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선약수(上善若水), 신자는 죽어서 말한다
(김성수 목사)
(창 49:8-12) “8 1)유다야, 너의 형제들이 너를 찬양할 것이다. 너는 원수의 멱살을 잡을 것이다. 너의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유다라는 이름은 '찬양'에서 유래함) 9 유다야, 너는 사자 새끼 같을 것이다. 나의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어 먹고, 굴로 되돌아갈 것이다. 엎드리고 웅크리는 모양이 수사자 같기도 하고, 암사자 같기도 하니, 누가 감히 범할 수 있으랴! 10 임금의 지휘봉이 유다를 떠나지 않고, 통치자의 지휘봉이 자손만대에까지 이를 것이다. 2)권능으로 그 자리에 앉을 분이 오시면, 만민이 그에게 순종할 것이다. [또는 '실로가 오시기까지', '그가 실로에 오시기까지', '그가 통치 지팡이를 쥔 자에게 오기까지' (시리아어역)] 11 그는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가장 좋은 포도나무 가지에 맬 것이다. 그는 옷을 포도주에다 빨며, 그 겉옷은 포도의 붉은 즙으로 빨 것이다. 12 그의 눈은 포도주 빛보다 진하고, 그의 이는 우유 빛보다 흴 것이다.”
제가 청년부 때 섬겼던 섬김의 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를 방문한 팽동국 교수가 대학원에 다닐 때였습니다. 섬김의 집에서 봉사를 하는 모든 교사들은 전부 우리 교회 청년부 지체들이었습니다. 교사들 모두가 힘들고 바쁘고 어렵게 공부를 하면서도 매일같이 난곡의 산동네로 모여 아이들 밥도 해주고 공부도 가르쳐주고 함께 놀아주기도 하면서 힘들지만 즐겁게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재래식 화장실에 뜨거운 물도 없고 변변한 난방장치나 냉방장치도 없었던 그 곳에서 우리는 돈이 모자라 양파와 당근밖에 들어있지 않은 엉성한 카레를 즐겨 해 먹으면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역이 끝나면 밤마다 저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앉아 촛불을 켜 놓고 부흥회를 하곤 했습니다. 최근에 경기도 안 좋고 해서 많이 힘들어졌지요. 지금은 우리 팽 교수 친구인 문식 형제가 전임으로 돌보고 있는데 저에게는 지금도 너무나 소중한 곳입니다.
그 곳에서 함께 사역하던 친구 중에 이영익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당시 고려대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그야말로 신실함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주던 그런 친구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친구를 ‘이 바울’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청년부에서 연극을 한 편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 연극에서 그 친구가 사도 바울 역할을 했었거든요. 그 친구는 마음이 참 따뜻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맛난 것을 더 먹여 주기 위해 새벽마다 신문이며 잡지 같은 것을 배달을 해서 그 돈으로 섬김의 집을 섬기곤 했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친구가 새벽에 배달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하나님 품으로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 섬김의 집 아이들이 ‘선생님 가지 마세요’를 외치면서 울부짖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저는 그러한 일을 겪으면서 아주 극심한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그 때는 어리기도 했었지만 혈기도 왕성하여 ‘뭐, 이런 하나님이 있냐?’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앉기만 하면 골똘히 생각에 잠기곤 했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익이를 사랑하신다. 영익이도 하나님을 사랑했다. 그런데 사랑한다던 하나님이 그가 죽는 걸 막아주지 않으셨다. 그걸 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왜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녀의 위험에 침묵하고 계셨을까? 그런 하나님을 계속 믿어야 하나?’ 뭐 이런 생각들이었습니다. 그 때만해도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의 가치관과 인본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그러한 하나님의 처사가 용납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저는 비로소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과 사랑하심의 진의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가시적 위험에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세상에 내어주신 후에 당신의 능력으로 그들의 마음과 믿음을 지키시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이 세상의 위험이나 상함으로부터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모든 것을 수용하고 인정하고 감내해 내는 그 신앙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우리 청년부 예배 때 설교 본문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는 그 본문 바로 뒤에 세례 요한이 세상의 권세를 상징하는 헤롯왕에게 잡혀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는 다시 파송된 제자들이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림이 그 뒤에 붙어 있습니다. 그건 여러분이 잘 아시는 히브리 사람들의 대표적인 문학기법인 샌드위치 구조입니다. 제자들의 파송, 세례요한의 죽음, 제자들의 귀환. 샌드위치 구조는 양쪽의 빵과 그 안에 들어있는 샌드위치 속이 서로의 내용을 설명하고 강화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지요? 따라서 그 전체 이야기는 이 세상에 파송된 제자들의 삶이 무엇인가를 규명하여 설명해 주는 그런 이야기인 것입니다. 간단히 요약하여 말씀을 드리자면 세상으로 파송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권세에 잡혀서 죽는 자들로 파송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귀신을 쫓는 권세는 주시지만 세상의 힘을 빼앗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지팡이 하나만 달랑 주시고는 양식도 못 가져가게 하시고, 돈도 못 가져가게 하시고, 옷도 한 벌만 가져가라 하십니다. 그건 우리가 야곱의 일생을 공부하면서 배운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만을 의지하여 이 세상 권세 잡은 자, 마귀와 귀신의 세력이 하나님 백성들의 믿음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는 권세가 주어짐과 함께 세상의 힘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제자의 구체적인 삶이 세례요한의 죽음으로 제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의 잡힘과 죽음은 성도 전체의 삶을 작은 그림으로 요약하여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권세에게 잡혀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당당히 보여주고 떠나는 바로 그 모습이 성도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도 성도를 상징하는 두 증인이 바벨론 성 길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부활의 몸으로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구속사의 완성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세상에게 잡히고 결국 죽는 사건은 성도 모두에게, 제자들 모두에게 공히 일어나게 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잡힘’이라는 사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짚어보고 오늘 본문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막 1:14)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여기에 보시면 요한이 세상에게 잡혔다는 어구가 나오지요? 그 ‘잡히다’라는 단어가 헬라어 ‘파라디도미’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렇게 잡혀서 곧 세상에 의해 죽습니다. 그 단어가 정확하게 로마서 4장에서 바울에 의해 사용이 됩니다.
(롬 4:25) “25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여기에서 ‘내어줌’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바로 ‘파라디도미’입니다. 여기서는 그 단어가 예수님에게 쓰이고 있지요? 그러니까 제자들, 즉 성도들은 하나님에 의해 예수가 세상에 내어준 바 된 것처럼 이 세상에 내어준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잡히다’ ‘파라디도미’라는 단어의 정확한 해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이 세상에 내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어주신 후에 당신의 권세와 능력으로 그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을 부으셔서 그 세상의 힘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지 않는 성품과 인격과 됨됨이를 성도의 삶에서 확인 시키시고 세상에게 증명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지키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했던 스데반의 예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보세요. 하나님은 스데반에게 날아오는 ‘돌’을 막아주신 것이 아니라 그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믿음으로 ‘용서와 사랑과 인내와 온유와 절제’를 잃지 않는 스데반으로 지켜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으로 성도를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 속에서 성도의 마음을 믿음으로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나타나는 현상만을 보고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움을 지켜보고만 계시는가? 왜 하나님은 그렇게 무력한가?’하는 원망을 쏟아놓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 그 마음을 지켜주고 계신데 우리는 우리의 소원과 기대와 만족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섣불리 하나님을 무능한 존재로 폄훼(貶毁)시켜 버리기 일쑤입니다. 우리 성도는 자기 자신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창조된 자가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원래 창조 시에 주어진, 피조물이라는 자기의 자리로 내려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자로 지어지고 완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요리 문답 소요리 문답 1번 질문,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영원히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을 영원히 즐기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의 야망이나 우리의 소원이나 우리의 비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성도의 인생의 목적을 신명기가 아주 잘 요약하여 표현하고 있지요?
(신 8:2-3)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광야 인생 동안에 우리에게 가르치려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죄인들은 절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로 돌아설 수 없다는 것과(2절) 아울러,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만 행복할 수 있는 것이지 이 세상의 힘이나 가치 등의, 이 세상 떡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님을(3절) 가르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이 광야 인생길에서 자신의 뜻과 소원을 하나님에게 관철시켜 행복을 누리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확인 도장을 찍어 드리겠습니다.
(출 12:11)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 이니라”
어떠세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파송하실 때와 정확하게 같은 모습이지요? 하나님은 열두 사도와 동일한 상징으로 등장하는 열두 지파에게 손에 지팡이를 잡고 신을 신고, 띠를 띠고 급히 먹은 후에 어디로 떠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디로? 광야로. 그 광야에 가서 뭐 하라는 것입니까? 이 세상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로 그들을 지배하려 하는 마귀의 권세를 조롱하고 격파하라고 보내시는 것입니다. ‘마귀의 세력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부인하게 하고, 이 세상의 힘과 자신의 지혜와 꾀를 사용하여 자신의 배와 자신의 야망과 자신의 소원과 자신의 기쁨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라고 끊임없이 유혹할 테지만, 내가 너희들에게는 믿음이라는 것을 줄 것이다. 그러니 그 믿음으로 그들의 유혹과 시험을 격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자로 성숙되고 양육되고 완성되라’고 광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성도의 모습은 세상에게 당하는 모습으로 자주 드러나게 되지만 그 가운데에서 성도는 믿음으로 그 상황과 사건을 딛고 일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세상에게 당하는 모습은 약함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놓지 않고 소망의 나라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그 믿음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강함을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수시로 약할 때 강함이 되신다는 진리를 반복하여 강조했던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강함으로 자신을 증명해 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해주고, 용서해 주고, 안아주고, 섬겨주고, 사랑해 주고 하는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강함을 증명해 내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수처럼, 세례요한처럼, 하나님의 사도들처럼 우리를 세상에게 내어주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주어진 믿음의 위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다른 말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증명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반복하여 자기를 부인하라 하는 것이고, 수시로 ‘너희의 배만을 위해 살던 너희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 이제 새 사람으로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라’고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롬 14:7-9)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 이로라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여기 보시면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는지가 명확하게 나오지요? 뭡니까? 9절 ‘이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입니까? 곧 하나님이 우리의 삶과 죽음의 주관자가 되셔서 죽어도 주를 위해 살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사는 자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심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어줌의 삶에서 많은 생명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삶이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고전 10:31)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를 이러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한 알의 밀알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요 12:24-2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런데 그렇게 열매로 맺혀진 우리 성도들에게도 똑같은 명령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눅 3:8-9)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그렇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열매는 어떻게 맺혀집니까?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어야 열매가 맺혀집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던 그 이기적인 자아에서 자신의 욕심과 야망과 비전과 목표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내시고야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내가 왔다’는 것입니다.
(요 14:12)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하는 일’은 십자가를 지고 세상에게 당하여 죽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일을 너희도 하게 될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한 알의 밀알로 죽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을 자랑하며 자신의 인기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돕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성도는 죽음으로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강력을 증명해 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분을 맞춰주시지 않는다고 불평이나 원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 내 의견을 따라주지 않느냐고, 왜 내가 편한 쪽으로 일을 진행시켜 주지 않느냐고, 왜 나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않느냐고’ 따지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제가 한 번 견뎌 보겠습니다, 이겨 보겠습니다.’하고 여러분을 바라보고, 여러분을 평가하고 있는 세상의 가치관을 조롱해 버리는 것입니다. ‘왜 젊은 나이에 스데반을 죽여요?’라든지 ‘왜 그 신실한 친구를 교통사고에서 건져주지 않으셨어요?’가 아닌 ‘하나님, 그 상황 속에서도 그들의 믿음과 성품과 됨됨이를 지켜주신 그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깊이 신뢰하며 찬양합니다.’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 성도라는 사람들마저도 이 땅에서 오래 사는 것이, 그리고 망하지 않고 번영하는 것이, 그리고 자식들 출세하는 것이 참된 가치요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그 분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그 분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는 하나님과 연합된 자로의 삶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가치이며, 그게 진짜 힘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땅에 쏟아지고 있는 잘못된 가르침을 잘 분별하고 그것에 분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오랜만에 만난 우리 동지 팽동국 형제와 과거 우리가 청년부 때 함께 공유했던 여러 가지 은혜롭고 재미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의 그리움이 동일하게 어떤 시점에서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은 다름 아닌 1993년 남서울 교회 청년부 산상 수련회 때 일어난 엄청난 revival의 경험이었습니다. 그 때 수백 명의 청년들이 그 산 위에서 하나님의 뜨거운 은혜를 모두 체험하고 거기에서 변화된 사람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거기에 있던 청년들 중에 많은 목사들이 나오고, 선교사들이 나오고, 사모들이 나오고, 사역자들이 나왔습니다. 저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그 때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그 때와 같은 부흥의 경험을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다시 경험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그런 기도에 대한 응답인 것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화가 한 통 걸려 왔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John Piper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의 신학과 교리를 절대적으로 지지를 한다는 그런 전화였습니다. 내용인즉슨, 그 분과 그분의 선교 단체가 Korean community 에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 대형 영적 대각 성 집회를 지원해 줄 테니 우리가 한 번 해보라는 그런 전화였습니다. 개혁주의 진영에서 지금 생존해 있는 설교자들 가운데 세계 4대 설교자 중의 한 분이 John Piper입니다. 저도 신학생 때 그 분의 책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저의 신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 많은 빚을 진 그런 분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신앙의 정서’라는 어려운 책을 집대성하여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으로 요약하여 내실 만큼 실력도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LA 구석에 있는 작은 교회의 신학과 교리에 관심을 갖고, 우리와 무슨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니까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허벅지를 꼬집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냥 이 작은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말씀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세계 94개국의 동지들에게 우리를 알려주셔서 매주 우리 교회 웹사이트를 방문하게 하시고 John Piper 라는 걸출한 설교자와 연결도 시켜주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이야기 하려는 요지는 그게 아닙니다. 저는 지금 그 분의 신학의 경향에 대해 시비를 좀 걸고 싶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John Piper 목사님의 설교나 저술에 묻어나는 주된 신학적 경향이 크리스천 헤도니즘(Hedonism)입니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을 하자면 ‘기독교 희락주의’라 번역을 할 수 있겠습니다. 크리스천 헤도니즘은 어떤 면에 있어서 성도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복음으로 인한 기쁨과 희락을 추구한다는 면으로 높은 점수를 줄 수도 있을 것처럼 보이는 그런 경향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분의 사상에는 인간의 기쁨과 희락과 만족에 대한 추구가 너무나 강조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John Piper가 그의 헤도니즘에서 추구하는 희락과 기쁨은 오늘날 현대 기독교가 추구하는 기쁨과는 많이 다른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회가 추구하는 기쁨은 자신의 행복한 삶을 위한 것입니다. 즉 희생과 자신의 목숨을 잃는 길도 거부하지 않고 순종하게 하는 능력으로서의 기쁨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위한 기쁨을 맛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때 존 파이퍼의 책을 읽다가 메모를 해 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이 이러합니다. "오늘 날 교회라는 집단은 다른 것들이 하나님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그분의 추구를 가로막았으며, 사실은 그분의 선물을 사랑하고 있으면서 그분을 기뻐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추구를 왜곡했다" 그분은 현대인들이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인해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것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한 사람입니다. 즉, 존 파이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쁨이시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기쁨이며,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을 알기를 갈망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 파이퍼는 믿음의 모든 것을 신자의 기쁨을 위한 것으로 끌어감으로써 마치 기쁨이 신자에게 필연적이며 당연한 것인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마치 신자에게 기쁨을 주기 위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모든 저서에 스며들어 있는 그 분의 신학의 주된 경향이 그러합니다. 거기에 심각한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존 파이퍼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영광과 기쁨을 찾기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창조된 자들인 것입니다.(사 43:7)
물론 신자에게 기쁨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기쁨이 있는 것은 당연한 열매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기쁨은 스스로가 추구하고, 만들고, 쌓고, 쟁취하고, 훈련하여 얻어내야 하는 삶의 목적으로서의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의 중심은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쁘셔서 기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우리의 영광이 되는 삶, 그것이 신자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나를 위해,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 그 자체가 죄입니다. 그 안에는 영적 기쁨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기쁘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고, 내가 기쁘기 위해 예배에 참석하며, 내가 기쁘기 위해 찬송을 하고, 내가 기쁘기 위해 헌금을 하고, 내가 기쁘기 위해 봉사를 하는 것 등등 그 모든 것들이 여전히 자아 숭배교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저급한 신앙인 것입니다.
그런데 존 파이퍼는 믿음의 목적과 이유를 성도의 기쁨에 둠으로써 결국 기뻐하기 위한 노력까지 언급을 합니다. 존 파이퍼는 성도가 스스로를 기쁘게 만들기 위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해야 한다고 성경과 기도를 기쁨을 얻는 방법과 수단으로 폄하시킵니다. 인간은 성경읽기와 기도를 통해서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쁨은 통렬한 자아에 대한 폭로와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인정, 거기에서 오는 자기 부인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엄위과 크심과 존귀와 영광의 경험,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과 내가 관계가 있는 자가 되었다는, 면목 없고 겸손한 기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존 파이퍼는 성경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고, 그 행하심에 감사하는 것에서 오는 기쁨을 누리는 것보다는 기쁨 자체를 위한 도구로 성경과 기도를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존 파이퍼의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보다 여러 면에서 시설과 환경이 뛰어난 곳이라서 소망의 대상이 되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가고 싶은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결국 존 파이퍼의 글은 하나님이 아닌 신자의 기쁨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자기 기쁨을 위한 것으로 말해버립니다. 따라서 존 파이퍼에게는 철저한 자기 부인이 없습니다. 물론 존 파이퍼도 자기 부인을 말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기쁨을 위한 자기 부인으로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기쁨을 얻기 위한 그리스도로 바라본다면 그 역시 자신을 위한 그리스도로 바라볼 뿐입니다.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마음이 가야 합니다. 그리고 기쁨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선물입니다. 신자는 기뻐하는 자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티끌임을 인정하는 자기부인의 자리로 가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망에 있는 나를 구출하시고 생명으로 옮기신 분의 의가 고마워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쁨인 것입니다.
(행 5:40-41) “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보세요. 사도들이 무엇으로 기뻐했습니까? 자신이 부인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으로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가게 되었다는 그 사실로 기뻐했습니다. 자신들은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가고 하는 것이 불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을 안 그들이 그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기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내 기쁨을 목표로 삼아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건 여전히 자아 숭배 교에서 나오지 못한 자들의 이기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아 사는 하나님의 종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9월 25일에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리는 칼빈 컨퍼런스에 존 파이퍼를 만나러 갑니다. 거기에서 컨퍼런스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게 될 텐데 저는 그 이야기보다는 바로 이러한 그의 신학 경향에 대해 토론을 좀 하고 싶습니다. 전 세계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분이니까요. 그 분과 절친한 존 맥아더의 progressive dispensationalism 이나 존 파이퍼의 progressive charismatic 같은 것은 백보 양보해서 애교로 봐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크리스천 헤도니즘은 반드시 수정이 되어야 하는 사상이요 경향인 것입니다.
성도의 본무는 ‘자기부인’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야망과 우리의 소원으로 우리의 배를 불리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아 살던 우리 옛사람은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욕심을 부인하고 세상의 힘을 부인하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오롯이 소망하며 이 세상에 던져지고 내어진 삶 속에서도 그 나라와 우리 아버지에 대한 소망만으로 행복할 수 있어야 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후손으로 하늘의 장자이신 실로, 즉 예수가 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유다에게 내려진 축복의 예언에서 참된 장자이신 예수가 오심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여호수아서에 보면 요셉이 장자 권을 이어받았다고 명기가 되어 있지요? 그런데 왜 하늘의 장자 예수가 유다의 후손으로 오시는 것일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선교 다녀와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말씀드린 대로 유다에게서 예수가 나와야 하는 개괄적인 이유만을 좀 살펴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로서 순서상으로 장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이 예표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의 후손으로 예수가 오시는 것입니다.
(창 43:8-9) “8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9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유다가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지 않으려는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베냐민을 살려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실제로 유다는 애굽에서 동생이 궁지에 몰리자 당당하게 애굽 총리 앞에서 자신이 종으로 남을 테니 동생을 보내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창 44:32-34) “32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34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 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어떻게 유다가 이런 희생과 헌신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유다는 원래 이기적이며 자아 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들들의 죽음의 책임을 며느리에게 돌리며 자기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챙겨내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며느리 다말이 약속의 후손의 탄생을 위해 자신이 창녀가 되는 희생과 헌신의 사람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며느리 다말이 창녀가 되어, 망해버려야 하는 유다의 집안에 약속의 후손이 태어나 그 집안이 축복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유다는 십자가의 원리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다수가 축복을 받는 그 하늘의 축복의 원리를 유다가 터득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의 희생과 헌신으로 많은 이들이 살아나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배운 유다가 아버지와 애굽 총리 앞에서 바로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자신의 몸을 내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원리로 메시아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 유다를 향한 예언에 등장하는 실로에 대해서도 다음 시간에 설명을 해야겠네요.
아무튼 이렇게 우리 성도는 예수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세상에게 내어줌이 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세상에게 맞아서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지키고, 성도된 성품을 다하며, 사랑으로 원수를 대하는 자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당신 백성들의 삶을 통해 또 다른 열매들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며 원리인 것입니다.
동양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고 계신 분들이라면 오늘 설교 제목을 보시고, 설교제목으로 노자의 도덕경의 한 절을 차용 해다가 쓰는 것이 정말 가당한 일인가하여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노자의 도덕경 8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노자의 도덕경 8장에 보면 상선약수(上善若水) 수선리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 고기어도(故幾於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한 선은 흐르는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기를 좋아할 뿐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극한 선은 도에 가깝다.’라는 뜻입니다. 어떠세요? 성경이 우리 성도에게 요구하는 성화의 삶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낮아지고 감추어지고 숨고 드러나지 않음으로 생명을 살리는 큰일을 하라’ 그게 예수님 말씀 아니었나요? 아닙니다. 크게 오해하셨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한자 5,000자로 이루어진, 마치 시처럼 아주 짧은 글입니다. 도덕경은 혹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의 도덕과 윤리에 관해 기록된 책이 아니라 상권(上卷)인 도경(道經)과 하권(下卷)인 덕경(德經)을 합한 이름이 도덕경(道德經)입니다. 이 도덕경은 비유와 상징의 대가인 장자에게 직접적이고 지대한 영향을 미쳐 장자의 사상의 뼈대가 된 책이기도 합니다. 이 도덕경은 영어권에서 성경 다음으로 번역본이 많은 책이며, 그만큼 많이 팔리기도 한 그런 책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의 수많은 철학도 들을 포함한 지성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도덕경의 진의에 대해 잘 모르고 얼핏 선지식을 가지고 보게 되면 신기하리만치 성경과 흡사한 내용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노자의 도덕경이 성경의 뼈대가 된 책이라고도 합니다. 그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지요. 노자의 도덕경과 성경이 비슷한 내용이 많다고 하지만 지향하는 목적지가 다릅니다.
노자의 도덕경도 겸손과 낮아짐과 자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도덕경이 그러한 덕목을 통하여 도달하려 하는 것은 세속적 성공입니다. 노자 사상의 중심은 개인적 또는 정치적인 성공을 쟁취하기 위한 무위(無爲)의 술(術)을 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근거로서 형이상학적 근원인 도(道)를 논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무위(無爲)란 인위(人爲)의 부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영위(營爲)를 부정하고 천지자연의 이치에 그대로 따른 참된 위(僞)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노자는 인간이 자신들의 지혜 또는 욕망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세상에 대위대란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므로 될 수 있는 대로 무리하지 말고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두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합니다. 그 때 인간은 개인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뭐 대단한 것 같지만 결국은 성공을 위해 조금 낮아지고 손해보고 살라는 내용입니다. 보세요. 인간의 성공과 인간의 기쁨과 행복이 주체가 되면 그 나머지는 모두 그것들을 얻어내는 방법으로 전락을 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겸손과 낮아짐과 섬김과 헌신도 결국 자신의 위신과 행복을 위한 알량한 도구가 된단 말입니다. 그게 존 파이퍼의 오류입니다. 성도는 세계관과 가치관과 신앙관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대 전환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나머지를 객체로, 방법으로, 도구로 쓰며 살던 그 삶에서 돌이켜 자신이 객체가 되고 하나님을 중심에 놓는 대 전환이 없이 우리는 성도라는 이름을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함께 읽은 노자 도덕경 8장의 ‘상선약수(上善若水) 수선리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 고기어도(故幾於道)’는 이 세상에서 성공을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가 된 것이지 우리의 됨됨이에 관한 권고와 교훈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어떤 의미로 상선약수라는 말을 설교 제목으로 쓴 것인가? 성경은 노자를 뛰어넘습니다. 저도 간혹 물에 관한 이야기를 교훈으로 삼아 여러분에게 적용의 말씀을 해 드리곤 했습니다만 제가 드린 말씀은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예를 든 것이 아닙니다. 노자의 무위자연은 높아지기 위한 한시적 낮아짐이며 제한적 비워냄이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낮아지기 위한 완전하고 영원한 낮아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위자연으로는 죄의 고착성과 영속성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거지에게 돈 몇 푼 쥐어주는 것이 거지의 고착성과 영속성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의 위신이나 기쁨이나 즐거움을 위한 낮아짐과 섬김과 희생은 구역질나는 위선일 뿐입니다. 그런데 혹자들은 그러한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 아닙니까? 결코 그런 행위로는 인간 세상의 평등이나 지상낙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인간의 불가능함만 폭로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제가 감히 노자의 사상을 뛰어넘어 한 수 위에서 그의 사상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노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인 도(道)에 순응하여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으로 그의 인생을 목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나라를 알고 진정한 행복과 풍요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연에 계시해 놓은 하나님나라의 삶의 원리를 노자보다 더 깊고 풍성하게 깨달아 알고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자가 물을 바라보면서 그 물의 낮아짐과 겸손함을 본받아 성공에 이르려 했다면 우리는 그 물의 낮아짐과 겸손과 드러나지 않음의 사역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를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노자의 말대로 물은 모든 만물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사람도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고 짐승도, 식물도, 작은 벌레도 물에 의해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물은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지도 않고, 자신이 가진 힘을 과시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정해진 길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 뿐입니다. 그런데 그 길에 생명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물이 그렇게 만물을 살리며, 생존케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물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물에게는 자기 의견이 없습니다. 물에게는 자기 계획이 없습니다. 물에게는 원대한 야망도 없습니다. 그냥 정해진 길을 따라, 내려가라 하면 내려가고 올라와라 하면 수증기가 되어 올라가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물이 어마어마한 생명의 일을 하고 있더란 것입니다. 물이 그 정해진 길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뭔가를 하려 할 때 해일이 되고 쓰나미가 되는 것이고 물이 분수를 모르고 위로 올라가려 할 때 ‘분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내 그 물은 다시 제 길로 평정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영원한 주체자 앞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그 명령에 순종하는 자로, 객체로 서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 앞에서 모두, 자신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피조물들의 필연적 삶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바로 그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경험하고, 맛보고, 훈련하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제가 말하는 상선약수와 노자가 말하는 상선약수의 차이점입니다. 어떤 게 옳은 것 같으세요?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이 땅에서 완벽하게 보여주고 가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라는 길로 열심히 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의도하신 많은 열매들이 그 죽은 나무인 십자가에서 주렁주렁 맺힌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며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이 땅에 내리 꽂아 보여주신 분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유다의 후손으로 그 분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죽으세요. 놓으십시오. 비우세요. 아브라함의 가나안 땅 점령이 막벨라 굴이라는 무덤에서 시작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지만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가질 수 있었던 가나안 땅은 무덤이었습니다. 영적 가나안, 즉 하나님 나라는 우리 옛 자아의 죽음과 무덤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죽읍시다. 상선약수, 최고의 선은 물처럼 죽는 것입니다. 거기서 생명이 탄생합니다. 성도는, 신자는 죽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죽어짐으로 많은 이웃들을 살려 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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