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도다! 하나님의 능력
(김성수 목사)
(엡 1:15-23) “15 그러므로 나도, 주 예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5)사랑을 듣고서,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사랑을'이 없음) 16 여러분을 두고 끊임없이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내 기도 중에 여러분을 기억합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19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20 6)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그, ('그는') 21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22 7)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시 8:6)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너희가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고 , 너희가 받은 그 영광스러운 상속의 풍성함을 알게 하시고 또 오늘 공부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교회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즉 예배당 출입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정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분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알며 내세를 준비하며 진지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제 생각엔 10% 미만일 것 같습니다. 일선에서 직접 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사역을 한지 벌써 15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제가 찬양 사역으로 처음 집회를 시작한 것이 1990년이니까요.
수백 군데 교회의 초청을 받았었고 수많은 집회를 열었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많은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만났고요.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향한 진지함을 가진 사람을 그렇게 많이 못 만나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당에 가는 것을 취미 생활의 일환으로 삼습니다. 현대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교양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에 가자니 왠지 음산한 기분이 들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성당이나 예배당엘 나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마치 부적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안가면 찝찝하고 혹시 재수 없을까봐 그냥 나가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당에 가는 것을 친목의 차원에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청년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청년부 사역을 오래 했었고 또 저도 그 대학 청년부를 지나왔기 때문에 너무 잘 알지요. 그들은 신앙이라든지 신학이라든지 교리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들이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도 사실 관심 없습니다.
그냥 자기를 알아주고, 자기가 놀기 좋은 그런 공동체에 가서 사람 만나는 재미를 누리기 위해 예배당에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핑계는 좋지요. “바로 알고 있는 내가 아직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저들에게 전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정말 그런 의무 때문일까요? 아니요? 그 “사람 만나는 즐거움”을 놓치기 싫은 것입니다. 세상은 참 신자들만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며 애 써도 이겨 나가기 힘든 겁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의 위력을 너무 모르는 거예요. 이렇게 정말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목숨 걸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참 드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틀린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노아의 때와 같고 소돔과 고모라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노아 때 몇 명 구원받았습니까? 8명 소돔과 고모라에서는요? 세 명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게을러집니다. 점점 자기중심적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큰 교회를 선호합니다. 아무 일 안하고 슬쩍 뒤에 앉아서 얼굴 도장만 찍고 가도 누가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사람을 골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습니다. 그리고 큰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고야 어떻게 교회가 이렇게 커질 수 있겠는가?” 하는 세상 경영 논리에 근거한 인간의 판단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거기에 가면 안전할 것 같은 착각을 합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항상 참 교회들은 소수의 자리에 있었고 권세와 주도권은 잘 못 가고 있는 사람들이 쥐고 있었습니다. 종교 개혁 당시 교회는 총체적으로 잘 못 가고 있었고 잘 못 가고 있는 사람들을 지적한 사람들은 아주 극 소수였음을 잊지 마십시오.
세상은 기독교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십자가를 걸고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교리도 거의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다 마찬가지네 뭐” 이런 반응을 받아냅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것 같지만 기독교의 핵심을 왜곡 시켜버립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위대한 선지자이시지만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시다. 우리는 위대한 박애주의자이신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최선을 다해 착하게 선하게 살자. 취지는 좋지만 이것은 이단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도 있다”라고 하는 신인 협력 설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하고 공짜로 받을 수 있느냐는 주장입니다.
성경에서 행위라고 하는 것은 acting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행위란 인과율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고 하는 인과율, 그것 또한 이단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하나님께서 마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공부하고 나면 여러분이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에 대해 정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능력”하면 무슨 신유의 은사나 예언의 은사 같은 신비적인 것과 물질 적인 축복 같은 것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그러한 것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담배 끊은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간증하고 다닙니다. 물론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그런 것으로만 이해하고 계시다면 우리 하나님의 능력은 정말 가난한 것입니다. 선방의 스님들도 기도하고 안수해서 병 고칩니다. 방언이나 예언은 다른 종교에도 다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귀신들린 여인이 점을 쳐주는데 얼마나 잘 맞추는지 그 여종의 주인이 그것으로 수입을 삼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약중독자가 이 한번 악 물고 딱 끊어버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보다 안 믿는 사람이 더 부자가 많습니다. 그럼, 고작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자기들이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그런 보잘 것 없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그렇게 가난하지 않습니다.
19절을 보면 사도에게 하나님의 능력은 그냥 “능력”이라는 말로만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짧은 구절에 능력, 힘 이라는 단어가 각기 다른 단어로 3가지나 나옵니다. 뒤나미스, 크라토스, 이스퀴스 전부 능력, 힘 , 강력 이런 뜻입니다. 특히 마지막에 나온 이스퀴스(mighty)는 하나님의 힘, 하나님 자신의 능력의 진수,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고유한 능력을 뜻합니다. (mighty, omnipotence) 그리고 19절 앞부분을 헬라어로 보면 “휘페르발론/ 메게또스/ 테스/ 두나메오스”입니다.
여기서 휘페르발로는 훨씬 능가하다(surpassing, exceeding)라는 뜻입니다. 메게또스는 (greatness)위대함을 뜻하는 것이고 뒤나미스는 능력, 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하나님의 능력은 위대함을 훨씬 능가하는 커다란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하나님만의 고유한 능력, 그 위대한 능력이 고작 인간 스스로도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그런 것이겠으며 사탄도 줄 수 있는 그런 예언이나 신유 같은 신비하다고 하는 능력이겠느냐 말입니다. 그럼 그 능력은 어떤 능력이며 사도는 어떤 능력을 알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냐? 그것은 조금 있다가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구요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사도는 그 위대한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능력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은 이미 교회 안에 주어졌고, 사도는 교회가 그 능력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능력을 주옵소서.”가 아닙니다. “능력을 알게 하옵소서.”입니다. 능력이 주어진 것은 이미 완료입니다. 우리 안에 베풀어진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더 많이 알게 해 달라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그 능력은 고정적이고 잠재적인 능력이 아니라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능력입니다. “역사하심”이라고 번역된 “에네르게이아”라는 단어는 활동력, the working power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능력이 지금 우리 안에서 working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단어 하나하나에 놀라운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능력은 바로 이러한 능력입니다.
(사 40:12-28) “12 누가 바닷물을 손바닥으로 떠서 헤아려 보았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어 보았느냐? 누가 온 땅의 티끌을 되로 되어 보고, 산들을 어깨 저울로 달아보고, 언덕들을 손저울로 달아 보았느냐? 13 누가 주의 영을 헤아릴 수 있겠으며, 주의 조언자가 되어 그를 가르칠 수 있겠느냐? 14 그가 누구와 의논하시는가? 누가 그를 깨우쳐 드리며, 공평의 도리를 가르쳐 드리는가? 누가 그에게 지식을 가르쳐 드리며, 슬기로운 처세술을 가르쳐 드리는가? 15 그에게는 뭇 나라가, 고작해야,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 물이나, 저울 위의 티끌과 같을 뿐이다. 섬들도 먼지를 들어 올리듯 가볍게 들어 올리신다. 16 레바논의 삼림이 제단의 장작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 곳의 짐승들도 번제물로 드리기에 충분하지 않다. 17 그 앞에서는 모든 민족이 아무 것도 아니며, 그에게는 사람이란 전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18 그렇다면,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어떤 형상에 비기겠느냐? 21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가 전해들은 것이 아니냐? 너희는 땅의 기초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알지 못하였느냐? 22 땅 위의 저 푸른 하늘에 계신 분께서 세상을 만드셨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메뚜기와 같을 뿐이다. 그는 하늘을, 마치 엷은 휘장처럼 펴서, 사람이 사는 장막처럼 쳐 놓으셨다. 23 그는 통치자들을 허수아비로 만드시며, 땅의 지배자들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드신다. 24 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풀포기와 같다. 심기가 무섭게, 씨를 뿌리기가 무섭게, 뿌리를 내리기가 무섭게, 하나님께서 입김을 부셔서 말려 버리시니, 마치 강풍에 날리는 검불과 같다. 25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너희가 나를 누구와 견주겠으며,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26 너희는 고개를 들어서, 저 위를 바라보아라. 누가 이 모든 별을 창조하였느냐? 바로 그분께서 천체를 군대처럼 불러내신다. 그는 능력이 많으시고 힘이 세셔서,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나오게 하시니,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불평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불만을 토로하느냐? 어찌하여 "주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는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존재이시며 그 능력 또한 우리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 우리 안에서 working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이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와 계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해야, 달아, 별아’ 하고 부르시기만 하면 그 흑암에 빛이 생기고 혼돈과 공허가 별들로 채워지는 그 창조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지금 동일한 창조를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믿겨지십니까?
그럼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공부를 끝내고 돌아가실 때에는 “구원의 확신” 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시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지겹게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을 물어보고 있는데, 그런 것은 물어보는 게 아니에요. 혹 그들이 물어오면 여러분은 이것을 근거로 대답을 해 주십시오. 본론을 그리로 몰고 가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에게 완벽한 환경을 제공하셨고 그들은 무죄한 자였으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거기에 사탄이 등장합니다. 분명 그 자는 인간보다 먼저 창조된 천사입니다.
그가 어떤 경위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타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힘이 얼마나 센지 성경도 그의 힘이 하나님 다음으로 세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그 완벽한 환경에 무죄한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있던 인간이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 타락을 했겠습니까? 인간은 타락을 하게 되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기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은 total depravity, total inability 전적인 타락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을 가리켜 “총명이 어두워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나방이 빛을 향해 저절로 움직이게 되는 것처럼 (광극 성) 죄를 향해서만 달려가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롬 5:12) “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렘 13:23) “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렘 17:9) “9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
(고전 2:14)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롬 8:7)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1:28-32) “28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게, 타락한 마음 자리에 내버려두셨습니다. 29 사람들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수군거리는 자요, 30 중상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불손한 자요, 오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꾸미는 모략꾼이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신의가 없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입니다. 32 그들은,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공정한 법도를 알면서도, 자기들만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이런 자들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죄를 벌하셔야 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롬 1:18)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 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의 온갖 불경건함과 불의함을 겨냥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케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요 3:19)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우리는 반드시 정 죄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한 무리를 그 사망에서 건지시고 ‘not guilty’라는 판결을 내리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칭의(justification)하셨습니다. 선물로 칭 의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칭 의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인간을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님 안에다가 자기가 구원할 모든 백성들을 넣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에게 guilty판결을 내리시고 벌로 그를 십자가에 달아 죽여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낸 완벽한, 당신이 만족하실 그 삶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어떻게 그 게 가능하냐고요? 말도 안 된다고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입니다.
(롬 1:16)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하나님의 능력이 구원을 우리에게 가능하게 만드셨고 그 것이 복음입니다.
(살전 1:5)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우리의 구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어있던 자들인데,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것을 깨달을 수도 없고 요구할 수도 없는 자들이었는데 그렇게 죽어야 할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1) 눈을 뜨게 하시고
(2) 성경에 관심을 갖게 하고
(3)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죄송하게 만들고,
(4) 거룩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게 만드셨습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셨습니까? 어떤 집회에 가서 뜨겁게 은혜 받고 여러분이 예수를 믿겠다고 결단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된 것인가요?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능력이 역사를 하셨는지 보세요. 오늘 본문 20절 볼까요?
(엡 1:20-22)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사도가 에베소 신자들이 그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하고서 그 능력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시고 살리신 사건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님 안에서 역사 하시자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셨습니다. 살려 내셨을 뿐 아니라 하늘로 올리셔서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만드셨고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우리에게 동일하게 임한 것입니다. 왜 사도가 하나님의 능력을 이야기하면서 예를 들기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려 내신 것을 드는지 아십니까? 그만한 예는 성경에 많지 않습니까?
(1) 천지가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2) 홍해가 갈라졌고
(3) 노아의 홍수도 있었고
(4)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로 들까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 가장 큰 기적은 천지창조도 아니고 노아의 홍수도 아니고 홍해가 갈라진 것도 아니고 바로 죄인인 여러분과 저의 구원이 가장 큰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2장으로 가시면 바로 그 예수께 임했던 능력이 우리에게 임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엡 2:1-2)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께 역사 하셨던 그대로 우리에게 역사 한 것입니다. 이렇게 도저히 불가능한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죽이시면서 까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그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지금도 역사하고 (working)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실패되어질 수 없고 확실한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빌 1:6)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은 “내가 얼마나 신기한 것을 경험했는가? 내가 지금 얼마나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그 능력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가리켜“내 백성이 열심이 없어서 망하는 도다”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 하는 도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신앙을 북돋고 회개를 요구할 때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깊이는 우리의 열심으로 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깊이는 우리가 ‘얼마나 큰 체험을 했는가?’로 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깊어지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면 큰소리로 주여 삼창하고 목젖이 튀어나올 정도로 통성 기도하는 것이 여러분의 신앙의 깊이를 나타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도 예전에 정말 기도 잘했습니다. 제 기도에 제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갈 정도로, 옆에서 나보다 더 큰소리로 기도하면 밀리는 것 같아서 더 큰 소리로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가며 신앙생활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잘 알게 되었을 때에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언제 흔들리지요? 자기 꼴을 인식하게 될 때, 그렇지요?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에 대해서도 알고, 우리가 받을 영광스러운 기업의 풍성함도 압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사는 꼴을 보면 도저히 자기는 거기에 안 어울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가 진짜 구원받은 게 맞나?”하고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구원을 어떻게 해서든지 지켜보려고 수도사가 되기도 하고 금식을 하기도하고 거룩한 묵상을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 된 본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기가 뭔가 보탤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세워보겠다는 거지요.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그게 죄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다소 무리한 종교행위를 강요하는 교회는 부흥하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그 불안을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한다고 하면서 잠시 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확신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와 불신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너희가 너희 안에 역사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알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그 위대한 능력을 알게 되면 너희가 그렇게 흔들릴 때, 너희를 그 죽음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해 내고, “아, 그 지경에 있던 나를 건져내셔서 이렇게 예수를 믿게 하시고 성경에 대해 궁금하게 하신 분이면 당연히 나를 천국까지 끌고 가시겠구나,” 하고 끝까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죽일 정도면 내가 이 정도 잘 못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절대 놓지 않으실 거라는 확신에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이 정도로 사랑하시는 구나, 이렇게 많은 것을 내게 베푸셨구나, 그러니 이제 절대 나를 포기하시지 않으시겠구나,” 분명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 지키면 너는 내 백성이고 못 지키면 넌 내 백성 아니다“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 로라, 그러므로 너희는 내 말을 들으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구원받은 자이므로 법을 지키라 하시지 “안 지키면 구원한 거 취소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신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조금 잘 못 살고 있다고 해서 “내가 정말 구원받은 거 맞나?” 이러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고민하신다는 것 자체가 여러분은 구원받으신 거예요. 시체는 그런 고민이 없다니까요.
항상 우리를 점검하고 채찍질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구원 자체가 흔들린 다는 것은 여러분이 아직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알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난, 죄 안에서 나고 죄 안에서 잉태된, 죽어있던 우리를 아들을 죽이기로 결심하시면서 까지 살려 내신 그 능력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품 하나 못 고치시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못된 습관 하나 못 끊게 하시겠어요? ‘지금은 이렇지만 그 능력이 꼭 나를 점도 없고 흠도 없게 만드시고 마실 거야.’ 그리로 가는 겁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내신 그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지금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working)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우리를 흠도 티도 주름 잡힌 것이나 그러한 것이 없는 온전한 모습으로 만들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롬 8:38-39)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38 For I am persuad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or angels, nor principalities, nor powers, nor things present, nor things to come, 39 Nor height, nor depth, nor any other creature, sha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which is in Christ Jesus our Lord.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끊어 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다시 똥통에 들어가서 분탕질을 쳐도 하나님은 또 건져내서 씻겨 주실 겁니다. 물론 거기에 대한 징계가 있겠지요. 그러나 징계가 구원의 취소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실패의 자리에서 구원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 난 이런 놈인데 하나님께서 점도 없고 흠도 없게 만드신다니, 그 하나님의 능력은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구나 하고 감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이런 역설이 통하는 것입니다. “약할 때 강함이 되시느니라.”
나의 약함이 드러날 때 그 분의 강하심을 배우십시오. 그래서 “나 혼자 놔두셨으면 난 절대 이 자리까지도 못 왔다. 난 죽어 있던 자였기 때문에 지금 요만큼 자란 이 모습도 하나님께서 모두 해 주신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어르고 달래면서 ,때로는 징계를 동원하시면서 나를 만들어 내실 것이다” 그걸 배우세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살아 주시는 데 내가 못 할 것이 뭐가 있나?
(갈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로 이 고백을 하십시오. 우리는 단 한 시간도 이 하나님의 능력 아니고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젖어있던 습관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여전히 남아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나태함, 게으름, 태만 같은 것입니다. 그 것도 무섭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습관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그런데 잘 안되지요?
(롬 8:12-13)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게다가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할 것입니다. 그 사탄의 공격은 정말 위력적입니다. 유다서에서도 천사 장 미가엘이 사탄과 맞장을 뜨다가 꽁무니를 뺄 정도로 사탄은 셉니다.
(유 1:9) "9 천사장 미가엘은 모세의 시체를 놓고 악마와 다투면서 논쟁을 할 때에, 차마 모욕적인 말로 단죄하지 못하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고만 말하였습니다."
그 사탄이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벧전 5:8)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엡 6:12)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 강한 마귀가 우리를 우는 사자처럼 노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 우리가 어떻게 그 강력한 마귀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 악한 습관들을 끊어버릴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도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그것은 힘이 든 것입니다.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을 들어보셨나요? 이미1717년부터 있어왔던 비밀단체로 처음에는 석공들의 노조 길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사해동포주의 적 박애정신과 도덕성 등을 강조하는 사교집단처럼 보이지만 전 세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의 최고 권위자들과 저명인사들이 모여서 세계 제패를 노리는 세계시민주의와 세계단일 정부를 지향하고 사해동포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수 백 년 동안 프리메이슨의 일원들은 비밀히 자기들의 조직을 지켜왔고 전 세계 굵직굵직한 사건에 개입해 왔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배후에 프리메이슨이 있었고 각종 금융위기 등을 만들어내고 잠식시키고 할 수 있는 집단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CIA나 백악관의 뒤에 프리메이슨이 있다고 할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그들의 계급은 최하위 1도(degree)에서부터 최고위 33도까지 있으며 최고 우두머리를 grand master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상징은 호루스의 눈이라는 눈 알 모양과 피라미드, 삼각자와 콤파스 등입니다. 그들은 본인이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은 밝힐 수 있지만 다른 멤버의 신원을 밝히거나 그들의 비밀 의식 등을 공개하면 안 됩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사탄을 숭배 하는 사람들입니다. 1889년7월에 프리메이슨 그랜드마스터였던 알버트 파이크가 회원들에게 남긴 메시지가 이러합니다.
“절대권자이며 대 감찰 장이신 우리 신께서 32도31도30도에 있는 현제들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메이슨 교는 이제 막 시작한 자로부터 고위 지위에 있는 자들에게 계명성(Lucifer)의 교리의 순수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계명성은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불행하게도 아도나이(야훼)역시 하나님이십니다. 계명성이여! 빛의 신이고 선의 신이신 루시퍼께서 어두움과 악의 신인 아도나이와 인류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전 세계에 570만 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의 역사는 그들이 쥐고 흔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일 불짜리 지폐에 자기들의 상징 문양을 집어넣었겠습니까? 이들은 불교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습니다. 그들의 계급이 33도 인 것은 불교에서 하늘이 33개 있다고 말한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야의 종을 33번, 치는 것입니다. 프리메이슨 32도 진입 의식은 불교 아미타불 의식을 그대로 도입해서 쓰고 있습니다. 뉴 에이지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불교는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다는 자력 종교입니다. 누구나 부처라는 것입니다. 1987년 4월초파일에 성철 스님이 사회사상 연구소에서 나온 “큰 빛 큰 지혜”라는 책에 이런 법어를 써 놓았습니다.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중략-
아! 이 얼마나 거룩한 진리입니까? 이 진리를 두고 어디에서 따로 진리를 구하겠습니까? 이 밖에서 진리를 찾으면 물속에서 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 물론 불교를 공부한 저는 그 분이 무슨 말씀을 하려는지 잘 압니다. 견성, 만물의 바탕을 보게 되면 추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고 산에서 물을 보는 경지에 갑니다. 오도가 되면 자기가 거하는 어느 곳에나, 자기가 하는 모든 행위에 부처의 불성이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의 교리가 신이 되고자 하는, 자신이 최종 결정권자가 되려는 인간의 죄 성에서 발원한 것이라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은 너무나 잘 알지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탄은 성경에 계시된 대로 세상을 차근차근 공략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음란물들을 통해 어린아이들까지 성적 광란에 빠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범죄는 더욱 더 흉폭 해 집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이겨 낼 수 있습니까? 바로 그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의 크심을 아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그 능력으로 우리를 지키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일 4:4)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벧후 1:3)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유 1:24-25)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벧전 1:5)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요 17:11)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만들어 가시는 그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지금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어떻게 그 지저분하고 무서운 세상에서 우리를 뽑아내어 이렇게 수요일 날 예배당에 와서 앉아있게 만들어 놓으셨습니까? 이게 여러분 의지대로 되는 것입니까? 엉터리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드신 그 하나님의 능력, 사기꾼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시는 그 능력이 지금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잔인한 사울 안에 뚫고 들어가셔서 인자한 바울로 만드신 그 동일한 성령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안에 지금 살아 계신 것입니다. 그 위대한 능력이 우리 안에서 지금 우리를 끌고 가고 계십니다. 그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이십니다. 내가 이끄는 대로 살라고 끊임없이 속삭이고 계십니다.
(빌 2:12-13)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대로,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13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소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계속해서 의를 향한 소원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입니다. 우리 안에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존재합니다. 계속해서 우리의 의지를 자극하십니다. 그 때 자기 안에 있는 능력의 크심을 아는 자들은 “그래, 해보자” 하면서 이겨내는 것입니다. 나태함 게으름, 악한 습관들 이겨내 보는 것입니다. 사탄의 시험도 이겨내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 있는 능력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난 안 돼, 내가 어떻게 그걸 해?” 그러면 못하는 것입니다. 성화는 100%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100%인간이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분명 성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시작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팔 다리를 움직여서 우리가 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어느 날 일어났더니 나태함이 사라지고, 악한 습관이 없어지고 그렇지 않습니다.
(골 1:29)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내 속에서 역사 하시는 그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내가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못하면 징계를 받습니다. 다시 하게 만드십니다. 그런 불상사가 없도록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알고 그 힘을 의지해서 우리는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는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 working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나의 삶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내 삶을 사신다.” 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고 주름 잡힌 것이 없게 되기까지 우리를 끌고 가실 것입니다” 바로 그 능력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에 우리의 구원은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 우리의 경건함, 그런 것 의지하지 마십시오. 신비한 체험, 그런 것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을 무덤에서 일으키시고 보좌 우편에 앉히신 동일한 능력이 여러분을 그 자리로 끌고 가십니다. 그 일은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맙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성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죄를 불편해 하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지옥을 무서워하게 되었습니까?
이미 여러분 안에서 그 위대한 능력이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일은 반드시 완성됩니다. 우리는 사망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입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고 껄껄 웃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이 무섭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가난이 무서우십니까? 그런데 그깟 암이 무서우십니까? 여러분의 신분을 다시 확인하십시오.
'the words of tru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이세벨의 가르침 (김성수 목사) (0) | 2013.07.01 |
---|---|
[스크랩] 가나의 혼인잔치 (김성수 목사) (0) | 2013.06.29 |
[스크랩] 살해하는 자들과 맞아 죽는 자들 (김성수 목사) (0) | 2013.06.29 |
[스크랩] 나다나엘 (김성수 목사) (0) | 2013.06.28 |
[스크랩] 구원받은 살인자들 (김성수 목사) (0) | 2013.06.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