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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6. 20.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김성수 목사)

 

 

(요 1:14-18) “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15 (요한은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쳤다. "이분이 내가 말씀드린 바로 그분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이분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실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16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18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6)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나님이신 외아들께서'”

 

 

우리는 지난주에 구원이라는 것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살리신 그 ‘주님의 은혜‘는 일회적이며 단발 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적이며 역동적인 영향력이며 경향성이라는 것이라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루이스 벌코프는 ’은혜’를 정의하기를 ‘은혜란 신자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방법이다. 즉, 은혜란 단지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은총일 뿐 아니라 성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격적이며 지속적인 거룩한 영향력을 말 한다’라고 했습니다.

 

쉬운 말로 은혜는 한번 받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그 날까지 우리를 양육하고 성숙시키는 방법이며 수단으로 ,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정의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의 세 시제’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여러 번 공부했다시피 구원은 ‘칭의, 성화, 영화‘모두를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어떤 한 시제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라고 과거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계획하시고 시작하신 것은 절대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원리적이며 신분적이며 운명적인 면에서 ‘구원을 받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다’라고 구원을 현재 시제로 이야기하는 것은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 죄 된 육신을 벗고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눈부신 새 몸을 입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 입성하는 그 날 완성이 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구원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구원의 미래시제가 성경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단발 적이며 일회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화의 단계에 들어가게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어, 그 분을 영접하게 된 사람들은 그 때부터 성화가 시작되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법’이 지배하던 그들의 삶을 ‘은혜의 법’인 ‘생명의 성령의 법’이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화입니다.

 

(롬 8:2)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6:14) “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은혜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은 은혜가 그 삶을 지배해야 합니다. 그런데 눈을 돌려 우리의 현실을 보면 여전히 우리의 삶을 죄가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내용이 바로 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고, 그 하나님의 자녀는 죄가 그의 삶을 주관치 못 한다’라고 성경이 이렇게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데 왜 우리 성도라는 사람들의 삶이 이렇게 여전히 죄의 지배 아래에서 허덕이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게 되면 성경의 말씀대로 죄의 절대적인 지배는 종식이 됩니다. 그러나 죄의 오염과 부패성은 여전히 그 성도의 안에 현존합니다. 그러니까 원리적으로는 거듭난 신자의 삶이 은혜 아래 있게 되는 것이지만 실제적인 성도의 삶은 은혜의 지배 아래에서 여전히 자신 안에 현존하는 죄와의 투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자가 죄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밀렸을 때 그 사람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롬 7:21-23)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1절에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에서 ‘함께 있다‘라고 번역이 된 ’파라케이타이‘는 ’근접해 있다, 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의미의 ’파라케이마이’의 직설법 현재 중간태 3인칭 남성 단수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 선생도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 한켠에 늘 악을 기꺼이 행하고자 하는 ‘준비된 의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는 거듭난 이후에도 죄와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것이고 때때로 죄가 거듭난 신자를 지배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의 삶을 죄가 절대적으로 지배를 할 수는 없습니다.

 

신자의 삶 속에 나타나는 죄의 지배는 ‘죄의 상대적인 지배’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은 불신자의 삶 속에 나타나는 죄의 지배는 ‘절대적인 것’이어서 그 죄에 대해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지만 신자의 삶 속에 나타나는 ‘상대적인 죄의 지배’는 비록 그 외양은 다른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저항하여 몰아낼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John owen은 그의 저서나 논문에서 ‘죄 죽이기’라는 표현을 아주 자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죄 죽이기’의 삶을 열심히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 신자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그 죄가 비록 ‘상대적이지만’ 그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록 그 사람이 신자라 할지라도 불신자와 방불한 더럽고 추악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자신의 삶을 죄의 지배에 내어주고 있기에 제가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그들의 삶은 은혜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바로 그 때 그를 지배하던 죄의 허리가 꺾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라는 놈은 여전히 자기의 노예였던 그 사람을 놓아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호시탐탐 지배권을 탈취하려 합니다. 그런데 신자라는 사람들이 그 잔존하는 죄가 벌이는 게릴라전에 스스로 동조를 해서 그 게릴라들이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 안에서 막강한 불법 정부를 세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 안에 세워진 그러한 게릴라 정부는 불법입니다.

 

(요일 3:3-4)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지리멸렬해야 하는 죄가 그 신자 안에서 불법 정부를 세울 수 있게 되는지를 살펴보지요. 여러분 이 죄의 교리를 잘 알아두셔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죄의 지배에 빠지지 않고 은혜로운 삶을 사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리산에 숨어있던 빨치산들이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버틸 수가 있었는지 아세요? 산 아래에 있는 농민들 중에 그들에게 동조하는 이들이 그들에게 계속해서 식량을 대 주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정부가 들어선 신자 안에서 죄의 게릴라 정부가 지속적으로 힘을 발휘하게 되는 이유는 신자 자신이 죄의 세력에 동조를 함으로 해서 지속적으로 그 죄의 세력에게 식량을 대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에게 식량을 공급해 준다는 말은 신자가 죄가 시키는 것을 열심히 순종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절대로 죄에게 복종해서는 안 된다‘라고 여러 곳에서 경고를 한 것입니다.

 

(롬 6:12-13)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6:16)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이렇게 거듭난 신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안에 작은 세력으로 남아 있는 잔존하는 죄를 죽이는 삶을 살아내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 은혜의 정부가 함락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구원이 취소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은혜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신자의 삶 속에 죄가 지배를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죽이시는 주체는 성령이시지만 성령께서는 반드시 신자의 순종을 통해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죄도 신자의 순종을 먹고 힘을 얻습니다.

 

(롬 8:13)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서 ‘육신‘’사르카‘는 ’죄 된 육체‘를 말합니다. 여기 보시면 그 죄 된 육체를 ’몸의 행실‘이라고도 부릅니다. 그 것을’영으로써 죽이면 살 것이다’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몸의 행실‘’죄 된 육체‘를 죽이시는 주체가 누구라는 것입니까?’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를 죽이라‘는 명령은 성도에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주체가 되셔서 죄를 죽이시는데 반드시 우리 성도의 순종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죽을 것이로되’ 그 단어는 헬라어 ‘아포스네스케인’인데 그 말은 ‘생명의 기능들이 사라지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죽이는 삶을 살지 않는 성도의 삶 속에는 생명력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행복과 기쁨과 경탄과 찬양이 없어지고 마치 죽은 자처럼 고통스럽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 ’살리라‘입니다. 여기서 쓰인 ’죽이면’은 또 다른 단어입니다. 여기서 쓰인 단어는 ’따나토오‘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동물이나 사람 같은 생명이 있는 사물을 공격하고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죄와의 싸움은 그야말로 치열한 전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싸움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은혜와 진리이신 주님을 보고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은혜의 지배가 사라지고 죄의 지배가 판을 치는 것입니다. 그 전투가 얼마나 치열한지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한탄을 했을 정도입니다.

 

(히 12:4)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이거 보세요. 사도 바울은 성도가 죄와 싸울 때 피가 흐를 정도로 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경건은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 생명이 풍성하게 자라게 되는 조건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딤전 4:8) “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신자들이 죄의 지배 아래에서 오래 머물다 보면 처음에는 ‘남아 있는 죄의 오염’ 때문에 괴로워하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본인이 자발적이며 의도적으로 죄를 짓게 됩니다.

 

(시 19:13) “13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여기서 ‘고범 죄’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제딤‘은 ’반항, 고의‘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제드‘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죄를 죽이는 삶을 살지 않고 오랫동안 그 죄가 이끄는 대로 죄에 순종해서 살다보면 본인이 의도적이며 계획적으로 죄를 짓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어둡고 암울하고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리처드 십스는 ‘양심을 거스르는 죄는 살아남은 기도의 입을 막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영혼의 자유를 빼앗아 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드시겠지요? ‘밖으로 나오는 실행 죄는 어떻게 참아 보겠는데 마음속에 일어나는 죄는 어떻게 하는가? 주님께서는 진짜 사람을 죽이고 살인을 한 자와 마음속으로 살인을 한자를 동일한 살인자로 여기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렇게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마음속의 죄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면 밖으로 실행이 되어 나가는 죄도 굳이 막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언젠가 마음이 통제 될 때 그 때 실행 죄도 그치면 되지 않겠는가?’ 이런 질문이 안 드세요?

 

(마 5:27-28)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타락한 인간 속에서는 절대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으며 밖으로 나타나는 실행 죄는 모두 그 타락한 더러운 마음속에서 출발된다는 것을 강조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의 수준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도저히 자신들의 실력으로 하나님의 요구 수준을 맞추어 낼 수 없음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짓는 모든 마음속의 죄와 밖으로 출산 된 죄를 다 뒤집어쓰시고 십자가에서 죽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모든 죄는 이미 다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신앙생활 속에서 그들이 출산된 죄를 지은 것과 아직 출산되지 않은 마음속의 죄를 지은 것이 성도에게 동일한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은 것’은 아직 출산되지 않은 심중의 죄이고 ‘실제로 간음을 한 것’은 이미 출산 된 죄입니다. 만일 성도가 ‘마음에 음욕을 품어서 마음으로 간음 죄를 범했다’고 해 보자고요. 그 성도의 마음은 일시적으로 더렵혀질 것이고 영혼의 생기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진심으로 참회하고 회개를 하면 이내 쉽게 영혼의 원기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죄를 밖으로 출산을 해 버렸다고 해 보세요.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실제로 남의 아내와 간음을 했다고 해 보세요. 그래서 다윗처럼 아이가 생기고 추문이 공개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진실하게 참회를 하고 회개를 한다고 해도 마음속으로 출산되지 않은 죄를 지었을 때처럼 쉽게 영혼의 원기를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진실로 참회를 했음에도 하나님의 거절 감과 징벌은 아주 오래도록 그 다윗을 쫓아다녔고 그 죄로 인한 고통은 다윗을 너무나 오랫동안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출산되는 죄, 고범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 실행 죄를 자발적으로 고의적으로 짓지 않기 위해서는 죄가 불법적으로 자신을 지배하지 못 하도록 매 순간을 자신의 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죄와 은혜는 둘 다 사람의 순종을 바탕으로 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죄와 은혜는 모두 실행하면 할수록 더욱 내적인 원리가 강화됩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쓰지 않으면 내재하는 죄가 증가되고 은혜를 사용함으로써 더 이상 내재하는 죄가 자라지 못합니다. 순종의 의무에 있어서 더 많은 은혜를 사용할수록 은혜는 더욱 강화되고 증가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들의 정욕의 열매를 많이 생산해 낼수록 그들 안에서 더 많은 정욕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정욕은 스스로를 먹고살며 자신의 독을 삼키며 증식합니다.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지을수록 그들의 성향은 죄를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경향성에 더욱 완고한 힘을 실어 주고 그 경향성에 맹렬함과 무모함을 더해 주고 죄책감을 덜어줍니다. 그렇게 해서 신자의 영이 하나님의 말씀에 둔감해 지게 만듭니다. 그런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져도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예전보다 더 쉽게 죄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죄가 어떻게 신자 안에서 은혜의 지배를 몰아내고 그 지배력을 확보해 가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죄가 신자의 마음속에서 그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 쓰는 무기가 ‘속임(deceit)'과 ’강압(force)'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속임(deceit)'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죄는 신자 안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그 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해 ‘속임(deceit)'이라는 무기를 쓰는데 죄가 신자를 속이는 것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로 죄는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를 숨깁니다. 죄의 궁극적인 계획은 단순히 신자로 하여금 개별적인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궁극적인 계획은 그러한 개별적인 죄를 통해서 신자의 영혼에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신자를 피로 사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죄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만일 신자가 유혹을 받을 때 죄의 속성이 무엇이고 그 죄가 자기를 데려 가려고 하는 그 끝이 어디인지를 안다면 신자는 결코 그 죄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그 것을 숨김으로써 신자를 속이는 것입니다.

 

둘째로 죄는 용서하시는 은혜의 원리를 자의적으로 적용을 함으로 신자를 속입니다. 신자가 죄를 죄로 인식하게 되면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죄는 신자에게 ‘네가 죄를 범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쉽게 용서해 주실 거야’라고 은혜의 원리를 자의적으로 적용을 합니다.

 

셋째로 죄는 범죄 함으로 얻는 즐거움에 대해서 과다한 기대를 갖도록 속입니다. 죄는 신자를 유혹하면서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갖게 될 죄책감보다 신자가 그 죄를 지음으로써 얻게 되는 즐거움이 더 클 것이라는 과장된 기대를 신자에게 심어 줍니다. 그래서 신자는 잠시 죄책감으로 망설이다가도 그 죄로 인한 즐거움에 대한 기대로 죄책감을 무참하게 밟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커다란 기대를 갖고 죄를 지었는데 의외로 그 즐거움이 기대에 못 미치고 허탈한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게 바로 죄의 속임수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죄가 신자 안에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 쓰는 무기가 ‘강압(force)'입니다. 강압은 ‘집착과 두려움’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죄의 강압은 신자로 하여금 죄의 욕구를 유지함으로써 느끼는 은밀한 마음의 즐거움에 집착하게 할 뿐 아니라 신자가 죄의 실행이 주는 즐거움 때문에 지금 실행하고 있는 죄악을 그만두지 못하게 힘을 가합니다. 그리고 죄의 강압은 그 욕구를 거절하거나 죄의 실행을 그친 후에 다가올 미래의 상황에 대해 두려움을 심어줍니다. 죄 가운데 있는 신자는 하나님의 엄위를 인식하고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죄의 실행이 주는 즐거움이 그 두려움을 잠시 잊게 해 줍니다. 그런데 죄는 신자가 그 죄를 그치게 되면 그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고스란히 자기에게 임할 것이라고 마음속에 위협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께서 신자로서 반드시 끊어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악한 습관이나 죄를 하나씩 떠 올려 보세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그 것을 당장 그만 두실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그러니까 무언가가 여러분 안에서 강한 힘으로 반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겠지요? 그게 강압입니다.

 

그리고 그 악한 습관이나 죄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미워하시는 짓인지 잘 아시지요? 그런데 그 악한 습관이나 죄를 저지르면서 하나님께 정말 죄송한 마음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 가요? 별로 없으실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면 벌써 그 악한습관을 끊어 내셨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해 아파하십니다. 그래서 루이스 벌코프는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라고까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께 조금도 죄송한 마음 없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죄에게 속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속임과 강압’ 이것이 바로 죄가 여러분 안에서 지배력을 확보하고 확장하기 위해 쓰는 교묘한 무기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속임과 강압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습니까? 먼저 속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총명이 필요하겠지요? 여러분은 성경을 근거로 죄가 어떻게 성도들을 미혹하며 어떤 힘으로 누르고 있는지 잘 공부하셔야 합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죄의 속임에 대한 내용만 알고 있어도 죄에게 그렇게 호락호락 속지 않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복음의 내용을 잘 공부해서 무장을 하고 있으면 죄가 신자를 속이려 할 때에 적절하게 대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압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도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의 강압에 맞서서 싸울 수 있는 힘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로부터 출발합니다. 새뮤얼 볼턴은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을 'wickedness''사악함‘이라고 하고 순종할 힘이 없는 것을 ’weakness''약함‘이라고 명확하게 구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순종하고자 하는 힘이 없는 것보다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을 더욱 더 악하게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다는 것은 은혜를 경험한 하나님의 자녀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사악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종하고자 하는 힘은 우리가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발동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의 강압과 속임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 성도들은 끊임없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 말씀과 교리들을 열심히 탐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죄를 죽이겠다는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징후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는 스스로 기꺼이 말씀을 통해서 영향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그 속에 떨어지면 기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는 자발적이며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자리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빠지지 않고 참석합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향을 받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예배나 성경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한 게으름과 나태함은 점점 깊어져서 어느 순간 말씀을 공부하는 자리에 빠지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게 되어서 진지하게 성경을 탐구하는 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한 신자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지금도 아파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두 번째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는 죄 책의 인식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에 의해서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이 죄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부터 죄에 대해 친화 적으로 민감하게 되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아파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자신만 거룩한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도 같은 기대를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의 유일한 존재 목적은 자신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창조의 목적 아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히 받아서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기를 기대하고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을 보거나 들을 때에 마음이 아픕니다.

 

(시 119:136) “136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네 번째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불쾌감이나 아픔을 인식하는, ‘마음의 신령한 지각’들이 사라집니다.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수시로 자신의 마음이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좋아하심과 싫어하심을 예민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신자가 자기의 마음을 죄에게 점차 내어 주면서 신자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나 마음의 생각, 그리고 실제로 나타나는 행동 등에 대하여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은 어리석을 정도로 무모하고 쉽게 범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는 자신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늘 의식하며 살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에서 마음의 신령한 지각들이 민감하게 작용하던 시편 기자의 고백이 시편 77 편에 나옵니다.

 

(시 77:6-9) “6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 7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8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9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

 

다섯 번째로 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신자는 특정한 악에 대해 계속해서 상상을 하게 됩니다. 죄는 제일 먼저 신자의 생각을 공격합니다. 생각을 통해서 들어 온 죄는 상상을 통해서 사고 기능에 간여하기 시작합니다. 신자가 어떠한 범죄를 지속적으로 상상한다는 것은 죄를 짓고 싶은데 그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도록 환경에 의해 제약을 받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특정한 범죄 행위를 계속해서 상상한다는 것은 환경의 제약만 없어지면 언제든지 그 죄를 출산해 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도둑질에 대한 상상을 오래도록 지속적으로 한 사람은 상상 속에서 그 도둑질이 주는 재미와 즐거움에 빠집니다. 간음에 대한 상상을 오래도록 지속적으로 하는 사람도 상상 속에서 그 죄가 주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되지요. 그러한 사람은 언제라도 환경만 열리면 그 재미를 좇아 죄를 지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사람은 죄 죽임의 방편들을 소홀히 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자가 자신 안에 내재하는 죄를 죽이며 은혜 아래 살게 하는 수단들을 주셨습니다. 'means of grace' 뭡니까? 말씀, 기도, 성례입니다. 성례는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복음이니까 은혜의 수단은 ‘말씀과 기도’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 은혜가 지속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은혜의 전달 수단으로 주신 말씀과 기도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실행에 옮깁니다. 그렇게 해서 은혜가 부어지게 되면 자연히 죄가 세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은혜가 죄의 세력에게 밀려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여 죄를 죽이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그 죄가 주는 즐거움과 쾌락에 푹 빠져서 죄와 담합하여 은혜를 죽이는 일에 힘을 쓰게 됩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공부하는 데에 불성실한 사람들은 전부 죄의 지배 아래 살고 있는 것이고 그들은 절대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늘 우울하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보시면서 마음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죄가 원하는 바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그렇게 죄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상대적 지배) 어떻게 구체적으로 대처를 해야 하는지에 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좀 전에 죄가 ‘속임과 강압’으로 우리 신자들을 유혹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잘 탐구하고 배워서 총명을 잃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발휘해야 한다고 그 대처 방안을 크게 두 가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을 조금 세분해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총명의 부분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금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다면 여러분은 오늘 배우신 죄의 지배의 교리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죄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맞붙어 싸워야 하는 죄와 우리 자신에 대한 정리된 지식이 필수적입니다.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죄의 지배와 죄의 집요한 공격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죄의 지배에 대항해서 싸운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나 있는 죄의 교리에 대한 지식을 통해 정확한 진단을 받고 그 진단에 맞추어서 조치를 하는 것이 가장 빠른 죄에 대한 대처 방법인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신자라는 확인만 있다면 현재 신자가 아무리 심각한 죄의 공격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그 것은 죄의 잠시 적이며 폭동 적인 사건이지 절대 그 죄가 영구적으로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피 흘리기까지 싸우다보면 반드시 그 죄의 세력은 지리 멸렬 하게 물러가고 맙니다. 여러분 정말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죄와 싸우겠다고 의지를 발동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때 그 죄가 얼마나 우습게 무너지는지 경험해 보지 않으셨어요? 단지 우리 성도들이 그 죄를 너무나 무서워해서 의지의 발동조차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아닙니다. 죄의 세력은 잠시 우리를 장악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발동하여 죄 죽이기에 나서면 이내 그 죄는 허물어지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발동하게 될 때 그 죄의 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서 여러분은 은혜의 교리에 대해서도 확실한 정리를 하고 계셔야 합니다. 신자가 정욕이 불길처럼 일어나서 죄의 지배를 받게 되면 신자는 이내 자기 안에는 은혜가 전혀 없고 자신은 온통 죄 덩어리라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가 아무리 극악한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할지라도 그 신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완전히 소멸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실패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은혜의 불길이 거의 꺼져 가고 작은 불씨만이 남아 있는 그런 처참한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불씨는 성도의 순종과 죄와 싸우겠다는 의지를 에너지로 삼아 다시 활활 타는 은혜의 불길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자신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이 확인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자신의 죄가 너무 커서 이제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고 생각된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는가를 기억하십시오.

 

(눅 23:34) “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주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전히 그 죄의 지배 아래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그 죄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오늘도 공급해 주고 계십니다.

 

(시 42:5)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121:1-2)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주님은 십자가를 의지해서 주님께 순종하고자 의지를 발동하는 사람에게 그 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이 확인이 되면 자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죄 가운데 살도록 돕는 삶의 환경을 정비하고 정돈해야 합니다. 소극적인 의미에서 삶을 정돈한다는 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죄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환경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죄를 이길 힘을 얻게 하는 은혜의 방편과 그를 실천할 환경에 자신을 가까이 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간이 심하게 나빠졌다고 가정해 보면, 그 사람은 여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그렇게 된 원인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간에 해로운 것들과 간에 이로운 음식이나 생활 습관 등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해로운 것이라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피하여야 합니다. 술, 담배, 맵고 짠 음식 등은 피하고 신선한 야채나 기타 간에 좋은 음식은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쁜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술을 한잔 안 마신다고 해서, 담배를 한 대 덜 피운다고 해서 당장 간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지를 가지고 그러한 생활 습관을 바로잡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질병은 악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불경건한 친구들과의 교제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서슴없이 죄를 짓게 한다면 여러분은 가차 없이 그 친구들을 떠나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인터넷에 뜨는 음란물들을 습관적으로 보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여러분은 단호히 인터넷도 끊어버리셔야 합니다. 음란물 한 두 번 보는 것이 무슨 큰 죄인가? 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쌓인 음란한 생각은 상상으로 이어지고 그 상상은 곧 실행 죄로 출산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청소년 범죄의 70% 이상이 인터넷 모방 범죄라고 합니다. 신자의 생활환경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직장에서 여러분에게 불법적인 일을 강요하거나 늘 회식이다 뭐다 해서 술자리를 피할 수 없게 한다면 그 직장이 아무리 편하고 유망한 직장이라 해도 여러분은 그 곳에서 나오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밤늦게 까지 TV를 보거나 비디오를 보느라 아침에 기도는커녕 출근하기 바쁘시다면 TV를 갖다 버리셔야 합니다. 신자의 거룩한 삶과 성화에 있어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소극적으로 죄를 짓게 하는 나쁜 환경에서 자신을 격리시키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신자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경 공부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구역 모임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주일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매일 매일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놓아야 합니다. 신자가 은혜로부터 멀어질 때 죄와 가깝게 된다는 진리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신자가 이러한 방법을 동원해서 죄와 싸운다할지라도 잘못된 동기와 목표를 가지고 싸우게 되면 신자는 반드시 죄와의 싸움에서 실패를 하게 됩니다.

 

첫째로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죄와 싸운다는 것은, 신자가 죄 자체를 혐오하거나 미워해서 죄 죽이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자신이 당하게 될 불명예나 수치에 대한 두려움이 동기가 되어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신자가 어떤 특정한 죄에 계속해서 말려들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범죄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교회의 장로, 혹은 목사인데 이런 게 알려지면 무슨 망신인가? 사람들이 알면 나를 향해 손가락질 하며 욕할 거야’ 그런 생각이 들면 죄를 지을 마음이 잠시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건 올바른 죄 죽이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죄와 싸우는 참된 동기는 복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이루신 속죄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도록 부름 받았는데 죄가 그 것을 깨뜨리고 구원의 소명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미워하고 죽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계획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도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읽으셨던 존 오웬의 ‘죄 죽이기’라는 책에 보면 죄 죽임과 비슷하기는 한데 죄 죽임의 실천이 아닌 것을 여섯 가지로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1) 죄를 죽인다는 것은 죄를 숨기는 것이 아니다(dissimulation)

 

(2) 죄 죽임은 단지 본성을 조용하게 만들고 침착하게 개선시키는 것이 아니다.

 

(3) 죄에 대한 간헐적인 정복이 죄 죽임은 아니다

 

(4) 죄의 고통이나 두려움 때문에 정욕에 대항하는 것은 죄 죽임의 실천이 아니다.

 

(5) 고통을 당하는 시기에 괴로움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무리 간절할 지라도 죄 죽임의 실천이 아니다.

 

(시 78:34-35) “34 하나님이 저희를 죽이실 때에 저희가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35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36 그러나 저희가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거보세요. 이렇게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기의 괴로움을 덜기 위해 죄를 멀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성경이 말하는 죄 죽이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고 그러한 사람은 절대 죄 죽이기를 성공할 수 없습니다.

 

(6) 죄의 모양이 다른 것으로 전환된다고 해서 죄가 죽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잘 못된 목표를 가지고 죄와 싸우는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평안을 위해 죄와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가 죄를 지으면 그 죄는 즐거움도 주지만 괴로움도 줍니다.

 

(시 31:10) “10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이렇게 죄는 신자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싫증을 내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도 권태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범죄 한 사람들에게는 지속적인 평강이 없습니다. 죄를 짓는 그 순간에는 더 이상의 평강을 바라지 않을 정도로 순간적인 즐거움이 있지만 그 즐거움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잠시 누린 죄의 즐거움보다 몇 배 더 커다란 심리적인 외로움과 생각의 혼란이 밀려옵니다. 그 때 잠시 그 사람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죄를 떨쳐 버리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에서 죄를 잠시 멀리하는 것은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죄의 지배 속에서도 얼마든지 잠시 죄에 대해 싫증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마음의 평화만을 위해 죄를 잠시 멀리하는 사람들은 목적이 죄를 죽여서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평화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죄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잘 못된 동기와 목표로 죄와 싸우는 사람들은 언제나 죄 죽이기에 실패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들은 금방 그 싸움을 포기하고 신속히 예전의 방탕한 삶으로 돌아갑니다.

 

(벧후 2:20-22) “20 만일 저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개가 그 토하였던 것이 돌아갔다는 것은 더럽고 역겨운 것이라 토한 것이 아니라 그냥 모르고 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더러운 것을 다시 먹지요.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돼지는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 옳기 때문에 씻은 것이 아니라 몸을 씻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씻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더러운 곳에 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왜 죄를 죽여야 하는지에 대해 정확한 동기와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그 죄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가 죄와 싸우는 것은 올바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성경을 탐구하고 공부해서 그 성경을 근거로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신자의 삶 속에 죄를 허락하시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구원하실 때 죄까지도 싹 없애주시면 좀 좋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신자 안에 죄의 오염과 부패성을 잔존하게 놔두셨을까요?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죄라는 것이 얼마나 집요하고 더럽고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러한 죄로부터 구원을 해 주신 하나님의 크심과 그 분의 은혜를 깊이 체험케 해 주시기 위해 죄를 잔존케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간수라는 것을 아십니까? 간수는 옛날에 사약으로 쓰이던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항우장사 같은 사람도 간수 한 사발만 마시면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간수가 어디에 쓰이는지 아세요? 두부를 만드는데 쓰입니다. 콩 물을 고체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간수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두부 좋아하시는 분들은 지금 매일 독약을 조금씩 마시고 있는 꼴이 되는 것입니까? 두부를 많이 먹은 사람은 체내에 독이 그만큼 많이 쌓여 있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두부는 그 자체로 아주 영양가가 높은 건강 음식입니다. 간수는 독약이지만 간수가 조금 섞여서 만들어 낸 두부는 아주 훌륭한 음식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옛날에 소금은 자살용으로 많이 쓰였던 것이었습니다. 소금을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내장이 절여져서 금방 죽습니다. 삼투압, 팽압 현상에 의해서 농도가 낮은 내장으로 소금이 금방 스며들어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금 없이는 살수가 없습니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우리 몸에 염분이 없으면 우리는 금방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는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멸절 시켜야 할 더럽고 추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죄로 하여금 성도의 성도됨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은혜로 연결되는 ‘죄’는 신자가 여전히 사랑하는 ‘죄’가 아니라 신자 안에 남아 있지만 신자가 그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로 하여금 죄와 싸우게 하심으로 해서 신자의 성숙에 유익을 만들어 내시고 은혜를 넘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인간들은 도저히 상상 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롬 5:20)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여기서 ‘가입하다’라고 번역이 된 ‘파레이셀뗀’은 ‘추가로 들어왔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이미 어떤 종류의 율법이 있었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law of nature''본성의 율법’입니다.

 

(롬 2:14-15)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렇게 인간에게는 본성의 율법이 있어서 모든 인간은 ‘죄’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이 들어옴으로 해서 본성의 율법만으로는 알지 못했던 죄를 아주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이 가입함으로 죄가 더해졌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가 드러난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다는 것이지요. 그 말은 신자가 도저히 자기 스스로 이겨낼 수 없는 죄를 경험하게 될 때 주님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은혜의 힘에 의해 그 죄가 죽어 가는 것을 봄으로 해서 그 죄보다 더 강한 주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하게 되는 이치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구절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의역을 한다면 ‘죄와의 싸움이 많은 곳에 은혜의 능력이 더욱 더 풍성하게 경험 된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또 하나님께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범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때까지 들어가 보지 못한 깊은 영혼의 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시 51:11-12)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다윗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야기 된 무서운 고통 속에서 통절하게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행복보다 자신의 마음이 정결해 지고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다윗은 마침내 자신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신학자인 워필드 목사님의 말씀처럼 다윗은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죄와 구원에 관하여 구약 계시 속에서 최고의 경험적인 이해를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그 추악한 범죄와 또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는 그 위대한 용서의 계시에 있어서 최고의 담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죄가 그를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죄를 통해서 죄의 비참한 결과를 뼈저린 고통 속에서 경험적으로 알 수 있었고 거기서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 사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처절하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죄를 사용하셔서 자기를 계시하시고 죄의 무서움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감사한 것인지를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신자들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던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와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으며 우리는 그 분의 은혜만을 간구해야 하는 나약한 피조물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뭡니까?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우주의 중심에 자기 자신을 올려놓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모든 행위‘가 ’죄‘입니다. 그런데 거듭난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그러한 ’죄‘를 경험함으로 해서 우리 자신은 얼마나 신뢰할 수 없으며 나약한 존재인지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자는 자기 자신 속에 남아 있는 죄와의 싸움을 통해 자신에 대한 신뢰를 깨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죄와의 싸움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오래 참으심도 아울러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더러운 죄 속에서 뒹굴고 있는 그 분의 자녀를 오래 오래 기다려 주십니다. 나중에 그 신자가 죄를 죽이고 은혜의 지배 속에 있을 때 죄 속에 있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자기의 죄를 그토록 오래 참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깨닫게 됩니다. 그럼으로 해서 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한 발 더 깊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죄까지도 선용하셔서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처럼 죄와 은혜의 교리를 명확히 배웠고 어떻게 해야 우리 안에 잔존하는 죄의 세력을 몰아내고 은혜가 지배하는 참 성도의 삶을 배웠음에도 여전히 죄 죽이기에 돌입하지 않고 죄가 주는 즐거움과 쾌락에 빠져서 하루하루를 더럽고 추악하게 산다면 그는 어쩌면 신자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주님을 ‘보고’ 그 분을 영접한 사람은 반드시 그 은혜의 영향력과 경향성에 지배를 받아 죄를 죽이고 하나님의 자녀로 지어져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부터 여러분 속에서 여러분을 미혹하고 있는 그 죄들을 죽여 가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로 쑥쑥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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