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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바벨의 심판과 족보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3.

 

 

바벨의 심판과 족보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김성수 목사)

 

 

(창 10:1‐32) “1 다음은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이다. 노아의 아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다. 홍수가 난 뒤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다. 2 ○야벳의 자손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이다. 3 고멜의 자손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이다. 4 야완의 자손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다. 5 이들에게서 바닷가 백성들이 지역과 언어와 종족과 부족을 따라서 저마다 갈라져 나갔다. 6 ○함의 자손은, 구스와 이집트와 리비아와 가나안이다. 7 구스의 자손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이다. 라아마의 자손은 스바와 드단이다. 8 구스는 또 니므롯을 낳았다. 니므롯은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이다. 9 그는 주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센 사냥꾼이었다. 그래서 "주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센 니므롯과 같은 사냥꾼"이라는 속담까지 생겼다. 10 그가 다스린 나라의 처음 중심지는, 시날 지방 안에 있는 바빌론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이다. 11 그는 그 지방을 떠나 앗시리아로 가서,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를 세우고, 12 니느웨와 갈라 사이에는 레센을 세웠는데, 그것은 아주 큰 성이다. 13 이집트는 리디아와 아남과 르합과 납두와 14 바드루스와 가슬루와 크레타를 낳았다. 블레셋이 바로 크레타에게서 나왔다. 15 ○가나안은 맏아들 시돈을 낳고, 그 아래로, 헷과 16 여부스와 아모리와 기르가스와 17 히위와 알가와 신과 18 아르왓과 스말과 하맛을 낳았다. 그 뒤에, 가나안 족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19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 그랄을 지나서, 멀리 가사에까지 이르렀고, 거기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서, 라사에까지 이르렀다. 20 이 사람들이 종족과 언어와 지역과 부족을 따라서 갈라져 나간 함의 자손이다. 21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 22 셈의 자손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다. 23 아람의 자손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이다. 24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다. 25 에벨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한 아들의 이름은, 그의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다고 해서 벨렉이라고 하였다. 벨렉의 아우 이름은 욕단이다. 26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27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28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29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다. 이 사람들이 모두 욕단의 자손이다. 30 그들이 사는 곳은 메사에서 스발에 이르는 동쪽 산간지방이다. 31 이 사람들이 종족과 언어와 지역과 부족을 따라서 갈라져 나간 셈의 자손이다. 32 ○이들이 각 종족의 족보를 따라 갈라져 나간 노아의 자손 종족이다. 홍수가 난 뒤에, 이 사람들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와서,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창 11:5) “5 주께서는,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창 11:10‐26) “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다. 셈은, 홍수가 끝난 지 이 년 뒤, 백 살이 되었을 때에 아르박삿을 낳았다. 11 셈은 아르박삿을 낳은 뒤에, 오백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12 ○아르박삿은 서른다섯 살에 셀라를 낳았다. 13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은 뒤에, 사백삼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14 ○셀라는 서른 살에 에벨을 낳았다. 15 셀라는 에벨을 낳은 뒤에, 사백삼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16 ○에벨은 서른네 살에 벨렉을 낳았다. 17 에벨은 벨렉을 낳은 뒤에, 사백삼십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18 ○벨렉은 서른 살에 르우를 낳았다. 19 벨렉은 르우를 낳은 뒤에, 이백구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20 ○르우는 서른두 살에 스룩을 낳았다. 21 르우는 스룩을 낳은 뒤에, 이백칠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22 ○스룩은 서른 살에 나홀을 낳았다. 23 스룩은 나홀을 낳은 뒤에, 이백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24 ○나홀은 스물아홉 살에 데라를 낳았다. 25 나홀은 데라를 낳은 뒤에, 백십구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26 ○데라는 일흔 살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11장 5절을 전후로 기록되어 있는 10장과 11장의 아주 지루하고 긴 족보를 통해 그 속에서 역시 ‘심판 속에 꽃피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성경의 대 주제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에 나오는 족보에 관해 여러 차례 공부를 했습니다.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배웠고(마태복음: 요셉의 족보, 누가복음: 마리아의 족보) 창세기5장의 족보를 통해서는 죽음으로 끝을 맺게 되는 죄를 지은 인류의 종국과 그 속에서도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하나 건져 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족보들, 마태복음의 족보와 창세기 5장의 족보와 오늘 우리가 공부할 창세기 11장의 족보를 하나로 연결을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완성이 됩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 속에는 바로 우리 성도들이 연합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성경의 족보들은 바로 우리 성도들의 족보, 다른 말로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탄생을 어떻게 계획하시고 완성시켜 내시는지에 대한 조감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1장 10절에 ‘톨레도트’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전에도 한번 설명해 드린 기억이 있는데 그 히브리어 ‘톨레도트’는 구속사를 흐르는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의 계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기 위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족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는 ‘후예’라고 번역이 되어 있어서 단순히 자손들이라는 뉘앙스로 들리지만 그 ‘톨레도트’는 구속사와 관련된 이들의 명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족보속의 인물들이 전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단어가 가장 처음 쓰인 곳이 창세기 2장 4절입니다.

 

(창 2:4) “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기서 ‘대략’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톨레도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5절부터 아담과 하와의 창조, 그리고 선악과에 대한 명령, 그리고 인간의 타락과 에덴에서의 추방 그리고 가인과 아벨과 셋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5장의 아담의 후예들로 이어집니다. 그 죽음의 족보라고 일컫는 5장의 1절에서 다시 한 번 그 ‘톨레도트’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창 5:1) “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여기서는 그 단어가 ‘계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아담의 후예들이 죽 열거가 되고 그 단어는 다시 창세기 오늘 본문의 10장 1절로 이어져서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에서 한 번 더 쓰이고 11장 10절의 ‘셈의 후예’에서 한 번 더 쓰입니다. 그리고 그 ‘톨레도트’는 헬라어로 ‘게네시스’로 번역이 되는데 그 단어는 마태복음 1장 1절로 이어집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에서 ‘세계’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바로 ‘게네시스’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에서부터 시작하여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윗과 아브라함과 셈과 노아를 거쳐 하나님께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은 창세로부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향해 흐르고 있고 그 속에서 유기되고 있는 자들의 라인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의 라인이 아주 선명하게 갈리고 있음을, 그리고 그 두 라인 모두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자들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톨레도트’ 족보들은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과 실재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기록들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이 족보에서 배울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모두 뿌리 뽑힌 나무가 되어 버린 인생들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구해내고 계신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오늘 본문 10장21절을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창 10:21) “21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잘 보시면 셈을 가리켜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모세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벨은 노아의 4대손이며 셈의 3대 손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셈을 가리켜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묘사를 했을까요? 그 히브리어 ‘에벨’ ‘헤베르’는 ‘다른 쪽에 있는 지역 혹은 건너가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단어가 이브리, 하비루, 히브리로 변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벨은 ‘건너간 자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선택과 요구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다른 쪽에 있는 지역’ 가나안으로 이주를 한 아브라함의 후예, 히브리 사람들의 조상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라인을 준비하고 계심을 모세가 그 한 문장에서 모두 축약하여 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에벨’이라는 단어 하나에 우리 교회의 정체성이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세상의 강을 건너 하나님 나라로 이주를 하여 이방인으로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모두 다 죽어야 하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역사를 경륜하시며 그 택한 백성들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다 건져내고 계십니다. 그게 바로 심판 속에 꽃피는 구원인 것입니다. 그것은 10장과 11장의 족보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10장은 전체가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11장에 셈의 후예들의 족보가 또 한 번 반복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그 두 족보가 조금 틀립니다.

 

(창 10:25‐31) “25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26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27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28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29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30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 31 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이 10장 말미의 족보에는 에벨의 두 아들 중 욕단의 후예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사건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에벨의 아들인 벨렉과 욕단의 대(代) 이후에 바벨탑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추론 해 볼 수 있습니다. 25절을 보시면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다”고 하지요? 여기 보시면 벨렉 때에 세상이 나뉘었다고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에벨의 아들 벨렉 때에 언어가 혼잡해 지고 세상이 나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25절에서 쓰인 ‘나뉘었다’로 번역이 된 히브리어 ‘파레그’는 ‘division under pressure' 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 단어의 명사가 ’벨렉‘입니다. 그리고 25절에 ’세상‘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에레츠‘는 ’흙, 땅‘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어구를 직역을 해 보면 ’그 때에 땅이 큰 압력에 의해 갈라졌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인간들을 땅에 흩으셨을 때에 땅이 오대양 육대주로 함께 갈라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미국의 대통령 후보였던 엘고어의 지구 온난화 현상에 대한 경고의 강연을 본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여섯 대륙을 퍼즐 맞추듯이 끼워 맞춰 보니까 정말 하나로 맞춰 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들끼리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자들을 온 땅에 철저하게 흩으심으로 그들의 멸망을 막으신 것입니다. 그들을 땅에 흩으시고 땅까지 갈라버리신 것입니다.

 

여러분, 벨렉은 노아의 아들인 셈의 4대 손입니다. 그 말은 노아의 홍수가 끝난 뒤 불과 백여 년 뒤에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았다는 말입니다. 셈이 홍수가 끝난 뒤 2년 만에 (100세)아이를 낳기 시작해서 바로 바로 후대들이 어어 졌으니까요. 우리가 창세기 9장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노아는 홍수 후에도 350년을 더 살았고 950세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셈은 98살에 방주에서 나와 100세에 첫 아들을 낳고 500년을 더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와 셈의 손자 손녀들이 바벨탑을 쌓고 있을 때 홍수를 직접 경험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무지개 언약을 받았던 노아와 셈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홍수를 직접 경험한 하나님의 사람들, 노아와 셈의 목전에서 그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쌓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악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자기들에게 자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홍수 후에 세상이 여전히 악하므로 당신께서 다시는 세상을 홍수로 멸하지 않으시고 다른 방법을 취하시겠다고 하셨는지 아시겠지요? 그렇게 자신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열심히 바벨탑을 쌓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 때 노아와 셈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자신들의 손자 손녀들이 얼마나 불쌍했겠습니까? 그들이 사랑하는 자기 손자 손녀들에게 경고의 말을 전하지 않았을까요? 홍수의 처참함과 무지개 언약을 주시며 복과 번영을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담아 수없이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여전히 바벨탑 짓기를 포기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 노아와 셈의 마음과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최후의 종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눈으로 본 자들입니다. 그 때에는 하늘이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목전에서 세상은 여전히 성공주의, 거대주의, 거인 숭배사상, 고지론 등의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정말 연민을 느끼십니까? 아니면 그들과 함께 세상의 바벨탑을 쌓고 계십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경고를 쉽게 잊고, 아니 하나님의 존재마저도 쉽게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꿈과 야망을 좇아 세상의 영걸이 되어 하나님과 맞장을 떠 보자고 대드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톨레도트’를 홀로 열심히 성실하게 챙기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바로 11장의 족보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10장 말미의 족보는 에벨의 두 아들 중 욕단의 족보였습니다. 그런데 11장에서는 욕단의 형제 벨렉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창 11:16‐26) “16 에벨은 삼십 사세에 벨렉을 낳았고 17 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 삼십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8 벨렉은 삼십 세에 르우를 낳았고 19 르우를 낳은 후에 이백 구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0 르우는 삼십 이세에 스룩을 낳았고 21 스룩을 낳은 후에 이백 칠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2 스룩은 삼십 세에 나홀을 낳았고 23 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4 나홀은 이십 구세에 데라를 낳았고 25 데라를 낳은 후에 일 백 십 구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이 11장의 벨렉의 족보에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름이 나오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쌓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죄인들의 무리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 ‘에벨’ ‘히브리’를 준비시키고 계셨고 그들을 건지시기 위한 족보, 믿음의 조상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아브람의 족보를 이렇게 이어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족보 사이에 들어 있는 바벨탑 사건은 단순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만을 경고의 메시지로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류의 역사에 간섭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 내는가에 더 악센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데라와 아브람의 족보는 어둠 속에 밝아오는 여명의 빛줄기를 비추고 있는 족보요, 인류의 원 역사를 마감하면서 동시에 구원 사를 태동시키고 있는 족보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의 행동은 언제나 무한한 은총을 베푸시기 위한 역설적 행동이었으며 구원 행동을 위한 전주곡이었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인류의 태고(太古)사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없이는 계속될 수 없었던 죄악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추방하시면서 원시 복음을 주셨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추방이라는 심판에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가 동행하고 있습니다. 동생 아벨을 살해한 가인에게 땅을 유리하는 저주를 내리시면서 동시에 그가 다른 이들에게 살해당하지 않도록 보호의 징표를 주셨지요? 역시 심판의 행위와 함께 구원의 의지가 엿보이는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가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즉시 심판하여 처형하지 않으시고 살려 두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솎아 내실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도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쓰레기들을 청소 하시는 심판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구원의 의지를 방주와 노아의 일곱 식구들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벨탑 사건으로 모든 인류를 버리시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건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의 최종 목적은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들의 구원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적은 무리의 당신의 백성들을 순결하게 보존하시고 구별하시기 위해 더러운 죄와 죄인들을 익사 시켜 버리시고 태워 버리시는 것이 바로 심판이며 그 심판이라는 동전의 뒷면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공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새 창조를 위한 더러운 쓰레기 청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불이 쏟아지는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더러운 쓰레기들과 어두움들이 청소가 되고 하나님의 새 창조가 완성이 되는 최후의 그림을 크고 작은 모형으로 여러 곳에 그려 넣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탑의 사건도 바로 그 최후의 심판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모두 다 심판을 받는 그 곳에서 아브람이라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바벨론에서 건져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뒷받침 해 주는 구절이 오늘 본문 11장 5절입니다.

 

(창 11:5) “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하나님께서 하늘에 닿으려는 인간들의 탑 쌓기 현장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인간들이 하늘 꼭대기에 닿으려고 하는 그 현장으로 하나님은 내려오셔야 합니다. 성경은 그러한 대조를 통해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늘에 오르려 하는 인간들의 노력이 얼마나 허망하고 허탈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힘으로 도저히 정복될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아래로 강림하셔서 인간들을 심판하십니다. 여기서 ‘강림’이라는 단어가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강림은 항상 심판과 구원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강림은 창세기부터 줄곧 이어지고 있습니다.

 

(창 3:8)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심판하시기 위해 강림하시는 장면입니다. 전에 우리가 이 구절을 공부할 때도 함께 살펴보았지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시는 날의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날이 서늘할 때에’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히브리 원어는 ‘욤 루아흐’입니다. 그 어구는 ‘the wind of the day' ‘그날의 바람’ ‘그날의 성령’이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번역이라 했지요? 성경에서 신구약을 막론하고 ‘여호와의 강림의 날’ ‘그 날’(그날의 바람)은 ‘심판의 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날이지요.

 

(계 6:15‐17) “15 그러자 땅의 왕들과 고관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세도가들과 노예와 자유인과, 모두가 동굴과 산의 바위들 틈에 숨어서, 16 산과 바위를 바라보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서, 보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과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숨겨다오. 17 그들의 큰 진노의 날이 이르렀다. 누가 이것을 버티어 낼 수 있겠느냐?"

 

그 날을 신약에서는 ‘주의 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살전 5:2) “2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 날이 어떤 날인지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지요? 최후의 심판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서 창세기 3장 8절과 9절을 다시 한 번 보세요.

 

(창 3:8~9)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8절에 음성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콜’이라는 단어는 '소리(sound), 혹은 천둥소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거기에서의 음성을 ’아담아‘라는 하나님의 호명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신 것은 9절입니다. 아담이 천둥 같은 소리, 여호와의 강림하시는 소리를 듣고 두려워 나무 뒤에 숨자 하나님께서 ’아담아‘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8절의 ’하나님의 음성‘ 정확히 번역을 하면 ’하나님의 소리‘이며 그 ’하나님의 소리‘는 하나님의 강림의 소리였던 것입니다. 구약의 기록을 잘 보시면 하나님의 강림은 항상 소리와 함께 임합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가 떨어졌습니다.

 

(출 19:16, 19-21) “16 ○마침내 셋째 날 아침이 되었다.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나며, 짙은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 산양 뿔 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자, 진에 있는 모든 백성이 두려워서 떨었다. 19 나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모세가 하나님께 말씀을 아뢰니, 하나님이 음성으로 그에게 대답하셨다. 20 주께서 시내 산, 곧 그 산 꼭대기로 내려오셔서, 모세를 그 산 꼭대기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갔다. 21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려가서 백성에게, 주를 보려고 경계선을 넘어 들어오다가, 많은 사람이 죽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일러 두어라.”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나팔 소리와 우레 소리와 함께 강림하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여호와의 강림하심 앞에 죄인들이 서게 되면 즉사입니다. 심판이지요. 그러나 지금 여호와의 강림은 그들을 즉사시키시기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들을 구원해 내시기 위한 강림입니다. 그래서 심판 받을 죄인들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직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날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히 12:19‐21) “19 나팔이 울리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리는, 그러한 곳이 아닙니다. 그 말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더 말씀하시지 않기를 간청하였습니다. 20 그들은 "비록 짐승이라도 그 산에 닿으면, 돌로 쳐죽여야 한다" 하신 명령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21 그 광경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모세도 "나는 너무도 무서워 떨린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강림은 항상 더러운 것을 심판하여 소멸하시고 새로운 창조를 완성하시는 심판과 구원의 강림인 것입니다. 따라서 소리와 함께 강림하신 에덴동산의 여호와의 모습도 역시 우리가 요한계시록 6장에서 확인했던 심판과 구원의 ‘최후의 날’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죄를 짓고 부끄러운 상태가 되어 하나님을 피해 숨어 버린 죄인들을 무죄한 동물 속에서 심판하여 죽여 버리시고 그 동물의 가죽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덮어 새로운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어 내시는 새 창조의 그림이 그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최후에 완성이 될 하나님 나라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렇게 이 역사와 성경은 여호와의 강림으로 더러운 쓰레기들이 완전히 청소가 되고 새로운 창조가 완성이 되는 그 날을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최후의 심판의 날은 사실 창세기 1장의 최초의 하나님의 강림에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레쉬트, 시간의 시작) 시간을 창조하시고 천지, 즉 공간을 창조하신 후에 ‘일’을 하시기 위해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게 역사 속으로의 하나님의 최초의 강림입니다. 그 하나님의 강림이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것’으로 묘사가 되었습니다. 그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처음 창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빛을 창조하시고 그 빛을 ‘낮’이라 칭하셨다고 하지요? 그 단어가 ‘욤’ ‘날’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 2절과 3절에서 하나님은 ‘날’을 창조하심으로 ‘욤 루아흐’ ‘그 날의 신’ ‘그 날의 성령’으로, 창세기 3장 8절의 ‘날이 서늘할 때에’의 그 ‘욤 루아흐’로 등장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그 날’을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그날의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빛을 창조하심으로 ‘그 날’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빛으로 심판하시고 빛이 가득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완성하시는 분으로 이 역사 속에 뚫고 들어오신 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게 창세기의 시작이며 그 시작이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 최종 목적의 시작지점으로 그리고 모형으로 천지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것이 창세기 3장에서 또 한 번의 심판과 구원의 강림으로 조금 더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의 강림은 바벨탑에서 한 번 더 보여 지고 있는 것이며 구약 전체에서 점점 더 확실하고 또렷한 그림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습 1:14-16) “14 주께서 심판하실 그 무서운 날이 다가온다. 득달같이 다가온다. 들어라! 주의 날에 부르짖는 저 비탄의 소리, 용사가 기운을 잃고 부르짖는 저 절규 15 그 날은 주께서 분노하시는 날이다. 환난과 고통을 겪는 날, 무너지고 부서지는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먹구름과 어둠이 뒤덮이는 날이다. 16 나팔이 울리는 날, 전쟁의 함성이 터지는 날, 견고한 성읍이 무너지는 날, 높이 솟은 망대가 무너지는 날이다.”

 

(욜 2:1,11) “1 너희는 시온에서 뿔 나팔을 불어라.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경보를 울려라. 유다 땅에 사는 백성아, 모두 떨어라. 주의 날이 오고 있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 11 주께서 큰 음성으로 당신의 군대를 지휘하신다. 병력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명령을 따르는 군대는 막강하다. 주의 날은 놀라운 날, 가장 무서운 날이다. 누가 감히 그 날을 견디어 낼까?”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 이외의 모든 것들은 쓰레기처럼 치워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청소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바로 하나님의 빛입니다.

 

(계 20:9-10) “9 그들은 지면으로 올라와서, 성도들의 진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도시를 둘러쌌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10 그들을 미혹하던 악마도 불과 유황의 바다로 던져졌는데, 그 곳은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영원히, 밤낮으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그 불이 동일하게 내려오게 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런데 그 동일한 빛, 동일한 불이 세상에게는 심판의 불이 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치료의 빛으로, 완성의 빛으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말 4:1-2) “1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용광로의 불길같이,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이 온다. 모든 교만한 자와 악한 일을 하는 자가 지푸라기같이 타 버릴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불이 그들을 살라서, 그 뿌리와 가지를 남김없이 태울 것이다. 2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니 너희는 외양간에서 풀려 난 송아지처럼 뛰어다닐 것이다.”

 

너무나 감격스러운 구절입니다. 하늘에서 극렬한 풀무 불이 내려와 악한 자들을 다 살라 소멸시키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그 불이 의로운 해로, 치료하는 광선으로 내려와 그들을 완전히 치료하여 새로운 창조물로 완성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그 불은 바로 성령의 불인 것입니다. 그 성령의 불이 내려와 더럽고 어두운 것들은 모두 다 불살라 버리시고 영원히 태우실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그러나 그 성령의 불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은혜의 불로, 완성의 불로, 치료의 불로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은 영원히 당신의 백성들에게 은혜와 사랑의 빛으로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곳을 우리는 천국이라 합니다.

 

(계 22:5) “5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릴 것입니다.”

 

그렇지요? 이 땅에 내려와 극렬한 풀무 불처럼 더러운 죄인들을 태우시는 그 불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영원히 우리를 비추시는 치료의 불, 사랑의 불, 은혜의 불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더러운 것들이 모두 태워지고 새로운 것들이 완성이 되는 그 날이 2,000년 전에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나타나셔서 불의 혀같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임하시는 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일로 ‘교회’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별이 되고 그 이외의 세상이 유기되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가시적이고 물리적으로 완성이 되는 날이 바로 최후의 종말의 날, 다른 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의 날인 것입니다.

 

세상은 그 무시무시한 마지막 날에 산들과 바위들에게 ‘나를 좀 가려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그 때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불이 마치 드라큐라가 햇빛을 싫어하는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하고 무섭기 짝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그 하나님의 불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 찬란한 빛을 감격 속에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왜요? 우리는 그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불을 이 땅에서 계속 경험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불의 유익이 어떠한 것인지를 확실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탑의 심판의 현장에서 아브라함 속에서 함께 건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나안 땅에 반드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원의 현실이 이 땅에서, 우리의 육체 속에서 실제화(actualizing)되어 지는데 그 구원의 현실이 성도의 삶 속에서 실제화 되어지는 그 시간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구원은 모든 더럽고 어두운 죄악의 쓰레기들이 다 타 버리고 순결하고 무흠한 새 것만이 남는 상태입니다. 그러한 구원의 현실은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인생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이미 불로 우리의 인생 속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비추고 사르십니다. 그래서 마치 어둡고 습한 곳에 숨어 있는 바퀴 벌레들을 빛을 비추어 드러내어 밟아 죽이듯이 어두운 가운데 숨어 있던 우리의 더러운 것들을 빛을 비추어 폭로시켜 버리시고 그 폭로된 죄들을 하나님의 불로 살라 버리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하나님의 불에 의해 폭로되고 지져지고 불 태워지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이며 성경은 그것을 환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환난은 복된 환난인 것입니다. 그 환난을 통과하게 되면 우리는 정금 같은 거룩한 자로, 순결한 자로 제련이 되고 연단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죄와 사망이라는 병에 걸려 있던 우리가 말라기의 말씀대로 온전히 치료가 되어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의 삶에 그렇게 불같은 시련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절대 낙심하시거나 절망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 우리를 순결한 정금으로 만들고 계시는 것이니까요. 그 때 기뻐하십시다. 그 때 감사하십시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바로 그러한 실력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이 온전한 모습으로 쏟아지는 그날, 심판의 날에 우리가 온전히 완성이 될 것을 기대하며 그 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하나님의 불이, 하나님의 빛이 여러분에게 임하시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여러분의 소원이나 들어주고, 여러분에게 무슨 신비한 체험이나 하게 해 주고, 기적이나 일으키기 위해 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리시고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알리시며 우리의 죄와 허물을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행복에 도달하려 쌓아놓은 이 세상 것들을 불사르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오늘날의 교회는 그 하나님의 힘을 빌어 무엇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조엘 오스틴의 새로운 베스트셀러인 ‘잘 되는 나’라는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은 이 세상의 복과 비례하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폅니다.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리지만 그 사람은 복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성경이 이야기 하는 바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바를 좇아가면 여러분은 분명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빛은 거창하게 당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증명하는 식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빛은 비밀스럽게 감추어져 있는 빛으로 일을 하십니다. 한문으로 밀양(密陽)입니다. 여러분 밀양이라는 영화 보셨어요? 그 영화의 주인공인 신애라는 여자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 여자는 연극 인생을 삽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다 죽었는데도 그 사실을 인정하면 자신이 너무나 비참해 질까봐 오히려 열녀 행세를 하며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부자 행세를 하며 거짓으로 땅을 보러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한 연극 인생이 그녀의 아들의 유괴를 불렀고 그녀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그 버릇은 전혀 고치지를 못합니다. 그 때 그녀는 어떤 교회의 부흥회에 참석을 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목사의 안수 기도를 받은 후 마치 새사람이 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회복이 되지 않았던 것을 우리는 그 영화 속에서 보았지요? 신앙생활도 연극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연극은 이제 성녀에 까지 도전을 하는 지경이 되지요. 자신의 아들을 유괴해서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러 교도소로 향합니다. 그 때 그 살인자가 자신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하자 신애는 거기서 기절을 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하나님과의 전쟁을 시작합니다. 교회의 부흥회가 한창일 때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크게 틀기도 하고 자기 교회의 장로를 유혹해서 간음을 하기도 하며, 급기야 자신의 손목의 혈관을 칼로 그어 자살을 시도 합니다. 그 때마다 신애는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소리칩니다. ‘보여? 보이냐구?’ 그렇게 신애는 정신 병원에 들어가게 되고 인생의 막장까지 내 몰립니다. 그런데 정신병원에서 나온 신애라가 머리를 자르기 위해 미용실에 들렀는데 그 미용실의 미용사가 마침 자신의 아들을 유괴해서 죽인 살인자의 딸입니다. 신애라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옵니다. 신애라는 분노합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끝까지 쫓아다니면서 괴롭히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모든 상황을 다 겪은 신애라가 결국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바라봅니다. 긴 어둠의 터널을 통과한 그녀는 거울 앞에서 비로소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허울 좋은 연극 속에서의 자신이 아닌 실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자릅니다. 그녀는 그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고 난 뒤 슬픔도 딛고 일어섭니다. 신애라가 머리를 자르기 위해 보던 거울, 송강호가 들고 있던 거울 아래에 그렇게 자신을 슬프게 했던 죽은 아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신애라는 그 사진을 보며 슬퍼하지 않습니다. 오직 거울 속의 자신만을 들여다보며 그동안 연극 속에서 자신을 치장하고 있던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입니다. 그 때 마지막 장면에서 빈 병과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하수구에 비밀스러운 햇빛이 비칩니다. 그걸로 그 영화는 끝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렇게 쓰레기 같은 우리 인생에 비밀스럽게 비추시는 분입니다. 쓰레기를 금은보화로 바꾸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렇게 보잘 것 없고 힘겨운 인생 속에서 우리를 비추시며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작은 피조물인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이 세상의 모든 더러움들을 털어내며, 자신을 괴롭히던 이 세상의 슬픔들을 밟고 일어서는 자로 만드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빛인 것입니다. 바벨탑의 현장에서 에벨과 아브라함을 그 마음속에 품고 계셨던 하나님의 큰 뜻을 헤아리십시오. 결국 바벨탑의 붕괴는 하나님 백성들의 창조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러분이 쌓는 바벨탑들이 하나하나 무너져 가거든 ‘아, 내가 지금 하나님의 순결한 백성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중이구나’하고 기뻐하세요. 마지막으로 베드로 후서 3장 11절 이하를 결론으로 읽고 마치겠습니다.

 

(벧후 3:11-13) “11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 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생활 가운데서, 12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 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을 따라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어 있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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