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 나타난 최초의 이신 칭의
(김성수 목사)
(창 15:1‐6) “1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2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3 주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4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5 주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성경의 대 주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대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사랑, 하나님의 주권, 믿음, 의’등의 소주제들에 의해 설명되고 있는 책이 성경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성경의 핵심 소주제들 중 두 가지 ‘믿음’과 ‘의’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오늘 본문 6절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마 만큼 오늘 본문은 아주 중요한 기독교 핵심 교리를 함의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믿음’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유일한 출생 근거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로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의(義)’의 교리 또한 성경의 핵심 교리 중 하나입니다. 신학에서는 그 ‘믿음에서 말미암게 되는 의’를 가리켜 ‘이신칭의’라 부릅니다. 로마서의 핵심 사상이 바로 ‘이신칭의’지요.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가 로마서 1장을 통해 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구원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롬 1:17)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로 이 구절이 마틴 루터를 회심케 한 구절입니다. 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이신칭의가 그림으로 잘 그려져 있는 곳이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생애이며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에 믿음과 의라는 구체적인 단어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 이신칭의 교리가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된 곳을 한 군데만 더 찾아서 읽어보지요. 로마서 4장 2절로 갑니다.
(롬 4:2‐5) “2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3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주셨다" 하였습니다. 4 일을 하는 사람은, 그가 받는 품삯을 은혜로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보수로 생각합니다. 5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게 하여 주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비록 아무 공로가 없어도, 그 믿음이 의로움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는 인과율이 아닌 오직 믿음에 의해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 확실하지요? 바로 그 것을 이신칭의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믿음’과 그에 따른 ‘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크게 오해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에 따라 알미니언 주의와 개혁주의가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죄인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의로워 지느냐, 아니면 자신들의 행위도 보태야 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만큼 성도에게 있어서 ‘믿음과 의’에 대한 교리는 사활(死活)을 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바로 그 ‘믿음과 의, 이신칭의’에 대해 정확하게 정의를 내려 볼 것입니다.
먼저 믿음에 대해 공부를 해 보지요. 인간 측에서 발휘해야 하는 믿음이라는 것에 과연 인간 쪽에서의 어떤 행위나 노력이나 열심이 보태지는 것인지 부터 보겠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라 합니다.(롬 4:11) 따라서 이 ‘믿음’이라는 단어 (히브리어 ‘아만’)가 아브라함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곳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내어놓아야 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자신이 실물 교재가 되어 삶으로 설명하는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 대해 올바른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는 창세기 1장 1절에서부터 오늘 본문 6절의 아브라함의 믿음까지의 내용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흘러오게 되었는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그 이해가 아주 쉽습니다. 14장까지의 내용을 간단하게 훑어볼까요? 창세기는 천지와 만물, 그리고 인간의 창조로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 창조물 중에서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고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력인 ‘복’(바라크)을 주셨습니다.(창1:28) 인간은 그 복에 의해서 존재할 수 있고 그 복에 의해 행복과 안식에 이를 수 있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인 인간이 타락을 하고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죄는 타락한 아담과 하와가 낳은 첫째 아들 가인이 의로운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죽이는 것으로 가시적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야 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행복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자기 이외의 다른 모든 존재가 다 경쟁자가 됩니다. 해서 가인은 자신보다 나은 평가를 받는 동생 아벨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요일3:12) 자기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죄의 본질(本質)입니다. 그렇게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을, 비록 그가 동생이라 할지라도 경쟁자로 간주하여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지키고 채우려 했던 가인 안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들의 모습이 내포(內包)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나면서부터 그렇게 자기 이외의 모든 이들을 경쟁자로 여겨 살해하는 살인자들로 살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이 세상과 역사와 스스로의 인생에 왕이 되어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들을 통제하고 다스리고자 하는 통제(統制)성향과 자기보호의 성향은 하나님의 저주를 부르게 되었고 그러한 하나님의 저주는 노아의 홍수를 통하여 무섭게 경고되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분께 자신의 삶을 의뢰하지 않는 자들이 스스로의 힘을 통하여 자신들을 지키고, 세상의 힘을 쌓아 네피림이 되고, 유명한 자가 되고, 영걸이 되고, 거인이 되려 하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미워하시는지가 홍수가 되어 부어지는 하나님의 눈물로 나타난 것이 노아의 홍수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를 제외한 모든 인간들이 홍수로 멸절되는 것을 보면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눈에 찰만한 의인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롬3:10)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자는 노아처럼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지는 것이지(창6:9)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노아의 에피소드는 웅변(雄辯)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세상의 영걸이 되고, 네피림이 되고, 유명한 자가 되고자 하는 희망이 없는 인간 세상은 바벨탑 사건을 통해 또 한 번 불가능하고 무기력하고 추악한 그의 정체를 폭로당하고 말았습니다. 인간들이 또 다시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 세상의 영걸이 되고자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며 하늘에 이르는 탑을 쌓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노아와 셈의 후손들까지도 포함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그 때는 노아와 셈이 시퍼렇게 살아서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고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흩어 버리셨습니다. 그 역시 홍수와 마찬가지로 죄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그렇게 성경은 11장까지에서 불가능하고 무력한 인간 세상, 그 저주받을 바벨론에서 스스로 빠져 나와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자로 설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명명백백하게 증명을 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불가능한 자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의 열심과 노력과 능력과 선에 근거하지 않은 당신의 계획과 당신의 힘으로, 오직 당신의 주권에 의해 창세전에 선택된 당신의 백성을 건져 내시는 구원의 사건이 있을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주도되어지는 하나님 백성의 구원 이야기의 단초(端初)가 바로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의 출(出) 갈대아 우르(바벨론) 사건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의인이 되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입성하는 하나님 백성의 출 바벨론 사건은 애초에 인간 측에서의 불가능함을 전제하고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 아브라함의 출(出) 갈대아 우르 사건이 바로 믿음에 의해 시작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히 11:8)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분깃으로 받을 땅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난 것입니다.”
그렇지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의 출 바벨론 사건이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렸다시피 아브라함은 창세기 11장까지의 모든 불가능한 인간의 표본으로 선택된 사람입니다. 창세기 11장까지에 등장하는 그렇게 불가능한 자들처럼 역시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타락한 자에게 하나님의 선택과 인도하심이 선물로 부어져서 그가 바벨론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따라서 믿음은 국어사전에 나오는 것처럼 믿음을 소유하고 발휘하는 사람 측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그러한 능력이 없는 불가능한 자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유 3) “3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가 함께 나눈 구원에 관해서 편지를 써 보내려고, 여러 가지로 애써 준비를 해 왔는데 이제 여러분에게, 간곡한 권고의 편지를 쓸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한 번 결정적으로 전해진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여러분이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단번에 ‘주어지는’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외부에서 그 인간의 심장으로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믿음을 굳이 신학적 언어로 표현을 하자면 객관적 믿음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죄인들에게 무상(無償)으로 부어진 객관적인 믿음에 의해 그가 그의 인생을 통하여 자신의 주관적인 믿음으로 내어놓게 되는 과정을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이제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이 좀 잡히시지요? 그렇게 믿음은 인간들에게서 만들어지고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선물의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알미니언 주의자들의 ‘모든 인간에게는 믿음을 발휘할 능력이 주어져 있으며 그 믿음을 발휘하여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유기 된다’는 주장은 창세기 서두의 태고사와 아브라함의 이야기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召致)인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가 아닙니다. 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그 믿음을 발휘하는 사람이 그 믿음을 인과율(因果律)에 의해 생산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선물로 받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믿음은 그렇게 아브라함 속에서 만들어져 발휘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인간 측에서의 모든 근거가 배제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도되어지고 완성이 되는 하나님 백성의 구원 사건을 이신칭의라 부르고 그 기독교 교리의 핵(核)이라 할 수 있는 이신칭의가 가장 처음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곳이 바로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다시 하박국에 의해 보다 확실한 언어로 정리가 되고(합2:4) 그 하박국의 이신칭의 구절은 로마서(롬1:17)와 갈라디아서(갈3:11)에서 바울에 의해 더욱더 명확히 설명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오늘 본문 말씀에 어떻게 그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라 하는 이신칭의의 교리가 설명되고 있는지 차근차근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6절을 다시 보세요.
(창 15:6)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구절만 보면 마치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어주었고 그래서 그 믿음을 근거로 그가 의로운 자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위 구절들과 잘 연결해서 이해를 하면 그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지 아브라함에게서 출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을 볼까요?
(창 15:1)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 이니라”
[표준새번역] “1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하나님께서 두려워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고 당신이 아브라함의 방패요 상급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이 바로 이신칭의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키(key)가 되는 구절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것처럼 아브라함은 어마어마한 동방의 연합군들을 삼백 열여덟 명의 가신들을 이끌고 좇아가 습격하여 그들의 전리품들과 포로들을 빼앗아 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떨결에 출격(出格)하여 일단 조카 롯과 원정대의 탈취 물 들을 빼앗아 오긴 했는데 돌아오고 나니까 동방 연합군의 재침공이 걱정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거절한 소돔 성의 그 많은 전리품들에 대한 미련도 그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들에 대한 불신도 그의 두려움을 부채질 했습니다. 그건 단지 저의 추측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짚어 주시는 대목에서 아브라함의 두려움의 정체가 폭로됩니다.
먼저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는 말씀에 이어 당신이 아브라함의 방패라고 하십니다. 방패는 전쟁 시에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데 쓰이는 무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후에 ‘내가 너의 방패’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전쟁, 즉 동방 연합군의 재침공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당신이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어서 지켜 주실 것이므로 안심하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14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살렘 왕 멜기세덱과의 대화를 통해 알고 있었고(창14:20) 또 그에게 바친 십일조를 통해 그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또 다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의 공격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의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나약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지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럽지 않으세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을 야단치지 않으시고 또 다시 아브라함이 치른 전쟁이 어떠한 전쟁이었으며 그 전쟁의 승리가 어떻게 주어진 것인지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그의 백성들이 치르는 전쟁의 당사자이며 무기이며 보호막이니 걱정 말라는 것입니다.(삼상17:47, 대하20:15) 그게 방패가 담지(擔持)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임을 천명하신 후에 계속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아브라함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상급’이라 번역이 된 ‘싸카르’는 전리품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소돔 왕이 내어 놓았던 그 많은 전리품을 거절해 놓고 그 것에 대해 미련을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너 소돔 왕에게 내어주었던 전리품들이 아깝니? 아까워하지 마라, 내가 바로 너의 전리품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단 거기까지 정리를 하고 넘어가지요.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이 치르는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며 그 전쟁에서 주어지는 상급, 즉 전리품은 하나님 자신이고 따라서 그 전쟁은 절대 패할 수 없는 전쟁임을 다시 한 번 확인 시켜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14장에서 아브라함이 동방 연합군을 상대하여 치렀던 그 전쟁이 어떤 전쟁이었는지를 반추(反芻)하게 하시면서 아브라함의 두려움을 벗겨 내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14장의 전쟁도 당신이 방패가 되어 이긴 전쟁이고 그 전쟁의 전리품도 소돔 왕이 내밀었던 세상의 보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었음을 떠 올리게 하시며 앞으로 아브라함이 치르게 될 모든 전쟁도 그러한 전쟁이 될 것임을 확인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워 말라는 것이지요. 그 14장의 전쟁은 성도의 영적 전쟁임을 우리는 지난시간에 확인했습니다.(엡 6)
하나님은 지금 세상 것들을 얻어내기 위해 세상의 다른 적들과 싸우는 이 세상의 전쟁으로 걱정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싸워야 할 전쟁은 세상의 적들과 세상의 전리품들을 놓고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사망과 하나님이라는 전리품을 두고 영적인 세력인 죄와 싸우는 전쟁’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 영적 전쟁은 아브라함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임을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땅에서 세상의 힘을 얻어내기 위해 다른 이들의 것을 탈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살고 있는 세상의 적들과 싸워서 고지에 올라가는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세상의 힘을 모으는가에 관심을 두고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작금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전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분명 말씀하십니다. 성도가 싸워야 하는 전쟁의 전리품은 이 세상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 상은 하나님이 가진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신적 생명, 영생이 성도의 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싸워야 하는 싸움은 죄의 세력과의 영적 전쟁을 말하는데 그 죄의 세력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길은, 다른 말로 죄인이었던 자들이 그 죄의 권세와 싸워 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의인의 반열에 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전쟁의 주인이시고 방패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전쟁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임을 알 때에 성도는 그 전쟁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의 사건이며 성도가 이 땅에서 치러내야 하는 영적 전쟁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 전쟁의 승리에 대한 전리품으로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이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처소가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어(엡2:22) 하나님이 누리는 모든 것을 함께 누리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상급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한 하나님의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역사 속에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십자가로 세상을 이겨 버리시고 그 승리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무상(無償)으로 선물해 주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모든 성도들의 영적 전쟁이 이미 결판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권세와 싸우셔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당신의 모든 백성들을 의인으로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 홀로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십자가 전쟁을 성도의 삶 속에서 실재(實在)화시켜 경험케 하십니다. 그게 바로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하는 유일한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죄를 이겨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 속에 여전히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옛 사람의 흔적들을 벗겨내는 싸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받은 사람들 속에서도 그 옛 사람의 흔적들이 여전히 위세를 떨칩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낙심하기도 하지요? 바로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방패요, 내가 상급이다. 그러므로 너는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열심히 싸워 보거라’ 그렇게 나의 불가능함과 무력함, 그리고 하나님의 크심과 그 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의인의 표지이며 믿음의 시작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도 이미 불가능하고 무력한 죄인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로 말미암게 되는 의, 즉 구원의 완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미리 예시(豫示)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나친 비약이라 생각하실 분들을 위해 조금만 더 설명을 해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성경이 그 영적 전쟁을 자손의 문제와 연결을 시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이고 전리품’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아브라함은 ‘나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나에게는 자식도 하나 없지 않습니까?’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밤하늘의 뭇별들을 보여주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 별들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뭇별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 6절까지의 표면적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표면적 내용으로 볼 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후손들이 반드시 탄생하게 될 것임을 믿어서 의롭게 된 것입니다. 환언하면 아브라함은 그의 후손들 덕에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잘 연결을 해 보세요. 우리는 전쟁의 이야기를 통해 영적 전쟁의 실체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경은 그 영적 전쟁이 아브라함의 후손에 의해 아브라함이 의인이 되는 사건으로 연결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적 전쟁이 어떻게 후손의 이야기로 이어지게 되는지를 보세요.
(창 15:5)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은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서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보면 이 자손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가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갈 3:16)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창세기 15장 5절의 ‘자손’은 히브리어로 ‘제라’입니다. 그 단어는 단수입니다. 하늘의 별들은 복수인데 그 별들과 같은 자손은 단수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5절의 하나님께서 자손을 걱정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뭇별들을 보여주시면서 자손을 약속하시는 장면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들의 중다(衆多)함을 예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이 어떻게 탄생하게 될 것인지도 함께 가리키고 있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 자손들은 아브라함이 치른 동방원정대와의 전쟁처럼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결판을 내시는 방법으로 탄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의 이야기가 아브라함과 동방 원정대의 전쟁 바로 뒤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나지도 않았을 때에 하늘의 별들이 무(無)에서 창조된 것처럼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창조가 될 것인데 그들이 그들의 힘과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즉 하나님의 친 자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가 될 것임을 이미 창세기 15장 5절에서 예시(豫示)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 현실, 인간 쪽에서는 아무것도 내어 놓을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하나님이 완성하셔서 의에 이르게 되는 영적 전쟁의 현실을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아브라함의 이해를 위해 동방 원정대와의 전쟁을 허락하신 것이고 그 전쟁 후에 두려워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 전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게 6절의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난 시간에 배운 아브라함과 롯의 결별이나 롯의 사로잡힘이나 아브라함과 동방원정대의 전쟁 등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지신 십자가로 말미암게 되는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하나님 백성들의 탄생에 관한 설명 용 교보재(敎輔財)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의(義)가 오직 당신의 열심과 배려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고 주어지는 것임을 설명하시기 위해 롯을 아브라함에게서 떠나보내신 것입니다.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이 형 하란의 아들 롯을 갈대아 우르에서 데리고 나온 것은 조카 롯을 자신의 후사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롯을 가차 없이 아브라함에게서 떼어 놓으십니다. 그리고 롯이 포로에서 풀려나와서도 다시 소돔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 하신 후에 또 다시 후손을 거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자기 쪽에서 무언가를 내어 놓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자신의 후사로 또 다시 자기 집의 종인 엘리에셀을 지목합니다. 하나님은 그는 네 후사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끊임없이 자기 쪽에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사의 근거를 제시하고 싶어 합니다. 결국 여든 여섯 살에 이스마엘까지 낳아 버립니다.
하나님은 그 일로 13년간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 것들은 오히려 그가 하나님 앞에 서는 데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일로 13년을 손해 본 것입니다. 자기 꾀로 조금 일찍 후사를 만들어 보려 하다가 오히려 13년을 돌아 간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다른 말로 자신의 행복과 만족과 기쁨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힘을 동원합니다. 그게 죄인의 속성입니다. 그들은 절대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합니다. 제가 자꾸 후사라고 하니까 이해를 못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지금 저는 후사라는 단어를 통하여 인간이 이르고 싶어 하는 최고의 행복의 자리를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자기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행복의 자리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해서 ‘너희들이 원하는 참된 행복과 만족은 너희들의 세상적인 열심이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너희에게 주는 영생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롯도 엘리에셀도 이스마엘도 모두 다 쳐 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고작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뿐입니다. 동방원정대와의 전쟁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동방 원정대와의 전쟁을 통해 다시 한 번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말미암게 되는 의에 대해 반복해서 설명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15장에서 세상의 전쟁을 걱정하고 있는 아브라함과의 대화를 통해 성도가 이 땅에서 치러내야 할 전쟁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겨 놓으신 싸움이며 성도는 그 이긴 싸움을 자신의 인생 속에서 실재 화하는 삶을 사는 것뿐이라고 그 영적 전쟁의 실체에 관해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것을 이해하는 것을 믿음 이라하고 그 믿음이 있는 자들을 의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우리의 열심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으세요? 그렇다면 여러분도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받으신 분들이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약속의 땅의 상속자들이십니다.
(갈 3:9)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그러면 이런 질문이 드시지요? ‘그렇게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만 완성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네요?’ 아니요.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2)라고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탄생한 의인들은 믿음을 통하여 소망이라는 것을 갖게 되고 그 소망을 가진 이들은 이 세상의 것들로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며 그들이 믿음으로 본 자신들의 결국, 즉 하나님 나라에 합한 자로서의 성숙을 자신들의 목적으로 삼아 열심히 그 일에 매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일 3:2‐3)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 모습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에게 이런 소망을 두는 사람은,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누구나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 이미 하나님의 호적에 등재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현실을 이미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결국을 이미 보고 있는 우리는 우리의 영광스러운 결국을 향해 열심히 자신을 채찍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싸움이 바로 아브라함의 싸움인 것이며 그 싸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싸움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안에 들어 있는 믿음의 후손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부인하고 목숨까지 바쳐가며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승리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여 우리 안에서 싸우시는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모습을 자주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이며 그게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나님이 이깁니다. 내가 살아있을 때 우리는 롯이나 엘리에셀이나 이스마엘 같은 것들을 내 놓아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만 할 뿐입니다. 열심히 죽으십시다. 그렇게 우리를 죽이고 내 안에 사시는 하나님을 오롯이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짐을 지우시기도 하시고 고난을 허락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을 원망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열심히 순종하는 자녀로 자라가십시오.
제가 얼마 전에 케빈과 크리스 부부의 병원에 심방을 갔었습니다. 의사들은 청진기를 들이대고 진찰을 하기 전에 망진(望診)이라는 것을 합니다. 환자의 숨소리나 목소리, 습관, 자세 등을 보면서 그 사람의 상태를 눈으로 진찰하고 진단하는 것입니다. 케빈 형제가 제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더니 대뜸 X‐ray를 찍어 보자고 해서 찍었다가 제가 아주 심각한 경추, 척추 환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엄격한 케빈 선생의 감시 하에 치료를 받고 있는데 그 치료 방법 중에 하나가 몸에 쇠붙이를 달고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교정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두 번씩 꼭 해야 하기 때문에 제가 새벽기도에 나올 때 그 쇠붙이들과 운동 기구들을 커다란 가방에 넣어서 나옵니다. 그리고 퇴근 할 때에 역시 가방에 쇠붙이들을 넣어서 집으로 옮깁니다.
그게 굉장히 무겁습니다. 정말 제게는 무거운 짐이요, 고통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쇠붙이들을 몸에 달고 교정 운동을 하면서 저는 그 쇠붙이들을 무겁게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신뢰할 만한 의사 선생님이 그 쇠붙이들이 제 몸을 건강하고 이상적인 상태로 회복을 시켜 준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 무거운 짐들이 저의 어긋난 경추와 척추를 바로 잡아주고 건강한 몸으로 회복을 시켜준다는 그 확신이 저로 하여금 그 무거운 쇳덩이들을 가볍게 여길 수 있게 해 준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깨에 가끔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을 지우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 짐들이 우리를 온전한 의인으로 교정하고 회복시키고 양육시키는 하나님의 교정 도구라는 인식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승리의 자리를 믿음으로 본 사람들이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그 자리로 이끌어 가실 것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그러한 무거운 짐들을 지우신다는 것은 그 짐들을 통해 우리의 온전한 승리를 도모하고 계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지금도 제 몸에 달린 무거운 쇳덩이들이 무겁게 느껴질 때면 첫날 케빈 형제가 보여준 온전한 척추와 경추를 가진 사람의 X‐ray를 떠 올립니다. 그리고 이 무거운 짐들이 저를 그렇게 온전한 몸으로 회복을 시켜 주는 고마운 도구라는 것을 생각하며 그 짐의 무거움을 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옛 사람이 공존하는, 옛 세대와 오는 세대가 공존하는 그런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우리의 인생 속에서 그러한 옛 것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계관과 새로운 가치관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싸움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겨 놓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싸움으로 초청하신 것입니다. 어떠세요? 우리의 방패이시고 우리의 상급이신 우리 하나님의 초청에 ‘예’하고 나서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믿음의 전사들이여, 모두 일어나 이미 완성된 여러분의 의를 향해 여러분의 손발을 움직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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