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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신령과 진리의 예배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7. 9.

 

 

신령과 진리의 예배

 

(김성수 목사)

 

 

(요 4:20-24)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진정한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를 얻기 위해 우물가로 한 걸음에 달려오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반드시 사마리아로 가셔야만했다는 구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이미 창세전에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배웠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네 남편을 데려 오라’는 주님의 질문을 통해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할 그들의 목마름을 이 세상의 엉뚱한 것들로 해갈하려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일이 찾아가셔서 그들의 목마름을 당신의 피로 해갈을 해 주신다는 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상실한 모든 인간들은 목이 마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을 의존하여 살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떠나 버린 그 빈자리는 늘 목마름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목마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목마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모두 눈이 멀고 귀가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알지도 못하고 찾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 세상의 것들로 그 목마름을 채우려 노력을 합니다. 그 하나님이 빠져 버린 목마름이 엉뚱한 방향으로 변이를 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돈, 명예, 이성(異性), 술, 마약, 도박, 취미, 운동, 우상, 인기, 철학’ 이런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로 자신들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일생을 허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서 다섯 명의 남편과 한 명의 동거남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타락한 인간들의 잘못된 해갈 방법을 하나의 예(例)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이 본문을 읽으면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들에게 목마름이라는 것을 남겨 두셨을까’였습니다. 여러분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에게 목마름이 남아 있을까요? 저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목마름이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목말라 하고 계신다는 증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49:14-15) “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호 11:8)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패역 한 이스라엘을 향해 긍휼과 은혜와 사랑을 쏟아 부으시고 싶으셔서 그들을 향해 얼마나 목 말라하고 계신지 너무나 절절하게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출 20:3-5)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여기에서 ‘질투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히브리어 ’카나‘인데 그 단어를 70인 역에서는 ’젤로스‘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 그 ’젤로스‘라는 단어는 ’열심‘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우리가 전에 공부했던 요한복음 2장에 그 단어가 나옵니다.

 

(요 2:17)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열심을 부리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을 해야 맞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질투라는 것은 어떤 비교 대상이 있을 때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대상이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바알입니까? 아세라인가요? 진짜 그런 신들이 있습니까? 없지요? 우상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질투를 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과 긍휼을 부으시고 싶으셔서 우리를 향해 열심을 부리시는 것‘이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목말라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이 마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하나 하나님께로 돌아 올 때 우리 하나님의 갈증은 해갈이 되는 것이고 그리로 돌아갈 때 비로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갈증도 해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엉뚱하게도 이 세상의 것들로 그 갈증의 해갈을 변이 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갈망 중에서 아주 악한 갈망의 변이가 바로 그릇된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내가 목이 마르니 물 좀 주겠느냐?’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생수의 이야기’로 생수의 이야기에서 ‘남편의 이야기’로 그 남편의 이야기에서 ‘예배의 이야기’로 이야기가 전개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개인의 잘못된 해갈의 변이에서 전 인류의 해갈의 변이로 이야기가 전개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조금 이해가 안 가실 텐데 끝까지 한 번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목이 마르다’라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목마름의 정체를 드러내시고 당신께서 그 목마름으로 죽으시고 우리에게 해갈을 선물하실 것이라는 주님의 의지를 교회들에게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약속하시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해갈 방법이 크게 잘 못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심으로 그 여인의 잘못된 해갈 방법을 폭로하시는 장면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들의 잘못된 해갈 방법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 잘못된 해갈 방법이 어떻게 인류 전체에게 구체적으로 편만하게 퍼져 있는지가 오늘 본문의 예배 이야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미리 언급했듯이 인간들의 잘못된 갈망 중에서 아주 악한 갈망의 변이가 바로 그릇된 예배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배‘라고 하면 기독교의 형식적 예배의식만을 떠올립니다.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다 예배를 하며 삽니다. 예배는 ‘worth + ship' 내가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의 삶의 중심에 올려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인들도 예배를 합니다. 그들은 그 예배를 예불이라고 부르지요. 이슬람교도들도 알라를 예배합니다. 하루에 다섯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메카를 향해 절을 하는 그들의 모습은 가히 우리 기독교인들을 부끄럽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이슬람교도들의 예배의 한 모습입니다.

 

힌두 교인들도 그들의 신을 예배합니다.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예배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가장 가치 있는 자리에 올려놓고 자신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종교들도 결국에는 자신을 예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인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전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어떤 힘 있는 존재의 도움을 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들이 섬기는 것은 그들이 부르는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각기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며 각기 다른 예배의 형식을 통해 그들의 신에게 예배를 하지만 결국 그들의 공통된 목적은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한 ‘자기 유익’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목마름은 그렇게 여러 모양의 ‘예배’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타락한 인간의 대표자격으로 등장하는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로 묘사되는지 아세요? 타락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유익과 자랑을 위해 자기 자신이나 우상에게 예배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자들의 예배의 목적도 ‘자신의 노력과 열심을 통한 절대자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자기 유익’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모든 것을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출 20:4)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 32:1)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우상이라는 것의 전제가 뭡니까? '자기를 위하여‘만들어 낸 것은 모두 우상입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위해 무엇인가에게 예배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상 숭배를 ‘탐심’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골 3:5)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러니까 자신의 유익을 위해 절대자의 힘을 이용하려 하는 모든 사람들의 행위는 우상에게 예배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원래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가장 가치 있는 자리에 올려드리고 그분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의뢰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께 찬양하는 자로, 즉 예배하는 자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게 우리 인간의 창조목적입니다. 하나님은 그 올바른 예배자의 자리로 당신의 백성들을 이끄시기 위해 인간의 타락을 허락하시고 그들에게 타락한 자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겪게 하시고 그들을 은혜로 구원해 내시는 ‘역사’라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들에게 그러한 경험을 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진정한 예배자의 자리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메시아를 약속하시고서 왜 4,000년이라는 긴 시간을 끄셨는지 아세요? 하나님은 그 긴 시간들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들의 죄악상을 역사 속에서 폭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자신들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의 허망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과학, 문명, 학문, 종교 그 어떤 것도 인간들의 목마름을 완전히 해갈할 수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인간들은 율법을 받고도 그 율법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행복할 수 있는 방법만 안다면 자신들의 힘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사는 방법을 제시해 주면 우리가 한번 해 보겠노라고 대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율법을 주십니다. 율법은 인간들을 구원하기는커녕 그들의 죄인 됨을 낱낱이 드러내는 저승사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본질을 보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크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며 도저히 그 크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설 수 없는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죽이셨다는 사실 앞에 까무러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복음을 깨달은 자들이고 그들을 진정한 예배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모여 사는 곳을 천국이라고 부르는 것이고요. 그러면 이 땅에서 우리 성도들이 지향해야 하는 진정한 예배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올바른 예배와 그른 예배의 모습을 최초로 설명해 주신 곳이 창세기 4장입니다.

 

(창 3:22-24 4:7)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 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 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구절을 곡해하시는 분들이 하나님은 정성이 담긴 피 있는 제물을 원하시기 때문에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신 것이라고 설명을 하시는데 이 부분은 제물의 종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는 둘 다 감사제입니다. 히브리어로 ’민하‘라고 하지요. 그 감사제는 양을 드려도 되고 곡식을 드려도 되는 그런 제사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적어도 제물에 관한 문제제기는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예배에 대해 정의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창세기 3장 말미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흙을 경작하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그 흙을 묘사하는 형용사가 ‘근본 된’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경작해야 할 땅은 흙은 흙인데 아담의 근본이 된 흙이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흙을 경작하라고 하신 이유가 ‘너는 하나님이 아니라 흙에서 근본 된 자라는 것을 직시하며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그 죄를 회개하라’는 것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이야기 바로 뒤에 이어지는 것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왜 제가 3장 말미와 4장의 이야기를 붙여서 읽었는지 아시겠어요?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서 흙을 경작하게 된 일과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서 아벨은 아담이 흙을 경작하며 자신의 본질을 직시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던 일을 회개하며 살았던 것처럼 살았기에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열납 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열납하신 아벨의 제사를 그냥 ’제사’라고 하지 않고 ’아벨과 그의 제사‘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이 드리는 제물이나 아벨의 제사 형식이 훌륭했기에 그의 제사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 위에 올라앉아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으로 살려하는 죄인의 삶은 잘못된 것이라는 정확한 인식 아래 드렸진 제사이기에 아벨의 제사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인간은 그 절대 상위의 존재 아래에서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분을 즐기는 참 예배였던 것이고 가인의 제사는 형식과 제물은 동일하게 드려졌지만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자신의 유익을 목적으로 했던 가짜 예배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죽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신을 이용하여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반드시 때려죽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인이 아벨을 때려죽이는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된 예배라는 것은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분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겠노라고 나선 자들의 모든 행위가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신의 유익과 자랑과 만족을 위해 드리는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해갈의 변이를 지적하시는 남편의 이야기 다음에 예배의 이야기를 이어서 붙여 놓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주님과 그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예배가 어떻게 인간 갈망의 악한 변이 일 수 있는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 4:20)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여기서 이 여인이 말한 이 산은 그리심 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 유대 사람들이 자신들을 짐승 취급하면서 성전의 접근을 막자 자기들 나름대로 그리심 산에다가 성전을 짓고 그 곳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그리심 산에 있는 성전이야말로 진짜 성전이라고 우겼습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12장에서 하나님은 한 장소에서만 예배를 받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신 12:10-11) 10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 1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이렇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전은 한 곳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과 남 유대 사람들은 서로 자기네 성전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곳이라고 우겼던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네 그리심 산이 진짜 하나님이 지정하신 예배의 장소라고 우기게 된 배경을 보겠습니다.

 

(창 12:6-8) “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사마리아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 땅인 세겜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것을 근거로 자기네 땅의 제단이 참 제단이라고 우겼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아버지 격인 야곱도 세겜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것을 증거로 내어놓기도 했습니다.

 

(창 33:18-20)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19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 백 개로 사고 20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그리고 이스라엘이 여리고가 무너진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 치른 첫 번째 전쟁인 아이 성에서의 전쟁에서 이긴 뒤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곳도 사마리아의 에발 산이었습니다.

 

(수 8:30-33) “30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31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철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 32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 대로함이라”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점령하고 가나안에서 처음 제사를 드린 곳이 바로 자기네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심 산 옆의 에발 산이고 예루살렘에 지어진 성전은 그로부터 500년 후인 솔로몬 때이므로 자기네 제단이 맞다고 우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모리아 산도 바로 그리심 산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북 이스라엘이었던 사마리아에 지어진 제단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사마리아 땅에 지어진 제단의 계보를 일관성 있게 연계하여 기록함으로 그 제단은 우상 숭배의 표본이었음을 밝힙니다. 북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거슬러 자신들의 땅에 성전을 지은 것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처음 있었던 일이 아니라 그 전에도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왕상 12:25-32) “25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26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하고 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31 저가 또 산당 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32 팔월 곧 그 달 십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은 솔로몬이 성전을 짓느라 세금을 많이 거두고 사람들을 동원하는 것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만을 부추겨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뺀 나머지 열 지파를 규합하여 BC931년에 북 이스라엘을 세웁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남 유대의 예루살렘으로 드나드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겨서 북 이스라엘 땅인 벧엘과 단에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고 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이지요? 바로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고 했던 이스라엘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던 그리심 산의 제단은 시내 산의 금송아지와 벧엘과 단의 금송아지와 같은 줄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심 산의 예배는 우상 숭배의 줄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산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심 산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리심 산이 틀리고 예루살렘의 시온 산이 맞다’라고 대답을 해 주셔야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라고 대답을 해 주시지요?

 

(요 4:21)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주님은 그리심 산도 아니고 시온 산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물론 예루살렘에서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여 주신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는 진정한 제물이시며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깨닫고 그 은혜를 추구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 행위를 의지해서 ‘자기 의’만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만을 위한 다윗 왕국을 재건해 주실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예배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해 ‘누가 이 성전 문 좀 닫아다오’라고 말씀을 하신 것은 유대인들의 예배가 잘못된 예배였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부분입니다.

 

지금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대답을 통해 구약의 제사 자체를 폐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신약의 예배라는 것은 장소나 방법에 의해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요 4:23-24)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여기서 신령과 진정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단어는 ‘프뉴마티 카이 알레떼이아’입니다. ‘프뉴마’는 ‘성령’이라는 뜻이고 ‘알레떼이아’라는 단어는 ‘진리, 진실, 실체, 본질’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우리 개역 성경은 ‘알레떼이아’라는 단어를 ‘진정‘으로 번역을 하는 바람에 많은 분들이 예배는 신령하게 그리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드려야 한다는 권고쯤으로 이 구절을 곡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은 예배에 대한 진지한 태도나 마음가짐에 관해 권고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먼저 ‘진정‘이라고 번역이 된 ’알레떼이아‘가 무슨 뜻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 ‘알레떼이아’라는 단어는 헬라어 문헌에서 ‘실체와 본질’이라는 뜻으로 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그림자나 상징이나 예표와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러한 뜻으로 쓰입니다.

 

(요 1:9)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6:32)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15:1)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그리고 또 다른 여러 곳에서 ‘참 선지자, 참 왕, 참 생명수’등에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알레떼이아’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이 땅의 것으로 예표가 되었던 모형과 상징과 그림자의 실체와 본질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이제 구약의 예표적 예배가 사라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쓰여 진 단어인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제사의 모습을 잠깐 머릿속에 떠올려 보세요. 제사장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을 제단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 속죄를 원하는 죄인의 머리와 그 제물의 몸에 양손을 얹고 죄인의 죄를 그 제물에게 전가시키는 의식을 행합니다. 그리고 제물이 죽습니다. 그렇게 하여 죄인의 죄가 속해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고 하늘과 땅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요 제사장으로 서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모형으로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여인 앞에 그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여인에게 ‘너희는 이제 그림자나 모형이 아닌 실체로 예배를 드려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히 9:23-25)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이제 우리의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를 들고 성소나 지성소 정도가 아닌 참 하늘로 들어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영적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땅 위에서의 육 적 현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자신이 지성소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는 늘 제사, 즉 예배가 드려져야 합니다. 영적으로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자들이 지성소가 되어 버린 자기 자신 속에서 하늘의 예배의 실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양 예수가 하나님께 드려졌듯이 성도의 삶 속에서 예수의 성품이, 순결한 삶이 하나님 앞에 제물로 올라갑니다. 이제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속에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올려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알레떼이아’ ‘진정으로’ ‘실체로’예배를 한다는 것은 이제 실체이신 예수를 제물로 바치는 예배를 해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물은 우리가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실체이신 예수를 제물로 바치는 예배를 해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 말은 예수님께서 제물로 바쳐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으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자다운 삶을 ‘예수를’ ‘예수의 성품을’ ‘순종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제물로 올려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삶은 죽기까지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 삶은 바로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삶이며 계명을 지키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계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자들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제물이 되는 삶을 내 놓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로 바쳐짐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된 성도들은 반드시 그 예수의 삶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가 성전이 되어 자신의 삶을 예배의 삶으로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릴 수 있는 자들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미리 나타난 것입니다.

 

(요 2:19-21)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전이 된 우리의 실존이 예수 안에서 미리 보여 졌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셨습니다. 그 성전이신 예수께서 어떤 제사를 드리셨나요?

 

(빌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배였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그 삶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전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바로 그러한 예배의 삶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라고 권고를 하심으로 ’지금까지는 너희가 예배의 모형과 그림자를 통해 예배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면 이제 그 실체인 내가 너희의 제물이 되고 제사장이 되어 제사를 다 드렸으니 너희는 그 실체인 십자가를 근거로 예배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배는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의 시온 산 같은 장소 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를 제물로 드린 자로서 예수의 삶을 내어놓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우리가 드려야 할 그 신령과 진정의 예배에 대해 잘 정의를 해 놓았습니다.

 

(롬 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렇게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지성소가 되어 매일 매일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일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교회가 탄생을 하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가 되어 오늘날까지 복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된 교회가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흩어지지요? 이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인 성전이 된 성도들은 성전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성전인 자기로부터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뿜어내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은 오직 성령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령과 진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자들은 성령에 의해 그들의 삶이 전체가 예배 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주일마다 모여서 드리는 공 예배의 개념도 많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마치 구약의 제사 때처럼 시간과 공간에 얽매여서 너무 형식화되어 버린 예배 의식에 빠져 있는 면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 시간과 교회 건물만 빠져나가면 완전히 세상 사람과 방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건 그림자요 모형으로 주어졌던 구약 시대의 제사를 드리던 자들과 똑같은 삶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예수로, 믿음으로, 복음으로, 말씀으로, 내 진심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실체가 오시지 않았을 때는 이 땅의 것들을 수단으로 방법으로 이용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물도 있어야 했고 감정을 자극하는 음악도 있어야 했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엄숙함도 있어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이었습니다. 엄청난 수의 찬양대와 연주자들 그리고 금과 은과 보석과 대리석으로 꾸민 엄숙한 성전의 외양 이러한 모든 것들은 단지 모형이요 그림자였기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실체가 오셔서 우리 안에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이라는 것이 생겼고 그 믿음에 의해 우리는 이 땅의 것들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감격스럽고 인위적인 엄숙함과 경건함을 만들어 내지 않아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솟구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감격의 찬양과 교제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자리가 예배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예배는 실체가 오시지 않았을 때 이 땅의 것으로 그 실체를 설명하기 위해 쓰여 졌던 방법과 수단들이 그대로 쓰여 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기 위해 지나치게 치장을 한 성가대라든지 밴드들을 동원합니다. 사람들이 심심하지 않도록 영화관 수준의 멀티미디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연극도 가미합니다. 목사의 설교도 짧고 재미있고 신선해야 합니다. 예배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예배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늘 그 예배 시간에 자신이 뭔가를 느껴야 직성이 풀립니다. 자기를 감동시키는 데 실패한 예배는 예배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예배는 인간의 감정과 인간의 만족에 의해 판단되어지는 가짜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는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여 인간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 성령을 받은 자들이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높이는 자리여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인간들의 감정과 기분을 맞춰주는 시간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진짜 성령을 받은 성령과 실체에 의한 예배를 드리게 된 성도들은 자기 기분이 조금 언짢다고, 몸이 조금 피곤하다고, 부부 싸움을 했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분과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배는 성령에 의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대상, 예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예배에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헌금? 봉사? 제가 예전에 어렸을 때 매주 거르지 않고 들었던 기도가 목사님의 헌금 기도 중에 나오는 ‘빈손으로 나오지 않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빈손으로 온 자라도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다음에는 빈손으로 오지 않게 하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빈손으로 나온 사람들이 참 듣기 거북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출 23:15) “15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출 34:20) “20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 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 할지며 빈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그러니까 예배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 무엇을 가져 와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져오라는 것이지요? 예배에는 반드시 대속 제물을 가져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대속 제물에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속 제물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로 이미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준비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좋은 그림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창 22:7-8) “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 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이렇게 하나님을 알현하는 예배의 준비물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에 근거한 그 하나님의 배려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의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의뢰하는 마음으로 서는 것입니다. 그게 성령 받은 자들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제물에 의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은혜의 복음 아래 선 사람들은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하나님을 자랑하고 감사의 찬양을 올리게 되는 것이고 이제는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들이기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남을 밟는 삶이 아니라 자기를 희생해서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예배의 삶인 것입니다.

 

(히 13:15-16)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예배의 근거)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보세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미의 제사는 선을 행하는 것과 서로 나누어주는 행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는 형식이나 방법의 차원이 아니라 한 인격과의 만남이고 그 인격의 드러남인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주님께서 구원은 장소나 형식이 아닌 ‘유대인에게서 난다‘라고 ’인격‘을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연대적 역사적 관점에서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언약 체결과 성취의 순서를 유대인에서 출발하여 이방인에게로 전해지는 방식으로 채택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언약의 성취는 유대인에게 먼저 주어지고 그 유대인들에게서 이방인들에게로 전파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인 사도들이 전부 유대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서 나온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먼저 편만 하게 전파가 되고 그 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에게 다시 들어가는 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 하실 때에도 유대인들에게 먼저 가라고 하신 것이고 혈루 병을 앓는 여인네에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줄 수 없다는 다소 잔인한 말씀까지 하시면서 구원의 연대적 역사적 진행 순서에 입각한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제시된 가장 보편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이 말씀은 주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번째 해석은 게할더스 보스를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이 지지하는 해석인데 지금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있는 유대인은 주님 한 분뿐이시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유대인들인 제자들은 모두 양식을 구하러 갔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희가 장소나 시간이나 방법을 예배의 조건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구원은 그러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믿는 것이다‘라는 의미에서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라는 단어도 ’단수‘로 썼다는 것이지요.

 

둘 다 아주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둘 중에 어떤 해석을 택하든 간에 중요한 것은 예배는 형식과 방법과 장소의 문제가 아닌 인격의 문제라는 것이며 그 예배의 근거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고 우리는 그 예배의 자리에 은혜를 근거해서 서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떠한 것을 준비하여 예배의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아니 오늘 하루 예배의 삶을 사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예배의 삶은 무엇에 근거한 삶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여러분을 예배하는 자로 만드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그 은혜를 입은 자로서 매일 매일의 삶을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 분의 계명을 열심히 지켜내는 예배의 삶으로 만들어 내십시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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