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김성수 목사)
(계 15:3-4)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 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우리는 계속해서 성도들이 유리 바닷가에서 부르는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연장인 이 땅의 삶 속에서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인식해야 하며 어떤 찬양을 해야 하는 지에 관해 알지 못하고 무턱대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도박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몇 주간에 걸쳐서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불러야 할 그 찬양의 내용을 자세하게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참되심'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본문 3절과 4절을 보시면 성도들이 찬양하기를 '하나님은 참되시며''오직 주 만 거룩하시니이다.'라고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참되심에 대해 정리를 잘 하고 있어야 그 분의 거룩하심과 참되심을 제대로 찬양하며 감사를 할 수 있겠죠.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거룩'의 정의가 뭡니까? 사람들이 보통 '거룩'하면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측면에서 '죄를 안 짓는 순결한 상태'를 거룩이라고 정의를 하곤 합니다. 맞습니까? 만일 그 정의가 맞다 면 성경에 등장하는 이런 단어들은 어떻게 해석을 하시겠습니까? '거룩한 집, 거룩한 단, 거룩한 땅, 거룩한 언약, 거룩한 말씀, 거룩한 십일조, 거룩한 안식일, 거룩한 그릇'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이런 구절들을 많이 보셨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어설프게 알고 있는 거룩의 정의를 가지고는 이러한 구절들을 바르게 해석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그럼 성경이 이야기하는 거룩의 바른 정의가 무엇인가? 성경 안에서 한번 추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거룩이라는 뜻의 히브리 단어는 '카다쉬'입니다. 명사형으로는 '코데쉬'가 됩니다. 이 '카다쉬'라는 단어의 어근은 원래 '자르다(cut), 구별하다(separate)' 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이 단어의 반대말로 쓰고 있는 단어는 '홀'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일반화하다, 더럽히다, 속화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의 '거룩''카다쉬'의 개념은 '세속과 더러움, 죄와 악 같은 일상 영역에서 구별된 것'을 가리킬 때 '거룩''카다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거룩''카다쉬'는 단순히 윤리적 속성을 지칭하는 단어라기보다는 그 윤리적인 속성을 포함한 '구별'의 의미가 더 강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하면 '하나님은 피조 세계와 피조물들과 완전히 구별된 엄위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죄와 악의 상징인 세속과 완전히 구별되신 분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은 그 어떤 더러운 것과도 함께 하실 수 없으신 순수와 순결의 결정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거룩'이라는 단어와 '순수''순결'라는 단어를 혼용해서 쓰기도 합니다. 아마 그러한 협의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거룩'을 단순히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측면에서의'본질적이며 절대적인 청결'의 뜻으로만 해석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룩이라는 말은 그보다 더 크고 깊은 내용을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게 되면 압도를 당하게 됩니다. 욥도 이사야도 에스겔도 사도 요한도 베드로도, 모두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섰을 때 두려워 떨며 '하나님 나를 떠나소서.'라고 외쳤을 정도로 우리 죄인들은 그 거룩하심 앞에 감히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하지 못한 것들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돌격해서 죽여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바대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신 그 분의 언약을 끝까지 지켜내셔야 합니다. 어떤 언약입니까?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죄 속에 빠져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만드셔야 합니까?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만드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분의 거룩하심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 거룩하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만드셨지요? 그들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넣어서 돌격하여 죽여 버리신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거룩하지 못한 것과 절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거룩하지 못한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넣어서 죽여 버리시고,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거룩하지 못한 우리의 옛 사람은 그 안에서 죽고 거룩한 예수의 동생들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바로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은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의 열매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심판도 역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의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과 신약,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설명하는 계시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거룩하심의 결과로 행하신 일들을 계시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거룩하게 만들 자들을 이미 선택해 놓으시고 왜 그들은 꼭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지를 성경에 일목요연하게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지 못한 이방 민족들을 어린아이까지 모조리 죽여 버리시는 것을 보여 주심으로써 죄와 절대 함께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성막과 성전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계시하셨습니다. 성막은 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이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지성소에는 대 제사장이 일 년에 딱 한번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완전한 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던 곳이었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 제가가 드려지면 대 제사장은 그 곳에서 즉사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뭡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율법과 관계없는 삶을 산다면 너희는 절대 나의 택한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경고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최고의 숭고한 선언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 거룩하시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죽음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벗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선언하는 거룩의 극치가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합 1:13)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과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더러운 죄와 악을 모조리 십자가에서 죽여 버리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거룩을 선물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거룩 앞으로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시고 대표하셔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지시고 제물이 되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거룩하신 분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물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거룩하게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거룩을 위해 먼저 그 분이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거룩하게 되는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무리, 성도, 거룩한 땅, 거룩한 안식일' 이렇게 '거룩''코데쉬''하기오스'라는 단어가 하나님께 쓰이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이나 피조물에게 쓰이게 되면 '영원한 사망으로 떨어지게 될 세속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 혹은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땅'하면 형질이나 모양 성분이 똑 같은 땅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쳐진 땅'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고 '성전에서 쓰이는 성구'는 똑같은 모양과 성질의 그릇 중에서 '하나님의 제사에 쓰여 지도록 구별되어진 기구'를 말하는 것이고 거룩한 안식일 하면 똑같은 날 중에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거룩한 무리'는 어떻게 정의되어져야 합니까? '성도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세상 속에서 선택되어지고 구별되어져서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입니다.
(민 18:9) “9 지성 물중에 불사르지 않은 것은 네 것이라 그들이 내게 드리는 모든 예물의 모든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 제물은 다 지극히 거룩한즉 너와 네 아들들에게 돌리리니”
보세요, 이 땅에서 거룩하다고 일컬을 수 있는 것들은 전부 하나님께 바쳐진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성도, 거룩한 무리인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의 말씀처럼 이제 우리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거룩하게 구별되어져서 더 이상 땅의 것을 생각지 않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골 3:1-2)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빌 3:18-20)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는 이렇게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땅의 사람들과 거룩하게 구별된 하늘나라의 시민이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그 거룩한 백성들에게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벧전 1:14-17)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레 11:44-45) “44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롬 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후 7:1)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을 좇아 열심히 거룩을 경주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가 이미 거룩하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룩하게 된 자들에게 '너희들은 이 땅에서 거룩을 경주해야 한다.'라고 하나님께서 권고하십니다.
(렘 1:5)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여기서 ‘구별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카다쉬‘’거룩‘이라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창세전에 택해졌고 거룩해 진 것입니다.
(히 10:10)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거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인의 의’에 대해서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우리는 이미 의로운 자가 되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희는 의로운 자가 되어라’하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된 자들의 삶 속에서는 그 ‘의’와 ‘거룩’이 당연히 나오게 되어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는 억지로 거룩과 의를 만들어 내라’는 말씀이 아니라 ‘너희는 이미 의인이고 이미 거룩한 자이므로 그 신분에 맞는 삶이 어떤 것인지 잘 배우고 그렇게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얼마나 철저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친절하게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정한 것들을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것을 만져서도 안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전쟁에 나갈 때도 무기 외에 항상 삽을 가지고 나가야 했습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자들이 지나간 자리는 더러운 것이 남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전쟁터에서도 그들은 용변을 보고 삽으로 꼭 덮어야 했습니다.
(신 23:12-14) “12 너의 진밖에 변소를 베풀고 그리로 나가되 13 너의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통할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이켜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 14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붙이시려고 네 진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합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거룩한 자들 성도들이 지나간 자리는 세상 사람들이 남긴 냄새와는 다른 거룩의 향기가 피어 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찌꺼기가 남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하게 구별된 것들에게는 그 것과 접촉하는 것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출 30:26-29) “26 너는 그것으로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27 상과 그 모든 기구며 등대와 그 기구며 분향단과 28 및 번제 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 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29 그것들을 지성물로 구별하라 무릇 이것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여러분은 거룩한 번제 단이나 물두멍, 성전에서 쓰이는 성구 같은 것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거룩한 무리‘성도’입니다. 고작 성구들과 접촉해서도 어떤 것들이 거룩하게 된다면 우리 성도들과 접촉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당연히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거룩을 경주하며, 거룩을 발휘하며, 거룩을 나누어주며 살아야 하는 고급스러운 존재들입니다. 거룩을 나누어주세요. 나의 형제자매들이 나의 삶을 보면서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사는 삶이 바로 저런 것이구나.’하고 배울 수 있게 그런 향기 있는 분들이 되십시오.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유리 바닷가에서 그 하나님의 거룩을 찬송하겠으며 그 하나님의 거룩을 찬송할 수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작 ‘God father’‘대부’라는 영화를 보면 나중에 마피아 두목 마이클 꼴레오네(알파치노)가 로마 교황청의 람베르토 대 주교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알파치노가 이제 합법적인 사업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자꾸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거대한 검은 손 뒤에 로마 교황청과 바티칸 은행이 개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파치노가 그 중에서도 힘이 있고 순수한 신앙인으로 소문이 난 ‘람베르토’대 주교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이렇게 더러운 일에 개입할 수 있느냐, 좀 도와 달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그 때 그 람베르토 대 주교가 ‘알 파치노’에게 한 이야기가 그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제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서 쩌렁쩌렁 울립니다.
그 알파치노의 말은 다 들은 람베르토 대 주교가 로마 교황청 뜰에 있는 분수 속에서 작은 자갈을 하나 꺼냅니다. 그리고 알파치노 앞에서 그 돌을 깹니다. 그런데 그 젖은 돌이, 안에는 바삭바삭 말라있는 것입니다. 그 돌을 보여 주면서 람베르토 대 주교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돌은 수백 년 동안 이 분수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돌은 겉만 젖었을 뿐 속은 한 번도 젖은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수 천년동안 기독교 문화에 젖어 살았고 예수를 믿어왔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의 속에는 스며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만 예수의 형제 흉내를 내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그 영화를 보고 대학 때 춘천에 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강에서 큰 자갈을 하나 꺼내서 깨 봤습니다. 정말 그 자갈 속은 바삭바삭하게 말라있었습니다.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의 속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심히 걱정이 됩니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생수에 젖어서 이제 다시는 목마르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서 정작 속은 다 타 들어가 버린, 쩍쩍 갈라지는 가짜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거룩을 나누어주기는커녕 억지로 있지도 않은 나의 거룩을 증명하기 위해 남을 깔아 뭉개버리는 다툼과 분열이 자칭 거룩한 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것입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보면 16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를 믿고 있는 유태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태인들을 케토라는 곳에 몰아넣고 그들에게 빨간 모자를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태인들에게는 부동산을 소유할 수 없게 했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대부분 고리 대금업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유태인들을 고리대금업으로밖에 먹고살 수 없게끔 만들었으면서도 고리대금업을 한다는 이유로 유태인들이 지나가면 그들의 수염에다가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태인들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이게 정말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구별됨’입니까? 이게 ‘거룩’인가요? 오죽하면 유태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자기에게 돈을 꿔 간 기독교인 ‘안토니오’가 돈을 갚지 못하자 그 친구가 그 원금의 두 배인 6000 다켓을 가지고 왔는데도 그 돈을 받지 않고 계약서대로 그 기독교인의 심장을 꺼내겠다고 고집을 부렸겠습니까?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눈에 예수를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그렇게 밖에 안 보였던 것입니다.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저 교만하고 표독스러운 예수 믿는 놈들 다 죽여 버렸으면 좋겠다.’ 이게 16세기 유럽을 덮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평판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들이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 안에서 어떤 평가를 얻고 계신가요? 왜 예수를 잘 믿는 다는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재수 없는 사람들’로 불립니까? 왜 ‘네가 예수 믿고 천국 간다면 난 너 없는 지옥에 갈래’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있지요?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거룩하게 만드셨는지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무지의 소치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베드로 전서 1장으로 다시 한 번 가볼까요.
(벧전 1:15-16)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5절에 ‘모든 행실’‘아나스트로페’는 ‘항상 어디서나 나타나는 일상생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항상 어디서나, 일상생활 속에서 거룩한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 거룩한 자로서의 삶을 살아낼 수가 있습니까?
(요 17:17-19)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시는데 우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가 뭔지를 알아야 하겠지요? 진리가 뭡니까?
(요 14:6)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내용이지만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다’라는 말은 그렇게 이해가 쉬운 구절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진리’‘참’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단어는 ‘아만’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아만’이라는 단어는 원래 ‘참되다’‘확실하다’‘신뢰하다’‘지지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아만’이라는 동사의 형용사가 우리가 매일 매일 외치는 ‘아멘’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설교 말씀을 듣다가 ‘아멘’하시는 것은 ‘난 그 말씀을 지지합니다, 확신합니다, 신뢰합니다, 믿습니다.’이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아만’라는 단어가 신약이나 LXX에서는 헬라어‘피스티스’나 ‘알레떼이아’로 번역이 됩니다. 이것을 우리 말 개역 성경에서는 ‘참’‘진리’‘신앙’으로 번역을 하고 있지요.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오늘 본문에도 그 단어가 등장합니다. 바로 본문 3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참되시다’가 ‘알레떼이아’‘진리’‘진실성’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읽었던 요한복음 17장의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에서 그 ‘진리’도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면 이 히브리어‘아만’과 헬라어 ‘알레떼이아’ 가 담고 있는 내용을 좀 더 깊이 연구를 해 보면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든다.’는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실 수 있겠지요. 조금 어려운 단어입니다만 신학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참’,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진실성’을 세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1) 그 첫 번째가 형이상학적 ‘참’입니다. ‘하나님의 참’,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진실성’은 그 분이 ‘모든 거짓된 것에 반하여 참 되시다’는 것을 뜻합니다.
(2) 그리고 두 번째 관점은 ‘윤리적 참’입니다. 그 하나님의 참되심, 하나님의 진실성은 하나님의계시가 하나님의 존재와 일치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은 곧 그 하나님의 존재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3) 세 번째가 ‘논리적 참’, ‘논리적 진실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실재 그대로 아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진실성, 하나님의 참되심, 하나님의 진리’를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본 것이지만 한 가지입니다. 그러면 세 가지 관점의 진리의 내용 중에 우리 성도들의 거룩과 관계가 있는 것이 몇 번째입니까? 두 번째 ‘윤리적 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그 분이 하시는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 한다’
성경은 분명 우리가 그 하나님의 진리로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정확하게 그 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 말씀이 무엇으로 주어졌습니까? 성경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그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알아 볼 수 있는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참되신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라고 설명을 해 주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요 1:1,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고 성경의 모든 말씀은 바로 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 5:39)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우리는 이렇게 참 되신 하나님의 현현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에 대한 증거인 성경 말씀을 통해 거룩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후 3:18)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러분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자로 변해가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거기서 비로소 ‘거룩’, 다른 말로‘순결’, 다른 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헬라어의 ‘순종’‘ 휘파쿠오’는 ‘말씀을 듣다’라는 단어인 ‘아쿠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순종은 말씀을 듣고 상고하고 묵상하는 것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참 되심과 거룩하심을 유리 바닷가에서 찬양하시는 성도들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하나님의 참되심을 배우고 그 진리에 의지하여 거룩을 경주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아직 어린아이의 유아적 신앙에 머물고 계신 분들입니다.
이제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참되심과 거룩하심을 자세하게 공부하셨습니다. 지금 이 문을 나서면서부터 그 참되심에 의지하여 거룩을 경주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시민입니다. 거룩하신 분들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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