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영광, 아들의 영광, 나의 영광
(김성수 목사)
(요 17:1-8)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2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1)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육체에게') 3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4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5 아버지,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나를 아버지 앞에서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6 나는,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인데, 아버지께서 그들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7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으며,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참으로 알았고,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긴 시간에 걸쳐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부터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에 관해 공부를 할 것입니다. 이 장도 굉장히 엄청난 복음의 핵심 내용을 구구절절이 함의하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장은 아닙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이 세상의 성경이 모두 사라지고 요한복음 17장, 한 장만 남는다 할지라도 복음은 여전히 전해 질 수 있다’고 말씀을 하셨을 정도로 요한복음 17장은 중요하고 복된 장입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님의 기도하면 떠 올리는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이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올리신 기도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오늘부터 우리가 공부하게 될 이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로 대표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요한복음 17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먼저 1절부터 8절까지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이고, 9절부터 19절까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며, 20절부터 26절까지가 당신의 제자들과 그 제자들에 의해 믿게 될 모든 신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 첫 번째 부분인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를 우선 개괄적으로 공부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마지막으로 하시는 것이 기도라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에 당도하여 다시 한 번 기도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분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끊임없이 기도를 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온 밤을 새워 기도를 하셨고, 새벽 미명이 되기 훨씬 이전에 일어나셔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는 기록도 자주 발견합니다. 그 분은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에도 밤을 새워 기도를 하셨고, 겟세마네에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현장이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현장에서도 그 분은 하나님께 먼저 기도를 하셨으며,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도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하십니다. 이렇듯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에서 필수적인 호흡과 같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러한 스승의 기도의 습관을 곁에서 지켜보다가 ‘스승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고 했던 것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그림입니다.
그렇듯 기도는 아버지와 아들 된 자의 긴밀한 대화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그 분의 아들이 된 성도들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미주알고주알, 조잘조잘 대며 아버지와의 대화를 즐겨 하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종이나 외인들은 주인에게 함부로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서워 보이는 주인도 아들이 와서 조잘조잘 자기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것을 즐겨 듣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모든 사정과 삶의 이야기를 터놓고 아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이니까요. 오늘 날 개혁주의가 바라보는 기도는 상당히 곡해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마치 숙명처럼 여기고 기도할 필요를 유보하고 놓치고 있는 것이 오늘 날 개혁주의 진영의 딜레마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하나님의 주권, 교리와 작정과 예정과 섭리의 교리를 배운 후에 기도에 더 소홀해 지지 않으셨어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 분의 권능을 알기에, 그리고 그 분의 약속 이행을 확신하기에 더욱 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좀 솔직해져 보자고요.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다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분의 도우심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까? 성도가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모두 맡기기 위한 기특한 생각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 분의 약속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이 땅을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언약들이 ‘과연 그렇게 될까?’하는 의심과 불안 속에서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까지 이 불완전한 옛 몸을 입고 있고, 대적이라는 놈이 우리를 수시로 흔들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럴 때 ‘아니야, 정말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야, 아버지 맞지요?’하고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흔들리고 연약한 가운데에서도 전혀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지도 않고, 아예 포기해 버린 사람들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확신한다는 믿음의 가장 좋은 표현 방식입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께 아뢸 때만큼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선포하는 때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그 분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기도라는 것을 합니까? 안 그래요? 따라서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성도의 기도는 자기의 요청과 간구로 일관 될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기다리며 진실로 의지하는 사람은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저는 그 모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저는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 계신 것을 제가 알며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속에서만 제가 평화와 안식과 고요함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바로 그와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옳은 방식인 것입니다. 기도는 당면한 문제의 해결이나 소원 성취를 그 목적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평강과 신앙의 성숙을 그 목적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 11:28-29)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보시다시피 하나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다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납작 엎드렸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게 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고 못 받고는 부차적인 문제이며 차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로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렸을 때에 하나님은 그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밭을 사라하셨을 때 예레미야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 자손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마당에 밭을 사는 일이 왜 필요한가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 때 예레미야는 ‘하나님, 제 우둔함을 일깨워 주소서. 하나님께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저로 알게 하시고 그 거룩한 뜻을 제게 설명해 주소서’하고 기도를 합니다. ‘이 마당에 왜 밭을 사라는 겁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고 제 의견을 한 번 들어보세요.’하고 자신의 뜻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성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되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황급하고 위급한 기도 제목이 있다 하더라도 일단 하나님 아버지께 다 아뢴 후,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선한 유익을 주시려 하시는지를 꼭 물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부터 공부하게 될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다 공부를 하시고 난 후에 ‘나는 왜 기도해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1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때가 이르렀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때’는 어떤 ‘때’를 말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2장으로 가면 그 때가 어떤 때인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 12:23,27)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보시다시피 그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으로 아들이 영화롭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가 영화롭게 된다고 합니다. 아들이 죽는데 아버지가 영화롭게 된다? 그리고 죽음 자체가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관점으로는 선뜻 이해가 어려운 그런 내용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아들의 영광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영광과 영화에 대해서는 제가 여러 번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만 여러분은 오늘 그 영광과 영화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배우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하나님의 영광 교리의 완결편이라 해도 좋습니다. 제가 이미 설명해 드린 다른 장들과 비교를 해가면서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앞서 공부한 13장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지요?
(요 13:30-32)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 이러라 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유다가 예수님을 팔러 나가자마자 예수님 당신이 영광을 얻으셨다고 하십니다. 거기에서 동사의 부정과거 수동태가 쓰였습니다. 그 말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지만 그것이 기정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말입니다. 도대체 자기가 팔려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무슨 영광이라고 이렇게 단 두 절에서 영광이라는 단어를 무려 네 번이나 쓰시면서 영광을 강조하실까요? 12장에도 역시 아들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진술이 나옵니다.
(요 12:27-28) “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수난의 순종을 가리켜 ‘네가 이미 나를 영광스럽게 했다’고 말씀하시고, 앞으로 예수가 지실 십자가를 겨냥하여 ‘네가 또 다시 나를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참 잔인한 아버지 아닙니까? 우리는 영광이라는 단어를 너무 표피적으로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오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그 영광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머릿속에 꼭 새기고 가셔야 합니다. 우리가 전에도 공부한 것처럼 ‘영광, 독사’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나라의 것이 가시적으로 계시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영광이라는 단어가 함의하는 내용은 그보다 더 크고 풍성합니다. 원래 그 영광이라는 단어, 헬라어 ‘독사’는 견해나 지식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orthodox, paradox, 등에 붙어 있는 그 ‘dox’가 바로 ‘독사’에서 파생된 접미사입니다. 그런데 그 ‘독사’가 ‘올바르고 선한 견해를 가진 사람의 위치와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여지게 되었고, 그러한 선한 견해와 지식을 가진 사람을 향한 칭찬과 명예를 나타내는 단어로 발전했으며, ‘지위를 굳힌다, 명성을 얻는다’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성경에 나오는 영광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나오는 ‘빛나는 영예’라는 의미와 ‘하나님과 하늘의 것이 가시적으로 계시된 상태’를 둘 다 아우르는 단어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이 영광이라는 단어가 ‘하늘의 것이 인간 세상에 가시적으로 계시되는 것’(11:4, 12:16,23, 13:31) 이라는 의미와 ‘칭찬과 명예와 명성, 빛나는 영예’(8:24, 12:28, 15:8, 16:14, 21:19)라는 두 가지 의미로 다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그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혼합된 상태로 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사복음서나 요한복음을 읽으실 때 61번이나 등장하는 영광이라는 단어를 해석하면서 그 의미를 잘 분별하여 읽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영화롭게 하다, 독사조’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로 쓰인 것일까요?
본문 1절을 다시 보시면 예수님께서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4절과 5절에서는 ‘내가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하고 기도를 하십니다. 이 4절과 5절이 참 난해한 구절입니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그런 부분이라 제가 서론을 길게 보탠 것입니다.
(요 17:4-5)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 구절을 언뜻 보면 예수님께서 죽을 고생을 다 한 후에, ‘아버지 이제 됐죠? 아버지가 시키신 일 다 했으니까 이제 다시 옛날의 그 영광을 회복시켜 주세요.’하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건 자칫 예수께서 당신의 영광을 잠시 비워 놓으셨던 그 시간들이 지긋지긋한 시간이었다는 뉘앙스를 풍기게 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그 영광이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면, 예수님은 창세전의 그 영광을 갖고 그냥 하늘에 계시면 됩니다. 뭐 하러 내려오셔서 그 고생을 하세요? 여기 4절과 5절에서의 영광은 앞에서 설명해 드린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함의하는 단어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을 하심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했습니다. 그건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의 그 순종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인내와, 하나님의 용서하심,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온유하심 등이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났습니다. 그렇지요? 그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견해가 올바로 드러난 상태가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의 순종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하나님으로 인정을 받으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순종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게 됨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세상에 계시가 되며, 그러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이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그 본체적이며 발산적인 영광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 본체적 영광이 다른 존재에게서 반사적 영광으로 드러나게 될 때, 그것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다른 존재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시적으로 반사가 되고, 계시가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그 상태를 가리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5절에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지금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해 달라는 기도는 어떤 기도이겠습니까?
이제 곧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이 시키신 일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예수님 자신도 피하고 싶으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자신을 영화롭게 해주시면, 다른 말로 끝까지 순종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세상에 드러나게 해 주시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니까 그렇게 좀 도와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반드시 십자가를 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게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인 것입니다. 이해가 가세요?
예수님은 지금 하늘나라에게 당신이 가졌던 그 화려하고 장엄한 그 영광을 돌려달라고 떼를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당신의 마음이 약해져서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의 삶속에서 드러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도와주셔서 당신이 십자가를 잘 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면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하도록 아버지의 권능으로 도와주시면, 그 아들의 삶 속에서 아버지가 드러나게 되고, 그 일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아버지 대접을 받게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여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반사적 영광을 드러내는 자들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들이 추구해야 하고, 드러내야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들의 선악 판단에 따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엉뚱한 영광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롬 1:18-23)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 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보시다시피 인간은 지어질 때부터 하나님을 알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로 지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에서 타락을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포기하고 그 영광을 썩어질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예가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내려왔을 때, 그 아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상이 금 송아지였습니다. 그 금송아지는 그들이 애굽에서 섬기던 풍요의 신, 아피스의 암소와 하돌의 황소를 본 따 만든 것이었으며, 그들이 앞으로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지방의 풍요와 다산의 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마음속의 하나님은 풍요와 다산을 주는 그런 존재였지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이라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가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다’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목숨 걸어 섬긴다고 하던,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어 보라고 하니까 송아지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속내가 폭로 되었던 것입니다. 그건 곧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방법과 수단으로 동원하도록 하는 마귀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썩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야 할 자들이, 썩어질 이 세상의 풍요를 추구하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된 것, 그것이 타락입니다.
(롬 1:25)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상태에 있는 자들을 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시 그 영광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요 17:22)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나님께 받은 영광을 성도들에게도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 받은 영광이 뭐였습니까? 죽기까지 순종하여, 고난도 감수하며, 십자가를 지는 것까지 감내하는, 절대 순종의 삶이 바로 영광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내셔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주님께 주신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성도들에게 주었다는 것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성도들 또한 자신들의 꿈과 야망과 비전을 접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죽기까지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반드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절대 순종의 자리로 이끌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의 구원의 목적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엡 1:11-14)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 위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성도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성숙이 되고 완성이 되어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자로 회복되기 위해 구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며 집중하여 삽니다.
(빌 3:17-21)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십자가의 원수로 행 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들의 하나님은 자기 배요, 그들의 영광은 ‘아이스퀴네, 부끄러움’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영광으로 알고 추구하는 모든 것이 다 ‘아이스퀴네, 부끄러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러한 땅의 영광, 즉 ‘아이스퀴네, 부끄러움’을 추구하며 사느라 하나님을 도구요 방법으로 동원하여 사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쌓아서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합니다. 축구 경기에서 골을 넣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고, 대종상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이 고작 그런 것과 비교될 수 있을 것 같으세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 계시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땅에서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 낸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자랑스러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세상 그 어떤 것을 올려드리며, 당신의 영광을 삼으라고 하셔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랑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수행해 내는 그 백성의 순종, 그리고 거기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랑인 것입니다.
(렘 6:20-21) “20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21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 백성 앞에 거침을 두리니 아비와 아들들이 한가지로 거기 거치며 이웃과 그 친구가 함께 멸망하리라”
보시다시피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자랑,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백성들이 고난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의 배가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웃을 위해 그들의 수고를 감수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예수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와 온유와 절제와 공의와 오래 참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넘겨주시고 가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십자가가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내 뜻과 내 야망이 기각되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십자가의 삶이 내 삶 속에서도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4절에서도 주님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하시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일은 십자가를 지고 죽어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구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요 6:28)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여기서 ‘일’은 복수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을 자기들이 해 내어 하나님께 이 세상의 것들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종교 행위들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좋은 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마치 거래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루에 기도를 세 시간씩 하라던가, 십일조를 빼 먹지 말고 하라던가, 매년 꼬박꼬박 단기선교를 가라던가, 열심히 구제에 힘쓰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엉뚱한 답을 주셨습니다.
(요 6:29)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여기서의 ‘일’은 단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잘 믿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일, 예수를 잘 믿는 일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믿음을 받은 자로서 믿음을 발휘하며 사는 신앙인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변변치 못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당하고 기쁘게 행복하게 살아내는 것, 하나님의 일입니다.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우고,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이 그것이 진짜 힘이 아니란 것을 알고 겸손하게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 하나님의 일입니다. 즉 보이는 것을 의지하여 교만을 떨고, 자랑을 하거나 그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부끄러워하고 기가 죽어지내는 이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만이 믿음의 대상이 되어 있는 자, 그가 바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 있는 자이고, 그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인 것입니다.
(사 43:7)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보세요. 우리는 우리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이들이 아닙니다. 정말 명심하세요.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합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잘 참아내야 하는 일과, 용서해야 하는 일, 섬겨야 하는 일, 사랑해야 하는 일 등이 우리에게 닥칩니다. 그 상태에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밝히 선포되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 고난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잘 견디고, 그 상황에 열심히 순종하다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영광은 장차 우리의 영광으로 완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롬 8:18)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따라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애를 쓰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 10:31-33)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예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이 주신 당신의 백성들을 모두 구원해 냄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고, 그 예수의 삶을 하나님이 영화롭다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써 다른 이들의 구원에 도구요 방법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순종과 완전한 자기부인입니다. 잘 안 되면 그 때 뭐하라는 것입니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일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끝까지 기도를 하셨는데 우리가 도대체 뭐라고 기도를 게을리 한다는 말입니까? 기도합시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멋진 성도들의 모습을 한 번 세상에 보여주세요. 오늘 오후에 한국에 계신 제 영적 동지인 어떤 장로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사업이 많이 어려워져서 이제 작은 월세 집으로 이사를 하신다는 그런 전화였습니다. 열 개가 넘는 우량 상장 회사를 경영했던 재벌급 인사가 경기도의 작은 아파트, 그것도 월세로 이사를 가는 처지가 되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런데 의외로 너무나 담담하셔서 제가 참 놀랐습니다.
오히려 그런 시련으로 오랜 시간 하나님을 외면했던 가족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뭉치게 되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에 선포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삿짐을 정리하다보니 그동안 200평이나 되는 집에서 정말 못 가져 본 것 없이 다 가지며 살았던 당신의 삶이 참으로 덧없다는 것을 깨달으셨다고 하시면서 이제는 왜 솔로몬이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헛되다고 했는지를 가슴으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저를 더 걱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입으시던 옷과 그릇 등을 싸서 보내셨노라고 하시면서 건강 조심하라고 신신 당부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경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꼭 붙들고 찬양하시는 그 장로님의 음성 속에서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전혀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은 이 풍랑 같은 세상 속에서 나를 꼭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늘 감지하며 사시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풍랑 속에 있는 사람들이라 해도 조난을 당한 사람과 구조대원은 그 마음가짐이 틀립니다. 조난을 당한 사람은 풍랑에 휩쓸리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그러나 구조대원은 그 속에서도 당당하고 멋지게 풍랑을 헤치며 사람들을 구조해 냅니다. 뭐가 틀린 것이죠? 구조대원의 허리에는 헬리콥터와 연결된 튼실한 밧줄이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허리에는 그렇게 하나님의 손이 감겨 있습니다. 풍랑을 두려워 마세요.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 하십시오.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주님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풍랑을 없애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게 해 달라고, 순종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밝히 드러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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