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를 의지하여
(김성수 목사)
(창 48:1-7,17-20) “1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요셉은 아버지의 병환 소식을 들었다. 요셉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아버지를 뵈러 갔다. 2 야곱 곧 이스라엘은 자기의 아들 요셉이 왔다는 말을 듣고서, 기력을 다하여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3 야곱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1)전능하신 하나님이 가나안 땅 루스에서 나에게 나타나셔서, 거기에서 나에게 복을 허락하시면서, (히, '엘 샤다이') 4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에게 수많은 자손을 주고, 그 수가 불어나게 하겠다. 내가 너에게서 여러 백성이 나오게 하고, 이 땅을 너의 자손에게 주어서,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겠다' 하셨다. 5 내가 너를 보려고 여기 이집트로 오기 전에 네가 이집트 땅에서 낳은 두 아이는, 내가 낳은 아들로 삼고 싶다. 르우벤과 시므온이 나의 아들이듯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나의 아들이다. 6 이 두 아이 다음에 낳은 자식들은 너의 아들이다. 이 두 아이는 형들과 함께 유산을 상속받게 할 것이다. 7 내가 밧단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슬프게도, 너의 어머니 라헬이 가나안 땅에 다 와서, 조금만 더 가면 에브랏에 이를 것인데, 그만 길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너의 어머니를 에브랏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옆에 묻었다." 17 요셉은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은 것을 보고서, 못마땅하게 여겼다. 요셉은 아버지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려고, 아버지의 오른손을 잡고 말하였다. 18 "아닙니다, 아버지! 이 아이가 맏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오른손을 큰 아이의 머리에 얹으셔야 합니다." 19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거절하면서 대답하였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므낫세가 한 겨레를 이루고 크게 되겠지만, 그 아우가 형보다 더 크게 되고, 아우의 자손에게서 여러 겨레가 갈라져 나올 것이다." 20 그 날, 야곱은 이렇게 그들을 축복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너희의 이름으로 축복할 것이니 '하나님이 너를 에브라임과 같고 므낫세와 같게 하시기를 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야곱은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다.”
우스갯소리일거라 생각됩니다만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읽었던 내용입니다. 영국 국교회의 어떤 주교가 예배당 안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던지 하나님께서 직접 그 주교에게 나타나 ‘내가 네 곁에 있느니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네 기도를 들었노라’하고 말씀을 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 주교가 깜짝 놀라서 눈을 떠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또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니까, 그러니 이제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네 기도를 들었노라’하고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그 때 주교가 조그만 소리로 물었답니다. ‘정말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내가 하나님이다’ 다시 주교가 물었습니다. ‘하나님, 정말 살아계신 거예요?’ ‘그렇다니까, 내가 이렇게 살아서 네 곁에 있지 않니?’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교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신단 말이에요? 하고는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었답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교회에 프로젝터가 필요해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를 했더니 생판 처음 보는 어떤 분이 지나가다가 헌금을 하고 가셨는데 딱 그 프로젝터 값을 헌금을 하고 가셔서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보다’하고 놀라셨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정말 믿고 있나요? 성경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는 정말 우리 안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체감하며 살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도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이 확인이 되면 심장마비 걸려 죽는 거 아니에요? 정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가 이렇게 맥없이 살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존재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백성들의 삶 속에 끊임없이 사건과 상황과 시험과 고난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과 상황들에 개입을 하심으로 성도에게 하나님의 존재인식을 선물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 모든 것들을 겪어내면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간섭과 그 분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고 그 앞에 완전히 항복하여 순종하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이 그러한 인생의 모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인생은 하나님의 존재 인식과 인정의 과정인 셈입니다.
이제 드디어 야곱이 죽습니다. 그 파란만장한 147년의 인생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가 애굽에 들어와서 바로 앞에 섰을 때 그는 그의 인생을 나그네 인생길, 험악한 삶으로 소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야곱이 임종을 앞두고 아들 요셉에게 ‘자신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형에게 쫓겨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던 중 겪었던 루스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해 줍니다. 험악한 삶과 복 받은 자, 별로 안 어울리는 조합이지요? 그럼에도 이렇게 야곱이 병들어 죽게 된 자신을 찾아온 요셉에게 마치 유언처럼 하나님의 복을 이야기한 것은 자신의 인생은 비록 험악함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자신이야 말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며, 자신에게 임한 그 복이 요셉과 그 자녀들에게도 흘러가게 되기를 소원하며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야곱은 결국 진정한 복의 정체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복이란, 자신의 야심과 욕망과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꺾이는 험악함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복이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험악한 자신의 인생을 ‘복’이라는 단어로 결론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단순히 저의 추론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가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는데 침상에서 축복을 하고 경배를 했다고 하지요? 야곱은 열로 하여 침상에서 일어설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히브리서 기자는 조금 다르게 묘사를 합니다.
(히 11:21)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요셉이 아들들을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팡이라는 단어 앞에 ‘그’라는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지팡이는 우리가 앞에서 본 어떤 특별한 지팡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지팡이란 어떤 지팡이를 말합니까?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에게 환도 뼈를 가격당한 후 평생을 짚고 다녔던 바로 그 지팡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야곱이 지팡이를 의지하여 아들들을 축복한 후 그 지팡이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을까요? 축복과 지팡이와 예배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이기에 성경의 기자가 굳이 지팡이와 축복과 경배를 하나로 묶어 제시를 하는 것입니까?
야곱이 지팡이를 의지하여 축복을 하고 지팡이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야곱이, 진정한 복은 자기의 두 다리로 펄펄 뛰며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려 애쓰던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환도 뼈를 가격 당한 후, 다른 말로 세상의 힘을 가격 당한 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한 발 한 발 걸었던 그 삶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자녀들을 축복하는데 굳이 지팡이를 의지하여 축복을 했고, 그 지팡이를 꼭 붙들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감사하다고. 야곱에게 있어서는 바로 그 지팡이가 복이었으며, 그 지팡이 때문에 자신의 꿈과 야망이 아닌, 다른 말로 ‘나’라는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이렇게 하나님이라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살 수 있는 자로 만들어 주신 것 감사합니다.’그게 야곱의 경배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굳이 야곱의 경배에 ‘그 지팡이’를 끼워 넣은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소개하는 그 대목에서 ‘믿음은 지팡이를 의지하는 것’임을 고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복은 우리의 뜻대로,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으로, 우리의 소원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만이 온전하며, 거기에만 실수가 없고, 거기에만 흠이 없으며, 거기에만 사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게 진짜 복인 것입니다. 우리의 뜻과 야망과 소원에는 너무 많은 사심이 들어 있고, 너무 많은 흠과 어둠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뜻과 소원이 모두 이루어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러티브를 잘 살펴보면 본문이 계속해서, 하나님 백성들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 가야 한다는 그 이야기를 주제로 내용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후반부를 보면 야곱이 굳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머리에 손을 어긋맞겨 얹습니다. 장자인 므낫세의 머리에 좌수를 얹고 차자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우수를 얹은 것입니다. 마치 야곱의 아비 이삭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장자인 에서의 머리에 우수를 얹으려 했다가 혼쭐이 난 것을 기억하고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건 에브라임이 므낫세보다 뭔가가 특출하게 잘 났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지금 성경의 독자인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들이 기대하거나 소원하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초지일관, 일관성 있게 장자들을 유기시켜 버립니다. 가인을 유기시키고 아벨을 택하고, 이스마엘을 유기시키고 이삭을 택하는가하면, 장자 에서를 유기시키고 차자 야곱에게 축복을 흘려보냅니다. 다윗의 형들을 제치고 가장 보잘것없었던 다윗을 택하시는가 하면 솔로몬의 형들을 유기시키고 솔로몬을 택합니다. 형 아론이 있음에도 동생 모세를 택하고, 르우벤을 제치고 요셉에게 장자권을 줍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기대에 대한 어긋남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로 오셔서 진정한 복의 근원 역할을 하실 분이, 세상에 그 많은 군왕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짐승의 구유에 목수의 아들로 오셔서 메시아의 역할을 수행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려 죽어버리셨습니다. 어긋남의 절정입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과 인간 세상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과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당연함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인간들이 세상 적 관점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들을 기각시키시고 기대치 않았던 것들을 선택하시는 것, 장자들을 유기시키고 차자들을 선택하는 그러한 사건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와 이 세상의 삶의 원리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 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장자인 에서가 축복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요셉이 자신의 장자인 므낫세가 축복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뒤집어엎으셨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에서와 므낫세가 뭔가 흠이 있고 야곱이나 에브라임이 뭐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냥 힘의 원리에 의해 판단되어지는 가치가 하나님 나라에서도 그대로 통용되지 않는 다는 것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하나님의 선택이 무조건 옳다는 것을 우리에게 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메시지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한 차자 선택의 이유가 오늘 본문에 명확하게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창 48:19) “19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이유가 뭡니까? 작은 자가 큰 자이기 때문이랍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 평가의 기준입니다. 작은 자가 큰 자가 된다는 이 말씀을 우리가 전에 신약을 공부하면서도 본 적이 있지요?
(롬 9:11-13)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여기에 보시면 작은 자인 야곱이 큰 자인 에서를 제치고 복을 받은 이유가 나오는데 그렇게 야곱이 복을 받은 이유는 야곱이 뭐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야곱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야곱이나 에브라임의 선택을 통하여 야곱과 에브라임의 탁월함을 강조하시려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은 에브라임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러한 에피소드가 함의하고 있는 정말 중요한 메시지는 작은 자, 즉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의 계시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야곱은 자신이 승리하고, 힘을 얻고, 이기는 것이 큰 자가 되는 것인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 권을 도득하기도 하고, 단풍나무 신풍나무를 사용하여 자기의 소유를 늘리려 획책하기도 하고, 외삼촌에게 재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 곁을 떠나기도 하고, 베델로 올라가는 길의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가족들의 우상을 전부 묻어버리기 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우상의 힘을 동시에 의지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그를 계속해서 두들겨 패십니다. 야곱은 당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가만 놔두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그렇게 자신의 태어남에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험악하게 경험하고 난 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이 세상의 힘을 얻어내어 행복에 이르려 하는 자들이 복 받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작은 자,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사실을 그가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작은 자로 태어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큰 자의 머리에 얹어야 할 우수를 얹은 것입니다. 절대 에브라임이 므낫세보다 잘난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독자들인 교회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가르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야곱이 믿음의 후손인 요셉과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남겨준 가장 큰 축복의 유산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루스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을 이야기 한 후 요셉 앞에서 작은 자를 축복하는 것으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똑같은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마 23:11-12)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바로 이 원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는 이렇게 작은 자, 섬기는 자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하늘의 큰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하늘의 삶의 원리로 이 땅을 살다가 가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짐승의 구유로 오셔서 가난하고 못 배우고 못 생긴 모습으로 사시다가 온갖 수난을 다 겪으시고 결국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까지 모두 빼앗기는 삶을 살다가 가셨습니다. 그 분은 그렇게 평생을 종의 모습으로 살아내셨습니다. 그러한 섬기는 자, 종으로 사는 자들에 의해 생명이 잉태되고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천국입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종 됨으로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났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섬김의 삶, 종 된 삶을 통해 ‘나’이외의 다른 이웃들이 행복해 지고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에 거기에 대한 아주 중요한 실례가 나옵니다.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자신의 아들들로 삼겠다고 하지요? 노인네가 갑자기 자식 욕심이 생긴 것입니까? 아닙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을 삼아 열 두 지파에 편입을 시키겠다고 하는 것은,(열 두 지파는 하나님 백성들을 상징) 하나님의 백성은 무죄한 자의 죽음에 의해, 마치 감자나 고구마가 줄기에 주렁주렁 달려올라 오는 것처럼 그렇게 탄생이 되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아들들이 열 두 지파에 편입이 되는 것입니다.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선 요셉이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두 아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요셉 때문에 두 아들이 열 두 지파의 아버지들로 편입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삶은 섬기는 삶이요, 종 된 삶이요, 낮아지는 삶이요, 당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의 삶 때문에 다른 이들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분을 좇았던 제자들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마 20:20-28)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 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 이니라“
예수님은 목숨을 바쳐 원수들을 섬기러 오셨는데 제자들은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큰 자, 높은 자가 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 날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과 이 우주의 역사를 통하여 바로 그 것을 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의 힘으로 높아지려 하는 그 아담적 사고를 격파하고 불식해 버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게 바로 아담의 모습이었고, 야곱의 모습이었고, 열 두 지파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으며, 열두 사도로 상징되는 우리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높아짐에 대한 열망이 깨지는 과정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 나라에서의 높은 자는 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높으신 예수님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우리를 섬기다가 가신 것을 보세요. 우리도 그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높은 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선택으로 높은 자가 되어 있으므로 섬기는 자, 작은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큰 자입니다. 이 세상의 힘을 좇아,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그러한 삶을 추구하다가 막상 죽음이라는 것이 눈앞에 닥쳤을 때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사람 참 많이 보았습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이 가진 힘은 그야말로 쓸모없는 배설물일 뿐입니다. 그게 세상의 큰 자, 하늘의 작은 자들의 말로인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고등법원 판사로, 사회적으로 대단히 성공을 한 이반 일리치는 자만심과 허영이 주는 기쁨으로 살다가 어느 날 죽을병에 걸립니다. 그는 죽음에 임박해서 자신이 겉으로는 품위가 있었지만 속으로는 늘 황폐한 삶을 살았음을 인식합니다. 그는 자신의 성장 과정과, 교육, 일 등을 돌아보며 자신이 다른 사람들 눈에 중요해 보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자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자신의 이익과 감수성을 희생해 왔는데 그들은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사랑한 것은 그의 지위와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존재 자체에 관심을 갖고 그를 사랑하고 동정해 준 사람은 하나도 없었음을 그가 마지막 순간에 자각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판사였기 때문에, 부유한 아버지이자 가장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관심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반 일리치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죽을병에 걸려 오랜 고통 끝에 병든 어린 아이처럼 누군가에게 진정이 담긴 동정과 걱정과 사랑을 받고 싶은 상태에서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판사도, 부자도 아닌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허연 턱수염을 가진 노인에 불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돌아서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양반집 개가 죽으면 온 마을 사람들이 문상을 오지만 정작 그 양반이 죽으면 아무도 문상을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양반집 개가 죽었을 때에는 양반이 시퍼렇게 살아 있으므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문상을 오지만 정작 그 양반이 죽으면 아무도 그 양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반 일리치나 그 속담 속의 양반 모두 살아생전에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긴 받는데 그 사랑과 존경의 대상은 그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힘과 권력이었던 것입니다.
이반 일리치가 죽고 난 후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기억했을까요? 하루? 이틀? 사람들은 망자를 묻고 오는 그 길에 그 사람을 잊습니다. 그들 또한 살아있는 다른 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삶을 바삐 살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잠시도 그리워해 주지 않을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멋진 평가를 얻어내기 위해 인간들은 오늘도 달리고 내일도 달립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황망히 닥친 죽음과 함께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버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렇게 타락한 모든 인간들이 자기 이외의 다른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부러움을 사고, 인기를 끌고, 자랑을 하는 삶만을 추구하다보니 이 세상은 부하고 강하고 잘나고 높은 자들의 세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심지어 ‘부자 되라’는 말이 온 국민이 주고받는 덕담이요 인사말이 될 정도입니다. 그러한 성공주의와 능력주의 하에서 가난한 부모는 자식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자신의 무능과 악습을 반성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에게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기 위해 사기와 권모술수와 도둑질까지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자식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부자부모, 잘난부모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철학자 루소는 부란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 관련이 없다고 했습니다. 부라는 것은 인간이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부에 대한 정의입니다. 따라서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에 따라 상대적으로 달라지는 것이라는 거죠. 인간이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애써 가지려 할 때마다 그가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그는 가난해 진다는 것이고 인간이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그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 철학자 루소도 부를 바라보는 관점이 이렇게 깔끔합니다. 하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세상 힘에 대한 관점이 불신자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성도의 복이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진짜 복 앞에서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합의해 놓은 가짜 복들이 다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복, 영생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시 133:3)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죽음 앞에서 무력한 복은 복이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그 죽음을 딛고 일어서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이 진짜 복인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을 보세요.
(창 48:21-22) “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 이니라"
야곱이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죽으나’ 그러나 야곱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죽으면서 아직 자신도 한 평 가져보지 못한 가나안 땅을 자식들에게 분배해 주는 여유를 보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므로 자신이 죽더라도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에게 약속된 하늘의 가나안,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반드시 주어질 것을 믿고 간다면 우리는 죽음 앞에서 그렇게 벌벌 떨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반 일리치처럼 이 세상 사람들에게 동정과 위로를 받고, 그들에게 훌륭한 사람, 대단한 사람으로 남겨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평안 속에서 죽음을 맞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 사람들은 나를 비웃고, 멸시하고, 조롱할 지라도 우리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칭찬하시며, 나를 위해 영원한 처소를 준비해 놓고 계신다고 하니 난 그것만을 굳게 믿고 이 세상을 떠난다.’하고 야곱과 같은 멋진 종말을 맞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올인 하는 줄 아세요? 그게 바로 인간의 결핍에서 오는 열등감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결핍 속에서 태어납니다. 하나님이 떠나간 자리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결핍은 곧 열등감으로 나타납니다. 해서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열등감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은 부나, 지위나, 인기 등으로 가면을 쓰는 것입니다.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그러한 시도와 추구는 곧 오만으로 바뀌게 됩니다. 괴로운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는 자아를 감추기 위해 남들로 하여금 ‘당신은 나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느낌을 심어 주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오만입니다. 그렇게 열등감에 시달리며 오만으로 가면을 쓴 인간들은 낮은 지위가 곧 무가치한 존재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높은 지위가 곧 훌륭한 존재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내적인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감정적 토대를 스스로 박탈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그대로 다음 세대에게 물려줍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충만해진 성도들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이 세상 죄인들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빠져 나간 자리를 오만과 자랑과 인기로 채우려 애를 쓰며 살지만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견지하고 추구하며 열심히 우리의 됨됨이를 챙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이 져주고, 더 많이 용서해 주고, 더 많이 비워주고, 더 많이 섬겨주고, 더 많이 손해 보며 정말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인으로 보여주는 것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안 되지요? 그 일을 여러분의 힘으로 할 생각 마세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실망하고, 더 많이 좌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살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은혜를 의지하세요. 그 때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가 우리 밖으로 격발되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역설적으로 많이 실수하시라고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많이 실수 하세요. 하지만 많이 실수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선하게 살아보려는 노력이 반드시 전제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등 되려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백성다움에서 일등이 되는 여러분이 되셔야 합니다.
몇 년 전에 전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일찍 남편을 사별한 어머니가 독자인 아들을 키우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버지 없는 아들을 키우면서 많은 설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 아들만큼은 부자로, 힘 있는 자로,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유명한 자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항상 무엇에든지 일등을 해야 한다고 다그쳤고, 아들은 그런 어머니의 코치에 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가며 모든 것에서 일등을 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 아들은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을 했고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과 하버드를 비롯한 미국 내 유수의 대학에서 입학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합격 통지서를 받은 그날 아들의 여자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어머니와 아들이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공부를 다 마친 후에 좀 더 환경이 나은 여자를 만나 더 성공하기를 원했고 아들은 그 여자 친구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말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분을 이기지 못한 아들은 야구 방망이로 어머니를 죽을 때까지 때려서 살해를 했습니다. 그 아들이 기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난 어머니로부터 늘 일 등을 해야 할 것을 강요받고 살았다. 그리고 나의 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쟁취해 내야 한다고 배웠다. 난 무조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엄마가 나의 꿈을 성취하는 데에 방해물로 서게 되었다. 나는 그 장애물이 비록 나의 어머니일지라도 내 앞에서 치워 버려야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앞길과 나의 뜻과 나의 꿈을 막는 어머니를 죽여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러분, 이게 사람입니까? 이건 사람이 아니라 아무런 감정도, 사랑도 없는 일 등하는 기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자녀들에게 일 등 신드롬을 유전으로 물려주시겠어요? 왜 요즘 젊은이들이 부모들이 늙으면 부모를 종처럼 부려먹는지, 아니면 찾아오지도 않고 무관심한지 아세요? 그 부모가 더 이상 자신의 유익에 불필요해졌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교육이, 세상이, 아니 부모가 그 자녀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그렇게 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네 유익에 손해가 되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치워 버리라고. 그 자녀들 앞에서 우리가 섬기는 모습, 작은 자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여준 적이 있나요? 부모들끼리도 서로 안지겠다고 아이들 앞에서 머리가 터지게 싸우는 것을 수시로 보여주고,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는 자식들에게 거짓말도 불사하게 하고, 밥이라고는 매일 성의 없는 인스턴트식품 하나 덜렁 데워서 허겁지겁 먹게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일등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보다 앞선 자가 되라, 가난은 무능력이고 범죄다, 무조건 이겨라, 신앙생활 같은 건 나중에 해도 된다, 학생은 공부만 잘하면 돼’하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가난해도 어머니가 직접 된장국에 나물 무침, 달걀찜 등으로 차려준 밥상을 받고 자란 아이와 성의 없는 엄마가 던져준 인스턴트식품으로 먹거리를 해결해 온 아이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갖게 됩니다. 아이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자라는 게 아닙니다. 아이는 엄마의 희생과 헌신과 섬김과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과 관심을 먹고 자란 아이와 어머니의 무관심과 귀찮음과 이기심을 먹고 자란 아이가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그런 것에는 관심도 두지 않으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너만 편하면 된다는 식의 교육으로 일관된 부모의 모습 속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여러분들이 나이 들고, 은퇴해서 그 아이들한테 불필요한 존재가 될 때 그 아이들의 장애물이 될 것이고, 그 아이들은 그 장애물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차 없이 치워 버릴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아이들의 불효나 무례함은 이 세상의 힘과 가치만을 좇는 우리 모두의 합작품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지식, 명예, 재산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 쓸모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움입니다. 그걸 가르치세요. 아이들 너무 달달 볶아서 일 등하는 기계 만들지 마세요. 방학이면 좀 놀게 놔두시고, 아이들과 함께 시간도 좀 보내 주시면서 아이들에게 사랑을 가르치세요. ‘좀 못살아도 된다, 좀 못 배워도 돼, 너무 훌륭한 사람 안 되도 된다. 그러나 아빠는 네가 이웃을 아프게 하고,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아닌 이웃을 행복하게 해주고, 그들을 사랑하며, 너 때문에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하고 하늘의 자녀로서의 교육을 시키세요. 말씀을 가까이 하게 하시고, 기도에 힘쓰게 하세요. 그까짓 공부 좀 못하면 어때요? 사람이 되어야지요. 그것도 저것도 아니면, 여러분이 늙고 병들어도 아이들이 여러분이 갖고 있는 재산 때문에라도 효도를 할 수 있게끔 부자가 되시던가요. 그러나 후자는 참 불쌍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자기 존재로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이 존경과 숭배를 받는 것에 꼽사리껴서 사는 인생, 그런 인생사시겠습니까?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같은 그런 종말을 맞고 싶으세요?
여러분, 우리가 먼저 이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십시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진짜 복된 삶임을 유산으로 물려줍시다. 야곱처럼 ‘내가 지금 죽으나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이루어진다’라는 당당함으로 사망을 이기는 삶을 멋지게 사십시다. 저는 매일 새벽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기도를 할 때 제발 우리 아이들 일 등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자기들을 너무 과신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요.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자꾸 실망하여 하나님만 의지하는 아이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 합니다. 그게 자녀를 향한 부모의 진정한 축복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의 힘을 자랑하며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를 의지하여 평생을 사는 그런 존귀한 자들로 키워 내십시오. 오늘부터 우리의 자녀를 그렇게 축복 하십시오.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면서 그저 예배당 출입만 하다가 정작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될 때 ‘어, 하나님이 진짜 살아있네’하면서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 민감한 자녀들로 키워 내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심장마비 걸려 영원한 불 못으로 떨어지는 처참함에서 아이들을 건져 내십시오. 여러분도 마찬가지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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