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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7. 1.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

 

(김성수 목사)

 

 

(요 2:23-3:13) “23.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에, 많은 사람이 예수께서 나타내 보이신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의지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사람을 다 알고 계셨으므로, 25. 사람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증언이 필요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속마음까지 다 알고 계셨다. 3:1.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의회원이었다. 2.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7.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희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8.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9. 니고데모가 예수께 묻기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니, 1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1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하는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오늘은 그 유명한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함께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이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세 편에서 네 편 정도로 나누어서 설교를 해야 하는 분량입니다. 제가 사족(蛇足)을 다 잘라버리고 여러분이 꼭 알아두셔야 할 내용만을 추려서 오늘 하루에 모두 설명해 드릴 테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원래 장 절(章節)이 나누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장절은 나중에 사용의 편이를 위해 후대 사람들이 나누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때로 그 성경의 장과 절을 무시하고 읽어 내려가야 성경의 내용 분석이 좀 더 용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한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 파괴 사건과 니고데모의 이야기 중간에 ‘예수님이 많은 표적을 일으키셨고 사람들이 주님을 믿었는데,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올바른 믿음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이 부분이 사실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2장 말미의 세 구절이 앞뒤의 에피소드들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가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장 말미에서 주님께서 ‘인자 위로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신 후에 2장부터 12장까지의 표적의 책(book of signs)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일곱 가지의 표적이 모두 ’죄인들에게 굳게 닫혔던 하늘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열리게 되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지난주에 확인을 했습니다.

 

그 일곱 가지 표적 중 제일 처음 등장하는 것이 주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형식주의로 흘러버린 죽은 종교로서의 유대교로는 진정한 잔치의 기쁨을 맛 볼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혼인 잔치의 기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회복이 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가나의 혼인 잔치가 담고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에피소드가 예수님의 성전 파괴 사건입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온갖 율례(律例)를 행하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여전히 자신들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잎 파리만 무성한 종교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진노’를 그 사건 속에서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러한 자들을 위해 자신이 그 더럽고 추한 성전이 되셔서 파괴되시고 그들을 새로운 성전으로 재창조해 주시는 은혜의 복음이 그 성전 파괴 사건에 담겨있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것이 2장 말미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을 예수님께서 인정치 않으시더라’는 내용인 것입니다.

 

본문 23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유월절 내내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유월절에’라고 번역이 된 단어 ‘엔토파스카’는 ‘유월절 절기 동안에’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유월절 절기 동안 내내 예루살렘에 계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유월절 절기 동안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적들은 모두 ‘표적’ ‘sign'이었습니다. 요한은 일부러 ’세메이온‘이라는 단어를 써서 그 기적들이 어떤 것을 지시하는 ’표적‘이었음을 밝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표적이 가리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표적의 신기함에 매혹되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한 마디로 견(見)월(月)망(望)지(指)한 것이지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사람의 의도는 달을 바라보라는 것인데 달에는 관심이 없고 손가락만을 바라보는 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적을 보고 주님을 믿노라하는 자들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인정치 않으셨습니다. 24절을 보세요.

 

(요 2:24) “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여기서 ‘의탁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에피스튜엔’입니다. 이 단어는 ‘피스튜오’ ‘믿다’라는 단어의 미완료 능동태입니다. 이 단어와 똑같은 단어가 23절에 나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를 믿었다’의 ‘믿다’가 ‘에피스튜산’이라는 ‘피스튜오’의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그 시제는 일시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같은 단어를 시제를 달리하여 사용해서 무언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 두 단어의 대조를 통해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겠다고 좇아 온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충동적으로 예수를 좇는 것이지 절대 예수님이 믿을만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예수를 믿음으로 여러분의 인생에 기적 같은 유익들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는 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신실한 연극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바리새인들 버금가게 종교 행위를 근사하게 할 수도 있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수도 있습니다. 감쪽같이 주위 사람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마치 ‘내가 예수를 믿나보다’라는 착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만은 절대 속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음이 확인이 되면 그 즉시 주님을 떠날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24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신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서 ‘알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 ‘기노스코’는 감각적인 지각을 의미하는 ‘아이스다네스다이’나 사물에 대한 견해를 의미하는 ‘도케인’과는 달리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단어는 예수님의 전지성(全知性)을 나타내는 단어인 것입니다. 주님은 절대 안 속으신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보고 주님을 좇아온 자들의 목적은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믿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표적들을 통하여 자기들에게 기적 같은 유익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님을 좇아 왔다는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그 주님의 전지성이 더 자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25절을 보세요.

 

(요 2:25) “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여기서 주님이 아신다는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 미완료 시제입니다. 거기서 미완료 시제가 쓰였다는 것은 주님은 사람 속에 있는 현재, 과거, 미래를 모두 속속들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믿겠다고 무리 지어 몰려왔을 때 그들의 믿음을 인정치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그들이 ’믿었다’라고 썼는가? 요한복음에는 ‘믿는다‘는 말이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그 하나는 1장 12절의 말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에서 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 믿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기적을 본다든지 감정의 자극을 받아서 일시적으로 그 대상의 가르침을 받고 그를 따르는 행위도 ‘믿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당시 고대 사람들이 ‘믿는다’는 말을 쓸 때 ‘누구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라는 의미로 주로 썼기 때문에 이런 혼용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후 문맥을 잘 살피지 않으면 곡해를 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 제자들이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예수님이 일으키신 표적을 보고 ‘그를 믿었다’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22절을 보시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예수님을 믿었다고 나옵니다.

 

(요 2:22)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뿐만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이 ‘주는 그리스도 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수없이 믿음을 고백했었음에도 십자가 앞에서 모두 도망을 쳤던 것을 보십시오. 그러니까 성령에 의해 거듭나지 않고는 절대 주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표적을 보고 주님을 믿겠다고 많은 무리가 따라나섰으니 주님께서 그 가증한 모습들을 보고 마음이 어떠셨겠습니까? 주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생각까지도 속속들이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들에 대해 누구의 설명도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25절 말미에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living bible이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고 계셨다. 그러므로 아무도 주님께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를 설명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잘 해 놓았지요?

 

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어떤 연극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런데 슬픈 것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국 가요 중에 ‘타타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로 시작되는 노래지요. 저는 가끔 그 노래 가사를 이렇게 바꾸어 부릅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나를 알겠느냐?’

 

정말 저는 저라는 인간에 대해 너무나 모릅니다. 때로는 지나친 기대를 했다가 왕창 실망하기 일쑤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가 의외의 개가를 올리기도 하고 그야 말로 천방지축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 만날 날을 더 학수고대하는 지도 모릅니다. 성경이 분명 그 때는 내가 나에 대해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라고 했으니까요.

 

(고전 13:12)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 하실지 모르지만 실상은 아닐지도 모르는 것이고 여러분 중에 지금 자신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계신 분들이 실상은 잘 못 생각하고 계신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근사하게 연극을 해도 주님은 우리의 속까지도 아십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갈릴리의 어부 시몬에게서 ‘반석(베드로)’를 보실 수 있었던 것이고 냉소적이지만 진지한 나다나엘에게서 ‘참 이스라엘 사람’을 보신 것이고, 뽕나무 위에 올라가 당신을 바라보는 삭개오에게서 새 삶에 대한 열망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막달라 마리아의 몸 짓 속에서 당신을 향한 한없는 사랑을 보셨고 주님과 함께 죽겠다고 장담을 했던 베드로에게서 그의 배신을 보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는 대로 보시지 않습니다. 귀에 들리는 대로 듣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을 보시고 가장 내밀한 영혼의 신음소리를 들으십니다. 우리는 늘 우리가 주님 앞에 발가벗겨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은 절대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은 자들에게 속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2장이 마무리가 되는 것이고 이제 3장에서 그렇게 겉만 번드르르한 가짜 믿음을 가진 사람의 대표로 니고데모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탄탄한 논리를 가지고 전개되어지고 있는 책입니다. 2장 말미를 잘 보시면 계속해서 ‘사람’이라는 단어가 반복이 됩니다. 23절에 ‘많은 사람‘ 24절에 ’모든 사람‘ 25절에 ’사람 속‘ ,이 사람이라는 단어 ’안뜨로포스‘가 3장 1절에서 그대로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요 3:1) "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이 부분을 장과 절을 배제하고 보게 되면 요한복음에 지금 예수님이 인정치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비어있는 여섯 개의 돌 항아리,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한 종교행위를 하는 자들, 그러면서 주를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는 자들, 다른 말로 ‘표적을 보기 원하고 표적을 추구하는 타락한 전 인류의 대표’인 ‘사람’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2절에 나옵니다.

 

(요 3:2)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가 왜 온 거예요? 표적을 보고 온 것입니다. 게다가 본문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에 관한 묘사를 잘 보시면 니고데모는 세상이 힘이라고 여기고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제가 전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엣센파와 열심당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렸지요? 바리새파 사람들은 유대 경건주의 운동인 하시딤에서 이루어진 파당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심을 다해 율법을 연구하고 도덕적인 깨끗한 삶을 생명을 걸고 추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스모니안 왕조가 비윤리적 행태를 보이면 즉시 목숨을 걸고 저항을 하기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예로 하스모니안 왕조 중에 아리스토 불르스1세가 죽고 그의 아내 살로메가 자기 남편의 첫 번째 동생 얀네우스와 결혼을 했을 때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녀의 비도덕적인 행위에 엄청난 비난을 퍼부어서 살로메가 800명의 바리새인들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을 존경해 마지않았습니다. 예수 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전국에 6,000명 정도가 ‘형제 단’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종교 행위는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바울이 자기를 소개하면서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엄격하게 종교 행위를 했는지 알려줍니다.

 

(빌 3:5-6)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613개의 조항으로 세분해서 그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던지 스스로를 가리켜 ‘흠이 없는 자’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렇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부자였습니다. 요세푸스의 고대사나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책을 보면 예수님이 오시기 100년 전부터 성전이 파괴되는 AD70년에 이르기까지 니고데모 가문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역사서에 등장할 정도의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몰약과 침향 백근을 가지고 와서 주님을 장사한 것도 니고데모였습니다. 당시 몰약과 침향은 아주 값비싼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백근이나 사 가지고 와서 주님을 장사지낼 정도면 그는 아주 부유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관원이었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 ‘관원’이라고 번역이 된 ‘아르콘’이라는 단어는 ‘통치자’ ‘주’ ‘왕’이라는 의미의 단어인데 당시에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지칭할 때 주로 쓰던 단어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 지도자 71명이 모여 입법, 사법, 행정의 권세를 휘 두르던 당시의 국회였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교육을 많이 받은 학자였습니다. 성경의 진술대로 니고데모는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백성들을 정복한 자’라는 헬라어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대부분 히브리 이름이나 아람어로 된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유대 문화 뿐 아니라 헬라 문화까지 함께 접촉을 했던 소수의 상류층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히브리 이름과 헬라이름, 두 가지를 다 붙여 주었고 당시 전 세계 학문의 최고봉이라 여겨졌던 헬라 교육을 철저하게 시켰습니다. 게다가 니고데모는 자신이 히브리 이름으로 보다 헬라 이름으로 알려지기를 더 좋아했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헬라 교육을 충분히 받았던 헬레니스트였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니고데모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늙은 바리새인이었던 그가 이제 나이 30의 젊은 목수에게 ‘랍비’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랍비는 랍비 학교에서 고등 교육을 받아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랍비 학교는커녕 정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가난한 목수이셨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나이도 어린 예수님께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쯤 되면 니고데모는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임에 틀림없지요? 부와 명예와 지성과 고매한 인격까지 그는 사람이 갖출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입니다. 요즘 말로 고지에 올라선 사람입니다. 어떤 몰지각한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 ‘복 받은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그가 어두움에 속한 사람이라고 진술을 합니다.

 

(요 3:2)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 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한복음은 니고데모가 ‘밤에’왔다는 것을 일부러 밝힙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단어 하나하나를 메시지 화해서 사용을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언어들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밤’ ‘어두움’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 있는 자들이나, 그러한 상태, 혹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함이나 악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을 가리켜 ‘밤’ ‘어두움’이라고 표기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 다락방을 나섰을 때 그 때가 ‘밤’이었다고 일부러 ‘밤’ ‘누크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요 13:30)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요한복음을 보면 요한이 그의 글에서 ‘빛’이신 예수님과 ‘어두움’인 세상을 자주 대조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 1:5)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요 8:12)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러니까 요한이 니고데모가 ‘밤’에 왔다고 일부러 ‘누크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세상이 ‘빛’이라고 여기고 있는 ‘세상 적 힘’을 가진 것이 결코 ‘빛’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표적을 보았고 세상의 힘을 모두 소유한 니고데모의 영적 상태가 ‘밤’이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그런 것들이 인간의 구원과 전혀 상관관계나 비례관계에 있지 않으며 기여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제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세상 적인 힘을 소유한 사람들이 모두 다 ‘밤’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구원의 증거나 복 받은 자의 증거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까지도 구원의 증거나 조건이 될 수 없음이 니고데모의 이야기에 나옵니다. 니고데모의 말을 잘 들어보세요. 다시 본문 2절로 갑니다.

 

(요 3:2)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 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 대답은 틀린 답이 아니었습니다.

 

(요 9:33)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요 8:29)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주님은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고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그 지식을 근거로 한 행동까지도 신앙이 아닐 수 있다는 엄청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에 따라 겸손하게 그 앞에 나왔습니다. 신기한 표적들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한 니고데모에게 ‘다른 것은 다 그만 두고 너 거듭났니?’라고 물으십니다.

 

(요 3:3)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주님은 조건이나 환경, 선한 행위, 미덕 그 어떠한 것에도 관심이 없으십니다. 오직 하나 ‘성령으로 거듭났느냐 아니냐’에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니고데모는 당황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니고데모는 선민으로 자처하던 유대인이었고 할례를 받았던 사람이고 종교행위를 열심히 했으며 율법을 목숨 걸고 지켰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가 신주처럼 붙들고 있던 할례, 제사, 율법, 선한 행위 이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 정말 거듭나셨습니까? 아니면 종교 행위나 성경 지식, 신앙적 열심 같은 것으로 열심히 불안을 메우고 계십니까?

 

그런데 그 거듭남은 자신의 노력이나 애씀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셔야 거듭날 수 있습니다. ‘거듭나다’ ‘겐네떼 아노뗀’은 수동태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거기서 쓰인 ‘아노뗀’은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첫 번째로 ‘다시’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위로부터’ ‘하늘로부터’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노뗀‘이라는 단어 안에 ’구원의 기원과 본질’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재창조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에는 ‘다시’라는 단어가 둘 있습니다. 하나가 오늘 본문에 쓰인 ‘아노뗀’이고 다른 하나가 ‘파린’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각기 쓰이는 용법이 다릅니다. ‘파린’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반복을 가리키는 단어이지만 ‘거듭남’의 ‘아노뗀’은 반드시 같은 원천과 형식을 가진 ‘반복’을 가리킬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해서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관중들이 소리칩니다. ‘당신의 연주를 다시 듣고 싶어요’ 만일 그 말에 ‘파린’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면 그 피아니스트는 아무런 형식의 곡을 연주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 말에 ‘아노뗀’이라는 단어가 쓰였다면 그 피아니스트는 콘체르토나 재즈가 아닌 소나타를 연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겐네떼 아노뗀’ ‘거듭남’은 인간이 처음 났을 때와 똑같은 형식과 원천으로 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처음에 어떻게 났습니까? 흙이 ‘나 좀 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라고 부탁을 해서 사람이 된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마음대로 만드신 것입니다.

 

(창 2:7)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생기‘’르와흐‘를 불어넣으심으로 탄생이 되지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르와흐‘는 ’성령‘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거듭남’ ‘겐네떼 아노뗀’도 똑같이 성령에 의해 창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주님께서 거듭남의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물과 성령‘인 것입니다.

 

(요 3:5)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다루어 드리겠습니다. 계속 해서 주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보시면 주님께서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 한다’라고 말씀하시자 니고데모가 주님께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고 되묻습니다.

 

그 4절의 말씀을 두고 혹자들이 ‘니고데모가 거듭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라고 단정 지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당시 고대시대에는 ‘거듭남’이라는 개념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통념이었습니다. 의외지요? 예를 들어 이방인들이 유대교를 믿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인이 되는 의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선민의식은 ‘민족’이라는 울타리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 민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기 위해서는 기도와 희생제사 그리고 세례 의식을 통해서 개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유대인들은 그 이방인을 가리켜 ‘거듭난 자’ ‘새롭게 출생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유대인들은 새롭게 유대인으로 태어난 이방인들에게 갓난아기가 먹는 우유를 먹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랍비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새로 태어난 사람이 원래의 자기 어머니나 누이와 결혼을 해도 되느냐에 대한 토론까지 있었다고 하니 니고데모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남’을 단순히 모태에 들어가서 다시 나와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거듭남의 개념은 유대 민족뿐만 아니라 헬라의 밀교에도 똑같이 통용되던 개념이었습니다. 그들도 입교식을 치르고 자기들의 밀교에 입교한 사람에게 ‘이는 영원한 중생이 되었다’라고 선포해 주었습니다. 밀교에 입교하기 이전의 사람과 밀교에 입교한 이후의 사람은 완전히 다른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고대 사회에서 ‘거듭남’이라는 개념은 이미 널리 통용이 되던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면 니고데모가 주님께 한 말은 무슨 의미인가?

 

니고데모는 그러한 가짜 거듭남을 무수히 많이 보아왔던 사람입니다. 새로 태어났다는 사람들이 이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을 무수히 보아왔기에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묻는 것입니다. ‘사람이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늙은 사람이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일인 듯싶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다는 것입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장의 강세는 ‘어떻게’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거듭남을 보아왔는데 그게 모두 가짜였습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거듭나는 방법에 대해 알려 주십시오.’ 니고데모는 간절한 염원을 담고 예수님께 거듭남의 방법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거듭남의 방법으로 제시하신 것이 ‘물과 성령’입니다. 이것은 히브리 문학의 반복 기법입니다. 히브리 문학에서는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를 반복함으로 해서 자기가 전하고자하는 의미를 강조하는 문학 기법이 있습니다. ‘휘다토스 카이 프뉴마토스’ ‘물과 성령’은 ‘kai’라는 동격 접속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 즉 성령‘이라고 번역을 하면 이해가 더 쉽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거듭남의 방법으로 제시하신 ’물 즉 성령‘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요 7:37-39)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여기 보시면 ‘물’이 바로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지요? 그러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한마디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물과 성령이라는 말을 반복했을까요? 여기서는 단순히 어떤 언어의 강조만을 위해 그렇게 단어를 나열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밤(흑암), 물(수면), 성령(하나님의 신) 하면 떠오르는 곳이 있지요? 창세기 1장 창조 기사가 떠오르지 않으세요? 흑암과 하나님의 신, 수면, 그러니까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바로 물과 성령으로 창조될 하나님 백성의 재창조, ‘거듭남‘을 힌트하고 있다는 것이 또 한 번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물’은 ‘심판‘과 ‘생명’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습니다.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을 성경은 ‘세례’라고 부르지요? 저주의 물이 퍼부어져서 죄가 죽고 의인이 살아나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세례 아닙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물’을 가리켜 ‘세례’라고 정의를 하는 것입니다.

 

(벧전 3:21)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그리고 사도 바울도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은 사건’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애굽의 죄인들이 빠져 죽고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 올라오는 사건이 바로 홍해 사건 아닙니까? 이렇게 물, 곧 세례는 죄가 죽고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나는 심판과 구원의 사건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서 일어나게 될 구속의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죄인은 하나님의 선물인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아무리 선한 행위를 열심히 하고 아무리 열심을 부려 종교행위를 한다 해도 절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통해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배웠던 가나의 혼인잔치와 성전 파괴사건이 니고데모의 이야기에서 또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율법과 제사로 대표되는 잎사귀만 무성한 유대교의 형식에서 배태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양의 보혈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게 되는 것이라는 은혜의 복음이 또 한 번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이 바뀌게 되는 것이니까요. 계속해서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십니다.

 

(요 3:6-8)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여기서 육은 ‘자연적 생명’을 말하는 것이고 ‘영’은 ‘영적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연적 생명과 영적 생명은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라는 걸,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8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거듭난다는 것은 바람이 부는 것처럼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모르지만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듯이 거듭남의 흔적이 남는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왜 제가 그런 추론을 하는가 하면 이어지는 11절에서 주님께서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 한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바람을 예로 들어 이 땅에서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거듭남의 효력과 열매를 말씀하시는데 니고데모가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는 그 것을 보고 알 수 있는데 너희는 왜 모르느냐?’라고 11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내가 바람이라는 이 땅의 것을 예로 들어 가시적인 거듭남의 열매를 설명하는 데도 못 알아먹는 너희가 거듭남이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기원된 것이며, 언제 계획된 것이며, 어떠한 능력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인지에 관한 하늘의 것을 설명해 준들 너희가 알아듣겠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12절입니다.

 

(요 3:12)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이해가 가시지요? 왜냐하면 하늘의 그 어전 회의에 참석한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으시기 때문에 하늘의 것에 대해서는 예수님 밖에 아시는 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것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에게만 계시로 알려지게 되는 것이고요.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이 이렇게 마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요 3:13)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하늘에 올라간 자‘라고 번역이 된 ’아나베베켄 에이스 톤 우라논‘은 직역을 하면 ’하늘에 계신 자‘라는 뜻입니다. 시제가 완료형이니까 ’하늘에 계셨던 자‘라고 번역을 하면 되겠지요? 그러니까 13절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있었던 자가 없느니라’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계시를 받으셔서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거듭남이 어떻게 시작이 되었으며 어떠한 능력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는지를 잘 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라는 1인칭 복수형을 쓰십니다. 그 ‘우리’라는 무리 속에 바로 여러분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은 그 ‘우리’라는 단어 속에 ‘예수님을 비롯하여 거듭남을 통하여 이 땅에서 보여 지는 거듭남의 열매와 효력을 알아보고 하늘의 것 또한 계시로 받아 알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두 포함하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 님 당시에는 그 ‘우리’ 속에 포함된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 ‘우리’라는 단어 속에다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를 품고 계신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전체가 다 이 은혜의 복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약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던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남이라는 것은 아무리 똑똑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물과 성령이 부어지지 않으면 절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에스겔 36장이나 예레미아 31장 같은 곳에서는 단어까지 똑같은 단어를 쓰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비밀은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어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요 3:9-10)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면 우리는 그 걸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해 볼까요?

 

(겔 36:22-28)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 구절들이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이 되어 손수 이스라엘의 손을 끌고 갔는데도 이스라엘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마음을 새 마음으로 바꾸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게 되는 ‘거듭남’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에스겔서 37장에서는 그 거듭남이라는 것이 어떻게 주어지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그림으로 설명을 해 줍니다. 마른 뼈들이 ‘르와흐’가 들어가자 거대한 무리의 군대가 되는 ’바람’ ‘성령’ ‘생기’에 의한 새로운 탄생이 그림책처럼 그려져 있는 것이 에스겔서 37장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여러분은 이해하시지요? 어떻게 이해하시게 되었습니까?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요.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끝 부분으로 가면서 니고데모의 이야기가 두 번 더 나옵니다. 한 번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주님을 잡아 죽이려 할 때 그들을 막아서서 ‘유대에는 법이 없느냐?’라고 외쳤던 부분과 두 번째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서슬이 퍼런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찾아다가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주님을 장사지내는 장면입니다.

 

니고데모가 아니었으면 예수님의 시체는 당시 관습에 따라 쓰레기장에 버려졌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사형수의 시체를 가족이나 친지가 찾아가지 않으면 가차 없이 쓰레기장에 가져다 버렸습니다.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이 무서워서 아무도 예수님의 시체를 찾아가지 않을 때 니고데모가 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눈이 무서워서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어떻게 이렇게 담대하게 변했을까요?

 

(요 19:39-40) "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몰약과 침향은 사람이 죽었을 때 냄새를 방지하기 위해 시체와 함께 싸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들레헴의 구유에 나셨을 때 동방박사들이 가져온 예물 중에 몰약이 있었지요? 아기가 태어났는데 시체와 함께 싸는 것을 예물로 가져왔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이 땅에 죽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의 장례법에 따르면, 향 품을 준비한 사람이 그 향 품이 시체와 함께 싸일 때 함께 죽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주님과의 만남 이후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이제 밤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장이 ‘밤에 나아왔던’이라고 과거 시제를 쓰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빌라도도 두렵지 않았던 것이고 제사장들도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예수와 함께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계신가요? 그리고 무엇을 자랑하고 계신가요? 거듭나기 전의 니고데모가 자랑했던 것들을 자랑삼아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게 된 거듭난 니고데모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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