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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12.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김성수 목사)

 

 

(창 12:5‐9) “5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길을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6 아브람은 그 땅을 지나서, 세겜 땅, 곧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7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아브람은 거기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8 아브람은 또 거기에서 떠나, 베델의 동쪽에 있는 산간지방으로 옮겨 가서, 장막을 쳤다. 서쪽은 베델이고 동쪽은 아이이다. 아브람은 거기에서도 제단을 쌓아서, 주께 바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9 아브람은 또 길을 떠나서, 줄곧 남쪽으로 가서, 네겝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의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재촉하심으로 하란을 떠나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에 의한 믿음의 처음과 끝을 간단하게 한번 보여줍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공부한 1절에서 4절까지의 내용과 오늘 본문 5절까지를 통해 믿음이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이며 심판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서 그가 저주받을 바벨론(갈대아 우르)에서 건져지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를 당신께서 약속하신 땅에 도달하게 만드시는 구원의 거시적(巨視的)시종(始終)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에서 설명을 멈추지 않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그렇게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을 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지를 6절부터 시작하여 친절하게 설명해 나갑니다. 6절 앞부분을 보시면 아브람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을 ‘통과하여’(지나서) 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거기서 ‘통과하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아바르’는 ‘pass through, 지나다, 나그네와 같이 이곳저곳을 여행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에 정착을 한 것이 아니라 그 땅이 진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하늘의 땅임을 알고 그 가나안 땅을 나그네처럼 통과하여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어구와 단어를 통하여 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가나안 땅은 지나가는 곳이지 그 자체가 종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옮겨갑니다. 그리고는 그 남쪽의 땅, 남방 헤브론에서 그의 생을 마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6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가나안 입성에서 가나안 남방에서의 마침까지 즉,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믿음의 사람으로서 겪고 익혀야 했던 순례의 내용이 압축되어 있는 구절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간 그가 어떻게 그 땅을 통과하여 그의 생을 마치게 되는지가 압축되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네 구절을 잘 공부를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이 세상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성도가 이 땅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해 잘 배울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를 믿게 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어떤 수확을 거두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선 자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뀌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삶을 잘 공부해보면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겪어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은 전혀 그런 기대와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6절을 다시 보세요.

 

(창 12:6) “6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약속의 땅에 들어간 아브라함이 처음 당도한 곳이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였습니다. 히브리어 ‘모레’는 ‘지침, 교사’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단어는 종종 ‘무당이나 점쟁이’로 번역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상수리나무’는 구약에서 가나안 종교의 문란한 종교 의식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던 나무입니다.

 

(호 4:12-13) “12 나무에게 묻고, 그 요술 막대기가 그들을 가르치니, 그들의 마음이 음심에 홀려서 곁길로 가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빗나간다. 13 산꼭대기에서 희생제물을 잡아서 바친다. 언덕 위에서 분향한다.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의 그늘이 좋다고, 거기에서도 제물을 잡아서 불살라 바친다. 너희의 딸들이 음행을 하고, 너희의 며느리들이 간음을 한다.”

 

모세는 지금 ‘모레’와 ‘상수리나무’라는 단어를 통해 아브라함이 도착한 가나안의 세겜 땅에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이방신전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당도한 땅은 하나님께서 논 갈고 밭 갈고 잘 정리해서 잘 먹고 잘 살라고 준비해 놓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은 풍요와 다산의 가나안 이방 신상과 이방 신전이 있는 땅이었고 그 이방 신에게 속하여 풍요와 다산을 좇는 가나안인 들이 우글거리는 땅이었습니다. 그는 풍요와 다산을 좇는 가나안인 들의 냉대와 질시 속에서 그 땅에 정착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보를 잘 보시면 아브라함은 북쪽으로부터 가나안으로 내려옵니다. 가나안 땅의 북쪽인 갈릴리 땅은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초지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인 들에게 밀리고 밀려 계속해서 황무지뿐인 남방으로 쫓겨 가는 형국입니다. 풍요와 다산을 좇는 사람들은 자기 이외의 모든 이들이 경쟁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낯선 이방인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기로 선택된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풍요와 다산의 신이 권세를 휘두르는 가나안에서 그 세상을 등지고 살기란 그리 녹녹치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예수를 믿게 된 성도가 처음 맞게 되는 현실이 바로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라는 것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새로운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우리는 그 때 비로소 세상의 정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성도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세상의 다스림을 받는 자로서 세상과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동일한 목적과 기대 속에서 삽니다. 그래서 그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추악한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예수를 알게 되고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되면 그는 그 세상이 얼마나 죄가 많은 곳이며 그 세상이 추구하는 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들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성도들을 교육시키는 영적훈련의 순서입니다. 성도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되면 먼저 세상의 실체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올바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이방의 우상들과 천국 백성인 나와는 전혀 다른 형질의 풍요와 다산만을 좇는 이방인들이 우글거리는 무서운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바로 하나님 나라에 넣지 않으시고 세상 신이라 불리는 사단과 그 사단의 자식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에 던져 넣으실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속해있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다름’을 그들 속에 있는 믿음을 발휘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성도를 이 이방 땅에 던져 넣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풍요와 다산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이들이 어떠한 선택으로 어떠한 삶을 사는지 보여주라 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풍요와 다산만을 목적으로 하여 사는 세상은 세상의 힘을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행복해하고 기뻐하지만 너희는 그러한 세상의 힘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으로 행복과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음으로 보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성도가 예수를 믿게 되면 그들의 눈을 열어 풍요와 다산의 우상을 좇는 모레 상수리나무라는 세상의 실체를 보게 하신 후에 ‘너희도 이 길을 가려느냐?’하고 우리에게 선택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풍요와 다산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이방 사람들처럼 너희도 모레의 지침을 좇아 풍요와 다산을 좇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자신을 정화시키며 오직 주님께만 충성을 다하겠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구원하신 후 세상에서 데려 가지 않으시고 세상으로 돌려보내시는 것입니다.

 

(요 17:15,18) “15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으로의 파송을 통해 주님께서 성도에게서 보고 싶은 것이 성도가 세상 속에서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고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나섰던 어떤 서기관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는데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 그런데도 나를 좇겠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진정으로 눈을 뜨지 못한 자들은 ‘내가 왜 그런 힘든 길을 가야해?’하고 돌아서게 되는 것이고 새로운 눈이 뜨여 세상의 정체를 본 성도는 풍요와 다산의 세상과 가난과 고난과 십자가의 주님 사이에서 망설임 없이 주님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했다는 것은 우리가 계속 세상에서 살되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과 헌신의 삶을 통해 증명되는 것입니다.

 

(빌 2:15) “15 그리하여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좇겠다고 나선 당신의 백성들을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앞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그토록 매력적인 세상의 모든 우상과 세속 신의 유혹을 뿌리치고 주님만 좇아 살겠다는 고백을 받아내시고야 마십니다. 그게 우리의 신앙생활의 주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신 것처럼 가나안 땅은 우리가 뿌리박고 살 땅이 아니라 ‘통과해야’할 땅입니다. 그 땅은 우리의 충성의 대상과 신실의 목표가 오직 주께만 있음을 확인시키고 증명해야 할, 가나안의 신전들이 줄지어 있는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은 순례의 종착지가 아니라 순례자의 믿음의 질을 평가하는 시험장인 것입니다.

 

(신 8:2-3) “2 너희가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여라. 그렇게 오랫동안 너희를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너희를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너희의 마음 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3 주께서 너희를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너희도 알지 못하고 너희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성도의 광야,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지 세상의 힘을 좇는지 시험하는 시험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창세기 23장으로 가서 아브라함이 어떠한 선택을 했으며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세상으로부터 어떠한 평가를 얻어냈는지를 보겠습니다.

 

(창 23:2-7) “2 그는(사라) 가나안 땅 기럇아르바 곧 헤브론에서 눈을 감았다. 아브라함은 빈소에 들어가서, 사라를 생각하면서, 곡을 하며 울었다. 3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 옆에서 물러나와서, 헷 사람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4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나그네로, 떠돌이로 살고 있습니다. 죽은 나의 아내를 묻으려고 하는데, 무덤으로 쓸 땅을 여러분들에게서 좀 살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5 헷 족속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였다. 6 "어른께서는 우리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른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세우신 지도자이십니다. 우리의 묘지에서 가장 좋은 곳을 골라서 고인을 모시기 바랍니다. 어른께서 고인의 묘지로 쓰시겠다고 하면, 우리 가운데서 그것이 자기의 묘 자리라고 해서 거절할 사람은 없습니다." 7 아브라함이 일어나서, 그 땅 사람들, 곧 헷 사람들에게 큰 절을 하고,

 

사라가 헤브론 땅에서 죽자 아브라함이 헷 사람들에게 가서 아내를 매장할 매장지를 좀 팔라고 말을 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자신을 어떻게 지칭하는지 보세요. 아브라함은 자신을 ‘나그네요 우거한 자’라 부릅니다. 자신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요 떠돌이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모두다 이 땅을 나그네요 떠돌이로 살다가 갔습니다.(히 11:13) 그렇게 이 땅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요 떠돌이로 살기로 선택을 한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어떠한 평가를 받게 되는지 보세요. 다시 창세기 23장으로 가서 6절을 보시면 헷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가리켜 하나님의 방백이라 부릅니다. 거기서 방백이라는 단어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왕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생애와 존재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니 아브라함은 자신들의 땅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의 복이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행 7:5)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단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설명해 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이 세상 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는 바로 우리에게서 시작이 되고 완성이 되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으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땅은 바로 우리 자신의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성숙으로 완성되는 땅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풍성히 받은 사람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그의 생애와 존재와 인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삶을 살았으니까요. 하나님의 통치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아브라함의 인생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땅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그 자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세상 속에서 특별한 ‘다름’을 보여주는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그 삶을 아주 성실하게 잘 살아내었습니다.

 

(행 2:43-47)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 장면은 단순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든 재산을 교회에 다 바치고 공산사회처럼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장면은 풍요와 다산의 신전이 있는 세상 속에서 갓 생겨난 교회라는 공동체가 세상의 삶의 원리와는 정 반대로 자기의 것을 모두 비워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그 속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더라는 것을 대비하여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땅에서 그러한 ‘다름’의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앞에서 ‘모레의 지침’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한 이들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고 다른 이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풍요와 다산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른 판단과 다른 결정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삶 속에서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선택을 하며 이 땅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선택하며 살아갈 때 여러분이 선 땅이 진짜 영적인 가나안,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7절을 보세요.

 

(창 12:7)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그 곳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신들을 섬기는 지역은 그 신들의 영토로 간주되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선 자리는 가나안의 신전, 즉 풍요의 신 바알신전이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그 땅은 바알 신이 소유권을 행사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바알신의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 만드셔서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겠다는 상징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결국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사단의 나라가 하나님 아들의 손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그 십자가의 열매가 미리 상징으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을 이끌고 계신 하나님은 이방 신들의 터줏자리까지도 임의로 넘겨주실 수 있는 분이심과 하나님의 이름이 인정되지 않은 이방 지역에서까지 주권적인 권한을 내세울 수 있는 권능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습니까?

 

7절 말미를 보시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그 말씀을 듣고 그 곳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단(壇)을 쌓습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은 지금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 가나안 땅은 그 땅 주인들이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창12:6) 아브라함은 그 이방 땅에서 완전히 무력한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어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너는 무력하나 나는 너의 무력함을 초월할 수 있는 절대 능력을 가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성도의 무기력함을 통감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말씀하신 것을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지난 번 수요 예배 때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신 한국 합동신학교 총장이셨던 윤영탁 교수님의 말씀 중에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윤 목사님은 대장암을 앓으신 분이십니다. 대장암이 발병하자 병원에서 장을 20센티 이상 잘라내셨습니다. 그러한 대 수술을 마치신 후 윤 목사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하나님 저는 제 힘으로 하나님만을 붙들며 살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저를 붙들어 주옵소서’였답니다. 여러분, 이 기도를 들으시고 어떤 생각이 드세요? 의지가 약한 어떤 노 목사의 넋두리로 들리십니까? 아닙니다. 바로 그 고백이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듣고 싶으신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 하나님께 자신을 붙들어 이끌어 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크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통감해 보지 않은 이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의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자신 없으니 하나님께서 저를 붙들고 이끌어 달라’는 고백은 ‘하나님, 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 싶습니다. 열심히 해 볼 테지만 자주 실수 할 것입니다.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은 저의 무력함을 넘어서시는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 때마다 저를 그 절망의 자리에서 일으켜 주세요.’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단을 쌓는 것은 그렇게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크심을 인정하며 그 크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좇겠다는 아브라함의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나는 불가능하고 무기력하고 부족하기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나를 맡깁니다.’라는 고백은 나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역설(逆說)의 투신(投身)’인 것입니다. 그 말은 나의 꾀나 나의 지략(智略)으로 이 땅을 살기를 포기하겠다는 항복 선언입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처음 당도하게 되는 땅은 세상의 힘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岐路)인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인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몇 군데 찾아 드리겠습니다.

 

(창 35:4)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야곱이 그의 아들들과 벧엘로 올라가면서 세겜 땅 상수리나무 아래에 무엇을 묻습니까? 이방 신상과 귀에 있는 고리를 묻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창35:1) 여기서 말하는 귀고리는 액세서리로서의 귀고리가 아니라 신상(神像)이나 주문(呪文)을 부조(浮彫)한 일종의 간이용 우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그러한 귀고리를 부착함으로 악귀를 몰아내고 행운을 소원했었습니다. 야곱과 야곱의 가족들이 하나님 이외에 자신들이 의지하고 의뢰했던 모든 것들을 상수리나무 아래에 모두 묻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원어를 보면 상수리나무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직역을 하면 ‘그 상수리나무’입니다. 그 말은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이방신상과 우상들을 모두 묻어 버린 그 상수리나무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상수리나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 상수리나무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야곱과 열두 아들이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이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만을 좇아 살겠습니다.’라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우상의 나무 상수리나무 아래에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세상 우상들을 파묻어 버린 것입니다. 우상들을 묻었다는 것은 마치 시체가 매장되듯이 우상은 하나님 앞에서 시체와 같은 것들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들은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고 있던 모든 우상들을 완전히 청산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기로 한 것입니다.

 

(신 11:29-30) “29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희는 그리심 산에서는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여라. 30 이 두 산은 요단 강 서쪽에 있는데, 모레 상수리나무 곁, 길갈 맞은쪽, 요단 강에서 서쪽으로 얼마만큼 들어간 곳에 있고, 요단 계곡 아라바에 살던 가나안 사람의 영토에 속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에발산과 그리심 산에서 축복과 저주,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역시 모레 상수리나무가 선택의 기로(岐路)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수 24:14-15) “14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여러분은 이제 주를 경외하면서, 그를 성실하고 진실하게 섬기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상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오직 주만 섬기시오. 15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여러분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를 섬길 것이오."

 

지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일갈(一喝)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어디지요? 세겜입니다.(수 24:1) 이렇게 세겜땅 모레 상수리나무는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는 이 세상 신, 즉 맘몬과 보이지 않는 땅을 제시하시며 믿음의 순종을 보이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岐路)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여정 내내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성도는 그의 인생 내내 모레 상수리나무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 때마다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면서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라 하셨으니 사랑하며 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원수 갚지 말라하셨으니 원수 갚지 않는 것이고(롬12:19)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끼리 소송하지 말라하셨으니 소송하지 않고 져 주는 것이고(고전6:6‐7) 하나님께서 오히려 손해를 보라 하셨으므로 손해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라 하셨으므로 용서하는 것이고(눅17:3‐4) 하나님께서 원수를 먹이고 마시게 하라고 하셨으므로 오히려 원수의 입에 떡을 집어 넣어주고 생수를 부어주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롬 12:20)

 

그러나 그러한 삶은 풍요와 다산의 신 바알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서 바보가 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바보의 삶을 선택하라 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힘을 좇지 말고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라 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진리를 우리더러 삶으로 보여주라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선택의 기로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했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벧엘과 아이 사이로 옮겨 또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삶의 여정 동안 그가 지나간 자리를 연결하고 있는 것은 그가 가는 곳마다 쌓은 단(壇)인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이 땅에 남기고 간 것은 무슨 대단한 업적이 아니라 그가 그의 신앙 여정 동안에 곳곳에 쌓은 단 뿐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발붙일 땅 한 쪽 없었습니다. 그가 무슨 대단한 도시를 건설한 것도 아닙니다. 그가 그의 인생 동안에 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드리는 단(壇)을 쌓은 것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세상의 힘을 약속하는 세상 신을 제시하시고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너는 누구를 택하겠느냐’하고 물으실 때 그 곳에 순종과 투신의 단을 쌓는 것이 성도의 일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여정을 대표하는 두 가지를 들라면 ‘장막’과 ‘단’입니다. 장막은 신앙의 진보라는 목표를 가지고 끊임없이 길을 떠나야 하는 나그네요 이방인들의 기동력(機動力)과 전진(前進)을 상징하는 것이고 단(壇)은 ‘나’를 드리는 헌신(獻身)과 투신(投身)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끊임없이 성숙을 향해 전진해야 하며 끊임없이 순종의 자리를 선택하면서 이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장막과 단입니다.

아브라함이 장막을 거두고 옮길 때마다 그 곳에는 그가 쌓은 단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지나간 자리에 여러분의 순종과 헌신과 투신이 담긴 단이 서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것들을 먹고 싸놓은 배설물들이 쌓여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언젠가 이 육신의 장막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영원한 하늘의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의 삶의 자취를 따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세우신 순종과 헌신의 단들이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종류의 순종을 원하시는지 반복해서 들으셔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엄마의 젖에 비유합니다.

 

(벧전 2:2) “2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우리 성도가 구원을 받은 후에 그를 구원받은 자로 성숙시키는 유일한 도구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내용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성도를 성숙하게 만드는 성숙의 젖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말씀의 젖을 사모하는 것은 필연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러한 말씀의 젖에 의해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상 우상들을 묻어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태어난 갓난아이들이 엄마의 젖이 부르트도록 빨게 되는 것은 본능인 것입니다. 나방이 불빛을 가까이 하면 근육이 수축이 되어 자연스럽게 불로 향하는 광극(光極)성이 나방의 본능이듯이 아기는 엄마의 젖을 본능적으로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갓난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엄마 젖은 비려서 싫으니 막걸리나 한 사발 주세요.’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된 성도들은 반드시 말씀이 있는 곳을 본능적으로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행복한 포만감을 얻게 되고 그 말씀에 의해 무럭무럭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 성장 속에서 성도는 그동안 자신이 추구했던 세상의 힘들을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났다고 하는 성도가 말씀이 아닌 바알이 뿌려놓은 세상의 힘들을 추구하며 그 것들을 선택하며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를 지나고 있다면 그가 어찌 올바른 선택으로 지나는 자리마다 단을 쌓은 믿음의 조상의 후손이겠습니까? 그러한 사람은 갓 태어난 아기임에도 엄마젖이 아닌 쾌락의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괴물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잠시 황홀하게 해 주는 바알의 막걸리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하게 성장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젖,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더욱 더 진지해 지시고 더욱 더 성실해 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지시하는 곳으로 열심히 순종과 헌신과 투신의 단을 쌓으며 오늘도 장막을 걷고 전진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토의할 질문

(1) 성도가 거듭난 뒤 처음 만나는 땅이 어느 땅입니까?

(2) 모레 상수리나무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3) 그 선택의 기로인 모레 상수리나무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4) 모레 상수리나무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에 힘써야 합니까?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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