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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29강. 작은 책을 먹으라

by IMmiji 2015. 9. 11.

29강. 작은 책을 먹으라 (계 10:1-11)

 

계 10:1-11절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2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3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4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5 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 손을 들고 6 세세토록 살아 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세 가지 환상이 보여집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 세 가지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섯째 나팔 속에는 세 가지 섹션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한 사건을 세 부분으로 설명해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 환상은, 9장에서 살펴보았던 유브라데 전쟁입니다.

두 번째 환상은, 10장인데 예수님이 작은 책을 두 증인들에게 먹이는 내용입니다.

세 번째 환상은, 11장인데 작은 책을 먹은 두 증인들이 타락한 교회에 들어가서 다시 예언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장면입니다.

 

세 가지 환상은 모두가 하나의 이야기인데 유브라데 전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즉 유브라데 전쟁의 성격과 그 의미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2중 계시가 담겨져 있어요.

육적인 것 속에 영적인 것이 담겨져 있어요.

 

요한계시록은 육적 사건을 가지고 영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적으로는 세상에 나타나는 유브라데 전쟁이지만 영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요한계시록은 1장 1절에서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하고 있어요.

될 일이에요.

될 일이란?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나타나는 사건 속에 영적인 것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타난 것만 보면 안 되고 그 속에 담겨진 메시지를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세 가지 해석법이 있어요.

역사적 해석과 문자적 해석과 영적 해석이에요.

 

역사적 해석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문자적 해석은 문자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영적 해석은 역사적 사건이나 문자나 모두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영적인 의미를 찾아내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역사적 해석이나 문자적 해석은 아무나 할 수가 있어요.

인간의 이성으로 해석이 가능해요.

이걸 육적 해석이라고 하는데 육적 해석은 성경의 이야기들을 교훈을 삼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 도적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와 같은 말씀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러한 일을 하지 마세요 라고 해요.

그러나 이 말씀의 그 진의는 다른데 있어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은 그 당시 율법을 잘 지켜서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유대인들 즉 바리새인들을 고발하기 위한 말씀이에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면 되는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율법 지킨 것을 의로 삼고 자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너희가 율법을 오해 하였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율법이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긴음하지 말라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이러한 일을 하지 말라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그렇다고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님)

너희가 이런 자라는 것을 알려주는데 초점이 있어요.

 

인간의 실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살인자이고 간음자이고 도적놈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러한 일을 해서 살인자이고 간음자이고 도적놈이 아니라 이런 일을 하나 안하나 나쁜 놈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정의는 너희가 살인자이기 때문에 살인하지 말라고 하고 있으며,

너희가 도적놈이니까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고 있고,

너희가 간음자이기 때문에 간음하지 말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일종의 확인 사살 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옛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을 하였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다시 정의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영적 해석이라고 해요.

 

이러한 해석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 이외 모두가 육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 지켰다고 거드름 떠는 자들에게 에라이~ 이 등신들아!

너희가 바로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하는 죄인들이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성경을 육적으로 해석하게 하여서 영적 해석을 가려요.

착하게 살아서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해요.

마귀는 착하게 사느냐 안 사느냐 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직 하나 예수만 가리면 되어요.

 

이와 반대로 하나님은 너희가 착하게 사느냐 안 사느냐 에는 관심이 없고(또 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고)

내 아들의 죽음을 알고 있느냐를 보세요.

하나님 앞에 죄는 예수를 안 믿는 거에요.

 

그래서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은 모든 성경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해석은 아무나 할 수가 없어요.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할 수가 있어요.

 

고린도전서 2장을 봅시다.

 

고전 2:1-14=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 하였으리라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바울은 예수를 만나고 난 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 했어요.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걸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일을 오직 택하신 자들만이 알게 하시려고 구원의 일을 미련한 방법으로 하신다고 하는 거에요.

너희들 눈에 보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은 것이 미련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그게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9절이에요.

 

9절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깨달아지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이 하신 일과 말씀들을 못 알아듣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저 사람 왜 저래,

왜? 저 따위로 말하고,

저 따위로 일을 처리해! 그랬어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임을 추호도 알 지 못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고 난 후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예수님이 왜? 저런 일을 하셨는지를 알게 하셨어요.

바울은 다메섹 이후에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게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하니까

신천지 이단들처럼 도나 개나 성령의 감동이라고 하면서 이상하게 해석을 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해석은 예수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을 해요.

언약적으로 해석을 해요.

 

그러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을 하는 분들은 요한계시록을 전부 예수그리스도와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적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예수 이 외 그 어느 인간이나 어느 집단이야기로 해석하면 그건 백 프로 가짜에요.

그 집단은 사단의 회이고 그 사람은 마귀의 종이에요.

또한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인간들이 어떻게 하면 환란을 이길 수 있다고 한다든지,

아니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방법론을 말하면 그것도 백 프로 가짜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된다 저렇게 하면 된다는 식의 “어떻게 하면” 이라는 방법론을 도출하고자 하는 해석들은 전부가 마귀적인 해석인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두려움만 주어요.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두려움을 주는 책이 아니에요.

소망을 주는 책이에요.

평안을 주어요.

요한계시록 설교를 듣고 불안해한다거나 두려워한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설교에요.

워낙 다양한 해석들이 난무하니까 잘 분별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육적 해석과 영적 해석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겠지요.

잘 이해하여서 속지 마세요.

하도 이상한 무리들이 많이 나와서 설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제가 피지에 집회 차 다녀왔어요.

그런데 그곳 목사님의 말씀을 빌리면 한국에 이상한 여자 목사 이단이 나타나서 피지가 장차 천년왕국이 세워진다고 하면서 그 교회 교인들을 이주를 시키는 일을 한다고 해요.

그래서 땅을 사서 집단생활을 하려고 공동체 마을을 건설 중에 있다고 합니다.

2억을 주면 거기서 천년왕국을 누릴 수 있다고 하면서 돈을 갈취한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거기 와서 속은 줄 알고 대사관에 빼내 달라고 탄원을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가요?

모두가 성경을 육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육에 속한 자들은 자기들 힘으로 천년왕국을 건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웃기지요.

 

아니에요.

여러분도 모르면 넘어 갈 수가 있어요.

신앙은 장담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셔야 해요.

 

신00에 빠진 사람들이 여러분 보다 덜 똑똑해서 교주를 재림 예수라고 따르는 줄 아세요.

마귀가 미혹하니까 인간을 메시야 라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단 감별사들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에만 재림 예수가 30명이 된다고 해요.

그러니 눈 부릅뜨고 성경이 과연 그러한가 상고 하셔야 해요.

 

다시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사건을 통해서 영적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사건만 보지 마시고 그 사건 속에 담겨진 메시지를 보아야 해요.

 

나타나는 육적 사건은 껍데기이고 그 속에 담겨진 영적 메시지가 알맹이에요.

하나님은 육적인 전쟁을 통해서 영적인 전쟁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육적인 것은 세상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영적인 것은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브라데 전쟁을 가지고 예를 들어 말합니다.

유브라데 전쟁은 종말에 나타날 전쟁이에요.

대 부분의 계시록 해석을 보면 이것은 말하고 있어요.

 

이게 계시록 16장에 가면 아마겟돈 전쟁으로 나타나는데 흔히들 세계 3차 대전이라고들 합니다.

즉 인류 종말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는 유브라데 전쟁이 핵전쟁으로서 온 인류가 불 바다가 될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맞아요.

저도 동의해요.

저는 여기에 기다 아니다 가타부타 하지 않겠어요.

그러한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으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어요.

작금에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만 머물고 싶지 않아요.

교회 안에 일어나는 영적 전쟁으로 보아요.

예수그리스도와 그 반대편인 적그리스도 세력의 전쟁으로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사단의 세력과의 싸움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전쟁은 영적인 것이에요.

언약의 후손과 비언약의 후손 간에 일어나는 싸움이에요.

이것을 최초에 가인과 아벨의 싸움으로 보여 주셨어요.

 

그리고는 이게 족장들 집안에서는 두 형제 싸움으로 나타나고,

점차적으로는 민족과 민족이 싸우는 것으로 나타나고,

급기야는 기독교와 반기독교 세력으로 확장 되어서 나타납니다.

영적으로는 예수에게 속한 자와 예수에게 속하지 아니하는 자들 간에 싸움으로 나타납니다.

 

이건 성경 속에 싸움을 추적해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아브라함 집안에서는 이스마엘과 이삭으로 나타났고,

이삭의 집안에서는 에서와 야곱으로 나타났고.

야곱의 집안에서는 요셉과 그 형제들로 나타났어요.

이게 민족적으로 발전하여서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타났어요.

 

더 확대 하면 예수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땅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예수님과 마귀와의 전쟁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종말에는 역사 속에서는 기독교와 비기독교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를 국가 간의 전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팔레스타인은 구약에서는 블레셋이라고 하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나라에요.

이 둘은 항상 앙숙처럼 싸워 왔어요.

 

이것이 온 세계적으로 확신이 되면 기독교와 이슬람 전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를 영적으로 보면 교회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과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 간의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들 간의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전쟁의 근원은 아브라함 집안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나타났어요.

 

창세기 21장을 봅시다.

 

창 21:8-21=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11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16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17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준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주실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기들 방식으로 자식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이에요.

 

남자의 정자(精子)는 죽을 때까지 생산이 되는 것이므로 100세가 되어도 자식을 생산 할 수가 있지만 여자는 달라요.

여자는 난자(卵子)를 생산하는 월경(月經)이 있을 때만 임신이 가능해요.

 

사라가 점점 늙어 급기야 경수가 끊어지는 지경으로 나아갑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식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조급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착안 해 낸 것이 자기들 힘으로 언약의 후손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이 애굽 여인 하갈을 씨받이로 하여서 아들을 낳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자가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은 애굽 여인에게서 태어난 자 답게 스스로의 힘으로 잘 살아가는 자로 나타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애굽이란? 영적 의미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을 말해요.

 

이는 이스라엘과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독자적으로 사는 자가 아니에요.

철저히 하나님께 종속이 되어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이스라엘에게 죄란? 스스로 살고자 하는 것이에요.

근데 인간 입장에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애굽식 삶이 좋아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항상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암튼 아브라함이 불순종으로 애굽 여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대노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느냐고 책망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아들을 줍니다.

이 때는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경수가 끊어진 사라는 아이를 생산 할 수 없는 몸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경수가 끊어져 죽은 것과 같은 사라의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십니다.

이건 사라가 낳은 것이 아니고 성령이 낳게 하신 것을 예표하고 있어요.

사도 바울은 이걸 갈라디아서에서는 이삭을 일컬어 성령으로 낳았다고 하면서 상대적으로 이스마엘은 육으로 낳은 자라고 합니다.

 

근데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입니다.

말이 좋아 희롱이지 이건 핍박하는 거예요.

싸움인 것입니다.

 

이를 보고 아브라함이 큰 근심을 하게 됩니다.

 

11절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아브라함은 장차 일어날 큰 전쟁을 보고 근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끼리 싸우는 동족상잔을 보고 있는 거에요.

이게 신앙적으로는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육으로 난 자들과 영으로 난 자들 간에 전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암튼 아브라함은 이삭을 핍박한 이스마엘과 그 어미를 집에서 내어 쫓습니다.

그런데 들에서 방황하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하나님이 거두어 주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게 기독교를 대적하는 이슬람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슬람권에 속한 자들은 아브라함의 서자(庶子)인 이스마엘의 후손들이에요.

이 서자(庶子)들이 적자(嫡子)인 이삭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서자를 일컬어 종이라고 하고,

적자를 일컬어 아들이라고 해요.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삭을 핍박하는 이스마엘을 하나님이 큰 민족으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이 원수를 없애 준다고 믿는데 성경은 도리어 하나님이 원수들을 키운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왜? 언약의 후손을 핍박하는 자들을 확장 시켜 주실까요?

이는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서는 언약의 후손과 비언약의 후손 간에 전쟁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이삭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그려나가세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로 되어 있어요.

한 언약 안에 두 민족이 있어요.

이것이 역사 속에서 한 집안 속에 두 민족인 이스마엘과 이삭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육이고, 이삭은 영이에요.

육과 영은 하나 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둘은 서로 짝이 되어서 창세전 언약을 그려나가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땅에 속하였고, 이삭은 하늘에 속하였어요.

이스마엘은 지옥 백성을 상징하고, 이삭은 천국백성을 상징해요.

알다시피 천국과 지옥은 극과 극처럼 서로 달라요.

하지만 하나님은 서로를 드러내는 짝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옥 백성을 가지고 천국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도 저들처럼 지옥으로 가야 하는데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속을 받아서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지옥 백성을 가지고 천국 백성들이 받은 복을 설명 할까요?

이는 천국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로부터 세세토록 찬미를 받고자 지옥 백성들을 가지고 천국 백성들에게 너희가 엄청난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영에 속한 자들은 세상 속에 약함으로 두고 육에 속한 자들은 강함으로 두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로 보아서 역설적으로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유약하고 힘이 없어요.

반면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은 힘이 세고 강해요.

이게 이스마엘은 강한 자로 나타나고, 이삭은 유약한 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구조는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계속하여서 유지 되어요.

항상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강하고 힘 있음으로 나타나요.

이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 안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요.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들은 죽임 당했어요.

그것도 형제라는 자들로부터 당했어요.

 

다음에 살펴볼 두 증인들도 이방 사람들에게 죽임 당하지 않아요.

교회 안에 있는 땅에 거하는 자들로부터 죽임 당해요.

이들을 일컬어 무저갱에서 올라온 자들이라고 합니다.

즉 지옥에 소속된 자들로부터 죽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을 괴롭힌 이스마엘도 큰 민족으로 만들게 하신 것입니다.

앞으로 이스마엘 후손들은 이삭의 후손들을 괴롭히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 사실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서는 마음에 큰 근심을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이삭의 전쟁이 바로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이에요.

말씀으로 사는 자와 떡으로 사는 자로 나타납니다.

신앙적인 모습으로는 언약 때문에 자기 인생이 차압당하는 성도들과 예수를 세상에서의 성공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자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국가적으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으로 나타나고,

사상적으로는 기독교와 이슬람권으로 나타나고,

영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하늘에 백성과 땅에 백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모든 전쟁을 일차적으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이러한 관점으로 보아야 해요.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교회에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재앙이나 전쟁은 구약의 배경을 깔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구약의 교회인 이스라엘에게 나타났던 일들이 신약에서는 교회 안에서 진리의 싸움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을 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말하고서는 그 아시아의 일곱 교회 안에 참 성도와 거짓 성도간의 싸움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거하는 자들 간에 다툼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 싸움이에요.

말씀 싸움이에요.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작은 책을 먹은 두 증인들이 종말의 타락한 교회에 들어가서 누구랑 싸우는가 하면 땅에 거하는 자들과 싸워요.

 

무엇으로 싸우는가요?

지팡이 같은 갈대로 싸워요.

지팡이 같은 갈대는 캐논이에요.

케논이란? 말씀을 말해요.

 

그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작은 책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작은 책의 내용은 구약의 에스겔서에 보면 잘 나와 있어요.

이건 잠시 후에 살펴볼게요.

 

암튼 요한계시록의 전쟁은 교회 안에 전쟁이라고 보세요.

교회 안에는 항상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과 육에 속한 교인들 간에 싸움이 있어 왔어요.

아사아의 일곱 교회를 통해서 살펴보았잖아요.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전 교회 시대를 통해서 나타나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장차도 일어날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언약에 관심을 두고 살고,

육에 속한 교인들은 떡에 관심을 두고 살아요.

결국 교회 안에서 두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땅에 가치로 사는 자들과 말씀에 가치로 사는 자들의 충돌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 전쟁 양상이 그대로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가 예수를 믿는 이유가 달라요.

예수님 초림 때 떡을 위하여 쫓는 자들과 언약에 붙잡혀 다니는 자들과 극명하게 나타났어요.

언약에 붙들린 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지만 떡을 위하여 쫓는 자들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하여 예수를 쫓았어요.

 

예수를 누가 죽입니까?

떡을 쫓던 자들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자기 배를 위하여 쫓는 자들은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로서 십자가의 원수라고 단호하게 증거 했던 것입니다.

 

빌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지금 이 시대 바울의 말을 가지고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을 분별해 보세요.

그럼 누가 참 종이고 누가 거짓 종인지 구별이 되어요.

누가 하늘에 속한 종이고 누가 땅에 속한 종인지를 구분 할 수가 있어요.

참 종들은 언약을 이야기하고 거짓 종들은 떡을 이야기해요.

 

이 시대 교회의 가치는 돈이에요.

교인들의 관심사는 이 땅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돈 많이 벌어서 등 따습고 배불리면서 호의호식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돈이 이러한 것을 주니까 결국 이들이 추구하는 신(神)은 돈인 것입니다.

이 신이 바로 구약에서는 바알로 나타났고, 신약에서는 마귀로 나타났어요.

마태복음 4장에 마귀가 예수에게 떡과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를 주겠다가 다가왔어요.

 

마 4: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귀가 그러잖아요.

세상의 모든 것은 자기 것이니까 자기에게 절만 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잖아요.

맞는 말이에요.

이는 하나님이 뱀을 저주 할 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흙이란? 땅에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두 증인들이 교회 안에 가서 땅에 거하는 자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속이는 자에요.

그러니까 땅에 속한 거짓 종들이 마귀의 종이라고 다가오면 다 도망을 가니까 광명의 천사처럼 다가와서 교인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식으로 미혹을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아합 왕 시절에 거짓 선지자들이 그랬어요.

그들은 백성들에게 바알을 하나님이라고 위장하여 가르쳤어요.

이 때 엘리야가 나타나서 너희가 섬기는 신(神)인 바알이 참 하나님인지,

아니면 내가 섬기는 신(神)인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지 내기 하자고 해서 벌린 전쟁이 바로 갈멜산 전투잖아요.

 

왕상 18:21-22=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이게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거짓 목사들이 다른 예수를 가르치고 있어요.

그러니까 육에 속한 자들은 마귀가 예수로 위장해서 다가오는데도 분별을 못하는 거예요.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들이 예수를 찾는 목적이 달라요.

영에 속한 자들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위하여 나아오고,

육에 속한 자들은 세상에 환경이나 가난이나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나아와요.

 

영에 속한 자들은 말씀을 쫓아가고 육에 속한 자들은 떡(기적)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떡을 쫓아간다는 것은 세상에서의 안락한 삶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자기 육신의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걸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전쟁을 일으켜서 육에 속한 자들을 추수하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일어나게 하여서 떡을 쫓아가는 자들을 미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 되지 않은 자들은 모두가 짐승을 경배하게 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짐승의 소속이 어딘가 하면 땅이에요.

그러니 땅에 것으로 미혹하는 겁니다.

땅에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에요.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떡이에요.

 

짐승이 떡으로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럼 떡에 가치로 사는 자들은 모두가 짐승을 따르게 되어 있어요.

이게 666 짐승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666짐승표로 미혹을 어디서 할까요?

교회 안이에요.

하나님이 교회 안에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고 거짓을 쫓는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여서 멸망 받게 하시려고 하는 전쟁이에요.

이게 유브라데 전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섯째 나팔 속에 전쟁의 성격을 세 가지 환상으로 담아 놓은 것입니다.

 

첫째 환상이, 유브라데 전쟁이고,

둘째 환상이, 두 증인들이 작은 책을 먹고 다시 예언하는 것이고,

셋째 환상이, 두 증인들이 교회 안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의 죄를 고발하다가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여섯째 나팔 속에 담겨진 두 번째 환상을 통해서 유브라데 전쟁이 교회 안에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봅시다.

 

계 10:1-3절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2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3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사도 요한이 두 번째 환상을 봅니다.

힘센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범상치가 않습니다.

 

그 머리에는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은데,

그 오른 손에는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서 있으면서,

사자가 부르짖는 것처럼 소리를 치니까 일곱 우뢰가 발합니다.

 

이 모습은 앞에서 본 기억이 있지요.

그래서 “그”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본 그 분이라는 것입니다.

 

1장 7절에 보면 예수님을 일컬어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합니다.

1장 16절에서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가 힘 있게 비친다고 했습니다.

1장 15절에서는 그 발은 풀무에 단련된 빛난 주석과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어린 양이 아버지로부터 책을 취하여서 인봉을 떼십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보면 구름을 입고 내려오는 힘센 천사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천사로 상징하여서 보여주시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수종 드는 종으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천사란? 수종 드는 종이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천사의 모습으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힘센 천사는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보면 되어요.

그럼 예수님의 모습을 봅시다.

 

무지개란? 노아 언약을 상징합니다.

 

노아 언약은 정결한 제물의 희생으로 부정한 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성하셨어요.

예수님의 머리에 무지개가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노아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노아 언약이 뭔가요?

정결한 제물의 희생으로 부정한 자들이 살아나는 것이잖아요.

이는 죄없는 의로운 예수가 죽어서 죄인인 자기 백성들이 살아나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말할 때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린 양에게 이 세상의 심판권을 넘겨 준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5장에 보면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을 넘겨받고서 인을 떼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이 인을 뗀다는 것은 어린 양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린 양이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을 하나씩 뗄 때마다 이 땅에서는 각양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어린 양의 허락 하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어린 양 되신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작은 책을 먹으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교회의 대표로 서 있습니다.

우리를 대표해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도 요한에게 먹인 작은 책은 종말의 모든 성도들이 먹어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봅시다.

 

계 10:8-11=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책이 있습니다.

천사는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도 요한에게 예수님의 손에 있는 책을 가져가서 먹으라고 합니다.

 

이에 사도 요한이 그 책을 먹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책이 입에서는 꿀처럼 엄청 단 데 배에서는 쓴 겁니다.

이것은 말씀을 들을 땐 좋은데 그 말씀을 증거 하는 일에는 엄청난 고난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이 모습은 구약의 에스겔이 경험한 일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구약을 바탕으로 쓰였어요.

이는 구약 이스라엘이나 신약의 교회가 같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종말의 교회 모습이 에스겔 시대의 이스라엘의 모습과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영적 상태가 같다는 말입니다.

 

그럼 작은 책 이야기를 구약과 신약의 이야기로 풀어봅시다.

 

에스겔 2-3장을 봅시다.

 

겔 2:1-10=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2 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4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5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 6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지어다 7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8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9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10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겔 3:1-11=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4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5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6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할 열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7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8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9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하시고 10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11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패역한 자로 서 있습니다.

얼마나 패역한가 하면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고집이 세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말을 안 들어 쳐 먹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두루마리 책을 하나 주면서 먹으라고 합니다.

그 책의 내용이 뭔고 하니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에요.

이건 심판의 소식입니다.

그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전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에스겔에게 먹인 두루마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심판이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인자야! 인자야! 그러지요.

인자가 누구냐?

에스겔이에요.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으로 나타나요.

 

근데 종말에 이 예수님과 같은 자들이 나타나요.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두 증인들이에요.

그래서 11장에 가면 두 증인들의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동일하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자가 되셔서 오셨어요.

오셔서 무슨 말씀을 전했나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에요.

 

이걸 어디에 전했나요?

구약 교회에요.

예수님은 구약 교회의 심판을 전했어요.

그들이 자랑하던 성전을 보시면서 저 성전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덧놓이지 않고 다 무너진다고 하면서 구약 교회의 심판 소식을 알려주었어요.

 

그리곤 예수님은 죽임 당했어요.

이걸 두 증인들이 그대로 신약교회 안에서 전해요.

그러니까 신약의 교회도 두 증인들을 예수님처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럼 사도 요한이 먹은 작은 책도 심판의 소식인 것입니다.

저도 사도 요한이 먹은 작은 책을 먹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악을 고발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전 여러분들 손에 죽임당해요.

그게 벌써 나타나고 있잖아요.

목사를 미워하는 게 죽이는 거예요.

제가 바른 말을 하면 여러분들이 싫어하잖아요.

 

저는 여러분들의 악함을 고발하고자 이 자리에 서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갖가지 핑계를 대고 자기 합리화를 시키려고 하잖아요.

언제 ‘예’ 하고 순종 한 적이 있나요?없잖아요.

 

요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미꾸라지 마냥 빠져 나가잖아요.

결국 나만 몹쓸 사람이 되고 말잖아요.

여러분들은 빛나는 보석처럼 빤질거리고 있구요.

 

에스겔을 보세요.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두루마리를 먹이고 어디로 보내던가요?

자기 백성들이잖아요.

 

5절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7절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자기 백성들이 어떻다고 합니까?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다고 하지요.

말을 안 듣는다고 하지요.

 

딱 여러분들 이야기에요.

여러분 속에 저도 포함되어 있어요.

여러분이 그렇잖아요.

말을 더럽게 안 들어 쳐 먹잖아요.

 

아니 신앙생활 잘 하라는 게 뭐가 그리 죽임당할 말입니까?

예배 빠지지 말라는 소리가 뭘 그리 잘못된 말입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런 말 하면 주둥이가 닷 발이나 나와서 지랄을 떨잖아요.

 

복음이네? 아니네?

행위네? 아니네? 하면서 말이에요.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난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버팅기잖아요.

아주 꼴값들을 떨고 있어요.

 

그래서 늘 하나님만 나쁜 분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마치 자식새끼들 눈에는 부모만 틀린 것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아요.

왜? 자식들이 부모 말을 틀렸다고 생각합니까?

자식들이 왜? 부모 말을 안 듣습니까?

 

자기들 잘못을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느 인간도 자기 잘못을 지적받고서 좋아하는 자가 없어요.

똥 싼 놈이 성 낸다고 우린 항상 잘났어요.

항상 하나님이 너무하고 틀렸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러 오신 예수님을 우리 손으로 죽인 것입니다.

왜?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하느냐고 죽였어요.

지금도 예수님의 심정으로 말하면 죽임 당해요.

 

에스겔이 사역 하던 시기가 어느 때인가요?바벨론에 포로 된 시기에요.

왜?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나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말의 교회를 뭐라고 하는가요?

계시록 17장 18장의 음녀가 종말의 타락한 교회에요.

그런데 그 교회를 일컬어 뭐라고 하던가요?

바벨론이라고 하지요.

 

이는 종말의 교회가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세속화 되었다는 말이에요.

교인들이 세상 가치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떡을 쫓고 있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바벨론을 두 가지 의미로 말해요.

타락한 세상을 말하고,

타락한 교회를 말해요.

타락한 교회를 다른 말로 적그리스도 세력이라고 해요.

 

왜? 교회가 세상화 되었는가요?

이는 하나님 말씀이 사려졌기 때문이에요.

목사들이 하나님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에요.

 

목사들이 하나님 말씀을 인간의 상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유익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 가치 챙기기를 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는데,

이 시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말씀 앞에서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른 복음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 하던가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거라고 하지요.

자기가 만약에 사람을 기쁘게 했으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어요.

 

복음 속에는 사람을 긍정해 주는 것이 없어요.

복음은 늘 우리 죄를 고발하면서 다가와요.

그래서 어느 시대이고 복음은 자기 백성들로부터 배척을 당해 왔어요.

결국 복음 전하는 자들은 모두가 죽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게 쓴 잔이에요.

 

예수님의 쓴 잔이 뭔가요?

십자가에 죽으심이잖아요.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임당하셨습니까?

백성들이 예수님 말씀을 듣기 싫어서였잖아요.

예수님 말씀 앞에 자기 죄가 고발당하니까 싫은 겁니다.

 

이걸 빛이 어둠에 비치니까 어둠이 자기 정체가 들어나니까 어둠이 빛을 죽이더라고 합니다.

만고불변의 진리가 인간들은 바른 말 안 들어 쳐 먹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들 손에 죽임 당한다는 거예요.

이걸 배에서 쓰다고 합니다.

 

그럼 다시 예언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작은 책을 먹이고 다시 예언하라고 하지요.

왜? “다시” 입니까?

다시란? 예전처럼 하라는 말입니다.

 

예전에 누가 예언을 하였나요?사도들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사도들이 외쳤어요.

 

사도들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했어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어찌할꼬! 회개가 일어났어요.

 

왜? 다시 예언하라고 할까요?

이는 복음이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옛 날처럼 다시 하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사도들처럼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예수의 죽음을 외치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누구에게 외쳤나요?

구약의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외쳤어요.

그럼 하나님이 사도 요한에게 작은 책을 먹이고 다시 예언하라는 말은 종말의 교회가 구약의 율법 교회처럼 변질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항상 포도주에 물을 섞는 일을 해요.

교회 안에 비 진리를 퍼뜨려요.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세요.

교회마다 각종 이단들이 횡행했어요.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

이세벨의 교훈,

자칭 유대인의 교훈,

영지주의 사상들이 난무했어요.

 

교회들이 귀신의 놀이터가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교인들이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 생활은 자기 가치를 챙기고 자기 보람을 느끼고 정신 수양하는 것이에요.

지금은 이러한 것들이 교회 안에서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어요.

 

이 시대 기독교는 문화가 되었어요.

교회의 모임이 동호회 모임처럼 되고 말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신앙생활을 취미 생활하듯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활동하던 시기가 바벨론 포로 시기에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에스겔에게 하신 그대로 두 증인들에게 책을 먹이고 교회로 보내서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종말에도 타락한 교회를 바벨론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바벨에서 유래 된 말이에요.

‘바벨’이라는 말은 ‘신의 문’이라는 뜻입니다.

신에게 나아가는 문이란 말입니다.

옛적에 인간들이 신에게 나아가는 바벨에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한 것처럼

종말에는 신에게 나아가는 교회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길이라 그러셨지요.

길이란? 문(門)을 말해요.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유일한 문이에요.

그런데 이젠 예수가 유일한 문이 아니고 여러 개의 문(門) 중에 하나가 되고 말았어요.

 

예수 말고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하고 있어요.

이것이 교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증거 되고 있어요.

교회에 중들이 와서 설법을 하고 목사가 절간에 가서 설교를 해요.

이게 열린 사고라나요.

열린 사고가 아니라 악이고 사단의 회에요.

 

교회는 예수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문이라고 알려주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알려주어야 해요.

예수 이외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해 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의로서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 이외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해요.

교회가 혼합주의에 빠지고 말았어요.

기독교가 여러 종교 중에 하나가 되고 말았어요.

 

이건 지난 번 부산에서 개최된 WCC 세계교회 협의회 총회를 통해서 극명하게 보여 주었어요.

대회를 주관한 대회장이 이름도 거룩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총회장이에요.

기독교 방송에서는 WCC가 마치 복음 적인 집단인 것처럼 선전을 했어요.

WCC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마귀 집단이라고 했어요.

이건 한국 교회의 정체성과 현 주소를 극명하게 보여 준 사건이에요.

하나님이 온 세상에 한국교회의 실상을 만방에 고발하신 것입니다.

 

WCC가 어떤 단체입니까?

반(反) 그리스도 단체에요.

WCC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알면 그 단체의 본질을 알 수가 있어요.

 

1947년에 스탈린이 서방교회 침투전략이라는 것을 세웠어요.

그리고 그 이듬해 1948년 WCC 세계 교회 협의회가 창립 되었어요.

이 때 스탈린이 서방 교회로 공작원 다수를 침투시켰어요.

이 사실이 스탈린 사후(死後)에 밝혀졌습니다.

 

WCC는 지금 에큐메니컬 운동의 선두주자입니다.

에큐메니컬 운동이 뭔고 하니 세계 종교 통합 운동이에요.

그래서 WCC는 세계의 모든 종교를 하나로 묶는 일을 하고 있어요.

1971년부터는 힌두교, 회교, 불교까지 합세를 했습니다.

지난 번 부산에서 WCC 총회 할 때 한국의 모든 종파들이 다 참석을 했어요.

 

스탈린이 서방 종교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침투 전락을 세웠는데 그 사상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 사상을 보면 WCC의 성격을 알게 되어요.

크게 세 가지 행동 강령이 있어요.

 

첫째, 교회 안으로 들어가라.

둘째, 신자들로 하여금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고 정부에 대한 비판 의식을 키우도록 하라.

셋째, 모든 순수 종교를 사회 종교로 대체 하라.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세요.

전부 세상일에 관심을 두고 있지요.

인본주의에 있지요.

 

이 시대 교회를 보세요.

WCC의 강령 그대로 되어 가고 있어요.

오늘날 교회가 사회정의를 부르짖고 있잖아요.

 

그리고 교인들은 신앙을 문화생활로 이해하고 있어요.

실제로 교인들은 교회의 모임과 신앙생활을 취미생활 하듯이 동호회 모임처럼 하고 있어요.

아쉬우면 오고 아쉽지 않으면 안 와요.

 

결국 스탈린의 계획대로 된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 종교로 대체 되고 만 것입니다.

마귀가 멋지게 성공한 셈입니다.

 

WCC는 로마 카토릭이 주축이 되어서 움직여져요.

로마 카토릭은 다신 종교를 인정하는 곳이에요.

모든 종교는 같다고 말을 한단 말이에요.

교황이 한국을 방문 했을 때 한국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교황과 함께 하는 걸 보았지요.

 

카토릭에서는 종교 통합 운동을 벌려요.

이게 신종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바벨탑이 어떤 모습인가요?

인간들이 힘을 쌓고 성을 쌓아 하나님께 나아가잖아요?

결국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바벨탑 사상입니다.

 

창세기 11장에 바벨탑을 쌓는 곳이 시날 평지입니다.

이 ‘시날’ 평지는 두 물이 갈라지는 곳이에요.

‘유브라데’ 강하고, ‘티그리스’ 강이 합하고 갈라지는 곳이에요.

 

두 물이 갈라지는 곳에 바벨탑을 세웠어요.

물이란 사상을 말하는데 이는 두 사상으로 신에게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게 종말에는 종교통합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항상 뱀이 들어 와서 두 가지 말을 하게 합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섞어 버리는 것입니다.

인본과 신본이 섞이는 것을 음행의 포도주라고 합니다.

그 음행의 포도주가 성도들의 신앙의 가치로 다가 올 때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51장 12-13절을 봅시다.

 

렘 51:12-13절 “바벨론 성벽을 향하여 기를 세우고 튼튼히 지키며 파숫군을 세우며 복병을 베풀어 방비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거민에 대하여 말씀하신대로 경영하시고 행하심이로다 13 많은 물 가에 거하여 재물이 많은 자여 네 탐남의 한정 네 결국이 이르렀도다”

 

바벨론이 많은 물가에 거하여서 재물을 많이 탐하였다고 하지요.

이 모습은 요한계시록 17장의 음녀의 모습이에요.

 

음녀가 어디에 앉아 있다고 합니까?

많은 물 위에 앉았다고 합니다.

 

계 17:1-6=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서 뭘 하고 있나요?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여 사치하고 연락하면서 성도들의 피에 취하여 있지요.

참 종들은 죽이고 있고 거짓 교인들에게는 피를 빨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았다는 말은 모든 사상을 아우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종교 통합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구약 창세기에서 바벨탑을 쌓을 때 모습이에요.

바벨탑을 쌓을 때 모습을 뭐라고 하였나요?

이들은 구음이 하나이고 언어가 하나라고 했어요.

 

이게 통합사상이에요.

계시록에서 음녀가 이 모습을 가지고 있어요.

이 시대 교회가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섞어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땅의 부귀영화를 꿈꾸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교회가 그 기복주의와 신비주의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예레미야 51장 17절, 18절을 보세요.

 

렘 51:17-18절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만든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18 그것들은 헛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시는 때에 멸망할 것이나”

 

사람마다 우상을 만든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우상으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우상은 생명을 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마귀는 하늘에 것을 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마귀는 기껏해야 흙에 속한 것만 줄 수가 있어요.

그런데 흙에 속한 것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영생을 줄 수가 없어요.

그러니 헛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속임이라고 해요.

 

그래서 마귀를 일컬어 그는 처음부터 속이는 자요 거짓의 아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속이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육에 속한 자들은 그들의 말을 진리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따른다는 거에요.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이 뭔가요?

자기 육신입니다.

결국 자기 육신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이 누구인가?

내가 우상입니다.

우상은 신의 힘을 이용해 내 탐욕을 채우는 것이 우상 숭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제 2 계명에서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출 20:4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너를 위하여” 에요.

“너를 위하여” 라는 말은 내 유익을 위하여 신을 찾으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란? 내가 나를 위해서 신을 찾는 행위를 말해요.

신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에요.

내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신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약에서 탐심을 일컬어 우상이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골 3:5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탐심이 왜 생깁니까?

땅에 지체에 쾌락을 위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탐심은 육신을 즐겁게 해 주어요.

그래서 탐심을 우상 숭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50장과 51장은 바벨론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바벨론이 요한계시록에 오니까 교회로 나타납니다.

교회를 일컬어서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하고 있어요.

지금 이 시대 교회가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가 된 것은 교회가 땅의 것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이 하늘의 말을 땅의 이야기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영생을 주기 위하여 오신 예수를 이 세상 떡을 주는 예수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생명의 말씀을 땅의 떡으로 풀 때 이것이 도적질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런 말을 하십니다.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않았는데 그들은 내 말을 도적질한다고 합니다.

어떤 식으로 도적질을 하는가 하면 백성들에게 “평안하다 평안하다”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버전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의미를 왜곡시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에요.

언약의 도구로 이스라엘을 선택을 했어요.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으로 둔갑을 시켜놓았어요.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전락시켜 놓은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애국가처럼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보호해 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건 이기주의가 만들어 낸 하나님이에요.

 

인간 입장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이에요.

이러한 사고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싸움은 주체의 싸움이에요.

누가 내 몸의 주인이냐의 싸움이에요.

내가 내 몸의 주인이 되면 내 중심에서 신을 찾게 되어 있어요.

그럼 내 유익을 구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내 몸의 주인이시면 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몸을 가지고 당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것을 순종이라고 해요.

이 순종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어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자기 안에서 두 사람이 싸움을 합니다.

한 사람은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십자가를 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십자가를 지도록 간섭을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걸 순종이라고 해요.

 

이 모습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모습이에요.

우리도 늘 두 사람이 싸워요.

나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사람과 언약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사람과 싸워요.

그런데 우린 늘 나를 위하여 살고자 해요.

이에 하나님이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간섭하는 것입니다.

이게 고난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음 속에는 육신을 편하게 해 준다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도 육에 속한 목사들은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고 한단 말이에요.

즉 평안하다 평안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이게 말씀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구약에만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있어요.

목사라는 이름으로 도적질하고 있어요.

 

이것을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적용을 해 봅시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풍족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꿈꾸고 있잖아요.

 

그런 꿈 안 꾸세요?

여러분들이 예수님 믿을 때 오늘도 저주 받아야 해 이러고 믿으시는가요?

아니지요.

오늘도 복 받아야 돼?

그러고 있잖아요.

 

여러분의 기도를 한번 녹음해서 들어 보세요.

교회에서 행하여지는 기도를 들어보세요.

전부 비언약적으로 기도하고 있어요.

이게 모두가 그릇된 하나님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바벨론이 되었고 우리의 신앙이 우상 숭배적 신앙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이 두 증인들에게 하늘에 복음을 먹이고서는 교회로 보내는 것입니다.

가서 외치라고 합니다.

이걸 다시 예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강해하면서 종말에 제 2의 종교개혁이 일어난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가 중세 교회시대와 같아졌어요.

하나님 말씀이 사라지고 인간의 말이 강단을 뒤덮고 있어요.

 

교회가 땅에 것을 추구하고 있어요.

교회의 정체성이 사라져 버렸어요.

교인들이 세상의 떡을 구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늘에 떡을 먹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에게 숯불에 구운 떡을 먹여서 하나님의 산으로 인도하여서 승천케 하였듯이 종말에도 하늘에 떡을 먹여서 하늘나라로 승천케 하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왜? 숯불에 구운 떡이라고 하나요?

숯불이란? 한번 피웠다가 잠시 꺼 두었다가 다시 피우는 것을 말해요.

불을 껐다가 다시 피우는 것을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다시 예언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 하셔서 제자들을 찾아가서 숯불에 구운 떡을 주시지요.

그 떡을 조반이라고 해요.

이는 새로운 시대의 양식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나타났어요.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자 성경이 달리 해석되어지기 시작을 했어요.

구약 성경을 전부 예수그리스도 이야기로 해석을 했어요.

바울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에요.

 

바울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어요.

율법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주의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성경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게 됩니다.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지켰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주체라는 것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이 대신 치렀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인간들이 행한 제사를 들고 오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대속하심에 은혜를 앞세우고 나아오라고 합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창세전 언약이구요.

 

그래서 종말에는 언약으로 돌아가자는 말씀이 다시 외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말씀이 증거 될 것입니다.

두 증인들이 이 일을 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두 증인들에게 작은 책을 먹이는 것입니다.

먹이고 다시 예언하라고 타락한 교회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게 여섯째 나팔 속에 담긴 두 번째 환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두 증인들이 다시 예언하는 내용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가름합시다.

부디 우리의 심장 속에 창세전 언약이 울려 퍼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난파선과 같이 침몰해 가는 교회에 복음에 말씀을 들려주시옵소서. 심판 속에서도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에게 작은 책을 먹이시고 그 힘을 의지하고 천국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한 번 예언하라는 그 말씀이 우리의 심장 속에서 요동치게 하시고 마지막 주의 길을 예비하는 종들이 많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蔚山 牧羊 ??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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