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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교회여 세상을 향해 출격(出格)하라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20.

 

 

교회여 세상을 향해 출격(出格)하라

 

(김성수 목사)

 

 

(창 14:1‐24) “1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의 시대에, 2 이 왕들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왕 곧 소알 왕과 싸웠다. 3 이 다섯 왕은 군대를 이끌고, 싯딤 벌판, 곧 지금의 '소금 바다'에 모였다. 4 지난날에, 이 왕들은 십이 년 동안이나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십삼 년째 되는 해에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5 십사 년째 되는 해에는, 그돌라오멜이 자기와 동맹을 맺은 왕들을 데리고 일어나서, 아스드롯가르나임에서는 르바 사람을 치고, 함에서는 수스 사람을 치고, 사웨 기랴다임에서는 엠 사람을 치고, 6 세일 산간지방에서는 호리 사람을 쳐서, 광야 부근 엘바란까지 이르렀다. 7 그리고는, 쳐들어온 왕들은 방향을 바꿔서, 엔미스밧 곧 가데스로 가서, 아말렉 족의 온 들판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까지 쳤다. 8 ○그래서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왕 곧 소알 왕이 싯딤 벌판으로 출전하여, 쳐들어온 왕들과 맞서서 싸웠다. 9 이 다섯 왕은,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이 네 왕을 맞아서 싸웠다. 10 싯딤 벌판은 온통 역청 수렁으로 가득 찼는데,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의 군인들 가운데서 일부는 그런 수렁에 빠지고, 나머지는 산간지방으로 달아났다. 11 그래서 쳐들어온 네 왕은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모든 재물과 먹을거리를 빼앗았다. 12 ○아브람의 조카 롯도 소돔에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롯까지 사로잡아 가고, 그의 재산까지 빼앗았다. 13 ○거기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 하나가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와서, 이 사실을 알렸다. 그 때에 아브람은 아모리 사람 마므레의 땅,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마므레는 에스골과는 형제 사이이고, 아넬과도 형제 사이이다.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을 맺은 사람들이다. 14 아브람은 자기 조카가 사로잡혀 갔다는 말을 듣고, 집에서 낳아 훈련시킨 사병 삼백열여덟 명을 데리고 단까지 쫓아갔다. 15 그 날 밤에 그는 자기의 사병들을 몇 패로 나누어서 공격하게 하였다. 그는 적들을 쳐부수고, 다마스쿠스 북쪽 호바까지 뒤쫓았다. 16 그는 모든 재물을 되찾고, 그의 조카 롯과 롯의 재산도 되찾았으며, 부녀자들과 다른 사람들까지 되찾았다.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을 맺은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온 뒤에, 소돔 왕이 아브람을 맞아서, 사웨 벌판 곧 왕의 벌판으로 나왔다. 18 그 때에 살렘 왕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19 그는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천지의 주재, 가장 높으신 하나님,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20 아브람은 들으시오. 그대는, 원수들을 그대의 손에 넘겨 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아브람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21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사람들은 나에게 돌려 주시고, 물건은 그대가 가지시오." 22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가장 높으신 주 하나님께, 나의 손을 들어서 맹세합니다. 23 그대의 것은 실오라기 하나나, 신발 끈 하나라도 가지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 덕분에 아브람이 부자가 되었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24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습니다. 다만,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함께 싸우러 나간 사람들, 곧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에게로 돌아갈 몫만은 따로 내놓아서, 그들이 저마다 제 몫을 가질 수 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기근의 시험과 풍요의 시험을 마치고 벧엘과 아이 사이로 올라갔다가 거기서 단을 쌓고 다시 헤브론 지역으로 내려와 그의 가솔(家率)들과 함께 남방에 둔취(屯聚)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아브라함은 세 번째 시험을 치릅니다.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애굽 땅처럼 좋은 요단들과 소알 땅을 차지하고 떠나버린 조카 롯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의 동방 연합군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는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그 전쟁의 기원은 이러합니다. 원래 이 일이 발생하기 14년 전에 엘람의 그돌라오멜 왕이 대 원정(遠征)을 하여 서방(西方) 사해(死海)일대를 정벌하고 그들로 하여금 신복(臣服)하게 하여 조공(租貢)을 바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서방의 다섯 나라는 12년 동안은 열심히 조공을 바치며 살았는데 제13년에 갑자기 배반을 하여 조공을 끊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14년 째 되는 해에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자신과 동맹을 맺고 있던 동방의 세 나라와 연합을 하여 다시 서정(西征)에 나선 것입니다. 그 때 소돔과 고모라도 그 동방의 원정군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그 동방의 원정군은 오늘날 이란 지방에 해당하는 큰 나라 엘람과 후대에 바벨론이라 불렸던 대 제국 시날, (1절을 보시면 당시 그 시날의 왕의 이름이 아므라벨이라고 나오지요? 학자들은 그가 아브라함과 동시대를 살았던 함부라비 법전을 만든 함무라비 왕이라 추찰(推察)합니다만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풍요의 나라 엘라살, 티그리스로부터 메디아 국경까지 너른 지경을 소유하고 있던, 후대에 앗수르라는 이름으로 불린 고임 이렇게 네 나라의 연합군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위세(威勢)가 어떠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동방의 원정대는 그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팔레스타인 중부의 여러 족속들을 치면서 아래로 내려옵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그들은 먼저 갈릴리 동쪽 바산 땅의 아스드롯 가르나임을 쳤습니다. 그곳에는 르바 족속이라는 거인 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역사 기록에 의하면 그 르바 족속은 매우 잔인하고 강한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전부 거인들이었으니 얼마나 강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엄청난 원정대의 서슬 앞에서 그 거인 족들도 맥을 못 추고 정벌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얍복강과 아르논 강 사이의 함에 머물던 수스 족속이 동방 원정대에게 무너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사웨(평야)기랴다임에 사는 거인 족 엠 족속이 무너졌습니다. 그 엠 족속 또한 거인 족속으로 아주 강한 군대가 있었음에도 동방 원정대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무너져 버렸습니다. 동방 원정대는 그렇게 갈릴리 바다 동쪽을 훑으면서 내려와서 사해 동쪽까지 이르렀습니다. 사해 동쪽의 호리 족속이 나중에 에서가 거했던 땅, 세일 산간에서 그들의 먹이가 되었고 동방원정대는 그길로 아래로 치고 내려가 바란 광야까지 내려갑니다. 그들은 그 바란 광야, 엘바란을 지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정탐꾼을 보내었던 가데스 바네아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니까 지금 동방 원정대가 팔레스타인 땅 동부를 모두 점령하면서 광야 북부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아말렉 족속을 때리고 하사손 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까지 점령을 했습니다. 하사손 다말은 사해 서쪽입니다. 그 아모리 족속이 사는 땅에 아브라함도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은 공격을 받지 않았을까요? 그는 가나안 땅에서 줄곧 장막을 치고 살았기 때문에 공격에서 제외되었던 것입니다. 원정대에게 천막은 먹이 감으로 인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동방의 원정대는 가나안 땅 동부를 모두 점령하고 사해 서쪽까지 점령을 한 후에 마지막으로 반역을 한 다섯 왕들을 치러 올라온 것입니다. 그들에 비하면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던 소돔과 고모라와 스보임, 아드마, 소알의 왕들은 역청 구덩이 앞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싸워 보았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습니다. 동방 원정군 앞에서의 그들의 투쟁은 당랑거철(螳螂拒轍)에 불과했습니다. 본문의 내용에 의하면 그들은 오히려 그 역청 구덩이에 자신들이 빠질 정도로 혼비백산(魂飛魄散)했습니다. 제가 왜 이러한 동방원정군의 행보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를 해 드리는가 하면 이렇게 거인 족들을 비롯한 가나안의 수많은 왕들과 나라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돌라오멜의 동방 원정군의 뒤를 자신의 집 가신(家臣)들 삼백여명을 데리고 좇아갔던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좀 더 현실감 있게 설명을 해 드리기 위함입니다. 한 마디로 동방 원정군을 향한 아브라함의 출격(出格)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싸움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삼백 열여덟 명의 가신들과 자기가 빌붙어 살고 있던 헤브론 땅의 아모리 족속, 마므레 삼형제의 부족, 즉 마므레와 에스골과 아넬 족속으로부터 소수의 동맹군을 얻어 황급히 출병을 했습니다.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할 적은 가나안 땅 전체를 점령하고 수많은 전리품과 포로들을 이끌고 승전가를 부르며 돌아가는 막강한 동방 원정군입니다. 이 장면을 보시면서 사사기의 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그 수가 메뚜기 떼처럼 중다(衆多)했다고 하는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연합군을 향해 삼백 명의 군사와 함께 출정을 했던 기드온이 생각나시지요? 원래 이스라엘 군대가 삼백 명밖에 안 되었나요? 아닙니다. 처음에는 삼만 이천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 돌려보내시고 삼백 명만 남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삿 7:2) “2 주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거느린 군대의 수가 너무 많다. 이대로는 내가 미디안 사람들을 네가 거느린 군대의 손에 넘겨주지 않겠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제쳐 놓고서, 제가 힘이 세어서 이긴 줄 알고 스스로 자랑할까 염려된다.”

 

하나님께서 삼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군대를 모두 해산 시키시고 삼백 명만 남기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치르는 전쟁은 그들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의해 승패가 갈린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도 그 관점에서 이해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지금 아브라함이 가신들 삼백여명과 출격하여 동방의 원정대와 치르는 전쟁은 아브라함의 지략과 능력에 의해 승패가 갈리는 전쟁이 아닌 하나님의 전쟁임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대적들과 치르시는 전쟁은 어떤 전쟁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세상과의 싸움에서 하나님 백성들 편을 들어서 세상에서 늘 승승장구하게 만들어 주는 싸움인가요? 그건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이지요.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과 싸워서 져주라고 하셨지 어떻게 해서든 이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 싸움은 어떤 싸움이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늘 승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 바로 성도가 신앙생활 내내 치러야 하는 영적전쟁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의 동방 원정군과의 전쟁에서 물리적이고 세상적인 보상을 받았나요?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의 엘람이라는 나라를 차지하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그돌라오멜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잡았습니까? 아니면 전쟁에서 패한 나라들이 아브라함에게 조공(租貢)을 바치기라도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그 전쟁을 통하여 세상적인 보상이나 물리적 결과를 조금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서방정벌에 나섰던 동방 연합군들이 아브라함의 소행을 괘씸하게 여겨 다시 회군(回軍)을 하여 아브라함을 좇아 왔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이상하지 않아요? 그들은 지금 자신들을 우습게 여기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던 다섯 나라를 혼내주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몇 명 안 되는 적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의 위신을 완전히 땅에 쳐 박아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아브라함을 혼내주었어야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의 출격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 교회에게 무언가를 설명해 주시기 위해 시청각 자료로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신앙여정에서 겪게 될 보편적 영적 전쟁의 내용을 아브라함의 전쟁을 통해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엡 6:12) “12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전쟁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과 세상 권세를 잡고 있는 정사와 권세 등의 우리 대적들과의 영적인 싸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싸움입니까? 골로새서에 가면 에베소서에서 우리의 대적으로 제시된 그 정사와 권세가 완전히 패배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골 2:14-15) “14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우리 가운데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15 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셔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심으로써,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서 ‘벗어버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아페크 뒤오마이’는 ‘빼앗다, 약탈하다, 망쳐 버리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우리의 대적인 정사와 권세를 약탈하여 망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벌이고 있는 정사와 권세와의 전쟁은 십자가에서 이미 결판이 나 있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 성도는 그 정사와 권세와의 싸움을 자신의 신앙 여정동안에 열심히 싸워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주님이 이미 이겨 놓았다고 하면서 우리에게는 너희가 싸워야 한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주님과 사단과의 전쟁은 이미 십자가에서 결판이 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전쟁을 재현하며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군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의 승패는 이미 갈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도의 영적 전쟁은 늘 승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미 승리로 결정지어진 싸움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성도가 그의 영적전쟁에서 실수할 수도 있고 패배하는 듯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수조차도 영원한 승리를 향한 거름역할을 하는 것이 성도의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결과는 이미 나 있는 것이니까요. 인내심을 가지시고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고린도 전서로 가서 그 전쟁의 가시적 결말을 보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고전 15:24~26) “24 그 다음에는 마지막이 올 것인데,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권위와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25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두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26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입니다.”

 

조금 전에 읽은 에베소서에서 우리의 영적 싸움의 대상이 누구라고 했지요? 정사와 권세죠? 여기도 그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에 우리의 대적 정사와 권세가 모두 멸해지게 되는데 그 중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 정사와 권세의 대장을 가리켜 사망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싸워야 하는 전쟁은 사망으로 대표되는 어떤 영적 세력과의 싸움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사망이라는 놈은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롬 5:12) “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사망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 세상에 뚫고 들어와 버린 것입니다. 사망은 죄의 삯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싸워야 할 대상은 사망, 즉 죄의 세력인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그 사망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삼켜져 버렸습니다.

 

(고전 15:54-57) “54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55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56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57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은 바로 그 사망을 이김으로 삼켜 버리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 안에서 그분의 이기심에 연합되어 우리도 이긴 자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사망이 우리의 사망을 삼켜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삼킴의 모습은 창세기에서부터 예시가 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해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을 때 무죄한 짐승의 사망이 아담과 하와의 사망을 삼켜버렸습니다.(창 3:21)

 

그 삼킴의 사건은 출애굽기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묘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앞에서 하나님 백성들의 출애굽이 무엇을 예표하고 있는 것인지를 실물자료를 통해 보여 주십니다. 출애굽기 7장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라고 하나님의 명을 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적을 보이라 했고 아론은 자기의 지팡이를 바로 앞에 던졌습니다. 그 지팡이는 이내 뱀으로 변했습니다. 그 것을 본 바로가 애굽의 술객들을 불렀습니다. 그 애굽의 술객들도 자신들의 지팡이를 던져 뱀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론의 뱀이 애굽 술객들의 뱀을 삼켜 버렸습니다. 뱀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타락하게 만든 저주와 심판과 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저주와 심판과 사망이 또 다른 저주와 심판과 사망을 삼켜 버린 것입니다.(출 7:10-12)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이 어떠한 모양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미리 그림으로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저주와 심판과 사망을 모두 받으시고, 다른 말로 저주와 심판과 사망이 되셔서 하나님 백성들의 저주와 심판과 사망을 삼켜 버리시는 십자가 복음의 모형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신 21:23) 그게 바로 영적이스라엘의 영적 출애굽, 구원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죄인들을 대신하고 대표하여 저주가 되시고 심판이 되시고 사망이 되시는 우리 주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세상 적 관점으로 볼 때 사망과 저주의 모습, 세상의 힘과는 전혀 무관한 나약한 모습으로 태어나십니다.

 

그 분은 구유(具有)에서 그의 생을 시작하셨고 죽는 날까지 약해빠진 모습으로 세상에게 당하기만 하다가 결국 사망이 되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사 53:2‐3) 그러나 그렇게 무능력해 보이고 약해빠진 모습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스스로 사망이 되어 사망을 삼키심으로 교회가 죄의 권세에서 놓여나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그 하나님의 전쟁과 아브라함의 전쟁을 비교해 보자고요. 지금 아브라함의 출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하나님의 전쟁에서 아브라함과 삼백 가신(家臣)들은 어떤 역할을 한 것입니까?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시 8:2) “2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의 위엄을 찬양합니다. 주께서는 원수와 복수하는 무리를 꺾으시고, 주께 맞서는 자들을 막아 낼 튼튼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삼백 가신들은 그들이 치른 그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이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승리한 것임을 보여주는 어린 아이와 젖먹이 역할을 한 것입니다. 바로 어린 아이처럼 젖먹이처럼 전혀 무능력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승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나’라는 존재가 드러나고 ‘나’라는 존재의 능력을 발휘하여 ‘나’를 자랑하는 나라가 아니라 ‘나’는 숨고 하나님이 드러나 내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향기처럼 흘러나오는 곳입니다. 그것을 쉬운 말로 ‘순종’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지금 아브라함의 출격에서 그림자로 보여 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과 삼백 용사는요?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쪽에서의 보잘것없음을 드러냄으로 해서 하나님의 강함을 보여주었던 것이 기드온과 삼백용사였던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에서 인간 쪽의 무력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골리앗 앞에선 소년 다윗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게 되는 전쟁이 바로 하나님의 전쟁인 것입니다.(고후 12:10)

 

하나님의 승리는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실현이 된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보잘것없는 출격은 바로 그 십자가 전쟁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백성들의 전쟁은 모두 하나님이 왕이시고 우리는 티끌인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와의 싸움 아닙니까?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이야기는 저의 추론(推論)이 아닙니다. 시편 110편으로 가 보시면 왜 제가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영적 전쟁으로 이해를 하는가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시 110:1‐5) “1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2 주께서 임금님의 권능의 홀을 시온에서 보내 주시니, 임금님께서는 저 원수들을 통치하십시오. 3 임금님께서 거룩한 산에서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시는 날에, 임금님의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고, 아침 동이 틀 때에 새벽 이슬이 맺히듯이, 젊은이들이 임금님께로 모여들 것입니다. 4 주께서 맹세하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셨으니, 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5 주께서 임금님의 오른쪽에 계시니, 그분께서 노하시는 심판의 날에, 그분께서 왕들을 다 쳐서 흩으실 것입니다.”

 

이 시편 110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데리고 전쟁을 하시는데 그의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 오른 편에 앉아계신 주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 110편은 단순히 다윗의 전쟁에 관한 시편이 아니라 메시아의 통치와 심판에 관한 시편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지금 메시아 왕국이 그러한 모습으로 완성이 될 것임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젖먹이로 서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의 힘으로 완성이 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4절을 보시면 다윗은 승리의 비결로 등장하는 그 주님을 가리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라 묘사를 합니다. 그 멜기세덱은 신약에도 딱 한 번 등장합니다.

 

(히 6:19-7:1) “19 우리에게는 이 소망이 있으니, 그것은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아서,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줍니다. 20 예수께서는 앞서서 달려가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거기에 들어가셔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7: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여러 왕을 무찌르고 돌아올 때에, 그를 만나서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시편과 히브리서에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멜기세덱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사건에 아주 중요한 인물로 인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아브라함의 출격 이야기가 바로 구원의 이야기,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관한 이야기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 멜기세덱에 관해서는 제가 예전에 에베소서 강해 때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린 바 있습니다. 에베소서 강해를 참고 하세요) 그런데 제가 서두에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세 번째 시험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의 출격 전쟁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를 예표하고 있는 사건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성도를 대표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시험이 될 수가 있지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구원을 받은 성도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전쟁에 그의 군사로 초청을 받습니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이 성도의 삶 속에서 실재 화 되어 나타나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빌 3:10; 벧전 4:13; 계 1:9)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믿음의 후예들인 교회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손해와 상(傷)함을 감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그의 삶 속에서 보여야 하는 예수의 전쟁에 동참하는 자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교회는 그 의 삶 속에서 바로 예수의 행함을 드러내야 하는 시험대에 수시로 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전쟁이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는지를 본문의 내용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롯이 동방의 원정군에게 사로잡혀 갔을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상당히 서운한 마음을 품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롯이 떠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위로해 준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만큼 아브라함은 롯의 배신이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괘씸한 조카 롯이 사로잡혀 갔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속으로 은근히 쾌재를 불러야 할 일이 아닐까요? 나를 버리고 가더니 고거 참 쌤통이라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그를 사로잡아 간 군대는 막강한 동방 4개국의 연합군입니다. 자신에게는 삼백여명의 가신들과 같은 동네에 사는 마므레 삼형제 부족들의 소소한 지원군뿐입니다. 게다가 원정군들은 이미 직선거리로 140마일이나 되는 단까지 철수해 있는 상태입니다.

 

아브라함이 기병(騎兵)과 보병(步兵)들을 거느리고 600리를 좇아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일주일은 걸리는 거리입니다. 이래저래 아브라함에게는 힘겹고 손해되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그 원정군의 손에 하나님의 백성 롯이 잡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괘씸한 롯을 위해 여러모로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출격을 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정신인 것입니다. 그러한 십자가의 삶은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와 자기 후손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 후손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으므로 그 전쟁에서도 지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그는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고 원수 같은 롯을 구하러 출격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치러내야 할 전쟁들이 자기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임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의 말에 자신의 전리품 십분의 일을 바친 것입니다.(창 14:20)

 

본문 20절을 보면 멜기세덱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초를 치는 말을 합니다. 네 전쟁은 너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하나님의 전쟁이었다고 그 전쟁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심을 전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자기가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줍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모든 공로와 공적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세 번째 시험에서도 보기 좋게 합격을 한 것입니다. 이제 그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똑같은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적은 사단의 세력이고 그러한 죄의 세력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아니 매 순간 매 순간 아브라함의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전쟁에 임하여야 합니까?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겨 놓으신 전쟁이기에 때론 감당할 수 없게 보이는 우리의 죄 성을 향해 과감히 출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이겨낼 재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동방원정대 앞에 선 아브라함과 가신 삼백열여덟 명 같은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하나님이 싸우시는 하나님의 전쟁이기에 우리는 전략과 전술을 동원해서 열심히 싸워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시겠지 하고 뒷짐 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임을 알았지만 무작정, 무모하게 달려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소수 정예의 군사들로 많은 수의 적군을 상대해야 했기에 그들을 나누고 밤을 타서 그들의 후미를 공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모을 수 있는 동맹군을 모두 모아서 출격을 했습니다.(창 14:14‐15) 아브라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무모함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행위처럼 우리의 최선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의 죄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이미 우리 죄를 모두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셨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린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패배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라는 결과를 못 박아 놓고 싸우는 이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전에 패배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패배 또한 승리를 향한 징검다리가 되는 것이 우리의 전쟁입니다. 결국 우리는 승리의 고지로 올라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확고한 구원의 최종성과 확실성을 우리가 정말 믿고 있다면 우리는 간혹 실수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그 싸움을 싸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길 것이니까요.

 

그러한 싸움을 싸우는 신자들은 우리 주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들의 삶 속에서 세상의 힘을 과감히 버리고 영적인 것을 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싸움은 이 세상 것들을 얼마나 많이 가지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죄를 얼마나 멀리하느냐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기에 세상의 힘이 아닌 영적인 성숙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마 4:1‐10)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돌아오면서 소돔 왕이 주는 전리품들을 하나도 받지 않았던 것을 보셨지요?(창 14:23)

 

그러나 그는 살렘 왕 멜기세덱의 떡과 포도주는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살렘이라는 말은 평화, 평강이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을 살렘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멜기세덱은 왕이라는 의미의 ‘멜렉’이라는 단어와 ‘의’라는 의미의 ‘쩨덱’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살렘왕 멜기세덱은 평강의 왕이요, 의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많이 듣던 소리지요? 그리고 그는 왕이면서 제사장입니다. 당시 고대시대 왕은 제사장을 수하에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통치에 제사장들의 제사 행위를 사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제사장입니다. 그 말은 제사를 지내는 것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는 왕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드리는 삶으로 통치의 수단을 삼는 하늘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주시는 떡과 포도주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그 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었지요? 아브라함이 그 떡과 포도주를 취하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분별력이 생겼을까요? 그게 믿음입니다. 우리가 다음 주에 공부할 15장에 가면 그 사실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소돔 왕의 금은보화와 보잘것없어 보이는 살렘 왕 멜기세덱의 떡과 포도주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고 계십니까? 다른 말로 바꾸어서 여쭤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해 세상의 힘을 과감히 버리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우리가 그렇게 세상의 힘과 영적인 것들 사이에서 영적인 것을 과감히 선택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때 자신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며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아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가리켜 주님은 자기부인의 삶이라 하셨고 십자가의 삶이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출격에서 우리는 그러한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기 부인의 삶은 우리가 크신 하나님 앞에서 티끌에 불과한 피조물이라는 자기 자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원래 무(無)에서 출발한 존재로서 손해와 상함 앞에 담담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 내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아니 나라는 존재 자체도 하나님 것이니까요.

 

(고전 6:20, 7:23) “그 때 우리는 우리의 소유에 대해 초연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승리를 온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돌렸습니다. 그 싸움은 애초에 승산이 없었던 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오로지 하나님 힘만 믿고 그 싸움에 어린아이요 젖먹이로 출격을 했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사람입니다. 누가 봐도 그 싸움은 아브라함의 힘으로 치른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싸움에서 티끌에 불과한 자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 이길 힘이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길 밖에 구원의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고 내안에서 그 분이 사십니다.(갈 2:20)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얻은 이후에도 오히려 내 안에서 십자가의 삶을 사시는 예수님이 밖으로 드러나지 못하도록 막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런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고(요 14:16; 히 13:5)우리 안에서 십자가의 삶을 사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간간이 나타나는 나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는 삶은 바로 우리 안에 살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 이만큼 했어요’라는 교만을 떨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세상을 향해 출격을 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안에서 열심히 십자가의 삶을 살고 계신 우리 주님을 의지하여 불가능해 보이는 우리의 거룩을 향해 손발을 힘껏 움직여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도록 충성한 후에(계 2:10; 딤후 4:2) 자신의 무익성을 통감하면서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하는 정직하고 겸손한 청지기로 살다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눅 17:10)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의 출격이 이야기하고 있는 영적 전쟁의 실체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성도 안에는 아브라함의 출격 속에서 모형으로 보여 졌던 순종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계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옛 육신입니다. 우리는 그 옛 육신의 습관, 집착, 중독, 통제성향, 자기 방어 등의 배설물들을 과감히 닦아 내는 전쟁을 매일매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세력, 세상을 향해 과감히 출격을 하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삶,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열심히 추구하며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살아냈던 신앙생활이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평생을 바쳐 추구한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6장은 그러한 영적 전쟁의 공격 무기를 단 하나로 제시합니다.

 

성령의 검, 즉 말씀이라고요. 여러분이 영적전쟁을 잘 치러내시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유일한 공격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익히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공격 무기를 잘 벼르고 닦아서 세상을 향해, 여러분 안에 매복하고 있는 죄의 세력을 향해 출격하십시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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