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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25강. 환란에서 나온 자들이 부르는 찬송

by IMmiji 2015. 6. 30.

25강. 환란에서 나온 자들이 부르는 찬송 (계 7:9-17)

 

계 7:9-17=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 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오늘 본문을 보면 흰 옷을 입은 성도들이 큰 환란에서 나옵니다.

그리고는 어린 양에게 우리를 구원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찬송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이는 이들이 눈물 골자기로 통행해 왔다는 뜻입니다.

눈물 골자기를 통행하고 왔으면 원망을 해야 함에도 도리어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하늘나라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왜냐하면! 살아가는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세상 가치로 살아야 편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세상에서 하늘나라 가치로 살아야 한단 말이에요.

하늘나라 가치와 세상나라 가치는 극명하게 달라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힘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천국에 가서 보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눈물을 닦아 준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천국에서 눈물을 닦아주지요.

 

시편 기자는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하였어요.

언제 기쁨으로 단을 거둡니까?

천국이에요.

천국에서 기쁨의 단을 거두어요.

 

누가 기쁨으로 단을 거둡니까?

눈물로 씨를 뿌린 사람들입니다.

누가 눈물로 씨를 뿌립니까?

하늘나라 백성들이에요.

 

요한계시록은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이 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어떤 하나님인가요?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을 봅시다.

 

고후 1:3-10=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이 자비의 하나님이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위로를 받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자기는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위로하더라고 합니다.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역설입니다.

병 주고 약주고 입니다.

아니 환난을 면하게 해 주시면 되잖아요.

그럼 위로 할 일도 없을 것 아닙니까?

 

이 시대 교회에서 증거 되는 말씀들이 대부분 예수 잘 믿으면 고난 없이 잘 산다고 하잖아요.

복 받고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 증거라고 하잖아요.

가난한 사람은 저주 받은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어요.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환란 가운데서 위로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고난을 주시고 위로한다고 합니다.

 

이 말 속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이 담겨져 있어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죄 아래 가두어 두었다가 건져 내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아니 그냥 살려주면 되잖아요.

애시당초 죄가 없이 하면 되잖아요.

뭘 복잡하게 죄 아래 가두었다가 빼내 주시고 죽였다가 살려 줍니까?

왜? 지옥에 가두었다가 천국으로 인도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냥 천국으로 직행하게 하시면 될 것을 왜? 지옥에 넣었다가 천국으로 옮겨 주는가요?

 

이는 감사와 찬송케 하기 위함입니다.

고마움을 알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지옥을 모르면 천국을 알 수가 없어요.

고난을 모르면 위로를 몰라요.

아픔을 모르면 감사를 몰라요.

 

천국은 세세토록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송하는 곳이에요.

왜?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송하는가 하면 하나님과 어린 양이 지옥에서 건져 주셨거든요.

천국에 가보니까 자기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어린 양이 대신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세세토록 찬송과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감히 천국에 올 수 없는 자인데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오게 된 것을 알고

그 은혜가 너무도 커서 감사와 찬송을 돌려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기쁨으로 말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구원 받은 무리들이 큰 환란에서 나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큰 환란으로부터 나오게 하실까요?

구원이 왜? 환란 가운데서 받는 것으로 주어질까요?

 

이 땅에서도 천국처럼 살게 하다가 나중에 죽어서 천국으로 인도 하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요?

사랑의 하나님이 왜? 자기 백성들을 행복하고 잘 살게 해 주시지 않고

환란 속에서 구원을 해 내는 것입니까?

 

흔히들 인간은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아서 우리를 죄인 되게 하였느냐고 따집니다.

아니, 안 따먹으면 되잖아요.

 

그런데도 인간들은 자기들이 따 먹어 놓고서는 그 원인을 하나님에게 돌려요.

하나님이 선악과를 안 만들어 놓았으면 안 따 먹었을 것이 아니냐 라고 죄를 하나님에게 돌려요.

이게 인간이에요.

 

묻습니다.

여러분이 대답해 보세요.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았을까요?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에요.

만물이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선악과도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서는 반드시 선악과가 있어야 해요.

또한 뱀도 있어야 해요.

하나님은 뱀과 선악과를 가지고 청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악과를 왜 만들어 놓았느냐고 우리가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린 따져요.

선악과를 만들어 놓았으면 인간들 눈에 안 띄게 숨겨 놓던지나 하지,

왜? 잘 보이는 곳에 두고,

그것도 볼품없이 맛대가리가 없도록 만들어 놓던지 하지 않고서는

왜?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만들어 놓았을까요?

 

그 이유가 창세전 언약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죄 아래서 건짐 받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즉 먼저 죽음에 가두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 받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선악과를 왜? 만들어 놓았느냐?

생명과를 먹이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생명과는 누구에게 필요한가 하면 죽은 자에게 필요해요.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먼저 죽어 주어야 해요.

그래야 생명과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살려주시게 됩니다.

 

구원 받기 위하여 죽음에 가두어지게 한 것입니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 주셨어요.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자들을 구원해 내는 것으로 보여 주셨어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 어린 양의 피로 씻김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흰 옷을 입고 큰 환란에서 나오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곤 자기 백성들을 종살이 시킨 이 세상을 멸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다루어 가시는 것이

이 세상의 상식과 다른 역설적인 방식으로 다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 던져 넣고 건져내는 형식으로 간섭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아셔야 실족하지 않아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 육적 아버지들과 달라요.

우리의 육적 아버지는 자식들을 고생 안 시키고자 합니다.

그래서 어린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줍니다.

 

이 땅에 재벌들을 보세요.

자식들 고생 안 시키려고 하잖아요.

어려서도 호의호식하게 키우고 커서도 부귀영화를 대물림 하여서 편안하게 살게 하잖아요.

모든 부모가 다 그렇게 자식을 키우잖아요.

 

그런데 왜? 성경을 열면 자비의 아버지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큰 환란 가운데 던져 놓았다가 구원을 하시는가요?

하나님이 우리 부모들보다 인정머리가 없어서입니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어서 일까요?

 

다른 뜻이 있어서이겠지요.

우린 성경을 통해서 이 비밀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실족하지 않습니다.

 

시편에 73편을 보면 이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어요.

 

1 (아삽의 시)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 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아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못 마땅해서 따진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매일 고난을 당하는데,

저 원수 같은 자들은 하는 일마다 잘 되고 등 따습고 배부르게 잘 살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살게 하고 원수들을 못 살게 해야지,

어떻게 자기 백성들은 고난당하게 하고 저 원수들은 고난당하지 않게 하십니까? 라고 의문을 품고 하나님께 바락 바락 따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야! 이 놈아!

저 놈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지만 너희들은 천국이 준비 되어 있지 않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주기 위해서 잠시 지옥 같은 고난을 당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은 꿈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좀 쉽게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너 이 땅에서 7-80년 동안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살다가 영원토록 거지로 살래!

아니면 이 땅에 7-80년 동안 거지로 살다가 영원토록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살래!

그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 땅에서 7-80년 지옥으로 살다가 천년만년 천국으로 살래!

아니면 이 땅에서 7-80년 천국으로 살다가 천년만년 지옥으로 살래!

그러는 겁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린 영악해서 이 땅에서도 천국으로 살고 죽어서도 천국으로 살래요 할 겁니다.

이게 이 시대 교회에서 선포되어지는 설교들이에요.

목사들이 여러분 이 땅에서 행복하게 잘 살다가 천국에 갑시다 그러고 있어요.

그럼 교인들은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 아멘 아멘 해요.

이게 아니라고 하면 이단이라고 해요.

 

천국과 지옥이 없고 이 세상이 전부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살아야지요.

그런데 이 세상 바깥에 천국과 지옥이 있어요.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이치이고 그 이후에 심판이 있단 말입니다.

 

아삽이 기도하다가 이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아삽이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불신자들이 잘되는 걸 보고 배 아파 하다가

이 세상의 영화는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것을 알고 그 다음부터 찍 소리 하지 않고 살았어요.

쉽게 말해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부자가 지옥에서 하나님에게 천국에 있는 나사로를 시켜서 자기에게 물 좀 가져다 달라고 하니까

애! 너는 살았을 적에는 호의호식하고 살았고 나사로는 거지로 살았지 않느냐!

그러니 너는 여기서 고통당하는 것이 당연하고, 나사로는 편안히 쉬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라고 하셨어요.

 

누가복음 16장을 한번 살펴보고 갑시다.

 

눅 16:19-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 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 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건 부자들은 지옥에 가고, 거지들이 천국에 간다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모른 채 재물을 의지하고 사는 자들을 고발하고자 함이에요.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부귀영화에 취하여 사는 부자를 고발하기 위하여 투입 시킨 배우에요.

 

이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는 육에 속한 자들의 말로는 지옥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자와 가난함의 개념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부자이고, 하나님과 끊어져 있으면 거지에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있기 때문에 거지이고,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과 관계가 연결 되어 있기 때문에 부자인 것입니다.

나사로가 천국에 간 걸 보니까 나사로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살았음이 되는 겁니다.

 

어리석은 부자 비유에서도 그랬잖아요.

어떤 부자가 눈만 뜨면 재물이 불어나서 창고를 짓고 또 짓고 재물을 쌓아두고 살았어요.

그 때 하나님이 야! 이 어리석은 놈아 오늘밤 네 영혼을 데리고 가면 이게 누구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과 멀어지고 재물을 의지하고 살면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 겁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거지로 살아도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영적으로는 부자에요.

 

세상 것을 많이 소유한 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나사로와 같은 거지이고,

한 푼 없는 거지라 할지라도 마음을 이 세상에 두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부자에요.

성경이 말하는 부자와 거지는 물질이 많고 적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교회 안에는 물질이 많고도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질이 가난하면서도 영적으로 부자인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어요.

 

이 세상에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 있고, 땅에 속한 사람이 있어요.

물론 교회 안에도 있어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이고 행인이에요.

비주류에요.

 

비주류란? 못 누린다는 말입니다.

기득권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득권이 없으니 혜택을 못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인 거예요.

 

정치인들이 하는 말을 보세요.

정권을 잡으면 주류가 되고 정권을 잃으면 비 주류가 되어요.

그래서 정권을 잃은 자들은 자조 섞인 말로 앞으로 고생 좀 하겠구나 라고 해요.

이는 정권을 잡았을 때 누리는 혜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특혜가 사라지니까 고생한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의 신앙이 그래요.

성도는 세상에서 비주류에요.

나그네이고 행인이에요.

당연히 고난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하세요.

그래서 하늘에 속한 성도들은 자기의 뜻과는 다르게 이 땅에서의 삶이 순탄치가 않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왜? 고난인가 하면 자기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비주류로 간섭을 하기 때문이에요.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간섭하지 않고 우리 뜻대로 살게 해 두었으면

우린 모두가 이 땅에서 재벌이 되어서 땅에 코를 박고 땅의 기운으로 호의호식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천국도 잊은 채 말입니다.

하나님도 안중에 두지 않고 말이에요.

 

인간들은 생래적(生來的)으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요.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해요.

인간은 누구로부터 간섭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요.

자식들 키워보면 이건 대번에 알아요.

 

품 안에 자식이라는 말이 있어요.

아이들을 키워보면 다 경험해요.

품 안에 있을 땐 어쩔 수 없이 부모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지만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부모의 간섭을 싫어해요.

자기 맘대로 가고자 해요.

 

이에 부모는 간섭을 합니다.

그럼 부모에게 덤벼요.

으앙~! 하고 운단 말입니다.

울음으로 자기를 간섭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요셉이 애미가 그럽니다.

이 녀석이 커 가면서 말을 안 듣는다고 탄식을 해요.

저 녀석이 이제 27개월 되었어요.

3살이에요.

 

미운 3살이라는 말이 있지요.

왜? 미운 3살이라고 합니까?

이 때부터 자기주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라고 하면 안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는 때에요.

이제부터 부모와 자식 간에 전쟁이 시작이 된 거에요.

 

자식들이 커 가면서 부모와 원수가 되어요.

자식들이 부모를 원수시 해요.

왜?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주는 부모를 원수시 하는가요?

이는 자기 인생을 자꾸만 간섭하기 때문입니다.

 

묻습니다.

왜? 부모가 자식을 간섭합니까?

피 흘려서 낳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 찢고 피 흘려 낳았기 때문에 간섭하는 거예요.

남에 자식은 간섭하지 않아요.

 

그런데 간섭 당하는 자식 입장에선 그게 못 마땅한 겁니다.

왜? 날 간섭하느냐 에요.

이모와 삼촌은 오면 간섭하지 않고 용돈만 주고 가요.

 

그래서 아이들이 이모와 삼촌을 좋아하는 겁니다.

이모가 엄마이고, 삼촌이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해요.

왜냐하면! 이모와 삼촌은 간섭하지 않거든요.

 

이모와 삼촌이 왜? 간섭하지 않는가요?

이는 자기가 낳은 새끼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모와 삼촌도 자기 새끼들에겐 간섭해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부모와 자식은 원수 관계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인을 향하여 독사 새끼라고 하는 겁니다.

독사라는 말은 원래 살모사에요.

살모사(殺母蛇)란? 자기를 낳아 준 어미를 잡아먹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래요.

살모사 새끼들이에요.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를 죽였어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해요.

 

우리들은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와 친구하고 살아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마귀가 하라는 것만 해요.

하나님이 이를 어찌 두고 보겠어요.

두고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간섭하는 겁니다.

너 죽고 나 죽자고 간섭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에게는 고난이고 환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보세요.

하나님이 집요하게 간섭을 하잖아요.

그 간섭하심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포로 잡혀 가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이 압권입니다.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합니다.

나 너희들 무지하게 사랑한다고 합니다.

아니 무슨 이런 보리개떡 같은 사랑이 있나요?

우린 이런 사랑 싫어요.

 

사랑은 간섭으로 나타나요.

간섭하지 않는 사랑은 가짜에요.

진짜 사랑은 반드시 간섭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그냥 둡니까?

간섭해야지요.

이 사랑을 모르면 왜? 날 귀찮게 하느냐 라고 합니다.

그건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자식들을 사랑으로 간섭해 보세요.

자식들은 그걸 징글징글한 고난이라고 여겨요.

왜 날 귀찮게 하느냐?

날 좀 내 버려두라고 합니다.

 

이에 그래 너 알아서 해라 하는 부모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이 새끼가 뭐라고 하느냐고 잔소리 합니다.

자식들은 그 잔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려요.

 

아~ 집이 싫다.

더러워서 못 살겠다 빨리 돈 벌어서 독립해야지 한다구요.

마음으로 그런다구요.

돈 벌 때까지 아더매치(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함) 하지만 참는 겁니다.

속으로 씩씩거리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나중에 세상에 나가 돈 버는 전쟁을 치르면서 부모의 마음을 서서히 알아갑니다.

시집가고 장가가서 자기도 자식 낳고 키워보면서

자기가 그렇게 싫어했던 그 부모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에게 잔소리를 합니다.

나 너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이게 인간이에요.

 

부모와 자식은 생각이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살아가는 존재 양식이 달라요.

이건 창조주와 피조물과 같아요.

 

창조주와 피조물은 존재 양식이 다릅니다.

존재 양식이 다르다는 것은 이해 불가라는 말입니다.

창조주는 피조물의 속속들을 다 알지만 피조물은 창조주를 전혀 알 수가 없어요.

창조주가 알려 주는 것만큼만 알아요.

 

피조물이 창조주를 알 수 있는 것은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계시해 줄 때입니다.

스스로 드러내 주셔야지만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계시해 주시는 것만큼만 알 수가 있어요.

다 알 수가 없어요.

 

성경은 계시의 책입니다.

이는 아무나 성경을 이해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 성경을 계시해 주셔야지만 알 수가 있을까요?

이는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만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만이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만이 알아야 합니까?

왜? 세상 사람 모두가 다 알면 안 될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일하는 것이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을 갈라내는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천국의 비밀은 너희에게는 허락이 되었으나

저희에게는 비밀로 한다고 하신 이유도 예수님 자신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두 부류의 사람들로 갈라지기 시작을 했어요.

‘예수에게 속한 자와’,

‘예수에게 속하지 아니한 자’로 갈라집니다.

이를 ‘너희’와 ‘저희’라고 합니다.

‘너희’는 간섭하는데, ‘저희’는 간섭하지 않아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는 구원주이지만, 자기 백성 아닌 자들에게는 심판주이십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서로 다름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너희’와 ‘저희’로 존재하게 되어요.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이 되었는데, ‘저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어요.

 

천국을 의인화(擬人化) 하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비밀이에요.

아무나 예수를 알 수가 없어요.

믿을 수 없어요.

 

예수님께서 하루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하더냐? 라고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생이나 선지자라고 합디다! 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럼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라고 합니다.

어째서 복을 받은 자인가 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내가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려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째서 똑 같은 예수를 보고서도 세상 사람들과 제자들은 다르게 고백을 합니까?

왜? 예수가 다르게 보일까요.

이는 그들의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이 달라서 그래요.

예수를 선생이나 선지자로 보는 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보는 사람들은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영과 육이라고 합니다.

자기 백성들은 영에 속한 자이고,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

영은 산 자들이고, 육은 죽은 자들이에요.

 

영과 육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하늘과 땅은 존재양식이 다릅니다.

하늘은 주는 양식으로 존재하고, 땅은 받는 양식으로 존재합니다.

 

하늘에 존재 양식은 많이 나누고 베푸는 것이 선이고 복된 삶입니다.

하지만 땅에 존재 양식은 많이 모으고 움켜잡는 것을 복된 삶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성공의 기준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많이 가졌으면 성공한 자로 간주하고

적게 가진 자는 실패한 자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주는 자가 복되다고 합니다.

왜? 주는 자가 복되다고 합니까?

이는 하늘에 원리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부모와 같고, 땅은 자식과 같아요.

부모는 자식에게 줌으로서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로부터 받음으로 행복해 합니다.

 

옛 말에 딸들은 다 도둑이라고 하지요.

친정집에 오면 뭘 가지고 갈 것이 없나 궁리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친정 엄마는 도둑 당하는데도 도리어 딸에게 바리 바리 싸주려고 하잖아요.

이게 바로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이에요.

 

하나님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원리를 부모와 자식 간에 담아 두고서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면 만물이 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는 은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이걸 일컬어 만물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담아 놓았다고 합니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신성이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아야 해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면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어요.

만물이 말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요.

정말이라니까요.

진짜라니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종말의 징조들을 말하였습니다.

징조란? 싸인이란 뜻입니다.

징조는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기근과 지진과 온역과 전쟁과 난리와 같은 사건들이에요.

 

하늘에 권능들이 흔들린다고 하지요.

이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천재지변이 곧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가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건들이 말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징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들리는 언어는 없지만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달한다고 하는 겁니다.

 

개나리가 봄이다 말을 하고,

단풍이 가을이다 말을 하고,

떨어지는 낙엽이 곧 겨울이 오니까 겨울 준비를 하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몰라도

어른들은 다 알아요.

개나리를 보고 봄이 온다는 걸 알고,

낙엽이 떨어지면 겨울이 온다는 것을 알아요.

 

성도들은 어른들처럼 시절을 읽을 줄 알아야 해요.

지금이 잘 때인지 아니면 자다가 깰 때인지,

씨를 뿌릴 때인지,

아니면 추수 할 때인지 알아야 해요.

 

영적으로 시대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지금은 노아의 때와 같아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고 있어요.

교회가 세상과 짝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말의 교회들을 환란 속에 던져서 금을 제련하듯이 믿음을 시험하는 일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환란이라고 하니까 로마 시대처럼 칼을 들고 너 예수 믿을래 안 믿을래 그러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아요.

 

이 시대 환란은 육체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종말의 때를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한 것은 교회가 세상 가치에 취하여서 세속화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성도들이 정체성을 상실한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쾌락을 좇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요한계시록 17장에서는 음녀라고 하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우상숭배라고 하지요.

 

하나님을 섬겨야 할 백성들이 틈만 나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지요.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길까요?

이는 바알과 아세라가 육신의 즐거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을 주기 때문이에요.

 

쉬운 말로 이방 신이 세상에서 등 따습고 배 부르게 하여 준단 말입니다.

이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에요.

마귀적인 것이에요.

 

요한일서 2장을 봅시다.

 

요일 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지요.

그게 뭔가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건 세상에 살자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에요.

세상은 이 가치로 살아요.

그래서 인간들이 눈만 뜨면 이러한 것들을 좇아가요.

 

그런데 그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하늘에 것이 아니고 땅에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마귀가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곧 이러한 것에는 참 평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 평안은 하나님이 주신 것 속에만 있어요.

하늘에 것에만 있어요.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자 땅을 저주해 버렸어요.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땅을 뱀에게 주었어요.

저주받은 땅이 뭔가요?

지옥이에요.

 

그리고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했어요.

하나님은 저주 하신 땅을 뱀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땅은 뱀의 것이에요.

 

이 땅이 지옥이에요.

지옥이란? 땅에 감옥이라는 뜻입니다.

어째서 감옥인가요?

 

마귀가 세상 것으로 가두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가두어 버리고,

명예로 가두어 버리고,

권세로 가두어 버리고,

부귀영화로 가두어 버렸어요.

세상 것이 사람들을 옥죄는 감옥인 것입니다.

 

돈이 감옥이고,

명예가 감옥이고,

권세가 감옥이고,

부귀영화가 감옥인 겁니다.

이러한 것에 맛이 들면 빠져 나오지 못해요.

 

돈과 명예와 부귀영화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해요.

이러한 것들이 사람의 영혼을 갉아 먹어요.

피폐케 해요.

세상 것은 평안을 주는게 아니라 고단함을 주어요.

이러한 것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평안을 얻는 게 아니고 쫓기게 되어 있어요.

 

이러한 것들이 사람에게는 편리함을 줄 수는 있어도 안식은 주지 못해요.

안식은 마음에 평안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마음에 평안은 세상 것으로 얻어지지 않아요.

하늘에 것으로만 얻어져요.

세상 것은 도리어 마음에 평안을 빼앗아 가요.

 

평안은 이러한 감옥으로부터 나와야 얻어져요.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이 죽을 때 주어져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이러한 것을 스스로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없어요.

 

그 어떤 인간도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스스로 죽일 수가 없어요.

종교인들이 이걸 흉내를 내는데,

그건 흉내일 뿐이지 실제가 아니에요.

속지 마세요.

 

이건 비유로 말하는 것이니 곡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누구를 폄훼하기 위한 것이 아니니 예를 들어서 말하는 것이니 이해하고 들으세요.

 

예전에 무소유를 말하던 어떤 분이 있었지요.

무소유라는 책을 써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잖아요.

그 분은 스스로를 무소유로 살았다고 해요.

 

그분의 책을 보면 이런 말이 나와요.

어떤 분이 자기에게 난초를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이분은 이 난초를 키우는 재미로 살았어요.

자기 방안에 생명을 가진 거라고는 난초와 자기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분이 출타를 하게 되었어요.

근데 난초에게 물을 주는 것을 깜빡하고 만 것입니다.

돌아와서 보니 난초가 햇빛에 말라서 축 늘어져 있는 겁니다.

그리하여 얼른 물을 주었어요.

 

그러자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이 분이 이 난초에 온 신경을 쓰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어딜 가도 이 난초 때문에 마음이 편칠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난초를 다른 분에게 주었어요.

난초를 주고 나니까 그렇게 편하더라는 것입니다.

난초를 소유할 때는 온 신경을 다 빼앗겼는데 난초를 주고 나니까 평안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것이 인간은 소유 하면 마음이 쫓기고 무소유하면 마음이 평온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파하기를 소유하고자 하지 말고 무소유로 살라고 하였어요.

 

그런데 그 분이 죽기 전에 자신의 무소유를 누구라도 소유하지 못하게 하였지요.

쉬운 말로 무소유의 저작권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어요.

남이 갖지 못하게 했어요.

 

결국 이 분은 무소유를 소유하고 죽은 겁니다.

이 분은 무소유를 소유한 것입니다.

그 분은 무소유 하고 살라는 것으로 자신을 유명하게 하였어요.

 

이 분이 정말 무소유를 알았다고 한다면 그 무소유조차도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으면 안 되어요.

그것조차 버려야 했어요.

무소유에 대한 저작권을 소유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러나 이 분은 무소유 라는 것을 가지고 유명세를 누리고 살았어요.

죽어서도 무소유로 자기 명예를 소유한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에요.

그 어떤 인간도 자기로부터 자유 할 수가 없어요.

죄가 지배하는 한 자기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어요.

무소유를 외치는 그것조차도 자기를 지키는 수단으로 사용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옷 한 벌 입고 산 것을 무소유 하고 산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아니에요.

그 분은 옷 한 벌로 무소유 한다는 것으로 명예를 누리고 살았어요.

자신들의 세계에서 큰 어른이라는 대접을 받고 살았단 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들으며 살았어요.

 

비록 삶에 모습은 청빈한 모습으로 살았다 할지라도 그 분은 부자로 살았어요.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받고 살았단 말입니다.

그러니 무소유로 산 것이 아니고 무소유 해야 한다는 것을 소유하여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산 것입니다.

 

예전에 타계한 카토릭의 어느 추기경도 그러했어요.

청빈한 삶을 살았다고 하여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고 살았어요.

왕 노릇하면서 살았어요.

 

그들이 숭앙하는 종교에서는 이걸 신앙이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그들의 종교에서는 탐욕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것을 무소유 하자는 것으로 교리를 만들어서 수행방법으로 가르치고 있어요.

 

저는 이런 분들의 삶을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인간적으로 보면 본 삼을 만해요.

이걸 어쭙잖게 목사들이 흉내 내는 자들이 있어요.

그렇게 해서 유명해진 자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으로 온갖 부와 명예를 다누려요.

결국 청빈을 자기 가치를 챙기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겉으론 거룩한 척 하면서 속으로는 호박씨를 까고 있어요.

 

예수님의 초림 때 바리새인들이 그런 자들이었어요.

겉으론 거룩한 척 하면서도 속에는 온갖 탐욕들로 가득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면서 지옥으로 들어가라고 하였어요.

 

성경은 탐심이나 탐욕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본성이란? 후천적으로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갈고 닦아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잠시 억제는 할 수 있어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에요.

잠시 억제하는 것을 가지고 나는 탐욕이 없다거나 탐심이 사라졌다고 하면 안 되어요.

 

탐욕이나 탐심은 죄의 성향이에요.

그건 환경만 조성이 되면 언제든지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죄인은 무소유가 안 되는 것입니다.

나 없음이 안 되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조금은 유익을 있을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죄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탐욕을 부리나 안 부리나 죄인 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실존을 말해주고 있어요.

탐욕을 버리는 인간이 되라고 하지 않아요.

그건 버려지는 것이 아니에요.

 

탐욕은 죄 아래서 난 사람이 죽어야지만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아래서 난 몸을 가지고 사는 한은 죄로부터 자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오늘 본문을 잘 보세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오는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어린 양 앞에 서 있습니다.

 

서서 뭐라고 하나요?

어린 양에게 구원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지요.

어린 양이 어디서 구원을 해 주셨는가요?

죄에서 구원해 주셨어요.

 

죄에서 구원을 해 주었다고 하니까 이들이 죄를 안 짓고 살았다는 말이 아니에요.

여전히 죄의 몸으로 살았지만 어린 양의 죽음으로 정죄당하지 않고 산 것입니다.

쉬운 말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거리들을 다 이기지 못하고 살았다 할지라도

어린 양의 피 흘리심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부터 정죄당하지 않고 자유하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몸으로 행한 것을 참소해요.

그것도 하나님 말씀으로 말이에요.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너 이것 했어! 안했어!

이렇게 살았어! 안 살았어!

말씀을 들이대면서 추궁해요.

 

그럼 우린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호리라도 어기면 죽음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참소에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어요.

우린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여전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해요.

그러니 마귀의 참소대로 라고 하면 저주 받아 지옥으로 가야 해요.

 

그런데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죄 값을 어린 양 되신 예수님께서 다 받으셨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퍼부어야 할 저주를 예수님에게 대신 퍼부으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귀가 참소하는 그 정죄로부터 벗어 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자유 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 하여도 정죄당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고 증거 한 것입니다.

우린 여전히 죄를 짓고 살지만 정죄당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의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갚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 양의 피로 씻김을 받은 자들이 구원하심이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고 하면서 감사와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이걸 직역하면 어린 양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모두가 어린 양의 공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세세토록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구약의 초막절 모습이에요.

 

레위기 23장을 봅시다.

 

레 23:33-4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 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35 첫 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36 이레 동안에 너희는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37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열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번제와 소제와 희생제물과 전제를 각각 그 날에 드릴지니 38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너희의 헌물 외에, 너희의 모든 서원제물 외에 또 너희의 모든 자원제물 외에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니라 39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 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 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40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 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42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44 모세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절기를 알려 주었어요.

그 절기는 유월절로 시작하여서 무교절과 초실절과 칠칠절과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이에요.

이름 하여 7대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고 초막절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주이지는 천국생활을 상징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7대 절기는 모두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시작이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었는가요?

죄에서 구원 받는 것이지요.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냄을 입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구원의 궁극적인 것은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인 것입니다.

 

이게 구약에서는 애굽 나라 바로의 종에서 해방 되는 것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애굽에서 광야로 나아온 것이 구원입니다.

애굽은 죄의 나라를 상징하고 바로 왕은 마귀를 상징해요.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신약적인 의미로 보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 받은 것을 상징해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서 소고 치며 찬송을 하지요.

 

이것을 “모세의 노래” 라고 합니다.

이들이 어떻게 출애굽을 하였나요?

어떻게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살아났습니까?

 

어린 양의 피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르고 살아났어요.

이스라엘의 대문(大門)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것은 요한계시록 식으로 말하면 144.000명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印)을 친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세세토록 찬송을 하는 자들이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을 맞고 큰 환란으로부터 나오지요.

이는 구약 이스라엘이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살아나서 죄와 사망을 상징하는 애굽과 바로의 권세로부터 나오는 것과 같아요.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보면 장차 이 땅에 임할 큰 환란으로부터 구원 받는 것을 말해요.

하지만 현재적인 의미에서는 영적으로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 하였다는 말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그 옷을 희게 씻었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제 정죄함이 없게 되었으니 감사와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고 사는 것이에요.

 

교회를 일컬어 ‘에클레시아’ 라고 하는데,

이는 ‘빼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어디서 빼내심을 입었나요?

죄와 사망으로부터 빼내심을 입었어요.

우리가 나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빼내 주셨어요.

 

그래서 교회는 오직 어린 양 되신 예수그리스도만 드러나야 하고 그 은혜만 찬송이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입었는가요?

그럼 감사 하세요.

찬송하세요.

그 은혜에 영광을 자랑하십시오.

 

장차 천국에서 해야 할 일을 교회 안에서 행하십시오.

지금 하십시오.

강요가 아닌 자발적으로,,,

억지가 아닌 감사함으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을 여시고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열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와 사랑과 긍휼을 알게 하옵소서. 어린 양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정죄당하지 않고 살고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루 하루의 삶이 감사이고 찬송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蔚山 牧羊 ??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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