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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썩지 않는 양식과 하나님의 일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7. 29.

 

 

썩지 않는 양식과 하나님의 일

 

(김성수 목사)

 

 

(요 6:22-31) “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요한복음 6장의 일관된 내용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바대로 이 6장은 죄인들이 진정한 만족과 배부름과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떡은 인간들의 노력이나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인간들의 행위로 얻어낼 수 있는 이 세상의 떡이 아닌 생명의 떡,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피력을 하고 있는 장입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행복에 도달하려고 애를 쓰는 인간들의 세속적 행위나, 인간들이 이 땅에서 자기들의 행복을 위해 쌓는 세상의 힘이 왜 그들에게 생명에 이르는 양식이 될 수 없는지에 관한 예수님의 강화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제가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 10:10,28)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분명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일까요? 읽고 구원받으라고 주신 것입니까? 아니지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은혜로만 주어집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성경이 필요합니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구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 성경입니까? 그렇다면 그 분량이 너무 많지 않아요? 단순히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이 주어진 것이라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몇 마디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그 긴 기록이 필요합니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에게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택하셔서 예수를 믿게 하셔야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설득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택한 자들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설득의 책도 아니고 단순히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놓은 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시간의 시작인 ‘태초’부터 시작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인 ‘최후의 종말’에서 끝이 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역사라는 시간과 천지라는 공간을 잠시 사용하셔서 당신께서 계획하시고 목적하시는 어떤 일을 완성해 내실 것임을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알리고 있는 책입니다.

 

여러분이 요한계시록을 공부하셔서 아시겠지만 하나님의 최종목적이 무엇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 다른 말로 다시는 타락하거나 배반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그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 중의 일부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이루어지기 위해 구원받은 인간이 필요한 것이지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일이 완성되는 데에 도구로 쓰시기 위함’까지를 그 범위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을 주셔서 당신과 당신의 계획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무엇이며, 그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 분이 계획하신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 인간들이 어떤 지경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가 기록된 책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고 피부에 와 닿는 문제가 우리의 구원이고 그 구원의 방법에 관한 문제이기에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으로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만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가 확인이 된 성도들은 거기서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성경이 거기서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인간의 구원에서 끝을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완성이 되는 하나님 나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 나라 완성의 시작 지점일 뿐 그 자체가 완성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일에 초청이 된 자들로서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무엇을 추구하며 어떠한 종류의 열심을 부려야 하는 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시간을 창조하신 후 역사와 우주를 경륜해 가시는 최종목적은 죄인들의 구원이 아니라 죄인들의 구원으로 말미암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先)지식을 바탕으로 오늘 본문을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6절과 27절을 보세요.

 

(요 6:26-27)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26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당신을 찾아와 왕을 삼으려 하는 자들에게 일갈(一喝)을 하십니다. 그들이 떡을 먹고 배가 부른 연고로 주님을 찾은 것이지 진정한 하늘의 복을 찾아 주님께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26절에 나오는 배부르게 하는 떡과 27절의 썩는 양식이 같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떡과 썩는 양식을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세상의 힘이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힘을 쌓는 일을 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인 하나님 일에 열심을 부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그 힘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정답은 아닙니다. 여러분, 정말 썩는 양식이 돈이나 명예 등의 세상의 부귀영화, 즉 세상의 힘만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지금 당장 여러분의 생업을 놓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분명 썩는 양식을 위해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요. 혹 이렇게 말씀하실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아니 주님은 지금 썩는 양식을 위한 세상일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너무 그런 세상 것에만 관심을 두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요. 주님은 분명 27절 서두에서 ‘에르가제스떼 메’라고 강한 부정의 불변 사를 쓰시면서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을 강력하게 금하고 계십니다.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은 절대 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이제 세상 일 다 놓고 어디 산 속에 모여서 하나님의 일만 하면서 살까요?

 

또 한 가지, 만일 썩는 양식이 이 세상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라면 주님은 오병이어로 썩는 양식을 만들어서 먹이신 것이 됩니다. 당신도 썩는 양식을 위해 일을 하셔서 그 썩는 양식으로 당신을 좇는 이들을 먹이셨으면서 당신을 좇아온 이들에게는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게 말이 됩니까? 그건 성경의 진의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금하시는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 과연 무엇일까요?

 

26절과 27절을 잘 보시면 썩는 양식은 그들이 오병이어의 기적 현장에서 먹은 떡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그 떡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주님을 찾아온 행위를 가리켜 썩는 양식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들의 배를 부르게 해주신 주님께 계속해서 배부르게 해 달라고 찾아온 자 들의 그 행위를 가리켜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배를 불린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먹을 것으로 배를 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만족을 위해 주님을 좇는 자들이 바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게 나쁜 일인가요? 주님을 찾아 온 것이 왜 나빠요? 그 일이 바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찾아 온 자들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들이 여전히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을 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지적하는 것을 잘 보세요.

 

주님은 지금 주님을 믿고 좇겠다고 신앙 행위를 하고 있는 일련의 무리들에게 너희는 지금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오늘날 예배당 안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혼신의 힘을 다해 종교행위를 하고 있는 자들 중에도 썩는 양식을 위해 일을 하는 불쌍한 이들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다른 말로 자기 자신의 만족과 유익을 위한 모든 신앙 행위는 전부 썩는 양식을 위한 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한 헌금, 나 자신을 위한 기도, 나 자신을 위한 선교, 나 자신을 위한 구제, 나 자신을 위한 봉사……. 이 모든 것들이 다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나 자신의 구원’도 포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종교 행위들도 썩는 양식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나의 구원을 위한 종교 행위 또한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일 수 있다니 그럼 무엇을 해야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을 하게 되는 것인가?’ 당연히 이런 질문이 드실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서두에 하나님의 최종목적은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설명을 해 드린 것입니다. 지금부터 구체적으로 거기에 대한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7절을 다시 보시면 조금 모순되는 듯 한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은 분명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셔놓고 그 양식은 당신께서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셔놓고 그 양식은 당신께서 주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의 개념과 ‘양식’의 개념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과 많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안 드세요? 먼저 주님께서 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그 어구부터 해결을 하자고요. 주님께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당신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당신이 그 양식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이지요? 그 양식이 이 전 장에서 한 번 나왔었는데 거기가 어디입니까?

 

(요 4:34)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여기 보시면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양식이 나오지요? 그 양식이 무엇입니까?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 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주님의 양식입니다. 보세요. 예수님은 나의 뜻을 행하고 나의 목적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아닌, 자신이 부인되고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양식으로 삼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부르게 한 양식은 바로 그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영생하도록 있는 예수님의 양식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나의 욕심과 정욕을 채우며 나의 비전을 성취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입니다. 우리를 배불릴 수 있는 양식은 나의 구원, 나의 소원 성취, 나의 만사형통, 내 질병의 치유, 나의 행복, 나의 기쁨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 성취, 하나님의 만사형통, 하나님의 행복,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하며 그러한 양식이 진짜 우리의 배를 부르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먹어야 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인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 양식을 얻어내기 위해 열심을 부려야 하는 어떤 일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당신을 찾아온 자들의 행위를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라고 하셨잖아요? 따라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은 자기의 배를 부르게 하는 세상 것들을 추구하는 삶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양식,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당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 여전히 자신의 문제 해결, 자신의 소원 성취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그러고도 그들은 모두 저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소원 성취를 위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만족을 위해 헌금 하고, 봉사하고, 선교하고, 구제하고 하면서도 자신들은 썩지 않는 영생을 위한 양식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요, 헌금과 구제와 선교와 봉사가 썩는 양식이 될 수 있다니까요.

 

정말 썩지 않는 양식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삶이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이 완성이 될까’를 고민하며 자신의 선택과 행동양식들을 ‘하나님의 기쁨’에 맞추어 살려고 노력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자신은 피조물이라는 올바른 자각 아래 자신의 모든 인생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으로 허비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삶으로의 대 전환이 일어난 사람들을 가리켜 구원 얻은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구원을 얻은 것으로 마지막을 삼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구원은 그 자체가 전부가 아니며 그 자체로 마지막이 아닌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그 자체가 시작이며 출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 구원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는 구원을 얻은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일이 완성이 되기 위해 ‘나’라는 존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나’ 중심의 인생관이 ‘하나님’ 중심의 인생관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 중심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많은 손해를 감수하는 삶이어야 하고, 많은 밟힘을 감수해야 하는 삶이며, 많은 억지 속에서도 상대방을 감싸 안고, 품어주고, 용납해 주어야 하는 삶이기에 그 삶을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만족과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나에게 손해를 입힌 자들에게 동일한 무게의 복수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이 완성이 되는 것을 그의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참아주고, 용납해주고, 섬겨주고, 용서해 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삶은 세상 적으로 볼 때 고난의 삶이며 고통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며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목적이 완성이 되어져 가는 삶이기에 꿋꿋이 이겨내며 사는 것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성도의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모두에게서 온전히 완성이 되어 발휘되게 되는 그날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날인 것입니다. 그러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에 관한 것, 성도의 삶 전체에 관한 내용이 잘 설명이 되어 있는 책이 성경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자들아, 이겨라, 끌까지 이겨라’ 하고 응원을 함께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여러분의 구원에 관해서만 기록을 하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그 구원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제 화 시키게 되는지 까지 기록이 되어 있는 책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여러분이 이 땅에서 세상의 힘을 누리며 얼마나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는지에 관해 기록된 책도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는 도구로서 이 땅에서 당해야 할 환난과 고통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해 놓은 책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이겨라’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벧전 2:9)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구원하신 이유가 정확히 나오지요? 우리 성도들은 구원을 얻은 후에 자기 구원에만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선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한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 하나님의 성품 등을 우리의 삶과 입으로 선전하는 자로 이 땅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삶이 온전히 살아지는 나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발산해 내게 되는 그 나라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의 순종으로 이 세상에서 증거 되는 일이 바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며 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가리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을 위해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생존에 관한 문제는 항상 나의 만족과 나의 자랑과 나의 행복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추구하는 삶은 자신의 삶 속에서 나의 자랑과 나의 행복을 기각(棄却)하고 하나님의 만족과 하나님의 자랑과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행복에 관심을 두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광야 인생길에서 바로 그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간 싸운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진짜 사는 것이라는 진리를 배우는 싸움이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자신의 설교에서 광야의 이스라엘을 가리켜 광야 교회라 부르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 할 삶을 모형으로 살았던 것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 세상의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이 자꾸 세상의 떡을 달라고 하나님께 조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증인의 삶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광야 40일을 보내시며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지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동안에 실패했던 하나님의 시험을 그대로 다시 받으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사단에게 절만하면 세상의 영광을 다 주겠다.’ 사단이 생존의 문제로 시험을 걸고 들어 옵니다. 그 때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사람은 생존의 문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문제로 사는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 때 진짜 사는 것이다.’라고 명쾌하게 대답을 해 주십니다. 사단은 그렇게 늘 생존의 문제로 시험을 걸고 들어 옵니다. 그 때 우리는 생명의 문제로 답을 해서 사단의 시험을 무색케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도와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존에 필요한 것들로 보상을 해 주신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본질과는 전혀 관계없는 생존의 문제로 기독교를 무속신앙화 시켜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러한 인간들의 오류가 정확하게 지적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이 주님께 바로 묻습니다.

 

(요 6:28)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여기서 ‘일’은 복수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을 자기들이 해 내어 하나님께 이 세상의 것들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종교 행위들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좋은 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마치 거래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루에 기도를 세 시간씩 하라던가, 십일조를 빼 먹지 말고 하라던가, 매년 꼬박꼬박 단기선교를 가라던가, 열심히 구제에 힘쓰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엉뚱한 답을 주셨습니다.

 

(요 6:29)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여기서의 ‘일’은 단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잘 믿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일, 예수를 잘 믿는 일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믿음을 받은 자로서 믿음을 발휘하며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변변치 못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당하고 기쁘게 행복하게 살아내는 것, 하나님의 일입니다.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우고,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이 그것이 진짜 힘이 아니란 것을 알고 겸손하게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 하나님의 일입니다. 즉 보이는 것을 의지하여 교만을 떨고, 자랑을 하거나 그 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부끄러워하고 기가 죽어지내는 이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일이 아닌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보이는 것이 주어졌을 때 그 현상을 보고 광분하여 그 현상을 일으켜 준 대상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불신자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본문 30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믿음을 요구하시는데 믿음 없는 자들이 또 눈에 보이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요 6:30) “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니까 이 우매한 자들이 당신을 믿도록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자신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존경받는 선지자가 되었으니 당신도 그런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요 6:31) “31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오병이어로 이 만 여명이 광야에서 배불리 먹은 기적 속에서 주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또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이게 바로 믿음 없음의 증거인 것입니다. 뭔가를 자꾸 보고 싶어 하고 자기의 인생 속에서 기적들을 자꾸 경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의 그 요구가 절대 만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보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그 기적이 사라지면 신앙도 함께 사라집니다. 소원 성취를 위해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자기의 눈에 소원 성취라는 결과물이 보여 지지 않으면 이내 믿음을 버립니다. 그건 올바른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이 정말 믿음을 줄 수 있다면 왜 그런 엄청난 기적을 눈으로 보고 체험을 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다 죽었겠습니까? 믿음은 표적으로 생겨나거나 성숙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받은 자들은 믿음을 발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요 6:44)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이렇게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님께로 인도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아무리 엄청난 기적이 눈앞에서 일어나도 하나님께서 이끌지 않은 자들은 예수를 믿을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끌어 믿음을 준 사람들은 기적 같은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보지 않아도 믿어지고 보지 않아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행복한데 뭐 하러 다른 것을 봅니까? 그러니까 성도의 삶이나 불신자들의 삶 속에서 공히 기적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이 땅에 기적을 보이시겠습니까? 그런데 속지 마세요. 믿음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보여주면 믿겠다고, 보여주면 더 열심을 내겠다고 사기 치지 마세요.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요 6:38-39)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 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보세요.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시지요?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4장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양식이라는 것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지금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어떤 일이라고 하나요?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을 받고 살아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하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여주면 믿겠다는 둥 기적을 체험하면 나의 믿음이 더욱 강건해 질 거라는 둥의 너스레는 집어치우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담은 그릇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이 땅에서 믿음을 발휘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썩는 양식이 무엇인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잘 아시겠지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나 우리의 행복이나 우리의 만족이나 우리의 기쁨만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의 완성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그리 녹녹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삶은 의미와 명분이 있는 고난의 삶이기에 우리는 충분히 이겨내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 의사인 빅터 프랭클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의미에의 의지(willing to meaning)'라 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자신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자신의 가족에게 가해질 고난이 줄어들 것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큰 고난이 오면 올수록 자신의 가족들이 편안해 진다고 나름대로 자신의 고난에 의미를 부여하자 그 고난이 견디기 쉬워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 당하는 고난과 환난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믿음을 발휘하는 길이며 그 일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명분이 어디 있으며 그것보다 더 큼 인생의 의미가 어디 있겠습니까? 잘 참으시고 잘 견디십시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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