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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4.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김성수 목사)

 

 

(엡 3:7-12)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바울은 7절에서 자신은 6절까지 상기한 그 비밀인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로 된 것이라고 사도는 또 반복해서 은혜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 그 은혜의 크기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을 가리켜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구약과 신약에서 중요한 사람을 한사람씩 꼽으라면 누구를 꼽으시겠습니까? 구약에서는 모세, 신약에서는 바울, 보통 이렇게 꼽습니다. 그러면 구약과 신약을 통 털어 한사람만 꼽으라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참 많은 일을 합니다. 그리고 성경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죽일 때 옷을 맡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책임지겠다.”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감옥에 넣으려고 공문을 가지고 살기등등해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요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자들을 극심하게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 그런 사람을 택해서 그 중요한 일을 맡기셨을까요? 영원 전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 두셨던 비밀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그 중요한 일을 왜 그런 바울에게 맡기셨을까요? 아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창세전에 택함을 받는다고 우리는 1장에서 배웠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던 것처럼 바울은 이미 택해졌던 자입니다. 그런데 왜 스데반을 죽이고 다른 이들을 감옥에 넣기 위해 살기등등해서 다니게 놔두셨을까요? 조금 바꾸어 생각해 보세요. 바울이 그렇게 엉터리 유대교인으로 살기 전에 이미 택해졌다면 그 삶은 바울이 택해지게 된 조건입니까, 아니면 택해졌기 때문에 그 과정을 통과한 것입니까? 야곱의 엉터리 같은 삶도 바울의 어리석은 삶도 전부 그들이 택해졌기 때문에 통과하게 놔두신 삶입니다. 왜 바울에게 그런 사도로서 평생 후회가 될 만한 삶을 허락하셨을까요? 구원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삶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26-29)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을 얻는 사람들은 모두 무식하고 약하고 가난하고 멸시받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가셔서 풍성하신 은혜로 그들을 건져내시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의 삶 자체가 그 구원의 내용을 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삶만큼 완벽하게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삶이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자신을 가리켜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에게 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기에 “그리스도의 풍성” “풍성한 은혜” 이런 표현들을 즐겨 쓰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참 부끄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성질 급하고 놀기 좋아하고 야망도 크고 승부욕도 많고 해서 임기응변이나 권모술수에 아주 능했던 사람입니다. 지금 그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순식간에 낯이 뜨뜻해 집니다. 어떤 시간들은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 있습니다. 한동안은 그것 때문에 굉장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나 같은 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그 과거의 삶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해주시는 거름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큼은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예수님께서 바르게 사는 순위대로 끊어서 구원을 하셨다면 저 같은 사람은 당연히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가 더 큽니다.

 

구원을 받는 사람 중에는 이삭처럼 모범생의 삶 속에서 건져냄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야곱처럼 파렴치한 생활 속에서 건져짐을 받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 구원의 감격의 무게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굳이 저울에 달아보면 누가 더 감사하겠습니까? 야곱 같은 사람이겠지요? 그렇다고 지금 제가 엉터리 같은 삶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불가능한 상태에서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리고 싶어서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그 풍성한 은혜를 수시로 확인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교만한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우리가 어디서부터 건져냄을 받은 자인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도 바울처럼 말끝마다 풍성한 은혜, 그리스도의 풍성, 이런 감격의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그것을 잊어버립니다.

 

어떤 분이 이 구절을 갖고 “예수를 믿으면 삶의 모든 부분이 풍성해 진다, 그리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풍요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설교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풍성함은 그 풍성함이 아닙니다. 만일 성경이 말하는 것이 그런 풍성이라면 사도 바울은 가짜입니다. 사도 바울은 병자였고 가난했고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갔습니다. 그 사람의 삶이 진짜 우리의 관점으로 해석한 풍성한 삶이었습니까?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세상 적인 풍성을 누리게 되는 것이라면 실제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풍성합니다. 예수 안 믿는 부자가 훨씬 많지 않습니까? 예수 안 믿는 행복한 사람이 훨씬 많아요. 예수 믿는 자들이 누리고 전해야 할 “풍성”은 금과 은이 아닙니다.

 

(행 3:3-6)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예수를 믿으면 앉은뱅이가 일어난다“라고 이 이야기를 제한시키시면 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고 전해야 하는 것은 세상의 금과 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 6:35)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결코 배고프지 않고 결코 목마르지 않는 풍성함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 떡이 아니고 세상 물이 아닙니다. 다른 풍성함입니다. 이 구절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그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눈으로 그 무리를 바라보셨는지 상상해 보셨습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자들이 배고파하고 있을 때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이 어떤 눈이었겠습니까? 저는 우리 아이들을 굶겨 봐서 압니다. 가슴이 찢어집니다. 가끔 지금도 죄스러워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많이 먹입니다. 아이가 좋아하면 배가 터질 때까지 먹입니다.

 

그들을 바라보시던 예수님께서 아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조림 두 마리 요한복음에 보면 그 물고기를 “익뚜스“가 아닌 “옵사리온“이라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 헬라어 ‘옵사리온’은 멸치조림 같이 작은 물고기를 조미료에 조린 것을 말합니다. 그 조금을 가지고 남자 어른만 5000명, 다 합치면 아마 30 000명은 족히 될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아니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아무도 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그 많은 무리, 200데나리온으로도 먹이지 못할 그 많은 무리를 먹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들린 그 작은 것은 엄청난 “풍성”을 품은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풍성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런 멸치조림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뷔페 앞의 콩떡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 작은 것 속에서의 풍성입니다. 세상에서의 물리적인 배고픔이 해결되지 않고 세상에서의 목마름은 해갈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고픔 속에서 배부름을 느끼고 그 목마름 속에서 시원한 해갈을 주시는 풍성함입니다.

 

여러분은 어떨 때 그리스도의 풍성을 느끼고 누리십니까? 비즈니스가 상상외로 너무 잘 풀릴 때 풍성을 느끼십니까? 아이가 좋은 대학에 합격했을 때 풍성함을 느끼십니까? 사도가 누리고 전했다는 풍성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그의 사역 기간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고문으로 보냈습니다. 그 시간들 속에서 사도는 풍성함을 누렸습니다. 그 사도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그 풍성한 삶을 살다 가셨습니다.

 

(마 11:28-29)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 오면 내가 대신 그 짐을 다 져 줄게“ 안 그러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 짐을 지고 예수님께 뭘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짐은 아주 가볍고 쉬운 것이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그 짐을 져야 우리가 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신 짐이 정말 가벼운 짐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지신 멍에가 정말 쉬운 멍에였습니까? 끔찍하게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은 그 짐을 가볍다고 말씀하시지요? 그 분에게는 목적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짐을 지고 멍에를 매고 가시는 길이 그 분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살길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 53:5-12)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7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 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8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9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였다. 10 주께서 그를 상하게 하고자 하셨다. 주께서 그를 병들게 하셨다. 그가 그의 영혼을 속죄 제물로 여기면, 그는 자손을 볼 것이며, 오래오래 살 것이다. 주께서 세우신 뜻을 그가 이루어 드릴 것이다. 11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12 그러므로 나는 그가 존귀한 자들과 함께 자기 몫을 차지하게 하며, 강한 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겠다. 그는 죽는 데까지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맡기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

 

예전에 제가 “아빠의 구두”라는 글을 한번 읽어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아빠의 헌 구두를 보고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매가 버스비를 아껴서 아빠의 구두를 사드리려고 몇 달 동안 학교를 걸어서 다녔다는 내용이지요. 다리도 아프고 피곤하기도 했지만 아빠가 새 구두를 받아들고 환히 웃으실 것만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뿌듯한 것입니다. 그렇게 정확한 목적과 목적지가 확인된 사람들은 그 목적을 위해 받는 고통 속에서 풍성하게 넘치는 기쁨도 함께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전해야 할 풍성은 바로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빛나는 하늘의 풍성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손해보고 섬기는 삶이 예수님의 삶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감옥에서 오히려 기뻐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두들겨 맞고 나오면서 기뻐하며 찬송을 했습니다. “내가 한번 찔리고 내가 한번 물리고 내가 한번 맞을 때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살아나올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찔려주겠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가난하고 그렇게 쪼들리고 그렇게 뻑 하면 감옥에 들어가 있었으면서도 말끝마다 풍성함과 풍요, 부유함(플루토스)를 당당히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는데 왜 대접이 이것밖에 안 됩니까?”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은 아직 그 풍성함이 뭔지 모르는 가짜들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면서 자꾸 “가짜”라는 말을 많이 하니까 어떤 분이 “목사님 성도의 견인도 모르세요?” “저는 지금 조금씩 변해 가는 중이지, 가짜는 아닙니다.” 맞습니다. 영적으로는 구원을 받은 분일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여러분이 지금 그 풍성함을 모르시고 죽게 되신다면 여러분은 천국 가실 수 있으신가요? 못 갑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것을 알고 누리실 때까지 안 죽이시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이미 구원을 받으셨을지라도 여러분 안에서 그 풍성함이 누려지고 그 풍성함이 삶으로 전해질 때 여러분은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죽으면 지옥 가는 사람이 어떻게 진짜입니까? 제가 “이런 사람들은 가짜다.”라고 이야기할 때 여러분은 그 말을 채찍 삼아 진짜의 삶으로 내 달으시라는 의미에서 자꾸 제가 원색적인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실제로 “진짜 가짜”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9절 후반부로 넘어갑니다. 9절을 다시 보시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복음 전파의 의무가 함께 주어지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엡 3:9)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그런 못된 사도 바울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신 이유는 그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풍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고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 섭리(오이코노미아)를 세상에 드러내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내다“라는 ”프호티조“라는 말은 단순히 가르치거나 선포하는 것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프호티조“는 빛을 비추어서 상대방까지 환하게 계몽시키는 것까지, 상대방에서도 빛이 나올 때까지 가는 것을 ”프호티조“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복음을 전하고 나서도 그가 빛으로 잘 자라날 때까지 계속 양육하고 기도하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가 복음을 전한 교회들에게 계속해서 편지도 쓰고 그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9절부터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엡 3:9-11)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영원부터“ ”아이온“이라는 말은 ”영원 전부터“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의 탄생이라는 비밀은 영원 전부터 예정되었던 것인데 천사들조차도 몰랐던 비밀이었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들어 놓으신 교회를 통해 하늘에 있는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신다고 하시죠?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영적 존재입니다. 우리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늘에서 우주의 창조부터 인류의 역사를 다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해 주는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사들을 이미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많이 알고 계셨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 창조 때 천사들이 환호를 했습니다. 수많은 꽃들과 새들과 동물들을 보면서, 사계절이 오고가며 우주가 자리를 잡고 궤도대로만 움직이고 하는 것을 보면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했을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선악과를 두시고 인간들에게 먹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따먹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쫓아 내버리셨습니다.

 

천사들은 생각했습니다. 인간들은 이제 끝났구나. 하나님께서는 아예 인간들을 다 쓸어버리시고 다시 만드실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요. 인간들을 용서하시면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집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무작정 벌하시면 사랑이신 하나님의 속성에 흠집을 내게 되는 것이지요? 천사들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계속 두고 보십니다. 그런데 가인이라는 놈이 동생 아벨을 때려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냥 놔두십니다. 셋의 후손 중에 노아라는 사람을 하나 택하십니다. 노아와 그 식구들 8명을 구해내시고 홍수로 세상을 다 쓸어버리십니다. 그렇다고 그 살아난 사람들이 다 착하고 의로워서 구해 내신 것도 아닙니다.

 

(창 8:21)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표준새번역] “주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서, 마음속으로 다짐하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그렇게 여전히 악한 자들이라면 “왜 다 쓸어버리지 않으실까?”천사들은 의아했겠지요? 그러더니 갈대아 우르, 지금의 이라크 지방에 있는 우상을 만들어 팔던 한 남자를 찾아가십니다. 그러더니 그를 데리고 가나안으로 가십니다. 천사들이 다 보았단 말입니다. 마누라를 두 번 씩이나 팔아먹고 좌충우돌하는 아브라함을 끝까지 끌고 가십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뭘 하시는 걸까? 그리고 그가 100세가 될 때까지 그 아내 사라의 태를 닫아 버리십니다. 그리고 결국 100세에 아들을 주시더니 그 귀한 아들을 또 죽이라고 하십니다. 어린 양 한 마리를 준비시키시고 그 아들, 이삭을 살려 내시더니 사기꾼 야곱을 또 택하십니다. 그리고 야비한 그의 삶을 보시고도 그를 구원하십니다. “왜 저 에서를 두고 야곱을 택하셨을까?” 천사들은 궁금했겠지요? 그리고 요셉이라는 청년을 택하셔서 애굽으로 보내셔서 감옥에 보내셔서 죽도록 고생을 시키십니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과 가족들을 모두 애굽으로 보내시고 거기서 400년 동안을 노예로 살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모세라는 사람을 택하십니다. 그런데 아까운 청춘을 미디안 광야에서 다 보내도록 가만 놔두십니다. 천사들이 초조해졌을 것입니다. “어, 이제 모세가80인데 곧 있으면 죽을 텐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80세에 그를 부르십니다.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끌어내십니다.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만나와 메추라기 생수를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데리고 가십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눈앞에 둔 곳에서 모세가 죽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세워서 요단을 건너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넣으십니다. “아, 이제 됐구나.” 되긴 뭐가 됩니까? 이스라엘은 계속 죄를 짓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신 28:53) “53 네가 대적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함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표준새번역] “너희의 원수가 너희를 에워싸서 너희에게 먹을거리가 떨어지면, 너희는 너희의 뱃속에서 나온 자식, 곧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너희의 아들딸을 잡아서, 그 살을 먹을 것이다.”

 

(왕하 6:28-30) “28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29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30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저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이렇게 정확하게 하나님의 경고가 사실이 되어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의아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이 되셔서 세상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천사들은 그 성자 하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찬송을 하고 올라왔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 찬송을 하면서도 천사들은 왜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땅으로 내려가야 하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성자 하나님께서 구유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천사들이 쑥덕거렸을 것입니다.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광의 우리 주님께서 왜 저런 모습으로 내려가셔야 하는가? 그 천사들은 천상에서 우리 주님을 섬기던 자들이었으니까요.

 

(사 6:1-5) “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사야는 여호와를 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사야가 예수님을 뵈었다고 합니다.

 

(요 12:40-41) “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표준새번역]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예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가 예수를 가리켜서 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사들의 수종을 받던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내려가셔서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시고 말을 배우시고 목수 일을 배우시고 글을 배우시고 사람들에게 쫓겨다니 시면서도 그들에게 맞고만 다니시지 대응해서 때리지도 않으십니다. 천사들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이 저렇게 땅에 내려가셔서 고생을 하실까? 심지어 인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 때까지도 천사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3일 만에 살아나셨고 다시 하늘로 올라오셨습니다. 이제 그 분은 육신을 가지신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은 편재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성령하나님께서 땅으로 내려가십니다. 그리고는 교회라는 것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성령의 모습으로 다시 그 교회의 안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나니 그 교회라는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절대 하나님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던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해 예배를 하고 찬양을 하고 하나님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깜짝 놀란 것입니다. 자기 자식을 구워먹으면서도 자기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모르던 그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셔서 그 교회를 건져내시기 위해 역사를 그렇게 운행하시고 우주를 그렇게 경륜해 나가셨구나.“하는 것을 그 때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공의의 하나님이신 그분의 속성을 하나도 손상시키지 않으시고 타락한 인간들을 건져내시는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지혜를 천사들은 교회를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시 85:9-10) “9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이에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10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이미 이렇게 긍휼과 진리, 의와 화평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구약에 계시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천사들이 보기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분열된 그 세상을 보면서 절대 그들은 다시 합쳐 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플라톤이나 키케로의 국가론을 가져다 완벽하게 시행을 해도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갈기갈기 갈라져 있는데 이방인과 유대인이 모인 교회가 하나가 되어 서로를 위해 오히려 자기를 죽이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천사들은 교회를 통해 그 하나님의 지혜의 최종적이며 최고의 극치를 보게 된 것입니다.

 

(벧전 1:12)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복음은 천사들도 너무 궁금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살펴보기를 원한다.“는 말인 ”파라큅토“는 ”몸을 구부리고 보다”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관심 있게 가슴 조리며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딤전 3:16)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왜 그 천사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보이셨는지 아십니까? 천사들이 너무 궁금해 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사망아래 던져지는가? 과연 어떻게 될까?” 거기에 “짠”하고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천사들도 궁금해서 미칠 뻔 한 그 복음의 비밀을 이제 완전히 알게 되신 여러분, 여러분이 얼마나 하나님께 고급스러운 대접을 받고 계신지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는데 힘으로 무력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썩어지는 밀알로 전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의 힘을 이용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전하는 자의 피를 타고 복음이 전해지더라는 것이지요. 천사들은 우리 교회의 일 거수 일 투족을 모두 지켜보고 있습니다.

 

(고전 4:9)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천사가 여러분의 삶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여러분의 삶으로, 입으로 인해 또 다른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천사들이 “와” 하고 환호를 지르는 것입니다.

 

(눅 15:10)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지금도 천사들은 교회를 예의 주시해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극치인 교회를 천사들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자기들이 수종을 들어야 할, 하나님의 아들의 목숨과 바꿀만한 그러한 존귀한 존재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열심히 트랙을 돌고 있고 천사들은 지금도 그 하나님의 지혜의 열매인 교회를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인님, 힘내세요.” 그런데 오늘 날 교회가 천사들한테 뭘 보여주고 있습니까? 건물 나눠 가지려고 싸움박질 하는 거 보여 주고 있나요? 시기, 질투, 미움, 다툼 이런 거 보여주고 있나요? 우리는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10절에서 각종 지혜라는 말을 씁니다.(manifold) 그 지혜는 다소의 사울을 다메섹에서 고꾸라뜨려서 그 분의 종으로 쓰시는 지혜이며, 유럽 최초의 신앙인인 루디아의 마음을 여시는 지혜이며 빌립보의 간수를 부르시는 지혜이며, 방배동의 한량 김성수를 부르시는 지혜입니다. 우리 교회를 부르시는 그 부르심이 얼마나 다양한지 보세요. 그 manifold한 지혜,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그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 삶으로 증거로, 내 놓는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천사들에게 세상에 그 비밀의 주인공으로서의 멋진 삶을 좀 보여 주세요. 자기의 삶이 조금 힘들다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아니, 이게 무슨 하나님의 지혜냐고“ 섣부른 불평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맞으시다 면 여러분의 삶은 지금 천사들도 궁금해 하는 하나님의 지혜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기대하세요.

 

(시 76:10) “10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하나님의 지혜안에서 그 지혜대로 지어져 가고 계시는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여러분을 이끌고 계십니다. 불안해하지 마시고, 힘들어하지 마시고 불평하지 마세요. 감사하면서 열심히 살아내 보자고요. 12절로 갑니다.

 

(엡 3:12)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우리 교회는 이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당당히 나아감“이라고 번역이 된 ”프로 사고게“라는 말은 어떤 들어가기 어려운 곳에 들어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대학 후배들 중에 제주도 출신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전부 ”앵커“라는 제주도 학생들의 써클 출신이었습니다. 그 ”앵커“라는 써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공부도 잘해야 하고 운동도 잘해야 하고 얼굴도 잘생겨야 하고 집도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들어가기가 아주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거기에 들어가는 것을 서울대학 들어가는 것보다 더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합니다. 그렇게 들어가기가 아주 까다롭고 거의 불가능한 어떤 곳에 들어감을 ”프로 사고게“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당당함의 근거가 뭡니까? “예수 안에서 예수를 믿음으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신앙을 느낌으로 평가합니다. 느낌이나 감정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 자체가 느낌이나 감정으로만 정리가 되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왜 오늘은 눈물이 안 나지? 은혜가 떨어졌나?“ 이건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신비적입니다. 많은 기적이 나오고 신비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가 되서는 안 됩니다. 제 말을 잘 새겨들으세요. 신비주의는 교리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자기의 오감으로만 기독교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비적인 기적이나 체험을 통해 기독교에 들어온 사람들은 교리를 아주 우습게 여깁니다. “교리가 뭐가 필요해? 뜨겁게 느끼면 되지” 정말 그렇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그 기적이나 체험이 없어지면 괜히 불안해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요 14:6)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딤전 2:4-5)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런데 어떻게 그 예수를 믿는 믿음이 생기고 자랍니까?

 

(롬 10:17)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여러분이 뜨레스 디아스나 무슨 부흥회 같은 데서 눈알이 빠지도록 울었다고 해서 아니면 무슨 전기가 오르는 듯한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게 여러분의 “믿음”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계기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해서 그런 체험과 느낌에만 머물러 계신다면 여러분은 무당을 믿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배우시고 예수를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당당해 질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서도 그렇게 흐지부지하고 힘이 없는 줄 아세요? 예수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 17:3)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적입니다. 문둥병 자, 소경, 귀머거리, 혈기 마른 자들은 모두 타락을 하고 저주를 받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국이 오게 되면 그러한 타락의 열매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절대 “예수 믿으면 병이 낫는다“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닙니다.

 

(계 21:3-4)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바로 이 천국의 모습을 미리 조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을 사인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구약에서 예언 된 진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런 기적들이 일어 난 것이지 예수 믿는 것과 병 낫는 것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 35:4-6) “4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바로 이분이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그 분이다“ 그걸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병이 나아야 하고 강건해 져야 한다면 왜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의 병이 낫지 않습니까? 믿음이 부족해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실 때 소경이 믿음으로 눈을 떴습니까?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려고요.

 

(요 9:3)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도 그 상대방의 믿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귀신을 쫓아 내 주셨습니다.

 

(마 17:17-19)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 오라 하시다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믿음이 있는 자만 병이 낫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자신을 설명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기 위해 표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신 기적을 가리켜 요나의 표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눅 11:29-30) “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회개의 복음을 전하러 간 요나가 예수님의 사역을 미리 예표 하는 경험을 하여 표적이 되었듯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표적, 기적들은 전부 우리에게 복음을 선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설명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요 5:36)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 하는 것이요”

 

성경에서 “표적”이라는 말 “세메이아”는 “sign”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사인 판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 그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얼바인” 이라는 사인 판을 보고 이게 얼바인 인가보다 하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성경의 기적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닥칠 하나님 나라를 사인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요 15:22-24) “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 죄를 변명할 길이 없다. 23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까지도 미워한다. 24 내가 다른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그들 가운데서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와 내 아버지까지 미워하였다.”

 

(요 14:10-11)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성경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과 그 분이 행하신 일들을 동격으로 놓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다 복음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절대 기적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부자가 하나님께 나사로를 다시 무덤에서 내 보내서 자기 형제들이 회개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세요?

 

(눅 16:31)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실제로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라는 사람이 무덤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요 11:53) “53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요 12:10-11)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진짜 죽은 사람이 살아났더니 그 죽은 사람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예수를 믿습니까? 그런데 왜 여러분은 부흥회 가서 강사가 쓰러 뜨려 주지 않으면 “그 강사 능력 없네.“이러십니까? 왜 사람들이 기적을 쫓아다니죠? 안 믿어지니까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기적을 좇는 자들은 말씀으로는 안 믿어지니까 뭘 좀 봐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예배당에서 그런 얼치기 무당 짓거리 하지 마세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기적을 믿는 사람들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감정에 휩쓸리지 마세요. 기분으로 신앙생활 하지 마세요.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할 때 “허, 허”하고 숨을 내 쉬는 소리를 내면서 기도한답니다. 그러면 금방 감정이 격해져서 눈물이 난다나요? 눈물 좀 안 나면 어떻습니까? 왜 바보 같이 그런 얼치기 무당 짓들을 좇아가십니까? 신앙은 느낌이 아닙니다. 신앙은 감정에서 머물면 안 됩니다. 정확한 사실을 믿으시는 것입니다.

 

(시 77:1-13) “1 내가 하나님께 소리 높여 부르짖습니다. 부르짖는 이 소리를 들으시고,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2 내가 고난당할 때에, 나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밤새도록 두 손 치켜들고 기도를 올리면서, 내 마음은 위로를 받기조차 마다하였습니다. 3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한숨을 짓습니다. 주님 생각에 골몰하면서, 내 기운은 쇠약하여 갑니다. (셀라) 4 주께서 나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하시니, 내가 지쳐서 말할 힘도 없습니다. 5 내가 옛날 곧 흘러간 세월을 회상하며 6 밤에 부르던 내 노래를 생각하면서, 생각에 깊이 잠길 때에, 내 영혼이 속으로 묻기를 7 "주께서 나를 영원히 버리시는 것일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일까? 8 한결같은 그분의 사랑도 이제는 끊기는 것일까? 그분의 약속도 이제는 영원히 끝나버린 것일까? 9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을 잊으신 것일까? 그의 노여움이 그의 긍휼을 거두어들이신 것일까?" 하였습니다.(셀라) 10 그 때에 나는 또 이르기를 "가장 높으신 분께서 그 오른손을 거두시는 것, 이것이 나의 슬픔이로구나" 하였습니다. 11 주께서 하신 일을, 나는 회상하렵니다. 그 옛날에 주께서 이루신, 놀라운 그 일들을 기억하렵니다. 12 주께서 해주신 모든 일을 하나하나 되뇌고, 주께서 이루신 그 크신 일들을 깊이깊이 되새기겠습니다. 13 하나님, 주의 길은 거룩합니다. 하나님만큼 위대하신 신이 누구입니까?”

 

정말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게 아닐까? 하는 절망 적인 상황 속에서 시편 기자가 어떻게 합니까? 11 주께서 하신 일을, 나는 회상하렵니다. 그 옛날에 주께서 이루신, 놀라운 그 일들을 기억하렵니다. 그걸 모르면? 거기서 못 나오는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을 떠납니까? 느낌으로 감정으로 기분으로 하나님을 믿어서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바른 교리가 바탕이 되어 있지 않은 신앙은 언제든지 흔들립니다. 우리의 당당함과 담대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2절 앞 분을 보시면

 

(12절)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누가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는다고 합니까? 목사가? 신부가? “우리가”입니다. 목사는 신부는 하나님과 조금 더 친한가요? 그래서 더 당당하게 나아갑니까? 아닙니다. 가톨릭이 나누어 놓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개신교 안에까지 들어와서 목사는 하나님과 좀 더 특별한 사이일 것이라고들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목사는 그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말씀을 맡은 장로일 뿐입니다. 여러 가지 역할 중에 한 역할을 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성직자입니다. 열심히 밥을 만들어 파는 것, 열심히 공부하는 것, 열심히 설거지하는 것, 열심히 그림 그리는 것, 열심히 벌레 잡으러 다니는 것 모두 하나님 백성의 거룩을 위한 것이라면 다 성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직업을 주실 때는 교회의 거룩을 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성직이지요?

 

제가 가끔 구역 예배에 참석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 교인들이 제가 올 때까지 식사를 안 하세요. 그래서 한 번은 제가 구역장님께 여쭤 보았습니다. 제가 시간이 좀 늦으면 먼저들 식사를 하시라고 하니까, 그 분께서 교회의 어른이 안 오셨는데 어떻게 먼저 식사를 하냐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목사는 교회의 어른이 아닙니다. 목사는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교인 중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목사를 우상화 시키지 마세요. 그건 죄입니다.

 

정리합니다. 신앙은 느낌으로 기분으로 하는 것 아닙니다. 정확한 복음의 이해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세요.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하나 하나님의 하신 일을 회상하십시오. 기적 같은 것으로 자꾸 환부에 진통제를 놓지 마세요. 나중에 큰 일 납니다. 천사도 궁금해 하던 비밀을 완전하게 이해하신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자부심을 가지시고 지금도 천사들이 세상이 여러분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시고 매일 매일을 그 신분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 내보자고요. 기도하겠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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