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성전 파괴
(김성수 목사)
(요 2:12-22) “12 이 일이 있은 뒤에, 예수께서는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내려가셔서, 거기에 며칠 동안 머물러 계셨다. 13 유대 사람의 유월절이 가까워져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14 그는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16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7 제자들은 3)'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시 69:9) 18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4)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기적(그리스어 세메이온)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20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 21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오늘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내용을 가리켜 예수님의 성전 정화, 혹은 성전 청소, 성전 청결 사건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고 성경조차도 이 문단의 소제목을 ‘예수님의 성전정화’라고 붙이고 있기 때문에 제가 ‘성전 정화’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저는 그 제목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정화’나 ‘청결’ ‘청소’라는 말은 깨끗이 소제해서 다시 쓰겠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문단에 소제목을 붙인다면 저는 ‘예수님의 성전 소란, 혹은 성전 파괴’라고 붙이겠습니다. 왜 그런지는 이 강해가 끝나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강해에서 ‘성전정화’라는 단어를 ‘성전 소란’ 혹은 ‘성전 파괴’라는 말로 바꾸어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예수님의 성전 파괴 사건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주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 바로 뒤에 붙어 있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완성하실 것인지에 관해 전해 들었습니다. 성경은 그 혼인 잔치 사건 이전인 1장 말미에서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이라 불린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의 땅은 인간의 간사한 꾀나 지혜나 노력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늘을 여시고, 감히 그 곳에 범접할 수 없었던 자들을 불러올리시는 가를, 첫 번째 표적인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있었던 사건을 필두로 설명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 성전 파괴의 사건도 죄인들에게 닫혔던 하늘이 열리게 되는 ‘복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이 성전 파괴의 사건이 서두에 등장하지만 다른 공관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마지막 주간에 일어난 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파괴 사건이 두 번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 요한복음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 후 시각을 가지고 썼기 때문에 설명의 편의 상 나중의 사건을 앞으로 끌어다가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전자의 주장이 옳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20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그 성전이 46년 동안 지어지고 있다고 말을 하지요? 그 헤롯 성전은 헤롯이 유대민족들에게 호의를 사기 위해 BC20 년에 재건을 시작해서 AD63년 알비누스 총독 때 완공 된 성전입니다. 그리고 AD70년에 로마의 타이터스에 의해 완전히 파괴가 되지요. 그렇다면 그 성전이 재건되기 시작한지 46년 째 되는 해는 AD26 년이라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BC3년이나 4년경에 태어나셨으니까 (헤롯이 죽은 해가 BC3년) AD26년에 주님의 나이는 31살입니다. 그러니까 이 요한복음의 성전 파괴 사건은 예수 님 공생애 말기의 일이 아니라 예수 님 공생애 초기의 일이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소란케 하신 사건은 공생애 초기에 한 번, 그리고 공생애 말미에 한 번 이렇게 두 번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한번이든 두 번이든 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마 만큼 복음서가 이 예수님의 성전 파괴사건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가나의 혼인잔치는 비어버린 돌 항아리가 상징하는 것처럼 형식주의에 빠져버린 생명력 없는 유대교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완성되는 참된 혼인 잔치가 극명하게 대조되는 사건이었습니다. 형식주의에 빠져 버린 유대교는 마치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 집과 같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 잔치를 기쁨이 가득한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회복시키시기 위해 주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된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 의해 완성이 된다고 하는 은혜의 복음이 그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에 담겨있는 메시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예수님께서 성전을 소란케 하신 사건도 동일한 내용인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요한복음 2장부터 12장까지의 표적의 책 부분은 ‘표적-오해-강해’의 순서로 기록이 되어 있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성전 파괴의 사건과 3장의 니고데모 사건, 그리고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모두 가나의 혼인잔치를 오해하고 있는 자들에게 그 진의를 친절하고 자세하게 강해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관점에서 이 성전 파괴의 이야기를 풀어보자고요.
유대인들은 닛산월, 그러니까 일반 달력으로 4월에, 일주일간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당시 어린양의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름으로 죽음이 넘어가 버렸던 그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 어린양이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예표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의 제사 제물로 계속 예표가 되었고 그 제사 제물이 바쳐지는 곳이 성막이요, 성전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속죄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주님의 피에 의해 주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행하는 종교행위와 제사와 제물과 율법이 그들의 죄를 속하는 것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오해에 대한 강해로 이 성전 소란의 사건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 성전 소란의 사건을 머릿속에 그림으로 그려보세요. 그 유대인들의 유월절과 유월절 어린양으로 바쳐지는 제물과 그 제물이 바쳐지는 곳인 성전과 진짜 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한 번에 만나는 것이 바로 이 성전 파괴의 사건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모형과 실체가 함께 만나 모형이 파괴되고 실체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사건이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들은 매년 3번 절기 때마다 의무적으로 예루살렘 순례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 것은 선민 이스라엘의 명문화 된 규례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이스라엘 장정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 개종한 사람들과 아직 개종은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이방인들도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에 모여든 장정들 숫자만 13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여자와 아이들 노인들까지 합치면 거의 백만에 가까운 인파가 예루살렘에 모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밖에다 천막을 치고 일주일 동안 유숙을 했다고 합니다. 유월절에는 그 13만 명의 순례자들이 25만 마리의 양을 잡아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때 잡혀 죽게 될 양들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문이 ‘양 문’이었습니다. 우리가 5장에서 공부하겠지만 베데스다 연못이 ‘양문 곁’에 있는 연못이었지요. 그 양문이 바로 제물로 잡혀 죽을 양들이 성안으로 들어오던 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 온 그 순례 객들은 성전에 들어갈 때에 ‘속전(贖錢)’이라 불리는 성전 세를 내야 했습니다. 성전 세는 유대화폐로 반 세겔이었는데 반 세겔은 당시 노동자 이틀 치 임금에 해당하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뿐 아니라 식민지 유대 땅에 사는 유대인들도 모두 로마의 화폐나 헬라의 화폐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로마나 헬라의 화폐에는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성전에서는 그 돈을 받지 않았고 성전 세는 오직 ‘세겔’로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지키러 온 사람들은 모두 의무적으로 자신들의 돈을 ‘세겔’로 바꿔야 했습니다. 그래서 절기 때가 되면 성전 마당과 부근 감람 산 일대에 환전상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환전상들을 관장하는 기관이 바로 산헤드린 공의 회였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의회는 절기 때마다 환전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반 세겔을 바꿔 주는데 반 세겔의 50%를 수수료로 받았다고 하니까 상상이 가지요?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순례를 온 유대교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 때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순례를 오는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 집에서 실한 가축을 끌고 와도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살이 빠지고 흠도 나고 해서 불합격 판정을 받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성전 부근 감람 산 일대에 네 곳의 가축 시장이 있었고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까지 가축을 파는 가축상들로 붐볐다고 합니다. 그 가축상들을 주관하는 사람이 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관장하는 가축 시장의 제물이 아니면 수시로 불합격 판정을 내리는 바람에 멀리서 오는 사람들이 아예 집에서 가축을 가져올 생각을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대 제사장의 무리들은 거기서도 엄청난 재물을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성경이 그러한 성전을 등장시키며 웅변적으로 역설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 하에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성전을 이윤 추구의 장소로 만들어 버린 죄인들을 총체적으로 상징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바로 그 현장에 참 제물이신 주님이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그들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모형이 물러가고 실체가 들어서는 순간인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의 관청이 바로 그 성전 마당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 소란을 모를 리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항의를 했습니다. 본문 18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사람은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밖에 없다. 네가 메시아가 맞다 면 우리가 놀랄만한 표적을 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표적을 한 번 보여 보아라’ 라고 대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대단한 기적을 일으키며 등장할 것이라는 것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정말 예수님이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그렇게 요구한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본문 18절의 ‘유대인들이 대답하여‘는 헬라어 ’아페크리떼산‘과 ’에이폰‘이라는 두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 두 동사는 어떤 요구나 항변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관용적 표현으로 ‘대들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이 정말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무례하게 대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똑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19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라는 구절이 있지요? 거기서 쓰인 단어가 똑같이 ’아페크리떼산‘과 ’에이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강력하게 대드신 것입니다. 그 불꽃 튀는 살벌한 현장이 상상이 가십니까?
오직 자기들의 이윤추구만을 목적으로 한, 형식뿐인 종교 행위에 대해 질책하시는 주님의 모습과 주님의 그 지적을 못마땅해 하며 그 분을 죽이려고 이를 악무는 그 현장의 모습 속에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비단 저만의 과민반응일까요?
주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들으시고는 그들에게 외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19절에서 쓰인 ‘성전’이라는 단어는 ‘나오스’입니다. 그 단어는 14절에 나오는 ‘성전’ ‘히에론’과 다른 단어입니다. 14절에 쓰인 ‘성전‘’히에론‘은 성전 전체의 외형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성전‘하면 ’성전과 성전 뜰, 그리고 그 부근의 감람산 일대까지‘를 포함해서 ’성전‘이라 불렀습니다. 그 때 쓰이는 단어가 ’히에론‘입니다. 반면에 19절의 ‘성전’ ‘나오스’는 거룩한 성전 건물 자체만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요한 계시록 2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전서 3장에서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들’을 가리킬 때 ‘나오스’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건물로서의 성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21절의 요한의 부연 설명처럼 성전이신 자신의 몸을 ‘헐라’고 하신 것입니다. 거기서 ‘헐라’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뤼사테’라는 단어인데 ‘파괴하다’라는 뜻의 명령형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너희가 나를 파괴하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거기서 쓰인 ‘일으키리라’
‘에게로’는 ‘다시 살리다‘라는 뜻의 미래 직설법 능동태 동사입니다.’스스로 다시 살아나리라‘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너희가 나를 파괴하면 내가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표적을 보여 달라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나를 파괴하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이와 흡사 한 상황을 마태복음에서도 보았습니다.
(마 12:38-40)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 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쓰인 단어와 표현 방법만 다르지 똑같은 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도 주님은 이 땅에 기적을 일으키러 오신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죄인들에게 닫힌 하늘을 열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으키신 모든 표적들은 전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결론지어지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매한 죄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이일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시는 날까지 유대인들의 조롱을 받으십니다.
(막 15:29-30)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 십자가의 자리가 바로 죄인들에 의해 성전이 되신 주님이 헐리는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은 자신들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헐리는 주님을 조롱했던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지금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키시는 사건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유익만을 챙기려하는 유대교로 대표된 죄인들의 행태 자체를 파괴하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전의 파괴라는 모형을 통해 그 더럽고 형식적인 성전이 되셔서 죽으셔야 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으로 가서 그 곳에 기록되어 있는 또 다른 성전 파괴의 이야기를 공부하면 더욱 더 확실해 집니다.
(막 11:12-25) “12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16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더라 20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제가 지금 요한복음의 성전 파괴의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마가복음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그 성전 파괴의 이야기 앞뒤로 붙어 있는 무화과나무의 저주까지 함께 인용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 문학의 특징인 샌드위치 구조 속에서 성전 파괴를 설명해 드리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의 문학 기법 중에 하나인 샌드위치 기법이라는 것은 중요한 가운데 것을 설명하기 위해 양쪽에 빵을 대듯이 부연 설명을 다는 문학 기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전 파괴의 양쪽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은 성전 파괴와 무화과나무의 저주가 같은 내용을 다른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화과나무의 저주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성전 파괴 사건을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는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올라가시던 중에 잎 파리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십니다. 주님은 마침 시장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무화과나무 앞에 가셔서 무화과열매를 찾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무화과열매는 우리나라 사람들로 따지자면 감자와 고구마 같은 부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화과를 식량으로 말려서도 먹고 날로도 먹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화과나무에는 잎 파리만 무성했지 열매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내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셔서 말라비틀어지게 만드십니다.
재미있는 것은 성경이 ‘그때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화과의 철이 아닌데 무화과나무 앞에 가서 무화과를 찾는 사람도 이상하거니와 열매가 없다고 그 나무를 저주해서 말라죽게 만드는 사람은 성질이 얼마나 못된 사람입니까? 예전에 어떤 분이 이 부분을 설교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지셨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설명하시는 걸 들었는데 그건 정말 어리석은 해석입니다.
예수님은 그 때가 무화과의 때가 아닌 것을 아셨습니다. 정상적인 유대인 중에 유월절이 가까운 닛산월에 무화과열매를 찾는 바보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그 무화과나무 앞으로 가셨는가? 주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그들이 알고 있는 구약의 말씀들을 상기시키시며 은혜의 ‘복음‘을 다시 한 번 그림으로 명료하게 그려서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 것이 은혜를 설명하는 복음의 이야기가 되는지 보자고요.
(호 9:10) “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며 그들을 무화과나무 첫 열매로 보셨다고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무화과나무 열매와 같은 열매를 원하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복음서에 나오는 포도원 지기의 비유에서처럼 하나님께 드릴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심히 율법을 지켰고 열심히 제사를 지냈고 최선을 다해 선행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을 가리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열매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시장해 하시면서 구하셨던 그 열매가 단순히 이스라엘이 행하는 종교 행위나 율법의 준수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뿌리고 가는 짐승의 피나 구수하게 태우고 가는 짐승의 기름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행위나 율법의 준수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예배의 삶을 살아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영어로 예배가 worship입니다. 그 단어는 ‘가치 있다‘라는 ’worth'와 상태를 나타내는 ‘ship'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자기가 앉아있던 ’가치 있는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가치 있는 그 자리‘에 앉혀드리고 그 분께 순종하며 의뢰하는 삶 전체를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삶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성품인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갈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렇게 되면 우리가 지난주일 설교 때 만들었던 등식에 또 하나가 첨가가 되지요? 제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리기를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삶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과 거룩과 하나 됨과 사랑과 계명을 지키는 삶이 정확하게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거기에 하나 더 보태지는 것이 바로 예배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어떤 지정된 시간과 지정된 공간에 모여 잠깐 드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삶 전체가 바로 예배여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보면 ‘너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몸’이 육신을 갖고 살아내야 하는 우리의 삶을 말하는 것이고 산제사가 바로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을 ‘예배’ ‘worship'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것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형식 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모든 것들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죄인들의 삶을 총칭해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로 비유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저주받아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무화과나무의 저주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죽이시지 않고 자신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되셔서 저주받아 죽으시고 (십자가) 정작 죽어야 할 열매 없는 나무들을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나무들로 만드실 것임을 암시하시는 것이 바로 무화과나무의 저주 사건입니다.
(신 21:22-23) “22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렇게 주님께서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되셔서 죽으심으로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지 마가복음 11장 21절로 가보겠습니다.
(막 11:21-24)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열매를 구하시던 참열매이신, 시장하신 주님은 아사(餓死)해서 죽으시고 저주받아 죽어야 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들이 이제 무엇이든지 구하면 풍성하게 받게 되는 열매 맺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실 물이 없어 목말라 죽어야 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퍼 주시고 자신은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시며 목마른 자가 되셔서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고후 8:9)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 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바로 그 은혜의 복음이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놓여 있던 율법과 그 아래에서 자행되던 죄들을 바다로 던져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23절을 보시면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라는 구절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 산’이라는 것이 어떤 산입니까? 주님께서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에 하시는 말씀이니까 그 산은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모두 내 쫓으신 후에 그 일이 바로 자신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되셔서 저주받아 죽으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저주의 율법과 죄악들이 바다로 빠지게 될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과 죄인들을 가로막고 있던 산이 없어지고 죄인들이 의인들이 되어 열린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 바로 성전 파괴의 사건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은 형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옛 성전이 되셔서 파괴가 되시고 다시 새 성전으로 부활하셔서 이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짜 열매를 맺는 참 성전이 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전 파괴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전 청결 사건’을 ‘성전 파괴의 사건’ 이라고 명명해서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일련의 사역 속에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고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저주받아 죽어 마땅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 성전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성도들도 성전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고전 3:16)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데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 성전 안에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장사나 하는 장사치들처럼 계속 죄만 짓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무상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주님이 참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 앞에 항복한 자들이 ‘하나님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합니다’라는 고백이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의 성전 됨은 오직 은혜로, 선물로만 주어지기에 그 참 성전은 너희들의 노력이나 행위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기도하는 집’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막 11:17)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그러니까 이제 새롭게 지어진 성전들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 앞에 납작 부복하고 그토록 엄청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터져 나오는 감사로 예배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의 삶은 하나님을 목표하게 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 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제사를 드리러 성전을 찾은 유대인들이 한 짓은 뭡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자신들의 목적이 아니라 모두다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풍성한 나뭇잎 파리 같은 종교 행위만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라는 정작 맺어야 할 열매는 맺지 못하고 엉뚱한 ‘일’들만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잎사귀만 풍성한 저주받을 무화과나무인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드릴까요?
(대하 34:1-4) “1 요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팔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 일년을 치리하며 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3 오히려 어렸을 때 곧 위에 있은지 팔년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고 그 십 이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케 하여 그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매 4 무리가 왕의 앞에서 바알들의 단을 훼파하였으며 왕이 또 그 단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들을 찍고 또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거기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요시야 왕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히스기야 왕과 더불어 성전을 청결하게 하고 종교 개혁을 단행해서 모든 우상들을 찍어버린 보기 드문 훌륭한 왕입니다. 그는 성전을 수리하다가 성전 안에서 여호와의 율법 책을 발견하고 그 책을 읽습니다. 요시야 왕은 더욱 깊이 회개를 하고 더 깊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심을 하고 여호와의 유월절도 잘 지킵니다. 얼마나 잘 지켰는가가 성경에 나오지요?
(대하 35:18-19) “18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열왕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거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 19 요시야의 위에 있은지 십팔 년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그 때에 예레미야를 시켜서 그 성전 문을 막아서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게 하십니다.
(렘 7:1-4) “1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지금 열심히 종교 개혁을 하고 우상을 찍어 없애 버리고 유월절도 역사에 다시없을 만큼 잘 지키고 있는 시점에서 하나님이 그 성전을 가리켜 ‘거짓말’이라고 일갈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지가 그 아래 구절로 이어집니다.
(렘 7:5-11)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8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 도다 9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고,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지 않고,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지 않고 하는 겉만 번드르르한 종교 행위를 하는 자들을 ‘거짓말하는 자, 도적‘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반드시 다른 이들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의 무화과나무의 저주 사건 뒤에 뜬금없이 용서의 권고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막 11:25)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정확하게 원문에 맞게 다시 번역을 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너희를 용서하실 때에(동시에)너희도 다른 이의 혐의를 용서 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용서의 삶, 긍휼의 삶, 이해의 삶이 아닌 자기들의 욕심이나 탐욕을 어떤 우상에게 투사시켜 놓고 그 것을 하나님이라 부르며 그 욕심과 탐심을 만족시켜 달라고 아우성치는 자들은 아무리 열심히 종교 행위를 한다고 해도 모두 절도요 강도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 종교 행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나의 주인 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 것은 주인이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만족스럽게 받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시키는 것에 전심을 다해 순종하겠다는 의지의 결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인이 하라는 것을 할 것이며 주인이 하지 말라는 것은 안하고 주인이 기뻐하시는 것을 나의 기쁨으로 삼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이며 종교 행위 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인생의 중심에 내가 앉아서 나의 유익만을 구하기 위해 종교 행위를 하는 자들은 아직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딤전 6:3-5)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거보세요.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타락한 자들은 경건조차도 이익의 재료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 중에는 혹시 그런 분 안 계신가요? ‘내가 예배당에 나가 줌으로, 내가 봉사 해 줌으로, 내가 헌금해 줌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더 좋은 것으로 보상해 주실 거야‘라고 기대하시는 분 안 계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도적이고, 강도이며, 이곳은 강도의 굴혈(掘穴)일 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왜 예배당에 나오십니까? 정말 하나님이 좋아서 그 분의 은혜가 감사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 하나님 나라는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 것인지를 배우시기 위해 나오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지만 그 하나님이 신앙의 중심이 아니라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힘을 빌리기 위해 나오시는 것입니까?
(출 32:1)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성경은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부르는 신을 모두 우상이라고 합니다. 신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그들이 섬긴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풍요와 다산을 줄 힘이 센 어떤 존재를 좇은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어도 좋고 바알이라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생각하고, 기대하고 있던 자신들 마음속의 하나님을 겉으로 표현해 낸 것이 바로 금송아지 였던 것입니다. 그 금송아지는 그들이 애굽에서 섬기던 아피스의 암소와 하돌의 황소였으며 그들이 앞으로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지방의 풍요와 다산의 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마음속의 하나님은 풍요와 다산을 주는 그런 존재였지 자신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가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다’라고 부른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산당과 우상들을 제거할 때 눈에 띠었던 것이 ‘느후스단’이라는 것입니다. 그 것은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놋 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히스기야 왕 때까지 그 놋 뱀을 함께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 놋 뱀을 섬겼을까요? 그 놋 뱀은 병을 낫게 해 주었던 신통한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병을 낫게 해주는 놋 뱀도 놓지 못했던 것입니다. 인간들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앞에 굴복하고 그 은혜 앞에 감읍하여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윤추구에 도움이 될 어떤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종교 행위를 하는 자들이 바로 타락한 인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은 당장 찍어 버리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굴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 제사하고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하나님은 뒤집어엎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고기 필요 없으니까 그런 것은 너희나 먹고 너희는 제발 내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렘 7:21-23) 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22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급기야 그러한 이스라엘의 성전 문을 닫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말 1:6)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그래서 하나님은 그 잎사귀만 풍성한 성전에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서 그 성전을 닫으시고 새 성전으로 재창조하실 것을 천명하시고 구약을 닫으시는 것입니다.
(말 3:1)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그리고 오늘 본문에 그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차 없이 그 잎사귀만 풍성한 옛 성전을 파괴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좋아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배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습니까? 오죽하면 사도 바울이 ‘너희의 섬기는 신은 배‘라고 까지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여러분, 기독교가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라는 본질을 놓치게 되면 그 때부터 형식에 치우치게 되고 형식에 매달리게 되고 형식만을 강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온갖 프로그램으로 치장을 해야 하고 자신들이 잘 가고 있다는 것을 고작 외형적인 성장으로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세를 늘리는 데 몰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이름으로 자아성취에 몰두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앙은 자아성취가 아니라 자기 부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읍하여 자기가 부인될 때 우리에게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의 본질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세상의 힘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 나 하나님 없이 살게 해 주세요’라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힘은 오직 하나님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힘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을 자기의 인생에서 몰아내고 싶어 안들을 부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공한 목회자, 세계에서 몇 번째로 큰 교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전……. ‘
이게 무슨 망발입니까? 신앙은 outside in이 아니라 inside out인 것입니다. 내가 나를 불 태워 내 이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내가 밖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옛 성전의 삶은 주님 다시 오시는 날 반드시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부터라도 하나님의 은혜 앞에 부복하여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며 사는 새 성전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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