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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I) /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7. 3.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I)

 

(김성수 목사)

 

 

(엡 2:1-3)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사도 바울은 1장 전체를 통해서 복음의 진리를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1장10절의 이 에베소서 전체의 주제를 명시해 놓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상태에 있던 것을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만들어 놓으셨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10절이 뭡니까?

 

(엡 1:10)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것은 그 구원은 통일 될 필요가 있는 타락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하지요. 그런데 죄인들을 그 타락에서 살려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그 능력은 이런 능력입니다.

 

(엡 1:20-22)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생각나세요? 장시간 공부했잖아요? 이렇게 1장을 마치고 2장을 시작하는데 2장의 시작이 ‘kai’라는 접속사를 시작한다고 했지요? kai는 “또한”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런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2장은 1장 말미의 그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더욱 더 세밀하고 친절하게 부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굳이 에베소서의 구조를 나눈다고 한다면 저는 1장 20절부터 전개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설명에 2장을 붙이겠습니다. 저 같으면 장을 1장23절에서 끊지 않겠다는 것이죠.

 

사도는 에베소서를 쓰면서 그의 편지를 받아 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에게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모든 교회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받은 구원의 영광과 위대함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에베소 사람들은 이미 복음을 믿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1장에서 이미 “그들이 주 예수를 믿는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그들의 사랑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까지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고 그들 속에 기업의 보증을 가졌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그들의 이해의 눈이 열려지기를 기도합니다.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교회가 그 놀라운 구원의 크기와 위대성과 그 장엄함에 대해서 더 붙잡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여전히 시험에 빠지기 쉬우며 그들을 반대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여러 양태로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고 있기 때문에 사도는 특별히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에 관해서 명확히 알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우리가 꼭 그렇게 성경을 많이 공부해야 합니까?”

 

옛날에 한글도 모르던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예수 믿고 천국에 가셨는데 뭘 그렇게 매일 성경 읽고 공부하라고 야단이십니까?“ 사도가 왜 자꾸 교회에게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가라고, 하나님의 능력을 더 밝히 알아가라고 요구한다고 그랬지요? 힘겨운 세상과의 싸움에서 그 말씀으로 이기고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자라가라고 우리에게 성경을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교회를 위해 기도만 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도와 아울러 이렇게 차근차근 교회의 본질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것들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이해가 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일단 기도로 부탁을 드리고 그런 다음에는 1장20절부터 지식과 교훈, doctrine을 가져다 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능력이 어떻게 우리의 구원에 발휘가 되었는가를 20절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설명을 한 후에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집어넣어서 우리를 그 예수와 동일하게 죽이시고 부활시키시고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신, 복음을 2장 1절부터 자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1장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20번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사도는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풀고 있습니다. 역시 2장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그 일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당신들이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러한 복음을 더욱 더 밝히 알게 되기를 원 한다 ”고 기도를 한 후에 2장에서 “혹시 아직도 그렇게 밝히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내가 너희가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 역사하시기 전에 어떤 존재였는가?”를 다시 한 번 숙고하라고 2장 처음을 구원받기 전의 죄인들의 모습으로 여는 것입니다. 2장의 앞부분을 읽어보면 1절부터 4절까지 문장의 주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1절에는 주어도 동사도 없습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 “살리셨다”는 동사는 한국말로 번역을 할 때 5절에서 빌려다 쓴 것입니다. 2절과 3절도 관계 대명사가 이끄는 문장으로 연속됩니다. 그리고 4절에 가서야 “호 떼오스” “하나님”이라는 주어가 나옵니다. 그리고 5절에 가서야 그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셨고” “함께 앉히셨다”고 비로소 동사가 나옵니다. 이러한 문장의 흐름은 사도가 의도적으로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먼저 적나라하게 밝혀 상기시켜놓고 그 다음에 극적으로 “그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집어넣어 살려 내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의 논리는 우리가 이 전능한 능력이 우리를 붙잡기 전에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가를 인식하기 전에는 이 구원의 위대성에 대하여 올바른 개념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여전히 어떤 지경에 처해 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 그 엄청난 은혜를 더 깊게 체감하게 해 주려고 그러한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도 죄에 대한 성경적 교리에 명확하지 못하다면 구속에 관한 성경적 바른 개념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구속에 대해서 별로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죄에 대한 처절한 인식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자기가 어떻게 살아가게 되고 어떤 종말을 맞을 것인지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우리 구원의 크기를 측량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건져진 죄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는 그 구원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면 다른 방법을 쓸 수 없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내려오셔서 죽으실 수밖에 없었겠습니까? 우리가 이 죄라는 놈의 정체를 잘 인식하고 있어야 인류의 역사도 이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싸움과 경쟁과 다툼과 재난과 인류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이 죄의 교리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는 “인간은 타락하였고 무시무시한 죄가 들어와서 그들이 그 죄 가운데 있다”는 그 죄의 교리를 배제하고는 풀어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역사를 풉니다. “인간은 지금 진화되어져 가고 있는데 아직 완전한 단계까지 진화되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점진적으로 나아지고 있으니까 인간들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인간은 점차 선해지고, 어떤 경지에 오르게 되면 다툼이나 경쟁에서 해방되게 될 것이다. 정말 그럴까요? 인간성의 문제는 정말 시간의 문제입니까? 인간성의 포악함이 정말 시간의 문제이고 교육의 문제이고 지식의 문제입니까? 르네상스는 2차 대전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습니다. 왜 교육하고 훈련하는데 인간이 변하지 않았지요? 인간은 죄인으로 나서 죄 속에서 살다가 죽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은 “불순종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러한 상태가 된 것이라고 정확하게 이야기 합니다. 성경은 철학과 같이 관념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적입니다. “지금 네 모습을 똑똑히 봐라, 그리고 다른 곳에 핑계대지 말고 네 스스로 그것을 고쳐내라, 그것은 모두 네 것이다” “안 돼? 그럼 너에게는 도움이 필요하겠구나. 겸손하게 도움을 구해야 하는 게 바로 너의 실존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세상의 철학처럼 정적인 수면제나 진통제 해열제 같은 것으로 잠시 그 아픔을 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환부에 메스를 가하고 그 환부를 도려내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직시하게 하십니다. 자신의 죄를 직면하게 되면 인간은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이 바로 수술입니다. 그것을 “아냐, 너는 아직 미성숙해서 그래. 시간이 가고 교육을 받으면 더 나아질거야” 이렇게 자꾸 진통제를 주는 것이 세상 철학이고요.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네 가지 요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두 번째로 어째서 인간이 이런 상태에 빠졌는지를 설명하지요. 세 번째로 사도는 이 상태와 조건이 실제적으로 어떤 것을 가져왔는지 설명합니다. 네 번째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런 상태에 있는 인간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럼 먼저 첫 번째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의 상태를 어떻게 표현합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다” 그럽니다.

 

(엡 2:1-2)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죄라는 것“하마르티아”는 과녁을 벗어난 것을 의미하고 “허물” “파랍토마”는 ‘잘못된 발걸음(false step), 혹은 경계선을 넘다(Transgress, trespass)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죄와 허물’하면 인간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를 전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적극적인 죄, 소극적인 죄,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총 망라하여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주일 설교 때 설명을 해 드렸지요?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오게 되었고 그 사망을 향해 가는 모든 사람들을 “죽었다”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사망이 들어와서 인간은 육신 자체가 사망으로 향하는 메카니즘에 들어가 있습니다.

 

오래 전 한번은 특이한 연구를 한 한 과학자의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이 과학자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오래 살 수 있을까“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깊이 연구한 결과 사람들의 세포에 가장 중요한 것이 '산소'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죽어 가는 세포에 영양과 산소를 풍부하게 공급하여주었을 때 그 세포가 건강해지고 죽어 가는 세포조차 그 활동이 되살아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하여 산소에 대하여 더욱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과학자가 발견한 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산소는 매우 중요한 물질로서 세포에 활력을 주고 건강하게 해주고 생명을 불어넣는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지만 바로 그 '산소'가 사람들의 세포를 아주 느리게, 서서히 늙게 하는 물질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에게는 커다란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사람들은 산소 없이 살 수 없는데 바로 그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산소가 우리의 육체를 서서히 늙게 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인간들에게 죽음이 들어와 있으며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과학이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죽음의 메카니즘 안에 들어가 있는 자들을 “죽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지금 죽어 있다는 말은 아니고요. 오늘 본문에도 2절에 보시면 죽은 자들이 무엇을 합니까? 다시 읽어보세요.

 

(엡 2:2-3)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행하고 지내며 삽니다. 행했다(to walk)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가 정적이고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고 동적이고 적극적인 상태였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능동적으로 반항을 그러므로 죽은 자들이라는 것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세상을 살되 하나님과 관계없이 삶을 사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생명은 뭡니까?

 

(요 17:3)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생명과 영생을 홀로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면서 생명을 주십니다. 그 분만이 생명의 원천이시며 생명을 유지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생명을 이렇게 규정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것이요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는 것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붙여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산 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살아난 자가 아닌 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사도는 12절에서 더 명백하게 죽은 자들을 설명합니다.

 

(엡 2:12)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죽은 자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그리스도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하셨는데 그 언약과도 상관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안다”라는 것은 그냥 피상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안다” “기노스코”라는 것은 부부관계처럼 아주 깊숙이 나의 존재와 깊은 관계가 성립된 상태를 “안다”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관념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셨다는 것이 가슴 깊이 감격으로 느껴지시는가 말입니다. 성령에 의해 눈을 뜨게 된 사람들만이 그 영적 생명이 무엇인지를 감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롬 8:5-11)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렇게 살아난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고 사도는 로마서 6장10,11절에서 그들을 이렇게 정의 합니다.

 

(롬 6:10-11)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해 산 자가 된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우리가 죽었던 자였는데 하나님께서 살리셨다는 것을 서두에 놓음으로써 우리가 진정 어떠한 상태였는지를 인식시킵니다.

 

(엡 2:2)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영이라”

 

죄인들은 이 세상에서 누군가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존재의 지배인지 먼저 “이 세상 풍속을 좇고”라는 구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풍속이라고 번역된 “아이온”이라는 말은 원래 “세대” “시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번역을 하면 “너희가 이세상의 세대를 좇고” 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합니다.

 

(갈 1:4)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같은 단어입니다. 이 현 세대의 사고방식과 정신구조를 따라 사는 것을 성경은 경계하고 있습니다. 아니 따라 살 뿐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통제와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이 더 무섭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세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고방식, 정신 구조, 삶의 영위방식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없는 인생관이요, 하나님 없는 사고방식과 정신입니다. 다시 엡 2장12절을 보세요.

 

(엡 2:12)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렇게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은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통제와 지배를 받는 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12장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롬 12:2)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사고방식과 정신구조에 의해서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요일 2:14-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구체적으로 그렇게 악한 세대를 좇아 사는 사람들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갈 5:19-21)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러한 것들을 즐기면서 사는 사람들을 세상 풍속을 좇는 자들이라 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세상에 의해 완전하게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우선 외모 자체가 세상에 의해서 통제를 받습니다. 유행을 따라 옷을 입고 유행을 따라 머리를 하고 유행을 따라 얼굴을 고칩니다. 유행을 따라 말을 하고 유행을 따라 가재도구를 바꿉니다.

 

그 유행이라는 것이 뭡니까? 그것이 뭐 길래 사람들은 거기에 반항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니지요? 세상의 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생각, 세상의 행위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합니다. 그래서 포르노가 유행을 하면 아이들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인터넷으로 포르노를 봅니다. 스와핑이라는 것을 아세요? 부부가 서로 파트너를 바꿔서 잠을 잡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었나요? 그런데 요즘은 인터넷에 버젓이 광고까지 합니다. 세상이 ‘좋은 대학을 들어가야 대접을 받는다.’ 하면 무조건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세상에서 따돌림을 받습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가치를 좇아 , 세상이 시키는 대로 뺑뺑이를 돕니다. 뒤돌아 볼 틈도 없습니다. 계속 달려야 합니다. 그게 잘 사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예전에 KBS 의 ‘도전 지구 탐험‘이라는 프로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멕시코의 마사틀란이라는 곳에 가서 마야의 후예들이 하는 울라마 경기를 배우고 그들과 함께 열흘을 보내다 오는 미션을 받았습니다. 방송국 피디 한 명과 현지 코디네이터, 그리고 카메라 맨, 이렇게 넷이서 그 곳에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은 마사틀란이라는 멕시코의 마을에서도 두 시간 정도를 숲으로 들어가야 마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숲 속의 마을 끝에는 유리 같은 바다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그런 원시 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우리 도시인들이 일 년 삼백 육십오일 열심히 일해서 겨우 일 중일 휴가내서 가고 싶은 곳이 바로 그런 곳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문명에 물들지 않고 원시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은근히 비웃으면서 결국은 그들의 삶을 동경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일 년 365일 휴가입니다. 배고프면 바다에 뛰어 들어 창으로 고기를 잡아 구워 먹습니다. 아무 때나 나무 위에 올라가 바나나며 망고, 코코넛 같은 과일들을 따 먹습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경쟁이 필요 없기에 훈훈한 인정이 가득합니다. 그 같은 휴양지가 또 있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속고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해서 인류가 정작 이익을 본 게 뭡니까? 왜 자살은 점점 더 많아지는 것입니까? 옛날에는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은 사람은 있어도 자살을 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습니다. 옛날에는 에이즈다 뭐다 해서 지금처럼 희귀한 병으로 떼죽음을 당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인간이 실패했다고 하면 하나님이 옳다는 것이 됩니다. 죄인들은 그걸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고 있고 실패하고 있는데도 끊임없이 우리는 잘되고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사탄은 인간을 자신이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오히려 종교 같은 것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탄의 조종 하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식물의 잎사귀와 꽃은 태양을 향해 뻗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는 어둡고 습한 곳을 찾아 들어갑니다. 세상의 세대를 좇아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자들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나방이 밝은 빛이 닿으면 그 빛이 닿는 쪽 근육이 수축해서 자연스럽게 빛 쪽으로 몸이 움직여져 불에 타 죽듯이 세상의 원리 아래 놓여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악을 향해 몸을 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들 달려가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실 때는 그 달음박질을 스톱시키시는 것입니다. “사업이 망하고, 건강을 잃고, 사고를 당하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 잠깐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기가 좇던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보게 되고 인간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걸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세상에 대해서 반항을 못합니다. 그냥 지배를 받지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 의해서 지배와 통제를 받고 있고 그들의 모든 견해와 언어와 돈을 쓰는 방식과 그들이 욕구 하는 것과 가는 곳, 휴일을 즐기는 방법까지 완벽하게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그것이 하나의 원리가 되어 자연스럽게 죄인들을 끌고 갑니다. 2절을 다시 보시면

 

(엡 2:2)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영이라”

 

역사 하는 영에서 “영”이라는 말은 ‘프뉴마’인데 “영”이라는 뜻 외에 “숨, 원리”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어떤 원리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우연히 막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리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는데 그 원리는 역사하고 있는 원리입니다. “역사 한다”는 말의 헬라어인 “에네르게오”는 “능력 있다, 효과적으로 일하다, 활동적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 공중 권세 잡은 자는 힘과 능력과 에너지를 가지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조드 박사가 2차 대전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역사 하는 악의 원리가 없다면 이 전쟁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전쟁은 절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었으며 소극적으로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거기에는 역사 하는 마귀 적인 악한 세력이 있음을 그는 알 수 있었습니다.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 하는 어떤 원리가 있다는 것을 전쟁의 한 복판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 세상이 어느 세상인데 아직까지 마귀 타령이냐고” 핀잔을 줍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마귀가 없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쫓아내신 귀신들은 뭡니까? 예수님을 시험한 존재는 뭡니까?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동네 뒷산에서 귀신을 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귀신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심지어 귀신을 달래는 굿을 하기도 했습니다. 마귀는 어리숙한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으로 겁을 주어서 귀신에게 절을 하고 머리를 숙이게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과학이 발달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것으로 좀체 겁을 먹지 않습니다.

 

지금은 무엇으로 마귀가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까? 풍요와 번영과 자만심과 가능성으로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더 무섭습니다. 과학이 발달했다고 마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숨어 훨씬 무서운 전략 전술로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귀의 지배 아래 놓여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마귀가 흔드는 대로 이리저리 팔 다리를 움직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대적이 시퍼렇게 존재하고 있음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다가가서 서슴지 않고 시험을 했던 그 사탄, 구약의 이스라엘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가지고 놀았던 그 사탄이 우리를 지금 동일한 세력으로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십시오. 그는 지금 자기의 모든 힘과 권세와 능력과 그가 명령하는 모든 세력들을 가지고 또한 세상의 정신에 주입시킨 악한 원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믿는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우리를 지탱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 우리는 단 1초도 견딜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 강력한 사탄의 세력을 막아서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그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오늘 본문의 세 번째와 네 번째 본문은 다음 시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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