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곳을 바라보는 자들
(김성수 목사)
(엡 1:11-14)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하나님의 위대하고 영원한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허락하셔서 그 뜻의 비밀을 알리셨고 그 비밀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 곧 죄 사함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위대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시는 목적’을 위해서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도는 그 계획은 바로 조화의 회복임을 말한 다음에 계속해서 그 통일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 땅에서 실현이 되어 가고 있는 지 상세한 국면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갑니다.
여러분, 사도가 지금 이 편지를 1차적으로 어디에다 쓰고 있습니까? 에베소 교회에 쓰고 있지요? 이 편지는 회람 서신입니다. 소아시아의 이방 교회들이 회람해서 볼 편지이면서 첫 번째로 에베소의 교인들에게 쓰고 있는 편지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에베소는 이방인들의 교회입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다소 사람 사울 같은 유대인이 이방의 에베소 사람들에게 이러한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참 놀라운 일입니다. 바로 이 일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펼쳐 나가고 이행해 나가는 구체적인 행위이기에 사도는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고 있는 예증인 것입니다. 그 예증은 바로 이렇게 ‘교회’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많은 면에서 하나님의 장엄하고 범 우주적인 계획 곧 모든 영역과 모든 국면에서 조화를 회복하려는 계획에 대한 최상의 예증입니다.
사도는 11절에서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음’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 ‘너희도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믿어 성령의 인 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와 ‘너희’가 누구인지 알아야 이 구절들을 풀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와 ‘너희’가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일단 ‘너희’는 이 편지의 수신자인 에베소 교회와 이방 교회들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2절이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엡 1:12)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in order that we, who were the first to hope in Christ, might be for the praise of his glory.(NIV)
That we should be to the praise of his glory, who first trusted in Christ.(KJV)
12절에서는 ‘우리’를 ‘먼저 믿었던’ ‘먼저 소망했던’ 자들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먼저 믿고 소망했고 그리고 이방인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도 그 복음 전파의 순서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이라고 말씀을 해 주셨듯이, 그리고 유대인들이 구약시대를 통하여 메시야 오시기를 고대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유대인임을 12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우리’와 ‘너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평소에 전혀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두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읽으면서 너무나 확실하게 확인한바 아닙니까? 그런데 왜 굳이 이곳에서만 이렇게 ‘우리’와‘너희’를 강조해서 구별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지금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10절의 ‘통일’이 시작되었음을 강조하여 알리기 위해 굳이 ‘우리’와 ‘너희’를 갈라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전체의 대 주제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신약성경 전체의 대 주제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3장에서 더 정확하게 그 주제를 설명합니다.
(엡 3:5-6) “5 지나간 다른 세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려 주지 않으셨는데, 지금은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성령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6 그 비밀이라는 것은,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함께 약속을 받은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모두 통일되는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의 가시적 실현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구원 받기 전에 이방인을 개 취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편협한 유대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방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그 놀라운 일을 강조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제 이 땅의 교회는 그 하나님의 궁극적 계획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하여 다시 한 번 그 점을 주목시켜 줍니다.
(롬 1:5-6) “5 우리는,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이방 사람으로 하여금 믿어서 순종하게 하려고, 그를 통하여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6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롬 10:12) “12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갈 3:28-29) “28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29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으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사람들입니다.”
(엡 2:11-14)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9) “19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것은 모든 육신 적이고 물질적이며 민족적인 개념들을 털어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계산되는 것은 오직 아브라함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인 씨앗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영적인 새 나라가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새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폐하여 졌습니다. 하나님은 그 위대한 목적을 위해 잠시 동안 유대인들을 사용하신 것뿐이었습니다. 유명한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기독교를 줄곧 오해해 왔습니다.
세상에서 허랑 방탕하게 삶을 소비하고 있는 둘째 아들을 언제까지라도 두 팔 벌려 기다리시는 아버지, 그리고 언제든지 뉘우치고 돌아가기만 하면 용서를 받게 되는 죄인, 이것이 기독교입니까?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면서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신 분이신가요? 그런 수동적인 하나님에게 우리가 어떻게 은혜를 읽어낼 수 있습니까?
그리고 죄인들은 어느 정도 놀다보면 스스로 뉘우칠 수도 있는 것입니까? 정말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죄는 반드시 벌해야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며 구원의 순서입니다. 문 밖에서 기다리시다가 그냥 두 팔 벌려 받아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인 ‘공의’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그 벌을 예수님이 받으셨지 않으셨습니까? 이 탕자의 비유는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죄인과 세리들과 친구가 되신 예수님께 원망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수군거림을 들으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눅 15:1-2)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고 있었다. 2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하였다.”
그렇지요? 즉,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고 있었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비유 속에 넣어 그들에게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에 있어 장자의 자리에 설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었다는 것이지요. 그 장자가 탕자인 동생이 아버지로부터 후대를 받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기면 안 된다는 것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경고하시는 비유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나름대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방식이 있었고 이방인들은 이방인들대로 자신들을 보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 둘 사이에는 막힌 담이 있었어요.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으로 말미암아 선민이라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고, 그들은 그 율법을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 보다는 그 율법이 자기네 민족에게만 주어져 있었다는 것으로 자기들을 추켜세웠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가리켜 ‘율법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 ‘세상에 하나님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조롱했습니다.
헬라인들은 나름대로 학식과 지적인 능력을 크게 물려받은 사람들입니다. 불과 주님 오시기 오 육백년 전에 인류 4대 성인으로 불리 우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불과 300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나름대로 인생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그들의 논리를 정교 화시키고 유토피아를 위한 그들 나름의 계획을 묘사했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이지의 역사에 놀라운 꽃을 피웠었지요. 어떤 민족도 그런 일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들은 독주자들이었고 독특한 민족이었습니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을 비롯한 다른 이방인들은 야만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자랑했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은 서로 충돌하고 싸웠던 견원지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헬라인의 철학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의 가르침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꿇어앉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한 곳을 바라보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그렇게 된 것입니다. 요즘 교회들이 기독교의 교훈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하여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가르쳐 세상을 순화하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편만한 인간들의 난제에 그리스도의 교훈을 적용시켜 풀어보려 애를 씁니다.
그게 정말 가능할까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기대하는 것만큼 큰 이단은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외식을 조장하는 것이거나 개 발에 땀나기를 기다리는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새로 지어지지 않으면 절대 선한 일을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절대 하나가 된다거나 통일을 이룰 수 없는 자들입니다.
(엡 2:8-10) “8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9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10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먼저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나지 않고 선한 행동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의 공식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기독교를 공격합니다. ‘난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 당신들의 하나님이 살아있고 그 메시지가 바른 것이면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타락할 수가 있는가? 그리고 이렇게 전쟁과 기아가 끊이지 않는가?’ 성경은 그들이 묻는 것처럼 세상이 그런 식으로 나아지게 될 것이라고 한 번도 이야기 한 적이 없습니다. 더 악해질 것이라고는 말한 적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새로운 관계를 이루는 새로운 나라의 백성들 사이에서만 영원한 행복과 기쁨과 안식이 충만히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 썩어 가는 호수가 되어 버렸기에 스스로 깨끗해 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얼마 전에 일어났던 911테러 사건 같은 것을 막아주지 않으셨냐고 흥분을 합니다. 여러분, 9.11테러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인가요? 아닙니다. 인간들이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는 남의 생명도 초개처럼 여기는 죄인들이 싸 놓은 더러운 배설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뉴스에 나와서 ‘거기서 죽은 사람들 중에 분명 하나님의 백성들도 끼어 있었을 것인데 왜 하나님은 그들을 살려내지 못했냐?’는 질문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뭔가?’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뭐긴 뭡니까? 천국 간 거지. 참 답답합니다. 왜 천국은 좋은 곳이라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들 합니까? 정말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 좋은 곳이라는 것을 기독교인들이 알긴 아는 것일까요? 그런데 왜 그 천국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데 그렇게 흥분을 합니까? 왜 그리스도인들이 천국 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맘대로 안 되는 이 죄의 몸을 벗어버리고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 품으로 가는 것이 왜들 그렇게 무섭습니까? 얼마 전에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서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인터넷 신문에 보니까 어떤 집사님이 그 불타는 지하철 속에서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할렐루야 나 지금 천국 간다.’라고 외치고 죽었답니다. 그런데 그 기사 아래 붙은 댓글들이 전부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장황하게 쓰여 있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수에 미친놈‘입니다. 맞습니다. 우린 미친놈들입니다. 예수에 미친놈들입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된 미친놈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님 말씀하신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를 몸으로 살아내는 미친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 받지 못한 죄인들이 불타는 지하철에서 죽은 것이 처참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는 소치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에 그 처참하게 찢긴 몸으로 다시 일어나 그보다 억만 배 큰 고통 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입니다. 9.11은 순간에 끝나버린 고통이지만 그 지옥의 고통은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실체를 로마서가 잘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롬 3:10-18)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 3:23)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절대 스스로 선한 것을 내어 놓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유대인이 헬라인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헬라인도 유대인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모두다 멸망 속으로 달음질쳐 가는 자들일 뿐입니다. 아프리카에 가면 스프링복스라는 양떼들의 행진이 화제입니다. 그들은 먹이를 찾아 옮겨 다니는데 그렇게 거대한 무리가 되면 뒤에 있는 양들이 앞에 있는 양들이 먹이를 다 먹고 갈까봐 머리고 앞에 있는 양들을 열심히 민다고 합니다. 앞에 있는 양들은 뒤에 있는 양들에게 밀려 서서히 달리게 되고 앞에 있는 양들이 달리면 뒤에 있는 양들이 그 앞선 양들을 따라 잡으려고 함께 뛴다는 것이지요. 결국 먹이는 둘 다 못 먹고 열심히 뛰기만 하는 것입니다. 앞선 양이나 뒤를 따르는 양이나 자기들이 지금 어디로 가는지 왜 뛰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다른 양들이 뛰니까 뛰는 것입니다. 그러다 강이나 절벽을 만나면 앞선 양들은 얼떨결에 뒤에 있는 양들에게 밀려 떨어져 죽고, 뒤를 따르던 양들은 앞을 보지 못해 떨어져 죽어 모두가 몰살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무조건 달리기만 하는 죄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들어 왔습니다. 헬라인들에게 복음이 들어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한 자들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한 몸이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는 민족과 학식과 재산과 외모에 관계없이 동일한 방법으로 조화 속으로 통일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빌 3:4-14) “4 다른 어떤 사람이 육체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5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6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습니다. 7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은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서 오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가지려는 것입니다.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12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13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민족, 학식, 명예, 열심 모두 다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모두 오물 같은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같은 성령을 받았으며 우리 모두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오직 그 길만이 우리를 통일시키고 조화시킬 수 있는 길입니다. 전에는 나를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죄인들이었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화해하고 통일 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그 안에서 우리가, 그 안에서 너희가’가 전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비로소 14절에서 다 함께 통일 된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엡 1:14)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우리가 받은 상속에) 보증이(담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가 세상에 기독교 윤리를 제시하고 그것을 실천하게 하면 세상의 난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중생, 거듭남이 없으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중생 , 거듭남, 새로 태어난 자들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고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합니다. 먼저11절을 보시면,
(엡 1:11)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기업이 되었다는 단어가 ‘클레로오’인데 그 단어는 동사이며 수동태입니다. ‘할당을 받다. 상속을 받다, 특권을 부여받다’의 뜻이 있습니다. 보세요. 수동태입니다. 우리는 상속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행한 대가로 되어진 것이 아니기에 수동태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14절에서 너희도 기업, 분깃을 받은 자 되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즉, 우리도 그리고 너희도 같은 분깃을, 기업을, 상속을 얻었고 같은 후사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 이방인들이 같은 기업을 상속받고 같은 후사일 뿐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후사가 되었다는 것이 바로 놀라운 복음입니다. 잘 보세요. 성경은 우리를 예수와 공동상속자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롬 8:17)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표준새번역]
우리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누어 받은 자들이다. 그러한 엄청난 상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며 천사들과 세상을 판단 할 것입니다. 우리 새사람들만이 거하게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나라를 바라보며 가는 자들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교육을 얼마나 받았는가, 잘 생겼는가, 못 생겼는가, 부자인가 가난한가, 흑인인가 백인인가’의 저급한 구별이 없는 나라입니다. 돈과 지위와 인기 때문에 전쟁하고 분열하는 것이 없는 나라입니다. 통일되고 조화되어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 나라, 거기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더럽지 않고 없어지지 아니하는 하늘에 있는 ‘기업’ ‘그 상속’만을 바라보며 가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벌써 이 땅에서 그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골 3:1-2)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우리, 너희의 구별이 없어진 하나입니다. 통일이 된 것입니다. 하늘의 그 분깃을 상속받은 자로서 그 기업만을 오매불망 바라며 가는 자들이므로 이 땅의 것으로 경쟁하며 다투지 않습니다. 아이들 공부, 너무 목숨 걸고 다그치지 마세요. 어떤 분들은 시험 기간에는 교회까지 안 보내면서 시험공부를 시킵니다. 교회는 언제든 다시 갈 수 있지만 시험은 한 번 못 보면 영원히 남는다나요?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네가 믿고 의지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네 실력과 돈이다’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적당히 양보하며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며 남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셔야지요. 자식들을 세상의 힘을 소유한 실력자로 키워 세상에 자랑거리로 만드는 것이 부모가 할 일이 아니라 자식들 예수를 잘 믿게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책임입니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성품으로 나와야 할 배려와 아량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내 친구들을 이겨야 한다는 경쟁구도로 아이들을 몰아넣고 계시지는 않으세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배려와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이기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 배려하고, 사랑해 주고, 아량을 가지고 대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룻기에 보면 과부둘이 모압에서 돌아와 베들레헴에서 이삭을 주워 가며 거지 노릇을 하는데도 베들레헴 사람들이 그들을 만날 때마다 진심으로 축복을 해 줍니다. 그 곳에서는 가난한 자들이, 종들이 부자나 상전을 축복하고 상전들이 종들을 축복합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속에서 그들의 축복 기원을 따라 그대로 이루어 주셨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이익이 닥칠 것 같으면 무조건 남에게 핑계 대지요? 그런 사람들 보는 것 이제 아주 지겹습니다. 자기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요. 무조건 잘못은 남에게 뒤집어씌웁니다. 그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가 아닙니다. 자기를 방어하고 보호하고 싶은 만큼 남을 배려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조화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통일 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통일 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양과 염소의 심판이 나오지요? 양과 염소를 어떻게 가릅니까? 예수님께서 오른편의 의인인 양들에게 뭐라고 하시지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물을 주었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하십니다. 의인들이 이야기합니다. ‘제가 언제 그랬나요?‘ 주님께서 말씀하시지요?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염소들은 뭐라고 항변해요? ‘내가 언제 안 했습니까?’ 그럽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안 한 것이 나에게 안 한 것이다’ 하십니다. 분명 어떤 죄를 지은 것을 근거로 심판의 기준을 삼지 않으시고 해야 할 일을 안 한 것을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단순히 죄를 안 지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이 땅에서 천국 백성들의 삶의 원리로 천국을 미리 살다 가지 않으면 천국은 그야말로 낯선 이방 땅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어떻게 맛보지 못한 것을 먹고 싶어 할 수 있겠습니까?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이 땅에서 경험해 보지 못하고 어떻게 그 나라를 소망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착한 일 선한 일을 해야 천국 간다라고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잘 한 번 보세요. 거기서 지극히 작은 형제들이 누굴까요? 배고픈 자들, 헐벗은 자들, 고아와 과부들 그런 것일까요? 물론 성경에 고아와 과부 소외된 자들을 돌아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들은 그런 불쌍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세대주의자들은 ‘내 형제들 중 지극히 작은 자’가 휴거 이후에 대 환란 기간에 남은 유대인들이라 합니다. 모든 민족들은 이방인들이고 회개하고 유대인들을 도운 자들을 양이라 하고 그렇지 않은 자들을 염소라 합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25장의 ‘모든 민족’을 모아 세워 놓고 분별을 하신다는 구절에서 모든 민족은 이방인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쓰인 모든 민족이라는 헬라어 원어가 ‘판타 타 에쓰네’ 인데 동일하게 그 단어가 쓰인 곳이 마태복음 28장에 나옵니다.
(마 28:19)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바로 여기에 똑같이 쓰였습니다. 모시다시피 모든 민족은 이방인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예수님의 형제들은 누구일까요?
(마 12:49-50)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라 하시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0:40-42)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을 향해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형제들은 바로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 옆에 있는 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형제자매에게 선행을 하면 천국을 하고, 선행을 안 하면 못 간다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형제자매들을 돌아본다는 증거(evidential)로 제시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교회를 돌아본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이유라기보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배고플 때 너는 자선 단체를 만들었고, 너는 나의 굶주림을 논의했다. 고맙다.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너는 슬그머니 빠져나가 너의 지하 기도실로 갔다. 거기서 너는 나의 석방을 위해 기도했다. 내가 헐벗었을 때 너는 마음속으로 내 몰골의 도덕성을 거론했다. 필시 믿음에 무슨 문제가 있을 거야 내가 아팠을 때 너는 무릎 꿇고 너의 건강함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내가 집이 없을 때 너는 하나님의 사랑이 영혼의 피란처라고 내게 설교했다. 내가 외로웠을 때 너는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가서 나를 위해 기도했다. 너는 참으로 거룩해 보인다. 하나님과 친밀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배가 몹시 고프고 외롭고 춥다.
너의 기도는 어디로 간 것인가?‘ 여러분, 세상의 다른 사람들은 도와 달라 부르짖는데 너희 기독교인들은 앉아서 그들과 비교해서 너에게 주어진 편안함에 감사만하고 있고 기도 책만 들추고 있다고 불신자가 쓴 시입니다. 정말 우리가 양 맞습니까? 아님 양의 탈만 쓰고 있는 염소입니까?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정말 너무나 힘이 들어서 일주일을 아이들 죽만 쑤어 먹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성경 공부를 가르치던 우리 청년들이 가끔 쌀과 반찬거리들을 사들고 놀러 와서 슬그머니 그 것들을 내려놓고 간 적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다들 힘든 아이들이었음에도 자기들을 가르치는 전도사님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그렇게들 해 준 것입니다. 제가 그 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아마 그러한 그 아이들의 사랑과 배려가 없었다면 저는 너무 힘이 들어 한국으로 그냥 돌아갔을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돈이 많다고 해서 남을 도울 수 있는 것 아닙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인색하게 살다가 결국 맨손으로 죽음의 문을 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직도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돈이 자기의 힘이라고 여기고 사는 세상 사람들은 절대 자발적이며 순수하게 남을 돕지 못합니다. 인색하기 그지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자기의 힘이기 때문에 자신의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결코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사람이 왜 인색하다고 했지요? 아직도 자기의 존재와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저 하늘에 있는 우리의 분깃, 우리의 기업, 우리에게 상속되어져 있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까짓 돈 없어도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기에 주눅 들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돈이 나의 힘이 아니기에 어려운 이들을 보면 자기 주머니를 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시겠다고 하신 그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로 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자로서 살 형제자매들의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 하나님의 약속에 활짝 귀를 열지 못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분명 거기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내가 형제의 아픔을 돌아보고 그들의 필요를 돕는 것에는 분명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천국은 바로 나를 위해 남을 밟는 자들이 아닌 남을 위해 나의 목숨을 주는 예수 안에 연합된 예수 같은 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 천국이기에 우리는 인생을 통해 희생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많이 손해 보세요. 그게 복입니다. 여인의 뜰에서 앉으셔서 연보함에 돈을 넣는 사람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계셨던 예수님을 기억하세요.
(막 12:41-44) “41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과부가 여인의 뜰에 있는 13개의 연보 궤 중 어느 곳에 두 렙 돈을 넣었습니다. 렙은 유대인들의 화폐단위 중에 가장 작은 것입니다. 8분의 1센트 정도의 가치이니 거의 쓸모없는 돈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칭찬하십니다. 그 여자는 자기의 모든 것을 넣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헌금을 많이 하고 안하고를 이야기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느냐를 보신 것입니다. 그 두 렙 돈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쓸모없는 돈이었을지 몰라도 그 여인에게는 생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칭찬하셨다는 것을 참 몰인정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아 내가 받은 걸로 할 테니 그냥 가지고 가서 빵이나 사먹어라’하고 말씀하셨다면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될 뻔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렇게 자기의 것을 투자해서 하나님께 받아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을 드려서 하늘나라의 분깃을 소망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삶인 것이기에 주님은 그 여인을 칭찬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칭찬을 받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백세에 얻은 자식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차 없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성도인 것입니다.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도 그렇고요 밀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있던 것을 자기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 쓰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나그네에게 먹인 그녀야 말로 자기의 모든 것을 드리는 희생을 삶으로 살아야 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니겠습니까? 그들이야말로 천국의 풍성함을 얻는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분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스리시고 거기에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잘 살고 있으십니까?
(골 1:13)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메디스테미’ 과거 시제입니다. 우리는 아들의 나라로 이미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께서 재통일을 시켜 놓으시고 천사들을 다스리고 계시고 만유의 왕이 되셨습니다. 이제 가시적으로 나타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들이 이 땅을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입니다. 우리 그 나라 백성다운 삶을 좀 경주해 봅시다. 그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자로서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그 하나님 나라는 어떠해야 함을 삶으로 보이고 입으로 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할 일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모두 그렇게 살다 갔습니다.
(행 1:3)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행 8:12) “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행 19:8)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행 20:25) “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행 28:23) “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행 28:30-31)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다들 무엇에 대하여 강론하고 전파하다가 갔습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대해 전파하고 강론하다 가야겠습니까? 역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라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재통일된(애나케 팔라이오) 나를 희생해서 남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천국 아닙니까? 우리는 입으로, 삶으로 그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살다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 희생하세요. 그럼으로 다른 이들이 살아나는 기적들을 경험해 보세요.
교회는 세상에 대해서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비추어져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가시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바로 그 하나님 나라만을 삶으로 입으로 전하다 갔는데 입만 열면 복 복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나라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중국 조선족 선교에 가서 처음 복음을 전한 아이가 성삼이라는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중국의 한 삼자 교회에 출석을 했었답니다. 삼자 교회는 들어가면서 헌금 봉투를 받아 교역자들이 보는 앞에서 헌금 통에 헌금을 해야 한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돈이 없어서 헌금을 안 했더니 목사가 그날은 인사도 안 하더라 지요. 그 아이가 편지에 이렇게 썼더군요. ‘선생님, 이곳의 교회는 일하기 싫은 사람들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만 믿으면 다 잘 살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저는 더 이상 그 곳에 가고 싶지 않아요.’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자들이 모여서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불가능해 보입니까? 여러분은 able not to sin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예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주셨고,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능력이 되셨고, 예수께서 우리가 그렇게 살아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럼 노력해야 지요. 우리는 한 곳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오직 하늘의 분깃을 바라보며,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며 서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세상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이런 것임을 보여주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그렇게 한 번 살아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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