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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이 땅의 만나냐 영생이냐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3.

 

 

이 땅의 만나냐 영생이냐

 

(김성수 목사)

 

 

(요 6:40-59)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 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여러분이 공부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요한복음 6장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죽어야 할 자들을 대신하고 대표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떡에 대한 긴 설명입니다. 생존을 위해 이 세상의 떡을 구하러 주님께 찾아온 많은 무리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 등의 시청각 자료까지 동원하셔서 구원의 참 의미를 가르치시고 ‘너희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생존에 필요한 세상의 떡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생의 떡’이라는 것을 반복하여 설명해 주시는 예수님의 애타는 마음을 우리는 6장 전체의 본문을 통하여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떡을 구하기 위해 주님을 찾은 사람들은 요지부동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주님과 표적을 보고 주님을 찾아온 무리들과의 대화를 주의 깊게 보면 마치 선문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영원한 생명의 떡이신 당신 자신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데 무리들은 집요하게 세상의 떡으로 대답을 합니다.

 

그건 비단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 지방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닙니다. 이 우주와 역사가 시작된 그 시점부터 하나님과 인간 간의 대화는 늘 어긋난 선문답이었고 그 선문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절대 의지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의뢰하며 당신께 순종하는 삶만이 진짜 행복과 만족에 이르는 길이라고 역사를 통해 계시를 통해 반복해서 말씀을 하시는데 인간들은 계속해서 그 분께 세상의 힘을 복으로 달라고 조르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과 인간간의 선문답은 오늘 본문을 비롯한 6장 전체에 편만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본문 41절을 보시면 예수님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수군거렸다고 합니다. ‘수군거리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공귀조’는 비둘기의 울음소리에서 유래된 동사로 ‘불평하다, 투덜거리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불평불만을 통해 타인을 중상 모략하거나 비방하는 것을 수군거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타락한 인간 본성에 대해 묘사를 하면서 수군거림을 포함시킵니다.(롬1:29)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물이 떨어지자 모세를 원망했지요?(출15:24) 그리고 가나안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부정적인 보고를 했을 때도 이스라엘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민14:2) 그러한 원망의 외침이 바로 수군거림이라는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좇아 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세상의 떡이 아닌 생명의 떡에 관해 이야기하시는 예수님께 불평과 불만과 원망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수군거리지 말라’하고 그 무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생명의 떡이신 당신에 관해 설명을 해 주십니다. 이번에는 주님께서 출애굽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쏟아졌던 만나를 예로 들어 설명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지금 주님을 찾아와서 출애굽 광야에서 선지자 모세에 의해 주어진 눈에 보이는 만나와 같은 세상의 떡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바로 그 만나를 예로 들어 그 만나가 상징하고 있던 것이 바로 당신 자신이었음을 재차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48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요 6:48-51)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출애굽 때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를 먹은 사람들은 잠시 배는 불렀을지 몰라도 결국은 모두 다 죽었다는 것이지요. 주님은 먹고 죽을 만나 정도가 아니라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떡을 주러 오신 분이심을 또 다시 천명(闡明)하신 것입니다. 만나는 전에도 한번 설명해 드렸다시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이스라엘에게 복으로 주어졌던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결핍과 굶주림이 해결되는 모양을 통해 죄와 허물로 죽은 이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의 떡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로 쓰인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죄인들은 절대 이 세상의 배부름에 의해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는 식물(食物)이었던 것입니다.(신8) 출애굽기 16장으로 가서 만나에 담긴 상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출 16:16~20) “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 할지니라 하셨느니라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20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면서 다음 날 것까지 미리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루하루의 삶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임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다음날 것까지 미리 거둔 것은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지 못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들의 힘으로 내일을 준비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생존의 문제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 앞에 맡길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불안해서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자기들의 꾀를 동원하여 자신들의 내일을 준비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만나는 그 다음날이 되면 썩어버립니다. 그 것은 ‘너의 내일은 내가 준비 한다’는 하나님의 외침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 다음날 것까지 거두어 집 안에 감추어 둡니다. 따라서 생명에 대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와서 자신의 내일에 필요한 힘들을 구하는 것은 유치한 신앙 정도가 아니라 불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당신의 입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해 근심하지도 말고 구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2:29)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살려내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서만 살아날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아울러 그 골고다의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 아래에서만 살아가게 될 것임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나는 바로 그 전체를 담고 있는 시청각자료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살아나게 되는 것이며 그렇게 은혜로 살아난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은혜에 순응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의뢰하며 살아가게 될 것임을 상징으로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만나는 오히려 매일 매일을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여 살라는 하나님의 시청각 자료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 만나를 오해하여 ‘그와 같은 세상의 떡을 우리에게 달라’고 주님께 조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만나를 통해 영원한 생명이신 하늘의 떡이신 예수와 하나님의 은혜만을 좇아 살아야 하는 하나님 백성의 삶을 배우라는 하나님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나를 세상의 배부름을 기대하며 먹음으로 모두 죽음에 이른 것같이 세상의 배부름을 위해 나를 찾아온 너희도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만 의지하며 세상의 힘들을 놓는 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경고는 구약에서부터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왕하 2:23-24) “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4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 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을 찢었더라”

 

엘리야가 승천을 한 뒤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갔을 때 아이들이 엘리사에게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조롱을 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그들을 저주하여 암 곰 둘을 불러 사십 이명을 찢어 죽이게 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좇아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납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엘리사는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놀린 것에 격분하여 곰을 불러 마흔 두 명이나 죽인 것일까요?

 

엘리야가 승천한 때는 BC848년입니다. 이스라엘이 솔로몬의 신하였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반역으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대로 갈라진 것이 BC931년이지요? 그렇게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지자 당장 문제가 된 것이 북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전 제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성전은 남 유대의 땅인 예루살렘 한 곳에만 있었기 때문에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러 자주 남 유대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고 그 곳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왕상12:25-33) 그러니까 벧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금송아지를 섬기는 곳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벧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고 애굽의 풍요의 신이었던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것을 하나님이라 부르며 세상의 힘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곳에 엘리사가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있던 아이들이 엘리사에게 ‘대머리여 올라가라’하고 조롱을 한 것입니다. 그 말은 ‘너와 네 스승이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 없으니 너도 네 스승처럼 하늘로 가버려라’는 조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세상의 힘에 밀려 하나님이 무시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못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흔 두 명의 아이들을 찢어 죽이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대로 아이성의 아간에게서 반복하여 경고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하고 여리고에 비하면 아주 작은 성에 불과한 아이를 점령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아이에서 대패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간이라는 사람이 여리고를 점령한 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외투 한 벌과 금은을 조금씩 숨겨 자신의 내일을 준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면서 이스라엘을 인도해 가고 계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의 집, 벧엘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의 꾀로 내일을 준비한 행위가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그의 아들들과 딸들을 모두 돌로 때려죽이게 하고 불살라 버립니다. 그리고 그 위에 돌을 쌓아 대대로 그 일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그 까짓 외투 한 벌, 금은 조금을 숨긴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잘못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진노하시지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의 힘들을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죽음밖에 돌아갈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신약으로 와서 영적 이스라엘인 초대교회에서 또 한 번 반복하여 경고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 벧엘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일 예배 때 살펴본 것처럼 초대교회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자신들의 재산을 모두 교회에 내어 놓고 필요한 이들의 결핍과 부족을 채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재산을 다 팔아 조금 감추어 두고 교회에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 그 들을 죽여 버리십니다. 재산 다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고 조금 감춰둔 게 그렇게 죽을죄인가요?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하는 당신의 백성들이 자신의 꾀를 이용하여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자신을 의지하는 것을 못 참으시는 것입니다. 전적인 의뢰와 전적인 순종, 이것이 바로 성도가 도달해야 할 신앙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고전 3:16)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성경은 바로 우리자신이 성전, 즉 벧엘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에게서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뢰와 의존과 순종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구하면 어떻게 된다고요? 거기가 바로 아골 골짝인 것입니다. 거기가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무덤인 것입니다. 제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자녀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 아버지께 우리의 필요를 구해야지요. 내 자식이 버젓이 아비가 살아있는데 옆집 아저씨에게 가서 자기의 필요를 채워달라고 하면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처럼 우리는 우리 아버지에게 우리의 필요를 고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의도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는 데에만 그 아버지를 이용하려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 아버지에게 우리의 필요를 고하는 것에 선행하여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 드릴까? 어떻게 하면 우리 아버지께 효도를 할까에 대해 먼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러한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계속해서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자녀가 정말 자녀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세상의 떡을 구하러 온 그 무리들에게 아골 골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인 영생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데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배를 부르게 해 줄 세상의 떡만을 조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48절부터 57절까지를 차근차근 읽어보자고요.

 

(요 6:48-57)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실 수 있으시지요? 주님은 당신 자신이 생명의 떡이며 하나님께서 당신께 주신 자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라고 분명하게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배를 불리고 육신의 목을 축이는 것은 주님이 공급하시겠다는 것들의 목록에 단 한 가지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영생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그 영생의 삶을 실재 화하여 보여주는 삶을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입니다. 영생이 무엇이라 했지요? 영생은 신적생명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성품과 하나님과 같은 됨됨이가 나타나는 삶이 영생입니다. 그 영생은 사랑으로 대표된다고 했지요? 따라서 생명의 떡을 먹고 영생을 얻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할 것은 사랑하는 자로의 성숙인 것이지 이 세상의 것들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까요.

 

(눅 12:13~15)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어떤 사람이 주님께 자신의 형이 부당하게 유산을 착복했으니 랍비로서 그 형에게 충고하여 유업을 공평하게 나누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야단을 맞아야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형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동생에게 유산을 하나도 물려주지 않고 혼자서 다 차지했으니까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런 부탁을 하러 온 그 사람을 야단치십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14) 주님은 이 세상의 힘을 정당하게 차지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사람도 이렇게 야단을 치십니다. 네 말이 정당한 것이기는 하다만 나는 그러한 것 챙겨주러 온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주님을 찾는 것이 그러한 세상의 떡에서 기인(起因)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삼박자 구원이라는 것은 정말 잘못된 가르침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영혼이 잘된 것처럼 범사가 다 잘되어야 하고 몸에 병도 걸리면 안 된다는 그런 식의 논리는 기독교를 오해한 우매한 지도자에 의해 조작되어진 것이지 절대 성경이 이야기 하는 바가 아닌 것입니다. 요한삼서의 그 이야기는 그 요한삼서의 수신자인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에 대한 칭찬과 더불어 그의 영적 강건함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요삼 3-4)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잘 보세요. 사도 요한은 가이오라는 사람이 진리를 듣고 진리를 받아들여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심히 기뻐하며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위의 1절과 2절은 그 편지의 인사말인 것입니다.

 

(요삼 1-2) “1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인사말을 3절과 4절과 연결시켜서 보세요. 3절과 4절에 의하면 여기서 네 영혼이 잘됨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진리를 듣고 진리를 받아들여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게 바로 네 영혼이 잘된 것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가이오가 진리와 전혀 관계없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았었는데 이제 진리를 받아들인 가이오가 진리를 따라, 다른 말로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그의 삶을 삽니다. 그게 그의 영혼이 잘 된 것입니다. 그러한 것처럼 범사(凡事)가 잘되기를 기원한다는 것은 가이오의 모든 삶이 자신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삶이 아닌 그렇게 진리를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사는 삶이되기를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영적 강건함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므로 영적인 강건함까지 기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 한다’는 구절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 구절은 만사형통을 이야기하는 구절이 아니라 오히려 만사가 틀어질지라도 너의 범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진리를 좇는 삶이되기를 기도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사업이 망해도 병에 걸려도 네가 하나님의 진리를 좇아 행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생은 그렇게 범사에 하나님의 진리를 좇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삶에 왜 지나치게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 삶에 왜 높은 지위가 필요하고 그 삶에 왜 멋진 자동차와 큰 집이 필요합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러한 세상의 떡들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도의 부귀영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 번영의 신학은 저주받을 사단의 작품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의 여러분의 번영의 삶에 전혀 쓸모없는 모습으로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마 16:21~23)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는도다 하시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함으로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주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주님을 야단치며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22절에서 ‘간하여’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에피티마오’는 ‘비난하다, 훈계하다, 책망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예수님이 풍랑을 꾸짖으실 때 쓰인 단어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세상 부귀영화와 전혀 상관없이 이 세상에서 죽으셔야 죄인들에게 생명이 주어지게 됨을 설명하시자 베드로가 펄쩍 뛰며 ‘그럼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좇아 온 우리는 뭐냐?’고 따지고 든 것입니다.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생존을 위한 떡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번영의 신학을 주장하는 이들의 모습 아닙니까? 예수는 우리 앞에서 죽으면 안 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한 자를 가리켜 주님은 ‘사단’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렇게 번영의 신학은 마귀의 신학인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좇아 이 땅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을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강화를 보세요.

 

(마 16:24~28)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주님은 그렇게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주님의 죽으심을 만류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성도들에게 죽는 모습으로, 다른 말로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모습으로 진짜 복을 주시는 것처럼 그 복을 받은 성도 또한 자기를 부인하는 자신의 죽음으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고 제 목숨을 잃으면 찾을 것이라’는 말은 자신의 육신의 생명을 위한 세상 것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는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된 자들만이 생명을 찾게 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세상의 떡과 생명의 떡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도 주고 세상에서도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는 기독교는 가짜입니다.

 

28절을 보시면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 구절에서 ‘그 왕권을 가지고’라고 번역이 된 어구는 ‘엔 테 바실레이아 아우투’로 ‘그의 왕국으로’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는 하나님 나라(교회)가 이 세상에 생기게 되고 그들 안으로 주님께서 들어가 그들을 통치하시는 그 광경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보게 될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특징은 주님의 통치에 순복하여 진리를 좇아 사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 영생으로의 통치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세상에서 바보처럼 사랑하고 바보처럼 용서하며 바보처럼 용납하는 삶을 살며 손해마저도 감수하는 삶을 살아야 옳지요? 그런데 어떻게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세상 사람들보다 더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혈안이 될 수가 있습니까? 기복신앙이 그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세상 사람들보다 더 잘나고 싶은 것, 그게 오늘날 번영의 신학을 외치는 이들의 신학 아닌가요?

 

교회가 그렇게 여전히 저 세상에서도 잘 되고 이 세상에서도 잘 되어야만 한다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세상에 비춰지니까 그토록 많은 안티(anti) 기독교인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기독교 박멸이라는 모토아래 만 오천 명의 회원을 확보하며 인터넷에서 활동하고 있는 반기독교 시민연합(antichrist.or.kr)이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르며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반기련의 이찬경 회장은 ‘개독교인들이여 안티들을 감동시켜라’라고 공공연히 기독교인들의 이기심을 공격하고 있고 바이블 19금(禁)지정 촉구를 위한 천만인 서명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열아홉 살 미만은 성경을 못 읽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안티 기독교인들로부터 이러한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좇아 세상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다른 이들을 밟아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는 모습들을 자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자신을 비워 다른 이들의 유익을 챙기는 영생의 삶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영생에 관심을 가지셔야지요. 성도는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그의 성도된 표지를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50절을 보시면 예수는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 되셔서 우리를 죽지 않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어디서는 죽어야 한다고 하고 어디서는 죽지 않아야 한다고 하고 조금 헛갈리시지요? 죽지 않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속사람이고 죽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겉 사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고 고백을 한 것은 그의 속사람이 날마다 살아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탐욕, 우리의 야망, 우리의 비전 하나님 앞에 모두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삶을 채우도록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 한 가지 당신의 백성을 새 사람으로 살려 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0절을 보세요.

 

(요 6:40)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우리 아버지의 뜻은 우리의 삶 속에서 신적 생명인 영생이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오히려 여러분의 겉 사람에 속하는 세상의 힘들을 자꾸 놓아가는 연습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 부인이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그 전까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쌓아두었던 세상의 힘을 놓는 행위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자 그의 재산을 내 놓은 것 기억하세요? 초대교회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상징하는 재산을 내 놓은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런데 예수를 부르며 오히려 그러한 세상의 힘들을 채우려 하는 것이 어찌 기독교이겠습니까? 그건 반기독교 시민 연합 같은 안티 기독교인들이 조롱해 마땅한 개독교인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이 해야 할 것은 하나도 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신들의 배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으니까 우리가 개독교의 오명(汚名)을 뒤집어쓰는 것 아닙니까?

 

열아홉 살 미만의 청소년들에게 성경을 금지도서로 지정해야 한다는 반기련의 천만인 서명 란에 어떤 사람이 참 얼굴 뜨거운 댓글을 달았더라고요. ‘걱정 마세요. 개독교인들은 어차피 어른들도 성경을 안 읽어요, 자기들 소원 비느라 그럴 시간이 없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의 눈에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정경인 성경조차도 읽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욕심만을 좇아 사는 자들로 보여 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해야 할 바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연구하여 그 말씀의 능력을 힘입어 진리를 좇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영생의 떡을 먹고 영생을 살아내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일에 얼마나 열심을 내고 계십니까? 자기들도 읽지 않는 성경을 중국에, 북한에 보내는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보면 참 그런 코미디도 없다 싶어요. 우리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올바로 서서 그 말씀을 좇아 열심히 살아내십시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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