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8)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20.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8)

 

(김성수 목사)

 

 

(롬 1:2-4)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오늘 설교 제목이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제목은 제가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정다운 스님이 쓰신 수필집에서 잠시 빌려온 제목입니다. 그분의 책을 읽다보면 불교의 지향점이 참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서 재미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 분 책의 내용에 동의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오늘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불교는 범신론의 종교입니다. 인간도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를 열심히 계발하고, 발전시키고, 성숙시켜서 원래 신의 자리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 범신론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하고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인본주의이며 범신론적 사고의 열매들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와 유대주의가 그러한 맥락의 종교행위였고, 아담 때부터 시작되어 줄기차게 역사를 관통하여 흘러내려오고 있는 알매니언 주의가 그러한 범신론적 사유의 산물인 것입니다. 성화론, 역시 범신론의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만큼 변질되어 있지요. 그래서 인간들의 범신론적 행위추구는 사뭇 진지하고 경건하고 부지런하고 세련되고 멋져 보입니다.

 

타락한 아담들의 욕망의 배설물로 가득 찬 이 역사는 사망으로 치닫고 있는 죽음의 열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결정을 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온통 사망의 증상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 연유에서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이 역사는 고해로 감지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건 불신자이건, 모든 이들에게 이 역사와 인생은 불만족스럽고, 불편하며, 때론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 누구도 이 세상을 만족스럽게 살다가 가지 못합니다. 그건 곧 공허와 심심함과 권태와 짜증으로 옷을 갈아입고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때 범신론자들은 ‘옷을 벗자’라고 계몽 운동을 펼칩니다. 욕망하는 인간들이 입고 있는 옷, 그리고 입고자 하는 옷 때문에 이 세상이 이렇게 각박하고, 어둡고, 고통스럽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므로 인간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여 그 옷을 벗어버리자는 것입니다. 교육, 이념, 종교, 과학, 문명, 도덕, 윤리 등의 선행체계, 지식체계 등을 이용하여 인간들 스스로 옷을 벗자는 것입니다. 교육도 잘 받고, 열심히 수행도 하고 해서 욕심을 버리고 속세에서 눈을 들게 되면 그러한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러운 역사와 인생의 옷을 벗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옷을 벗는 것이 아니라 진짜 두꺼운 자기 ‘의’의 옷을 입는 것임을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다운 스님의 책을 읽으면서, 열심히 옷을 벗자고 외치는 그가, 진짜 입으면 안 되는 두꺼운 옷을 들고, 자신의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첩첩이 껴입히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무튼 역사 속에서 인간들이 해답으로 제시한 그 모든 것들이 범신론에서의 수행, 정진, 고행과 일맥상통하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역사와 인생 속에서 고통의 옷을 벗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을 종교라 합니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만, 인간은 스스로 옷을 벗을 수 없는 존재라고 삐딱선을 탑니다. 성경은 인간들이 입고 있는, 그래서 고통을 유발하게 하는, 그 옷을 자기 ‘의’의 옷이라고 정확하게 지적을 해 줍니다. 그 옷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상의 종교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벗어버림으로써 입고자 하는 바로 그 옷입니다. 이사야는 그 옷을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사 64:6) “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자기 의라는 이 더러운 옷이 바로 죄이며, 인간의 용사되기 운동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너희들의 힘으로 역사와 인생 속에서의 불만족의 옷, 고통의 옷, 더러움의 옷을 벗으려 하는 행위를 그치고 그 옷을 벗겨줄 절대자를 바라보라고 하지, 열심히 노력해서 다른 종교인들과 같이 너희들 힘으로 그 옷을 벗어보라고 권고를 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그러한 인간들의 용사되기 운동을 ‘육신’이라고 명명합니다.

 

(창 6:1-4)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3절의 ‘육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단어가 ‘바싸르’입니다. 그 단어는 ‘벌거벗은 몸, 외부로 드러난 생식기, 살, 육신’등의 뜻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부끄럽고 추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육체의 정체를 ‘용사, 유명한 자, 거인, 네피림’이라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용사, 유명한 자, 거인, 네피림’이 되려 하는 것이 바로 ‘육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사야가 ‘우리의 의’라고 표현을 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벗어야 할 더러운 옷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육체라는 옷이 우리에게 어떻게 입혀진 것이지요? 그 육체라는 단어가 ‘벌거벗음’이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의 벌거벗음을 인지하게 되자 그것이 곧 부끄러움으로 받아들여졌잖아요? 그 단어가 ‘아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앞의 ‘뱀이 가장 간교하다’라는 어구의 ‘간교’가 ‘아람’입니다. 그 단어는 ‘벌거벗음’이라는 뜻도 동시에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모세는 그러한 워드플레이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부끄러운 자가 되는 것을, 뱀의 간교를 입는 것임을 보여줌과 아울러, 창세기 6장에서 그것을 ‘바싸르, 육체’라는 단어로 받아서 인간이 벗어야 할 옷의 정체가 육체이며, 그 육체가 바로 죄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새 몸을 입어야 한다고도 하고 옛 몸을 벗어야 한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육체, 바싸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번역이 될 때 ‘사륵스’인데 그 단어가 오늘 본문에 쓰인 ‘육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인간이 벗어야 할 육신으로 오셔서 그 옷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벗어 버리신 것이고 성결의 영에 의해 새 옷을 입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벗어야 할 육신의 옷이, 다윗의 혈통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왕 됨의 추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구절이 댓 구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혈통은 죽어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부활과 대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다윗 왕의 혈통이라는 옷을 입으시고 죽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은혜에 의해 우리에게서 그 더럽고 추악한 옷이 벗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은 자 가운데서 새 몸으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몸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심으로,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지는 새 옷이 입혀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복음의 이야기, 그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요한은 그 새 옷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계 7:9-10)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바로 이 옷을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다윗 왕의 혈통, 즉 세상의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욕망이 되어 죽으시고, 하나님이 은혜로 입혀주시는 새로운 하늘의 옷을 입고 살아나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엡 1:5)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바울은 그것을 복음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은 끊임없이, 죄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역사 속의 다윗의 왕국을 허무시고 다윗조차 삭제시켜 버립니다. 그러니까 다윗 왕국은 역사 속에 회복되어야 할 왕국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기능적 역할을 마치고 사라져야 할 왕국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역사 속의 다윗 왕과 그 다윗 왕처럼 되고 싶어 하는 역사 속의 수많은 다윗 왕들을 기각시키고 다윗 왕이 모형하고 있던 진짜 하늘의 왕이신 예수를 부각시킵니다.

 

우리가 전에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를 공부하면서 성경이 일부러 그 족보에서 다윗을 빼 버리는 것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성경이 일부러 예수님의 족보를 14, 14, 14라는 숫자로 나누어 버리지요? 그것은 ‘다윗’이라는 이름의 히브리어 알파벳을 다 합한 숫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신약 성경이 ‘이 족보는 너희들이 그렇게 기다리는 다윗에 관한 족보다’라고 선언을 하고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다윗이 등장하는 중간의 14는 잘 세어보면 15여야 맞는데 성경이 어거지로 14라고 우기고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왜 15를 굳이 14라고 하는지에 관해 설명을 해 주는 부분이 밧세바의 호칭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어미 밧세바는 분명 다윗의 아내로 표기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아비가 다윗이니까요. 그런데 성경은 밧세바를 우리야의 아내라고 기록을 하고, 우리야의 아내가 솔로몬을 낳았다고 함으로 해서 솔로몬의 아비를 우리야로 끼워 넣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다윗이 족보에서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인간들이 기다리는 그 다윗 왕국의 왕이 예수의 족보에서 빠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솔로몬이라는 사람의 기능적 역할에 관해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그 이름 자체가 ‘샬롬’입니다. 평강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하 7장의 다윗의 언약을 보면 마치 솔로몬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삼하 7:12-14)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보시다시피 솔로몬은 14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에 의해 맞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위만 영원합니다. 다른 모든 세상의 왕들은 제한적 왕의 삶을 살다가 결국 멸망으로 떨어지게 되지만 예수라는 왕만 영원한 왕위에 앉으실 분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왕위가 영원할 것이라고 상징적인 언약이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의 솔로몬의 왕위는 그의 아들 대에서 둘로 갈라지고 얼마 있다가 둘 다 멸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솔로몬이 어떻게 출생을 하게 되지요? 우리야라는 장수, 하나님의 성전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전쟁을 치르던 무죄한 장수가 죽어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우리야가 죽지 않으면 솔로몬이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그 우리야의 죽음은 솔로몬을 존재케 하는 죽음이었을 뿐 아니라 다윗을 살리는 죽음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죄를 짓고 우리야가 대신 죽은 형국입니다. 우리야가 살아있을 때 다윗의 죄가 폭로되면 다윗은 왕으로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스라엘 왕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우리야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죄가 감추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야는 결과적으로 죄인인 다윗을 살리기 위해, 그의 죄를 감추어주기 위해 대신 죽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야의 역할을 부연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인물이 또 한 사람 나오는데 그 이가 사무엘하 12장에 나옵니다.

 

(삼하 12:13-14) “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14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밧세바와 통간을 하여 낳은 첫째 아이가 다윗 때문에 죽습니다. 13절을 보시면 다윗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선포됩니다. 여호와가 다윗의 죄를 사했기 때문에 다윗은 죽지 않을 거라고 나단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다윗대신에 다윗이 낳은 아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시면 다윗의 아이가 죽는 이유가 나오지요? 뭡니까? ‘여호와의 원수’ 때문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다윗 왕입니다. 마귀의 실체 다윗을 통해 나타난 것이니까요. 그러한 여호와의 원수 다윗 왕 때문에 다윗 왕이 낳아놓은 죄의 산물이 죽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그렇게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죽으시는 예수의 모습을 기능적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야가 하늘의 장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 존재의 모형이라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 번째 아이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쓰시고 죽으시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야와 그 아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이며 기능적인 인물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 군대의 장수 우리야와 자신의 죄의 산물인 아기가 죽음으로 자기 자신이 살게 된다는 그 십자가 복음을 다윗이 이해했습니다.

 

(시 51:7-8)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 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정결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주세요.’라고 징징대던 다윗이 자신의 용서의 근거를 ‘주께서 꺾으신 뼈’로 대고 있습니다. 자기대신에 주님이 꺾으신 뼈가 있는데 그로 인해 자신이 용서받고 살아나게 된 것임을 그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꺾으신 뼈인 우리야, 그리고 그 우리야 장군의 역할을 설명해 주고 있는 첫째 아이, 그 꺾어진 뼈들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다윗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다윗이 용서받고 살아났다는 것을 입증하는 인물이 다윗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인 것입니다. 솔로몬은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라인에서 탈락되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는 인물인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로 죽게 되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아이가 솔로몬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태어났다는 것은 죽어야 할 다윗이 살아났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 다윗은 하나님께서 꺾으신 뼈 안에서 함께 꺾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둘째 다윗으로 부활을 하는 형국인 것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용서받은 다윗인 것이고, 죽어야 할 다윗이 어떻게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었는가를 온 몸으로 증거 하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솔로몬은 꺾으신 뼈 안에서 죽고, 하나님의 은혜로 부활한 하나님의 아들 역할로 이 세상에 온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이루신 분이 하나님의 진짜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솔로몬을 예수의 모형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왕의 상징인 다윗은 죽고, 그 다윗 대신에 하나님이 세우시는 진짜 하늘의 왕인 예수가 솔로몬 안에서 등장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솔로몬을 ‘나의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이고 그에게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따로 주시는 것입니다.

 

(삼하 12:24~25) “24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 이더라”

 

솔로몬은 평강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용서받고 구원받게 될 하나님의 교회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 ‘샬롬’의 이름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는 ‘여디디야’인 것입니다. 그 이름은 여기에 딱 한번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지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바로 그것이 여디디야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입니다. 솔로몬이 바로 그 예수의 역할로 이 세상에 왔던 인물인 것입니다.

 

이렇게 솔로몬은 다윗이라는 죄인의 존재를 부정해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롭게 창조가 된 새로운 아들을 모형 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란 말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다윗이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솔로몬이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그 자신은 죄로 인해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로 인해 새로운 옷을 입고 탄생한 존재가 솔로몬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아비가 우리야로 기록이 되는 것이고 그 솔로몬 앞에서 다윗이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확하게 14대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야는 이미 죽어버린 존재니까요. 그는 육적 자손을 잉태하고 출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영적 아들을 낳은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에서 다윗이 근사하게 14, 14, 14로 등장했다가 살짝 사라져 버리고 맨 나중에 ‘예수’만 오롯이 남는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님의 족보에서도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다윗 왕과 같은 힘 있는 메시야가 삭제가 되고 구유에 오신, 꺾어지는 뼈, 예수만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의 왕인 다윗이 아니라 세상의 종으로 오신 예수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 아들에 의해 우리의 왕의 추구, 용사의 추구가 꺾이고 새로운 몸으로, 하나님 절대 의존자로 새롭게 창조가 되는 것이 복음임을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로 그 복음의 현실이 창세기에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을 하여 하나님의 저주로 에덴에서 쫓겨납니다. 그게 창세기 3장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4장을 시작하면서 갑자기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아이를 낳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기에 쫓겨나자마자 동침하여 아이를 낳는 것으로 모세가 아담의 에덴 밖의 삶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일까요? 모세는 지금 창세기 3장 15절의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신실하게 실행이 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언약이 어떤 언약이었습니까? 죽어야 할 여자를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살려낼 것이라는 원시복음이었지요? 지금 그 언약 하에서 아담과 하와가 후손을 낳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죽어야 할 다윗, 즉 교회가, 다른 말로 여자가, 다윗의 후손, 여인의 후손의 죽음으로, 살게 되는 원시적 그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아담과 하와의 에덴 밖의 삶을 시작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이 그들에게서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쉽게 간과해 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해산의 고통입니다. 지금 하와는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 주어진 ‘해산의 고통’과 함께 후손을 낳고 있습니다. 상징적으로 볼 때, 하와, 즉 산자의 어미인 여자가 ‘산자’를 낳고 있는 형국입니다. 물론 가인이 산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고 있는 여자의 상징적인 모습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여자가 산자를 낳는데 해산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은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여자가 산자를 낳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낳는 것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구원을 받은 교회가 역시 산고의 고통으로 산자들을 낳는 모습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해산의 고통에 관해 살펴보지요. 예수님께서 교회를 낳으실 때 십자가의 고통을 통과하셨지요? 그렇다면 예수가 통과하신 그 십자가의 고통이 결국 무엇이었다는 말인가요? 하나님의 저주였다는 말입니다.

 

(갈 3:13)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렇지요? 그러니까 지금 하와는 창세기 3장 15절의 언약의 현실을 그대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될 자신들의 현실,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여인의 후손이 겪어야 할 저주의 고통에 하와가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구원에 이르게 되지만 이 역사 속에서 자기들을 살려내게 될 그 십자가의 현실을 몸으로 체휼하여 살게 된단 말입니다. 그게 에덴에서 쫓겨나 이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배워야 할 성도들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다른 거 없어요. 성도는 예수가 누구이시며, 예수의 하신 일이 무엇이며, 왜 예수가 그 일을 하셨어야만 했는가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살다가 결국 실존적 경험으로 그 복음의 현실을 깨닫고 하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걸 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 자연스럽게 교회가 이 땅에서 겪어야 할 해산의 고통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피 공로로 우리 교회를 낳습니다. 그것을 하와가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자, 즉 교회가 아이, 예수를 낳는다고도 하지요? 그게 요한계시록 12장입니다. 여자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기를 낳잖아요? 마귀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게 막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아이를 낳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이를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여자는 1260일 동안 광야인 이 세상에서 양육을 받습니다.

 

그건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살려내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지요? 교회 때문에 예수가 오십니다. 그래서 여자가 예수를 낳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예수를 낳는 과정이 해산의 고통으로 점철이 됩니다. 그것은 교회가 예수를 낳기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무익하고 무력하며 추악한 죄인인지를 폭로 당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너무나 힘이 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불가능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폭로당하고 발각당하는 삶을 살다가 결국 ‘내가 예수 죽인 자이며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을 토해내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꼭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를 낳는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자체가 ‘이건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나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가 하시는 일’임을 보여주는 자기부인의 극치였던 것처럼 우리의 삶이 그렇게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렇게 죄인임을 폭로당하고, 무기력한 자로 발각 당하게 되면 이 세상의 왕으로, 용사로, 유명한 자로, 거인으로 살고자 했던 그의 욕망이 무너져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난 왕이 아니구나, 난 오히려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자구나’라는 올바른 자아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은혜만을 꼭 붙드는 하나님 절대의존자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바로 그 삶을 살았잖아요? 그게 바로 예수에 의해 출생한 성도의 ‘예수 낳기’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이 되고 싶어 하던 욕망의 산실인 ‘나’가 예수의 순종으로 하나님을 붙드는 작은 예수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기부인의 실존적 경험은 아주 아픕니다. 그래서 성도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해산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가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진짜 ‘나’를 낳는 경험, 즉 해산의 경험을 하는 곳이 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내가 너희를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한 것이고,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도, 여인이 해산하는 수고를 통과하지 못하면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딤전 2:15)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게 되는 그 과정이 바로 해산을 하는 고통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과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구원의 조건이 해산인 것처럼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여자로서 산자를 낳는다는 것은 비단 전도의 어려움만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인 내가 진짜 교회로 완성이 되는 그 과정을 일차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진짜 복이란 말입니다.

 

하와는 구원받을 여자의 대표, 어린양의 신부의 대표 격으로 지금 창세기에서 해산의 고통과 함께 후손을 낳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저주가 예수에게 부어져 하와에게 부어질 진짜 저주가 소멸되었음을 교훈하는 축복의 자리였던 것처럼 우리 성도의 일상에 닥치는 해산의 고통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을 하는 영광스러운 자리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계속 가보지요. 아담이 하나님의 그 언약을 듣고서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짓지요? 그 하와의 의미는 산자의 어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들은 여자의 후손 때문에 살게 될 것임을 이해했다는 증거입니다. 죽어야 할 자가 산자를 낳는다는 것은 자신들도 산다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첫 아들을 낳자마자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얻었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첫아들이 하나님의 언약하신 여자의 후손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자마자 하나님의 언약이 주신 아들이라는 ‘가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얻은 언약의 후손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가인’은 인간의 욕망이 추구하는 이 세상 용사의 모형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잘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인간 세상의 눈으로 판단할 때, ‘이 사람이다’하는 사람들은 전부 유기가 되고 인간 세상의 세계관으로 보아서 ‘이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사람이 하나님의 라인으로 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의 선악구조에 의한 기대와 가치기준은 하나님 나라의 것과 완전히 반대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지금 가인이 그렇게 유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은 뒤에 하와가 한 고백의 내용을 잘 뜯어보면 그것이 아주 명확해 집니다. 창세기 4장 1절을 보면 하와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 부분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여호와’라는 단어와 ‘에트’라는 전치사가 함께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에트’라는 전치사는 ‘with’라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함께 붙어 있는 단어를 목적어로 만드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어구는 ‘내가 여호와와 함께 아들을 낳았다’라는 뜻도 되고 ‘내가 아들, 곧 여호와를 낳았다’라는 뜻도 됩니다.

 

이것은 하와가 창세기 3장 15절의 하나님의 언약을 분명하게 이해를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와는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이 자신들의 구원자가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자마자 ‘내가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여호와(구원자)를 낳았다’고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4장 2절을 보시면 그 가인이 어떤 자였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창 4:2)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여기에서 가인을 묘사하는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를 히브리 원어로 보면 ‘아다마 아바드 하야’입니다. 여기에서 ‘아다마’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아담’이라는 이름의 어원인 ‘흙, 땅’이라는 말이고, ‘아바드’는 ‘노예가 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라는 말을 직역을 하면 ‘가인은 땅의 노예로 살았다’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셨는데 가인은 땅의 노예가 되어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뱀의 후손의 대표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의 노예들은 자신들이 다스리고 정복해야 할 것들에게 되려 다스려지고 정복당한 채 살게 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가 자신이 다스려야 할 뱀에게 다스림을 받아 타락을 했던 것이고 그 뱀에게 주어진 이 세상 모든 힘들이 인간을 다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마귀가 예수님에게 ‘내 소유인 이 세상을 주마’라고 유혹을 하지요?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넘어갈 때 그들에게 다스리라고 주신 이 세상이 함께 넘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이로 주실 때 말입니다. 제가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성도가 벗어야 할 옷과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성도가 입어야 할 옷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렇게 뱀과 뱀에게 속한 땅의 노예가 되어 땅의 힘을 추구하는 자들이 화려한 다윗 왕의 제국의 도래를 기다리던 바리새인들이요 오늘날 자칭 교회라고 너스레를 떠는 마귀들의 정체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들의 취향에 맞는 민속 메시야, 땅의 노예가 되어 땅의 것을 추구하는 자로 등장하는 가인을 부정해 버리십니다. 그리고는 또 다른 메시아의 모형을 주시는데 그가 아벨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메시아의 모형인 둘째 아들이 태어나자 인간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습니다. 이름이 벌써 ‘아벨’입니다. ‘아벨’은 ‘헛됨, 아무것도 아님, 없음’이라는 뜻입니다.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의 그 헛됨이 바로 ‘아벨’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진짜 메시아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으로 인식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의 기능적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의도적으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구별하고 계신데, 여인의 후손인 아벨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 이유를 요한이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요일 3:12)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 이니라”

 

가인의 행위는 악하고, 아벨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에 아벨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아벨의 의로운 행위는 딱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엉터리 제사를 드린 것이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운 행위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어떤 제사입니까?

 

(히 11:4)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2장 8절 이하를 보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아벨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고 가인은 자기의 힘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아벨의 제사 행위는 하나님의 것이었고 가인의 제사 행위는 가인의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당신이 제사장이 되시고 당신이 친히 제물이 되신 그 제사 이외의 다른 그 어떤 제사도 안 받으신다는 것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잘 보시면 히브리서 기자가 아벨이 지낸 제사를 ‘더 나은 제사’라고 명명을 합니다. 그리고 그 더 나은 제사는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드려지는 예물에 초점이 있는 것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물에 대해 증거 하신다고 하시잖아요. 그렇다면 더 나은 제사는 더 나은 제물을 드리는 제사가 되는 것인데 바로 밑으로 내려가면 더 좋은 제물을 갖고 드리는 제사가 어떤 제사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히 11:39-40) “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브리서 9장과 10장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 9:23)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더 좋은 예물이 무엇입니까?

 

(히 10:10)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더 좋은 예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아벨이 드린 더 좋은 제사는 더 좋은 예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드린 제사, 즉 창세기 3장 15절의 원시복음, 하나님의 언약 아래에서 믿음으로 드린 제사였던 것이고, 가인이 드린 제사는 자신의 힘과 지혜와 정성을 모아서 드린 기특한(?) 제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준비하신 어린양 예수를 제물로 가져오지 않은 모든 제사를 다 부정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절대 자신들의 행위로 자신들에게 입혀져 있는 옛 사람의 옷을 못 벗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제사 예물이 어린양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세상살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양,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엄마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데에 쓰셨던 바로 그 양의 가죽에 관심을 가졌던 아벨의 믿음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운 행위인 것입니다. 나의 행위가 아닌, 어린양을 잡으신 하나님의 행위에 관심을 갖고 그 하나님의 행위를 찬송하는 것이 더 좋은 제물로 더 좋은 제사를 드리는 성도의 제사인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나와 나에게 속한 모든 행위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복음이라 합니다. 예수가 바로 그 복음의 현실을 몸으로 보여주고 가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자고요. 그러한 믿음 안에서 제사를 드렸던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셨다고 가정해 보세요. 거기에서 열납이라는 단어는 ‘look, respect’라는 의미를 가진 ‘솨아’라는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쳐다보지도 않으셨다는 것인데, 만일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취급을 하셨다면 아벨의 태도는 어땠을까요?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 자체가 ‘내가 드리는 제사가 아님’을 전제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던 받지 않으시던 내가 화날 것이 없는 것이지요? 그 제사의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제사가 담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로 인해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니까요. 제사는 그 자체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는 구원의 현실을 담아내는 성례전적 그림(sacramental picture)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어땠습니까? ‘다른 제사는 몰라도 내가 드리는 제사는 반드시 받아야 한다’가 가인의 태도였습니다.

 

(창 4:5-7)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 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

 

내가 행하는 행위, 내가 드리는 제사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의 질과 양에 따라 하나님의 보상이 차등 있게 주어져야 한다는 그 발상이 바로 요한 사도가 말한 ‘악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행위, 악한 행위의 구별은 사건화 되어 밖으로 드러난 어떤 행위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느냐 아니냐로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가치를 부여하여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성을 챙기려 하는 바로 그것을 벌하신단 말입니다.

 

왜냐? 그렇게 자기의 행위에 가치를 두고 그 행위를 내어놓은 자기 자신이 기특해지게 되면 그 행위가 그 행위를 내어놓은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대상이 죽도록 미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가인은 자기의 가치 있는 제사 행위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는 자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건 자기의 제사 행위의 가치를 폄하하고 폄훼하게 만드는 모든 원인을 제거하여 자기 제사의 가치를 수호하겠다는 마귀적 발상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자신의 왕 됨을 방해하는 대상이 하나님일지라도 그 대상을 없애 버리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 그림을 그대로 들어서 신약 시대로 가져와 다시 펼쳐 놓은 것이 예수님의 비유 중에 등장합니다.

 

(눅 18:12~13) “12 나는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여기에서 가인이 누구입니까? 자기의 종교행위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바리새인입니다. 반면에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가슴을 쳤던 세리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까? 깨끗하게 살려고 열심히 노력했고 목숨을 걸고 종교행위를 했던 바리새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게 가인의 악한 행위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에서의 가인은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나의 행위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그게 범신론의 ‘자기 옷 벗기’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의 고통의 옷을 벗겠다고 하는 그 행위가 하나님을 죽이는 행위란 말입니다. 인간이 입은 타락의 옷은 마치 네수스의 피가 묻은 옷을 입고 그것이 벗겨지지 않아 최후를 맞게 되는 헤라클레스의 형국인 것입니다. 그건 천하장사 헤라클레스도 스스로 벗을 수 없는 무서운 옷입니다. 그 옷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벗겨질 수 있는 옷입니다. 그 옷은 믿음으로만 벗겨지는 옷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더러운 옷, 다윗 왕의 혈통, 육체를 입으시고 오셔서 죽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입혀졌던 네수스의 저주의 옷이 벗겨졌고 새로운 몸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새롭게 부활을 하게 된 자신의 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아담대신에 아벨이 죽고 셋이라는 새 창조물이 태어나 하나님 나라 백성의 혈통이 이어지는 그 위대한 복음의 현실은 죽어야 할 다윗 대신에 우리야와 아기가 죽고 솔로몬으로 태어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 속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나고, 죽어야 할 나 대신에 예수가 죽고 새로운 부활의 ‘나’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교회의 탄생에서 다시 한 번 확증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히 12:24) “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아벨의 피는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가인들에게 맞아 죽어 셋으로 부활해야 하는 자들이고, 자신의 더러운 죄를 폭로당하고 솔로몬으로 부활을 해야 하는 자들이며, 해산의 고통으로 예수를 낳아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죽고 죽다가 결국 예수의 십자가와 연합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성도들이 다 그렇게 죽었습니다.

 

(마 23:33-35)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의인 아벨부터 시작하여 사가랴까지 모두 어디에서 죽습니까?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죽습니다. 스스로 옷을 벗겠다고 했던 유대주의와 율법주의의 상징입니다. 그러한 범신론적 발상이 은혜의 복음을 말하는 자들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옛 옷을 벗을 수 없다는 자아의 죽음이 우리의 옷을 벗겨 버리시는 예수를 붙드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는 부활은 있을 수 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해 철장을 들고 달려오신다는 생각이 들 때 너무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마세요. 그럴 때마다 여러분은 선한 척, 의인인 척, 경건한 척, 자신의 의를 자랑하던 욥을 죽이시고 13만 5천 앞의 300으로 낮추심으로 그를 살려내셨던 하나님의 그 사랑을 떠 올리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옷을 벗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철장으로 우리의 옷을 벗기시려 오시는 것이니 기쁘게 그 철장을 받으십시다.

 

아벨은 죽어서 믿음으로 말을 했습니다.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 11:4)’ 신자는 죽음으로 자신의 신앙 고백을 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기특한 종교 행위, 선한 행위 몇 개 내어놓고 ‘나 좀 봐 주세요’ 하는 것이 신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로운 행위를 했다고 하는 아벨의 행위가 성경에 하나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도 죽음으로 말을 했고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이 역사 속에서 그렇게 죽음으로 자신의 신자 됨을 확인받고 떠났습니다. 그렇게 죽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힘내세요. 죽음이라는 네거티브의 총화 앞에서 힘을 내라는 위로를 할 수 있는 이 역설의 미학, 부디 여러분에게 이해가 가시길 바랍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