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벨의 교훈에 빠져버린 현대교회의 모습
이세벨의 가르침
(김성수 목사)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진짜 목적은 자기의 세상적인 유익을 위해, 자기의 배를 위해 엉터리 신을 만들어 놓고 그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물질이라는 두 영역 속에서 살아갑니다. 제한된 이성의 인간은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물질과 공간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시간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합니다. 물질과 공간 속에서 감지되지 않는 하나님을 굳이 물질과 공간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것이 바로 인간의 죄 성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나는 정말 바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 혹시 나는 이기적인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예배당 안에서 아피스의 암소와 하돌의 황소를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진지하게 여러분의 신앙을 돌아보십시오.)
(계 2:18-29) “18 "두아디라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그 눈이 불꽃과 같고, 그 발이 놋쇠와 같으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말씀하신다.19 나는 네 행위와 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오래 참음을 알고, 또 네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안다. 20 그러나 네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내 종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미혹시켜서 간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자다. 21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그는 자기 음행을 회개하려 하지 않았다. 22 보아라, 나는 그를 병상에다가 던지겠다.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그와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으면, 큰 환난을 당하게 하겠다. 23 그리고 나는 그의 자녀들을 반드시 죽게 하겠다. 그러면 모든 교회는 내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살피는 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겠다. 24 그러나 두아디라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곧 사탄의 깊은 흉계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인 너희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 25 다만 내가 올 때까지,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굳게 붙잡고 있어라. 26 이기는 사람, 곧 내 일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에게는,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27 2)「그는 쇠막대기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고, 민족들은 마치 질그릇이 부수어지듯 할 것이다. 28 이것은 마치, 내가 나의 아버지께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다스리는 것과 같다. 나는 그 사람에게 샛별을 주겠다. 29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지난 시간에 두아디라 교회를 좀 먹고 있던 이세벨의 가르침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다고 책망을 받았던 에베소 교회와는 달리 ‘네 나중 행위가 더 많다’라고 칭찬을 받았던 두아디라 교회에 그렇게 전혀 다른 이교 적 신앙 행위를 하고 있던 자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날도 별반 다를 것이 없지요? 그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꼭 같은 행위를 하면서도, 한 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근거로 한 행위이고, 다른 쪽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없는,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종교 행위를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진짜 목적은 자기의 세상 적인 유익을 위해, 자기의 배를 위해 엉터리 신을 만들어 놓고 그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죠.
(빌 3:18-19)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롬 16:17-18) “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18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 하느니라”
이렇게 예배당 안에서 자기 배를 위해 하나님을 우상화 시켜놓고 섬기는 자들을 우리는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진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 배만을 위해 살게 되었습니까? 심지어 예배당에서도 자기의 필요를 따라 자기가 만들어 놓은 신을 하나님이라 이름을 붙여 부르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합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인간을 절대 홀로 살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께 절대 의존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쫓아내 버렸고 인간은 그 때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문명과 문화라는 것을 만들어 스스로의 행복을 좇고 스스로를 지켜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타락한 가인의 후예들이 인류 문명의 조상으로 묘사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 4:16-22) “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이 이렇게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스스로를 지키려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때때로 자기들 힘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현상이나 사건들을 볼 때 즉, 지진이나 폭풍이나 홍수나 일식이나 월식이나 죽음 같은, 자기 힘으로 control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볼 때, 그들이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힘을 가진 어떤 존재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때마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들에게 유익을 주고 자기들을 보호 해 줄 신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만을 위할 줄밖에 모르는 인본주의 아래서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신들은 아주 인간적입니다. 그러한 한 예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 신화를 읽거나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제우스, 아폴로, 헤라, 포세이돈, 헤라클레스 같은 신들이 나오지요? 그런데 그 신들은 우리 인간들처럼 서로 미워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고 울고 웃고 슬퍼하고 시기하고 사랑에 빠지고 실연을 당하고 그럽니다. 그들이 인간과 다른 것은 아주 강한 힘이 있다는 것과 올림푸스 산에서 ‘nectar’라는 영원히 죽지 않는 술을 마셨다는 것 정도만 다릅니다. 그래서 그 신들은 인간에게 전혀 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호메로스’라는 시인은 ‘너희들은 신을 존경하고 복종하되 본받지는 말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신들은 ‘인간의 필요를 채워줄 엄청난 힘’만을 소유한 ‘질투도하고 시기도 하고 사랑도 하고’ 하는 괴물들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합니까? 무당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달래기 위해 눈물겨운 치성을 드립니다.
수많은 기독교의 문패를 단 이단들이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선행과 전도를 합니까? 복음주의를 자처하는 교회의 예배당 안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엄청난 힘만을 소유한 정신 연령 20세의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얼마나 그 신을 조롱합니까? 그 신은 조르고 조르면 언젠가 고집을 꺾고 자기의 말을 들어 줄 거라 생각합니다. 평소에 그 신을 잘 달래놓지 않으면 그 신은 언제든지 자기의 삶에 내려와서 깽판을 부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일 성수도 잘 하고 헌금도 열심히 해 주고 때 맞춰 선교도 열심히 가주는 그런 엉터리 신앙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오히려 그 하나님 머리 위에 올라서서 자기의 계획과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고 ‘당신은 당신이 가진 힘으로 나를 열심히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완성 된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신앙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구약에 보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이스라엘도 계속해서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신을 만들어 냅니다. 그 중 우리가 잘 아는 금송아지 사건을 한번 보겠습니다.
(출 32:1-4)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 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오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여러분이 잘 아는 구절이지요?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쉽게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신을 만들어 내는 존재인지를 너무나 확연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서 이스라엘에게 고했습니다. 십계명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율례를 백성에게 일렀습니다. 그랬더니 백성이 이구동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겠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출 24:3-7) “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하리이다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 이 지파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보세요, 이렇게 맹세하고 딱40일 만에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금송아지를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낸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섬기던 풍요의 신 “아피스의 암소”와 “하돌의 황소”의 형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자기들의 풍요를 위한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있었던 바로 그 시간에 시내산 위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계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출 20:3-5)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시는 그 시간에도 자기를 위한 신을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실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죄보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러한 우상을 만들어 내는 자들을 가장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물질과 공간 속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간 속에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나중에 이 시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드릴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물질이라는 두 영역 속에서 살아갑니다. 제한된 이성의 인간은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물질과 공간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시간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합니다.
시간은 단지, 그것이 흘러가면 물질이 늙어지고, 훼손되고, 죽음으로 향한다는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시간은 인간에게 두려운 영역입니다. 그렇게 시간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공간과 물질 속에 숨는 것입니다. 마치 이 공간과 물질이 전부인양 시간을 외면하는 것이지요. 물질과 공간은 시간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사는 연습과 훈련을 하기 위해 공간과 물질 속을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공간과 물질 속에서 행복을 찾고 심지어 공간과 물질로 하나님의 형상까지도 만들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매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 속에 존재하시기에 물질로 하나님의 형상을 공간 속에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질과 공간 속에서 감지되지 않는 하나님을 굳이 물질과 공간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것이 바로 인간의 죄 성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롬 1:18-23)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자기들의 배를 위한 해결사로 하나님을 만들어 버리는 것에 대해 진노하신다고 하십니다. 오늘날도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하나님을 ‘아피스의 암소’와 ‘하돌의 황소’ 취급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분명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셨습니다.
(빌 4:19)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나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광 가운데서, 그분의 풍성하심을 따라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우시는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주시는 은혜의 방편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기적으로 이스라엘을 도우신 것은 은혜의 방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을 배불리 먹게 하고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뭐였습니까?
(출 19:5-6)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 지니라“
하나님은 온 열방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통해 알리고 싶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가를 이스라엘의 삶을 통해 알려서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시려는 목적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편의를 제공하고 그들을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은혜의 방편을 목적으로 삼아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그러한 것을 채워 주는 잡신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게 여호와든, 금송아지든 자기들의 필요만 채워주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똑같은 일이 예배당에서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시키시는 것입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그 길에 하나님의 자녀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적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자기들의 필요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어찌 바른 순례자이겠습니까? 우리는 아무 데나 발길 닿는 데로 가는 순례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확한 목적지가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대학생들이 가끔 조국 통일을 기원하면서 국토의 최남단인 마라도에서 판문점까지 국토 순례를 합니다. 목적지는 판문점입니다. 그리고 그 순례의 목적은 통일 기원입니다. 목적과 목적지가 분명합니다. 그 20박21일의 대 장정기간 동안 숙박과 식사, 속옷, 신발 같은 것들이 본부로부터 공급이 됩니다. 그것은 그 대장정을 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입니다.
사실 많이 불편합니다. 그렇지만 목적이 있고 가야할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조금 맛없는 식사라도 불평 않고 먹습니다. 잠자리가 불편해도 참습니다. 그런데 그 대장정을 하는 사람 중에 ‘나는 그렇게는 못 가, 잠은 꼭 five star 호텔에서 자야하고, 식사는 항상 갈비와 스테이크를 먹어야 하고, 신발은 항상 나이키를 신어야 한다고’ 늘 본부에 요구하고, 남들에게 멋진 모습만 보이고 싶어서 조금만 더러워져도 세탁을 요구하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세요. 그 사람은 목적지까지 가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가는 길에서 뻐기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국토 대장정의 의미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국토 순례의 의미는 목적을 가지고 정해진 목적지까지 가는데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의 인생은 하나님 나라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짧은 여정일 뿐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은 영원 속에서 끝없이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삶을 바라보며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이 대 장정의 길을 성실하게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순례의 길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 공급하십니다. 우리는 그 하늘 본부에서 공급되는 지급품이 조금 불편하고 조금 마음에 안 들어도 목적지를 향해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나는 나이키를 원했는데 본부에서는 그 것의 십분의 일 가격인 ‘나이카’를 주었다고 해도 우리는 허허 웃으며 가야 하는 것입니다. 걷는 데 불편하지 않으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그까짓 신발짝이 아니니까요.
(마 6:24-34)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 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 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 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 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 하니라”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 땅의 순례 길에서 필요한 것들만을 졸라대는 사람들을 가리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들을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진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진짜 순례자인지 아니면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진 가짜 순례자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1) 첫 번째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필요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하박국 3장의,
(합 3:17-18) “17 비록 (1)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2)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3)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4) 밭에 식물이 없으며 (5) 우리에 양이 없으며 (6)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7절의 내용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활하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비록 내 필요가 채워지지 않아도 하나님만으로 기뻐 할 수 있는 자가 진짜 순례자입니다.
(2) 두 번째로 여러분이 확인하셔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추구하고 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을 안 그 첫날부터 매일 매일 그 하나님을 알고 싶어야 합니다. 그분이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추구하는 소원과 갈망이 있는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호 6:1,3,6)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벧후 3:17-18)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 지어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면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언제든지 우리의 욕심을 투사해서 스스로 신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을 알아 가는 데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정확히 알아야 엉뚱한 신 만들어 놓고 치성 드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전래 동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엄마가 장에 가시면서 요즘 늑대가 마을에 출몰해서 아이들을 잡아먹는다고 하니 엄마 이외에는 절대 문을 열어 줘서는 안 된다고 신신 당부를 하고 가십니다. 어머니가 장에 가시자 어김없이 늑대가 찾아왔습니다. 늑대는 밖에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이들이 묻습니다. ‘누구세요?’ 늑대가 대답합니다. ‘나다, 엄마다’
아이들은 그 목소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늑대는 엄마의 목소리를 연습해서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아이들이 엄마의 손을 문 밑으로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역시 늑대의 발과 엄마의 손의 차이를 아는 아이들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늑대가 흰 밀가루를 묻혀서 엄마의 손처럼 꾸몄습니다. 늑대는 참으로 집요합니다. 아이들을 잡아먹겠다는 일념으로 끝까지 덤빕니다. 그 때 아이들이 엄마와 늑대의 구별을 잘 못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금방 문을 열어 주었겠지요?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버지에 대해 정말 잘 알고 계십니까? 마귀가 아버지 흉내를 내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할 때 정확히 구별해서 문을 안 열어줄 그런 분별력이 있으십니까? 오늘날도 이세벨이 발람이 니골라당이 끊임없이 여러분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거짓 가르침에 절대 문을 여시면 안 됩니다. 더욱더 긴장하시고 더욱더 진지해 지세요. 혹 이 다음에 저 천국에서 지옥을 내려다보며 ‘집사님 왜 거기 계세요?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왜 거기서 그렇게 타고 계세요?’ 이런 슬픈 해후가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가르침인 그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이세벨의 자녀들을 사망으로 죽여 버리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나중에 a bed of suffering, 고통의 침대, 환난의 침대, 심판의 침대에 던져지지 마시고 지금 여러분의 신앙을 재확인하세요. 하나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정말 바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 혹시 나는 이기적인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예배당 안에서 아피스의 암소와 하돌의 황소를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진지하게 여러분의 신앙을 돌아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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