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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그러나”의 은혜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4. 1. 14.

 

 

“그러나”의 은혜

 

(김성수 목사)

 

 

(창 6:5‐8) “5 ○주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7 주께서는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하고 탄식하셨다.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왜 최후의 심판의 모형으로 나타난 노아의 홍수 심판의 근거가 혼인관계의 왜곡으로 묘사가 되어 제시 되어졌는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혼인이라는 것이 담고 있는 내용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신랑이신 하나님과 신부인 교회의 영원한 혼인 언약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혼인 관계의 왜곡은 곧 하나님의 언약의 왜곡이므로 그 혼인관계의 왜곡이 심판의 전제로 묘사가 되곤 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혼을 금했던 것이고 간음한 자들을 돌로 쳐 죽인 것이지 도덕법 상으로 이혼이나 간음이라는 죄가 다른 죄보다 더 중한 죄이기 때문에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그건 하나의 상징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혼이나 간음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혼인 관계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라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이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은혜의 옷자락으로 감싸셔서 깨끗하게 하시고 그들을 당신의 처소로 삼아 하나님과 그 백성들이 한 몸이 되어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모든 것을 함께 누리게 해 주실 때 비로소 온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기에 바로 그 영광스러운 현실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성경은 전체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인 그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꼭지 점으로 하여 그 지점으로 수렴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장 첫 부분인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장면도 바로 그 혼인 언약의 완성을 향한 언약의 그림자였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 자체도 하나님의 혼인 언약을 그림자로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창세기 1장에서부터 그 어린양의 혼인 잔치라는 하나님의 목적과 역사의 결론을 암시하고 있는 책입니다. 지난 두 주간에 걸쳐 공부한 내용을 머릿속에 잘 떠 올려 보세요. 그 부분에 관해 조금만 부연을 하여 확실하게 결론을 맺어드리고 오늘의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를 처소 삼아 거하셨다고 했지요? 하나님 자신이지요? (제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의 처소라는 것이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우리가 종국에는 하나님의 처소로 완성될 것이라는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 일체 속으로 초대되어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다시 증명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속에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창조물(크티세오스)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고 하지요? 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은 그 죄로 물든 인간을 더 이상 당신의 처소로 삼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죄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우리가 몇 주 전에 함께 공부한 창세기 6장 3절이지요?

 

(창 6:3) “3 주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 때부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처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 보면 인간들에게서 떠나가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어떤 분이 그대로 담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처소인 참 성전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 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며,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그대로 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독생자에게 주신 당신 자신의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그 아버지의 영광을 그대로 입고 재림하실 것이라 약속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마 16:27)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이렇게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담고 계신 하나님의 처소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우리 주님 안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걸 다른 말로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지요? 바로 그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주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히 1:1‐3) “1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시켜서,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2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시켜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3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하나님의 본바탕의 본보기이시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여기 보시면 하나님의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오 하나님 본체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처소 삼으셔서 당신의 영광의 형상을 그 분 안에서 나타내고 계시다는 뜻인 것입니다. 환언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로 연합이 되어 계신 분이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는 어구를 동일한 한 분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형상’ 헬라어 ‘카라크테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쩨렘’입니다. 그 ‘쩨렘’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최초로 쓰인 곳이 창세기 1장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에게 쓰인 그 형상이라는 단어가 창세기에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창 1:27)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렇지요? 이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계신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될 때 바로 그러한 목적,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 발산해 내는 목적으로 창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창조하신 창조의 목적은 예수님이 그렇듯이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바로 그 지점을 목표 지점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 성도들에게서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 희락, 화평, 온유, 자비, 절제 등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잖아요. 하나님은 그러한 요구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의 백성에게서 그러한 것들이 나오게 완성시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 백성들의 온전한 순종과 하나님의 완전한 이끄심, 즉 그 분의 은혜가 전제되어야 비로소 완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본보기로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을 해 보이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100이라는 온전한 힘과 지혜와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과 10이라는 제한된 힘과 지혜와 사랑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100이라는 온전한 힘과 지혜와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힘과 지혜와 사랑으로 당신께 온전히 순종하는 10을 가진 당신의 백성들을 온전한 100의 행복과 만족과 기쁨과 안식으로 이끄시려 하십니다.

 

그런데 10이라는 제한된 것을 가진 인간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 통치에 순종하는 것이 못내 싫어서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기 위해 그 이끄심을 거부하고 자신 안에 내재된 10이라는 힘과 지혜와 사랑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리는 것을 우리가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람은 아무리 올바른 판단을 하고 최선의 노력을 한다 해도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봉은 10이라는 제한된 만족과 행복에만 이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애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온전한 100이라는 행복과 안식과 기쁨이 주어지기 전에는 절대 만족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늘 힘의 부족에서 오는 결핍과 좌절, 그리고 지혜의 부족에서 오는 불안과 근심,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다른 이들과의 갈등과 다툼과 전쟁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고 영원한 존재로부터 끊어지게 되어 고통의 극치라 할 수 있는 죽음이라는 것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생명력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스스로의 왕이 되어 살아보겠다고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처한 영원한 죽음의 증상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역사와 인생과 성경 말씀을 주시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존하여 그 분의 100을 다 받아 누리는 자 만이 영원한 만족과 행복에 이를 수 있음을 경험케 하시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표 지점은 인간 스스로는 절대 도달 할 수 없는 곳이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그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리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메시지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인생 속에서 배우고 가야할 핵심 진리인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선악과와 생명나무 열매와 가죽 옷으로 상징이 되어 시작이 되었고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다른 그림으로 우리에게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순종과 은혜의 필연성을 강제나 억압의 수단이 아닌 설득과 교육과 훈련과 경험으로 체득하게 하시기 위해 역사와 인생을 허락하신 것이고 그 역사와 인생을 경륜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만이 이 역사와 인생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하여 이 역사를 해석하고 그 역사가 의도하고 있는 지점을 향하여 우리의 삶을 맞출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아는 사람들만이 인생의 목적을 정확하게 세울 수 있는 것이고 그 인생의 목적을 향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절대 이 역사의 의미를 이해할 수 도 없고 그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엉뚱한 세상의 힘들을 좇아 살다가 귀한 시간만 허비하고 죽음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며 윤회하는 것’이라는 순환적(循環的) 역사관이 아닌, ‘역사는 하나님에 의한 창조와 종말에 의해 시작되고 결론지어지게 될 것’이라는 직선적(直線的)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는 이 역사의 결론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스스로 네피림이 되고, 용사가 되고, 유명한 자가 되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해지게 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순종과 은혜의 필연성, 다시 말해 십자가의 필연성을 이해하게 되어 그 분께 순종하고 의뢰하는 자로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혼인잔치를 치르고 하나님과 한 몸이 되어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 영원한 안식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은혜에 반응하여 하루하루를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존하는 분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의 결론이요 목표 지점이며 성경의 결론인 것입니다. 간단히 줄여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심판 속에 꽃 피는 은혜의 구원’이 바로 성경과 역사가 우리에게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것을 한 단어로 줄이면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혼인 잔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오직 은혜로만 완성될 것이라는 사실은 성경 곳곳에 반복되어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에스겔서의 신부의 모습이 어떤 장면이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시내 산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이라고 했지요? 출애굽기를 보면 19장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일을 가리켜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인도하신 것으로 묘사를 하신 후에 율법을 주십니다. 율법은 언약이지요? 그 장면이 에스겔서에서 혼인 장면으로 묘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24장으로 가면 그 혼인 언약에 피가 뿌려집니다.

 

(출 24:8) “8 모세는 피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뿌리며 말하였다. "보아라, 이것은 주께서 이 모든 말씀을 따라, 너희에게 세우신 언약의 피다."

 

이 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혼인 언약은 그들이 하나님의 요구인 율법을 다 지켜내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무흠한 제물의 피에 의해 완성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과 혼인을 하여 그 분의 영광의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열심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부분도 바로 그 ‘그러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의 은혜란 모든 피조물이 다 멸망당할 때에 ‘그러나’에 속한 어떤 무리들이 그 멸망의 물속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복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잘 보시면 성경은 온통 질서와 조화에서 혼돈과 부조화로 그 질서와 조화가 깨어지고 하나님은 다시 그 무질서와 혼돈과 부조화를 질서와 조화로 세우시는 동일한 패턴의 반복임을 쉽게 찾아내실 수가 있으실 것입니다.

 

성경에는 질서‐무질서‐새 질서, 조화‐부조화‐새 조화, 창조‐역 창조‐새 창조의 패턴이 계속해서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질서를 세우시고 인간은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그 질서를 깹니다. 그 것이 곧 불순종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심판을 하시고 다시 새 질서를 세우십니다. 환언하면 하나님께서 조화롭게 창조해 놓은 것들을 왕이 되고 싶은 인간들이 부조화로 망가트려 버리고 하나님은 그 부조화를 심판하시고 다시 당신의 은혜로 조화롭게 세우시는 것이 성경 전체의 내용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를 인간들이 그들의 죄로 망가뜨리고 부수어 버리면 종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망가지고 왜곡된 것들을 완전히 멸해 버리시지만 그 역 창조의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은 쉬지 않으시고 어떤 무리들에게 은혜를 쏟아 부으셔서 그 속에서도 실패치 않으시고 다시 새 창조를 완성 하신다는 것이 역사와 성경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와 성경의 기록을 통해 새 창조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행복할 수 있는 것이구나.’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배우게 되는 것이고요.

 

우리가 그 관점에서 이 노아의 홍수 사건을 보게 되면 이 노아의 홍수 사건은 역창조의 극치 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의 세계, 조화의 세계가 인간들의 타락으로 역창조의 현상을 드러내게 되고(역 창조: 하나님의 조화로운 창조가 거꾸로 부조화와 혼돈으로 부수어져 들어가는 모습,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상하 질서를 깨고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네피림으로, 용사로, 유명한 자로 서려 한 시도로 그려짐. 따라서 그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질서가 깨졌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임) 하나님은 그 역창조의 상태를 완전히 멸해 버리십니다. 그러나 그 역 창조 속에서 꽃 피는 새로운 창조가 그 폐허의 자리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암시하는 구절이 8장에 나옵니다.

 

(창 8:11)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홍수로 멸망한 땅에 새로운 잎사귀가 등장합니다. 어떻게 온통 사람들과 짐승들과 기식하는 것들의 시체로 뒤 덮인 폐허의 땅에 새로운 것이 생겨났을까요? 성경은 일부러 ‘타라프’ ‘새로운’이라는 형용사를 동원해서 폐허 속에서 새로운 것이 창조되고 있음을, 다른 말로 하나님은 심판 속에서도 새로운 것을 준비하고 계셨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확실하게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포함한 성경 전체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홍수와 불로 멸해지는 역 창조의 심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역 창조를 진행시켜온 세상의 죄를 말끔히 소멸하여 씻어버리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새로운 자들에게 주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과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영원히 멸망당할 세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너무 배타적이라고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해 놓으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에게 ‘너희들에게 일어나는 사건들과 역사를 보게 되면 이러한 역 창조의 과정 속에서 과연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겠지만 걱정 하지 마라. 나는 너희들에게 나의 은혜를 부어 반드시 너희를 새 하늘과 새 땅에 세울 것이다. 그러니 이 땅의 역사와 너희들의 인생과 내가 너희들에게 전해 준 성경을 통해 불순종의 죄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며 너희는 왜 나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너희는 어떻게 해서 나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자로 지어지게 되는 것인지를 잘 배우고 오너라.’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은 절대 우리에게 겁을 주는 책이 아닙니다. 겁은 세상이 먹어야지요.

 

우리가 진짜 성도가 맞다면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노아의 홍수 사건과 같은 심판과 저주와 멸망의 사건들을 보면서 두려움이 아닌 감당할 수 없는 감사로 빠져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 전체의 구조를 보시면 그 사실을 더욱 확연하게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히브리 문학의 아주 대표적인 특징은 교차 댓구 법이라 했지요? 가운데에 전체의 주제를 심어 놓고 양 쪽에서 설명을 해 들어가는 그러한 구조입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도 그렇게 교차 댓구 법에 의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께 나누어 드린 표를 함께 봐 주세요.

 

6:9,10 A 도입: 노아와 세 아들이 등장

6:11,12 B 온 땅의 타락: 강포가 땅에 충만하다

6:13‐22 C 심판 선언: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7:1‐10 D 방주 승선 명령: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7:11‐16 E 심판의 시작: 큰 깊음의 샘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림

7:17‐22 F 심판의 급속한 진행: 물이 많아져서 방주가 땅에서 떠오름

7:23‐8:1 M 하나님의 은혜의 새 창조: 하나님이 권념하사

 

(8: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권념하사, 자카르: 항상 마음에 뚜렷이 새겨 깊이 간직함)

 

8:1‐5 F' 심판의 급속한 정리: 물이 점점 감하여

8:6‐14 E' 심판의 종결: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8:15‐19 D' 방주 하선 명령: 너는 방주에서 나오라

8:20‐22 C' 심판 종결 선언: 내가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9:1‐17 B' 하나님의 축복: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9:18‐19 A' 결론: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온 땅에 퍼지니라

 

잘 보시면 가장 가운데 부분에 하나님의 은혜가 놓여 있고 6장과 7장은 역 창조의 완결로 완전히 파괴가 되지만 8장과 9장은 다시 새 창조로 전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표로 보니까 노아의 홍수 사건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가 확실하게 보이시지요? 그러니까 노아의 홍수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로 옛 것들이 물러가고 새로운 것이 완성이 되는 새 창조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첫 창조를 당신의 최종 목적으로 삼으셨던 것이 아니라 새 창조, 즉 하나님의 은혜로 건설될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시기 위해 첫 창조를 하셨던 것이고 그 첫 창조가 인간의 불순종으로 어떻게 역창조의 길을 가게 되며 그 역 창조를 딛고 어떻게 새 창조가 완성이 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혼돈과 공허의 상태에서 당신의 백성들의 생육과 번성을 이루어 내시는지 그 하나님의 열심과 은혜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열심 앞에 철저하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초의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했던 아담에게도 생육과 번성의 명령이 떨어졌던 것이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에서 새 삶을 살게 될 새로운 피조물의 상징인 노아에게도 생육과 번성의 명령이 동일하게 떨어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도 생육과 번성의 약속,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을 하신 것이고요.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과 마귀의 세력들이 아무리 역 창조로 방해를 해도 반드시 당신의 백성들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생육시키고 번성시켜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그러한 명령과 언약 속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최초의 하나님의 백성인 아담과 하와에서, 그리고 모든 기식하는 것들이 다 죽어버린 역 창조의 종결 상태에서 은혜를 입은 새 사람 여덟 명과 새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에서, 그리고 온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의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 어떻게 생육되고 번성이 되었습니까?

 

(마 8:11)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계 7:9‐10) “9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들은 큰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의 것입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하나님의 새 창조의 완성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목표지점을 설정해 놓으시고 역사와 인생을 이끌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 장면을 성경에서 보면서 아무리 인간과 마귀들이 역 창조로 방해를 한다 해도 하나님의 새 창조는 반드시 완성이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단 한 사람도 놓치지 않으시고 모두 구원하실 것이라는 성도의 견인(牽引)교리도 그 속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떠한 세상의 방해나 공격에도 기죽지 말고 열심히 한 곳만 바라보면서 가야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창조와 역 창조와 재창조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멸망당해 버릴 쓰레기들 속에서도 창세전에 택해 놓으신 당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부으셔서 새로운 창조를 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 8절의 ‘그러나’의 은혜인 것입니다.

 

(창 6:5‐8)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 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5절과 6절과 7절은 보시다시피 역 창조의 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탄을 불러일으킬 만큼 악한 불순종과 무질서의 상태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러나’의 은혜를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그러나’의 은혜 속에 들어 있는 이들이 바로 여러분과 저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새 창조사역은 혹자들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들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계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 목적은 바로 그 새 창조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은 아담 때부터 시작된 역 창조 속에서 이미 그 때부터 진행되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계속해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의지를 그림자로 모형으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새 창조에 대한 암시를 창세기 3장 15절의 원시(原始)복음을 공부하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정녕 죽으리라’는 역 창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들을 바로 죽이지 않으시고 그들의 부끄러움을 무죄한 짐승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가죽 옷으로 가려주시고 그들에게 창세기 3장 15절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모든 피조물들이 멸망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무흠한 제물의 피, 다른 말로 당신의 은혜로 그 죽음 속에서 다시 생명을 일으키실 것임을 암시해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노아의 홍수 사건에도 그 새 창조의 의지는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도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을 다 죽이셔야 했습니다.

 

(창 6:5)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여기서 ‘모든’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콜’은 바로 그 뒤에 ‘항상’이라고도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콜’이라는 단어는 모든 개체 전부와 모든 시간 전부를 가리키는 단어인 것입니다. 성경은 아담 이후의 모든 시간 속에서 모든 인간들의 생각과 계획이 단 한 순간도, 단 한 가지도 선한 것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탄과 근심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을 쓸어버리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 모든 것 안에는 당연히 노아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창 6:7)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쓸어버리다’라고 번역이 된 ‘마하’는 어떤 것을 철저히 파괴하고 말끔히 없애 버리는 경우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통제와 조화를 떠나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은 그 멸망의 저주 속에서 건져집니다. 어떻게요? 은혜로.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통제와 질서와 조화를 떠나 자기 스스로 계획하고 결단하고 실행에 옮기며 선과 악 조차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겠다는 세상의 네피림, 용사, 유명한 자들을 모두 쓸어버리실 것인데 그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 어떠한 한 무리는 그 속에서 건지셔서 당신의 은혜를 부어 다시는 불순종의 악을 저지르지 않는 자들로 만드시는 새 창조를 이루실 것임을 우리는 이 ‘그러나’라는 단어 속에서 메시지로 읽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그 은혜의 교리를 좀 더 확고하게 다질 수가 있습니다.

 

(창 6:8)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 구절을 히브리어로 보면 ‘예흐와 뻬에네 헨 마차 웨노아흐’입니다. 거기서 ‘뻬에네’라는 단어는 ‘아인’이라는 명사의 연계 형인데 그 단어의 의미는 ‘눈(eye)’입니다. 그리고 ‘입었더라’라고 번역이 된 ‘마차’는 원래 ‘발견하다, 획득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보다 원문에 충실하게 직역을 하면 ‘노아는 여호와의 눈 안에서 은혜를 발견하여 획득하였다’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왜 굳이 이 구절을 원문을 바탕으로 직역을 해 드리는가 하면 본문 5절에 보면 하나님의 눈에 비친 모든 시간, 모든 개체들이 다 한탄과 근심의 대상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오직 노아만 은혜의 눈으로 바라보셨다는 그 극명한 대조를 확인시켜 드리기 위함인 것입니다.

 

(창 6:5)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여기서는 여호와의 눈에 금심과 한탄 밖에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8절의 ‘그러나’ 이후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눈에는 ‘은혜’가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조차도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눈앞에서 모두 멸망해 버려야 하는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은혜의 눈으로 바라봐 주셔서 그 속에서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를 획득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육신의 옛 몸을 입고 있기에, 다른 말로 첫 창조의 몸을 입고 있기에 우리의 죄 된 본성과 습관과 집착과 중독과 통제성향 등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이 진행시키고 있는 역 창조 사역에 동참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질서와 조화를 깨는 무질서와 불순종의 삶을 여전히 살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러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그건 미미하나마 그 속에 이미 새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쓰레기 더미 속에서 여전히 뒹굴고 있는 우리의 손에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쥐어 주셨습니다. 저주의 홍수로 두려워 떨고 있던 노아에게 새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한 위로를 주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새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에서 이렇게 멋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겨우 새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를 손에 든 불안에 떠는 노아와 같은 심정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새롭게 창조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내는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 그 분이 누리시는 모든 영광과 아름다움과 행복과 안식을 모두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계 21:5‐8) “5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6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7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받을 것이고,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8 그러나 비겁한 자와 신실하지 못한 자와 가증한 자와 살인자와 음행하는 자와 마술쟁이와 우상 숭배자와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믿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당신의 생명수를 부으셔서 새롭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 것을 믿는 자들을 우리가 성도라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사실을 믿으십니까? 정말 그 사실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에게는 소망이라는 것이 있으실 것이고 그 소망은 여러분을 절대 절망 속에 그냥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합시다. 나에게 일어난 사건, 내가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이런 어두운 상황,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캄캄한 인생의 터널 그런 것 바라보지 마시고 우리가 믿고 있는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 그리고 우리가 입게 될 새로운 몸을 생각하십시오. 역사와 인생과 사건 만을 바라보며 그 역사와 인생과 사건에 지배당하지 마시고 역사의 종국을 알고 있는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그 역사와 인생을 주도해 나가셔야 합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 백성들의 현장 실습 수업장입니다. 그 하나님의 수업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잘 배워 수업 끝 종이 칠 때 우리 아버지가 계신 우리의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이제 이 곳 수업 장에서 배운 대로 하나님께만 온전히 순종하고 의존하는 새로운 자들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있는 바대로 반드시 그 일을 이루어 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아직 이 모양인데도 너희는 이미 지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라고 확언해 주신 것입니다.

 

(고후 5:17~18)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우리는 이렇게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원론 적으로 이미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인식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신 여러분, 그렇다면 그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께서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시는 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이 역 창조의 혼돈 속에서 건져져서 새롭게 창조된 노아와 같은 자로서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준비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무엇을 하며 산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그저 순종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성경으로만 말씀을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연구해서 그 분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기를 애쓰는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그 분의 뜻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어떤 것이라 했지요? ‘너는 죽고 하나님과 네 이웃을 목숨 바쳐 사랑하라’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목숨 바쳐 그거 하다가 가면 되는 것입니다. 당장은 잘 안 되더라도 결국은 우리가 그렇게 완성이 될 것이므로 열심히 노력해 보는 것입니다. 나와 의견이 조금 다르다고, 나를 모함했다고, 나의 진심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나 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했다고, 나에게 손해를 끼쳤다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해서 그 상대방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려 달려드는 그러한 역 창조 속의 사람들이 되지 마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로 했습니다.’라는 멋진 용서와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 되십시오.

 

세상은 그런 우리를 가리켜 바보라고, 약해 빠진 자라고 손가락질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입은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비라는 것이 한 번도 오지 않았던 그 시대에 산꼭대기에다가 배를 지었습니다. 그것도 120년 동안이요. 그건 정말 세상 적으로 볼 때 바보 같은 짓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그 짓을 한 것입니다. 그 노아의 반대편 사람들은요? 네피림이 되고, 용사가 되고, 유명한 자가 되기 위해, 다른 말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보 같은 짓을 한 노아의 손을 들어 주신다니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역사가 무엇이며 이 역사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는 지 정확하게 아는 분들이기에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통해 배우고 오라고 하신 그 것들만 열심히 경험하고 익히고 배우다 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악함과 무력함과 무익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열심히 실천하다가 가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역 창조의 현장 속에서 예수의 심장을 가지고 원수들 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해 주며 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좇아 살다가 가야 합니다.

 

여러분, 용서하고, 당해주고, 죽어주는 것이 패배자의 모습처럼 보이고 구차한 자의 모습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그게 진짜 승리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더러운 죄를 양털처럼 희게 만드신 방법이 뭡니까? 십자가에서 그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지금 자기들이 저지르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니 용서해 주세요.’ 여러분, 죄는 용서를 통해서만 소멸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아십니까? 누가 어떤 상대방에게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 상대방이 자기에게 해를 끼친 자를 용서할 때 그 커다란 죄가 소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삶을 좇아 살기로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세상의 죄를 용서와 사랑으로 소멸하는 자로 이 땅을 살다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용서해 주고 사랑해 준다고 해서 그 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죄가 진짜로 소멸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처분은 하나님께 맡기시고 우리는 우리의 역할만 잘 해 내다가 가면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으로 죄를 소멸하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 우리는 그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기적이어서 어떤 분쟁이나 다툼이 있을 때 항상 자기가 피해자라고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분쟁과 다툼 속에서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를 밝히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 누가 얼마만큼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졌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많이 당해 주십시다. 당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억울해서 기도하다가 나중에는 ‘혹시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로 가게 되고 종국에는 자신의 모난 부분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게 되는 것이 당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유익입니다. 가해자들이 기도하는 것 보셨어요? ‘하나님 저는 오늘도 열 명의 사람들에게 내 이웃의 험담과 모함과 욕을 했습니다. 저 잘했지요?’ 이런 기도가 있을 수 있나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러시겠지요. ‘내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복음을 전하랬지 언제 땅 끝까지 이르러 소문을 전하고 험담을 전하라고 했니?’ 그러실 거예요.

 

설사 상대방이 진짜 죽을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려 드는 사람은 절대 기도의 자리, 성숙의 자리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죽이려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저는 하벨(nothingness)입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할 수 있는 자입니다.’라는 기도를 할 수 가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닌 우리를 위해서요. 여러분, 내가 가해자인지 아니면 당해주는 자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리트머스 시험지가 바로 ‘나는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기도와 참회와 회개를 하는 자리로 내려갔는가? 그 일이 나의 신앙 성숙에 도움이 되었는가?’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 역사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이기에 이 역사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압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교회를 가리켜 해석학적 공동체라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영화가 나왔다고 하기에 아이들을 데리고 영화관엘 갔었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은 인류가 멸망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은 변종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어 전부 흡혈귀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한 사람의 생존자가 살아남아서 그 흡혈귀들을 피해 도망 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맞서서 싸우기도 하다가 결국은 죽어 버리는 그런 허무맹랑한 만화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 주인공이 얼마나 외로워하는지 몰라요. 그리고 매일 매일을 공포에 떨며 삽니다. 그런데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런 모습으로 이 땅을 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을 세상의 왕으로 삼고 싶어 하는 마귀와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언제든지 남의 피를 빨아먹을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흡혈귀들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그 속에서 보여 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란 그토록 힘겨운 것입니다. 내 피를 빨아 먹고 있는 흡혈귀를 힘으로 밀쳐 내지도 못하고 그 흡혈귀를 감싸 안아주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기가 어찌 수월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우리 피 흘리기까지 한 번 노력해 봅시다. 용서하고 사랑하며 죽어 주십시다. 우리는 역사를 알고 역사의 종국을 아는 해석학적 공동체이니까요.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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