살 이상을 산단 말입니다. 그 중에 천 살 넘게 산 사람이 있었나요? 므두셀라가 31년만 더 살았어도 천 살을 산 사람이 되었을 텐데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천 살 이전에 다 죽이신단 말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가리키는 천년이라는 ‘상태’, 즉 영생을 살게 될 성도와 대조되는, 육신으로서의 인간들의 수명의 한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여 천년이라는 영생의 상태를 살게 되는 것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왕 노릇을 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영생을 살고 계시지요? 요한복음 3장 36절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여러분은 지금 영생의 상태인 ‘천년’을 살고 계신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이 땅에서 왕 노릇을 한다고 하는 이들이 이 땅에서 전부 죽습니다. 다시 계시록 20장으로 가보겠습니다.

 

(계 20:4)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에서 ‘목 베임을 받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도끼’라는 뜻을 지닌 ‘펠레퀴스’에서 파생한 동사 ‘펠레키조’의 완료 수동태 분사입니다. 반면에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에서 ‘살아서’는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그것은 천년 동안 왕 노릇을 하게 될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죽게 된다는 것이고, 그들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이미 영 단번에 살아나서 왕 노릇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아주 해석하기가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성도라는 사람들은 이 역사 속에서는 마치 도끼로 목 베임을 받는 것과 같은 핍박과 고난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겪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한 번에 살아나게 된 자들의 왕 노릇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왕이 아니라 왕 노릇이라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왕 노릇이라는 것은 왕이신 분에게 붙어서 그 왕이 가신 길을 그대로 좇아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쉬운 말로 묵시 속에서의 왕들의 역사 속에서의 왕 노릇을 말하는 것입니다. 빌라도 앞에서 ‘내가 왕이라’고 하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셨지요? 따라서 성도의 왕 노릇 또한 세상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어야 맞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역사 속에서의 천년, 즉 영생을 사는 이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의 삶이 반드시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 6:9-11)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잘 보시면 여기에서 죽임을 당한 성도들이 하나님께 원수를 갚아달라고 조르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냐면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가 가진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입니다. 그 증거는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겠지요. 그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레위기 4장 7절의 말씀이 형상화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 바쳐질 제물의 피가 번제 단 아래에 뿌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제물이 되어 번제 단 아래에 피를 뿌린 자들이라는 말인데 성경은 그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 ‘죽임 당함’이라는 단어가 바로 앞 장에서 똑같이 나옵니다.

 

(계 5:6)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똑같이 나오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죽임을 당하신 분은 어린 양 예수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하늘의 왕이셨습니다. 바로 그 왕의 죽음이 그대로 성도들에게서 실재 화되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 죽임 당함을 왕 노릇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은혜로 부활을 하게 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부터 살아난 삶, 즉 영생을 살게 되고, 그 삶이 천년의 삶이며, 그 천년의 삶은 성도들의 죽임 당함으로 점철이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죽이는 이가 누구냐인 것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이 세상 원수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임 당함의 실행 주체가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감안 할 때, 그 예수님의 죽임 당함을 실재 화하여 살게 되는 성도의 죽임 당함은 하나님에 의한 죽임 당함이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 역사 속에서 천년을 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죽이시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왕 노릇이 될 수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영생을 사는 일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게 복음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심판이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는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벧전 4:17-19)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 지어다”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이 된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집’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오이코스’는 house라는 의미보다는 household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빌립보 감옥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대답을 해 줍니다. 거기에서 똑같이 쓰인 단어가 ‘오이코스’입니다.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되면 그의 천국 가족들의 구원 사역에 참여되게 된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심판이 시작이 되는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천국 가족, 교회인 것입니다.

 

(딤전 3:15)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 이니라”

 

보세요. 바울이 하나님의 집이 뭐라고 합니까? 교회라고 하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먼저 이 땅에서 심판을 통과하고, 그 다음에 유기된 자들이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그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잘 보시면 베드로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을 하고는 바로 뒤에서 ‘우리’라고 그 말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가족은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먼저 심판을 통과하고 교회 밖의 존재들이 마지막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18절에서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는다’고 말을 한 것입니다. 그건 성도가, 의인이 이 세상에서 통과해야 할 죽임 당함의 삶이 얼마나 힘겨울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나 그 역사 속에서의 심판의 과정을 통과해 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 땅에서 그러한 힘겨운 죽임 당함의 삶, 심판의 삶을 성도에게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먼저 말라기 4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말 4:1-2)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여러 번 말씀 드렸던 것처럼 말라기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강림으로 임할 종말적 심판을 주제로 기록이 된 책입니다. 그 종말적 심판 때에 풀무 불이 떨어져서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를 다 불살라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이 의인에게 가 닿으면 치료하는 광선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밑의 5절을 보면 그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선지 엘리야가 와서 그 때가 마지막 불이 떨어지는 심판의 날이 될 것임을 알려 줄 것이랍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엘리야가 누구라고 하셨지요? 세례 요한이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풀무 불같은 극렬한 심판의 날이 언제 시작되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오심으로 심판은 이미 시작이 된 것입니다.

 

(말 3:1-4)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눅 12:49)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 하리요”

 

보시다시피 분명 예수님은 심판의 주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은 한 무리는 완전히 멸망으로 몰아넣는 심판임과 동시에 다른 한 무리에게는 금과 은을 연단하여서 깨끗하게 하는 것과 같이 더러운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멸망으로 떨어지게 될 자들의 심판은 묵시 속에서 결정이 나지만 연단의 심판을 받을 자들은 이 역사 속에서 심판을 통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역사 속에서 심판의 고난을 통과하지 않는 자들은 묵시 속에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자들이 되는 것이고 이 역사 속에서 심판의 고난을 통과하는 자들이 연단의 심판을 통과하여 결국 정금같이 나오게 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가족들에게 먼저 임한다고 반복하여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심판은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복이지요.

 

(슥 13:7-9)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9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칼에게 명령을 하시는데 제일 먼저 누구를 치라고 하시지요?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 목자가 칼에 의해 침을 받으면 양들이 흩어진다고 합니다.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삼분의 이와 삼분의 일로 나누어지는 데 그 삼분의 이는 멸절을 당하고 삼분의 일이 남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남은 삼분의 일을 불에 던져 은같이 연단하고 금같이 시험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에 불같은 시험이 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남겨진 자라는 것이 확증되는 것이 바로 고난인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은 축복이다? 저주다?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벧전 1:6-7)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14)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의해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여 천년을 살게 되고 그 천년의 영생은 곧 죽임 당함, 고난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공식이 섰습니다. 그리고 그 죽임 당함의 삶은 다윗의 혈통인 옛 사람의 죽임 당함인 것이고 그것이 죽는 것이 바로 축복이기에 성경이 그렇게 많은 곳에서 성도의 고난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가족은 반드시 죽임 당함, 즉 연단의 고난과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예가 창세기에 나오는 에녹입니다.

 

(창 5:24)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 하였더라”

 

에녹이라는 단어는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5장의 죽음의 족보 속에서 누군가가 하나님과 동행을 하고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에녹을 부러워하며, 에녹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가고 싶다고 수선들을 떱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정말 그렇게 좋은 것인가요?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않은 것이 그렇게 부러워 할 일입니까? 에녹은 다른 사람들이 900살 이상을 살 때 365살에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3분의 1 정도 살다가 간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그게 정말 복인가요? 성경을 보면 에녹에게 많은 자식들이 있었고 아내가 있었습니다. 에녹이 그렇게 일찍 떠나고 난 뒤에 그의 식솔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요? 그리고 만일 에녹이 죽음만 보지 않았지 365살까지 골골대며 앓다가 갔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래도 그게 부러우세요? 어차피 우리도 죽음이라는 문만 통과한다 뿐이지 에녹과 똑같은 하늘나라로 들어갈 거 아닙니까? 그런데 단지 죽음이라는 순간의 문을 통과하지 않은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인가요?

 

그건 우리가 부러워 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이 에녹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부활한 자의 삶을 사는 이들이 겪어야 할 이 땅에서의 죽음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오히려 이 세상에서 검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에 의해 가족들과의 관계를 단절당하고, 이 세상의 힘들과 가치들과 일찌감치 단절의 삶을 살게 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언제든지 순응해야 하는, 세상 적 가치관으로 볼 때 자신의 삶을 차압당하는, 죽음의 삶이 바로 산 자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어린양이 어디로 이끌던지 따라가야 하는 삶, 그게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그들이 바로 영생을 가진, 산 자라는 말입니다. 그와 반대로 가인의 후예 중에도 에녹이라는 사람이 있지요?

 

(창 4:16-17) “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 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이 에녹도 역시 ‘시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입니다. 저주의 땅인 에덴 동편으로 쫓겨난 가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이 에녹이라는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쌓은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훌륭하게 성공을 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의 이름을 보면 전부 강한 자, 아름다운 자, 뛰어난 자라는 의미의 이름을 갖고 있고 그들은 모두 문화와 문명과 경제의 주인공들로 성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영원한 죽음 속에 거하게 될 가인의 후손, 즉 뱀의 후손들의 삶의 시작이고, 영원한 삶, 즉 영생으로 부활을 할 여인의 후손들의 시작은 오히려 이 세상에서 죽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쪽 라인에 공히 ‘에녹’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라인과 셋의 라인은 그렇게 갈라지는데 중요한 것은 셋의 라인, 즉 여인의 후손의 라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창 4:26)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른 것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너희들의 이름 말고 나의 이름을 부르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건 너의 이름을 가진 옛 사람과 함께 장렬하게 죽으라는 말과 똑같은 말인 것입니다. 뱀의 후손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힘과 업적을 자랑하며 떵떵거리며 삽니다. 그러나 여인의 후손들은 참으로 연약하게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삶이 바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 버린 죄인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리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육적 이름을 담고 있는 옛 사람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게 성도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통과해야 하는 축복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죽어버린 자신의 옛사람의 죽음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재 화하여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계속 죽어가는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절대 변개될 수 없는, 이미 일어난 묵시 속의 일이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기 때문에 옛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것을 통과하지 않은 자들은 반드시 최후의 심판대에서 영벌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러한 구원의 현실을 몸소 이 땅에서 보여주고 가신 것입니다.

 

(겔 9:5-6) “5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 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 하더라”

 

6절을 보시면 심판이 시작되는 장소가 ‘성소’라고 나와 있지요? 그 단어가 히브리어 ‘바이트 파님’입니다. ‘파님’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빛을 가리키는 단어라 했지요? 그리고 ‘바이트’는 헬라어 ‘오이코스’와 같은 단어입니다. household입니다. 그러니까 심판은 하나님의 임재 앞의 가족, 즉 하나님의 아들에게 가장 먼저 일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의 가족이 가장 먼저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요? 하나님의 가족이신 예수가 우리의 죄 된 육신을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떨어져야 할 심판을 먼저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육신, 사륵스는 이 세상에서 왕이 되어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자아실현과 자아확립과 자아확장의 죄 성, 즉 다윗의 혈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용사, 유명한 자, 거인, 네피림이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이었던 것을 잊지 마세요. 모세가 그러한 노아시대의 심판대상자들을 육체, 육신이라고 불렀던 것을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육의 심판을 불세례라고 했던 것 기억나세요? 다시 누가복음 12장으로 갑니다.

 

(눅 12:49-50)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 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불을 던져 심판을 하시기 위해 당신이 오셨다고 하시면서 당신이 받을 세례에 대해 답답해하고 계시지요?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말라기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불을 던져 멸망시킬 자들을 멸망시키시고 연단할 자들을 연단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 심판을 당신이 먼저 받으셔야 함에 답답해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 불세례가 뭔지 볼까요?

 

(막 10:38-39)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 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뭡니까? 불세례, 불 심판이 뭐예요? 십자가입니다. 거기에서 무엇이 죽었습니까?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시고’가 저주를 받아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그토록 줄기차게 반복되어 기록이 되어 있던 불 심판이 무엇이지요? 성결의 영을 대적하는 육신이 죽는 것입니다. 바로 그 불 심판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제일 먼저 받아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새 몸으로 부활을 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심판이 완료가 되었음을 만 천하에 공포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성도에게 떨어질 하늘의 불 심판은 기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받는 불세례를 똑같이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까?

 

(눅 3:16)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 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당신의 십자가를, 이 역사 속에서 우리 어깨위에 얹어 놓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떨어질 심판의 십자가를 모두 도말해 버린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의 인생 속에서, 왜 성결의 영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세상에 설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 세상에 서지 않았다면 우리의 결국은 어떻게 끝이 나게 될 것이었는지, 그러한 자들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도저히 살아 날 수 없고 살아나서도 안 되는 이런 존재를 어떠한 능력으로 살려내신 것인지에 관해 몸으로 배우고 말씀으로 배우는 신앙생활이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바로 나에 대한 신뢰와 집착을 놓아가게 되는 불 시험의 장인 것이며, 그 과정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죽어 가는 것이고, 그렇게 ‘나’라는 존재가 죽어갈 때, 십자가에서 이미 죽어 버린 나의 옛 사람을 주관적 믿음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나’라는 존재의 ‘이미 죽었음, 없음의 자리로 돌아갔음’을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 안의 새 생명이 그 옛 사람의 부패한 시신을 뚫고 나에게 조금씩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묵시 속에서 완료가 된 창세전 언약이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에 실재 화되어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고후 4:10-11)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예수의 죽음, 즉 십자가를 항상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쓰인 동사의 시제가 전부 현재시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몸에 예수의 죽음이 실재 화되어 나타나는 것도 현재진행인 것이고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 것도 현재 진행입니다. 그 말은 곧 우리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상태, 즉 부활한 자로서 영생을 사는 자의 증거는, 그의 몸에 예수의 죽음이 나타나느냐 안 나타나느냐로 판정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은혜로 부활한 자가 되어 이 세상에서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옛 사람의 죽음인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 예수의 죽음, 즉 십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건 생명이 없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고난은 일차적으로 옛 사람의 죽음이라는 십자가 사건의 실재화인 것이기도 하지만, 두 번째로는 예수와 연합된 자들의 삶 속에서 예수가 누구이시며 예수가 세상에게 어떠한 대접을 받으셨는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로 성도의 삶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냥 그릇으로서 십자가를 담아내는 역할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 15:18)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세상이 예수를 어떻게 미워했는지를 그대로 경험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요 15:25) “25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함 이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게 아무런 연고 없이 미움을 당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고난도 때로는 아무런 연고 없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삶에 고난이 닥칠 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기는가?’에 대한 원인 규명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러한 고난이 자신의 옛 자아를 죽여 감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옛 사람이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복음의 현실을 깨닫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걸 기억해야 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이렇게 아무런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이 바로 ‘나’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닥치는 하늘의 불 심판에 의해 이미 죽어 버린 우리의 영적 현실을 자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이해하며 이 세상에서 조금씩 눈을 들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 4:16)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벧전 5:9-10)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 이니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고후 4:16-18)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 이니라”

 

어떠세요? 고난이,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의 철장이 우리에게 내리는 저주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6장의 그 제단 아래의 영혼들, 즉 묵시의 영역인 하나님 나라에 이미 완성된 자로 존재하고 있는 그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신원이 어떤 신원이겠습니까? 나를 죽인 자들에게 복수해 달라는 그런 신원일까요? 그 신원은 하늘에 완성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이 세상 첫 창조에 속한 사라져야 할 옛 것들을 하루 속히 소멸시켜 주십사’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료에 대한 기원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바로 이 세상에서 그러한 소원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 옛 사람의 손아귀에서 이렇게 당해야만 합니까? 하나님 어서어서 저의 이 옛 사람이 무너지게 해 주시고, 죄와 무관한, 완료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을 살게 해 주옵소서’ 한 마디로 ‘나를 죽여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 기도가 어디에서 원시적으로 보여졌지요? 가인에게 맞아죽은 아벨의 피가 땅 속에서 신원했던 것 기억하세요? 바로 거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왔던 아벨이 정말 하나님께 복수를 부탁했던 것일까요? 아벨의 신원은 자신의 제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마저도 살해하려 했던 ‘죄’에 대한 신원이었던 것입니다. 그게 천상의 성도들의 신원입니다. 그런데 그 죄인 중의 괴수가 바로 내 안에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미 이 땅에서 하늘을 사는 성도들은 ‘나’를 죽여 달라는 신원을 매 순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열망이 있나요?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옛 사람의 죽음에 대한 열심과 노력과 추구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왜요? 우리 안에 성령이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의 지향점이 정해지고 우리 삶에 한 방향으로의 지향성이 생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열심히 노력해서 그 옛 사람의 죽음을 성취해 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놓은 그 영적 현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내 삶 속에서 그 일이 실재 화되기를 자연스럽게 열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의 열심 안에 들어 있는 자의 필연적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나의 무력함과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아는 자들이 어떻게 그 전과 똑같을 수가 있나요?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잘 몰랐던 때와 지금과 여러분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변함이 없습니까? 예전 같으면 당장에라도 목을 매달아야 할 그런 일들이 여러분에게 시시한 일로 받아들여 지지 않습니까? 심지어 질병이나 죽음을 생각할 때도 예전처럼 그 앞에서 호들갑을 떨거나 하지 않지요? 작은 사고에도 벌벌 떨던 사람들이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되셨습니다. 예전에는 절대 참을 수 없었던 타인의 해꼬지나 모함 등에 대해 전처럼 흥분하지 않고 심드렁하게 지나칠 수 있는 여유도 조금 생기지 않았나요?

 

예전에는 이 세상의 힘과 가치를 쟁취하고 소유하고 축적하기 위해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기도 하잖아요? 분명 어떤 변화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어떤 성숙이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비워지는 삶에 대한 열망이 우리에게 있었고,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러한 비움에 대한 추구와 선한 삶에 대한 열심이 분명 우리에게 있었지요? 목사가 아무리 ‘은혜가 모든 것을 다 덮으니까 그냥 살라’고 초를 쳐도 여러분 안에 여러분이 그냥 막 살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꿈틀거려서 여러분을 아래로 아래로 밀어내리지 않던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열심에서 격발이 된 진짜 성도의 열심인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극한의 가난에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도에 지난 연보를 했던 것이 정말 연극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투옥과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며 산천을 누볐던 하나님의 사도들의 열심이 정말 외식이었을까요? 감옥 속에서도 찬양을 했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담대함이 쇼였습니까? 아닙니다. 분명 성도에게는 변화와 성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피눈물 나는 고민과 열심과 노력이 성도의 삶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나’라는 존재의 가치 격상이나 영광 챙기기나 자아 확립이나 자아 화보, 자아 성취의 도구로 쓰기위해 인위적으로 조작해 내는 오늘날 성도라 자처하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어서 제가 지난 일 년 간 인간들의 행위를 그렇게 두들겨 팼던 것입니다.

 

제가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1년 전에 수요예배를 마치고 식당에 앉아 우리 교회 장로님들께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앞으로 얼마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설교를 하게 될 텐데 아마 많이들 혼란스러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설교자로서 목적하고 있는 것이 어느 정도 성취되었다고 생각 될 때 대 반전이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그냥 잘 지켜봐 주세요.’ 그리고 지난 1년간 다소 과격하다 싶을 만치 인본주의적 성화 론에 대해 메스를 대어 도려내는 설교를 했습니다. 많이들 아프셨지요?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 그냥 묵묵히 지켜봐 주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우리 교회 장로님들과 같은 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그런 결심을 했던 이유가 이러합니다. 초창기에 서머나 교회를 개척하고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빠져있는 신비주의나 기복주의를 깨기 위해 여느 개혁주의 교회와 마찬가지로 말씀의 중요성과 성도의 삶에 대해 집중하여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저희 교회는 정말 열심히 말씀을 공부했고 올바로 살기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서머나 교회가 풍성한 말씀과 삶을 가지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얏 잡아 보기도 하고 경홀히 여기기도 하며 무례하기까지 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문제의 중심에는 항상 성경을 가장 열심히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서 있었고 착하게 살자고 떠벌리며 다니던 사람들이 편당을 가르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을 했던 교회입니다. 그건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압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과 열심이 우리 자신을 비워내고 겸손의 자리, 티끌의 자리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교만과 위선의 자리로 밀어 올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신비주의나 기복주의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치와 위상과 만족을 챙기기 위한 가짜 열심과 가짜 업적과 가짜 섬김과 가짜 착함을 쳐내기로 작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저는 성화 론에 대해 목숨을 걸고 반대를 하는 이들의 책과 논문들과 그들의 강의들을 정말 치열하게 탐독하고, 듣고, 읽고, 쓰고 하면서 제 나름대로 가짜 성화를 부수는 외로운 싸움을 해 왔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옳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주장 속에서 과연 개혁주의의 성화론 중 어떤 것이 허구이며 어떤 것이 깨져 나가야 할 것인지를 배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기독교를 좀 더 풍성한 시각으로, 거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 허구이며 어떤 것이 깨져 나가야 할 것인지가 명료해 졌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바로 그것들을 깨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쌓은 성화를 부수는 작업은,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제 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으로 감지가 된다는 것을 저는 익히 잘 압니다. 많은 분들이 아파할 것을 알았고, 심지어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못 견디고 떠나게 될 것이라는 것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깨져야 할 것이 깨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가치와 만족과 영광을 챙기기 위해 내어놓는 종교적 열심은 개인과 교회를 파괴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홀로 감수하며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실제로 못 견디고 떠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로 혼란스러워 하시는 것을 저는 1년간 고통스럽게 지켜봤습니다.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나를 이끌고 계신가?’에 관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놀란 것은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묵묵히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삶을 단속하고, 성도다운 삶을 견지하며, 선한 일에 힘을 쓰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눈물을 뿌리며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가 ‘그냥 마음대로 사세요’라고 매 설교 때마다 걸림돌을 던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요동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고민을 던져 버리지 않았고 바르게 살고자 하는 열심과 하나님의 백성다움에 대한 고뇌를 놓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목사가 ‘이렇게 사십시오.’ 혹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라는 적용의 부분에서 그 어떤 걸림돌을 던지더라도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끌려가는 이들의 삶에는 조금도 요동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옛 자아를 죽여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에서 격발이 되는 진짜 열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열심 있는 삶을 허락하시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십시오. 아니, 제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열심히 사실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설교 시간을 통해 ‘어차피 티끌인 인간에게 인권이 어디 있냐?’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실은 길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이 듭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보는데 쓰레기로 보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원론적 차원에서 욕을 하셨지만 그들을 바라보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인간 행위의 무용함과 무력함을 설교하면서도 20년째 한국의 고아원 아이들 마흔 두 명의 생활비를 지금까지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나오는 목회 활동비는 전액 그리로 보냅니다. 그리고 교인들 밥을 사줘야 할 일이 있으면 제 돈으로 메웁니다.

 

그리고 제가 쓴 책이 한권 나올 때마다 한국에서 점심끼니도 해결하지 못하는 가난한 신학생들에게 무료로 책을 나누어 줍니다. 그래서 책이 한 권 나올 때마다 600만원씩의 빚이 늘어납니다. 작년까지는 그들에게 점심값까지 보내 주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다고 해서, 그런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뭐, 하고 그런 일을 그만 두는 게 옳은 것일까요? 우리에게서는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님이 주시는 부담이 얹혀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최선을 다해 그 일에 열심을 부리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은 죽은 것이지만 우리 안에 성령이 살아 계시기에 성령으로 살아 난 자들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다운 열심을 격발해 내신단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서머나 교회는 지난 6년간 누구 못지않은 열심도 부려봤고 그 열심들 중에 어떤 것이 위선의 열심이었고 가짜 열심이었는지도 이제 알았습니다. 어떤 것이 죄에서 격발된 열심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격발이 되는 진짜 열심인지 구별할 수 있는 눈도 어느 정도 갖게 되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이제 자기 의로 쌓이지 않을 수 있는 그러한 삶을 열심히 살아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진짜 열심을 부려서 삽시다. 그때 우리는 죄로 인한 고통과 불쾌와 상심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자유와 풍요를 한껏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죄라는 주인에게서 조금씩 놓여나는 그 삶이 바로 하늘 백성의 왕 노릇이며 자기부인의 삶이며, 천년의 삶이며, 영생인 것이며, 죽임 당함의 삶인 것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