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은 살인자들
(김성수 목사)
(창 4:3‐8) “3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주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다. 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5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색이 변하였다. 6 주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색이 변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7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을 펴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하니,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8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
우리는 지난주에 가인과 아벨과 셋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어떠한 은혜로 얼마나 큰 선물을 주셨는가가 기록되어 있는 복된 소식이 적힌 책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러한 ‘은혜의 관점’을 놓쳐버리면 성경은 그저 도덕책이나 윤리 책 혹은 이솝이야기 같은 우화 책에 지나지 않는 아주 저급한 책이 되고 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살수가 없는 존재인지를 웅변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장 중(掌中)’으로 인도하는 ‘은혜의 책’입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나의 은혜 속으로 들어와 살아야 한다, 그럴 때 너희는 비로소 행복할 수 있는 거야‘ 이게 성경이 외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간단합니다. 시퍼렇게 살아있는 지금의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사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은혜로 탄생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책이 성경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보답을 할까‘를 찾으려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제사를 이해하실 때에도 그들의 제물이 얼마나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혹은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를 가지고 그들의 제사를 판단하실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께서 동쪽으로 쫓겨나 모두 죽어야 할 자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자를 만들어 내셨는지, 그 은혜를 찾아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은혜를 입은 아벨과 셋 안에 우리 자신을 투영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인류 최초의 살인인 가인의 살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고자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시겠습니다.
(창4:8)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기에 오는 ‘고하니라’ ‘요메르’라는 단어는 ‘말하다’라는 의미의 ‘아마르’라는 동사의 미래 완료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당신께서 가인의 제물을 열납 하시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 주신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어떤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가인이 아벨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가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70인 역(LXX)성경이나, 라틴어 번역본인 라틴 vulgate 성경, 그리고 사마리아 오경, 공동 번역 이런 성경 번역본들을 보면 그 ‘요메르’라는 단어의 목적어가 ‘들로 가자’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가인이 아벨에게 ‘들로 가자고 이야기했다‘가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주석가인 메튜 헨리에 의하면 성경의 갈대아 번역본에는 가인이 아벨에게 한 말의 내용이 조금 더 첨가되어 있는데 그 갈대아 번역본에 따르면 가인이 아벨에게 제물에 대해 열납에 대해, 그리고 내세와 상벌이 없다는 등의 자신의 불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 아벨이 동의하지 않자 아벨을 질투하여 들로 가자고 이야기한 것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어찌되었든 성경이 그 구절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지시키고자 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그렇게 가인이 아벨에게 의도적으로 ‘들로 가자‘고 한 뒤 아벨을 죽인 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라 고의적이었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의적인 것과 우발적인 것을 가르는 일이 왜 중요한지는 다음 주에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도대체 가인에게 뭐라고 말씀을 하셨기에 가인이 그렇게 발끈해서 동생을 고의적으로 쳐 죽였을까요?
(창 4:5‐7) “5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색이 변하였다. 6 주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색이 변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7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을 펴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하니,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열납 하지 않으시자 가인은 심히 분해했고 그의 안색마저 변했습니다. 그러한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이 가인의 제물을 열납 하지 않으시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7절을 보시면 ‘네가 선을 행하면’이라는 어구가 있습니다. 그 어구에 쓰인 ‘선을 행하다’ ‘테티브’라는 히브리어는 ‘유익하다, 아름답다, 옳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야타브’의 미 완료형입니다. 그런데 이 ‘야타브‘라는 동사는 성경에서 한 번도 완료형으로 쓰여진 곳이 없습니다. 그 말은 선을 행하는 상태, 옳은 상태, 유익한 상태는 한 순간에 완성된다거나 한 순간 있다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중단 없이 계속 지속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70인 역 (LXX)에 보면 그 ’선을 행하다’ ‘야타브’라는 동사가 ‘예물을 올바로 바치다, 제물을 올바로 바치다, 올바른 제사를 올리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70인 역은 창세기 4장 7절을 ‘네가 제물을 올바로 바쳤다면(올바른 제사를 드렸다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올바로 제물을 바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이 구절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열납 하지 않으신 이유를 설명해 주시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70인 역의 번역은 아주 적절한 번역이라 생각이 됩니다. 가인이 ‘하나님 왜 내 제사는 기뻐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 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너는 제물을 올바로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야(제사를 올바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야)’ 라고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마치 제물의 내용에 따라 제사를 받으시거나 받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했다시피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어떤 것을 근거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먼저 여러분은 히브리어의 ‘제물을 드리다, 제사를 올리다 그리고 선을 행하다. 옳은 일을 하다‘라는 단어가 한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방식에는 선을 행하는 일과 아름답고 유익한 일은 올바로 제물을 바치는 일, 즉 올바른 예배의 삶을 사는 것과 정확하게 동의어로 인식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7절의 ’네가 선을 행하면‘이라는 어구는 말 그대로 ’네가 선을 행하고 아름답고 유익한 일을 행하면’이라는 뜻과 ‘네가 올바른 제물을 드리면, 즉 올바로 예배를 하면’이라는 말을 동시에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어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어구는 ‘제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배’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이런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왜 내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까?’라고 묻는 가인에게 ‘네가 올바로 제물을 드려 올바른 예배를 하면, 다시 말해 네가 선을 행하고 옳은 일을 하면 왜 내가 받지 너의 제사를 열납 하지 않겠느냐?’라고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왜 올바른 예배와 선을 행하는 삶이 같은 것을 의미하는 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이참에 ‘인간의 선‘이라는 개념을 확실하게 정리를 하고 넘어 가셔야 합니다. 우리가 전에 ‘선’이라는 개념을 정리하기를 ‘하나님의 질서 아래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과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선’이라고 정의를 했었지요? 그것이 하늘에서 본 ‘선’의 개념이라면, 땅에서, 인간 쪽에서의 ‘선‘의 정의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사람들이 그 분이 세우신 질서 아래에서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고 그 분을 하나님으로 대우 해드리며 그 분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선‘인 것입니다. 단순히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 혹은 열심 있는 삶을 선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선을 행하는 것과 올바로 제사를 드리는 것 다른 말로 올바른 예배를 하는 것은 정확하게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러한 자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가인은 여전히 자신을 하나님 위에 올려놓고 ‘하나님 같이’(like God without God)되기 위해 이 땅의 것들로 하나님의 비위나 맞추고 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선을 행하는 자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네 제물을 받지 않는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달랐습니다. 아벨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정확하게 인식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양의 첫 새끼를 그 제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벨이 그렇게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은혜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열납 하신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아벨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심으로 인해 그가 여인의 후손에 의해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복음을 깨달았다는 징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의 삶을 선한 삶으로 보아주셨던 것이고 가인은 여전히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 되어 자기 자신을 예배하던 사람이었기에 그는 선을 행하는 자가 아닌 악을 행하는 자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것이며 그의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난주에 제가 아벨이 어떻게 복음을 삶으로 산 사람이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지요? 그런데 아벨이 믿음을 소유하고 믿음의 삶을 살았다는 증거는 성경의 문맥에서도 드러납니다. 제가 전에 요한복음을 강해할 때도 잠깐 설명해 드렸습니다만 이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는 창세기 3장의 아담에게 떨어진 저주의 이야기와 연결시켜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토지를 갈게 하셨는데 그 토지가 그냥 토지가 아니라 ‘근본 된 토지’입니다.
(창 3:23)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영어로 보시면 the ground from which he had been taken.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절대 상위권 자이신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그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원래 티끌에서 출발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시기 위해 아담에게 벌을 주시는 장면입니다. ‘네가 어디서부터 나온 존재인지 땅을 갈면서 회개하라’는 것이지요. 아담은 그렇게 땅을 갈면서 하나님의 왕좌를 노리려 했던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며 그 절대자에게 순종하지 않은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을 것입니다. ‘아 나는 참으로 연약하고 작은 자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정말 보잘것없는 자구나’ 그게 구원받은 자의 삶이며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 뒤에 오늘 본문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 것은 진정한 제사, 즉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의 크심과 자신의 연약함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인정하여 하나님 앞에 작은 자로 엎드려 항복하고 순종하는 행위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예배의 삶’이고 그게 바로 성경이 정의하는 ‘선’아닙니까? 이렇게 아벨은 아담에게 내려진 저주가 어떠한 것이며 자기 아버지와 그 후손들이 왜 그러한 저주 속에 던져지게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여인의 후손이신 구원자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기름을 발라서 기름과 함께 제사를 드림으로(기름은 아주 귀한 것)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자의 도래를 기다리는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여전히 자신을 믿었고 신뢰했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구원자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힘을 믿고 자기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땅의 소산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준비한 것을 감지덕지하게 받아 드셔야 한다는 확신과 함께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자 분노를 한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이해가 가시지요? 올바른 예배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숨어서 겸손하게 순종하며 의뢰하는 삶이지 절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거나 의지하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여전히 자신의 공로를 자랑거리로 삼았고 그 공로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꾸중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올바른 예배의 삶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우주의 중심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만왕의 왕으로 섬기면서 ‘그 분이 시키시는 것은 모두 하겠습니다.‘라는 순종과 항복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 할 오해가 ‘예배의 삶’은 열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열심 있는 봉사, 열심히 하는 헌금, 열심 있는 선교‘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배의 삶, 즉 하나님을 가장 가치 있는 자리에 올려드리고 그 분을 하나님 대접 해드리는 삶이라는 것은 무조건 열심을 부린다고 하나님께 열납 되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이 부린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롬 10:3)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가 뭔지도 모르고 힘써 열심을 부리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것일 뿐 아니라 자기 의를 세우는 악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걸만큼 열심을 부리다가 하나님께 혼 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을 위하는 행위인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열심은 하나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열심이었습니다.
(빌 3:5‐6)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부렸다고 부렸는데 그 결과는 교회를 핍박하는 결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러한 사도 바울의 열심을 가리켜 ‘네가 나를 핍박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열심도 아니고 노력도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의 삶, 제물의 삶은 어떻게 우리에게서 나오게 되는 것인가?
(빌 3:9) 9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롬 10:4)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의인들의 의는 자신의 공로나 열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서 의롭게, 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짜로 의를 선물 받고 선을 완성한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신의 손발을 움직여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기로 노력하는 것을 진짜 ‘그리스도인의 열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복음을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열심히 헛수고하고 지옥 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인은 열심히 제사를 준비했습니다. 제물도 잘 준비했고 시간도 잘 맞췄습니다. 가인이 열심을 안 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의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배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그리고 자신을 예배하는 자‘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예배하는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물론 당장은 자신만을 위해서 살던 오염된 육체 속에서 살기 때문에 여전히 옛 사람과의 전쟁 속에서 살게 되지만 성도들은 점점 자신의 육신을 죽여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삶으로 성숙되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양육‘이라고 부릅니다.
(계 12:6,14) “6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 곳은 하나님께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 여자를 먹여 살리시려고 마련해 두신 곳이었습니다. 14 그러나 그 여자는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가지고 광야에 있는 자기 은신처로 날아가서, 거기에서 뱀을 피해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부양을 받았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양육 속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자신을 예배하는 자’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며 의존하며 의뢰하는 삶을 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 것들을 하나하나 놓아가면서 오늘 주님이 오실 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전부를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그러한 삶을 가리켜 종말론 적 신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기뻐 열납 하시는, 올바로 예배하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 있으세요? 만일 오늘 주님이 오신다 해도 난 기쁘게 주님을 맞을 수 있다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그게 예배자의 삶이라는 데 그러한 삶이 나에게서 나오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두려워해야지요. 혹시 여러분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을 예배하는 삶을 사시는 가인은 아닙니까? 이렇게 예배자의 삶은 종말론적인 신앙을 말하는 것이기에 두 부류의 예배하는 자들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오늘 본문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세월이 지난 뒤에’라는 어구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 4:3)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여기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와예히 믹케츠 야밈’이라는 어구는 원래대로 직역을 하면 ‘그리고 날들의 끝으로부터, 종말에’라는 뜻이 됩니다. 영어로는 ‘in the end of the day'입니다. 왜 최초의 예배에 관해 기술하는 창세기에 요한 계시록의 언어인 ‘종말’이라는 어구를 썼을까요? 여러분 잘 들으세요. ‘예배‘라는 것은 ’종말‘을 품고 있는 단어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떠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던 이 세상의 ‘왕’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티끌에 불과한 자신들의 실존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분께 순종하고 충성하며 자신의 삶을 의뢰하는 모든 행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리기를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딱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예배하는 자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타락한 아담의 후예들은 모두다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그 말은 이제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이 어떤 무리와 완전히 구별되어서 심판의 자리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확연하게 선택을 받은 자들과 심판을 받은 자들이 구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모여 공적인 예배를 드리거나 아니면 삶의 처소에서 예배의 삶을 올바르게 살아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제 선택과 심판으로 갈라져 영원히 분리가 될 종말이 왔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하고 예배의 삶을 살게 될 때 세상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께서 속한 각자의 처소에서 예배 자로서의 올바른 삶을 살게 되면 세상의 악이 여러분의 선한 삶과 대조가 되어 폭로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여러분의 예배의 삶은 세상의 심판에 대한 근거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여전히 자신의 자랑과 인기와 유익을 위해 여러분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험담하고 억압하는 자들에게 온유와 인내와 사랑으로 참아주고 당해주는 것이 바로 예배의 삶이고 그 삶이 그들의 죄를 심판하는 삶이 되는 것임을 절대 잊지 마세요. 당하는 것이 이기는 삶입니다. 그게 심판을 하는 삶입니다.
(갈 4:28‐29) “28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29 그러나 그 때에 육신을 따라 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박해한 것과 같이,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당하는 여러분이 승리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역설을 꼭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예배와 예배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오게 된 선한 자들과 그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된 저주받은 인생들을 정확하게 구분 짓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아벨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는 자,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선을 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은 여전히 자신을 예배하고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악인입니다. 아벨의 선한 행위, 즉 올바른 예배의 삶이 가인의 악한 삶을 폭로했습니다. 아벨이 가인을 가리켜 ‘넌 잘 못 사는 거야, 너처럼 살면 안 돼’라고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올바른 예배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벨의 삶은 가인의 삶을 악으로 규정지어 심판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예배가 있는 곳은 늘 종말이 선포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세상을 심판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심판을 당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세월이 흐른 뒤에’라는 어구가 가진 의미가 이해가 가시지요? 그렇게 예배를 통하여 죄가 지적을 당하고 어두움이 폭로되고 더러운 것들이 시궁창 밖으로 드러나게 될 때 그 곳에는 반드시 가라지 들의 반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 성과 나약함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설파하는 복음을 못 견뎌합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설교는 항상 세상에 심판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 예배 시에 선포되는 목사의 설교가 모든 사람에 환영을 받는다면 그 설교는 빵 점입니다. 그것은 설교를 통하여 심판이 선포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존 웨슬리 목사님은 평소에 ‘내가 말씀을 전한 뒤에 사람들이 나를 박대하지 않으면 내가 과연 복음을 전한 것이 맞는가 의심했다’라고 제자들에게 자주 말씀을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눅 6:26)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였다."
예배당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는 기실 가라지가 더 많습니다. 가라지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알곡들인 하나님 백성들의 신앙 성숙을 위해 일시적으로 도구로 쓰여 지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 가라지들은 하나님 백성들의 예배 장소에 함께 앉아있기는 하지만 도대체 복음이 두렵기만 하고 껄끄럽기만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자기들은 이 세상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있고 그렇게 살고 있는데 복음은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비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라고 가슴을 후벼 팝니다. 자기들은 여전히 남을 밟아 나의 유익을 챙기는 삶을 살고 있는데 그러한 삶을 사는 자들은 가인의 길에 행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저주를 피하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달가울 리 없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도대체가 못 마땅한 것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들에게는 심판을 선포하는 말씀이기에 못 마땅한 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복음의 말씀이 달기만 합니다.
지금은 이 세상에서 이렇게 악한 자들에게 당하고 얻어터지며 살고 있지만, 그리고 여전히 이렇게 죄에 오염된 육체 속에서 치열한 신 구 세력 간의 전쟁을 겪으며 살고 있지만 이제 곧 하나님께서 우리의 새로운 몸을 완성시켜 주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 상을 베풀어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기에 아무리 들어도 또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서 열심히 분투하고 있는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만나 그들의 무용담을 듣고 교제를 하는 교회의 모임을 너무 너무 사모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예배와 예배의 삶은 종말의 선포요 심판의 포효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을 소유하고 선한 행위, 즉 올바른 예배의 행위와 삶을 살게 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에 나타나게 되는 대표적인 현상을 한 번 본문 속에서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 인류 최초의 살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에덴에서 추방된 죄의 열매로 첫 번째 기록된 것이 살인입니다. 성경이 이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살인이라는 것이 어떠한 죄이며 어떠한 근원에서 출발한 것인지를 설명하여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 그 살인의 행위를 몰아내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심각하게 경고된 범죄가 바로 살인죄입니다. 신학에서는 십계명의 제 4계명까지를 대신(對神) 윤리(倫理)라고 칭하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를 대인(對人)윤리하고 말합니다. 대신 윤리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를 말하고 대인 윤리라는 것은 사람에 대해 우리가 지켜야 할 윤리를 말합니다. 이 5계명부터 10계명까지의 대인 윤리도 두 가지로 분류가 되는데 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적극적인 권고인 반면 6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무엇 무엇은 하지 말라’라는 경고입니다. 그 경고의 계명 가운데 가장 첫 번째 것이 바로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민수기에는 살인자에 대한 율례가 더 무섭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민 35:29‐31) “29 ○위에서 말한 율례는, 너희가 어디에 가서 살든지, 자자손손 모든 세대에 적용되는 율례이다. 30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살인자이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증인들이 있어야 한다. 오직 한 증인의 증언만으로는 어느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 31 살인죄를 지었을 때에는, 살인범에게서 속전을 받고 목숨을 살려 주어서는 안 된다. 그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이렇게 성경은 살인에 대해 아주 무섭게 경고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성경을 통해 무섭게 경고되어진 살인죄가 그저 사람을 죽이는 것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5:21-24) “21 ○"옛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을 것이다' 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를 모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의회에 불려 갈 것이요, 자기 형제나 자매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 불 속에 던짐을 받을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24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주님은 형제를 향해 노하는 것, 형제에게 라가라 욕하는 것,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 업신여기는 것 모두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인과 벌이 똑같습니다. 지옥 불입니다. 요한 사도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요일 3:15)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살인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다 살인자들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다 살인자 가인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자들은 살인자의 삶을 살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를 떠난 죄인들은 이제 어떻게 해서든 자기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남을 밟는 것이 그들의 삶의 원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삶 전체를 ‘살인자의 삶’ ‘가인의 길에 행하는 삶’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로 ‘조승희‘이고 우리가 바로 ’김 대두’이고 우리가 바로 ‘유 영철’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 욕할 거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모든 죄인들은 다 살인자들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바로 그 살인자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시며, 그들은 이 땅에서 어떠한 행위를 하며,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정확한 예화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살인자들의 삶에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징후가 무엇인지를 보겠습니다. 다른 말로 살인을 일으키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가인의 예를 들어 공부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가인의 이야기에 국한시키시면 안 됩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과연 우리 안에는 살인자 가인이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지 잘 살펴보세요.
살인자들의 삶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징후의 첫 번째가 시기와 질투입니다. 왜 가인이 아벨을 죽였지요?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여러분 시기와 질투는 여자들의 애교가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는 그 자체가 살인의 동인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한 이유가 뭡니까? 질투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대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뭐지요? 역시 질투 때문입니다.
(요 11:47‐48,53)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53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 하니라”
질투는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왜곡시키는 가장 무서운 감정이 바로 질투심입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질투심을 갖지 않습니다. 질투심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건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갖는 감정입니다. 여전히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망상 속에 사로잡혀 있는 가인들은 다른 이들에게서 자기보다 나은 모습이 보일 때 그를 제거하고 싶어집니다. 그게 바로 살인의 동인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그러한 가인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대할 때 가져야 하는 올바른 태도는 무엇입니까? 바로 벤치마킹의 이성적 자세입니다. 벤치마킹이라는 것은 경쟁업체의 장점을 면밀히 분석하고 배워서 쉽게 아이디어를 얻어 그 경쟁업체를 따라잡는 다는 의미로 fortune 지가 만들어낸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성도는 그 사람을 질투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기도 생활을 분석하고 배워서 자신도 기도 생활에 열심을 내는 사람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질투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시간을 내어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지 벤치마킹을 해서 나의 영적 생활에 유익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다른 이들에게 나보다 더 인기가 좋으면 그 사람의 품성과 성격, 대인관계 같은 그 사람의 인기 비결을 잘 분석하고 배워서 그 사람처럼 인기 있는 사람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그러한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한 벤치마킹으로 자신의 영적 유익을 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 상대방을 말로 행동으로 몰아붙여서 죽여 버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질투의 정체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 하셨을 때 도대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왜 하나님은 나의 삶을 기뻐 받지 않으시는지 그리고 저 아벨의 삶은 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인지 고민하고 분석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아벨을 죽여 버리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아벨만 없으면 자기가 최고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질투이며 살인인 것입니다. 세상은 그러한 질투로 점철되어지고 있으며 굴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 앞에 하나님의 백성들인 아벨 들은 계속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인들의 죄가 폭로되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가 안토니오 살리에르의 질투에 의해 얼마나 곤욕을 치렀습니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천재 미켈란젤로 때문에 얼마나 많이 흔들렸습니까? 그의 말년 작품은 한심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그게 다 미켈란젤로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나보다 나은 사람이 보이면 그를 질투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를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보아 자신의 영적 성숙에 보탬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살인자인 가인들이 품고 있는 살인의 동인이 분노입니다. 본문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냐‘라고 물으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인자의 삶을 살게 된 죄인들에게서 나오는 대표적인 감정이 분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분노를 말합니다. 거룩한 분노도 있습니다. 의분이라고 하지요.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시면서 유대인들의 외식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죄를 보고 분노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서 죄가 발견 될 때 분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로 죄를 밟아 죽이는 데 쓰면 그 것은 거룩한 분노입니다. 그러나 오직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내는 분노는 그 것 자체가 살인의 동인이 되는 것입니다.
(창 49:6) “6 나는 그들의 비밀 회담에 들어가지 않으며, 그들의 회의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화가 난다고, 사람을 죽이고, 장난삼아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의 유익을 위해 뿜어내는 분노와 혈기는 살인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분노라는 감정 자체를 없애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이 오염된 육체 속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를 사용하여 살인의 도구로 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이 나는 것은 어찌 할 수 없지만 그 분을 해 질 때까지 품고 있지는 말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엡 4:26‐27)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에 부담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분노’이거든요. 제 설교를 들어보셔서 아시겠지만 저는 분노를 잘 참지 못합니다. 그나마 지금은 아주 많이 좋아진 거예요. 예전에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저는 특히 누가 저를 무시하는 발언이나 행동을 하면 그걸 못 참았어요. 심지어 누가 뒤에서 자동차 경음기만 울려도 저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간주하고 응징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분을 참는 방법을 성경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분을 냅니까? 우리가 분을 내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분을 낼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제가 이청준 선생의 벌레 이야기라는 소설에 대해 잠깐 언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사랑하는 아이마저 유괴범에게 살해를 당한 한 여인이 자기 아이를 살해한 유괴범을 예수의 사랑으로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에 찾아갔는데 그 유괴범이 이미 자신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며 분노하여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장면으로 그 소설은 끝이 납니다. 그 여인은 일차적으로 자기 아이를 살해한 유괴범에게 분노한 것이지만 결국 그 분노의 끝자락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분노는 그 대상이 각기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결국 그 분노의 끝으로 가보면 인간의 분노는 항상 하나님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들이 피해자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살해한 가해자들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그 가해자들이 당해야 할 고통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이 세상에서 질병으로 가난으로 전쟁으로 천재지변으로 조금씩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전부 인간들의 죄로 인해 주렁주렁 영근 죄의 부산물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그러한 죄의 열매들이 자신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될 때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지를 인식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한 발 한발 깊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들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은 그러한 죄의 열매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보여 지게 되면 자신들은 누군가로부터 가해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분노라는 것은 하나님을 살해한 가해자인 우리가 내는 것이 아닙니다. 피해자이신 하나님께서 가해자들의 죄를 향해 발하시는 것이 분노입니다. 여전히 그러한 하나님의 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 분노에 대응해서 자기들도 분노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분노 속에서 해방된 무리들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을 보며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아들에게 그 모든 분노를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더 이상 그 아들 안에 있는 자들의 죄를 분노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그 하나님의 분노에서 벗어나게 된 사람들은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혹여 상대방이 자신의 분노를 일으킬만한 행동을 해도 이내 자제를 하고 자신을 향한 분노를 거두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분노를 우리에게 모두 쏟아 부으셨다면 우리는 벌써 지금 이 순간에 그 분노의 불에 활활 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분노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분노케 하는 모든 상황들과 사건들과 이웃들을 자신의 영적 성숙에 유효적절하게 사용을 할지언정 그 것을 살인에 사용하지는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약 1:19‐20)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야고보는 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말은 자주 분노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로 회복되지 못한 증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여러분을 분노케 하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나에게서 거두어 가신 하나님의 분노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일 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자로서 오 백 데나리온 때문에 분노해서는 안 된다는 주님의 음성을 떠올리십시오.
(잠 16:32) “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이렇게 질투와 시기와 분노로 야기되는 살인은 모든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죄의 문제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매일같이 살인을 합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언제든지 자기 형제를 향하여 미련한 놈이라 욕을 해대는 살인을 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언제든지 형제에게 노하며,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언제든지 형제에게 라가라 부르는 자들이 죄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분노에서 구출되었다는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방불하게 시기와 질투와 분노의 살인을 하고 있다면 과연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이 맞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추구해야 할 것은 ‘만사형통, 소원성취’가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 추구해야 할 것은 내가 여전히 시기하는 자, 질투하는 자, 분노하는 자, 살인하는 자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사랑하는 자, 용서하는 자, 온유한 자로 지어져 가고 있는가를 확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자꾸 사랑해 보고, 용서해 보고, 인내해 보고, 감싸 안는 연습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게 잘 안 될 때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지어져 가는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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