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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왕, 제사장, 선지자] / 그 거룩한 삼위일체의 삶이여!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7. 2.

 

 

[왕, 제사장, 선지자]

/ 그 거룩한 삼위일체의 삶이여!

 

(김성수 목사)

 

 

(창 4:16‐26) “16 가인은 주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 17 ○가인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그 때에, 가인은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를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하였다. 18 에녹은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다. 19 라멕은 두 아내와 함께 살았다.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이고, 또 한 아내의 이름은 씰라이다.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는데, 그는 장막을 치고 살면서, 집짐승을 치는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인데, 유발은 수금을 타고 퉁소를 부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22 또한 씰라는 두발가인이라는 아이를 낳았다. 그는 구리나 쇠를 가지고, 온갖 기구를 만드는 사람이다. 두발가인에게는 나아마라고 하는 누이가 있었다. 23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24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였다. 마침내, 그의 아내가 아들을 낳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가인에게 죽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나에게 허락하셨구나" 하였다. 그의 아내는 아이의 이름을 셋이라고 하였다. 26 셋도 아들을 낳고, 아이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하였다.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품고 있는 복음의 내용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가인과 아벨과 셋의 이야기는 단순히 형제간의 살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은 모두 다 살인자들이어서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 땅을 유리하다 사망으로 던져져야 하는데 무죄한 의인(nothingness, 아벨)이 죽음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을 하게 되는 복음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가인이 아벨을 고의적으로 때려죽인 사건으로부터 도피성으로 그리고 도피성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어떻게 일관성 있게 기술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도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고의적 살인자들이었던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이 준비하신 레위인 들의 도피성으로 피신을 시키셔서 우리를 우발적 살인자로 여겨 주신 것이며 친히 그 레위인 들의 도성인 도피성의 대 제사장이 죽으면 그 우발적 살인자들이 살인자의 죄명을 벗게 되는 법을 마련하심으로써 진정한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미리 예표 하신 것에 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대 제사장의 직분이 어떻게 아벨에게서부터 시작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어지게 되는지에 관해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오늘도 본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아벨은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인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이 땅에 오신 분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왕으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직분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왕의 직분을 우리 성도들에게도 주셨습니다. 따라서 성도인 아벨은 왕의 직분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에 살펴 본 것처럼 아벨은 선지자였습니다.

 

(마 23:34‐35) “34 그러므로 내가 예언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율법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너희는 그 가운데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못박고,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뒤쫓으며 박해할 것이다. 35 그리하여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죄 없이 흘린 모든 피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예수님도 선지자 이셨습니다.

 

(신 18:15) “15 주 너희의 하나님은 너희의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히 1:1‐2) “1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시켜서,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2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시켜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선지자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마지막 선지자였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구약 선지자의 마지막이었던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이 가리켰던 그 내용을 몸으로 삶으로 입으로 담아내신 온전한 선지자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벨은 제사장이었습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벨은 하나님께 양의 첫 새끼로 제물을 드렸고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기뻐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아벨은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제사장이셨지요?

 

(히 3:1)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제가 왜 굳이 여러분이 익히 다 아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직분을 다시 언급을 하는가 하면 하늘의 왕, 그리고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이라는 직분은 이 역사 속에서 정확하게 삼위일체의 직분이라는 것을 설명해 드리기 위함입니다. 이 삼위일체의 직분이라는 말은 제가 만들어 낸 말인데 제가 여러분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러한 표현을 썼는지 만 숙지하시면 됩니다. 왜 제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분을 삼위일체의 직분이라 했는고 하니 왕이신 예수께서 이 역사 속에서 그 하늘의 왕 노릇을 보여주고 가셨는데 그 삶은 선지자와 제사장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선지자로서 삶으로 입으로 하늘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과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선지하고 가셨고 자신이 선지 하신 그 하늘의 삶의 원리를 직접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제물로 드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삶이 바로 제사장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왕이 사는 하늘 왕의 삶의 원리는 이 땅에서 선지자요 제사장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분을 삼위일체의 직분이라 명명한 것입니다. 그 세 직분은 각기 다른 직분인 듯싶지만 결국은 하나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아벨의 삶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 은혜를 입은 하늘의 왕 노릇을 할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성도는 하늘의 왕 노릇을 하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양의 첫 새끼라는 가장 좋은 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장 좋은 제물이라는 것은 자기 존재의 확장을 말합니다. 그 말은 아벨이 자기의 가장 좋은 것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제사장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으로 하늘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선지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벨은 형이 자신을 때려죽일 때에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으면서까지 하나님 나라의 존재를 삶으로 증거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가인이 아벨을 정확하게 한 방에 죽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아벨이 자기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세상과 타협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는 이내 형에게 ‘형 내가 잘못했어, 형이 말하는 것처럼 이제 형이 요구하는 삶을 살게, 다시는 형을 질투 나게 하지 않을게’라고 타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벨은 그냥 가인에게 맞아 죽어 버렸습니다. 그게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다른 모든 문제에 있어서는 양보하고 져주고 인내해 주지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증거함에 있어서는 목숨까지도 초개처럼 여기는 삶이 바로 제사장이요 선지자의 삶인 것입니다. 보세요. 하늘의 왕 노릇을 할 첫 번째 천국 시민이 이 땅을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살다 갔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고 간 것입니다. 그게 아벨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삶이 단순히 아벨의 삶에 국한 된 것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벧전 2:9)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바실레이온 주격 형용사, 왕인 제사장들이요, 왕다운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바로 하늘의 왕 노릇 할 사람들이고 제사장들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선지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옳습니까? 하늘의 왕인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아벨의 삶이 우리의 삶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의 원리를 이 땅에서 삶으로 몸으로 구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선지자로서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죽여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다른 이들의 유익을 구하는 십자가의 삶을 가리켜 제사장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아벨에서부터 우리에게 요구되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삶을 그림으로 보여주시고 가신 것이고요.

 

‘하늘의 왕은 이 역사 속에서 반드시 선지자요 제사장의 삶을 살다가게 된다‘ 이해가 가시지요? 그러면 금방 이런 질문이 드시지요? ‘아니 예수를 믿는다는 게 그렇게 손해만 보다가 가는 삶이란 말인가?’ 어떠세요? 우리가 이 시점에서 손익 계산서를 정확하게 맞추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고요. 그렇게 이 땅에서 맞아 죽은 첫 번째 아벨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잃은 것이 무엇입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나라 백성인 아벨이 이 땅에서 세상 사람인 가인에게 맞아죽음으로써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지요? 하나님 나라 백성인 아벨이 하나님 나라에 꼭 가져가야 할 어떤 것을 잃게 되었습니까? 아벨이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젊은 나이에 맞아 죽음으로써 하나님 나라에서 긴요하게 쓸 수 있는 어떤 것을 놓쳐버렸습니까? 아닙니다. 아벨은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땅에서의 것들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늘의 것만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첫 번째로 맞아 죽은 아벨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잃어버린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가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처음으로 맞아 죽었더니 첫 번째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1호 천국 시민이 누구입니까? 아벨입니다. 아벨이 죽었을 때는 아담이 백 삼십 세도 안 되었을 때였으니까요.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이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낳았을 때가 일 백 삼 십 세라고 나오지요? 그러니까 아벨이 이 땅에서 세상에게 맞아죽은 제 일 호 천국 시민인 것입니다. 그러한 아벨의 삶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맞아죽는 것은 무언가를 잃는 손해를 보는 삶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상급인 영생을 얻는 수지맞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가인들에게 맞아 죽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간혹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 예수를 믿고 올바른 신앙 양심으로 살면서 이렇게 손해를 보아야 하나?’입니다. 그렇지요? 져 주고,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고, 인내해 주는 삶을 손해 보는 삶이라고들 생각합니다. 그건 아직까지도 이 땅의 것들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다 두고 갈 것입니다. 이 땅의 것은 하나님 나라에 하나도 못 가져갑니다. 우리의 목표지점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 땅에 쌓아 둘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늘에 보화를 쌓으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마 6:19‐21)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면 하늘에 자기 보물이 쌓이나요? 실제로 그렇게 믿고 열심히 헌금하고 구제 비 내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자로 살기 위해 이 땅에서 애를 쓰는 사람이 정말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만일 하늘나라에도 빈부귀천의 차이가 있다면 그 곳이 무슨 천국입니까? 그렇다면 하늘에 보물을 쌓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늘에 있는 반짝 반짝 빛나는 보물을 우리가 요한 계시록에서 보았습니다. 그 보물은 에덴동산에서도 잠깐 등장을 했었습니다. 하늘의 보물은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다는 것은 성도가 이 땅에서 진정한 하늘의 보물로 다듬어져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도가 이 땅에서 보물로 다듬어져 갈 수 있지요? 자기에게 주어진 이 땅의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청지기의 삶을 잘 살아내는 것입니다. 나의 것을 털어 가난하고 억압받고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로 보석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손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게 하늘에 보석을 쌓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벨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이 땅에서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아니 그 삶은 손해 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 노릇을 하게 될 성도들이 당연히 살아내야 할 비움의 삶이요, 성경은 그 삶을 선지자의 삶, 제사장의 삶이라 부른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의 삶이 어떠한 삶인지를 간파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용감하게 비움의 삶을 살다가 간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존경하는 부르스 라르손이라는 목사님의 책을 읽다가 참 인상 깊은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님과 장모님을 그리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 부부가 목회자로서 너무나 가난한 삶을 살고 있을 때 자신들을 이렇게 훌륭한 신앙인들로 키워주신 부모님들에게 선물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없는 살림에 모으고 모아서 장모님에게는 금목걸이를 선물해 드리고 당신의 어머님께는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화가의 그림을 사 드렸답니다. 그 후로 많은 세월이 흐르고 두 분 어머님께서는 다 돌아가셨을 때 부엌 테이블에 앉아 아내와 차를 마시면서 문득 아내의 목을 보니 수 십 년 전에 자기가 장모님께 사 드린 그 금목걸이가 걸려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실의 벽을 보니 자신이 그 당시 어머님께 사 드렸던 그림이 아주 비싼 그림이 되어 걸려 있었다지요? 그런데 그 동안 자신과 자기 아내를 위해서 소비했던 많은 것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께서 그 이야기 끝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나의 것을 비워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게 주는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렇게 내 것을 비워 남에게 준 것만이 진짜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공감하세요? 우리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소비한 것들은 다 사라지고 없어져 버리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 것을 비워 다른 이들을 섬겼을 때 그 것들이 바로 내게 남게 되는 진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삶의 신비인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 수도원에 있는 크리스토퍼 채프먼의 묘비에는 이러한 유명한 그의 유언이 쓰여 있습니다. ‘내가 죽음 앞에 서 보니 내가 평생토록 다른 이들에게 준 것은 내가 모두 갖고 있다. 그 것들은 모두 다 그들의 삶 속에 나의 것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이들에게 모두 베풀지 못하고 여전히 나에게 남겨두고 가는 것들은 나의 죽음 앞에서 내가 모두 잃어버린 것들이 되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나면서 내 소유로 남겨둔 것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도 쓸모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것은 다 잃어버린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워 하나님과 다른 이들을 섬기는 선지자의 삶, 제사장의 삶, 다른 말로 가인들에게 맞아죽는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그 것이야말로 수지맞는 삶이고 그 것이야 말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제 설교를 들으시고 저에게 ‘목사님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바보로 살라는 것입니까?’이런 질문하지 마세요. 그런 질문 자체가 ‘난 아직도 이 땅의 힘을 포기할 수 없어요’라는 말이니까요. 그 삶은 바보의 삶이 아니라 하늘 왕들의 삶이요, 제사장들의 삶이요, 선지자의 삶인 것입니다.

 

어떠세요. 여러분들은 지금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면서 많은 것들을 그저 잃어버리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시간과 힘과 물질을 털어 나 이외의 다른 약한 자들을 섬기시면서 하늘의 보물을 열심히 쌓고, 닦고 계십니까? 그렇게 이 땅에서 제사장의 삶과 선지자의 삶을 잘 살아내려 애 쓰는 사람들은 가인처럼 자기를 무시한 하나님과 형제에게 질투하거나 분노하여 그들을 살해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9절 이하를 보시면 십자가의 삶, 제사장의 삶은커녕 자신만을 위해 사는 자들이 얼마나 일관성 있는 모습을 보이는 지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성도의 삶을 사는 이들은 어떻게 이 땅을 살게 되는지가 아주 잘 대조되어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잘 보시면 가인의 족보는 창세기 4장 오늘 본문에 단 한번 등장하고 끝이 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가인의 라인, 즉 힘의 원리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오직 아벨의 라인, 즉 여인의 후손의 라인과만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곳에 가인의 자손들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죄인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게 되는지를 하나님의 교회에게 미리 보여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가인의 후손들의 삶을 성경이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잘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이들은 문명을 만듭니다. 16절을 보시면 가인이 놋 땅에 거합니다. 지난번에도 설명해 드렸다시피 ‘놋’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유리하다. 방황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저주하시면서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 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가인은 놋 땅에 거주합니다. 정착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대로 해석해서 자기가 편한 쪽으로 적용을 시킨다는 뜻도 담고 있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죄인들은 아무리 성을 쌓고 정착을 한 다해도 그 삶 자체가 유리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유리하다‘라는 단어의 원래의 뜻은 ’근거 없이 떠돌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이 땅에서 많은 땅을 소유하고 많은 돈을 벌고 많은 명성을 누린다 할지라도 그 삶은 목표 없이, 근거 없이 떠도는 유랑의 삶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삶을 유랑의 삶, 공허한 삶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그래서 재벌들이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유명 연예인들이 목을 매다는 것입니다. 돈이나 명성, 인기 같은 그러한 세상의 힘들이 죄인들의 공허를 메워주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끔씩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죄인들이 땅 위에 훌륭하게 정착을 한다고 해도 아담의 타락이후 땅 자체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버렸기 때문에 인간들은 이 땅에다가 어떤 행복도 기쁨도 만족도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주받은 죄인들의 삶이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승승장구, 전도 양양, 일취월장의 모습으로 보여 진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7절을 보시면 가인은 놋 땅에다가 성을 쌓습니다.

 

(창 4:17) "17 ○가인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그 때에, 가인은 도시(성)를 세우고, 그 도시(성)를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성’이라고 번역이 된 ‘이르’라는 단어는 ‘성읍, 도시’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도피성으로 피해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려야 했던 고의적 살인자 가인은 도피성이 아닌 에녹성을 쌓습니다. 인류 최초의 성주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가 성을 쌓았다는 것은 성안으로 도시를 건설했다는 말입니다. NIV성경을 보면 ‘성을 쌓았다’라는 어구가 ‘building a city'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 ’도시,city'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키비스’ 혹은 ‘키빌리타스’ 라는 단어에서 파생이 된 단어입니다. 같은 어원을 같고 있는 영어 단어가 'civilization''문명‘ 입니다. 그러니까 문명이라는 단어의 어근은 ’도시‘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지금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은 이미 그 때부터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문화가 그 때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문명이나 문화는 엄밀히 말하면 그 뿌리가 같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신적 가치 추구의 결과가 만들어 낸 것을 문화라고 하고(음악, 예술, 문학)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가치 추구가 만들어 낸 것을 문명이라고 합니다.(과학) 결국 문명과 문화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죄인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고 즐겁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 대용품으로 만들어 낸 인간의 죄 성을 품고 있는 것들입니다. 가인이 바로 성을 쌓고 도시를 세우고 문명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었던 것입니다.

 

죄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아담도 하나님 앞에서 숨었던 것이고 가인도 하나님 앞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저주받은 자신들의 모습을 성으로, 문명으로 감추는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모습을 보이며 나는 저주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죄인들의 속성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이 세상의 것들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는 자들은 ‘나는 저주받은 죄인입니다’라고 외치는 꼴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 고의적 살인자인 가인의 후예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십시오.

 

(창 4:18) "18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가인의 아들 에녹이 이랏을 낳았습니다. 이랏은 ‘도망자’란 뜻입니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속성이나 본질, 혹은 약속이나 예언이 들어 있는 것이라 했지요? 그 자녀들의 이름이 모두 이렇습니다. 이랏이 ‘므후야엘’을 낳았습니다. 므후야엘은 ‘하나님이 치셨다. 하나님이 징계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습니다. 므드사엘은 ‘므드스올’ 즉 ‘스올의 아들, 지옥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름들이 무시무시하지요? 계속해서 19절부터는 그러한 지옥의 자식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18절까지 에서는 가인의 자녀들의 이름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임을 밝히는 것이고 19절부터는 그들이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설명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 4:19‐22) "19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므드사엘‘스올의 아들, 지옥의 아들’이 라멕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라멕이라는 자는 아주 포악하고 안하무인인 자였습니다. 이름의 뜻도 ‘강한 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강한 자의 자리를 점유하는 것이지 절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강한 자의 자리에 올라서지 못합니다. 성도들은 그 강한 자들에게 맞아죽는 삶을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라멕이 두 아내를 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면서 정해 놓으신 일부일처제가 깨지는 장면입니다.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자들은 이 세상의 것들로 자신들을 보호하려 하고, 자신들을 즐겁게 하려 하기 때문에 다다익선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다다익선의 삶, 즉 힘을 추구하는 자들의 말로는 항상 처참하게 끝이 납니다. 라멕의 아내들의 이름 속에서도 그러한 사실이 힌트 되고 있습니다.

 

라멕의 첫째 부인의 이름은 ‘아다’입니다. 아다는 ‘빛,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부인의 이름은 ‘씰라’입니다. 씰라는 ‘그늘’입니다. 하나를 얻고 보니 너무 좋아서 둘을 얻었습니다. 수가 많아지면 더 좋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빛이었던 삶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 얻어내어 축적한 것은 그 삶에 그늘을 가져오게 마련입니다. 그 그늘은 결국 영원한 어둠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잉태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라멕이라는 자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의 아들 중 ’야발‘이라는 사람은 육 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 말은 그 때 이미 들짐승들을 집짐승들로, 다른 말로 육축으로 양육하고 훈련하는 기술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육축을 쳐서 먹 거리를 대야 할 만큼 인구가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아무튼 가인의 후손에게서 낙농업이 시작된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동생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수금 ’킨노르‘는 현악기를 말하는 것이고 퉁소 ’우가브‘는 관악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자손에게서 음악과 문화가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발가인’이라는 아들은 동 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였습니다. 이미 그 때 청동기, 철기 문명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기계와 무기가 가인의 자손에게서부터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두발가인의 누이의 이름이 ‘나아마’입니다. 왜 그 누이의 이름만이 그 곳에 기록이 되어 있을까요? ‘나아마’라는 이름의 뜻은 ‘사랑스러움,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의 자손은 예쁘기까지 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뭡니까? 세상의 힘입니다. 가인의 자손들은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삶을 살 뿐 아니라 정말 그 힘들을 얻어서 떵떵거리면서 자신을 증명하며 이 땅을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23절과 24절의 강한 자 ‘라멕’의 독백을 들어보십시오.

 

(창 4:23‐24) "23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24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

 

자기를 상하게 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자기 아내들에게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과 다툼을 벌이다 자기가 상처를 입게 되자 그를 죽여 버렸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그 상대방이 소년이라 할지라도 그 상대방을 죽여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게 가인의 라인에 선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말로든 행동으로든 가차 없이 죽여 버리는 것이 오늘 날 세상의 삶의 법칙 아닙니까? 아무리 훌륭한 문명을 이루고 문화를 발전시켜가며, 춤추고 노래하고 하프를 켜고 퉁소를 불며, 기계를 만들고 무기를 만들어 다른 사람들을 정복하고, 육축으로 부자가 되면 무엇 합니까? 그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데 쓰는 것이 바로 죄인들의 삶인 걸요. 그리고는 뉘우치지도 않습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였는데도 하나님이 그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이 칠 배라고 하셨다. 나는 정당방위로 사람을 죽인 것이므로 나에게 복수하는 자는 벌이 칠 십 칠 배다‘라고 이 뻔뻔스러운 살인자가 노래를 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게 바로 세상인 것입니다.

 

성경이 굳이 이렇게 가인의 자손들의 족보를 몇 개나마 기록을 한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들 이 삶이 정말 좋아 보이니?’라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벨의 라인, 여인의 후손의 라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 본문에 그 삶이 어떻게 극명하게 대조가 되어있는지 보세요.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조금 의아한 부분이 나오지요? 가인의 족보 끝에 갑자기 ‘셋과 에노스’라는 여인의 후손의 라인이 등장합니다. 그리고는 5장부터 다시 아담의 족보가 등장하는데 거기에 다시 셋과 에노스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지금 이 부분에서 셋과 에노스를 등장시킨 것은 단순한 족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 4:25‐26) "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은 말씀드렸다시피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두신, 놓으신’이“라는 뜻이라 했지요? 무죄한 자의 죽음으로 말미암게 되는 하나님의 라인, 하나님의 씨, 즉 부활한 성도들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셋입니다. 가인의 자손들이 도시를 건설하고 기계문명을 발달시키며 부를 쌓고 떵떵거리며 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진술 뒤에 아벨의 라인인 셋과 에노스가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노스는 ‘사람’을 뜻하는 ‘이쉬’와 같은 어근이고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인의 후손의 라인, 셋의 자손은 가인의 자손들이 강한 자로 이 땅에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성을 쌓고 문명을 만들며 살인자의 삶을 살고 있을 때 ‘에노스, 사람, 티끌’로 이 땅을 살더라는 것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상 13:20) "20 온 이스라엘 사람이 각기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에게로 내려갔었는데"

 

가인의 자손인 블레셋은 문명을 일구며 강한 자로 군림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삽이나 도끼나 괭이나 갈퀴의 날을 갈기 위해 블레셋에 가서 구걸을 해야 합니다. 이게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들이 ‘에노스, 사람, 티끌’인 것을 인정하고 이 땅에서 선지자의 삶, 제사장의 삶, 십자가의 삶을 사는 이들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노스라는 이름 뒤에 ‘그 때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라는 구절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강한 자가 되어 이 땅에서 군림하는 자들은 절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도 세상을 주물럭거릴 수 있는데 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까? 그게 부러우세요? 그게 정말 복 받은 삶입니까? 아닙니다. 복 받은 성도의 삶은 하나님을 불러야만 하는 환경과 상황과 사건 속으로 던져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성도의 환난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하나님의 복인 것입니다.

 

성경의 이 명쾌한 대조를 보십시오. 누가 예수를 믿으면 세상 사람들 등 짝 위에 올라서서 자기를 증명하고 자신을 자랑할 수 있다고 합니까?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심지어 원수를 위해 나의 속 옷 뿐만 아니라 겉옷까지도 벗어주는, 자기를 비우는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자기를 비워 가는 삶이 바로 하늘의 보석을 보석답게 닦아내는 삶인 것입니다. 그 삶에 ‘손해’라는 말이 웬 말입니까? 예수를 믿고 십자가를 지고 죽어주는 삶이 손해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게 바로 선지자의 삶이며 제사장의 삶이며, 하늘의 왕 노릇을 할 성도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비워주고, 용서해 주고, 참아주고, 사랑해 주는 삶을 살며 이 땅에서 자신을 조금씩 죽여 갈 때, 하늘의 보물인 우리 성도가 점차 점차 빛을 발하며 진정한 보석으로서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행복한 삶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가인처럼 라멕처럼 하나님과 내 이웃들에게 분노할 수 있습니까? 나보다 나은 사람들을 질투할 수 있습니까? 낮아지는 게 복인데 나보다 나은 사람을 왜 질투합니까? 그리고 왜 그 질투를 분노로 발산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에게 쏟아 부어질 하나님의 분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신 부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는다고, 자기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그 사람을 분노로 때려죽일 수 없습니다. 분노와 질투는 죄로 인해 사람들에게 닥치게 된 사망의 증상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반드시 그 죽음의 증상을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해결할 수 있는 약은 복음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복음을 아시는 분들이라면 여러분은 이미 그러한 질투와 분노에서 치유를 받으신 분들이십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사망이 복음 안에서 해결되었기 때문에 그 죽음의 증상인 분노와 질투는 치료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질투와 분노에서 벗어나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살해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기 위해서는 복음을 잘 공부하시고 확실하게 이해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분노와 질투라는 증상을 나타내는 그 죽음이 해결되었다는 망각한 채 자꾸 그 증상들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증상의 치료의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 소위 말하는 내적 치유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치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치유는 복음에 의한 사망의 치유입니다. 그 사망이 치유됨으로 해서 다른 증상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지는 것이 기독교 안에서의 치유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질투나 분노가 사람이 갖고 있는 상처에서 기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도 내적 치유를 통해서 그 상처를 치유 받아야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우깁니다. 그들은 복음으로는 죄를 용서받는 것이고 이 땅에서 성도가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하지요. 한국 교회에 그 내적 치유 열풍이 아주 오래도록 불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복음 이외의 second blessing이 필요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렇게 무언가 다른 방법으로 남은 상처를 치료해야 할 만큼 부족한 것이었습니까?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치유의 방법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그들은 성도의 삶 속에서 분노를 유발시키는 상처라는 것이 발견이 되면 먼저 그들은 그 상처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추적해 올라갑니다. 그 사람의 상처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 어떤 인물이나 어떤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그 사건이나 그 인물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 치유 집회에 가보면 전부 자기 부모나 형제나 친척이 자기에게 어떤 잘 못을 했었는지 치열하게 기억을 해내도록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강사는 ‘강사 님 저는 도저히 제 부모님에게서 받은 상처를 기억할 수가 없는 데요’ 그러면 아주 불성실하고 참여 정신이 결여된 사람으로 몰아붙입니다. 그래서 그 곳에 가면 반드시 나의 과거에 있었던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나 인물들을 떠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잘못을 그 인물이나 사건에게 책임전가를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항상 거절 감에 시달리며 조금이라도 자신이 거절을 당했다고 느끼게 되면 분노를 참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부모가 항상 거절 감을 느끼게 만들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식의 문제 제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 거절 감에서 오는 분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버지를 용서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그러한 책임전가의 방법이 낳은 이단이 바로 귀신 론을 주장하는 베뢰아 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질병이나 사건들을 전부 귀신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들에게는 감기도 귀신이고 치질도 귀신이고 안질도 귀신의 짓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아닙니다. 그 모든 죽음의 증상들의 원인은 과거의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사망으로 떨어지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그 사망의 증상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은 그 에덴동산의 불순종이지 우리 인생 속에서의 어떠한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 그 모든 증상들은 우리의 부모나 귀신들이 준 것이 아니라 아담의 자손인 우리의 것입니다. 왜 나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를 시킵니까?

 

내적 치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치명적인 오류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 론입니다. 여러분 정말 저주가 족보를 타고 흐릅니까? 그들이 근거 구절로 삼고 있는 구절 중의 대표적인 구절이 출애굽기 20장 십계명의 장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삼사 대 까지 갚으신다고 하셨고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절을 아직도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하는 바보들이 있나요? 이게 사실이라면 왜 셋의 후손에서 노아밖에 살아남지 못합니까? 왜 노아의 후손에서는 셈만이 선택을 받지요? 왜 셈의 후손 중에서는 아브라함만이 선택을 받습니까?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 이스마엘과 에서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던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어떻게 된 거지요? 천대까지 복을 받는다면서요?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저주가 정말 자손 삼사 대에까지 미칩니까?

 

(렘 31:29‐30) "29 그 때가 오면, 사람들이 더 이상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자식들의 이가 시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30 오직 각자가 자기의 죄악 때문에 죽을 것이다. 신 포도를 먹는 그 사람의 이만 실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아들들의 이가 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무슨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습니까?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이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자기의 죄를 조상이나 귀신에게 전가하지 마세요. 그 구절은 3년 전에 교리 설교를 했을 때도 잠깐 언급을 해 드렸지만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쓰인 히브리 사람들의 문학기법일 뿐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부모에게서 난 자식은 절대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면 여기 계신 믿지 않는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분들은 어떻게 된 것이지요?

 

(롬 8:1‐2)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여러분 각자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전체 성도는 모든 저주에서 다 풀려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에게 남아 있는 저주는 없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면 우리에게 분노를 일으키는 상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러분, 상처가 뭡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여자 분이 어린 시절에 강간을 당해서 평생을 그 상처 때문에 분노와 우울증 속에서 살았다고 해 보자고요. 그런 이야기 많이 들어 보셨지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늘 부모에게 학대를 당해서 심한 거절 감에 시달리며 살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늘 무시당하는 삶을 살아오는 바람에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이나 행동을 보이면 격렬하게 분노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복음을 전해 듣고 감격 속에서 구원을 확인했습니다. 내적 치유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구원은 받았지만 그 어린 시절의 상처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반드시 치유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에서 새 생명으로 살아난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 사람의 삶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사건들인 것이며 그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인간들은 그 사람의 성도됨을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사람들인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자기에게 일어난 더럽고 추악한 사건들을 반추해서 그 것을 상처로 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만들어 낸 세상의 열매들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것인지를 확인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그렇게 더럽고 추악한 세상 속에서 그들과 방불한 삶을 살았을 터인데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은혜로 구원해 주셔서 이렇게 선한 삶이 무엇이고 악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음에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에 그러한 과거의 사건들이 상처로만 남게 될까요?

 

아울러 성도들은 나의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인간들을 떠올리면서 상처로 이를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얼마나 악한 자들인지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자기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그렇게 남에게 피해나 주며, 사기나 치며,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자식마저도 학대를 서슴지 않는 그런 짐승 같은 삶을 살았을 터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자신을 비워 원수를 살리는 자가 되었음에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도둑놈 집에 도둑놈이 간혹 나오는 것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 때문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것이 그 것 뿐이기 때문에 도둑놈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자유 하십시오. 여러분은 분노와 질투에서 해방되신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에노스로, 사람으로, 흙으로, 아벨로 이 땅을 사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게 당해주고 그럼에도 용서해주며 심지어 사랑까지 해 주면서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것을 상처라 부르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제사장의 삶이며 선지자의 삶이며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잘 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손해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하며 사신 여러분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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