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의 삶
(김성수 목사)
(우리가 이 땅에서 마치 죽임을 당하는 자들처럼 순교자로 살게 되는 이유는 첫 번째로, 우리는 새 생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새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옛 것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 옛 것을 부수는데 필요한 것이 바로 순교자 적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환난과 고통을 통해서 죽습니다. )
(계 6:9-11) “9 그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또 그들이 말한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10 그들은 큰소리로 "거룩하고 참되신 통치자님,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땅 위에 사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또 우리가 흘린 피의 원수를 갚아 주시겠습니까?"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11 그리고 그들은 흰 두루마기를 한 벌씩 받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그들과 같은 동료 종들과 그들의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그들과 같이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의 수가 차기까지, 아직도 더 쉬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네 번째 인의 재앙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네 말 탄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그 말 탄자들이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지 그리고 왜 우리는 골짜기에서 구원을 받는 것인지 공부를 했습니다. 그 인들이 떨어질 때에 일어났던 전쟁, 기근, 질병 같은 것들은 모두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타락한 후에 지금도 그 악한 세력의 수중에서 놀아나고 있는 타락한 인간들의 죄의 결과이며 하나님은 그 것들을 심판의 도구로, 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을 완성시키시는 도구로 쓰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재앙들은 순서대로 차례차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시대 전체를 통해 일어날 일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섯 번째 인의 재앙이 나옵니다. 다섯 번째 인의 재앙의 내용이 뭡니까? 다섯 번째에서는 뜬금없이 순교자들이 등장합니다. 계속해서 전쟁, 기근, 질병 같은 재앙이 나오다가 갑자기 재앙의 내용이 아닌 순교자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순교자 하면 예수 믿다가 살해를 당한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그럼 하나님의 제단 앞에는 그렇게 순교한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이 순교자들은 단순히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해를 당한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 24:9)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예수님께서 말세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시면서 ‘그 때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고 죽일 것이다. 모든 민족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하십니다. 말세가 언제입니까?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말세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오늘날을 포함한 전체 교회 시대를 말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교회는 모두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모든 교회는 반드시 이 땅에서 환난과 궁핍과 핍박을 통과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마치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이 힘이 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제단 아래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 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나이까?’ 이 기도는 단순히 복수를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고 했지요?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있는 천상의 교회가 ‘하나님 빨리 보복을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뭔가 어색하지 않습니까? 전에 설명해 드린 대로 그 기도는 하나님의 정의 구현, 즉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교회들의 간절한 염원인 것입니다. 능력과 위엄과 권세를 가지신 대주재이시며 죄를 증오하시고 처벌하신다는 면에서 ‘거룩하시고’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씀에 신실하시다는 면에서 ‘참되신’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이 성도들의 기도는 그 거룩하시고 참되신 성부하나님의 정의의 통치가 완성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흰옷을 주시면서 ‘아직 잠시 동안 쉬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어야 할 자들이 다 죽어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해 놓으신 죽임을 당할 자들의 수가 다 차면 완성이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켜서 죽임을 받을 자들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계 11:3,4,7,8)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교회지요?)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교회는 이렇게 이 땅에서 죽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 땅에서 환난과 궁핍과 핍박 속에 던져져서 마치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고통을 당하게 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제가 두 가지로 답을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마치 죽임을 당하는 자들처럼 순교자로 살게 되는 이유는 첫 번째로, 우리는 새 생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새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옛 것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 옛 것을 부수는데 필요한 것이 바로 순교자 적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환난과 고통을 통해서 죽습니다. 첫 창조의 부산물들을 하나하나 죽여 갑니다. 그러면서 거룩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요? 우리의 죄 된 옛 몸이 되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우리가 우리 인생을 통하여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인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마귀는 우리를 속일 것입니다. ‘그건 단지 고통일 뿐이지 너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욥처럼 너희도 하나님을 원망해라’ 그러면서 우리를 속일 겁니다. 가짜들은 거기에 금방 넘어가겠지요? 하나님을 이용해서 이 땅의 것들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은 고난이 닥치면 금방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고난을 통해서 옛 몸을 죽여 갑니다.
옛 사람을 죽여 가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모든 사람이 어떤 모양으로든 고난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순교자, 죽임을 당한 자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내 살을 잘라내야 하는 아픔이 있기 때문에 힘들어요. 거기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 22:15-22) “15 그 때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면 말을 트집잡아서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할까 의논하였다. 16 그런 다음에, 자기네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말하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17 그러니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말씀해 주십시오. 황제(그,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18 예수께서 그들의 간악한 생각을 아시고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 달라" 하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드렸다. 20 예수께서 물으셨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21 그들은 "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22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탄복하면서 예수를 떠나갔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내용이지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정말 잘 아세요? ‘세상에 내는 세금도 빼 먹지 말고 꼬박 꼬박 내고 교회 헌금은 또 나름대로 열심히 하면서 살자’ 이런 뜻인가요? 로마서 13장에 보면 바울이 ‘국세를 받을 자에게는 국세를 바치고 공세를 받을 자에게는 공세를 바쳐라’ 하잖아요. 로마에 세금을 내면 로마가 그 세금을 받아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힘으로 쓸 텐데 그래도 세금을 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그 이야기하시는 것입니까? 16절을 보시면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 중에서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16절) “그런 다음에, 자기네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말하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이 둘은 서로 원수 같은 사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다윗 왕국의 재건을 기다리는 사람들이고 헤롯당은 로마에 빌붙어서 잘 먹고 잘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담합을 해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그들의 질문의 내용 중에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 이니이다‘라는 부분이 있지요? 참 되고 선하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다는 말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말입니까?
(신 10:17)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참 되신 분, 선하신 분도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성경을 인용해서 ‘네가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네가 진짜 그 왕의 아들이라면 너하고 이 땅의 왕인 가이사하고 누가 더 세냐? 네가 진짜 왕이라면 이 세상의 왕인 가이사를 네 힘으로 이겨서 너를 한번 증명해 봐라’ 이런 의도로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지 말라’라고 하면 예수님은 금방 로마 군사들에게 잡혀가게 될 것이고 ‘세금을 내라’라고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가, 유대인의 메시야로 왔다는 자가 이 땅의 왕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느냐’ 하고 반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들은 ‘네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면 너의 힘을 발휘해서 이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빠져 나와 봐라’‘이 세상의 것으로 너의 힘을 한번 증명해 봐라’ 하고 시험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내내 예수님께 닥쳤던 시험입니다.
(마 4:1-3)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귀도 역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그러니까 너의 힘을 이 세상의 것으로 한번 증명해 봐라’ 하고 시험을 던지지요? 우리에게도 동일한 시험이 우리의 신앙생활 내내 닥치게 될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며? 그럼 한번 이 세상에서 이 세상 것으로 네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라는 것을 증명해봐’하고 시험을 할 것입니다. 바보같이 그러한 마귀의 시험에 ‘이게 어디서 까불어, 그래 한번 볼래?’ 하고 반응하는 것이 바로 health and wealth gospel, 번영의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의 복을 받은 자들은 세상에서도 복을 받아야 정상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도 복 받고 출세하고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러한 시험이 닥쳤을 때 자신의 힘을 발휘해서 악한 세력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동전을 가지고 와 봐라, 누구의 형상이 그려져 있느냐?’ ‘가이사의 형상이 그려져 있습니다.’‘그러면 그 것은 가이사의 것이다, 그러니 가이사에게 바쳐라’ 그러나(kai)(한국어 개역 성경에는 kai가 빠졌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이게 주님의 대답이십니다.
고대 시대에는 그 나라의 주화에 항상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형상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가 다스리던 로마와 그 식민지에서는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을 사용하였습니다.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동전은 가이사의 소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동전에는 ‘신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디베리오 가이사 아우구스도’라고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전의 뒷면에는 ‘폰티페스 멕스모스’‘대 제사장‘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이사 그는 신의 아들이요 대 제사장이다‘라고 동전 양면에 새겨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 동전을 만지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애국심의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적인 문제였습니다. 그 동전을 사용한다는 것은 십계명의 1계명을 어기는 것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 세를 낼 때에도 로마의 동전이 아닌 저 위 쪽 나라 두로의 동전으로 성전 세를 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동전을 하나 가지고 와 봐라‘ 하셨을 때 그들이 금방 그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을 가지고 왔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그 동전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겉으로는 아닌 척 했지만 사실은 가이사의 통치 아래에서의 로마가 주는 유익, 팍스로마나, 세상의 힘을 은근히 누리고 추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것들은 가이사에게 주라, 너희가 가이사 아래에서의 편안함과 가이사 아래에서의 풍요함을 원한다면 당연히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한다. 단순히 세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그 세상에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거기에는 ‘지금 너희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느냐?’ 라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것들은 하나님께 드려라‘ 이 말씀이 이 전체 구절의 포인트입니다.
이 세상은 아직도 세상 권세 잡은 자, 즉 마귀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마귀를 결박하셨지만 아직 이 가시적인 세상은 그 마귀의 손아귀에 있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요. 여러분 2차 대전 때 독일의 패망이 사실상 결정된 것이 언제입니까?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입니다. 그 때 이미 독일의 허리는 꺾인 것입니다. 그 때를 우리가 D - day 라고 하지요?(designated day) 그러나 연합군이 완전히 승리를 확인한 것은 그로부터 1년 뒤입니다. 그 때를 우리가 V-day 라고 합니다. 독일군은 이미 그 d-day를 기점으로 허리가 꺾였지만 지리멸렬하면서도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그 때 이미 패망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마귀의 허리는 꺾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마귀는 최후의 발악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이 세상은 여전히 마귀의 손아래 있습니다. 사단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그 세상 속에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통치권의 개념이라고 했지요? 그 세상 속에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여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 둘을 비교해서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자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세상의 원리, 마귀의 원리를 따라 살게 된다. 그러니까 그것들은 가이사의 나라에 속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가이사의 나라에 세금을 낸다. 대가를 지불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자들은 그 세상의 삶의 원리를 따라 살면 안 된다. 그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께 드려라‘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자고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사는 하나님의 것들이라고 자처하면서 삶은 어떻게 삽니까? 세상의 것들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를 지불합니다. 나의 취미 생활, 나의 행복한 가정생활, 나의 자랑, 나의 명예 이런 것들을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대가를 지불합니까? 그것을 가이사에게 내는 세금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는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분명 나의 것은 나에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 나의 인생을 바치고 있습니까? 헌금 많이 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고 그 분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가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동전 하나도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으면 가이사의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떠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것들이 왜 가이사에게 빌붙어서 그가 주는 풍요를 얻어먹겠다고 아우성입니까? 물론 가이사의 나라가 주는 것이 참 매력적입니다. 참 달아요. 당시 팍스 로마나 아래에서의 전 세계는 해적과 산적은 물론 좀 도둑들도 다 소탕이 된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로마가 주는 물질적 편안함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는 그 세상이 주는 편안함과 풍요함에 너희를 던져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너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라‘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어떤 삶인지 알기만 하면 되지요? 예수님께서 대답을 해주고 가셨습니다. ‘그 삶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예수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삶이다’하고 정확하게 말씀하시고 가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고난을 감수하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가이사의 나라에 꼬박 꼬박 세금을 내면서, 대가를 지불하면서 자기 육신의 안일과 자랑만을 위해 일로 매진하고 있는 것이 오늘 날 우리들의 자화상 아닙니까?
이 땅에서의 입신양명을 위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투자합니까?‘과외 해야지요, 연수가야지요, 밤새워 시험 공부해야지요, 취직해서 다른 사람보다 앞서려면 몇 배 더 열심히 일해야지요. TV봐야지요, 골프 쳐야 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드리기 위해서 어떤 투자를 합니까? 여전히 가이사의 나라에만 관심을 두고 가이사가 주는 것을 누리기 위해 거기에 세금은 꼬박 꼬박 지불하면서 하나님의 것으로서의 몸부림은 이렇게 미미하기만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생이라는 것을,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더러 가이사의 나라의 것을 실컷 누리다가 오라고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은 가이사의 나라의 것들을 하나하나 포기하고 놓으면서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것이구나,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다 의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구나’ 하는 것을 배우고 오라고 이 인생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고구나, 그래서 난 그 분과 영원히 살고 싶다’ 이거 배우고 오라고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을 광야에 비유합니다. 성경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무엇을 하다가 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신 8:2-16)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실패한 아담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고 그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훈련을 시키시려고 광야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우리 광야 인생의 목적은 가이사의 나라의 것, 떡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배우고 가는 것이 우리 광야 인생의 목적입니다) 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오히려 그 가이사의 나라의 풍요가 주어지면 우리는 금방 여호와를 잊어버리는 족속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로 몰고 가셔서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으면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고 질병도 낫지 않는 경험을 우리에게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그런데 그 모든 광야의 삶은 다 ‘우리의 복’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의 복, 하나님의 선, 하나님 나라의 완성, 우리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를 광야로 내 모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삶에 닥쳐오는 죽음 같은 환난과 핍박과 궁핍은 축복인 것입니다. 가이사 나라의 것을 약속하는 자들을 단호히 배격하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것들에게 하늘의 것을 선물하시기 위해 ‘참 복’을 선물하시기 위해 우리에게서 가이사의 나라의 것들을 빼앗아 버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은 그 광야에서 애굽의 부추와 마늘과 고기와 애굽이 주던 안전을 그리워 하다가 망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혹 하나님께서 광야로 몰아내실 때에 애굽을 바라보시면 안 됩니다. 기껏 하나님께서 광야로 데리고 가셨는데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 잘 하면 애굽의 부추와 마늘과 고기를 풍성하게 주실 거야’라고 가르치는 그러한 자들의 속임수에 속지 마세요. 이스라엘은 애굽의 풍요를 그리워 하다가 다 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품에 안고 다시 그 광야로 가셔서 가이사의 것들로 자신의 만족을 삼지 않으시고, 가이사의 것들로 자기를 증명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그 모든 시험들을 다 이겨내시고 우리를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의 광야 인생 동안에 세상의 것들로 우리를 증명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게 쉽지 않아요. 그래서 그 삶을 순교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마 16:22-24) “22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면서, 예수께 항의하였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다. 24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에서의 하나님의 것‘타 투 떼우’와 여기서의 ‘하나님의 일’‘타 투 떼우’가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뭡니까?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삶 전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십니다.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의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 진짜 하나님의 것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살다 가셨습니까? 고난당하시고 순종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의 옛 사람이 되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해결하셨습니다. 그 예수 안에 있는 자들로서 우리는 그 예수의 삶의 자취를 따라 살면서 환난을 통해 고난을 통해 죄인 된 옛 우리 자아를 죽여 가고 결국에는 참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너무나 많은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 욕심을 따라 세상의 것들만을 추구하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환난과 고난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 감사가 나오기는커녕 하나님을 저주하며 절망하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행동들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하게 되겠지요.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이 죄라는 놈의 힘이 너무 강합니다. 공의의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참되신 하나님 빨리 그 나라를 완성시켜 주십시오. 그래서 이 지긋 지긋한 죄의 몸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의 보좌 앞의 순교자들의 기도의 내용과 같은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기도’ 그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한 발 한발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광야에서 60만 명이 모두 죽고 새 사람 60만 명이 가나안에 들어 간 것처럼 여러분은 이 광야 인생길에서 죽으셔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들을 다 버리시고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참으로 힘든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를 순교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그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힘이 드실 때 기억하십시오. 다른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그 순교자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 나만 이렇게 힘겹게 가는 것이 아니구나. 모두 다 어떤 모양으로든 그 길을 가고 있구나.’ 그리고 힘을 내십시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가는 길에 방법으로 택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이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그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삶으로 입으로 전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십자가를 듣고 보고 우리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요 17:18)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우리는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무얼 하라고 보내진 것이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라고, 삶으로 예수를 설명해 주라고 세상으로 파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히 11:32-38)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고후 11:23-27)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하나님이 왜 이렇게 믿음의 선진들의 죽음 같은 고통을 그냥 지켜보십니까? 왜 안 말려 주시지요?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그들이 거룩하게 지어져 가기 위해서 자기의 옛 자아를 죽이는데 그 고통들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가 짊어짐으로 그 십자가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이해 할 수 있게 되고, 아울러 그들의 그 고난은 하나님께 선용이 되어 세상에 십자가를 보여주는 도구요 방법으로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헬렌 로제비어 선교사가 아프리카의 자이레에서 사역을 할 때 자이레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 여의사는 혁명군에게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얼토당토 한 죄목을 걸어서 그녀를 고문했습니다. 헬렌 선교사가 너무나 고통스러운 그 고문 속에서 ‘하나님은 나를 떠나셨나보다’하고 생각을 했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음속에 분명한 깨달음이 오기를 ‘헬렌, 너는 분명 21년 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특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니? 바로 이것이 그 특권이야. 이 고난은 네 고난이 아니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야. 예수님은 잠시 네 목숨을 빌리시는 것뿐이야. 네가 여기서 죽는다면 그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야. 너는 그 죽음에 동참하는 영광스러운 특권을 얻은 거야’라는 깨달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의 일기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을 멈추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잔인함과 그들의 악함을 조금도 말려주지 않으셨다. 여전히 아팠고 여전히 두려웠고 여전히 고통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깨달음이 온 후에 나는 달라졌다. 이제 그 고통은 예수 님 안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고통이었다. 나는 그 영광스러운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이 십자가의 삶, 순교자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방법으로 쓰여 진다는 감격에 나는 잘 참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 말려 주셨습니다.
그녀의 죽음을 통해 17살의 자이레 소년이 예수님을 만났고 그는 자이레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십자가의 삶은 우리를 완성시켜 갈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의 방법으로도 쓰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모저모로 이 땅에서 순교자의 삶을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레위 지파에게 교회를 상징하는 레위 지파에게는 땅을 나누어주지 않았는지 아세요?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주셨습니다. ‘너희의 분깃은 나다. 너희는 이 세상의 땅 덩어리 같은 것에 관심 두지 말라.’는 것을 우리 교회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땅덩어리 같은 것에 관심 두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을 상급으로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조금 힘이 드셔도 잘 참으시고 소망을 잃지 마시고 다시 한 번 무릎을 일으켜 세워 일어나 걸으십시오. 우리는 매일 매일 순교해야 하는 자들이니까요. 불 이익을 당하셨습니까? 억울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참으세요. 참기 힘드십니까? 그래도 참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또 한 번 죽는 것입니다. 그게 순교자들의 삶입니다. 힘들지만 서로 서로 도와주고 지켜 봐 주면서 함께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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