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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가나의 혼인잔치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6. 29.

 

 

가나의 혼인잔치

 

(김성수 목사)

 

 

(요 1:50-2:1-11)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2:1 사흘째 되는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에 계셨고, 2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3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기를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였다. 4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1)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로 번역할 수도 있음 5 그 어머니가 일꾼들에게 이르기를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하였다. 6 그런데 유대 사람의 정결 예법을 따라, 거기에는 돌로 만든 물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물 두세 동이들이 항아리였다. 7 예수께서 일꾼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그래서 그들은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웠다. 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떠서, 잔치를 맡은 이에게 가져다 주어라" 하시니, 그들이 그대로 하였다. 9 잔치를 맡은 이는, 포도주로 변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물을 떠온 일꾼들은 알았다. 그래서 잔치를 맡은 이는 신랑을 불러서 10 그에게 말하기를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데, 그대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구려!" 하였다. 11 예수께서 이 첫 번 2)표징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시니,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요한복음의 서론 부분을 마치고 본론 부분으로 들어 왔습니다. 본론 부분은 크게 둘로 나뉘어지는데 그 첫 번째 부분이 2장1절부터 12장 50절까지이고 그 첫 번째 부분을 ‘표적들의 책‘’book of signs'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본론의 부분이 13장부터 20장 31절까지인데 그 부분을 ‘영광의 책‘’book of glory'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그 본론의 첫 번째 부분인 표적들의 책 중에서 가장 첫 번째 표적인 가나의 혼인 잔치에 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가나의 혼인 잔치의 내용에 1장 50절과 51절을 연결시켜 읽었는지 아세요? 예수님께서는 1장 50절과 51절에서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표적들의 책입니다.

 

그러니까 이 본론의 첫 번째 부분인 표적들의 책에 나오는 일곱 개의 표적들은 단순히 신기한 기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늘이 열리는 것’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제가 그 것을 확인시켜 드리기 위해서 첫 번째 표적과 1장 마지막의 주님의 말씀을 연결시켜 읽은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표적’ ‘세메이온’이라는 단어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표지판‘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 앞에 붙어 있는 남가주 서머나 교회라는 간판이 있지요?

 

그러나 그 간판이 서머나 교회는 아니지요? 그 간판은 실체인 서머나 교회를 가리키는 하나의 표지판일 뿐입니다. ‘표적’ ‘세메이온’이라는 단어는 바로 그러한 표지판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공부하면서 그 기적 자체에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되고 그 기적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를 올바로 파악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요한복음의 기록 배경을 조금 알고 가시면 그 표적들에 대한 이해가 훨씬 용이하실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에는 헬라 적 배경과 유대 적 배경이 둘 다 들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플라톤 사상과 스토아 사상 그리고 BC와 AD의 경계에 걸쳐 활동한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 Philo의 글들 그리고 유대사상과 헬라 영향을 동시에 보여주는 일종의 신학적 문서들이었던 Corpus Hermetica 의 사상 구조와 어휘에 있어서 비슷한 점들이 꽤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으로 헬라 적 이원론의 사상구조와 어휘들이 요한복음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헬라의 사상과 문화에 푹 젖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이 의도적으로 복음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이해의 편이를 위해 헬라 적 사상과 헬라 적 어휘들을 차용하여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플라톤에 의해 정리된 헬라 세계 전체의 근본적인 사상구조인 이원론은 영과 물질세계의 이원론입니다. 이원론은 불변하는 영의 세계를 진리(reality), 본질(essence), idea의 세계로 보았고 한정적이며 한시적인 물질의 세계를 idea의 세계의 복사판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물질 세계를 (copy, shadow, phenomena-현상)의 세계라 불렀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본질적인 것같이 보이나 사실은 본질이 아니고 모조품이나 그림자와 같은 가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요한복음에서 그대로 묻어나고 있는데, 요한은 요한복음 1장이나 3장에서 사람의 아들 인자, 즉 주님을 윗 세상(Ta anw)에서 아래 세상(Ta katw)으로 내려오신 분으로, 그리고 그의 백성들을 다시 밑(Ta katw)에서 위(Ta anw)로 데리고 올라가실 분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3장에서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그 단어를 직역하면 ‘위에서부터 나야한다’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위에서 오시는 성령의 힘에 의해 나야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위아래의 세계관들을 지칭하는 어휘들이 전부 헬라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표현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전통적인 천국 관은 헬라의 이원론의 영향을 심하게 받은 것이지요. 그래서 ‘천국이 이미 이 땅에 와 있다‘라고 말을 하면 모두들 의아해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은 빨리 벗어나야 할 물질세계이고 천국은 저 멀리 하늘에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해 공간적 이원론에 입각해서 천국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헬라의 이원론이 ‘옳다 그르다‘를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당시의 사람들이 푹 젖어있던 헬라의 이원론을 설명의 방법과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주지시켜 드리면서 오늘부터 우리가 공부할 ’표적들의 책’ ‘book of signs' 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들은 모두 영적인 어떠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것으로 표현되어진 것일 뿐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총 일곱 개의 표적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표적이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사건이고 두 번째 표적이 왕의 신하 아들을 고쳐주는 사건입니다. 세 번째 표적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이고 네 번째 표적이 오병 이어로 5,000명을 먹이시는 사건입니다. 다섯 번째 표적이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이고 여섯 번째 표적이 소경을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입니다.

 

이러한 표적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 분이 이 땅에서 이루실 일이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표지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표적들을 오로지 아래 세상의 물질적인 현상으로만 깨닫고 그 물질적인 현상이 어떠한 영원한 진리를 계시하는지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표적들은 모두 ‘표적-오해-강해‘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일으키시고 유대인들이 그 표적을 자기들 방식대로 해석을 해서 오해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표적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를 강해하시는 방식으로 요한복음의 표적들의 부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의 기적은 3장과 4장의 니고데모의 이야기와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서 부연 설명되고 있고, 4장 26절에서 고관의 아들을 고치시는 것과 5장의 베데스다 못 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은 5장 16절부터 강해됩니다.

 

사람들이 주님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의 병을 고치시자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행했다고 해서 핍박을 합니다. 그들은 그 사건들을 통해 예수께서 종말에 치유와 생명을 가져오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멀어 그 하늘에 속한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그 때 예수님의 긴 강해가 시작되지요.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받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한 것은 ‘당신께서 안식일이 담고 있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완성하여서 죽음을 극복하고 삶으로 가득 찬 새 창조를 가져오는 표적’이라는 것을 강해하십니다. 그러니까 고관의 아들을 고치시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과 심판자이심을 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지 단순히 병든 자를 고친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을 강해해 주신 것입니다.

 

6장에 나오는 오병 이어로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물위를 걸어 호수를 건너시는 표적에 대해서는 6장 26절부터 해설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기 위해 그 분을 좇아갑니다. 그들은 주님이야말로 만나로 자신의 조상들을 먹이고 홍해를 건너게 했던 모세와 같이 자신들을 애굽의 노예생활과 방불한 그 로마의 압제에서 구출해 줄, 다시 말해 제2의 출애굽으로 이끄실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이 오병 이어를 통해 기대했던 것은 이 땅에서의 출애굽이었습니다. 오해지요. 예수님은 6장 26절부터 오병 이어의 표적은 하늘의 생명, 영생을 주실 하늘의 떡으로서의 자신을 표적 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7장과 8장에서 세상의 빛에 대한 사전 설명이 나오고 9장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9장과 10장에서 참 메시아 론으로 더욱 자세하게 해설이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소경을 고치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암흑 속에 들어있는 당신의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러 오신 주님의 사역에 대해 표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1장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표적이 나옵니다. 주님은 이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에 품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그의 백성들에게 참 생명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역시 못 알아듣고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그 때 주님께서 11장과 12장에 걸쳐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강해하십니다.

 

이렇게 표적들의 책은 모두 ‘표적-오해-강해’의 구조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인자 위의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늘의 생명력이 부어지게 되는 ‘복음’을 설명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을 세상에 보여 주신 것이지 단순히 기적을 보임으로 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거나 자신을 증명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 12:38-40)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 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여기에도 역시 ‘표적‘’세메이온‘이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주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자 주님께서 ’오직 내가 보일 수 있는 표적은 모두 선지자 요나의 표적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보이신 모든 기적들이 다 무엇에 관한 것이라는 말입니까? 요나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속에 들어 있다가 나옴으로 죽어야 할 니느웨가 회개를 한 것처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밤 낮 사흘을 땅 속에 계시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한 자들이 살아나게 되는 새 창조에 관한 것들이 바로 표적이 가리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이적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 분이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이 일으킨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거짓 사도들과 비교해서 그들이 바로 진짜 사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그 사도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복음으로 말미암게 될 새 생명의 탄생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도들을 통해 보여 진 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성령이 오시고 성경이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기적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 님 당시나 초대교회 때 기적이 필요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는 책도 없었고 이해 시켜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 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는 성경이 완성이 되었고 그 것을 이해시켜 주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이제는 기적이 필요 없게 된 것이지요.

 

이제는 기적으로 그리스도와 복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성령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안에 내주 하시며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이 가나의 표적이 담고 있는 영적 의미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 다섯 명이 마리아와 함께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합니다. 가나는 나사렛에서 3마일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마리아가 그 혼인집의 잔치 음식에까지 관여하는 것을 보면 그 집은 마리아와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을 것입니다.

 

혼인 잔치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에 혼인 잔치에 없어서는 안 될 포도주가 떨어집니다.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는 보통 수요일에 시작해서 일주일이나 길게는 이주일 동안 치러집니다. 그래서 혼인집에는 항상 충분한 포도주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혼인집에 포도주가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는 잔치일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을 합니다. 서둘러 결론지어 말씀을 드리면 그 말의 의미는 ‘이제 네가 이 혼인 잔치에서 기적을 일으킴으로 너의 메시아 됨을 사람들 앞에서 증명해 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다소 무례하고 매정한 대답을 하십니다. 여기서 쓰인 ‘여자여‘’귀네‘라는 단어는 사실 무례한 단어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리아에게 요한을 가리키며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 이다’라고 하셨을 때도 똑같은 단어 ‘귀네’가 쓰였습니다. 이 단어는 여자를 아주 높여 부르는 존칭입니다. 그 단어에는 존경의 의미까지 들어 있습니다.

 

호머의 일리아드 오딧세이에 보면 오딧세이가 그의 아내 페넬로프를 항상 ‘귀네’ ‘여자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클레오파트라를 ‘귀네’ ‘여자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존경의 의미가 있다고 해도 자기 혈육인 어머니에게는 적합한 단어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이제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로서의 공생애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얼핏 보면 이 말씀은 마치 주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안 만드시겠다는 듯 한 의미로 들립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중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런 경우가 또 있었지요?

 

(요 7:2-10)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비슷한 상황이지요? 예수님의 형제들이 초막절이 다가오자 예수님께 유대로 올라가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그 때 주님께서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오늘 본문의 내용과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안 올라가시겠다는 거지요. 그래놓고는 몰래 올라가십니다. 여기에 오늘 본문의 내용을 여는 키가 들어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라는 구절이 있지요? 주님은 ‘당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라는 요구에 ‘No'를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마리아나 7장에서의 예수의 형제들이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 기적이라도 일으켜서 메시아답게 자신을 세상에 증명해 보세요’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그런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성전에 올라가시는 일을 통해 주님은 하실 일이 있으셨습니다. 주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 종말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설명하셔야 했고, 절기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심으로 율법을 모두 지켜 내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치 안 하실 것처럼 말씀하시면서 그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 인간들이 요구하는 ‘힘으로 당신을 증명해 보시오’는 내가 하지 않겠지만, 난 너희의 그런 요구와 상관없이 내 일을 한다”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의 요구가 오늘날 교회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요구하는 것과 흡사하지 않으세요? ‘주님 주님의 힘을 좀 보여주십시오. 예수 믿는 나를 고지 꼭대기에 올려 주시면 세상이 나를 보고 주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게 오늘 날 예배당에서 드려지는 기도의 내용 아닙니까? 그런데 누구 또 다른 자가 주님께 그와 똑같은 요구를 했었지요. 누굽니까? 마귀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간 금식을 하신 후에 성령께서 주님을 마귀에게로 이끌고 가십니다. 그 때 마귀가 똑같은 요구를 하지요. ‘네 힘을 보여 봐, 너를 증명해봐, 그래야 사람들이 너를 메시아로 믿어줄 거야’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나요? 여러분, 주님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분이 아닙니다.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이나 우리의 소원을 기적처럼 이루어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서 너를 증명해 보라’는 마리아의 요구에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도 예수를 믿는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인생에 축복의 포도주를 얻어내는 것이라고 믿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주님께서 똑같은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얘야,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 때문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도말 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오염과 부패성을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씻어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그 주님에게 내 삶의 포도주를 채워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이 세상 잔치 집의 포도주를 구하는 마리아의 요구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대답을 하십니다. 조금 엉뚱한 대답 같지만 그 대답 안에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내 때‘’호라 무‘는 요한복음 내에서 만도 여러 번 나오는데 그 ’때‘가 가리키는 것이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요 7:30) “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 8:20)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 12:23)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 16:32)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요 17:1)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보시다시피 여기서 가리키는 ‘때’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의 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 인생의 흥을 돋우는 포도주를 만들어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라는 것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라는 주님의 대답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포도주를 위해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그 포도주가 채워지게 되었을 때도 역시 주님을 찾을까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의 인생의 목적이 오로지 하나님을 이용해 인생의 행복을 구하는 것이라면 그 행복이 채워졌을 때 그 때에도 과연 그에게 주님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자기의 모든 요구가 채워지게 되면 그들은 언제든지 주님을 버릴 수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간의 탐욕이라는 것이 끝이 없기에 끝까지 자신의 삶의 포도주를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뿐이지 그들은 자신의 죄를 사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시켜 가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힘을 추구하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삶에 물질이 채워지고 과학 문명의 발달로 편안한 삶이 찾아오게 되면 주님을 자꾸 자기의 삶 속에서 밀어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날 보십시오.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이기(利器)를 자꾸 쏟아내자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여전히 예배당에 와서 힘을 추구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 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신 직후 하인들에게 비어있는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여섯 개의 돌 항아리는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유대인들이 결례(缺禮)를 행할 때 쓰는 돌 항아리였습니다. 결례(缺禮)라는 것은 ‘청결하게 닦는 예식’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밖에 나갔다 들어왔을 때, 혹은 식사하기 전에 반드시 손과 발, 그리고 몸을 청결하게 닦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율법도 아니었고 그냥 장로들의 유전이었습니다.

 

(막 7:3-4)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돌 항아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유대인들이라면 그 항아리는 항상 맑을 물로 가득 차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항아리들이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그 비어있는 돌 항아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지어지지 않는 ‘형식주의에 빠져 버린 생명력 없는 유대교’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도 채워져 있지 않은 정결 예식 항아리,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열광적인 종교 행위에 광분하는 어떤 사람들이 생각나지 않으세요? 주님은 그 항아리들에다가 물을 가득 채우십니다. 그리고 참 기쁨과 참 행복은 어떻게 해서 오게 되는 것인가를 표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 물들이 모두 포도주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주로 ‘기쁨, 잔치, 희락‘을 상징합니다.

 

(시 104:15) “15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심지어 랍비들의 어록에는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도 없다’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그 정도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이었습니다. 성경은 지금 형식뿐인 유대교를 ‘참 기쁨을 상실한 잔치 집’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잔치 집이 참 기쁨을 회복한 잔치 집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뿌려져야 비로소 그 잔치 집이 참 잔치 집이 될 수 있음을 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의 진의인 것입니다.

 

왜 이 가나의 혼인 잔치가 일곱째 날에 등장하는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참 안식, 새 창조의 완성,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창세기의 안식의 날인 일곱째 날에 이 가나의 혼인 잔치를 등장시킨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철저하고 완벽한 논리를 가지고 빈틈없이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지요?

 

안식을 표적하고 있는 일곱째 날의 가나 혼인 잔치가 참 기쁨을 회복한 하늘의 잔치가 되기 위해서 어린양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가 그 잔치에 부어지는데 왜 여섯 항아리일까요? 안식을 상징하는 일곱 항아리이면 더 논리에 맞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일곱 개의 포도주 항아리를 완성하는 마지막 항아리를 우리가 한 번 찾아볼까요? 잔치를 잔치답게 완성하는 마지막 일곱 번째 항아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눅 22:20)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일곱 번째 포도주 항아리가 되셔서 그 잔치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주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에 ‘주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여러 번 반복했다시피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이 계시된 상태를 ’하나님의 영광‘’독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음과 공의 등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이 계시된 상태를 ‘하나님의 영광’ ‘독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 어떠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는지를 간단하게 살펴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창조‘라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지요.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이 이름도 없는 동네인 가나의 어느 잔치 집에 나타난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은 본질이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본질이 바뀌었다는 것은 곧 창조를 의미하지요. 주님은 가나라는 작은 시골 마을의 잔치 집에 들어가셔서 자칫 파토가 날 뻔했던 잔치 집에 창조의 행위를 보태심으로 그 잔치 집을 회복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 성령으로 내주 하십니다. 그 주님은 지금도 이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마치 저 유대의 시골 가나와 같은 우리 안에서 물로 제일 맛 좋은 포도주를 만들고 계십니다. 전혀 변할 것 같지 않았던 사람들이 조금 씩 조금씩 변해 가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창조를 하고 계심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도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보다 더 확실하게 변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저입니다. 저 말고도 정말 신기 하리 만치 변한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있습니다. 제가 요즘 우리 경호가 게시판에 글을 쓰는 것을 보면서 참 큰 은혜를 받습니다. 경호를 처음 만난 것이 벌써 4-5년 되는가 봅니다. 제가 서머나 교회가 개척되기 전 다른 교회 청년 부 담당 목사로 있을 때부터 알았으니까 꽤 오래 되었네요. 제가 처음 경호를 만났을 때 경호는 신앙과 기독교 교리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었습니다. 그냥 일간지 경제 부 기자 출신의 좌파 기질이 농후한 똑똑한 청년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경호를 보았을 때 꼭 대학 시절 저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기질이나 성품, 고집 같은 것이 어쩌면 그렇게 거울을 보는 것처럼 닮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청년부 예배 때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경호한테 기독교 교리 집을 비롯해서 열권이 넘는 책을 공개적으로 줬습니다. 다 읽어보라고요. 그리고 하나님께 정말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저 공산당이 참 주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그래서 저는 경호를 보면 마치 제가 낳은 자식 같습니다. 오랜 산고 끝에 출산한 자식, 아니 그건 좀 징그럽고 형제 같습니다. 우리가 ‘형제’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어떤 사람에게 ‘형제’라는 호칭을 쓰면 괜히 부르면서도 몸이 간지럽고 어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경호는 정말 형제 같습니다. 경호는 그 많은 책들을 샅샅이 다 읽고 마치 스펀지처럼 그 내용을 습득했습니다. 그러더니 질문을 해 대는데 정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바꾸고 계시구나 하는 확신이 들 정도로 급격히 복음 안으로 빠져 들어왔습니다. 그 것도 모자라서 여기까지 쫓아와서 계속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요즘 경호가 교회 게시판에 올리는 글들을 보면 마치 제 입안의 혀가 주인 허락도 안 받고 다른 곳에 나가서 제 마음대로 주인의 말을 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냥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저 공산당이 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복음의 전사로 바뀌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오죽하면 동생들이 ‘최경호가 저렇게 예수를 믿는 것을 보니 세상의 종말이 오긴 오나보다’하고 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창조가 오늘도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여러분들 속에도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영광으로 나타나고 있나요?

 

두 번째로 나타난 영광은 ‘불가능한 곳에 쏟아지는 주님의 기쁨‘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주님은 우리 백성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타락한 인간은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 집처럼 참 기쁨을 얻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러한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참된 하늘의 기쁨을 쏟아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엄숙과 경건을 너무 강조하는 바람에 그 기쁨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오면 무조건 엄숙해야 하고 조용해야 하고 반듯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습관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포도주로 상징되는 기쁨이 회복된 잔치라는 생각이 안 들고 무슨 장례식 장에 온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오셨을 때 마치 모란봉 예술단 옷차림처럼 검은 치마에 흰 브라우스 입고 성경 책 옆구리에 낀 사람과 밝은 옷에 멋진 챙 모자를 쓰고 깔깔 거리고 웃는 사람을 보았을 때 누가 더 신앙적인 사람처럼 보입니까? 입만 열면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는 아줌마와 입만 열면 깔깔거리면 웃는 아줌마 중에 누가 더 하나님의 기쁨을 회복한 사람처럼 보이세요?

 

여러분 우리가 예배당에 오는 것은 우리 아버지에게 나오는 것입니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나가는데 늘 그렇게 엄숙하고 경건하게 나가면 아버지가 기뻐하실까요? 물론 경거망동(輕擧妄動)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상하게 정형화되어 버린 것 같아요. 우리는 진동치 못할 하나님 나라를 이미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어떤 선물을 받고 그게 너무 좋으면 저절로 웃음이 나고 다른 이들에게도 괜히 친절을 베풀게 되고 작은 일에도 행복을 느끼게 되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기쁨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여러분에게 주시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빌 4:4-7) “4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구할 바를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께서 모두 다 들어주심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겠다고 하시나요? 아니지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쁨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마 11:28-29)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기도 역시 주님께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시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주님께 배우면 그 짐은 여전히 우리의 등에 남아 있을지라도 마음의 쉼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은 칠 흙같이 어두운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흥겨운 잔치 집으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즐거우십니까? 예수 믿는 것이 정말 즐거우세요?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의 삶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여러분 안에서 포도주가 충만하게 흘러넘치는 가나의 혼인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그냥 있으나 없으나 한 그런 작은 기쁨이 아닙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새로 만들어진 포도주는 무려 180 갤론에 가까운 양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항아리 하나에 두세 통이 들어간다고 했지요? 한 통이 보통 10 갤런 이니까 120에서 180 갤론의 포도주가 그 집에 흘러넘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 도 없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늘 부족합니다. 늘 빠르게 시들어 버립니다. 여러분이 새 집을 갖게 되었을 때 기쁘시지요? 그 기쁨이 얼마나 가던가요? 여러분이 갖고 싶었던 새 차를 갖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가던가요? 여러분의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이 몇 년이나 지속되던가요? 우리 아이가 USC에 들어가서 너무 기뻐하고 있었는데 옆 집 아이가 하버드에 들어갔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어떨 것 같으세요? 금방 그 기쁨이 반감이 되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기쁨은 절대적인 기쁨이 없습니다. 전부 상대적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이 땅의 기쁨으로는 그 욕망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까뮈의 글에 나오는 마치 끊임없이 커다란 바위를 굴려 산꼭대기로 올라 가야하는 저주를 받은 시지프스의 삶 같은 것입니다. 저 꼭대기에만 올라가면 이 욕망이 채워질 것 같아서 열심히 바위를 굴려 올라가 보지만 그 꼭대기에 올라서자마자 내 욕망의 바위는 또 저 아래로 굴러 떨어집니다. 금방 그 기쁨과 만족이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또 그 욕망의 바위를 굴려 산꼭대기를 향해 전진합니다. 그 꼭대기에 올라가도 역시 그 욕망의 바위는 저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충만히 채워지고 흘러넘치는 기쁨입니다.

 

(롬 14:17) "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갈5:22)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보세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온 사람들은 그 삶 속에서 ‘희락’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여호와로만 기뻐하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상황이 주어져서 혹은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짐으로 기뻐하는 자가 아닌 오직 여호와만으로 기뻐하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것이 바로 성도의 힘이 되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이 땅을 잘 살아내는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느 8:10) "10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어떠세요?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 때문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시는 분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만 기뻐하시는 분들이십니까? 여러분께서 정말 하나님으로만 기뻐하시는 분들이라면 여러분은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으실 것입니다.

 

(합 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 속에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삶의 주어를 바꾸면 됩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마리아의 말의 주어가 ‘포도주’입니다.

 

(요 2:3)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그 때 마리아가 주님으로부터 들은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였습니다. 그런데 5절로 가보시면 마리아의 말의 주어가 바뀝니다.

 

(요 2:5)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무엇이든지 그 분이 하라는 대로하라‘입니다. 포도주에서 눈을 돌려 그 분께 주목하게 되는 그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여전히 여러분의 삶의 포도주에만 관심을 두고 계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까지도 이 세상의 포도주에만 관심을 두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늘 부족하고 우울하고 초조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님께서 ’너의 잔치 집을 엎어 버려라‘하시면 엎어 버리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네가 좋아하는, 너의 입맛에 맞는 포도주가 아닌 나의 피를 마셔라‘라고 말씀하시면 이 세상의 포도주를 즉시 포기하고 주님의 피를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그 상황이 너에게 최선의 상황이다’하시면 그냥 우리의 상황 속에서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에게 참 기쁨이 회복이 되는 것이고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이 새록새록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Do whatever he tells you."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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