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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거룩한 빼앗김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12. 13.

 

 

거룩한 빼앗김

 

(김성수 목사)

 

 

(창 47:13-26)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네가 알고 있듯이, 너의 형들이 세겜 근처에서 양을 치지 않느냐? 내가 너를 너의 형들에게 좀 보내야겠다." 요셉이 대답하였다. "다녀오겠습니다." 14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너의 형들이 잘 있는지, 양들도 잘 있는지를 가서 살펴보고, 나에게 와서 소식을 전해 다오." 그의 아버지는 헤브론 골짜기에서 그를 떠나보냈다. 요셉이 세겜에 도착하였다. 15 어떤 사람이 보니, 요셉이 들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가 요셉에게 물었다. "누구를 찾느냐?" 16 요셉이 대답하였다. "형들을 찾습니다. 우리 형들이 어디에서 양을 치고 있는지, 나에게 일러 주시겠습니까?" 17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너의 형들은 여기에서 떠났다. '도단으로 가자'고 하는 말을 내가 들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뒤따라가서, 도단 근처에서 형들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 8 그런데 그의 형들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서, 그를 죽여 버리려고, 그가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음모를 꾸몄다. 19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면서 말하였다. "야, 저기 꿈꾸는 녀석이 온다. 20 자,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들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21 르우벤이 이 말을 듣고서,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건져 내려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22 피는 흘리지 말자. 여기 들판에 있는 구덩이에 그 아이를 던져 넣기만 하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말자." 르우벤은 요셉을 그들에게서 건져 내서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낼 생각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23 요셉이 형들에게로 오자, 그들은 그의 옷 곧 그가 입은 화려한 옷을 벗기고, 24 그를 들어서 구덩이에 던졌다. 그 구덩이는 비어 있고, 그 안에는 물이 없었다. 25 그들이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데, 고개를 들고 보니, 마침 이스마엘 상인 한 떼가 길르앗으로부터 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낙타에다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26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이냐?”

 

 

리차드 기어라는 신예 배우를 세계적인 탑 스타로 만들어 준 영화가 ‘사관과 신사(an officer and a gentleman)’라는 영화입니다. 지금부터 27년 전쯤에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개봉이 되어 수많은 청춘 남녀들의 가슴을 울렸던 잭(richard gere)과 폴라(debra winger)라는 인물의 사랑이야기입니다. 그 영화에는 두 쌍의 젊은 연인이 등장합니다. 잭과 시드는 해군 항공 사관학교 생도들이고 폴라와 리넷은 제지 공장 여공들입니다. 제지 공장 여공들은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노동에서 탈출을 하기 위해 사관학교 생도들에게 계획적으로 접근을 합니다. 그건 그 마을 제지 공장 여공들의 전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접근을 하여 결혼에 성공을 하면 그 지긋지긋한 가난한 마을과 고단한 제지공장을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데브라 윙거가 열연한 폴라라는 여자는 진심으로 잭(richard gere)을 사랑하게 되고, 리넷이라는 여자는 다른 여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시드라는 남자의 신분과 소유와 미래를 사랑합니다. 폴라에게는 잭이라는 사람 자체가 사랑의 대상이었지만 리넷의 사랑은 시드의 장교 직분과 그의 보장된 미래였던 것입니다. 리넷이라는 여자는 행여 그 남자 친구를 놓칠까봐 시드에게 임신을 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래야 결혼을 해 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시드가 사관학교 졸업을 2주 남겨놓고 사관학교를 자퇴해 버립니다. 사랑하는 리넷과 함께 자신이 원하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시드는 학교를 자퇴하고 반지를 사서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리넷에게 가서 청혼을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뛸 듯이 기뻐하던 리넷이 사관학교를 자퇴했다는 시드의 말을 듣자 갑자기 차갑게 돌변하여 그 청혼을 거절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은 임신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시드라는 남자는 아무런 매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그의 사관생도라는 신분과 보장된 미래만을 보고 시드를 유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드에게서 사관생도라는 매력이 상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관생도가 아닌 시드는 더 이상 그녀의 로망이 될 수 없었습니다. 시드는 너무나 큰 충격에 빠지고 결국 그는 그 일로 자살을 합니다.

 

사관학교 졸업식 날이었습니다. 멋진 장교복을 입은 한 남자가 제지 공장의 문을 활짝 열고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준 폴라를 번쩍 안아들고 어두컴컴한 제지 공장에서 찬란한 햇빛이 비치는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그 울트라 라스트 씬의 장면에서 조 카커와 제니퍼 원스가 부른 ‘Up where we belong’이 흐릅니다. 조건과 배경, 그리고 그 상대방에게서 얻어내고자 하는 떡고물에 관심을 가진 가짜 사랑은 그 상대방을 모독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반면, 배경이나 조건이나 신분이나 소유 등에 매이지 않는 진실한 사랑은 진정한 연합을 가져온다는 것을 묵직한 메시지로 던져준 아주 훌륭한 영화였습니다. 특히 그 마지막 장면은 가슴을 떨리게 할 정도로 압권입니다.

 

대학교 1학년 때 그 영화를 본 후 그 영화에 빠져 거의 열 번 정도는 더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매번 그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떠 올리곤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진 힘이나 신분, 그 분이 가진 풍요를 얻어내기 위해 거짓 사랑을 고백하는 그런 자들을 제지공장 같은 어두움에 그냥 놔두시고 진심으로 예수를 사랑한 그 분의 신부들을 번쩍 안아서 하늘로 옮겨 가실 예수님의 모습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리넷같은 사랑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비록 해 줄 수 있는 것이 하나 없고 내세 울 것도 하나 없는 집안사람이지만 그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사랑한 폴라 같은 사랑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침묵 정도가 아니라 아주 무력한 존재처럼 우리의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실 때도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가진 힘과 풍요와 능력과 신분과 조건 등을 노리고 거짓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자들을 가려내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리넷과 같은 이들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나갑니다. 그러나 폴라와 같이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는 참 하나님의 사람들은 끝까지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앙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께 여쭤 볼게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소개하실 때 보통 누구의 하나님이라 하십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시지요? 그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성도의 삶의 특징을 종합하여 보여주고 있는 인물들이라서 그렇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바로 우리 교회 자신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대표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공통적으로 겪은 일이 뭡니까? 그걸 알면 우리 교회가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 셋이 공통적으로 겪은 일이 무엇이지요?

 

셋 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잃음이 잃음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찾아짐으로 막을 내렸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삭의 가슴에 칼을 꽂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르치실 것을 모두 가르치신 후 이삭을 고스란히 돌려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음에서 다시 찾았다고 기록을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빼앗아 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잃음이 결국 완전한 찾음으로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이삭은 어땠습니까? 이삭은 야곱이라는 아들에게 속아 그를 축복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아들을 수 십 년간 잃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다시 아버지 이삭에게로 돌려 주셨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을 20년간이나 죽은 아들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심지어 요셉의 동생 베냐민까지 빼앗기는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 둘을 모두 빼앗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시퍼렇게 살아서, 아니 살다 뿐입니까? 애굽의 주가 되어서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왜 우리의 언약의 조상들이 모두 아들을 잃는 경험을 해야 한 것일까요? 아들은 바로 ‘나’라는 존재의 확장입니다. 아들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더 나아가 아들은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으로 행복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천착하고 있는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다 포함하는 그런 유비입니다. ‘나’라는 우상을 만족스럽게 행복하게 만들고자 내가 천착하고 있는 모든 것, 그것이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조상들의 아들을 죽이시는 사건으로 ‘나’라는 우상과 그 우상을 섬기는 데에 필요한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 모든 가치들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들을 잃는 사건이 아니라, 다른 말로 ‘나’를 잃어버리는 사건이 아니라 더 멋진 ‘나’, 새로운 ‘나’의 완성에로의 필연적 과정이며 진정한 가치와 진정한 풍요를 얻는 필연적 통과의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잃었던 아들들을 더 멋지게 변화시켜 돌려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아들들이 바로 하나님나라에서 완성이 될 우리 성도의 실존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이나 고난 등을 빼앗김이나 잃음이나 실패로 정의 하지 마시고, ‘나’의 아들을 빼앗으심으로 더 좋은 것을 주고야 마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배려의 손길로 받아들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 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 없어’라는 리넷 식의 신앙은 신앙도 아닌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모독하는 것이며 멸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사랑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이었으며, 하나님의 재산이었으며, 하나님의 능력 뿐 이었던 것이니까요.

 

라헬이 라마에서 아들을 잃고 통곡을 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 아들들을 돌려보낼 것이다’(렘 31:15)하신 것을 기억하세요? 라헬의 아들들이 누구입니까? 요셉과 베냐민입니다. 요셉의 아들이 에브라임, 즉 북 이스라엘의 대표지파이고 베냐민이 남 유대의 대표이므로 그 라헬의 아들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는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라헬이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의 어미로 불린다고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과 베냐민, 즉 이스라엘을 잠시 빼앗아 버리십니다. 요셉과 베냐민의 빼앗김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로 다시 한 번 나타납니다. 그렇게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빼앗아 망하게 하시고,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고, 기근과 흉년에 내 던지기도 하시는 일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반복하고 반복하여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매번 다시 돌려보내 주십니다. ‘돌려보내실 걸 왜 빼앗아 가십니까?’하고 질문을 하실 분들이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아들들을 빼앗으시고, 라헬의 아들들이라 일컬어지던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 보내시며, 교회인 두 증인을 바벨론 성 길가에서 죽여 버리신 것은 그들을 골탕 먹이시려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의뢰하며,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자들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그들을 부인 시키시는 방법으로 잠시 사용하신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잃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아들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통해, 다른 말로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 말고도 힘으로 작용했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함으로 해서 우리를 위해 아들을 빼앗기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그렇게 모든 것을 상실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예수께서 통곡하고 있는 라헬에게 오셔서 내가 너에게 영원히 잃어버릴 수 없는 ‘진짜 아들’ 즉 ‘영원한 생명’을 돌려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오늘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우리의 아들, 즉 우리의 힘을 빼앗아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빼앗김은 가장 좋은 것으로 바꿔 주시기 위한 거룩한 빼앗김인 것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오늘 본문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올바른 선(先) 이해가 없이 오늘 본문을 보면 그야 말로 황당 그 자체입니다. 요셉이 매점매석을 하여 가나안과 애굽의 모든 돈을 다 끌어 모아 바로에게 바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돈이 떨어져 이제 더 이상 곡식과 맞바꿀 아무런 재화가 없는 이들의 땅도 다 빼앗아 버립니다. 그게 언약의 후손이 할 일입니까?

 

요셉이 그렇게 가나안과 애굽의 모든 돈과 땅을 다 끌어 모아 애굽왕 바로에게 바쳤다는 그 사실은 헤로도투스 (Herodotus)나 스트라보(Strabo)와 같은 역사가들의 증언을 통해 역사적 사실로 확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지금 우리의 도덕관이나 윤리관, 그리고 사회관으로 볼 때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이 7년간 풍년이 들고 나중에 7년간 흉년이 들 것을 명확하게 계시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기만 준비를 했다가 나중에 흉년이 들자 가나안과 애굽의 모든 돈과 땅을 다 빼앗아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정말 민중을 위하고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위정자는 백성들을 계몽하여 흉년에 대한 대비를 시켰어야지요? 그런데 요셉이라는 사람은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오로지 자기 위의 왕의 유익만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얻은 고급 정보로 부동산 투기나 주식 투자를 하는 오늘날의 정신 나간 관리들과 똑같은 행태 아닌가요? 매점매석으로 자유 농들을 일시에 전부 소작농으로 전락을 시켜버린 악덕기업가의 원조같이 보이지 않으세요? 요셉은 지금 힉소스 왕조라는 이방 왕조가 애굽의 모든 돈과 땅을 다 차지하는 데에 일등공신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요셉이 바로 예수의 모형이며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한 왕에게 완전히 복속이 되어 순종을 하는 전제 군주제의 애굽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실 때 자신의 가치관이나 도덕관, 그리고 오늘 날의 시대정신 등을 전제하고 보시면 안 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인간과 하나님을 계시해 주는 책이지 도덕책이나 윤리 책이 아닙니다. 그렇게 성경을 보니까 구약의 하나님은 무식하고 폭력적인 하나님이라느니, 유다는 며느리와 근친상간을 한 나쁜 인간이라느니, 요셉은 애굽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고 애굽의 제사장의 딸과 결혼을 한 더러운 인간이라는 등의 지탄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식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성경의 독자인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그리고 인간의 죄와 구원을 친절하게 설명을 하실 뿐입니다. 그 설명을 위해 역사까지도 동원이 되고, 창세전의 작정과 예정과 계획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사건화 되어 설명이 되고 그 객관적이며 실제적인 역사가 우리에게 계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은 당신의 백성들의 아들을 빼앗아버리는 예수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아담 안에서 타락을 한 인간들은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너무나 많은 것들로 자신들의 안위와 행복과 만족을 채우려 애를 써왔습니다. 인간들은 성(城), 돈, 명예, 인기 등등 제한되고 유한한 이 세상의 자원들을 가지고 자신들이 원하는 구원에 도달하려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로는 절대로 인간이 참 행복과 만족에 도달할 수 없음을 역사와 경험과 교육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르치십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자신들을 보호하려 하고, 행복에 도달하려 하는 시도를 할 때 그 길을 막아서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그 것들을 빼앗아 가시기도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정한 행복은 이 세상의 소유나 힘이나 명예나 자랑이나 인기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고, 오직 유일한 절대 상위권 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고 의뢰하는 삶만이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행복과 만족이 있는 삶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에 가끔 빼앗김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을 빼앗기기도 하고, 자식들을 빼앗기기도 하고, 재산을 빼앗기기도 하고, 명예를 빼앗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것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비워 내시고 그 빈 공간에 예수를 채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진정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삶이 우리에게서 격발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빼앗김의 사건이 자신에게 닥쳤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분을 저주하고 떠나는 것이 시드를 모독하고 죽게 만든 리넷 식의 사랑입니다. 그들은 절대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이 잭이 폴라를 번쩍 안아 제지공장에서 탈출 시키는 것처럼 절대 그들을 번쩍 안아 들어 올리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힘과 도움이 탐났을 뿐이니까요. 성경은 그들을 돌 짝 밭이라고도 부르고 가시 떨기 밭이라고도 부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가나안과 애굽의 모든 백성들이 요셉에게 와서, 먹여만 주시면 땅도 다 내 놓고 노예가 되는 것도 감수하겠다고 하자 요셉이 그들의 땅을 몰수한 후 곡식을 주고 종자와 식량으로 쓰라고 하지요? 그 때 그 백성들이 씨를 뿌리는 것으로 그 흉년 사건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한 왕에게 종속이 되고, 항복이 되자 흉년이 끝나고 새로운 파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소출의 5분의 1만 왕에게 바치고 5분의 4는 자신들이 갖게 되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고대 농지법이 만들어 집니다. 요셉에 의해 새 세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고대의 역사서들을 보면 그 때 요셉에 의해 만들어진 그러한 고대 농지법이 상당히 오랜 시간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제 다시는 농민들이 굶을 일이 없어진 것입니다. 자유 농들이 나라와 왕과의 관계 속으로 복속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소출이 줄어든 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소작농이 아닌 자유 농 때에도 그만한 세금은 냈었으니까요.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진면목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백성들의 꿈이 펼쳐지고 백성들의 의견이 다수결에 의해 수용이 되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 모든 걸 빼앗긴 피조물들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에 이끌려 그 분이 주시는 하늘의 생명력으로 배불리는 그런 나라인 것입니다. 자기의 꿈과 야망을 이루는 그런 삶이 아닌 자신이 속한 나라의 법에 따라 그 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 나라의 뜻을 성취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교회의 개혁을 꿈꾸는 많은 단체들이나 개인들이 목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이 뭡니까?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자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민주주의라는 것은 가장 인간다운 이데올로기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민주주의가 가장 인간다운 이념입니까? 민주주의는 ‘내 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자본주의 경제 구조가 바탕이 되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건 제 말이 아니라 홉스라는 사회학자의 말입니다. 국가가 자신의 사유재산을 반드시 지켜줘야 한다는 핵심 계약 내용이 전제가 되어 지지 않는 민주주의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홉스의 지적처럼 민주주의는 인본주의의 만개(滿開)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큼은 절대 손해보고 싶지 않고, 나에게 불이익을 주는 불합리는 목숨을 걸고라도 타파해야 하고, 불평등하게 누가 누구를 섬기고 섬김을 받고 하는 그런 시스템은 절대 용납 할 수 없다는 인본주의의 만개가 민주주의로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절대 내 것은 손해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수를 모아 다수결로라도 소수를 이겨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당해 주라 하고, 먼저 섬겨 주라하고, 누가 손해를 입히거든 손해를 보라고 합니다. 이 세상 것들 조금 손해 본다고 너희의 영원한 생명에 전혀 지장이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러한 것들을 손해 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 수 있는가?’를 집요하게 묻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교회는 다수결에 의해 교인들의 의견이 관철이 되는 그런 집단이 아니라 다수가 불편하고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이라는 고통에 의해 전제군주제로 끌려가는 공동체여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목사가 왕이 되어서 목사통제에 의해서 끌려가는 그런 집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하나님 통제에 의해 끌려가는 그런 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라는 것은 하고 성경이 하지 말라는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는 그런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다수가 원한다고 해서 말씀의 진의를 왜곡하고 성경의 근본 지평을 벗어난 맘모니즘과 성공주의와 세속적 소 하향성, 패권주의 등을 하향하는 그러한 천민자본주의보다 더 치졸한 그런 막가파식의 힘의 원리를 따라 교회의 몸집을 확장해 가는 그런 류의 행태는 지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성경의 독자들인 성도들에게 ‘너희들은 이 세상에 대해 시체가 되어라, 주검이 되어라’ 다른 말로 ‘이 세상에서 죽어라’하고 반복하여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돋보이기 위해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올인 하고 ‘나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른 이들을 밟고 하는 일이 어찌 성도의 삶 속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 24:23-28) “23 그 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아니, 여기 있다' 하더라도, 믿지 말아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들과 기적들을 행하여 보여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받은 사람들까지도 홀릴 것이다. 25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여 둔다. 26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더라도 너희는 나가지 말고, '그리스도가 골방에 있다' 하더라도 너희는 믿지 말아라. 27 번개가 동쪽에서 나서, 서쪽에까지 번쩍이듯이, 인자도 그렇게 올 것이다. 28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 드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말세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해 말씀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말세 때는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선지자들, 그리고 거짓 그리스도들이 큰 표적들과 큰 기적들을 행하여 하나님의 백성들까지 미혹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를 성경이 말세라 하지요? 그러니까 지금이 바로 말세입니다. 왜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큰 기적과 표적들을 일으킬까요? 사람들이 기적과 표적 앞에서 맥을 못 추기 때문입니다. 성공주의와 맘모니즘에 물든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기적이 자기에게도 영향을 미쳐 뭔가 유익을 주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큰 기적과 표적을 갈망합니다. 자기의 삶에서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문제가 해결이 되고, 불치병이 낫고 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하는 마음을 마귀가 잘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이 임하실 때 번개처럼, 시체를 보고 달려드는 독수리처럼 임하실 것이라 말씀을 하십니다. 번개는 동쪽에서 일어나면 동쪽에만 있어야 하는데 번개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번쩍이듯이 주님이 임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예수님의 재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의 재림의 장면을 다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이해가 가는데 주님이 시체 위에 내려 앉는 독수리처럼 임하시겠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여러분, 독수리가 창공을 유유히 날다가 맹수가 잡아먹고 남은 시체를 발견하게 되면 그 많은 공간 속에서 정확하게 그 자리에 내려 앉아 그 먹이를 채 가는 것 아시지요? 주님이 바로 그렇게 오신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인간들이 있지만 독수리와 같은 우리 주님은 정확하게 당신의 백성들만을 잡아 채서 당신의 날개 위에 얹어 하늘로 옮기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독수리가 내려앉는 목표물이 시체입니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독수리가 내려앉아 그 날개위에 얹어 하늘로 옮길 목표물들은 이 세상에서 시체가 되어 있는 자들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골로새서에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골 3:1-4)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위엣 것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들은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그 분과 함께 영광중에 거하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주검들에 내려앉으시는 것입니다. 한 군데 더 보지요.

 

(갈 6:14)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는 이렇게 이미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로 결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재산에 대해서도 죽은 것이고, 여러분의 육신적 건강에 대해서도 죽은 것이고, 여러분의 명예에 대해서도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평가에 대해 살아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평가에 민감해야지 이 세상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하다 보면 우리는 마귀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게 됩니다. ‘너 정도의 나이에, 너 정도의 학벌에, 너 정도의 위치에 이 만큼의 평가는 받고 있어야지’ 이런 마귀의 속삭임에 속아 세상에게 자랑스러운 평가를 받기 위해 자신의 모든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 이 불쌍한 인생들의 현 주소인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평가에 대해서만 살아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식, 그렇게 세상에게 조롱당하면서도 나를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주었구나, 참 고맙다’ ‘아이구, 우리 새끼 그렇게 가난하고 병들고 한 상태에서 끝까지 하늘 소망을 놓지 않고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을 소망하는 믿음을 보여 주었구나, 참 고맙다’ 왜 이러한 하나님의 평가에는 그렇게들 둔감하냔 말입니다. 여러분, 정말 사업이 망해서 마음까지 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식이 대학 떨어졌다고 마음까지 망하는 사람 없어요. 그 후에 닥쳐오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손가락질 때문에 다 마음이 상하고 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까지 하는 것입니다. 인터넷 악플, 그런 평가들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게들 가슴 아파합니다. 그게 죽을 정도의 시련입니까?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뭐 그리 중요합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를 조롱하고 비웃어도 우리 하나님이 옳다 인정해 주신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닙니까? 그걸 순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을 만큼 힘들지만 하나님이 가라시니 간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망하셨습니까? 자식이 속을 썩이고 있습니까? 그게 꼭 그렇게 부끄럽고 민망한 일입니까? 만일 그 상황을 보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아들, 사업이 어려워지니까 내 앞에 무릎 꿇는 시간이 더 많아졌네, 이 아비가 참 기쁘다.’ ‘우리 딸, 자식이 속을 썩이니까 성경 말씀을 더 신실하게 붙드는구나, 참 좋다’ 이렇게 우리에게 닥친 사건들과 상황을 평가 하신다 해도 그렇게 부끄러워하시고, 절망하실 거예요? 우리는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세상에게 잘 보이려 하지 마세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마세요. 세상에 대해서는 주검이 되시란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셔야 합니다.

 

(롬 6:11)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풍요로 자신을 채워야 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세상의 가치라 불리는 똥 덩어리들을 치워내고 계신데 왜 그렇게 불만이 많으세요? 왜 여전히 ‘나’라는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의 꿈, 나의 비전, 나의 소원, 나의 문제 해결’에만 천착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서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정작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러분, 솔직히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생명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 뭐예요? 다시 여쭤 볼게요. 여러분에게서 무엇이 없어졌을 때 죽고 싶으셨습니까? 그게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여러분의 생명입니다. 돈입니까? 사업입니까? 학업입니까? 명예입니까? 자식입니까? 가족입니까? 쾌락인가요? 뭐가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지요? 그게 없어지면 죽을 것 같은 것, 그게 생명 아닙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생명줄이에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0:37)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요 12:43) “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딤후 3:4-5) “4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아비나 어미, 아들이나 딸, 사람들의 평가, 쾌락, 재물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을 앞서면 안 됩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죽으셔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유한하고 한시적인 것들입니다. 유한하고 한시적이며 가변적인 것이 나의 생명으로 자리 잡고 있을 때 그러한 것들이 배신을 하거나 소멸이 될 때 여러분은 함께 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성경이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마음속에 가득 담아 자신의 생명으로 삼는 자 만이 영원히 삽니다. 그 분은 변하지 않으시며 소멸되지도 않으시고 배반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참 생명이신 것입니다. 예수님 이외의 이 땅의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생명으로서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죽으셔야 합니다. 다 빼앗기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만왕의 왕의 발 앞에 꿇어 엎드려 ‘저는 기쁘게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하는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보세요.

 

(창 47:25) “25 그들이 가로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입에서 이 고백을 들으시기 위해 그 백성들의 삶에 기근을 허락하시기도 하시고 흉년을 허락하시기도 하시며 결국에는 그들이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는, 모두 빼앗긴 자로,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자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아를 꼭 붙들고 있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전부 부인해 내셔야 합니다. 그게 거룩한 빼앗김입니다. 돈이 많아도 그게 자신의 자랑과 교만이 되지 않는 사람, 하나님께 빼앗긴 사람입니다. 자식이 훌륭한 직업을 갖게 되고 모든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을 보고도 우쭐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식의 올바른 신앙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 좋은 직업을 빼앗아서라도 참된 신앙인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하는 이, 하나님께 빼앗긴 것입니다. 건강한 육신 때문에 때때로 골프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예배를 빼먹는 사람이 ‘하나님 이 건강 쳐서라도 하나님 앞에 올바른 신앙인으로 서게 해 주세요’할 수 있는 사람, 그는 건강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건강을 빼앗겨 버린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빼앗고 있는 그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해 내고야 마십니다. 거룩하게 빼앗기세요. 포기하십시오. 하나님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전제군주제입니다. 하나님나라의 그 ‘나라’ 바실레이아는 민주주의에 의해 민의가 반영이 되는 공화국이 아니라 한 왕에 의해 독재적으로 끌려가는 왕국이란 말입니다. 그 나라 백성들은 그 왕 앞에서 모든 것을 빼앗겨야 합니다. 자기가 부인되지 않는 자는 그 왕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눅 9:23-25)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래도 여러분이 하나님이 가진 힘이나 이용하고 그 분에게서 얻어내고자 하는 그 어떤 것들을 목적으로 그 분을 신앙하고 사랑하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모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지금 결정하세요. 하나님이 가진 그 어떤 것을 이용하기 위해 거짓 사랑을 고백하는 리넷이 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비록 이 세상에서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나의 꿈의 실현에 침묵하고 계신다 할지라도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내가 알기에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심지어 거룩한 빼앗김 속에서도 그 하나님만을 사랑하겠다는 폴라 같은 사랑을 하시겠습니까? 한 가지 명심하실 것은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리넷을 제지공장에 남겨두고 폴라만을 번쩍 들어 하늘로 옮기신다는 사실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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