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김성수 목사)
(계 14:12-13)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 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제 곧 세상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과 그 심판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천사의 소리가 우리에게는 복된 소리, 복음이 되는 신비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이제 그 심판의 날이 되면 우리 하나님 나라는 가시적으로도 완성이 될 것이고 우리는 이제 이 지겨운 육신의 몸을 벗고 영원한 새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 심판의 임박함이 바로 “복음“이 되는 것이다.‘ 라고 제가 말씀드렸죠. 그리고 아울러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이 땅에서 매매도 마음대로 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들은 지금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고 실상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불쌍한 자들이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진짜 쉬는 자, 진짜 자유 한 자들은 바로 우리였습니다. 12절은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고 영원히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게 될 마귀의 세력들과 대조적으로 영원한 쉼을 얻게 될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서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계 14:12)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이 구절은 우리가 그렇게 쉽게 지나쳐서는 안 되는 구절입니다. 본문 12절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고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이며 그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제가 한번 여쭤보지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지요? 그리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을 때 우리에게는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지 오늘 잘 정리를 해보자고요.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들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왕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인간들에게 단 한 가지 금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을 하신 것은 단순히 선악과가 저주의 과일이라서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는 모든 인간은 만물보다 절대 상위에 있는 존재이지만 그 모든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절대 하위에 있을 때에만 그 복이 유효하다고 하는 하나의 상징이었습니다. ‘너는 내 말을 지켜야 하는 자다’라는 상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아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모든 생명력을 우리가 ‘바라크’ ‘복’이라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 하나님마저 자기 아래로 내려 보내고 자신들이 왕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게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앉아버린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그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자들이 그 계명을 버리고 자기들 스스로 왕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로 한 것’이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당연히 그 타락한 자들과 달리 자신의 의도와 계획과 욕심과 야망을 다 누르고 원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들은 계명을 지킨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계명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계명들을 몇 가지만 보고 넘어가지요. 먼저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직접 새겨주신 십계명을 한번 읽어볼까요?
(출 20:1-17)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해 냈으므로, 너는 이러한 계명들을 지켜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 살인하지 말지니라 14 간음하지 말지니라 15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여러분, 이 계명 다 지키고 계세요? 분명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계명인 십계명을 읽었는데 여러분 그 계명도 다 못 지키시지요? 그래도 이 계명들은 이를 악 물고 지키겠노라고 마음을 먹으면 인간이 못할 것도 없는 그런 계명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비록 회칠한 무덤처럼 살긴 했지만 이 계명을 외형적으로 정확하게 지켜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넘어 와서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단순히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 뿐 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포함한다고 다시 율법을 정의해 주십니다.
(마 5:21-45)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송사 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이같이 해야 너희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고 딱 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 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라도 어기면 모두 어긴 것이 됩니다.
(약 2:10)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더군다나 오늘 본문 13절에서는 하늘나라에서 쉬게 되는 성도들은 그들의 행한 일을 근거로 쉬게 된다고 명시가 되어있습니다.
(계 14:13)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 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그렇죠? 그럼 지금 당장 우리의 모습을 보자고요. 여러분의 행위가 하나님 마음에 드실 것 같으세요? 저는 자신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천국에 못 가는 건가요? 큰일 났지요? 어차피 못 지킬 거 그냥 애시 당초 포기하고 오늘부터 ‘부어라, 마셔라’광란의 밤을 보낼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에게 예수를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12절을 보세요.
(계 14:12)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예수 믿음이 함께 붙어있지요? 그냥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더라.’라고 끝났다면 우리는 큰일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그 계명을 다 지킬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거기에 바로 이어서 ‘예수 믿음’이 등장합니다. 이게 얼마나 복된 소식인지 모릅니다. 이 ‘예수 믿음’ ‘텐 피스틴 예수’는 소유격입니다. 헬라어의 소유격은 네 가지로 쓰입니다. 단순한 소유격을 나타낼 때도 쓰이지만 주격으로도 쓰이고 원인을 가리킬 때도 소유격을 씁니다. 그리고 목적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음’ ‘텐 피스틴 예수’는 ‘예수의 믿음’ 혹은 ‘예수가 가진 믿음’ 혹은 ‘예수를 믿는 믿음’ ‘예수에 대한 믿음’이렇게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모두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이 우리 것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 주님께서 이미 모두 지켜내셨고 완성시키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계명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완전한 인간의 신분으로 모두 지켜내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시고 결례의 날이 되어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 데리고 올라가서 정결 예식을 행하는 것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유대인들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고 아이를 낳은 산모는 부정한 여인이라 하여 반드시 아이를 낳은 후에 아이와 함께 제사장에게 가서 정결 예식을 행해야 합니다. 남자아이는 40일, 여자아이는 80일이 지난 후에 어머니와 아기들은 정결 예식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남자아이 중 장남들은 하나님께 바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법 들 뿐만 아니라 이 자질구레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누가복음뿐만이 아니라 4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시는 것을 시작으로, 절기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셔서 모든 율법을 하나하나 다 지키고 계신 것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도덕법들을 다 지켜내셨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삶을 우리 주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전가시켜 주셨습니다. 그냥 거저 다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님의 은혜로 마치 우리가 계명을 다 지켜낸 것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하신 사역을 믿음으로 그 모든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예수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이렇게 개판으로 사는데도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우리의 것으로 여겨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계명을 지킨 자가 되는 것이고 하늘에서 영원한 쉼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게 ‘하늘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성도들은 계명을 지키고 예수 믿음을 지킨다.’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예수 믿음이 함께 붙어서 나와 있는지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거저먹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을 ‘은혜다, 선물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매주 당신들 그렇게 살면 가짜라고 소리소리 지르더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 계시지요? 오해 말고 잘 들어주세요.
저의 고등학교 동창 중에 아주 유명한 철학 교수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교수님의 에세이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이 되었으니까 아주 뛰어난 철학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저희 학교 철학과 주임교수님이셨고 그 가족들과 제가 한 교회를 섬겼기 때문에 더 가까웠지요. 그 분은 저희 교회 장로님이셨습니다. 그 아들하고 제가 같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 친구 집에 자주 들러서 공부도 하고 밥도 먹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 아버님께서 제가 차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보시더니 ‘그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는 어디 가고 심심하게 십자가만 남아있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굉장히 당황했습니다. 저희 교회 장로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냥 ‘예수’라고 부르는 것도 의아했지만 그 예수가 어디 갔냐고 물으시는 것에 적지 않게 당황했습니다.
제가 얼떨결에 ‘부활하셨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분께서 ‘너는 정말 그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나서 너의 죄를 다 없애 주었다고 믿는 거냐?’ 하고 거의 조롱하는 말투로 제게 물으셨습니다. 저는 서슴없이 ‘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께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회자되던 자유주의 신학자 불트만의 학설을 장시간에 걸쳐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매료되어서 그 가르침을 좀 더 효과적이고 감동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예수의 이야기를 신화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예수가 살아났다고 여길 만큼 그의 가르침을 신봉하고 그의 삶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열심히 그 분의 삶을 좇아서 고급한 정신문화와 고급한 도덕, 윤리 그리고 고급한 종교성을 갈고 닦으면 되는 것이라고 기독교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철학과 주임 교수님이신 교회 장로님의 신앙관이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 분의 삶을 좇아 그대로 살아낼 수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건 어불성설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실 필요가 없지요. 우리는 그 하나님의 요구를 다 지켜낼 수 없는 타락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는 어떤 인간이며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배우고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항복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려는 시도들이 나오는 것이지 단순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이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게 기독교의 최종 목적이라면 간디나 슈바이처가 최고로 신앙 좋은 사람이 게요?
여러분 제가 기독교는 성품의 문제요 인격의 문제라고 말씀드린 것은 기독교는 무슨 무당 종교처럼 ‘나보다 힘센 어떤 존재에게 아부를 떨어서 그 힘을 좀 빌려 내 유익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변해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무(本務)’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드린 말씀이지 ‘어떻게 해서든 깨끗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면 알매니안 주의와 뭐가 다릅니까? 기독교는 이 땅에서 훌륭한 일을 해내고 엄청난 업적을 쌓고 자신의 인격을 수양해서 모든 이에게 존경받는 사람들을 생산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내가 나의 인생에 주인이 되어서 내 인생을 이끌어 가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사는 게 진짜 행복한 삶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전적으로 그 분께만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어 내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 분께 순종하게 된 자들의 삶이 변해 가는 것을 ‘거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계명이 완성이 되어 이제 우리는 개판으로 살아도 천국을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그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었다고 해서 이제 우리는 아무렇게나 불효를 하면서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 안에서 그 부모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기 전에는 다분히 의무감으로 부모에 대한 효도를 했었다면 이제 예수를 알고 난 후에는 자신의 목숨을 끊어서 나를 사랑하신 그 예수의 사랑으로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헌금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되었으므로 나는 나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 서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삶은 바로 그 ‘항복’에서 나온 거룩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목소리를 높여 요구하는 신자의 바른 삶도 바로 그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그렇게 잘 배우고,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왜 그 삶 속에서 하나님에게 항복하는 순종의 몸짓이 안 보이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여러분이 복음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라는 의미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한 장군이 황후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그 황후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전쟁에서 크게 이긴 황제와 장군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잔치가 흥겹게 무르익을 무렵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불이 모두 꺼져 버렸습니다. 그 때 황제가 애지중지 아끼는 그 황후의 볼에 누군가가 뽀뽀를 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황후는 당황했지만 자기 볼에 뽀뽀를 하고 도망간 그 남자의 갓 끈을 하나 끊어서 꼭 쥐고 있었습니다. 불이 들어오자 그 황후는 황제에게 고자질을 했습니다. ‘불이 꺼졌을 때 누군가 나의 볼에 뽀뽀를 하고 도망갔습니다. 제가 그 자의 갓 끈을 끊어서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갓 끈이 없는 자를 찾아내어 능지처참(陵遲處斬)을 해 주옵소서’
그 때 황제가 급히 엄명을 내렸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장군들은 즉시 갓 끈을 전부 끊어서 버려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장군들이 즉시 자기가 쓰고 있던 갓 끈을 끊어서 버렸습니다. 이제 범인이 누구인지 찾는 것은 다 틀려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황제는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기 위해 장군들과 출정을 했습니다. 황제는 적군의 계략에 빠져 홀홀(忽忽)단신 포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 장수가 목숨을 걸고 적진을 뚫고 들어와서 황제를 말에 태우고 탈출을 했습니다. 무사히 탈출을 한 황제가 그 장수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죽을 지도 모르는 그 사지에 홀로 들어와서 목숨을 걸고 나를 구했느냐?’ 그 때 그 장수가 말했습니다. ‘얼마 전 잔치 때 황후에게 갓 끈을 뜯긴 자가 바로 저였습니다. 그런데 황제께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저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 황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이게 은혜를 입은 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은혜를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 은혜를 베푼 분께 목숨을 바치기는커녕 여전히 이렇게 게으르고 모나고 불성실하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마음에도 없는 것들을 억지로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인간들은 얼마든지 자기의 자랑과 드러남을 위해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사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롬 10:1-3)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제가 말씀드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성품과 인격은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위해서 단순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고 선행을 행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거룩은 단순히 깨끗하고 바른 삶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위에 깨끗하고 바르고 정직하게 사는데 왠지 재수가 없는 사람들 많지요? 왜 그렇죠? 그 사람들의 바른 생활의 의도는 남을 유익하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자랑과 유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닮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함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자랑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그리고 그 분이 목숨을 끊어가며 사랑하신 나의 지체들을 위해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겸손이요 온유요 인내요, 사랑이요, 충성이요, 절제인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만 나올 수 있는 아주 고급한 성품이요 인격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고급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이 땅에 우리 교회를 던져 놓으신 것입니다. 성경이 요구하고 있고 제가 매주 여러분에게 강요하고 있는 성품과 인격은 바로 이 하나님과 나를 아는 지식에서 나온 성품과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에 걸어놓은 가짜 열매처럼 억지로 만들어 내는 그런 성품과 인격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살아야 가장 행복하다’라는 것을 깨달은 자가 그 지식을 근거로 행복하게 행하는 성품과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주 실패할 겁니다. 자주 넘어질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 자신의 모습을 보며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난 백 점이야’ 라고 뻔뻔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 저희 반에 김 상수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름이 비슷해서 시험지가 곧잘 바뀌곤 했습니다. 한번은 수학 시험지를 나누어주는데 제 점수가 80점이었습니다. 100점을 기대하고 갔는데 80점짜리 시험지를 받고 보니 만감이 교차를 했습니다. 분명 답을 밀려서 썼거나 아니면 답안지 표시를 잘 못했나보다 하고 시험지를 제대로 살펴 보지도 못하고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잠시 그러다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혹시 또 김 상수하고 시험지가 바뀌었나?’ 하고 잘 보니까 정말 그 시험지는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김 상수 거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우리 삶의 점수를 매겨보면 80점이 아니라 20점도 안됩니다. 그런 우리 삶을 보고 우리 스스로 참 많이 절망합니다. 그 때 제 말씀을 기억하세요. ‘이건 내 시험지가 아니다. 난 이미 백 점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잠시 시험지가 바뀐 것이다.’ 누구의 시험지? 이 육신이라는 옛 몸의 시험지인 것입니다. 그건 여러분의 시험지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백 점짜리들입니다. 다 합격입니다. 전부 빵점짜리들을 예수님께서 대리 시험을 쳐주셔서 전부 백 점짜리로 이미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서는 이제 그 은혜에 감사하는 반응이 나와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요구에 턱없이 모자라는 자신의 모습을 매일 매일 발견하면서 진정으로 겸손함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매일 남들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 여러분의 불가능함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매일 화를 참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슬퍼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얼마나 못되고 얼마나 더러우며 얼마나 게으르며 얼마나 추악한지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나를 위해 죽어주신’ 그 천지를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신 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빵점짜리 나를 위해 백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찾아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감격하십시오. 그 감격이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천천히 인도해 갈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다른 게 아닙니다. 거룩입니다. 거룩도 그냥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드러내기 위한 거룩이 아닌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앎으로 해서 하나님 앞에 항복해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겸손한 거룩, 바로 그것이 여러분이 이 땅에서 유일하게 하셔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모양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분의 생명까지 다 주셨습니다. 이미 우리의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분의 기쁨을 위해 그 분의 말씀대로 살기를 경주하는 것입니다.
(벧후 1:3)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보세요. 다 주셨습니다. 이걸 믿으시는 여러분은 무조건 천국 갑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래서 우리는 막 살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내 아들이 자기 몸을 천박하게 막 굴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모범이 되는 삶을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엉터리 무당종교에서 얼른 벗어나십시오.
제가 일전에 교회를 개척하시고 10년간 목회를 하던 교회를 자기 부 목사에게 맡기시고 그 부목사가 개척을 해서 고전하던 다른 도시에 있는 작은 교회로 가신 목사님에 대한 일화를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떠나시면서 기도 부탁하기를 ‘혹시 우리 부 목사님이 실패하신 교회를 제가 가서 부흥시켰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기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부목사가 실패한 교회에 자기가 가서 그 교회가 부흥이 되면 사람들은 자기를 능력 있는 종이라고 부르지 절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것이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정말 그 교회가 문을 닫았습니다. 정말 바른 복음을 아주 잘 가르치시는 이 시대에 몇 안 되는 그런 목사님이십니다.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하실 뿐 아니라 열심까지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 목사님이 시무 하시는 교회의 문을 닫아 버리셨을까요? 왜 사도 바울을 그렇게 오래 감옥에 가두십니까? 왜 다메섹에서 그를 구원하시고 십 수 년 간 아라비아에서 다소에서 그냥 썩게 만드실까요? 왜 복음을 전하는 그에게 사단의 가시라는 간질병을 그냥 주셨을까요?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계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왜 모세를 쓰실 때도 가장 정신이 또렷하고 힘이 넘치고 의욕에 넘치는 40세에는 모른 척 하시다가 이제 다 죽어 가는 80이 되어서야 그를 부르실까요? 하나님은 참 일을 비효율적으로 하시는 것 같지요? 왜 성령과 능력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을 살려서 오래 오래 하나님의 일에 쓰시지 않으시고 그냥 돌에 맞아 죽게 만드실까요? 하나님은 아까운 일꾼을 하나 그냥 놓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이용해서 어떤 일을 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에게 ‘나는 얼마나 약하고 더럽고 악하고 게으르고 무식한 인간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난 하나님 없으면 절대 살 수 없는 자입니다‘라는 항복을 받아내심으로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어 내시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교회 문을 닫으신 그 목사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세요? ‘그 동안 내가 얼마나 보잘것 없고 무능력한 존재인지 너무나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저는 이렇게 매 순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설교를 이렇게 마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고백을 듣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목사님에게서 바로 그 항복을 받아내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똑똑하고 유능한 목사를 망하게 만드시는가? 의아해 하겠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목사님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는 데에만 관심이 있으신 것입니다.
CS Lewis가 죽기 바로 직전에 쓴 ‘a grief observed’라는 책이 있습니다. 59살까지 독신으로 지내던 CS Lewis가 Joy라는 여자 작가를 만나서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몇 년을 아주 행복하게 살다가 그 아내가 암으로 죽습니다. CS Lewis가 그 아내가 죽은 뒤에 그의 마음 상태를 글로 옮긴 것입니다. 저는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나 나니아 연대기, 순전한 기독교 이런 대작을 쓴 CS Lewis가 죽기 바로 직전에 그런 글을 썼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아내를 잃은 슬픔이 크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나님을 심술쟁이 영감이라고 막말을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소망을 이야기하며 자신을 위로하는 사람들을 무식하고 몰지각한 사람들로 몰아세웁니다.
그런데 제가 그 책에서 하나 배운 것이 있습니다. 그 CS Lewis는 그 죽음 같은 슬픔을 통해서 자신이 지금까지 이미지로 가지고 있던 믿음, 신앙, 슬픔, 고통 이런 것들을 실체로 경험하면서 진짜 자기가 얼마나 모자라고 추한 존재인지를 깨달았고 얼마나 신앙이 어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 때까지 가짜 돈을 걸어놓고 포커 게임을 하는 사람처럼 신앙에 대해 막연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 슬픔, 고통, 환난 이런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또 남들로부터 들을 때 자기는 자기 안에 스스로 만들어 놓은 이미지로 그 것들을 판단하고 섣부른 위로를 하고 섣부른 정죄를 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에게 그러한 고통이 실제로 오게 되니까 지금까지 가짜 돈으로 게임처럼 즐겼던 포커게임이 자기의 전 재산을 걸고 하는 손에 땀을 쥐는,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게임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CS Lewis는 말합니다. 그 동안 자신은 굉장한 신앙인인 것처럼 살았고 행동해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마분지로 만들어 놓은 나의 신앙의 성을 왕창 부수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지으라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 인생의 모든 사건들, 상황들까지도 동원하셔서 우리를 만드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질병과 고통과 부도와 이혼과 굶주림 같은 것들이 동원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지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왜? 우리는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으니까 인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킨 자들이 되었고 결국 천국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믿기 때문에, 이 모든 고통들은 전부 나에게 유익이야’ 그렇게 참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인 것입니다.
잘 참아내십시오. 인내하세요. 여러분은 이미 모든 계명을 다 지켜내신 분들이십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니까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신 우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해서 그 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한번 살아보자고요. 안 되도 괜찮습니다. CS Lewis처럼 하나님께 때로 삿대질할 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실존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고 ‘우리는 여전히 이런 존재인데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 걸까?’하고 또 감격하고 또 실수하고 또 감격하고 그렇게, 그렇게 열심히 가다보면 곧 끝이 올 겁니다. 그 때까지 힘들 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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