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하는 자들과 맞아 죽는 자들
(김성수 목사)
(창 4:8‐17) “8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9 주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10 주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11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너에게 효력을 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13 가인이 주께 말씀드렸다.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14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15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16 가인은 주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 17 ○가인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그 때에, 가인은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를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지난주에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어떻게 때려죽이게 되는 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인 인간이 자신도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는 욕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장 중(掌中)을 떠나게 되면 인간들은 그 즉시 자기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보다 힘이 세거나 자기보다 무언가 강한 것을 소유한 자기 이외의 다른 모든 존재들을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자들이 관계 속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질투와 분노입니다. 그렇게 질투와 분노로 가득 찬 인간들은 끊임없이 유형무형의 살인을 저지르며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 내 닫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모든 행위를 살인으로 규정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살인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형이 매겨져 있습니다. ‘사형’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죽음의 지옥으로 떨어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러한 가인의 자리에서 건짐을 받은 성도들은 이제 자신을 예배하는 자가 아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되기 때문에 질투와 분노와 미움에서 벗어나 오히려 살인자들의 삶을 부끄럽게 만드는 예배의 삶을 살게 되기에 이 땅의 가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아벨 들을 때려죽이려 혈안이 됩니다. 질투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땅의 아벨들에게 그 가인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아벨이 그러했듯이 아무 것도 아닌 nothingness의 모습으로 맞아 죽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좇으라는 것은 ‘네가 죽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렇게 맞아 죽어야 하는 상황들을 반드시 만들어 허락하십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정말 맞아 죽는지 아니면 똑같은 힘으로 받아치고 있는지, 인내하는지 분노를 폭발시켜 버리는지를 확인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반드시 가인들에게 맞아 죽는 고난의 순간들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험들을 통과해서 이긴 자들만이 정금 같이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삶은 참 힘이 듭니다.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예수를 알면 알수록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위대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스스로 목을 매달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는 모든 이들은 위대합니다. 저는 어느 때부터인가 예수를 믿으면서 여전히 예수 믿는 자로 살고 있는 분들이 존경스러워 졌습니다. 목회를 시작하고 오랜 시간 목회를 하고 계신 목사님들을 존경하게 된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나 할까요?
예수를 믿는 아벨 들이 세상의 가인들에게 맞아 죽는 삶은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합니다. 그만큼 힘이 듭니다. 죽는 것은 잠깐만 참으면 어찌 되던 끝나는 거니까 쉽습니다. 그런데 오감을 가지고 내 육신이 찢겨져 나가는 고통은 죽는 것보다 훨씬 힘이든 것입니다. 내가 가인에게 맞아 죽는 삶은 나의 옛 사람을 죽이는 삶인데 그 옛 사람이 나의 밖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살과 뼈와 피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옛 사람이 죽어 가는 과정이 어찌 쉬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그 고통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를 믿으면서 여전히 숨을 쉬며 살아내고 있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들이 곁에서 잘 견디고 계시기에 저도 힘내서 살고 있는 것이고요.
우리 모두는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을 죽이는 가인의 삶을 습관처럼 살아왔기 때문에 맞아 죽는 삶은 그렇게 녹녹치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도 어느새 가인이 되어 상대방을 오히려 때려죽이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아벨의 삶을 살게 되면 그렇게 남을 때려죽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도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고난의 삶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신앙이 성숙되어짐에 따라 점차로 옛 사람이 죽어지고 그 속에 심겨진 예수 그리스도라는 씨가 자라나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온전한 작품으로 출산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출산에는 반드시 열 달 동안의 수고와 산고의 고통이 따르듯이 우리가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출산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수고와 고통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원수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 같은 크기의 힘으로 대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가 주릴 때 먹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많이 먹고 배 터져서 죽어라‘는 마음으로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랑하는 마음으로 먹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때려죽이고 싶은 원수한테 먹을 것을 갖다 주라니요? 그게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하나님의 그런 요구는 정말 듣기도 싫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라니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이기 이전에 의지의 발동이라고 했지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러한 사랑의 모습이 원수들에게 지는 모습으로, 맞아 죽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자기를 밟는 원수에게 먹을 것을 갖다 바치는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눈에는 당연히 패배의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런 쪼다, 어떻게 저런 못 된 자들에게 당하고만 있어, 겁이 나서 그런가봐, 약해빠진 인간’ 그러나 그러한 아무 것도 아닌 자로서의 삶, 다른 말로 아벨의 삶은 가인의 머리를 밟는 삶인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원수들이 너희를 핍박할 때 그들을 축복하라고 하십니다.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악인들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벨이 쌓아놓은 숯불을 근거로 가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참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맞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벨 들이 가인들에게 맞아 죽는 모습이 세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예배당 안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마 23:35) “35 그리하여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죄 없이 흘린 모든 피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여기 보시면 의인 아벨과 의인 사가랴가 나오지요? 아벨과 사가랴는 죽임을 당한 의인의 처음과 끝의 모델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인들이 모두 어디서 죽임을 당했느냐하면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말은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하는 아벨 들은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에 의해 그들의 제단을 지키기 위한 열심에 의해 죽게 된다는 뜻과 함께 그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는 가짜 아벨들에 의해서도 자행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벨과 사가랴의 피가 ‘성전과 제단’사이에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이렇게 다툼과 시기와 질투와 피 튀기는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하나님의 참 백성, 아벨 여러분 그 때 여러분은 가해자가 되셔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아벨과 사가랴처럼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맞아 죽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가인들에게 맞아 죽는 이 땅의 아벨 들은 그들의 선한 삶으로 가인들의 심판의 근거를 하나님께 제공합니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예배를 상징하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세월이 흐른 후에, 종말에, in the end of the day'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심판의 객체에서 심판의 주체로 신분이 바뀌게 된 것인가? 오늘도 역시 본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8절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창 4:8)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제가 지난 시간에 설명해 드리기를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인 것은 고의 적 살인이었다고 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고하니라‘라는 단어의 목적어가 생략이 되어 있지만 70인 역이나 공동 번역을 비롯한 다른 여러 번역본에서는 ’들로 가자‘라는 목적어가 삽입이 되어 있다고 했지요? 가인은 동생 아벨을 질투하여 들로 데리고 나가 고의적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가인의 고의적 살인을 표명해 놓은 것은 성경이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을 가인의 라인과 아벨과 셋의 라인으로 분류하여, 어떻게 해서 성도들은 아벨과 셋의 라인, 즉 여인의 후손의 라인에 서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심어 놓은 장치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고하니라’라는 단어가 그러한 복음의 이야기로 이어지게 되는 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민 35:6) “6 ○너희가 레위 사람에게 줄 성읍들 가운데서 여섯은 도피성으로 만들어서, 사람을 죽인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게 하고, 이 밖에 별도로 레위 사람에게 마흔두 성읍을 주어라.”
여기 보시면 이스라엘에는 살인자들이 피할 수 있는 도피성이라는 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도피성은 레위인들이 거하는 성입니다. 이스라엘은 레위인들에게 마흔 여덟 개의 성 읍을 주었는데 그 중에서 여섯 개의 성 읍이 도피성이었습니다. 그 여섯 개의 성읍은 이스라엘 어느 성읍에서든 하루에 도착할 수 있는 성읍 이어야 합니다. 그 도피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민수기가 계속해서 설명을 해 줍니다.
(민 35:16‐28) “16 ○만일 쇠붙이 같은 것으로 사람을 쳐서 죽게 하였으면, 그는 살인자이다. 그러한 살인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17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들고 있다가, 그것으로 사람을 쳐서 죽게 하였으면, 그는 살인자이다. 그러한 살인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18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나무 연장을 들고 있다가, 그것으로 사람을 쳐서 죽게 하였으면, 그는 살인자이다. 그러한 살인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19 이러한 경우에 그 살인자를 죽일 사람은 피해자의 피를 보복할 친족이다. 그는 그 살인자를 만나는 대로 죽일 수 있다 20 ○미워하기 때문에 밀쳐서 죽게 하거나, 몰래 숨어 있다가 무엇을 던져서 죽게 하거나, 21 원한이 있어서 주먹으로 쳐서 사람을 죽게 하였으면, 그는 살인자이다. 그러한 살인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피를 보복할 친족은, 어디서 그를 만나든지 그를 죽일 수 있다. 22 ○그러나 아무런 원한도 없이 사람을 밀치거나, 몰래 숨어 있다가 무엇을 던지거나 한 것이 아니고, 23 잘못 보고 굴린 돌이 사람에게 맞아 그를 죽게 하였으면, 그 가해자가 피해자의 원수가 아니고, 더욱이 그를 해칠 의사가 전혀 없었던 것이므로, 24 회중은 이러한 규례에 따라서, 그 가해자와 피를 보복할 친족 사이를 판단해야 한다. 25 회중은 그 살인 혐의를 받은 사람이 피를 보복할 피해자의 친족에게서 보복을 당하지 않도록, 그 살인 혐의자를 그가 도피한 도피성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는, 거룩한 기름을 부어 성직에 임명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 26 도피성으로 피한 그 살인자가 도피성의 경계 밖으로 나갔을 때에, 27 마침 피를 보복할 친척이 그를 알아보고 도피성의 경계 밖에서 죽였으면, 그 친척에게는 아무런 살인죄도 적용되지 않는다. 28 살인자는 반드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대제사장이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 소유지가 있는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
도피성이라는 것은 고의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자가 아닌, 우발적인 살인자들이 도망하여 피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일단 우발적 살인자들이 도피성 안으로 들어가면 그 살인자는 복수하는 자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도피성 밖으로 나오면 그들은 죽임을 당합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피하여 숨은 도피성의 대 제사장이 죽으면 그들의 죄는 완전히 사해져서 밖으로 나와도 무죄한 자로 여겨지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우발적 살인자들이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을까요? 그것도 율법에 명기를 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도피성의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 고의적 살인과 우발적 살인은 죄 질 면에 있어서 현격하게 다른 것인데 똑같이 취급을 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라고 질문을 가지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고의적 살인과 우발적 살인이 죄 질이 다른 것인가요?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죄는 그 죄의 경(經)중(重)에 관계없이 전부 사형입니다. ‘사망’
그렇다면 이 도피성의 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가? 잘 들어보세요. 아담 이후로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다 살인자들입니다. 맞습니까? 자기 자신을 예배하는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행복과 안녕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 다 미움, 시기, 질투로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을 죽이는 살인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 사형입니다. 죄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고의적 살인자들이기에 사형을 당해도 쌉니다. 고살 자들은 전부 사형시키라고 하나님께서 법을 주셨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모든 살인자들 중에서 어떤 자들을 우발적 살인자로 간주해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똑같이 살인이라는 죄를 저지른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어떤 무리들에게는 그들의 죄명을 우발적 살인으로 명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발적 살인자들을 도피성으로 피하게 해 주셨습니다. 도피성은 말씀드린 대로 레위인 들의 성입니다.
그 곳은 레위인 들이 사는 성입니다. 레위인은 여러분께 설명해 드린 대로 하나님께 바쳐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영적 이스라엘,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발적 살인자들이 레위인 들이 거하는 도피성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발적 살인자들을 레위 인화시켜 버리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당신의 백성들이 이 땅에 살인자의 모습으로 원죄를 지고 태어나게 되지만 그 택하신 살인자들은 우발적 살인자들로 취급하여 레위인으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집어 넣으셔서 그 죄를 사해 주시겠다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우발적 살인자들이 온전히 사면이 되기 위해서는 그 도피성의 대 제사장이 죽어야 합니다. (민35:28) 그 때에야 비로소 우발적 살인자들은 살인자라는 오명을 벗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즉 레위인 들이 거하는 성의 대 제사장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우발적 살인자들은 이제 완전히 사면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은혜의 복음의 이야기가 도피성이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피성의 이야기는 바로 오늘 본문의 ‘고하니라’ ‘아마르’라는 단어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고의적 살인‘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고의적 살인자들인 가인들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가인의 살인을 고의적 살인으로 명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인은 용서받지 못할 고의적 살인자들의 대표자로 선 것이고 아벨과 셋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똑같이 살인자로 태어나 죽어야 하지만 ‘무죄한 자, nothingness'의 죽음으로 용서받은 자로 태어나게 되는 우발적 살인자들인 성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왜 가인을 고의적 살인자로 기록을 하고 있는 지 아시겠지요? 사실 여러분이나 저나 모두 다 고의적인 살인자들인 가인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전부 고의적으로 죄를 지으니까요. 고의적으로 내 이웃을 세 치 혀로 우리의 행동으로 죽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발적 살인자로 여겨 주시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면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게 감사하지 않으세요? 그렇게 용서받지 못한 자, 가인들은 이 땅을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지 한번 보세요.
(창 4:9) “9 주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가인에게 아벨의 행방에 대해 물으십니다. 하나님이 모르셔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고의적 살인자들인 이 땅의 가인들이 얼마나 뻔뻔스러우며, 자신들의 죄에 대해 둔감한 지를 독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가인은 금방 거짓말을 합니다. 자기가 때려 죽여 놓고 ‘내가 알지 못 합니다’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할뿐만 아니라 거기에 보태서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도 뻔뻔스럽게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고의적 살인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가인에게 가차 없이 그의 죄를 지적하시고 그를 심판하십니다.
(창 4:10‐15) “10 주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11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너에게 효력을 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13 가인이 주께 말씀드렸다.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14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15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10절의 ‘피 소리’에 쓰인 ‘피’ ‘담’이라는 단어는 복수입니다. ‘피들’입니다. 왜 아벨의 피 소리를 복수로 썼을까요? 땅 속에서 호소하는 아벨의 피는 이제 아벨 이후로 이 땅에 태어나 고의적 살인자들인 가인들에게 맞아죽게 될 수많은 아벨들의 피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 피들이 무엇을 호소하겠습니까? 아벨들의 피들은 가인들의 죄를 하나님께 폭로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맞아 죽은 수많은 아벨 들이 있기에 이 땅의 가인들은 하나님께 처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인들에게 맞아 죽는 우리 성도들은 선으로 악을 악답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벨의 피가 땅에서 호소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오늘의 이 이야기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계 6:9‐10)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맞아죽은 자들이 하늘의 참 성전 안의 제단 아래에서)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맞아 죽은 수많은 아벨 들이 하늘의 참 제단 앞에서 가인들을 고소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호소한다는 어구와 정확하게 같은 의미의 구절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여러분을 이 땅에서 맞아 죽게 놔두시는 지 아시겠지요? 계속해서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이제는 땅에서 저주를 받고 유리 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저주를 내리시자 가인은 즉각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벌이 너무 중합니다.’ 그 말은 ‘겨우 사람 하나 죽였는데 왜 나에게 그렇게 큰 벌을 내리십니까?’라고 대드는 것입니다. 고의적 살인자들은 자기들의 세 치 혀로 혹은 행동으로 수많은 아벨 들을 죽입니다. 그러나 그 살인자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큰 죄를 범한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자기 때문에 피를 철철 흘리며 죽음까지도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여전히 희희낙락인 사람들이 있지요? 그게 가인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들에게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어떤 사람 하나 때문에 그 사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죽어 가는 모습을 왕왕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늘 외톨이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잘못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맞아 죽고 있는 아벨 들을 욕합니다. 어처구니가 없지요. 바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자들의 조상이 이 가인인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형제를 죽여 놓고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항변하는 가인의 후예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고의적 살인자들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자들입니다.
가인은 뻔뻔스럽게도 자기에게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께 자기를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니 어떤 방책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십니다. 이 표에 대해서 구구한 해석들이 많습니다만 제가 전에 요한 계시록 강해 때도 간단하게 언급을 했던 것처럼 이 표는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고의적 살인자들, 즉 가인들에게 찍히는 사망의 표인 것입니다.
(롬 5:15) “15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생긴 일은, 한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 생긴 일과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더 넘쳤습니다.”
(엡 2:1) “1 여러분도 전에는 범죄와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고전 15:22)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이후 모든 인간들은 아담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렇게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는 ‘죽은 자들’이라는 저주의 표가 주어집니다.
(계 13:16‐17) “16 또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다 그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였습니다.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사람, 곧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나타내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팔거나 사거나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인간들이 받아야 할 저주의 표를 하나님의 백성들은 받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품에 안으시고 당신께서 직접 그 저주의 표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모두 그 저주의 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 안에서 받았기에 우리는 그 저주의 표가 상징하는 사망을 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따로 찍어주시는 다른 표를 받았습니다.
(계 14:1) “1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서 있었습니다. 그 어린 양과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어린양의 이름이 적힌 표를 받습니다. 다른 말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작은 예수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주의 표를 받고 동일하게 사망으로 떨어져야 할 우리 성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표로 주시고 그들을 당신의 아들들로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저주의 표를 면하게 된 것입니다. 가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의 표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한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세상 속에서 보호하시는 방법으로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는 것은 가인과 세상을 한 편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서로 죽일 필요가 없는 한 편‘ ‘그러면 가인들끼리는 그렇다 치고 가인 시대에 태어날 아벨 들이 가인에게 복수를 하면 어떻게 하는가? ‘ 아벨 들은 가인들에게 복수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 12:19‐21) “19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아벨 들은 가인들에게 맞아 죽는 역할로 이 땅에 태어나기 때문에 가인은 다른 가인들만 걱정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가인들을 모두 한 편으로 만들어 주심으로 이 땅에서 가인들이 아벨 들을 때려죽이는 자신들의 역할을 다 하기 위해 생존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가인은 죽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인들의 삶이 얼마나 악독하고 그 결말이 얼마나 처절한 지를 demonstration해야 하는 역할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 죽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떵떵거리며 아벨 들을 때려죽이는 역할을 충실히 해 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들을 살려 놓으시는 것입니다. 본문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이 칠 배라고 말씀하시지요? 칠은 완전수입니다. 이 땅의 가인들은 반드시 살아서 아벨 들을 때려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배당 안에도 가인들이 죽지도 않고 득실거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가인의 표를 받은 자들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삽니다. 요한 계시록에도 가인의 표를 받은 자들만이 이 땅에서 매매를 한다고 나오지요? 그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매매를 못 한다고 합니다. 그 말은 이 땅의 가인들은 이 세상의 삶의 방식인 힘의 원리에 의해 장사를 해서 이윤을 챙기고 잘 먹고 잘 살게 되는데 이 땅의 아벨 들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인 십자가의 삶의 원리로 이 땅을 살기에 늘 가인들에게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정말 고역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사는 삶이 이기는 삶이고 승리의 삶이라고 하십니다.
가인의 표를 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를 바탕으로 매매를 하며 승승장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하늘의 원리로 살아야 하기에 늘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남을 밟아 자기의 유익을 채워야 하는 이 세상에서 자기를 비워 남의 유익을 챙겨야 하는 하나님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승승장구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가인이 저주의 표를 받고도 승승장구하며 성까지 쌓고 그의 후손들과 문명을 만들며 살도록 놔두십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가인의 모습을 보세요. 가인은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태어난 장자입니다. 가인은 모친의 자랑이었습니다. 신체적으로도 아벨보다 건장한 자입니다. 그는 시대가 요구하는 재주와 능력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그는 최초로 도성을 건설한 위대한 성주였고 각종 문화 창설의 선구자였습니다. 아벨과는 도무지 비교도 되지 않는 뛰어난 자입니다. 그러나 그 삶은 결국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되고 그 뒤로 그 가인들은 엄청난 고통의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일반 상식의 세상 가치관으로 사람의 가치를 재서는 안 됩니다. 가치 있는 사람들은 단 한 부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피로 거듭난 아벨 들‘ 본문 17절을 보면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나 놋 땅에 정착해서 성을 쌓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류 최초의 위대한 성주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도피성으로 피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가인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도피성이 아닌 자신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낸 에녹성을 쌓는 자들입니다. 에녹이라는 단어는 ‘바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이 땅의 가인들은 자기가 노력해서 쌓은 이 땅의 힘을 자기 자신에게 바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객관적으로 보여 지기는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며 화려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도피성으로 피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이 땅의 가치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에녹성을 쌓는 사람들에게 당하는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맞는 삶입니다. 이 땅의 가인들은 절대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잘 삽니다. 본문 9절을 보겠습니다.
(창 4:9)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 질문과 대답을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형제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자 가인이 하는 대답이 걸작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지극히 이기적인 자가 되어버린 가인의 실체를 폭로하는 대답이기도 하지만 그 대답 속에는 하나님마저도 무시하는 가인의 오만이 담겨있습니다. 그의 대답 속에는 ‘왜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나한테 물어보느냐?’라는 오만과 ‘누가 나에게 내 동생을 지키라고 명령했느냐?’라는 기고만장함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가인들에게서도 이와 똑같은 오만과 기고만장함과 이기심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대자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과 행동으로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매일 매일 때려죽이면서도 죄책감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왜 그들을 지켜야 돼?’라고 뻔뻔스러운 반응을 보입니다. 당연하지요. 그들은 우주의 중심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으니까요.
아담과 하와는 한 몸이었습니다. 태초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서로 서로를 지켜주도록 창조가 된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당신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는 고백을 하는 하나 됨 관계, 즉 의로운 관계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서로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아니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나를 비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건 궁극적으로 상대방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한 몸인 나를 위한 삶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삶을 한 번 반추해 보십시오.
(막 15:31)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이렇게 자신을 구원하는 삶이 아닌 남을 구원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은 자기의 몸인 교회를 위한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결국 주님은 자기의 몸을 위해 자신을 죽음으로 내 모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위해 나를 비운다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그렇게 살기에. 따라서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들이 된 그리스도인들의 삶 또한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삶은 결국 우리의 성숙을 위한 도움이 되는, 나 자신을 위한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켜야 할 형제는 누구입니까? 누가 우리의 형제입니까?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누가 우리의 형제인가를 구분하기 전에 나 자신이 다른 이들의 형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이들을 나의 형제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삶입니다.
(요일 4:19‐21)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이고 그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선물을 거저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이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증명이 되는 가하면 그들이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자들은 형제를 사랑해 주어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마 25:35‐36)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주님께서 천국에 들어 갈 양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 때 양들이 대답합니다. ‘주님 제가 언제 그러한 일을 했나요? ‘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마 25:40)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형제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주위에 있는,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형제가 되어서 그들을 지켜줄 수 있나요? 밥을 먹여 주고, 마실 것을 주고, 어려울 때 도와주는 그런 일을 말하나요? 그러한 일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일차적인 지킴의 내용은 그 형제들이 살인자의 자리에서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복음을 전심으로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방법 중 가장 최고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만남이라는 것을 주시고 관계라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만남과 관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켜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체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역사와 공간 속에서 손과 발이 필요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손과 발의 역할을 하라고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과 발과 입의 노릇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명령이 얼마나 강조가 되고 있는지 보세요.
(겔 33:1‐9) “1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2 "사람아, 너는 네 민족의 자손 모두에게 전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라. 만일 내가 어떤 나라에 전쟁이 이르게 할 때에, 그 나라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하자. 3 이 파수꾼은 자기 나라로 적군이 접근하여 오는 것을 보고 나팔을 불어, 자기 백성에게 경고를 하였는데도 4 어떤 사람이 그 나팔 소리를 분명히 듣고서도 경고를 무시해서, 적군이 이르러 그를 덮치면, 그가 죽은 것은 자기 탓이다. 5 그는 나팔 소리를 듣고서도 그 경고를 무시하였으니, 죽어도 자기 탓인 것이다. 그러나 파수꾼의 나팔 소리를 듣고서 경고를 받아들인 사람은 자기의 목숨을 건질 것이다. 6 그러나 만일 그 파수꾼이, 적군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서도 나팔을 불지 않아서, 그 백성이 경고를 받지 못하고, 적군이 이르러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덮쳤다면,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내가 파수꾼에게 묻겠다. 7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 8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도, 네가 그 악인에게 말하여 그가 악한 길을 버리고 떠나도록 경고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신의 죄가 있어서 죽을 것이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내가 너에게 묻겠다. 9 네가 악인에게, 그의 길에서 떠나서 거기에서 돌이키도록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신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지만,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믿은 자들에게 파수꾼의 임무를 주셨습니다. 먼저 복음을 전해들은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칼이 이제 곧 세상을 치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전하지 않아서 그들이 그냥 죽어 지옥에 가게 되면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핏 값을 우리에게서 찾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이라면 우리에게서 그들의 핏 값을 찾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 전파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지키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자기 자신의 자랑과 자기실현을 위해 형제를 지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형제의 핏 값을 찾으시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창 4:11) “11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
여러분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내가 그 때 너에게 붙여준 형제 아무개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어 오실 때 여러분은 무어라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내가 그 사람을 지키는 자입니까? 왜 나한테 그 사람 이야기를 물어 보세요?’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그게 바로 가인의 대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형제를 지키라고 사람들을 붙여 주십니다. 그 때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외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네 형제 중국 동포들이 어디 있느냐?’ ‘네 형제 homeless들이 어디 있느냐?’ ‘네 형제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어디 있느냐?’ ‘네 형제 너의 직장 동료들이 어디 있느냐?’ 그 때 여러분은 ‘네 주님 여기 이렇게 제가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생명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제 도피성으로 피해 있습니다. 이만하면 잘 지키고 있는 것이지요?’라고 대답을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나한테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를 물어 보세요? ‘라고 반응을 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 인생은 참으로 짧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다른 이들을 죽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들을 지켜주며 살려내고 계십니까? 저는 요즘 우리가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한다고 하면서 너무 무책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참 많은 생각을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 뒤로 숨어서 전도도, 선교도, 구제도, 봉사도 너무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지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필라델피아에서 simple way라는 공동체 사역을 하고 있는 쉐인 클레어본 이라는 청년의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 회개했습니다. 필라델피아의 homeless들과 빈민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그 백인 청년의 이야기 속에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면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을까? ‘를 늘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자신을 비워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고 있는 그 쉐인 클레어본이라는 청년은 감히 오늘날 교회들을 향해 ’믿음은 행동이 증명 한다‘라는 야고보서의 대 주제를 목소리 높여 외칩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제 이만큼 배웠으니 지금부터는 손발을 좀 움직여서 우리의 형제자매들과 이웃들과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지켜내는 삶을 살아 내십시다. 여러분의 형제들을 좀 지켜 주세요. 제발 그들을 죽이지 마십시오. 지켜주세요.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형제를 살해하고 계십니까? 살려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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