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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간음한 여인을 통해서 본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사랑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21.

 

 

간음한 여인을 통해서 본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사랑

 

(김성수 목사)

 

 

(요 7:53-8:11) “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 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성경을 읽다보면 서로 모순이 되는 듯해 보이는 구절이 종종 나타납니다. 그 중에서도 율법에 근거한 철저한 하나님의 공의와 하해같이 넓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구절들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서로 요원(遙遠)해 보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라는 구절과 ‘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9:13)라는 구절 은 마치 서로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모순되어 보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어떻게 해결이 되는가에 대한 그림입니다. 오늘 본문을 주해해 나가기 전에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요한복음의 전체 흐름을 간단하게 복습해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의 전체 흐름의 맥락 속에서 이해를 해야 그 이해가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장에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세상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빛은 세상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나하나 해 나가십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들과 연합이 되시고 창세전에 택해진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가셔서 그들을 불러내십니다. 요한복음 1장은 창세기 1장과 정확하게 같은 구조를 갖고 있었지요? 우리는 거기서 창세기의 첫 창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새 창조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아 가십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첫 번째 이적을 베푸십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집에 포도주를 채워 주심으로 잔치를 잔치답게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그 사건은 창세기의 일곱 째 날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참된 안식의 완성, 즉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완성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아리가 여섯 개 밖에 없었던 것이고 예수님이 일곱 번째 항아리의 포도주가 되셔서 그 잔치를 잔치답게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저는 그 에피소드의 제목을 예수님의 성전 파괴라 붙였었지요. 그 이야기는 옛 성전인 율법과 인과율을 무너뜨리시고 참 성전이신 당신의 공로로만 구원이 이루어질 것임을 공포하신 사건입니다. 옛 성전인 율법이 부정되고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이 완성되는 이야기는 오늘 본문에서도 반복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2장이 끝나고 3장에서 니고데모의 사건이 이어집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의 관원이고 유대의 선생이었으며 부자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구원에 적합한 모든 것을 갖추고 소유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못 박아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 사건은 인간 측에서 내어놓는 됨됨이나 업적이나 노력이나 그 어떤 것도 인간의 구원에 보탬이 될 수 없음이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는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관원 니고데모와는 정 반대로 그 속에서 그 어떤 자격이나 열심도 찾아 볼 수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여인에게 하늘의 생수를 주심으로 그 여인이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지 인간 측에서의 어떤 자격과 조건도 필요 없음이 한 번 더 확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그렇게 처참하게 썩어버린 여인도 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3장과 4장을 연결하여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는 4장 후반부에서 믿음은 표적을 봄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보지 않고 믿는 것임을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을 통해 교훈하십니다.

 

그리고 5장으로 넘어가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을 통하여 구원은 그렇게 자기의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주님만 바라보는 것임을 보여주시고 6장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죄인들의 구원이 하늘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이 자세하게 설명이 됩니다. 그래서 6장의 배경이 유월절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7장에서 초막절을 배경으로 인간은 율법을 통해, 다른 말로 옛 성전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없음에도 계속해서 자기의 가능성을 버리지 못하고 은혜를 붙들지 못함을 보여주십니다.

 

열심히 절기를 지키고 정성스럽게 성전 제단에 물을 퍼다 부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와 다윗 왕국의 영화를 회복시켜 달라는 염원으로 열심을 부리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물이다’라는 말씀을 던지시며 진정한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참된 행복과 영화가 주어질 수 있음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7장까지의 내용을 한 마디로 줄이면 ‘오직 은혜’입니다. 인간의 참 행복, 구원은 율법에 의해서, 옛 성전의 방식으로, 이 세상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참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며 그 행복은 이 세상의 떡이 아닌 하늘의 떡임이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통해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내용이 함축되어 한 편의 드라마로 재연되는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 이 둘이 어떻게 화해를 하여 구원을 이룰 수 있는가, 죄인들을 반드시 벌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당신이 선택하신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크고 넓은 사랑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구원을 완성해 내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오늘 본문의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한 절 한 절 공부해 보겠습니다. 본문 7장 53절과 8장 1절은 세상 사람들과 예수님의 가는 곳에 대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7:53-8:1) “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사람들은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갔는데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는데 우리 주님은 머리 둘 곳이 없으셨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조입니다.(마 8:20)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부요를 비우시고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것입니다.(고후8:9) 구원은 바로 그 십자가의 사랑에 의해 이루어질 것임이 이미 힌트 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3절을 보시면 그 주님이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십니다. 우리가 지난시간에 성전에서 ‘내가 물이다’라고 외치신 주님의 모습을 공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이 어떻게 옛 성전인 율법을 부정하시고 참 성전의 모습을 드러내시는지가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배경이 성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잡아왔습니다. 그 모습을 잘 그려보세요. 지금 율법의 대명사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죄인을 고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판 석에 앉아 계시고 죄인 하나와 고소인 다수가 등장인물입니다. 그러니까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은 자타가 공인한 죄인으로 주님 앞에서 선 것이고 나머지는 참소하는 자들로 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대조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세력의 대표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참소입니다.

 

(계 12:10)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하나님을 떠나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죄인들은 남의 잘못이나 허점을 들추어내서 참소를 하여 상대적인 우월감을 확보하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쏟습니다. 그것을 자기방어 혹은 통제성향이라 부릅니다. 그게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세력의 특징을 참소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어 하는 죄인들의 속성은 율법의 진의를 곡해하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죄를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필연성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 주신 율법을 구원에 이르는 사다리로 생각하고 율법을 열심히 지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존심도 지키고 하나님의 복도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철저한 자기 부인을 요구하십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티끌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불가능한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온전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크심 앞에 항복하여 순종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이끄시는 참 생명의 길을 순종하여 좇아 올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한 사람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만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함께 간음하다가 도망간 사람, 간음하던 여인을 잡아온 사람들, 그들은 자기들이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 자신의 죄 인됨을 인정하지 않고 도망하고 참소하는 그들이 사망으로 던져질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은 참소하는 자들의 말을 들으시곤 몸을 굽히셔서 땅에다 무언가를 쓰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무엇을 쓰신 사건은 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가 시내산에서 돌 판에 십계명을 쓰신 사건이고 두 번째가 벨사살 왕 때 벽에다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쓰신 사건이고 세 번째가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인간들에게 요구되는 율법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산 위에서 그 율법을 쓰시는 동안 아래서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들이 애굽에서 보았던 풍요의 신인 아피스의 암소와 하돌의 황소 숭배를 기억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가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낸 여호와라’고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그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이 그 현장에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죄와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의 돌 판은 죄 앞에서 깨어진 것입니다. 그 것은 율법에 의한 죄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상징적으로 그들은 거기서 다 죽은 것입니다.

 

두 번째 벨사살 왕의 잔치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은 무엇입니까? 다니엘서 5장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의 금 그릇 은그릇으로 술을 받아 마시고 금은동철과 나무, 돌로 된 신들을 찬양한 벨사살을 심판하셔서 그날 밤 다리오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 하십니다. 그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단 5:26-28) “26 그 글자를 해석하면, 이러합니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임금님의 나라의 시대를 계산하셔서, 그것이 끝나게 하셨다는 것이고, 27 '데겔'은, 임금님이 저울에 달리셨는데, 무게가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것이고, 28 '바르신'은 임금님의 왕국이 둘로 나뉘어서 메대와 페르시아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한 심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쓰셨다는 것은 율법에 근거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서로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렘 17:12-13) “12 영화로우신 보좌여 원시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사건은 바로 이 예레미야의 말씀을 알기 쉬운 그림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보시면 흙과 생수이신 하나님 그리고 여호와를 떠나는 자(죄인) 등의 오늘 본문의 등장인물과 소품들이 그대로 나오고 있지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율법의 저울에 달아서 부족한 죄인들, 다른 말로 흙에 기록되어 죽어야 할 자들이 어떻게 살아나게 되는가에 대한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저울에 달아서 부족함 없이 합격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롬3:10)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이 그 여인을 참소하던 자들에게 그 여인을‘돌로 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직접 주신 율법이니까요.(레 20:10; 신 22:22)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로 치긴 치는데 ‘죄 없는 자’만 돌로 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숙이시고 흙에다가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그랬더니 어른에서 젊은이까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모두다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을 것이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개괄적인 내용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키가 되는 단어가 8절의 ‘다시’라는 단어입니다.

 

(요 8:8)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하나님께서 직접 무언가를 쓰셨다가 다시 쓰셨던 사건이 시내산의 십계명 돌판 사건이지요? 이 두 에피소드가 어떤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출애굽기의 십계명 돌판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 올려 보세요.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돌 판이 인간의 죄를 직면하자 심판이 일어났습니다. 그 일로 삼천 명이 죽었던 것 기억나시지요? 그리고 두 번째 다시 쓰신 십계명 돌 판이 내려와 법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두 번째 돌 판은 모세가 준비하고 하나님이 쓰신 돌 판입니다.(출 34:1) 다른 말로 이 세상의 것과 하늘의 것이 합쳐져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율법은 법궤 속으로 들어가 법궤 뚜껑으로 가려집니다. 그리고 그 위에 흠 없는 제물의 피가 부어져서 율법이 가려집니다. 거기서 죄인들이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궤 위를 시은 좌(mercy seat)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사건 중간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 끼어 있습니다.

 

(출 32:30~34)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 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31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 하였나이다 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 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34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바로 중보자 모세의 중보가 그 두 사건 사이에 끼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약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율법 아래에서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 모두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살아나게 되는 교회의 이야기가 바로 십계명 돌 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죄를 상징하는 금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어 이스라엘에게 마시게 합니다.(출 32:20) 오늘 본문에도 똑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생수이신 예수님이 죄를 상징하는 티끌에 섞여 버리는 모습이 나오지요? 생수이신 예수님이 흙에다 무언가를 쓰시는 장면이 바로 그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십니다.(요 1:1) 그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흙과 섞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이 죄인들에게 제시되자 죄인들의 죄가 드러나고 그들이 그 앞에서 떠나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티끌은 금송아지 가루처럼 죄와 죄인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흙, 티끌이 죄를 상징한다는 것은 미가 서에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미 7:17) “17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 하리이다”

 

여기서 티끌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흙’입니다. 이처럼 흙은 뱀이 먹는 것, 즉 뱀이 장악할 수 있는 상태로 되어 있는 대상, 다른 말로 죄와 죄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티끌을 섞은 물 앞에서 죄가 드러나게 되는 사건은 민수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민 5:11-27)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의 아내가 실행하여 남편에게 범죄 하여 13 타인과 정교를 하였으나 그 남편의 눈에 숨겨 드러나지 아니하였고 그 여자의 더러워진 일에 증인도 없고 그가 잡히지도 아니하였어도 14 그 더러워짐을 인하여 남편이 의심이 생겨서 그 아내를 의심하든지 또는 아내가 더럽히지 아니하였어도 그 남편이 의심이 생겨서 그 아내를 의심하거든 15 그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로 가서 그를 위하여 보리 가루 에바 십 분지 일을 예물로 드리되 그것에 기름도 붓지 말고 유향도 두지 말라 이는 의심의 소제요 생각하게 하는 소제니 곧 죄악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니라 16 제사장은 그 여인으로 가까이 오게 하여 여호와 앞에 세우고 17 토기에 거룩한 물을 담고 성막 바닥의 티끌을 취하여 물에 넣고 18 여인을 여호와 앞에 세우고 그 머리를 풀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소 제물 곧 의심의 소 제물을 그 두 손에 두고 제사장은 저주가 되게 할 쓴 물을 자기 손에 들고 19 여인에게 맹세시켜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네 남편을 두고 실행하여 사람과 동침하여 더럽힌 일이 없으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쓴 물의 해독을 면하리라 20 그러나 네가 네 남편을 두고 실행하여 더럽혀서 네 남편 아닌 사람과 동침하였으면 21 (제사장이 그 여인으로 저주의 맹세를 하게하고 그 여인에게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고 네 배로 부어서 너로 네 백성 중에 저줏 거리, 맹셋 거리가 되게 하실 지라 22 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로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게 하리라 할 것이요 여인은 아멘 아멘 할지니라 23 제사장이 저주의 말을 두루마리에 써서 그 글자를 그 쓴 물에 빨아 넣고 24 여인으로 그 저주가 되게 하는 쓴 물을 마시게 할지니 그 저주가 되게 하는 물이 그의 속에 들어가서 쓰리라 25 제사장이 먼저 그 여인의 손에서 의심의 소 제물을 취하여 그 소 제물을 여호와 앞에 흔들고 가지고 단으로 가서 26 그 소 제물 중에서 기념으로 한 움큼을 취하여 단 위에 소화하고 그 후에 여인에게 그 물을 마시울지라 27 그 물을 마시운 후에 만일 여인이 몸을 더럽혀서 그 남편에게 범죄 하였으면 그 저주가 되게 하는 물이 그의 속에 들어가서 쓰게 되어 그 배가 부으며 그 넓적다리가 떨어지리니 그 여인이 그 백성 중에서 저줏 거리가 될 것 이니라”

 

어떤 여인이 간음을 했는지 안 했는지 판별을 할 때 율법이 정한 규례입니다. 그러나 이 규례는 단순히 간음한 여인의 판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여인은 신부인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음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자신의 힘으로 삼으려 하는 인간의 죄를 상징하는 것이고요. 남편에게 범죄 함을 의심받는 여인은 거룩한 물에 티끌을 넣어 마시우게 해 보면 판별이 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토기에 담긴 거룩한 물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몸인 토기로 오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물에 빨아 넣지요? 그렇게 물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죄가 들어가 죄인들이 그 생수인 물을 마시는 모양으로 죄 있음과 죄 없음이 판별되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선택된 사람들은 그 물을 마시고 죄 없는 자로 선포되는 것이고 유기된 자들은 예수라는 그 물에 의해 죄인으로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거룩한 물에 티끌이 섞인다는 것은 거룩하신 예수님과 죄인들이 섞여서 거룩한 것이 죄가 되고 죄인들이 거룩한 자로 바뀌는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은 은혜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자들은 은혜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은혜의 복음 앞에서 떠나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죄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무기력함과 무능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들은 그 은혜의 복음 앞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티끌이 섞인 물에 의해 죄인이 확인되는지 아시겠지요?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거룩한 물이신, 참 생수이신 예수님이 티끌과 합하여 지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흙에 쓰여 지는 모습은 거룩한 물과 티끌이 합하여 지는 민수기의 그 그림과 똑같은 그림입니다. 그 티끌을 담은 거룩한 물이 참소 자들 앞에 서자 그 물은 참소 자들에게 쓴 물이 되고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다른 말로 죄인 됨이 드러나 예수님을 떠나 버립니다.

 

그게 율법을 의지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죄인인 여자만 주님 앞에 남습니다. 그 여자는 이제 어디로 갈 데가 없습니다. 그녀는 이미 유죄가 입증된 현행범이기 때문에 곧 죽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인정한 사람만이 다른 데로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주님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인정하고 있는 간음한 여인만 그 티끌이 담긴 거룩한 물 앞에 서 있습니다. 오직 그 여인만 죄 없는 자로 선고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무력함과 불가능함과 죄인 됨을 인정한 사람만이 주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임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서 결론으로 가서 오늘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거룩한 물, 참 생수이신 주님이 ‘나를 마시라’고 했을 때 자기의 가능성과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오히려 예수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들어 안식일을 범하고 병자를 고치신 주님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부인이 되지 않은 자들은 절대 주님을 마실 수 없습니다. 나도 할 수 있는데 왜 예수를 마십니까? 그들이 8장에서 참소하는 자들로 재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율법으로 죽이려 했던 자들이 역시 율법으로 한 여인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 여인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건 하나님의 명령이었으니까요. 주님은 땅에다가 무언가를 쓰십니다. 그건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율법에 의한 죄인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그 쓴 물에 의해 죄인임이 판명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행동은 그 간음한 여인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죽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 간음한 여인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시고는 다시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시내 산 사건과 비교하여 보면서 예수님의 그 두 가지 행동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중보사건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건을 통해 그 여인이 무죄한 자로 새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는 당신이 죄를 뒤집어쓰고 죽으시고 정작 죽어야 할 자를 풀어내시는 방법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보시면 그 십자가 복음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요 8:10-11)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정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전부 도망을 가 버렸습니다. 그 말은 그들이 모두 죄 있는 자들로 판명이 났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11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은 주님이 지금 죄 있음이 판명되어 성전에서 떠나버린 죄인들과 당신을 같은 죄인으로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도 죄인이지만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죄와는 전혀 무관하신 분이십니다.

 

(히 4:15)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렇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를 가리켜 죄가 있다 하십니까?

 

(고후 5:21)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바로 그 간음한 여인의 죄를 주님이 뒤집어쓰고 십자가에서 돌에 맞아 죽으심으로 그 여인이 죄 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인간의 율법지킴과는 전혀 관계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말미암는 것입니다. 예수를 마시는 방법 이외에 죄인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행이 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퍼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어떻게 화해를 하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나로서는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자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물을 마시는 자기 부인과 절대 순종의 행위를 수반하게 됩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끝까지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려 합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났을 때에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 자리를 떠나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 하는 것이 죄인들인 것입니다. 여전히 율법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가능성을 놓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왜 주님이 초막절 끝 날에 ‘내가 물이니 나를 마셔라’하고 말씀하시는 장면 뒤에 이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가 삽입이 되어 있는지 이해가 가시지요? 그 생수이신 예수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상징하는 옛 성전에서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부정하고 은혜로 죄를 이겨 버리는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구원을 얻은 여인에게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순서를 보세요. 우리는 율법을 열심히 지켜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가 되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가 죄를 안 짓는 자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로만 가톨릭의 구원의 서정인 성화-칭의-영화는 비 성경적인 것입니다. 구원의 서정은 칭의-성화-영화가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선택에 의해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하게 지어져 가고 있는 성도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을 얻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께서 간음한 여자에게 무어라 하시지요?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부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생수를 거부하고 저주받아 죽어야 할 자로 흙에 기록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주님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났습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하나님의 부탁을 큰 소리로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벧전 2:11-21) “11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그네와 거류민 같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적인 욕정을 멀리하십시오. 12 여러분은 이방 사람 가운데서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그들이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을 하다가도, 여러분의 바른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13 여러분은 주님을 위하여,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순종하십시오. 주권자인 왕에게나, 14 총독들에게나, 그렇게 하십시오. 총독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게 하려고, 왕이 보낸 이들입니다. 15 선을 행함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16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 17 모든 사람을 존경하며, 신도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경하십시오. 18 하인 여러분, 가장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만이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리하십시오. 19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21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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