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김성수 목사)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여기서 ‘복 주셨다’ ‘율로게사스’는 과거시제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미 모든 복을 다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복 내려 주옵소서.’를 외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의 내용을 잘 못 알고 계신 분들이지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전부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삶으로 입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압니다. 그런데 그것까지 해야 진짜 복음을 누리는 자들이며 진짜 복음을 바로 받아먹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계 10:9-11) “9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로 가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니, 그는 나에게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의 배에는 쓰겠지만, 너의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하였습니다. 10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서 삼켰습니다. 그것이 내 입에는 꿀같이 달았으나, 먹고 나니, 뱃속은 쓰라렸습니다. 11 그 때에 "너는 여러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에 관해서 다시 예언을 하여야 한다" 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 왔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10장을 공부하면서 바른 복음을 받아먹은 자들의 삶은 입에서는 달지만 배에서는 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역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고난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함께 확인했지요? 지난주에 저희 교회 집사 님 한 분이 저에게 ‘목사님, 밖에 있는 사람들이 목사님을 고난 목사라고 부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은 걱정이 되셔서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제가 참 영광스러운 별명을 얻었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아더핑크나 리차드 벡스터나 해리 아이언 사이드나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 조지 휫필드 같은 분들의 별명이 바로 ‘고난 목사’였거든요. 제가 감히 그 분들이 가지셨던 별명을 얻었으니 이 어찌 영광스럽지 않겠습니까? 성도의 삶이 이 땅에서 고난을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기에 성경을 올바로 강해하는 사람은 성도의 고난을 피해서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11장을 공부하면서 그 신자의 바른 삶에 대해 더욱 더 자세하게 공부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올바른 복음 위에 사는 자들의 삶을 어떻게 기록을 해 놓으셨는지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그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을 살피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에 대해 9,10,11절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1절을 보시면 작은 책을 받아먹은 요한에게 하나님께서 명령을 내리십니다.
(11절) “그 때에 "너는 여러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에 관해서 다시 예언을 하여야 한다" 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 왔습니다.”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이 구절 때문에 고전적 세대주의자들은 이때부터 후 삼년 반이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해서 이 때 새로운 예언을 받아서 새롭게 예언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만 여기서 쓰인 ‘다시’‘팔린’이라는 헬라어는 ‘더 깊이, 강화하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11절의 말씀을 좀 더 원어의 뜻에 가깝게 번역을 하면 ‘제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네가 하나님 말씀이 무엇인지 지금 전하던 것을 더 강화해서 전해야 한다는’사명을 내리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그 시작은 복음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복이 담긴 소식, 복된 소식’이지요? 그래서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미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공부한 에베소서로 가보지요.
(엡 1:3)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여기서 ‘복 주셨다’ ‘율로게사스’는 과거시제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미 모든 복을 다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복 내려 주옵소서.’를 외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의 내용을 잘 못 알고 계신 분들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그 복음 안에 담긴 복의 내용이 뭔지 복습을 해 보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복’이라는 단어가 언제 처음 나옵니까?
(창 1:27-28)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복’‘바라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인간의 존재 속으로 공급되는 모든 생명력을 ‘복’‘바라크’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하고 그 ‘복’을 상실했습니다. 이제 인간은 뿌리가 뽑힌 나무가 된 것입니다. 살아있긴 하지만 생명의 근원인 땅에서 그 뿌리가 뽑혀버렸기 때문에 결국 사망으로 그의 삶을 결론 맺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금 어떤 무리들에게 그 ‘복’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 ‘복’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행되어야 합니까?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이 되어야 하지요? 끊어진 송수관을 이어야 다시 물이 끊이지 않고 공급이 되지요. 그 끊어진 송수관을 어떻게 이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해결을 하십니다. 그래서 그 예수 안에 들어있던 모든 자들이 다시 하나님의 생명력을 영원히 공급받게 되는 것을 우리가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전부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그 ‘복’의 회복을 어디서부터 설명해 가십니까?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창 12:1-3)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런데 잘 보시면 그 복의 내용이 그 복을 받은 사람에게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처음부터 강조하십니다. ‘가 네게 복을 줄 텐데 너는 그 복의 근원이 되어서 다른 이들에게 그 복을 흘려보내야한다’ 여기까지가 복음입니다.
(갈 3:6-9)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보세요, 사도 바울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 복음의 내용이 ‘너 혼자 구원받고 천국 가라’가 아니라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까지가 복음인 것입니다. 왜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복을 얻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 되는 것인지를 지금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복음이 적힌 작은 책을 받아먹은 요한에게 ‘너는 지금부터 더 깊이,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을 하셨는지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롬 10:13-17) “13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주님, 우리에게서 들은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은 반드시 전하는 자의 입을 통해서만 전파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이 복음 전하는 일도 하나님 혼자서 하시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어차피 그 복음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그 성령에 의해 눈이 뜨여지고 귀가 열린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먼저 복음을 받아먹은 자들을 복음 전파의 자리로 모두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삶으로 입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압니다. 그런데 그것까지 해야 진짜 복음을 누리는 자들이며 진짜 복음을 바로 받아먹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전 1:20-21) “20 지혜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21 이 세상이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보세요. 우리의 전도가, 우리의 설교가 미련한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그런 것으로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세요. 하나님께서 개입 안 하시면 아무리 감동적인 설교를 퍼부어도 인간은 절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우리를 그 일에 부르실까요? 왜 우리를 전도의 현장으로 부르실까요? 왜 우리를 하나님 나라 완성의 도구로 수단으로 방법으로 택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 즉 이제 영원히 타락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을 그 완벽한 재창조의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켜 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빵 나무를 주시지 않고 밀을 심어서 농사를 짓고 추수를 해서 방앗간에 가서 탈곡을 하고 그것을 잘게 갈아 밀가루 반죽을 하고 간을 해서 오븐에 잘 구워서 빵을 만들어 먹는 창조의 자리에 우리를 부르시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그와 똑같은 원리로 우리를 그 영광스러운 자리로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입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긍휼과 인내와 온유하심에 동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하여 하나님께 등을 돌린 자들을 향해 어떠한 사랑을 부어주신 것인지를 조금이나마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 안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한량없는 배려인 것입니다.
(눅 19:41-44) “41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시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42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43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칠 것이니, 너의 원수들이 흙언덕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사면으로부터 너를 공격하여서, 44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하러 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듣지 못하고 그냥 사망으로 떨어지게 될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시면서 우셨습니다. 우리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신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긍휼과 인내와 온유의 성품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을‘하면서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면서 조롱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이 복음이 아니면 당신이 살 길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참아주며 인내하며 기도하며 눈물 흘리며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에 조금 씩 조금씩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가 복음의 내용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난 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야 하는 사람들이고 아울러 입으로도 그 복된 소식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고전 9:16-18)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17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사도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부득불 해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부득불은 ‘마지못해’의 뜻이 더 강하지만 여기서 쓰인 헬라어 ‘아낭케’는 헬라의 숙명론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당시 헬라의 델포이와 아테네의 신전에서는 간혹 신탁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으로부터 사제에게 신탁이 선포되면 사제는 그 신탁의 당사자에게 그 신탁을 전했고 그 사람은 반드시 그 신탁을 운명적으로 살아내야 했습니다. 만일 신전에서 전달된 그 신탁을 외면하거나 거부하면 그 사람은 벌은 벌대로 받고 그 신탁은 신탁대로 살아내야 했습니다. 그 때 쓰인 단어가 ‘아낭케’입니다. 그러니까 그 뜻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거스릴 수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에게 벌써 이 땅에서 상이 주어졌습니다. 18절 보시면 내가 상을 받았다. 그 상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복음을 전할 때 응당 받아야 할 것을 받지 않고 값없이 기쁘게 전하는 온유함과 사랑과 인내, 이런 것을 벌써 상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먹은 자들에게 복음전파의 명령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롬 1:14) “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복음을 먼저 받은 자들은 모두 빚진 자입니다. 여기서 빚진 자‘오페일레테스’는 그 빚을 갚지 않으면 감옥에 갈 수밖에 없는 악성 채무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 전파는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요 책임입니다.
(고전 9:23)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 하고자 함이라”
여기서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내가 복음에 참예 하고자 함이라’는 표현을 쓰지요? 거기서 쓰인 단어‘순코이노노스’는 ‘joint partaker’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가 받은 복음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그 복음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선교와 전도에 별로 관심이 없는 줄 압니다. 제가 선교와 전도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 세계를 품에 안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올바른 복음을 정리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거룩을 먼저 챙기십시오.’ 그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목사님은 선교에는 관심이 없나보다’ 이런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설교한 것은 ‘외식이나 종교행위, 형식, 자기의’그런 것들에 빠져서 엉터리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경고를 한 것이지, 선교의 중요성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선교 사역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학 부 때는 그 어려운 선교사 훈련까지도 다 마쳤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결혼 후에도 제 아내가 꿈이 ‘중국 선교사’여서 언젠가는 선교사로 나갈 것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놓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3년마다 한 번씩 시카고 휘튼 칼리지에서 열리는 세계 선교 대회에 매 번 참석을 했었습니다. 다른 것보다도 그냥 선교 현장에서 살고 계신 선교사님들을 가까이서 뵙고 간증을 듣고 하는 것이 좋아서 참석을 했던 것입니다. 그 선교 대회에는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시는 수천 명의 선교사님들이 참석을 하기 때문에 일주일간 아주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습니다. 제가 선교에 대한 관점이 바뀐 것이 그 세계 선교 대회에서 선교사님들을 만나면서 많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참 훌륭한 선교사님들도 많이 계시지만 어떤 분들은 현지에 가서 죽도록 고생은 하시는데 정작 본인이 ‘복음에 대한 정확한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계신 분들이 허다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아무리 좋은 유치원을 지어주고 빵 공장을 지어주고, 병원을 지어주고 한다한들 그게 무슨 선교가 되겠습니까? 봉사활동이지... 그래서 제가 ’우리 세계를 품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복음을 바로 배우고 가자‘ 라고 설교를 한 것입니다.
제가 만난 무수한 선교사님들 중에 정말 저에게 감동을 안겨 준 선교사님 부부가 계십니다. 위클리프 선교회 소속의 젊은 부부였습니다. 지난 번 세계 선교 대회 때 그 아내가 나와서 선교 보고를 하셨는데 그 분들은 아프리카의 어떤 이름도 알 수 없는 부족에게 가서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계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족은 말만 있지 글이 아직 없어요. 그러니까 일단 그들의 말을 배워서 글을 만들고 글자를 만든 후에 그 글자를 가지고 성경을 번역하고 그 글자를 가리켜서 복음을 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다 되려면 앞으로 20년쯤이 걸린답니다. 4살 박이 딸을 포함한 전 가족의 인생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어떤 아프리카의 부족을 위해 쏟아 부은 분들입니다. 거기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서 저녁에 해가 지면 모두가 잠을 잔답니다. 그리고 해가 뜨면 일어나서 해 질 때까지 일하다가 또 해가 지면 자고 그런대요. 음식도 그 부족들과 똑같이 먹고 마을에 일이 있으면 함께 노동도 하고 그렇게 사셨어요. TV, 인터넷, 신문, 자동차, 게임, 영화 이런 것 없이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녁 무렵 마을 뒷산에 올라가면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는 200 여 가구의 굴뚝에서 일제히 저녁을 하는 연기가 솟아오른다고 합니다. 매일 저녁 석양이 질 때면 그 모습을 보면서 아프리카의 아버지, 위대한 선교사 리빙스턴의 기도를 드리신답니다. ‘아버지, 저 불쌍한 사람들에게 꼭 아버지를 나타내시옵소서.’ 제가 저녁 때 그분들 숙소로 찾아갔습니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진짜로 몸에서 향기가 나는 듯했습니다. 아마 순결이나 순수라는 냄새가 있다면 바로 그 냄새일 것 같아요. 그분들은 정말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계신 분들이었습니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너무나 명확하게 알고 계신 분들이었어요. 그런 분들은 정말 아프리카의 ‘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분들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어떤 한 소녀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한 첫 마디가 ‘왜 이제 오셨어요?’였답니다. 그 말씀을 하시면서 눈물을 훔치시더라고요. 그리고 잘 걷지 못하는 코끼리 근육병을 앓고 있는 그 소녀가 매일 매일 수 마일씩을 걸어서 자기 일가친척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다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렇게 건져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 존경하는 선배 목사님의 설교에서 포항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공학 박사로서 전도유망하던 한 젊은 선교사님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두 딸과 함께 중국으로 떠나면서 자신을 파송 하는 교회에 쓴 편지의 내용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지난 세월 속에 포항의 단칸방이 좁았던 만큼 가족들 간의 거리도 가까워 졌는데 세상 사람들은 보다 많은 방과 좀 더 큰집을 갖기 위해서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불행을 집으로 불러들이는 분주와 집착과 비교가 밉지도 않은지 궁금해집니다. 왜 좀 더 빠르고 편리하고 안락하고 화려하고 거창한 것에는 구름처럼 사람이 모이는데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길이와 높이를 깨닫고 싶어 하는 모임에는 빈 의자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알려져야 할 그리스도의 비밀이 여전히 비밀로 남아있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확연하게 구분되는 두 종류의 삶이 세상에 존재함을 깨닫게 해주신 것은 바로 그 분의 전적인 은혜와 긍휼에서 나온 것임을 고백하며 이제 중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부모님과 친척과 친구들은 저희 가족이 중국으로 가는 것에 못마땅한 시선과 만류를 보냅니다. 그러나 저희 가족이 / 힘을 소유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힘을 버리는 길로 보이게 될, 중국을 향해서 떠나가지만 바로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기에 그들도 그 멸망의 도를 벗어나 구원의 길로 접어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어때요? 이런 분들은 정말 중국의 ‘복’이지요? 이게 진정한 전도자요, 선교사인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정의도 못 내린 사람들이 선교지에 가서 학교 수백 개 짓고 빵공장, 국수공장 수백 개 짓는 것보다 하나님은 이런 진짜 선교사 한 사람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도자들에게 그런 전도자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유익과 권리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지옥을 살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자신들을 불사르는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아직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지 못했어요.
(사 52:7) “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How beautiful! 삶으로 입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살아내는 자들, 그들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기원전 490년에 아테네의 마라톤 광장에서 커다란 전쟁이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수십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아테네로 쳐들어 온 것입니다. 그 때 아테네의 군사는 불과 수천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라톤 광장의 전투에서 아테네 군이 승리를 했습니다. 그 병사 중에 한 명이 그 승리가 너무 기뻐서 단숨에 42.195km를 달려서 그 기쁜 소식을 전하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마라톤 광장의 이름을 따서 마라톤이라는 경기가 생겨난 것이지요. 구원의 복된 소식이 고작 그런 전쟁의 승리보다 못한 소식입니까?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기쁘고도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발길은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 좋아서...나누고 싶어서...
마포구 합정동에 가면 양화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 조선 땅에 오셨던 선교사님들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제가 자주 들르던 곳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 수많은 선교사들의 무덤을 하나하나 만져가며 그 묘비명들을 다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다들 조선을 너무 사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들이 미개한 땅 조선 땅에 와서 전염병으로 과로로 때로는 핍박의 칼에 목숨을 던지며 예수를 전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애통함에 참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요? 그들 안에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안 사람들이었습니다.
억만장자의 아들이었으며 영국의 가장 유명한 크리킷 선수였던 CT Studd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헌납하고 인도로, 아프리카로 선교를 떠난 것을 기억하십니까? 예일대 출신의 미국 갑부 윌리암 보이든이 모든 재산을 다 털어 기증을 하고 이집트에 가서 평생을 복음을 전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미친 사람들입니까? 아니요. 어떤 것이 진정한 가치요, 진정한 기쁨인지를 정확히 알았던 분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실 때 몸이 필요하셨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에도 예수님의 몸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작은 그리스도들, 하나님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더 깊이, 더 강하게, 더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 중에 이제 방학을 하고 한국이나 타 주에 있는 집으로 돌아 갈 친구들 있지요? 가서 뭐 하실 겁니까? 스노우보드 타러 다닐 거예요? 친구들하고 잡담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실 것입니까? 뭐 하실 겁니까? 삶으로 입으로 복음을 전하십시오. 여러분은 이제 복음이 뭔지 아시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가족들이 예수를 알지 못하는 분들 계시죠? 언제까지 여러분의 직무를 유기 하실 것입니까? 복음을 전하세요. 우리 유정이가 이번 방학 동안 우리가 지난여름에 다녀왔던 중국 장춘으로 4일간 혼자 갑니다. 자기가 맡았던 반 아이들에게 더욱더 정확한 복음을 알려주고 싶은 겁니다. 지난 반년동안 이메일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꾸준히 복음을 설명해 왔었고 이제 마무리 확인도장 찍으러 가는 것이지요.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의 의미를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전도는 별거 아닙니다.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그 눈물을 아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도하지 않는다니요? 우리가 선교하지 않는다니요? 그건 언어도단입니다. 전하세요. 증거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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