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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31강. 두 증인

by IMmiji 2015. 10. 9.

31강. 두 증인 (계 11:1-13)

 

계 11:1-13=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3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요한계시록은 영적으로는 모든 교회 시대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로부터 시작하여서 어느 시대에나 적용을 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두 증인은 어느 시대이고 있었어요.

 

하지만 요한 계시록은 종말에 되어 질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그럼 두 증인은 종말에 나타날 주의 종들인 것입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요한계시록을 대할 때에 과거적인 해석 보다는 미래적인 해석, 즉 장차 될 일로 해석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세상적인 것 같지만 실상은 그 속에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에게는 영적 비밀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각양의 사회 현상들을 통해서 영적 메시지를 읽어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으로 흐르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시작과 끝이 있다 함은 시작의 모습이 있고 끝의 모습이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어른에서 노인이 되면 우리의 몸이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이 세상도 그러합니다.

세상의 끝이 다다르면 세상의 모습도 끝인 종말론적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걸 징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일어날 여러 가지 사건들을 가지고서 종말의 징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징조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읽어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종말론적 현상들을 나타내는 것과 같이 교회도 종말론적 현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의 모습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노아의 때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파는 것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관심사가 세상 적이고 육신적인 일에만 몰입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를 영적으로 말하면 교회가 세속화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땅에 가치로 살고 육적 쾌락을 쫓아간다는 말이에요.

신앙의 타락이란? 인본주의와 세속화입니다.

 

구약에서는 종말의 모습들이 여러 번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 하셨듯이 노아 시대가 세상 종말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당시의 모습이 종말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초림 때 유대교의 타락 모습이 종말 교회의 타락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초림은 예수님의 재림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예수님 초림 때 그림을 이 시대 교회 모습과 비교 하면 복사판임을 알 수가 있어요.

전도서에서는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하면서 인간의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였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이는 옛날 인간이나 지금 인간이나 그 인간이 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성은 어느 시대이고 동일하고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게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예전에 했던 일을 지금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에는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은 우리의 자화상이고 우리의 신앙에 거울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봅시다.

 

고전 10:1-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저희의 다수(多數)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末世)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기를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실패한 사건들을 가지고 거울로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왜, 거울로 삼으라고 합니까?

 

이는 종말의 교회가 또 다시 구약 교회의 전철을 밟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교회를 가지고 신약 교회에 경계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을 보세요.

예수님 초림 당시의 교회 모습과 똑 같아요.

예수님 초림 당시의 유대교는 화석화 되었어요.

백성들의 신앙은 외식으로 편만했어요.

 

그래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두 증인이 되어서 화석화 된 구약의 율법 외식 신앙을 깨트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강력한 말씀으로 백성들의 굳은 마음들을 깨트리는 일을 하셨어요.

 

세례요한을 첫 마디가 뭔가요?

‘회개 하라!’ 이었어요.

‘회개 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했어요.

 

‘회개 하라!’는 말은 기존의 ‘신앙의 형식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외식 신앙에서 돌이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율법 신앙을 버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신앙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고 하셨어요.

왜, 율법 신앙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고 합니까?

이는 마음에도 없는 것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백성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마음에도 없는 것을 억지로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니 얼마나 고역이었겠어요?

하나님이 좋을 리가 없지요.

하나님이 싫은 겁니다.

 

그 이유는 거짓 종들이 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법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니까 두려운 겁니다.

그러니 억지 춘향이 노릇을 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이는 성전에 오기 싫은데 율법으로 안 오면 저주 받는다고 하니까 오는 거예요.

 

이사야는 이러한 신앙을 성전 마당만 밟고 다니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얼마나 하나님이 역겨웠으면 누가 성전 문을 좀 닫아 달라고 하였겠습니까?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게 외식이에요.

마음에도 없는 것을 하는 척 하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제사와 제물들은 이제는 역겁다고 하시면서 다시는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전에도 오지 말고 문을 닫으라고 하신 거예요.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소돔의 관원이라고 하였고 고모라 백성이라고 하였어요.

얼마나 역겨웠으면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저주 받은 가장 타락한 도시의 백성들과 같다고 하였겠습니까.

 

명절날 못난 며느리가 시집에 와서 잔뜩 골이 나서 찌푸리고 있는 그 면상을 그려 보세요.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보세요.

당장 가라고 하지 않겠어요.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그랬어요.

안식일에 하나님 앞에 안 오면 저주 받을 까봐 오기 싫어도 오는 거에요.

와서 눈도장 찍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받으시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 신앙이 그랬어요.

종교 지도자들은 무거운 짐을 백성들에게 지웠어요.

갖가지 제목의 금령들을 만들어서 백성들을 옭아맸어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제정한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하는 금령이 39가지가 있어요.

참고적으로 한 번 살펴보세요.

 

1. 씨를 뿌리지 말 것

2. 밭을 갈지 말 것

3. 곡식 단을 묶지 말 것

4. 곡식을 거두지 말 것

5. 곡식을 타작하지 말 것

6. 곡식을 까불지 말 것

7. 곡식을 갈아 가루로 만들지 말 것

8. 곡식을 찌지 말 것

9. 채질하지 말 것

10. 반죽하지 말 것

11. 굽지 말 것

12. 털 깍지 말 것

13. 빨래하지 말 것

14. 때리지 말 것

15. 염색하지 말 것

16. 실을 짜지 말 것

17. 밧줄을 끌지 말 것

18. 두 끈을 만들지 말 것

19. 두 실을 짜지 말 것

20. 두 실을 가르지 말 것

21. 매듭을 짖지 말 것

22. 매듭(끈)을 풀지 말 것

23. 바늘로 두 번 깁지 말 것

24. 두 뜸을 깁기 위해 찢지 말 것

25. 사슴을 잡지 말 것

26. 죽이지 말 것

27. 껍질을 베끼지 말 것

28. 소금을 치지 말 것

29. 그 가죽을 만들지 말 것

30. 머리털을 밀지 말 것

31. 그것을 깍지 말 것

32. 두 글자를 쓰지 말 것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지우지 말 것

34. 집 짓지 말 것

35. 헐지 말 것

36. 망치로 납작하게 때리지 말 것

37. 불을 끄지 말 것

38. 불을 켜지 말 것

39.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물건을 옮기지 말 것

 

이것은 노동과 관련 있는 조항들입니다.

다른 것들도 많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주머니에 일정한 금액 이상의 돈을 가지고 있어도 안 되어요.

또한 일정한 거리 이상 걸어가서도 안 되어요.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길이가 정해져 있었어요.

 

한 번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에 관하여서 설교를 하였어요.

그러자 회당에 있던 자들이 화가 나서 예수님을 동네 밖 벼랑으로 밀어서 죽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날이 마침 안식일이에요.

 

안식일에는 일정한 거리 이상을 가게 되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되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벼랑으로 밀고자 갔는데 아뿔사 그 벼랑이 안식일에 갈 수 있는 거리를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벼랑으로 밀어서 떨어뜨리지 못하였어요.

 

성경에는 안식일 거리 이야기는 기록이 되지 않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을 잘 아는 유대 역사가들은 그렇게 해석하고 있어요.

충분히 공감 가는 말이에요.

그만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하는 수많은 금령들을 만들어서 백성들을 옭아매었던 것입니다.

 

안식일 금령중 하나라도 범하면 죄가 되니까 제사를 지내야 하잖아요?

없는 살림에 제사 지내자면 제물을 사서 바쳐야 하니까 부담스러운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차라리 안식일이 없었으면 하였어요.

왜냐하면 안식일이 되면 제사 지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요즘 식으로 돈을 많이 갖다 바쳐야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 백성들 입장에서는 안식일이 아니라 두려운 날이 되고 만 것입니다.

 

백성들은 안식일이 고역의 날이지만 제사장들에게는 기쁨의 날이에요.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바치는 제물로 먹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제사를 많이 지내면 지낼수록 좋은 겁니다.

그만큼 수입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제물도 아무 것이나 바치면 안 되어요.

성전에 가면 제사장들이 정해 놓은 제물들이 있어요.

그걸 사서 바쳐야 했어요.

 

성전에서 비둘기나 양을 파는 자들이 있었어요.

이들은 제사장들과 결탁이 되어서 이익을 반분 하였어요.

그러니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죄를 많이 지으면 지을수록 좋은 겁니다.

안식일 금령에 위배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기 주머니에 돈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확대 해석하여서 가르쳤어요.

지도자들은 없는 법도 자꾸만 만들어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 먹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백성들은 안식일이 돌아오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안식일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뒤집어엎은 것이에요.

이건 성전이 아니라 마귀의 소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허물어 버린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을 척량하지요.

이것은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서 사고 파는 자들을 내어 쫓은 것과 같아요.

같은 의미에요.

 

알다시피 요한계시록은 장차 될 일을 기록하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초림 당시와 같이 성전을 척량하는 일이 있어요.

이는 곧 종말의 교회가 예수님 초림 당시의 교회와 같이 타락하였다는 말입니다.

도적놈들만 모였다는 말입니다.

 

누가 도적놈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도적질 하는 놈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 배를 채우는 자들이에요.

예수를 이용해서 이 세상에서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어요.

 

빌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저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배를 섬긴다고 합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땅에 거하는 자들이에요.

성전 밖 마당에 있는 자들이에요.

 

이들은 성전에 온 목적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에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러 온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하고자 왔어요.

그래서 도적이고 강도인 겁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돈이에요.

돈을 위하여 하나님을 우상숭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증인들이 누구랑 싸웁니까?

두 증인은 땅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이란? 육신의 소욕을 좇아가는 자들을 말해요.

신앙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불리는 자들을 말해요.

 

그래서 두 증인들이 하늘을 닫아 비오지 못하게 합니다.

 

이건 엘리야 시대 일어났던 일입니다.

엘리야 시대가 어떤 시대였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어떠했나요?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으로 둔갑하여서 섬기던 시대였어요.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이라고 가르쳤어요.

 

바알은 남자 신으로서 풍요를 주는 신이고,

아세라는 여자 신으로서 다산을 주는 신이에요.

그러니까 바알과 아세라는 이 땅에 풍요와 다산을 주는 신이에요.

성경은 이걸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 우상 신들은 두로 왕의 딸인 이세벨이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시집을 오면서 데리고 온 것들입니다.

아합 왕이 두로와 정치적인 동맹을 맺고 정략적으로 두로 왕 엣 바알의 딸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때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수백 명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들이 사마리아에 바알과 아세라 산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어요.

그들의 종교 의식이 제사장과 성교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바알과 아세라 신전에서는 음행이 난무했어요.

 

바알과 아세라는 부부에요.

바알 신전에는 남자 제사장이 있고 아세라 신전에는 여 사제가 있었어요.

부부가 사랑을 하면 자식이 생기듯이 신전의 제사장과 교접을 하면 많은 자식을 생산하고 풍년이 주어진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바알 신전과 아세라 신전에는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었어요.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 이외 모두는 우상이에요.

이를 알고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이 자기들의 신을 하나님으로 둔갑을 시켜 놓은 것입니다.

바알을 하나님으로 둔갑을 시킨 겁니다.

여기에 궁중 선지자들이 합세를 하여서 백성들을 미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혹을 당하여서 거리낌 없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이럴 때 엘리야가 하나님께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속에 바알 신앙이 팽배해 있었어요.

백성들은 바알이 복을 준다고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비가 오지 못하게 기도를 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때를 따라 비가 와서 농사를 잘 지으니까 그것이 바알의 은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엘리야가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바알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 비를 내리지 못하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자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든 것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자 온 나라에 난리가 났습니다.

 

이 때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불러서 누가 진짜 하나님인지 내기를 하자고 합니다.

백성들에게 엘리야가 섬기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지 아니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섬기는 신이 참 하나님인지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누구의 제단에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지 확인해 보자고 합니다.

불이 내리는 제단에 신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각자의 방식대로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자 엘리야의 제단에 하늘에서 불이 내립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고 바알의 하나님은 가짜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엘리야가 백성들로 하여금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몽땅 죽여 버립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비가 옵니다.

3년 6개월 동안 닫혔던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주심으로서 너희가 그동안 풍요를 누리고 잘 산 것은 바알이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누리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이 주는 것인 줄을 잘못 알고 있어요.

그래서 엘리야가 하늘을 닫아 비가 내리지 못하게 하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는 바알이 풍요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것이 호세아에서도 나타납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남편의 돈으로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것입니다.

고멜이 바람피우는 돈이 모두가 호세아 돈이에요.

그래서 호세아가 고멜의 돈 줄을 막아 버립니다.

 

이것은 엘리야 시대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고 가뭄이 든 것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고멜이 돈 줄이 끊기자 비로소 본 남편에게로 돌아갑니다.

호세아가 고멜의 돈 줄을 막아 버린 것은 본 남편에게 돌아오게 하고자 함입니다.

 

결국 고멜은 돈이 떨어지자 본 남편에게로 돌아갑니다.

고멜은 돈이 있으면 본 남편을 떠나고 돈이 없으면 본 남편에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걸 알고 하나님은 고멜의 돈 줄을 막아 버리는 일을 단행한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골 골짜기로 인도하고서는 거기서 소망의 문을 삼게 하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골 골짜기는 지옥을 상징해요.

 

하나님이 지옥 같은 환경에 집어넣고서는 하나님을 찾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을 삼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옥에서 천국을 바라보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등 따습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떠나요.

이건 인간의 본성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들을 정의하기를 배부르면 하나님을 떠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대로 드러나요.

항상 부요하면 타락 했어요.

그럼 하나님께서 이방에 붙여서 부요를 약탈당하게 합니다.

약탈당하고 나면 그 때 하나님을 찾아요.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부요와 타락과 징계와 회개라는 악순환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요.

 

종말의 교회에 두 증인들이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한다는 말은 종말의 교회들이 부요하여서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종말의 교회 안에서 두 증인들이 엘리야가 행하였던 것을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증인들이 하나님에게 무엇이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였는지,

하나님을 떠나게 한 그것들을 제거 해 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바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회개 운동을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복이란?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저주란?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두 증인들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요인들을 제거 해 달라고 기도해요.

이게 하늘을 닫아 비를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에요.

 

이 시대 교인들은 하나님을 바알처럼 섬기고 있어요.

세상에 복주는 하나님으로 믿고 있어요.

땅에서 잘되게 해 주고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어요.

이건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관이에요.

 

그래서 두 증인들이 엘리야처럼 잘못된 신관을 고쳐주는 일을 합니다.

이것을 회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릴 것이냐? 바알이 하나님이면 바알을 섬기고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여호와를 섬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갈멜산 전투에서 바알은 거짓 신이고 엘리야가 섬기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백성들 앞에서 증명해 보였습니다.

 

엘리야의 갈멜산 전투가 곧 유브라데 전쟁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두 증인들이 사역을 할 때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고 땅에 거하는 자들과 싸우고 잘못된 신앙에서 돌이키라는 뜻으로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두 증인들이 굵은 베옷을 입었지요.

베옷은 회개를 상징하는 옷입니다.

굵은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큰 회개 운동이 일어날 것을 말하고 있어요.

마치 예수님 초림 때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예루살렘에 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종말에도 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농사를 알면 이해가 쉬워요.

하나님은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옮겨 두고서 애굽과 다른 방식으로 농사를 짓게 하십니다.

애굽은 나일강 물이 풍성해서 자기들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어요.

 

그러나 가나안은 물을 저축할 수가 없는 산악지대에요.

비가 오면 물이 다 빠져 나가요.

그래서 가나안에서는 애굽식 농사법으로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 방식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세초부터 세말까지 너희들을 지켜보면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신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농사를 지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나만 믿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의 농사법을 가지고서 자기 백성들을 어떤 식으로 구원해 내시고 다스려 가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에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단순한 비가 아니고 그 비가 담고 있는 영적 의미가 있어요.

이게 신약으로 오면 성령으로 나타나요.

 

이른 비는 봄비로서 파종 할 때 내리는 부드러운 비에요.

이 비로 인하여 파종된 씨앗이 싹을 내고 잎을 피우고 자라게 됩니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나타났어요.

오순절 성령 강림은 이른 비와 같아요.

 

성령이 임하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예수님 피로 맺은 새 언약의 복음이 온 세상으로 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온 세상에 구원의 농사가 지어지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곡식이 잘 익으면 가을에 추수를 하여야 하잖아요?

 

늦은 비는 가을 추수시기에 오는 비에요.

이 비는 강한 비에요.

이 비로 인하여 과실들이 텁텁한 맛이 사라지고 달콤한 맛이 들어가게 되어요.

그러니까 늦은 비는 과실의 맛을 내게 하는 비에요.

이 비가 열매를 익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 재림 때 부어지는 늦은 비 성령이에요.

 

스가랴 12-13장을 봅시다.

 

슥 12:10-14=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슥 13:1-9=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3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 4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5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6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9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주신다고 하지요.

그럼 각 사람들이 애통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를 일컬어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들의 죄와 더러움을 씻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는 회개를 말합니다.

 

회개 운동이 일어나면 거짓 선지자들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럼 백성들은 그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그들에게서 떠나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떠나온 작은 무리들에게 손을 드리우고 지켜 주십니다.

이게 초림으로도 나타났지만 재림 때도 또 다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씨 뿌리는 봄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재림은 곡식을 추수하는 가을이에요.

씨 뿌릴 때 연장하고 추수 할 때 연장은 달라요.

연장을 말씀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종말에 타락된 교회 안에서 전해지는 복음이 어떠한 것인지 드러나게 됩니다.

 

어린 아이에게 하는 말과 어른에게 하는 말이 달라요.

어린 아이들에게는 부드러운 말을 하지만 어른들에게는 강한 말을 해요.

우리의 신앙은 초림 때는 어린 아이 같지만 재림 때는 다 자란 어른이에요.

 

두 증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을 하지요?

이는 강력한 말씀으로 회개 운동을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늦은 비가 뿌려지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릇된 신앙에서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란? 가던 길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종말의 회개는 타락된 교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을 보면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합니다.

 

계 18:1-5=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계시록 18장은 음녀의 멸망 사건을 기록하고 있어요.

음녀가 누구인가 하면 종말의 타락한 교회를 말해요.

교회의 모습을 보세요.

 

2절을 보세요.

 

2절,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큰 성 바벨론이라고 하지요.

그러면서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인 곳이라고 합니다.

 

종말의 교회가 예수님 초림 때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강도의 굴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각종 장사꾼들이 모였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음녀를 일컬어 큰 성 바벨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바벨론 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 할 당시의 성전 안의 모습과 일치해요.

 

에스겔 8장을 봅시다.

 

겔 8:1-18= “제 육년 유월 오일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았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서 내게 임하기로 2 내가 보니 불같은 형상이 있어 그 허리 이하 모양은 불 같고 허리 이상은 광채가 나서 단 쇠 같은데 3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는 투기의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4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 있는데 내가 들에서 보던 이상과 같더라 5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니 제단 문 어귀 북편에 그 투기의 우상이 있더라 6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7 그가 나를 이끌고 뜰 문에 이르시기로 내가 본즉 담에 구멍이 있더라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 담을 헐라 하시기로 내가 그 담을 허니 한 문이 있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들어가서 그들이 거기서 행하는 가증하고 악한 일을 보라 하시기로 10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면 벽에 그렸고 11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인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같이 오르더라 12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13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다시 그들의 행하는바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14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거기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 15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16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보니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 오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 17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 그들이 강포로 이 땅에 채우고 또 다시 내 노를 격동하고 심지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느니라 18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아껴 보지 아니하고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이 때가 언제인가 하면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때 성전 안에서 일어나는 모습이에요.

성신이 에스겔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리고 가서 그 안을 보여 줍니다.

에스겔이 가만히 보니까 성전 곳곳에 각양의 우상에 모습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장로들은 우상에게 기도하고 있으며,

여인들은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고 있고,

사람들은 동방 태양을 숭배하고 있어요.

이것은 전부 이방신들을 섬기는 모습들이에요.

 

이건 요한계시록 18장의 음녀의 모습과 같아요.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인 것입니다.

남쪽 유다가 멸망 할 당시의 구약 교회 모습과 예수님 재림 직전의 교회 모습이 똑 같아요.

지금 이 시대 교회가 귀신의 놀이터가 되었어요.

 

이 때 하나님이 빛난 놋 쇠 같은 분을 보내서 성전을 척량하게 하셨어요.

그리곤 성신으로 새로운 성전을 짓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구약 교회를 심판하신 것으로 나타났어요.

그리고 오순절 성령이 오셔서 새로운 성전을 성도들 안에서 짓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종말에 다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두 증인들을 보내서 성전을 척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자들에게 강력한 말씀으로 회개케 하십니다.

예수님이 강력한 말씀으로 구약 교회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빼내셨듯이 종말에도 두 증인들이 강력한 말씀으로 성도들을 음녀로부터 빼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증인들이 모습을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바벨론에 불타 버린 성전을 다시 짖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구약의 스가랴서를 인용한 말씀입니다.

 

스가랴 4장을 봅시다.

 

슥 4:1-14=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우임 같더라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3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4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11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12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13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14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12절을 보면 스가랴가 두 금관 옆에 두 감람나무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14절에서 이들은 기름 발리운 자 둘인데 온 세상에 주 앞에 모셔 서 있는 자라고 합니다.

 

기름 발리운자 둘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말해요.

이 두 사람은 당시 바벨론에 불타 버린 성전을 다시 짓기 위하여 파송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세우심을 입었어요.

그래서 기름 발리운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성령의 감동을 입은 종들을 말해요.

이렇게 되면 바벨론에 의하여 불타 버린 성전을 다시 짓는 일을 누가 주도적으로 하는가 하면 성령이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합니다.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가리키는데 스룹바벨은 유대 총독이며 여호수아는 제사장입니다.

이들이 바벨론에 불타 버린 성전을 다시 짓는 일을 합니다.

새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증인을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합니다.

이는 두 증인들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같은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종말에 두 증인들을 가지고 세속화되어서 바벨론에 불타 버린 성전과 같은 타락된 교회를 새로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짓는 것이 아니고 성신으로 지어요.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에 의하여 지어진다는 말입니다.

이 성전은 일차적인 의미로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성취가 되었어요.

 

예수님은 인간의 의가 난무하던 구약 교회를 허물었어요.

예수님께서 강도의 굴혈이 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는 ‘이 성전을 허물라 그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 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시고 난 후 부활하여서 성령으로 성도들 심령에 오셔서 새로운 성전을 짓는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가 아닌 성령에 의해서 말이에요.

그래서 5절에 보면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이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온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처소는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을 말해요.

그 성전은 성령이 오심으로서 성도들 안에 지어지는 것입니다.

 

스가랴는 지금 성령이 오셔서 지어지는 성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전을 스가랴에서는 두 감람나무인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짓는다고 하였어요.

스룹바벨은 왕이고 여호수아는 제사장이라고 하였지요.

 

그러니까 새롭게 지어지는 성전은 왕이시면 제사장이신 분이 짓는다는 것입니다.

왕이며 제사장인신 분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이에요.

그러니까 두 감람나무는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두 증인은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하고 있어요.

이는 두 증인이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나요?

타락한 교회를 허물고 새로운 성전을 지었어요.

 

그럼 종말에 나타나는 두 증인들도 타락된 교회를 허물고 새로운 성전을 짓는 일을 한다는 말이 되겠지요.

맞아요.

종말의 교회도 예수님 초림 당시의 구약 교회처럼 강도의 굴혈이 되었어요.

 

이걸 요한계시록 17-18장에서는 교회 안에 각종 상고들이 가득하다고 하였어요.

상고란? 장사꾼을 말해요.

이 말은 곧 종말의 교회가 장사꾼 소굴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걸 예수님 초림 식으로 말하면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것으로 말해주었어요.

 

이 시대 교회는 예수님 초림 당신의 구약 교회와 똑 같아요.

목사들은 강도가 되었고 교인들은 장사꾼이 되었어요.

모두가 자기 이익을 위하여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비즈니스가 이루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종말의 타락 한 교회를 일컬어 교회라고 하지 않고 음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음녀가 뭔가요?

몸을 팔아서 사는 자를 말하잖아요.

교회가 누굴 팝니까?

예수를 팔고 있어요.

교회들이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를 팔고 있어요.

쎄일하고 있다고요.

 

교인들은 마트에 가서 자기가 필요한 물건을 고르고 사오듯이 자기가 필요한 교회로 찾아가요.

이 시대 교회 안에는 갖가지 예수가 포장 되어서 진열이 되어 있어요.

자기 입맛에 맞는 예수가 포장 되어 있는 교회로 찾아 가면 되어요.

 

떡 주는 예수,

병 고쳐주는 예수,

기적을 행하는 예수,

사업을 번창케 해 주는 예수,

사회 정의를 위하여 데모하는 예수,

갖가지 예수가 있어요.

골라잡으면 되어요.

 

마귀가 예수를 다양하게 포장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주리실 때 마귀가 찾아 와서 하는 말을 잘 생각해 보세요.

마귀가 예수님에게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라고 합니다.

 

마귀가 제시한 하나님의 아들은 이런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 아들이니까’ 돌이 떡 되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마귀가 이 세상에 내어 놓는 하나님의 아들은 떡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자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아들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이 가난하면 하나님 망신시키는 것이니까 세상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많은 들은 이야기지요?

이 시대 교회 안에서 목사들이 앞 다투어 설교 하는 내용이잖아요.

주구장창 들리는 소리들이잖아요?

목사들이 마귀의 말을 하고 있어요.

 

거짓 종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증명 할 거야? 부자가 되어서 봐라, 나는 예수 믿고 이렇게 복 받고 잘 살게 되었다고 간증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말하잖아요.

물질만능 시대에 아주 와 닿는 말이 아닌가요?

그래서 목사나 교인들은 부자가 되면 예수 믿고 복 받았다고 자랑하잖아요.

교인들은 이런 사고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라고 전도하고 있구요.

 

마귀가 또 하나 내민 카드가 천하만국의 영광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최소한도 세상 사람들보다도 높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는 세상에서 유명해지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교회마다 유명인들 자랑하기에 바빠요.

목사나 교인이나 우리 교회에 이런 사람 나온다고 하면서 교회 알리기 마케팅을 해요.

 

유명 연예인이나, 유명 스포츠 선수나, 유명 정치인이나, 유명 재벌이나, 유명한 교수나 의사나 법조인들이나 아무튼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 자기 교회에 나오면 그걸 가지고 교회 홍보를 해요.

이게 이 시대 우리들의 교회 모습입니다.

 

마귀가 또 하나 내민 카드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는 기적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기적을 행하여서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합니다.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적을 행하는 분으로 각인을 시켜 놓았어요.

그래서 교인들은 목사들이 신접한 여인처럼 무당 노릇을 하면 능력 있는 목사라고 하면서 추종을 해요.

마귀가 제시한 하나님 아들 상은 한마디로 자기존재감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영웅호걸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를 드러내고자 존재하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라고 합니다.

즉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나를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창세전에 하신 언약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몸을 십자가에 죽임 당하는 것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면서 아버지께 복종 하였다고 합니다.

 

마귀의 논리는 땅에 가치로 하나님 아들다움은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본문에서는 땅에 거하는 자라고 합니다.

마귀의 소속은 땅이에요.

 

하나님께서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저주하셨어요.

그러므로 마귀는 땅에 것으로 미혹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를 시험하던 방식은 지금도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귀가 내민 카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거리들입니다.

 

사도요한은 이러한 것을 일컬어 모두가 세상에 것이라고 하였어요.

 

요일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 것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요.

세상 것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니에요.

마귀로부터 온 것이에요.

 

이러한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에요.

지나간다는 말은 영원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진짜 복이 아니란 말입니다.

 

진짜 복은 하늘에 있어요.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들이에요.

그게 창세전 언약이고 말씀이에요.

예수에요.

하나님의 말씀만 영원히 남아요.

예수만 영원히 남아요.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가진 자가 진짜 복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는 주야로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증인에게 작은 책을 먹이지요.

작은 책이 영원한 복음이에요.

창세전 언약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창세전 언약을 가진 성도가 진짜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두 증인들은 땅에 가치로 가득한 종말의 세속화 된 교회에 가서 하늘에 가치인 하나님의 언약에 말씀을 증거 합니다.

그러자 땅에 거하는 자들이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유브라데 전쟁이에요.

 

이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거짓 선지자들과 벌린 전쟁과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주셨던 그 능력을 주셔서 말씀을 증거 하는 기간 동안은 악한 자들을 이기게 하십니다.

 

두 증인들이 말씀을 전할 때 방해하는 자들은 죽임을 당해요.

영적으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증인들이 그 증거를 마치는 때에는 힘없이 죽임을 당해요.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수고를 마치고 쉬게 하신 것입니다.

마치 군대에서 제대 시킨 것과 같아요.

 

두 증인은 이 땅에서의 삶은 마치고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안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증인의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동일한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두 증인도 예수님처럼 죽임 당했어요.

 

예수님을 누가 죽였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불리던 땅에 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육에 속한 자들이 예수를 죽였어요.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이용해서 성전에서 백성들의 피를 빨아 먹던 자들이에요.

 

이러면 두 증인들을 죽인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의 정체를 알 수가 있겠지요?

거짓 목사들이에요.

이들은 예수를 죽인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 배를 채우던 자들이에요.

 

성경을 보면 답이 있어요.

구약에 선지자들이 누구랑 싸웠습니까?

그리고 누구에게 죽임을 당하였나요?

거짓 선지자들과 싸웠고 그들에게 죽임 당했어요.

 

거짓 선지자가 어디서 활동합니까?

교회에요.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등쳐먹고 있어요.

요한계시록은 거짓 목사들을 폭로하고 있어요.

이들을 적그리스도 세력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예수님 초림 때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권력을 삼았어요.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백성들의 돈을 갈취하였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육에 속한 목사들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공갈을 쳐요.

교인들을 협박해요.

자기들 말을 안 들으면 저주 받는다고 해요.

여기에 그 속에 진리가 없는 사람들은 다 속아요.

거짓 목사들에게 당하게 되어 있어요.

 

영적인 일에는 인간의 똑똑함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해요.

그래서 거짓 목사들의 말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라고 하지 마세요.

그들이 우리보다 똑똑치 못하여서 그런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짓 것을 믿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봅시다.

 

살후 2:9-14=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악한 자가 누구에게 임한다고 합니까?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에게 임한다고 하지요.

악한 자는 육에 속한 자들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란? 거짓 목사들을 말해요.

하나님께서 거짓 목사들을 일으킨 것은 육에 속한 자들을 추수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에게 거짓 것을 믿게 하는 유혹의 역사를 일으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서 주의 사랑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여서 진리를 믿게 하고 복음 안에 든든히 서게 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를 복음으로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합니다.

 

우리가 이단에 빠지지 않은 것은 우리가 똑똑하고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막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으면 우리도 이단에 빠질 수 있어요.

그러니 감사하셔야 해요.

선줄로 생각하지 말고 넘어질까 조심하고 늘 기도해야 합니다.

 

성전 바깥은 이방인에게 42달 동안 내어 주었다고 하지요.

여기서 “주었은즉” 이라는 말은 ‘에도떼’ 라고 하는데, 이는 수동태로서 하나님이 내어 주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교회 안에 거짓 종들의 활동을 막지 않고 일하도록 허용 하였다는 말입니다.

 

왜, 거짓 종들을 허락했을까요?

이는 교회가 세상과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걸 요한계시록 17-18장에서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은 사상을 말해요.

그러니까 교회가 세상의 가치와 하나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교회인지 세상인지 분간이 안 된단 말입니다.

마치 창세기 1장의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이 하나로 섞여 있는 것과 같아요.

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서 갈라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면 갈라짐이 일어나요.

심판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세울 자는 세우고 넘어지게 할 자는 넘어지게 하세요.

 

두 증인들이 입에서 불이 나오지요.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불같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불은 심판성을 말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 모습이 어떠했나요?

불의 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지요.

이는 성령이 감동으로 증거되는 말씀은 불 같이 심령을 변화시킨다는 말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 이야기를 해 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하지요.

 

말씀이 불같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하나는 거짓은 소멸하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소성 시킨다는 의미에요.

 

작은 책을 먹은 두 증인들이 전하는 복음을 들으면 항상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어떤 이는 신앙이 힘을 얻고 살아나고 어떤 이는 그 반대로 심령이 강퍅해지기도 해요.

 

복음에 합당한 자들은 말씀을 들으면 회개하고 돌이켜요.

허물어진 신앙의 단을 다시 쌓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반대로 복음에 합당치 않는 자들은 점점 멀어지고 신앙의 단을 허무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게으름으로 나타나요.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면 감사해서 더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쪽으로 나타나는데,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핑계로 그나마 하던 신앙생활도 안 하는 식으로 나타나요.

동일한 복음을 들었음에도 상반된 반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의 차이입니다.

그 안에 성령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입니다.

법 아래 있는 자와 은혜 아래 있는 자의 차이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면 육에 속한 자들은 신앙에 쌓았던 단을 허물어 버려요.

오히려 더 열심히 하여야 하는데 반대로 게으르고 악해져요.

이건 마치 죽은 나무에 물을 주면 썩는 것과 같아요.

 

이 시대 이런 자들이 엄청 많아요.

복음 아는 것이 마치 모든 신앙인줄 알고 거드름을 피우고 있어요.

복음을 자기들 입맛에 맞도록 가공하여서 어떤 논리를 만들어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니 우린 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신앙의 형식들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두 증인들이 복음을 전하면 영에 속한 자들은 무너진 단을 수축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오지만, 육에 속한 자들은 그나마 있던 신앙의 단들도 다 허물어 버리고 육체의 소욕을 좇아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음을 잘못 이해하면 율법 폐기론자가 되고 무 율법주의가 되어요.

이들은 복음을 자기 사욕을 좇는데 악용을 해요.

예수 믿으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면서 자기 맘대로 살아요.

 

은혜를 옳게 받으면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하나님 말씀을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순종하고자 하는 성향으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걸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이건 사랑해 보면 알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은 다 듣고 싶어져요.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게 되어 있어요.

그게 사랑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그래요.

하나님 말씀을 더 순종하고자 해요.

비록 우리 몸이 연약하여 온전하게 지켜내지 못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지향성은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걸 구약의 귀를 뚫은 종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은혜 받은 자들은 귀를 뚫은 종처럼 살게 되어요.

 

출애굽기 21장을 봅시다.

 

출 21:1-6= “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 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3 만일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4 만일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그의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의 아내와 그의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5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6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원래 히브리인들은 종이란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기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다가 어떤 사고나 사건으로 인하여 땅을 팔게 되면 부득불 남의 집에 종살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희년이 되면 종에서 해방이 됩니다.

이 때 주인이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 값으로 산 토지도 원 주인에게로 돌려주고 종에서 자유의 몸이 되도록 해 줍니다.

 

이 때 그 종이 이르기를 그 주인이 너무도 좋아서 자신은 그 주인과 함께 살고 싶어서 종에서 풀려나기를 거절합니다.

그냥 주인을 모시고 종으로 살겠다고 합니다.

 

그럼 주인은 그 종을 성전으로 데리고 가서 제사장에게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그럼 제사장은 그 종의 귀를 성전 문에 대고 송곳으로 뚫게 됩니다.

이러면 그 종은 영원히 그 주인의 종으로 살게 되어요.

 

종으로 살되 자원하는 종으로 살아요.

억지로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고 기쁨으로 해요.

왜냐하면, 자비로운 주인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말이에요.

이러한 종이 바로 자유하는 종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원래부터 종이었어요.

과거에는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은혜 아래로 옮겨 주셨어요.

이제 은혜의 종이 된 것입니다.

 

이건 자랑스러운 종이에요.

주인이 자유를 주었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러니 자유를 주어도 돌아가지 않고 주인의 집에서 영원히 기쁨으로 주인을 섬기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 받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를 칭하기를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어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데 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이 올바로 구원을 받은 귀를 뚫은 종의 모습이에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렇게 나타나야 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이 모습이 교회 안에서 나타났어요.

율법 아래서는 안식일에만 모이면 되었지만 성령이 임하여 구원의 은혜를 받고 보니 그 기쁨을 주체 할 수가 없어서 날마다 모여서 그 은혜를 찬미하며 감사 하였던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십일조만 드리면 되었는데 구원을 받고 보니 그 은혜가 너무도 커서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게 된 것입니다.

구원 받고 보니 자기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재산을 팔아 교회에 내어 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보세요.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고 보니 그 은혜가 너무도 고마운 겁니다.

그래서 자기의 전 재산과 같은 향유가 든 옥합을 깨트려서 예수님의 발을 씻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제자들은 마리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였어요.

그래서 제자들은 마리아에게 그 귀한 것을 허비 한다고 나무랐던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하면서 제자들을 나무랍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마리아의 이러한 일들을 증거 하라고 하셨어요.

 

예수님이 교회에다가 전 재산을 팔아서 돈 바치라고 한 것입니까?

아니에요.

은혜가 이러한 식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을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마리아를 향하여 귀한 것을 허비하였다고 나무라던 제자들이 자기 목숨을 예수님을 위하여 버리는 식으로 살아갔어요.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자기들이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귀를 뚫은 종처럼 죽음도 불사하면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억지로 하지 않았어요.

모두가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했어요.

이게 올바로 은혜를 받은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령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를 지식으로 알았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붙잡혀서 죽임 당하게 되자 자신들은 살기 위하여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임하고 나자 도망은커녕 도리어 예수로 인하여 핍박 받고 죽임 당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된 것은 엄청난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복음을 아는 성도들은 율법 아래서 행하던 것보다 더 열심히 주를 섬기게 되어 있어요.

자원하는 마음으로 말이에요.

 

그런데 어찌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아무 것도 안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가 있나요?단언코 그럴 순 없어요.

만약에 복음 안다고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자들은 그가 아는 복음은 지식이고 그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고 죽은 믿음이에요.

 

그가 아는 복음이 지식이고 그가 믿는 예수가 관념이기 때문에 자기 몸뚱이의 편안함을 챙기고자 예수를 배반하고 다 도망가던 성령 받기 전의 제자들처럼 아무 것도 안하고 게으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보세요.

야고보서는 살아 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의 차이를 행함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그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 나타나게 되어 있고,

귀신의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기 때문에 행함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더러 행함을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니까 날마다 모이고 섬김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 임하기 전에는 그러지 않았어요.

손을 움켜잡고 내어 놓지 않았어요.

인색 했어요.

근데 성령이 임하자 움켜잡은 손이 펴지고 베풂이 나오는 것입니다.

 

산 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요.

하지만 죽은 나무는 꽃도 없고 열매도 없어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예수가 있는 성도는 성령의 열매들을 맺지만, 그 안에 예수가 없는 자들은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없는 자는 결국 이방인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의 생명의 활동이에요.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살아서 일을 하세요.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올바로 받은 성도들은 귀를 뚫은 종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에서 성도들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기 때문에 더 잘해야지요.

더 감사하여야지요.

더 모이고 더 섬기고 더 봉사하고 더 연보하고 더 잘하여야지요.

어떻게 복음 안다고 하면서 안 모이고 안 섬기고 연보도 안하고 봉사도 안 할 수가 있어요.

그건 짝퉁 복음이에요.

 

분명히 말합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게으름을 피운다면 그 사람은 지금 성전 밖 마당 신자에요.

이방인과 같아요.

 

이방인의 특징이 뭔 줄 아세요.

자기 몸에 사욕을 쫓아가는 자들이에요.

자기 몸뚱이를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이에요.

그러니까 복음 안다는 핑계로 자기 몸뚱이 편한 쪽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 나는 성전 밖 마당만 밟고 다니는 이방인 신자입니다 라는 것을 자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증인들이 누구랑 싸우는 줄 아세요.

자기 몸뚱이 챙기는 육에 속한 자들과 싸워요.

저도 지금 이러한 자들과 싸우고 있어요.

땅에 거하는 자들이란? 자기 몸뚱이를 위하여 사는 자들을 말해요.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세요.

그 안에 자칭 유대인들과 자칭 사도 라고 하는 자들이 있었어요.

자칭이란? 짝퉁이란 말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짝퉁 신자들이 많이 있어요.

이들이 복음을 훼방하는 자들이고 예수를 죽이는 자들이에요.

두 증인들도 이러한 자들에게 죽임 당해요.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난 후 사도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전하자 두 가지 상반 된 반응들이 나타났어요.

한 쪽에서는 어찌할꼬!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고,

다른 한쪽에서는 적개심이 가득하여서 이를 가는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누가 적개심으로 이를 갈았나요?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땅에 거하는 자들이에요.

육에 속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두 증인들이 교회 안에서 육적 신자와 영적 성도를 갈라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걸 유브라데 전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두 증인들에게 성전을 척량하라고 하셨는지 그 뜻을 알 수가 있겠지요?

그리고 그 배경을 구약의 엘리야 시대나 바벨론에게 망한 때로 말하는지도 알겠지요?

이는 이 시대 교회가 그 때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타락하였다는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 영적 상태가 어떠했는가요?

아합 왕이 이방여인과 결혼해서 이방신을 데리고 와서 하나님이라고 둔갑을 시켜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였지요.

이건 이 시대 교회의 모습과 같아요.

 

거짓 목사들이 예수를 전부 왜곡시켜 놓았어요.

엘리야 때에 거짓 종들이 여호와를 바알과 아세라로 둔갑 시켰어요.

지금도 거짓 목사들이 예수를 바알로 둔갑 시켜 놓았어요.

세상에서 성공시켜 주는 예수로 바꾸어 놓았어요.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증거 되는 예수는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에요.

 

예수님은 이러한 것으로부터 빼내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거짓 종들이 땅에서 부요를 주는 다른 예수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의 타락한 교회를 음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음녀란? 몸을 팔아서 사는 여자를 말해요.

이 시대 교회가 예수를 가지고 사고 파는 장사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 음녀이지요.

 

이러한 것은 모두가 말씀을 몰라서 그래요.

창세전 언약을 모르니까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땅에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와서 땅에 복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빼내려고 오셨는데 말이죠.

이 얼마나 아이러니 합니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말씀을 모르면 무식해져요.

 

신앙의 타락이란? 말씀의 왜곡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요.

하나님 말씀을 육적으로 해석 하면서부터 타락은 시작이 되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두 증인들에게 작은 책을 먹이시고 하나님 말씀이 왜곡되어서 전해지는 교회에 가서 다시 예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두 증인들이 죽지요.

두 증인들이 죽은 곳을 뭐라고 하는가요?

영적으로 소돔이라고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고 예수님께서 죽으신 곳이라고 하지요.

그러니 소돔이나 애굽이나 예수님 초림 때 구약 교회나 종말의 교회나 다 같다는 말입니다.

 

소돔 사람들은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았고,

애굽 사람들은 떡을 위하여 살았고,

예수를 죽인 유대교는 겉치레만 화려한 외식 신앙생활을 했어요.

 

종말 교회는 이 세 가지를 다 가지고 있어요.

복음을 빙자하여 육신의 쾌락을 좇아가고 있으며,

세상의 성공과 출세를 위하여 예수를 이용하고 있으며,

경건의 이름은 가졌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아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종말 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세요.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 비친 모습은 어떠했나요?

예수님은 가련하고 헐벗고 가난하고 눈멀고 발가벗고 있다고 하지요.

 

두 증인들이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진단한 것처럼 종말 교회들을 진단 할 것입니다.

 

위선을 고발하고,

외식을 고발하고,

악을 고발 할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유대교를 고발한 것과 같아요.

그러다가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죽임 당함으로서 그들의 악을 고발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증인들을 예수님과 같은 프로그램에 동참을 시키셔서 부활을 시키십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처럼 살게 해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두 증인들을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구원을 해 내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두 증인들이에요.

예수와 연합 한 자들이에요.

예수님과 하나로 연합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세요.

예수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죽임을 당하여도 이긴 자들이에요.

 

사흘 반 만에 생기가 들어가서 부활을 하지요.

여기서 사흘 반이란? 삼년 반을 축약해서 하는 말이에요.

삼년 반은 다니엘의 70 이레 중에서 마지막 남은 한 이레의 절반을 말해요.

마지막 한 이레의 절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부터 시작이 되는 신약의 전 기간을 함축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두 증인들이 사흘 반 동안 있다가 생기로 인하여 부활하는 것은 예수님이 사흘 만에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 한 것과 같은 의미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 시대에 복음 전하던 모든 종들이 70 이레 중 마지막 한 이레의 절반인 삼년 반 후인 예수님이 재림 할 때 부활 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두 증인들입니다.

두 증인이라고 하니까 이걸 또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두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되어요.

율법에 의하면 어떤 것을 증거 할 때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을 두라고 하였어요.

그러니까 두 증인은 두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고 동일하게 증거하는 종들을 말해요.

 

예수님이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신약에서는 성령을 받은 모든 성도는 증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둘씩 파송 했듯이 지금도 파송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디로 파송 하던가요?

이리들이 있는 곳으로 파송하시지요.

이리 속에 가서 뱀처럼 지혜롭게 하라고 하셨어요.

 

양 잡아 먹는 이리들이 어디 있나요?

교회 안에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마리아로 가지 말고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으라고 파송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이 어디에 있나요?

타락된 교회 안에 있어요.

교회가 이스라엘이에요.

 

교회 안에 복음을 듣지 못하여 잃어버려진 양들이 있어요.

그들에게 복음을 들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두 증인을 교회로 파송 하여 성전을 척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약 교회 안에서 잃어버려진 양들을 찾아냈듯이 종말에도 우리가 두 증인이 되어서 음녀로 타락한 교회 안에서 잃어버려진 양들을 찾아 내셔야 합니다.

주께서 만날 자를 만나게 하시고 들을 자에게 들려지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각자 처한 교회 안에서 복음에 빚진 자 답게 뱀처럼 지혜롭게 복음을 전하세요.

 

주님이 곧 오십니다.

그 때까지 잘 견디시고 이겨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듯이 말씀이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으나 정작 들어야 하는 복음이 희귀한 때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의 눈을 여시고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열어서 복음이 들려지게 하시고 주의 일하심이 보여지게 하시고 창세전에 계획 되었던 새 언약이 믿어지게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작은 책 영원한 복음을 먹여 주셨사오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두 증인으로서 다시 예언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만 가능하오니 주의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서 두 증인의 사역을 잘 감당케 하여 주옵소서. 가는 길이 험하고 힘들지라도 앞서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께서 늘 동행하고 계심을 믿고 담대함으로 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蔚山 牧羊 ??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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